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토마토와 함께 끓인 고기 스튜의 달큼한 향기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요리를 식탁 위에 채 올리기도 전에 레아와 레오가 서둘러 주방으로 달려왔다. 누가 정해준 적도 없는데, 어느새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식탁 의자에 앉았다.
“고기! 고기다!”
그 뒤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오던 펠릭스가 긴 팔을 위로 쭉 늘어뜨리며 기지개를 켰다.
“피곤해 보이네?”
“응. 아침에 일하고 왔거든.”
“그럼 집에서 편히 주무시지 여기까지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펠릭스 씨?”
내가 인터뷰하듯 주먹을 말아 그에게 내밀자, 그가 내 팔목을 살짝 잡아당겨 입 근처로 가져갔다.
“으윽, 여기 굶어 죽기 직전인 불쌍한 영혼이 안 보이십니까?”
“참나. 일하고 왔다니까 봐준다.”
배를 부여잡은 채 골골대던 펠릭스가 생긋 웃으며 스튜가 담긴 냄비를 식탁 위로 옮겼다.
다리가 휘어질 정도의 상차림은 아니었지만, 네 사람이 앉아있으니 어쩐지 테이블이 좁아 보였다.
수도의 작은 집에서 엄마는, 하루 대부분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로 방에 누워있었다. 내가 식탁 앞에 앉아 빵 한 조각을 꾸역꾸역 밀어 넣을 때면, 늘 엄마의 웅크린 뒷모습이 보였다.
그럴 때마다 오고 갔던 말은 많지 않았다.
내가 “엄마.”하고 부르면 그녀가 힘없이 “응.”이라고 대답하던 것.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 의미 없는 대화는 아니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그녀가 살아있음을 확신했고 그제야 안도했으므로.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는 새 복작복작 시끄러워진 이 분위기가 처음에는 참 낯설었다. 이 부엌에서 웃을 때마다 떠오르는 엄마의 야윈 뒷모습에, 나는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다. 빵이라도 훔친 사람처럼.
잠시 옛 생각으로 울적해지려던 찰나, 내 앞에 큼지막한 고기 한 덩이가 불쑥 나타났다.
“시아라 언니! 아- 해요. 레아가 줄게.”
나는 상념을 내쫓으려 고개를 휘휘 내젓고, 아이를 따라 크게 입을 벌렸다.
“맛있어요?”
“응! 레아가 줘서 더 맛있어.”
“레아야, 오빠는?”
“펠릭스 오빠도 레아가 줄-.”
“싫어! 형아는 내가 줄 거야!”
레아는 레오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형아. 내가 이거 줬으니까 비행기 백 번 태워주면 안 돼?”
레오는 또 다 들리게 귓속말을 했다. 펠릭스는 푸스스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알겠어. 백 번 태워줄게.”
레오는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신나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제는 뭘 그렇게 바리바리 사 온 거야?”
“아, 그냥 좀. 내 실수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한 거랄까.”
“무슨 실수를 얼마나 했길래 정장 한 벌씩이나…?”
그는 내가 미처 정리하지 못해 바닥에 내려둔 슈트케이스를 곁눈질했다.
“그러게. 뭔가 단단히 잘못 걸린 기분이야.”
나는 다시금 초조해진 마음을 뒤로 한 채 빵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버터를 듬뿍 바른 빵을 레오의 접시에 올려주다가 문득,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꼬맹이들…. 카시안이랑도 아는 사이잖아?’
뭐야, 이 애들 완전 아델트 정보통이야…!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나는 레오에게 물었다.
“레오는 아델트 공작님을 어떻게 알아?”
“멋쟁이 공작님?”
“응. 멋쟁이.”
“공작님도 누나랑 똑같아.”
“똑같아? 뭐가?”
“친구가 없어.”
“……?”
레오는 빵 한 입을 크게 베어 물며 무심하게 말했다.
“공작님도 매일매일 저기에 앉아있었거든.”
그가 몸을 뒤로 돌려 손가락으로 바깥 정원을 가리켰다. 그의 손을 따라가자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나무 그네였다.
