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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22화 (22/135)

22.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는 마법은 없는 걸까?

정원에 나가도, 대문만 봐도 생생하게 그려지는 카시안의 얼굴에,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 위에서 바르작거렸다. 무도회에 가겠다니….

“내가 미쳤지. 가긴 어딜 같이 가!”

뭔가에 홀렸거나 분위기에 취한 것이 확실했다.

그러니까 분명….

바늘로 찔러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 엘리나 트리탄. 그녀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던 것이 마음에 들었다.

바람결에 실려 온 풀내음으로 정신이 아득했고, 서서히 저물어가던 노을빛이 내려앉은 카시안의 얼굴은 황홀했다.

그러나 가장 좋았던 것은, 꿈을 꾸듯 나른하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다음 그의 행동은….

“… 으으악…!”

무릎을 굽혀 앉아 나를 올려다보던 카시안은, 내 손등에 입술이 스치는 순간까지도 그 눈에 나를 담았다. 눈 한 번을 깜빡이지 않고.

눈을 질끈 감은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그 진득한 눈빛을 다시 떠올리자마자 불 주사라도 맞은 것처럼 손등이 화끈거렸다.

나는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찬물로 달아오른 열기를 식혔다. 그리고서야 그간 잊고 있던 문제에 직면할 수 있었다.

벌써 수도에서 도망쳐 아델트로 이사 온 지 한 달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당첨금 때문에 내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이 있던가?

아니. 처음 그것을 받아오던 날과 며칠 전 숲에서 강도를 만났던 것을 제외하면, 내 일상은 꽤 평탄했다.

생각보다 돈 쓸 일이 별로 없었거니와, 외부 활동을 자제해 온 터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디 가서 그 사실을 떠벌리고 다니지도 않았었고.

그러나 이 무도회에 참석하게 된다면….

내가 에벨의 수양딸이라던가, 로또 당첨자라던가 하는 사실이 순식간에 밝혀지겠지?

그래도 뭐, 내가 죄지어서 돈 번 것도 아니고.

쏟아지는 관심이 버겁기야 하겠지만, 언젠가는 밝혀지겠거니 늘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러한 것들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제일 큰 고민거리는,

‘라튼 레트랑…….’

그도 그곳에 나타날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혹시 자기 엄마 팔짱 끼고 오려나?

조금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라튼과 만난 지 2년 정도 지났을 즈음, 그에게 파티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새로 시작한 사업을 축하하는 파티라고 했던가? 아무튼, 비밀 연애 중인 주제에 나를 초대한다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그 자리에 함께 있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거라 했고, 멍청하게도 나는 그곳에 갔다. 그의 에스코트도 없이, 나 홀로. 그가 그러라고 했으니까.

그날 내가 본 것은 레트랑 저택의 거대한 정문뿐이었다. 나는 보초를 서던 경비원들에게 입구컷을 당했고, 초대장을 보여주며 애원해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가문을 밝히라.”라는 말이었다.

참다 참다 에벨 가문이라 밝혔으나, 그런 가문은 리스트에 없다고 했다.

라튼을 불러달라 하자 “도련님은 바쁘십니다”라고 말했고, 얼마 뒤 울타리 너머로 그가 보였다. 그의 옆에서 아름답게 웃고 있던 이름 모를 여자와, 그의 엄마도 함께.

나는 그날 울면서 돌아왔다.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 서러웠고, 서글펐고, 아팠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떠나지 못했다.

라튼을 잃는 것을 내 삶을 잃는 것과 같다고 여겼으니까. 왜 하필 그와 관련된 일에는 죄다 바보같이 굴었는지 모를 일이다.

상상만으로도 피폐해지는 과거에 내 입에서 자조적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체가 까발려지는 것보다도 더 끔찍한 일이 전 남자친구 앞에 나를 드러내는 일이라니.

사실 그의 엄마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여자라면, 이 무도회에 나타날 리 없다.

길바닥 개미만큼 하찮게 여기던 나에게 된통 모욕을 당해버렸으니. 그것도 찻집 한가운데에서! 창피해서 어디 밖을 돌아다닐 수나 있겠어?

