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틸다의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물론 요새 한동안 라튼이 그녀를 피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 가여운 어미를 보살피러 찾아온 것을 보라지. 제 아들은 엄마 없이 못 사는걸!
그녀는 만족스럽게 와인 한 모금을 넘겼다.
그러나 그녀의 장남, 라튼 레트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떠했던가?
“엄마! 시아라가 엄마한테 몹쓸 짓을 했다는 말. 사실 거짓말인 거죠? 그 애가 그럴 리 없잖아!”
“라튼. 엄마는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통 모르겠구나.”
“엄마가 그 애를 쫓아낸 거야! 나한테서 떼어 놓기 위해서!”
“… 너는 지금 네 엄마 상태는 보이지도 않는 것이냐?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그 애는 제 전부였어요! 시아라가 어디 있는지 당장 말해요! 엄마는 알고 있잖아. 그렇죠? 그렇다고 말해요! 당장!”
틸다는 제게 악다구니를 쓰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겨우 그깟 계집애 일로!
당장이라도 와인잔을 집어던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다 아들의 잘난 얼굴에 흉터라도 생기면!
“라튼, 잘 듣거라.”
그는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을 들어 올렸다.
“그 애한테 남자가 있었더구나.”
“네?”
“그 계집한테 너 말고 다른 남자가 있었다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루아침에 웬 남자와 함께 천만 드랑을 들고 나타났어. 그 뒤로 여길 떠났고! 이게 지금 무슨 소리인지, 이 엄마가 다시 설명해줘야 이해하겠니?”
빛을 잃은 라튼의 새빨간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
아델트로 이사 온 지도 벌써 스무날이 되었다.
오늘따라 더 유난스러운 추위에, 나는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거실 안락의자에 앉았다. 벽난로에 집어넣은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와 함께 타들어 갔다. 천천히 전해지는 온기에 눈꺼풀이 나른하게 감겨왔다.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려던 찰나, 지이잉-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하게 크던지. 나는 화들짝 놀라 그대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성미가 급한 벨 소리는 그 뒤로도 두 번이나 더 쩌렁쩌렁 울렸다.
“누구지?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혹시, 벌써 나를 찾은 걸까?
덜덜 떨리는 손가락에 최대한 힘을 주고 커튼 자락을 약간만 걷어냈다.
그러나 방문객은, 뜻밖에도 레오였다.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대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대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레오? 무슨 일이야?”
“누나…. 레아가, 레아가 너무 아파. 도와주세요.”
에엥?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하게 레오의 손을 잡고 옆집으로 갔다.
그의 말대로 레아의 몸은 열로 펄펄 끓었다. 곧바로 물수건을 적셔 아이의 이마에 올려놓으며, 레오에게 물었다.
“약은 먹었어?”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 떨어졌어요. 엄마한테 있는데.”
“그럼 누나가 얼른 다녀올 게. 그때까지 레오가 잘 돌봐줄 수 있지?”
아이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꽉 여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그런 레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오늘이 유난히 추워서 그런가 봐. 좀 이따가 누나 집으로 가자. 따뜻하게 나무 많이 때줄게.”
“… 레아가 얼른 일어날까?”
“당연하지. 용감한 레오가 옆에 있는걸.”
레오는 조그만 양손으로 눈썹까지 내려온 제 앞머리를 꽉 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레아! 오빠가 다 지켜줄게! 나만 믿어!”
*
밤사이 내리다가 멈췄던 눈이 또다시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음…. 얼른 다녀와야 하는데.’
한나의 레스토랑에 가려면 집 뒤편에 있는 언덕을 넘는 것이 가장 빨랐다. 꼬불꼬불 제멋대로 나 있는 길이 문제기는 했지만.
에둘러 가는 길은 평탄하여 걸어가기에는 편했으나 시간이 두 배로 걸렸다.
사람이 많이 안 사는 이 동네에서 당장 마차를 구하기는 어렵고. 바닥이 꽁꽁 얼어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은 애초에 포기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에벨 가문에 돈이 최고로 많을 때 말 타는 법 좀 배워둘 걸.
나는 게을렀던 과거의 나를 타박하며 레아를 위해 지름길을 선택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검술 훈련도 받은 여자라고! 씩씩하다, 이 말이야.
생각대로 언덕은 꽁꽁 얼어있었다. 눈이 쌓인 곳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흙까지 얼어붙어 상당히 미끄러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목검을 휘두르던 것이 드디어 진가를 발휘하는 걸까? 빙판에서 미끄러질 뻔할 때마다 어렵지 않게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발생했다.
레아의 소식을 들은 한나가 당장 앞치마를 벗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손님은 파도처럼 끊이지를 않았다.
“어떻게 하죠…. 하필 남편도 오늘 수도에 간지라….”
“걱정 마세요. 제가 아이들이랑 같이 있을게요.”
나는 생애 첫 임무를 맡은 요원처럼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한 손은 한나가 챙겨준 약과 음식이, 다른 손은 아이들의 선물로 가득 차 있었다. 아픈 아이가 안쓰럽기도 하고, 그녀 곁을 지키고 있는 아이가 기특하기도 해서 이것저것 샀더니 그만….
괜찮아. 돌아갈 때는 마차를 타고 가면 되니까!
“아유, 이 아가씨 좀 보게. 지금 눈 내리는 것 좀 봐유. 마차 운행은 못 해유.”
“네에…?”
그 말인즉슨…. 이걸 들고 다시 한 시간이나 걸어가야 해…? 저 언덕을?
새어 나오는 한숨을 도무지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별다른 방법이 없기에 나는 다시 그 험난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새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양손 가득 선물꾸러미를 들고 흰 눈밭을 가로지른다.
