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무리 인생이란 예기치 못한 일의 연속이라고 한다지만, 왜 내 인생은 늘 이런 식일까. 뭐 하나 평온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가령 어제와 같은 싸움 말이다.
난 그저 일하러 가는 중이었다. 점심용 빵이 든 종이봉투를 품에 안아 들고 상쾌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말이다.
그런데, 광장 한복판에서 웬 여자가 내 어깨를 잡고 나를 돌려세웠다.
“너, 거기 멈춰 봐.”
“네?”
“네가 한스한테 자꾸 찝쩍거리는 그 계집이니?”
당근색 머리카락을 정갈하게 묶은 한 소녀가 뜬금없이 비아냥거렸다.
“저 아세요? 그보다, 전 한스가 누군지도 몰라요.”
“뭐? 네가 자꾸 잡화점에서 웃어준다며 너한테 반했다잖아! 친절한 척 눈웃음 흘리면서 사실은 내 남자를 뺏어가려던 거지?”
얼굴에 주근깨가 빼빼 박힌 그녀가 팔짱을 끼고 억지를 부려댔다.
아니, 그럼 잡화점에서 울어야 하나? 손님한테 화를 내란 말인가? 이 말도 안 되는 대화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나 곧 미소를 되찾았다. 나는 서비스업 정신이 충만한 사람이니까.
“글쎄요. 제가 너무 예쁜가 봐요.”
“이… 이 거지 같은 게 진짜!”
갑자기 달려든 여자가 내 머리를 잡아챘다.
그리고 시작된 싸움은, 내 손에 당근색 머리카락이 한 움큼 뜯기고 나서야 끝이 났다. 여자는 꺼이꺼이 울며 돌아갔다.
내 얼굴에도 손톱에 긁힌 상처가 나긴 했지만, 상대방은 주먹으로 얼굴을 맞고 뒤통수에 하얀 구멍까지 생겼으니. 이 정도면 꽤 만족한다.
아무튼, 이 이야기들이 앞선 두 남자가 속닥거리던 나의 불행이다. 뭐, 다시 생각해 봐도 그 치들이 틀린 말 한 건 없네.
‘아무리 그래도 한번 물면 안 놓는 개라니….’
난 그저 자기방어를 한 것뿐이라고!
나는 두 번째 손가락으로 카운터를 톡톡 두드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와 동시에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잡화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훤칠하고, 아주 잘생긴.
*
“시아라, 몸은 좀 괜찮아? 아픈 데는 없고?”
걱정스러운 눈길로 내게 안부를 묻는 붉은 머리의 남자. 내 연인, 라튼 레트랑이었다.
그는 내 오른뺨 위에 남은 붉은 생채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응. 괜찮아. 아픈 곳도 없고.”
“네가 다치면… 내 마음도 아파. 그러니 싸우지 마.”
그가 나를 제 품에 꼭 안으며 속삭였다.
“응. 고마워, 라튼.”
나 역시 그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포근한 향기가 나른했다.
따뜻하고 어둑한 실내, 은은히 빛나는 조명, 그리고 그의 향기.
이 모든 삼박자가 아주 뜨거운 분위기를 만들려는 찰나,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시아라, 오늘 내 머리 어때?”
“멋지네.”
“다행이다. 엄마가 해줬거든.”
“응…?”
“옷도 엄마가 골라줬어. 멋있지?”
…….
“오늘 저녁은 우리 엄마랑 먹기로 했어. 그래서 이따가 집에는 못 데려다줄 것 같은데…. 괜찮지?”
“으응. 괜찮고말고.”
내가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이자 그 역시 따라 웃었다.
내 연인 라튼 레트랑. 그는 엄마 없이 아무것도 못 하는, 지독한…
마마보이였다.
그의 모든 말은 “우리 엄마는-.”으로 시작해 “우리 엄마가-.”로 끝났다.
우리는 3년을 만났지만, 내가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었다. 눈에 단단히 씌었던 콩깍지 탓이었다.
‘그야 얼굴이 너무….’
사기 같으니까.
처음 그를 만난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타들어 갈 것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나를 한눈에 사로잡은 것은 물론이요, 웃을 때 사르륵 접히는 그의 눈꼬리에 나는 두 손 두발을 다 들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 외모가 주는 효과는 아직도 유효했다.
비록 그가 어마어마한 마마보이라는 점이 마음 아프긴 했지만, 그의 얼굴은 그것마저 용서 가능케 했으므로.
‘얼굴 보고 반한 내 죄다, 죄.’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레트랑 백작의 장남, 라튼 레트랑.
늘 그렇듯 몰락한 가문의 여식과 번듯한 귀족 영식의 사랑에는 장애물이 많았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우리의 연애는 비밀스러웠다. 한데 그게 또 어찌나 설레던지.
우리의 데이트는 대부분 잡화점에서 이뤄졌다.
내가 혼자 일하는 시간에 맞춰 그가 오면, 카운터 뒤에 숨어 수다를 떨거나 작은 입맞춤을 나누는 것이 다였다. 그래도 행복했다.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을 만큼 너무도.
“시아라, 우리 결혼 말이야….”
그리고 얼마 전, 그는 나와 결혼을 하겠노라 제 엄마에게 고백했다.
그 결과를 알려주려는 모양인지 그가 답지 않게 잔뜩 움츠러들었다.
“엄마한테 말해봤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좀 힘들 것 같아. 그…. 우리 엄마는 결국 내 말을 들어주시거든.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오늘 저녁도 엄마를 설득해보려고 같이 먹는 거니까.”
