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목표를 정하니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먼저, 레트랑 부인에게 긴급 전보를 쳐 약속을 잡았다.
다음으로 마법사와 만나 거래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천만 드랑짜리 수표 한 장을 작은 액수의 돈으로 바꿔 가방에 차곡차곡 담았다. 의심스러운 내 행동에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마지막으로는 찻집에 앉아 조용히 그녀를 기다리는 일. 그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어찌나 심장이 요란하게 구는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묘하게 께름칙한 기운이 다시금 나를 덮쳐 몸이 살짝 떨렸다.
‘쫄지 마, 시아라. 너 원래 오늘만 살았잖아.’
그치. 그렇긴 하지.
마음을 든든히 먹고 정신을 딱! 차렸을 찰나, 라튼의 모친 틸다 레트랑이 찻집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
“얘야. 나는 너처럼 한가한 사람이 아니란다.”
레트랑 부인은 프릴이 잔뜩 매달린 장밋빛 드레스를 정리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행동은 누가 봐도 귀족 부인이라 할 만큼 우아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래. 내 치맛자락이라도 붙들고 빌어보려고?”
“음, 글쎄요.”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내 뒤에 선 남자에게 흘끗 눈길을 던졌다.
오늘 내 든든한 파트너는 얼굴 절반을 가리는 검은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 아무래도 마법사니까, 정체를 감추는 편이 낫겠지.
가면 사이로 드러나는 것은 새까만 눈동자와 단단하게 다물린 입술뿐인데도, 그는 꽤 위험한 사람처럼 보였다. 게다가 온몸을 검은색으로 휘두르고 온 이 남자. 분위기가 어찌나 스산한지, 지옥의 저편에서 넘어왔다고 해도 믿을 듯했다.
아주, 훌륭해. 마음에 들어!
입가에 조롱을 머금고 나를 내려다보던 레트랑 부인의 시선도 그를 향했다. 그 순간 그녀 역시 움찔한 것을 보면, 이 남자가 예사 사람이 아닐 거라 눈치챈 게 확실했다.
그래, 싸움은 기세지!
그때,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내 오른 뺨을 간지럽혔다. 그러더니 그가 귓속말로 조용히 소곤거렸다.
“지금 죽이면 되나요?”
“아뇨, 죽이는 건 절대 안 돼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열심히 속닥거리는 우리를 레트랑 부인이 기가 찬다는 듯 응시했다.
“내 아들로도 모자라 그새 새 남자를 꾀어낸 모양이구나. 너처럼 천박한 것이 먹고 살려면 별다른 방법이 있겠느냐마는.”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저 신사분은 네가 지금 어떤 신세인 줄이나 아니?”
“그건 왜요? 모른다고 하면 대신 말씀해주시려고요?”
“얘야, 넌 잘 모르겠지만.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돕는 것. 그게 귀족 된 도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란다.”
“아아, 귀족 된 도리.”
나는 다리를 꼬고 앉아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얼마든지 하세요. 부탁드려요. 어서 수렁에 빠진 저 신사분을 구해주세요!”
내가 꺄르르 웃자 레트랑 부인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진짠가 봐!
그녀는 할 말을 잃고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었다. 꺄륵.
“근데 그전에. 먼저 하셔야 할 게 있어요.”
나는 웃음을 뚝 그쳤다.
“엄마를 모욕했던 것. 사과하세요.”
“뭐라고?”
“사과 먼저 하시라고요.”
“네가 이제 눈에 뵈는 게 없구나.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다만 네 엄마가 멍청해서 그리된 것을 내가 왜 사과해야 하지?”
그녀가 뱀 같은 눈을 부라리며 내게 되물었다.
“마음이 유약하긴 하셨으나 부인께 그런 모욕을 당할 정도로 잘못하신 일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엄마는 도박을 끔찍하게 여기셨어요. 그러니 도박 빚 따위로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의 죽음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그녀가 빚을 진 이유일 것이다.
엄마의 아빠, 그러니까 내 양조부 피에르 자작은 한때 도박에 미쳐있었다. 우리 가문이 이렇게 되고 나서, 엄마는 내게 한참이나 그 시절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렇게 골방에 갇혀 있으니 그때가 생각난다고. 도박이 끝일 줄 알았는데 더 깊은 나락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그녀는 그러한 돈놀이를 저주했다.
그런 엄마가 도박을 위해 빚을 지다니. 애초에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잘못이라. 네 엄마는 내게 큰돈을 빌리고 죽음을 택했지. 신뢰를 저버린 일 역시 지탄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되는구나.”
나는 휘둘리지 않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네 말대로 그 이유가 노름 따위가 아닐 수도 있지.”
“…….”
“근데 그걸 누가 믿을까? 이미 죽었잖니. 아! 네 엄마가 정말 하늘에서 답이라도 해준 거라면, 내가 믿어주마!”
“… 그만… 하세요….”
“게다가 이유가 뭐가 됐든. 여기 이렇게 증거도 빼곡하고.”
그녀가 눈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깔깔거렸다. 그러더니 차용증을 꺼내 들고 허공에 흔들어 보였다. 그 행동에 내 손은 분노로 파들거렸으나 목소리만큼은 되려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여기, 가져가세요. 그렇게 노래 부르시던 돈이요.”
나는 돈뭉치가 가득 든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이걸로 레트랑 가문과의 악연은 끝내고 싶네요.”
맞은편에 앉아 나를 쏘아보던 중년 여성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네까짓 게 이만한 돈을 벌어왔을 리는 없고. 어디 몸이라도 팔았나 보지? 아니면 훔쳤다던가.”