뭐야, 나 완전 산타할아버지 같잖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내친김에 진짜 할아버지처럼 껄껄 소리내어 웃으려던 참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신중히 내디디고 있는데, 저 멀리서 우레와 같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이렇게 좁은데다가 빙판길에 말이?
멈출 줄 모르고 질주하던 말의 새까만 형체가 어느새 내 시야에 나타났다.
나는 화들짝 놀라 옆으로 피했다.
“어… 어어…? 어어어어엉어?!”
하필 밟은 곳이 꽁꽁 얼어붙은 흙바닥이었고 내가 처박힌 곳은 그 옆의 진흙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은, 이미 사건이 벌어진 후였다. 허공에 던져진 선물꾸러미들은 고속낙하 중이었다. 그것들이 착륙할 곳엔 다행히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다는 사실만이, 나를 위로했다.
“하…….”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다리를 살짝 삐끗한 것인지 통증이 밀려왔다.
“아씨…. 아프잖아.”
손바닥과 무르팍에서는 피도 흘렀다.
오늘 빨간 원피스를 입은 것이 내 운명을 결정한 것인가. 산타는 개뿔.
씩씩거리며 뒤돌아봤지만, 이미 말이 휩쓸고 간 자리엔 채 가라앉지 못한 눈보라가 산란할 뿐이었다. 치미는 짜증을 가라앉히며 통증이 나아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내 위로 새까만 그림자가 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카시… 마법사님?”
에엥? 마법사님이 왜 여기에 있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상황이 아리송한 것은 카시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분명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그저 돌처럼 굳어서 정지해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구 조사를 할 분위기가 아니기에, 나는 그가 내게 온정을 베풀어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뭐지? 자기 때문에 넘어진 걸 모르나?’
꼭 그게 아니더라도, 도대체 왜 그냥 보고만 있는 거지? 도와줄 거면 도와주고 갈 거면 창피하니까 얼른 사라지라고! 계약 끝났다고 이렇게 야멸치게 구는 거야?
내 바람이 무색하게, 그는 계속해서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어디 그뿐이랴. 껌뻑거리던 눈을 손으로 세차게 비볐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입술을 꿈틀거려댔다.
내 과거 호위 기사님의 취미는 조롱이었나?
“저…. 그쯤 하셨으면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내가 이빨을 꽉 깨물고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망부석처럼 굳어있던 그가 움찔거렸다.
“… 시아라 씨?”
“네.”
그러나 그는 손을 잡는 것 대신 난데없이 자기 볼을 찰싹 내리쳤다. 나는 허망하게 그 꼴을 보고 있다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 일어섰다. 아무래도 이 사람 미친 것 같다.
눈밭에 나뒹구는 선물들도 다시 주워들고 절뚝절뚝 걸음을 옮겼다. ‘서두르자.’ 그렇게 그의 곁을 지나치려는데 그가 내 팔을 붙잡았다.
“지금 제 눈에 보이는 거, 진짜예요?”
… 뭐가 보이기에……?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역시,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이 붙잡으면 조심하라던 옛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다.
*
카시안은 온종일 어떤 업무도 집중할 수 없었다.
자신의 집무실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들이 이리도 많았던가?
옷걸이에 걸린 정복의 금색 휘장이, 황실에서 보낸 금색 인장이 찍힌 서류 더미가, 심지어 오늘 그의 비서가 차고 있는 금색 벨트와 책상 위에 내던져진 금색 만년필마저.
모두 그 빌어먹을 금발의 여자를 떠올리게 했다.
‘수도에 있던 여자가 왜 여기에 있지?’
혹시 도망친 곳이 여기야?
카시안은 그대로 책상 위에 머리를 처박았다.
쿵.
“등신.”
쿵.
“머저리.”
왜 거기서 손을 내밀지 못했을까?
아니, 애초에 그는 그게 다 꿈인 줄 알았다. 생각하지 말자고 애썼던 시간만큼 그녀를 떠올렸기에, 이제 하다 하다 헛것이 보이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지나치던 순간 머리카락에서 풍겨오던 꽃향기는, 분명히 그녀의 것이었다. 그는 그제야 시아라가 진짜로 거기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상상이 아니라 진짜가.
“일으켜 줬어야지.”
다리가 아파 보였는데.
… 물어보고 싶었던 것도 많았는데.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혀 허공을 응시했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의 얼굴이 또다시 책상 위로 쿵, 떨어지는 일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
“마법사님도 아델트에 사는 걸까?”
나는 바짝 말린 벚꽃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말을 좀 더 걸어볼 걸 그랬나?”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굴던 카시안은 진심으로 이상했지만, 그래도 과거에 나를 도와줬던 사람이 아니던가. 분명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그날 행동은 진짜로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내가 그새 뭘 잘못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난 돈다발 던지고 튄 죄 밖에 없는데!
“누나! 빨리 일로 와 봐!”
복잡한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방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책 사이에 벚꽃을 다시 끼워 넣고 책을 덮었다.
“무슨 일이야, 레오?”
“이 나무칼들 나도 만져 봐도 돼?”
“당연하지.”
“우와아아! 이제부터 나도 멋쟁이 기사님이야!”
나는 레오에게 답해주고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린 집을 둘러보았다.
레아가 아팠던 날 이후로 쌍둥이는 틈만 나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물론 나도 대환영이었다. 알고 보니 한나의 레스토랑은 아델트 최고의 디저트 맛집이었거든!
초인종을 누르는 아이들의 손에는 늘 커다란 케이크 상자가 들려있었다.
산처럼 쌓여있는 돈을 보아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데, 이상하게 저 케이크는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단 말이지?
나는 오늘도 주방 테이블 위에 올려있는 케이크를 보며 흡족하게 미소지었다.
내 행복, 내 케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