“… 그네에? … 공작님이?”
“응.”
“저걸 타셨어?”
“응!”
커다란 참나무 가지에 매달린 그네의 주변에는 노란 수선화 꽃이 아름드리 피어있다. 그 탓에 저 위에 앉아 하늘을 향할 때면, 꼭 꽃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것 같았는데. 혹시 카시안도 그런 기분이었을까?
그 날카롭고 무자비해 보이는 사람이 그네에 올라 발을 동동 구르다니. 퍽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슬쩍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 집, 처음 이사 왔을 때도….’
온갖 곳에서 묘한 애정이 느껴졌었는데.
이 집을 계약할 때 가장 좋았던 것은 가구까지 완비된 상태였다는 점이다. 부동산업자는 내가 원하면 물건을 싹 비워주겠다고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렇게 도착해서 살펴보니 모든 것이 두 사람을 위해 존재했다.
커다란 침대도, 식탁도, 의자도. 서재의 책상도. 심지어 테라스에 놓인 안락의자와 화분마저도. 모두 두 사람이 나란히, 혹은 마주 보게끔 자리해있었다.
여기 살았던 그 둘은 모든 장소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 따뜻한 애정이 물씬 풍기는 집이었으므로.
이곳에서, 카시안은 누구와 살았을까?
나는 테이블에 놓인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켰다. 내일이면 마주하게 될, 그를 떠올리며.
*
딸랑-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저…. 여, 여기서 일하던 아, 아가씨 말입니다.”
손님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수도 잡화점의 주인 로지 러셀이 작은 한숨을 내비쳤다.
“그 아이는 그만두었답니다.”
“왜, 왜요?”
“글쎄요. 사정이 생긴 모양이에요.”
“그, 그럼…. 그 아가씨가 어, 어디로 갔는지는….”
“죄송합니다만, 저희도 아이를 못 본 지 꽤 되어서요.”
“크흠, 그럼. 가, 가보겠습니다!”
로지는 남자가 닫고 나간 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벌써 며칠째 시아라의 행방을 묻는 손님들이 들락날락한다. 귀족부터 시작해 저런 평민들까지.
그러나 정작 그녀 역시 아이의 행방을 모르니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물론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저런 수상한 자들에게 정보를 넘겨줄 리 없었지만.
한 달 전 즈음, 시아라가 눈물에 젖은 편지 한 장을 건네며 잡화점을 그만두겠다고 말했을 때, 로지는 그녀를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그리되었고, 그녀의 집 사정 또한 모르지 않았기에. 잡화점에서 버는 돈으로는 빚을 갚기에 턱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아이가 떠난 다음 날 로지는, 잡화점 계산대에서 의문의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뜬금없게도 일 년 치 봉급에 달하는 돈이 들어있었다. 봉투의 겉면에는 이름 하나 쓰여 있지 않았지만, 계산대를 열 수 있는 사람은 그녀 자신과 시아라 뿐이었다.
그러니 이 돈을 두고 간 사람은 시아라가 분명할 터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로지는 어안이 벙벙했다.
혹시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닐까.
비록 헤어지기 직전에, 꼭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 기다려달라고 말했지만.
어찌 그 아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는 뿔테안경을 고쳐 쓰며 일전에 아이가 건네주었던 편지를 다시 꺼내 들었다. 그러고 있자니, 처음 시장 골목에서 아이를 만났을 적이 떠올랐다.
부디, 무사해야 할 텐데.
*
며칠 내리 흐렸던 날씨가 맑게 갰다. 모처럼 따사로운 위용을 내뿜는 태양의 자비에 정원에 노랗게 피어난 수선화가 더욱 찬란했다.
덕분에 한동안 바짝 긴장해 있던 내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나는 잡화점에서 일하며 터득한 진상 손님도 무장해제 시키는 맑은 ‘억지’웃음을 한껏 그려보았다. 까짓것.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약속 시각이 아직 한참 남아 정원 벤치에 앉아있는데 곧 카시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가 어찌나 큰지. 담벼락 너머에 있음에도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하필 미소짓는 연습을 하겠답시고 혼자 웃고 있을 때!