“… 하아.”
“아, 혹시 저 남자가 돈을 대준 건가?”
내 입에서 짤막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역시, 뭐 눈엔 뭐 밖에 안 보인다더니. 말씀이 정말 천박하세요.”
“… 무, 뭐야?”
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나무 바닥에 긁힌 의자가 거칠게 드르륵거렸다.
“당장 앉지 못해?”
“제가 여기서 앉으면 진짜 등신이죠.”
레트랑 부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는 가방에 손을 넣어 잡히는 대로 돈을 집어 들었다.
“진짜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기어코 제가 바닥을 보게 만드시네요.”
촤라락.
나는 그녀를 향해 돈다발을 내던졌다. 공중으로 붕 뜬 돈 뭉텅이가 천천히, 벚꽃처럼 흩어지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개중에는 레트랑 부인의 얼굴에 들러붙어 아름답게 낙하하는 것도 있었다.
그녀가 콧김을 내뿜자 지폐가 팔랑거리며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요구하셨던 것보다도 많을 테니 주워서 세보시던가요.”
1 드랑 더 넣었거든요.
내가 싱긋 웃자 그녀의 얼굴이 터질 듯 시뻘게졌다.
“이… 이게 지금 무슨…!”
“그럼 이만.”
나는 그대로 찻집의 문을 박차고 나왔다.
“시, 시아라! 거기서! 다, 당장 저 계집을 잡아!”
당황으로 물든 여자가 어버버 하는 것도 잠시. 문 너머로 찢어질 듯 날카로운 분노의 외침이 들려왔다.
근데 뭐 어쩔까?
문은 닫혔고, 이제 그녀와 난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텐데.
레트랑 가문과의 질긴 악연은 이제 정말 끝이다.
자연스럽게 내 연인, 라튼 레트랑에게도 이별을 고한 셈이다.
나는 지금 그의 엄마 면전에 돈다발을 집어 던지고 나온 길이니까.
곧 라튼도 오늘 내 행동을 알게 되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상관없어.
“우리 얼른 가요.”
걸음을 서두르기 위해 마법사의 옷소매를 살짝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는 내 손 위로 그의 단단하고 커다란 손을 포갰다.
“괜찮아요.”
“그렇지만…. 이제 절 잡으러 나올 거예요.”
“못 와요.”
“네?”
“쥐새끼들이 보이길래 손 좀 써놨거든요.”
“… 언제요?”
“처음부터요.”
뭐야, 그럼 나 혼자였으면 폼 내다가 진짜 죽을지도 몰랐던 거야? 갑자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가,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덕분에 오늘도 목숨을 구했어요.”
“괜찮습니다. 저도 덕분에 재밌는 구경을 했으니.”
“아…. 아무래도 제가 좀 무례했죠? 그래도 귀족인데.”
“아뇨. 용감했어요.”
담담한 그의 칭찬에 어쩐지 낯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찻집을 나오기 전 레트랑 부인의 손에서 뺏어 든 차용증서를 괜스레 힘줘 구겼다.
“그거, 이리 줘요.”
“네? 이걸 왜….”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손아귀에 있던 종이가 그의 손으로 스르륵 옮겨갔다.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뿐인데도, 차용증서는 공중에서 검은 먼지가 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양 손바닥을 훌훌 털어냈다.
“증거는 완벽하게 없애야 하니까요.”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능력에 감탄해 쌍 엄지를 추어올렸다.
“참! 실례가 아니라면 마법사님 성함을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궁금해요?”
“네. 혹시 정체를 밝히기가 껄끄러우시면 괜찮….”
“카시안이요.”
“네?”
“카시안. 우린 이미 한배를 탔으니까요.”
그가 미묘하게 웃는듯했다.
저 가면 뒤 얼굴도, 갑자기 불어 왔던 봄바람처럼 따뜻할까?
오늘이면 사라질 인연에 왜 자꾸 호기심이 생기는지.
“맞아요, 같은 편. 그러니까 이건 카시안 님을 향한 제 마음이에요. 꼭 받아주세요.”
나는 그의 코트 주머니 속에 편지봉투를 지그시 눌러 넣었다.
“시아라 씨의… 마음이요?”
“네. 아주 정성껏 담았어요.”
그가 봉투를 당장 꺼내보려는 것을 다급히 막고 서둘러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오늘 절 지켜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려요.”
“같이 가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아니에요. 이제 혼자 갈 수 있어요.”
나는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카시안은 제 옷의 주머니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여 작별했다.
“또 만나요.”
글쎄…. 우리가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그의 인사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손을 흔들었다.
*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 한가운데에 드러누웠다.
인생의 큰 과제를 마친 안도감 때문인지, 몸이 녹아내렸다.
“이제 이런 거 두 번 다시 못 해…….”
안 해.
기지개 켜듯 팔다리를 양쪽으로 쭉 뻗자 벽이 닿을락 말락 했다.
언제나 내 목을 조르는 것 같던 낮은 천장을 바라보면서,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홀가분했다. 자꾸만 콧노래가 새어 나왔다.
윗집에선 아이들이 쿵쿵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싫지 않았다. 평소라면 당장 뛰어 올라갔을 텐데.
오늘은 그마저도 환호의 북소리처럼 들렸다. 앞으로 펼쳐질 내 찬란한 인생을 축복하는 영광의 북소리.
이제, 다음은…….
튀자, 멀리멀리.
아무도 날 못 찾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