짐작건대, 그녀가 아직 나를 찾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틸다 레트랑은 논외였다. 문제는 라튼인데….

애초에 우리 엄마와 나를 모욕한 것도 그쪽.

먼저 배신한 것도 그쪽.

이별 후에도 나를 겁주고 지질하게 군 것도 그쪽.

어쩌면 라튼은 아직도 내가 저를 좋아한다는 망상 속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를 불쌍하게 여기며 “시아라, 널 이해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야.” 따위의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말이지?

그 생각에 이르자, 이쯤에서 라튼을 한 번 만나는 게 오히려 더 속이 편할 것 같았다.

아주 똑똑히 기억시켜 줄게. 나 잘살고 있다고.

한껏 가벼워진 마음으로 팔다리를 쭉쭉 늘어뜨리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한나가 나를 반겼다. 그녀의 오른편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함께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단번에 레아와 레오가 떠오르는 걸 보아하니, 그녀의 남편이 수도에서 돌아온 모양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파울 프란츠입니다.”

“안녕하세요, 프란츠 씨.”

“편하게 파울이라고 부르세요.”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닮는다던데, 선한 미소가 파울의 만면에도 가득했다.

한나는 양손 가득 담긴 선물 보따리를 내 손에 쥐어줬다.

“그간 너무 고마워서. 선물이에요.”

“뭘 이런 걸 다…….”

“이걸로도 부족하죠. 애들이 요새 시아라랑 공작님 이야기 밖에 안 하는걸요? 파울, 그건 당신이 줘요.”

한나의 말에 파울이 나무 상자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그게 무엇인지, 나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로지하우스에서 판매하던 오르골이었으니까.

“아…….”

“요새 수도에는 이 오르골이 유행이래요. 남편이 사 왔는데 글쎄, 이걸 보자마자 시아라가 딱 떠오르던 거 있죠? 소리가 너무 예쁘더라니까?”

뚜껑을 열어 태엽을 돌리자 익숙한 오르간 선율이 흘러나왔다.

‘… 조만간 꼭 로지 아줌마를 찾아뵈어야겠어.’

“고마워요, 한나. 파울.”

그러고 보니 한나는 오늘따라 유달리 빛이 났다. 평소 화장기 없는 얼굴도 예뻤지만, 연한 살구색으로 물들인 그녀의 양 뺨은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레스토랑에서 앞치마를 두른 모습만 보아서일까? 쇄골이 드러나는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세련된 숙녀 같았다.

“그보다 한나. 오늘 너무 예뻐요.”

“시아라. 오늘 시간 괜찮으면 나랑 같이 놀지 않을래요? 남편이 가게 봐주기로 해서 나 너무 신나는 거 있지!”

“좋아요. 어디로 갈까요?”

그렇게 그녀는 우리 집에 남고 파울은 레스토랑으로 떠났다.

나는 그녀에게 차와 간단한 디저트를 내주고, 집 구경을 시켜주었다. 드레스룸에 다다르자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시… 시아라.”

“한나?”

“이게…. 이게 진짜로…. 어떻게 이 컬렉션들이 전부 여기에….”

그녀가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한나는 내 손목을 잡고 화장대 앞 의자로 이끌었다.

“저 예쁜 옷들을 옷장에 가만히 걸어둔 채로 이렇게 하루를 낭비할 순 없어.”

내 얼굴에 닿기 시작한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은, 곱게 빗어 내린 금발을 어깨 위로 가지런히 내려뜨려서 드러내주었다.

그녀는 옷장에서 원피스 여러 벌을 꺼내어 내 몸에 이리저리 대보기 시작했다. 가늘고 날렵하게 뜬 한나의 눈이 사뭇 진지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마침내 한 가지를 내게 내밀었다.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하얀색 쉬폰 원피스가 내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나는 만족스럽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그녀가 직업을 잘못 고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그녀의 손이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듯했다. 확실해. 저 손은 보통 손이 아니야.