어쩐지 시작부터 좋지 않다.
“시아라?”
“이, 일찍 오셨네요, 마법, 아니. 공작님.”
“이렇게 반갑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올 걸 그랬어요.”
“… 그런 거 아닌데요.”
집으로 들어간 우리는 응접실의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커피를 드릴까요? 아니면 허브차도 있답니다.”
“차가 좋겠군요.”
나는 찬장에서 티포트를 꺼내 찻물을 우려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집은 정말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네요.”
“한 번 둘러보시겠어요?”
“아니요. 당신이 괜찮다는데 굳이 둘러 볼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네? 저번에는 분명 꼭 보셔야겠다고….”
“그거야.”
“…….”
“저도 차 한 잔 같이하고 싶어서.”
“… 저랑요?”
찻물이 찻잔으로 쪼로록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우리 사이에는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네. 꼭 다시 보고 싶었거든요.”
… 왜요?
혹시 저를 처리하려고…?
나는 정성껏 포장한 슈트케이스를 테이블 위로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야 했기에.
“부디 이걸로 공작님이 노여움을 푸셨으면 좋겠어요.”
카시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게 뭡니까?”
“물론 제 잘못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하기가 조금 창피하지만…. 아무래도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내가 말없이 그의 셔츠 소맷자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의 시선 역시 아래로 떨어졌다.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얕은 탄식을 내뱉었다. 뒤이어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탁 짚었다.
“하아….”
얕은 한숨을 내뱉고 나서 뭐라고 나지막이 중얼거리는데, 아무래도 욕 같았다.
“그게 아닙니다.”
“네?”
“잉크를 쏟은 일로 화가 났던 게 아닙니다.”
“그럼 그때 언덕에서는 왜….”
“그러니까 그게, 심술을…. 하아, 아닙니다. 아무튼, 그 일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겨우 그런 일을 마음에 품고 있을 정도로 치졸한 놈은 아니니.”
카시안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오해하게 해서 미안해요.”
“그럼 저를 해치운다거나 감옥에 가둔다거나 그런….”
“도대체 제가 당신한테 왜 그런 짓을 합니까?”
“… 저 오늘부터 두 다리 쭉 뻗고 자도 괜찮은 거예요?”
그는 진심으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마주했다. 그제야 무언가 단단히 오해했음을 깨달은 나의 머쓱한 시선이 허공을 떠돌았다.
“그래도 이건 꼭 받아주셨으면 해요. 아! 그리고 이 집 말이에요!”
나는 카시안의 앞으로 선물을 쭉 내밀며 급하게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되게 소중한 집이었나 봐요.”
그러자 원래도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이 더욱 급하게 굳어졌다.
곧,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무겁게 다물렸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 맞아요. 선물이었거든요.”
“선물이요?”
“네. 소중한 사람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오, 로맨스! 예상은 했지만 그게 진짜일 줄은 몰랐는데.
나는 뜻밖의 이야기에 구미가 당겨 눈빛을 초롱초롱 빛냈다.
사실 그를 우연히 서너 번 마주했던 것이 전부였지만, 그에게서 이처럼 애틋한 감정이 느껴지던 순간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금방이라도 눈물 한 방울을 톡, 떨굴 것처럼 붉어진 눈가가 어찌나 아련하던지.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이 남자가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들까?
그 순간 정말 이상하게도 나는, 그를 한껏 골려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유치하고 해괴망측한 생각이었지만.
“근데 왜 파셨어요? 집 좋던데. 어머나 세상에! 혹시 헤어지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척 입을 가렸다.
그런데….
“그 애가 죽었거든요.”
“아아, 죽어… 예…에…?”
…… 아니…. 이건 좀…….
나는 응접실 구석으로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그곳에 세워져 있는 쓰레기통을 가만히 바라보며, 해탈한 듯 미소지었다.
‘어머, 안녕? 거기가 내 집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