나는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한나. 나 좀 도와줘요.”

더는 고민하지 않고 그녀에게 아델트 무도회의 초대장을 보여주었다.

한나는 그것을 몇 번이고 읽더니,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라, 나만 믿어요.”

*

화려한 대리석 욕조 위로 기다란 분홍색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늘어져 있었다.

풍성한 거품 속에 파묻힌 엘리나 트리탄 옆에서, 하녀 세 명이 빗질 중이었다. 오늘따라 더욱 사나운 주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그들은 최대한 조심스레 손을 놀렸다.

“순진한 눈빛이 꽤 마음에 들었었는데.”

생각보다도 훨씬 맹랑하네?

엘리나는 자신의 기다란 손톱 위에 올려있는 비누 거품을 후, 하고 불었다. 그 바람에 날아간 방울들이 한순간 조각나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 애도 이렇게 눈앞에서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지.

눈앞에서 차근차근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재미있을지도.

아델트 공작이 대놓고 모욕을 준 것이 견딜 수 없게 짜증스럽긴 해도, 결국 그녀의 발밑에 고개 숙이게 하면 되니까. 그 정도는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시아라 그 애를 무도회에 데려오겠다, 그 말인 거지?

엘리나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에 당황한 하녀 루이자의 빗에, 엉킨 머리가 걸려 그녀의 고개가 살짝 당겨졌다. 그러자 그 웃음이 뚝 멈추었다.

“아, 아가씨.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로 그만….”

루이자가 머리를 조아리자 엘리나가 그녀의 뺨을 휘갈겼다.

“있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 줄 알아?”

엘리나가 바닥에 쓰러진 하녀를 향해 물었다.

“너 같은 애들을 잔-뜩 괴롭힌 다음에.”

그녀가 욕조에서 일어나자 나머지 하녀 두 명이 서둘러 커다란 타올로 주인의 몸을 닦았다.

“그리고 내가 보듬어 주는 거.”

무릎을 굽혀 앉은 엘리나가 하녀의 턱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죄,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그래. 이런 눈빛. 나를 보고 겁먹는 거 말이야. 난 그게 그렇게 좋더라?”

벌벌 떠는 루이자를 내려다보는 엘리나의 보랏빛 눈동자가 환희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너, 이전에 아델트 공작의 저택에서 일했던가?”

하녀가 재빠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 네가 나를 위해 희생할 수 있게 해줄게.”

“뭐든…. 그게 뭐든 시켜만 주세요.”

제 하녀의 복종에 엘리나가 미소를 그렸다. 만개한 꽃처럼 아름답게, 활짝.

*

한나와 나는 상업지구에 가서 하루를 보냈다.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한바탕 쇼핑을 한 후에 유쾌한 연극까지 한 편 보고 나니 벌써 저녁 시간이었다.

한나는 레아와 레오가 레스토랑에서 기다린다며 시장으로 갔고, 나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다다르자 우리 집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펠릭스가 보였다.

“펠릭스? 여기서 뭐 해. 나 기다린 거야?”

“누나, 왔어?”

그가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왜 그렇게 봐. 무슨 할 말 있어?”

“아니야. 어디 다녀왔나 봐.”

“아, 응. 한나랑 데이트했거든.”

“데이트….”

펠릭스는 내 말을 조용히 따라 하더니 연신 뒷머리를 매만졌다.

“엄마한테 다녀오다가…. 집에 들어가기 전에 그냥 누나 얼굴이나 보려고 했지.”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괜히 오래 기다린 거 아니야?”

“아냐. 방금 왔어.”

그가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누나. 오늘, 예뻐.”

“응?”

“진짜 진짜 예뻐. 눈부셔서 못 알아볼 뻔했어.”

“… 그런 얘기는 가슴에 손을 얹고 해줄래?”

펠릭스가 갑자기 내 손을 끌어당겨 자기 가슴팍 위로 가져다 댔다.

“내 양심 걸고, 예뻐.”

손바닥 아래서 조금 빠르게 뛰는 듯한 심장의 고동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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