“응. 걱정하지 마, 라튼.”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곁엔 항상 내가 있을 거야.”
그가 나를 더욱 깊게 품에 안았다.
당연히 허락하지 않으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그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걸 보면 그래도 내가 내심 기대했었나 보다.
아아, 시아라. 너 언제부터 이렇게 염치가 없었니. 애초에 안 될 거란 걸 알고 있었으면서.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라튼이 내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우리 엄마도 곧 네가 좋은 여자라는 걸 알아주실 거야.”
물론 나는 그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
*
“카시안 폰 아델트 공.”
“아, 대장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카시안 폰 아델트는 근위대의 입단 시험이 한창인 연무장을 둘러보다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래. 자네가 너무 바빠서 통 얼굴 볼 시간이 없군. 폐하를 뵙고 오는 길인가?”
“예. 이제 헤르본의 북부 경계도 안정을 되찾았으니. 가기 전에 얼굴 뵐 겸 왔습니다.”
“고생했군. 그래, 자네 영지로 돌아간다고?”
“예. 수도에 좀 머물다 곧 돌아갈 예정입니다.”
연대장이 아쉬운 듯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렇다면 황실 근위대에 들어올 생각은 여전히 없는 건가?”
“전 그저 해치는 것에 능할 뿐, 지키는 데는 아무런 재주가 없습니다.”
“허허. 저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이 이리 겸손해서야.”
“다 좋은 스승님을 둔 덕일 테지요.”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군.”
그의 스승, 베른 로하르트 대장이 카시안을 보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자네라면 바로 내 뒤를 이을 텐데, 참 아쉽군. 그래. 바쁠 테니 이만 가봐. 곧 또 보자고.”
“예.”
카시안은 정중히 인사하고 뒤돌았다.
“아델트 공.”
그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하자 로하르트 대장이 이어 말했다.
“좀 웃게나.”
스승의 간결한 당부에도 그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밖으로 나왔다.
‘황궁에 온다고 오랜만에 갖춰 입었더니 영 불편해.’
카시안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감청색 프록코트를 벗어들었다. 거추장스러운 크라바트를 끌어내고 셔츠의 제일 윗단추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지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황성의 가로수 사이로 불어든 미풍이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나뭇잎 사이로 조각나 산란하는 태양이, 탄탄하게 그을린 그의 피부를 더욱 빛나게 했다.
‘황실 근위대라니.’
카시안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로하르트 대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물론 지금도 제국의 북부 아델트의 공작으로서 그 일대 침입자 토벌 임무를 맡고 있긴 하다만. 영지를 수호하는 일도 어쩔 수 없이 물려받은 작위 탓일 뿐, 그가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그런 내게 황제 폐하 수호라.’
웃기지도 않는군. 소중한 것을 한 번도 지켜낸 적이 없는데.
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황궁의 정문에 다다르자 그를 기다리던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공작님. 어디로 모실까요?”
사념에 빠져있던 카시안은 마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근처 잡화점으로 가지. 만년필을 잃어버렸거든.”
마차에서 내린 카시안 폰 아델트는 시장의 한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로지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만년필을 하나 사려고 합니다.”
“그럼 샘플 몇 가지를 보여드릴 테니 여기 오셔서 골라보시겠어요?”
짙은 고동색 나무로 실내장식 되어 조금은 어두컴컴한 내부에서, 카시안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엔 황금을 뿌려놓은 듯 반짝거리는 여자가 있었다.
높게 묶은 금색 머리카락에, 보석을 빼다 박은 듯 영롱하게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
“… 아….”
그는 여자를 향해 앞으로 다가갔다. 맑은 웃음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걸음은 불가항력이었다.
“이 세 가지가 여기서 제일 잘 팔리는 제품들이에요. 직접 한 번 써보시겠어요?”
“그러도록 하지요.”
여자는 서랍에서 잉크병을 꺼냈다. 그러나 뚜껑이 너무 꽉 닫혀 있는지 낑낑대며 분투 중이었다.
“제가 도와 드리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온 힘을 다해 열던 뚜껑이 휙 돌아갔다.
문제는 그 힘을 주체하지 못했던 탓인지, 병에 들었던 잉크가 허공을 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됐다! 어? 어어…!”
공기 중을 떠돌던 검은 잉크가 카시안의 흰 셔츠 소맷자락에 떨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당황한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들고 소매 위의 잉크를 닦았다.
그러나 속절없이 더욱 새까맣게 번져 들어갈 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내 울상이 됐다.
“제, 제가 세탁비를…. 아니지. 셔츠 값은 꼭 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혹시 엄청 비싼 옷은 아닌지….”
그녀는 끝말을 살짝 우물우물하며 그와 눈을 맞췄다.
새파란 눈동자에 살짝 투명한 눈물이 고였다. 그 덕에 그녀의 눈은 더욱 반짝거렸다.
‘보석 위에 또 보석이 있는 것 같네.’
…….
………?
미쳤나. 뭐 이런 별 거지 같은 생각을….
그는 울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별 해괴망측한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비난하며 헛기침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옷이 많이 더러워졌는걸요.”
카시안은 커프스단추를 풀어 소매를 두어 번 접어 올렸다.
“이러면 안 보입니다.”
그가 깨끗한 소맷단을 보여주며 여자를 안심시켰다.
난처한지 입술을 삐죽이던 그녀의 시선이 곧 다른 곳을 향했다.
훤히 드러난 그의 팔 바깥쪽에 길게 난 상처. 그곳이었다.
“여기 상처가….”
카시안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이미 오래전 상처일 뿐이었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여자를 마주했다.
“제 상처보다 그쪽 얼굴에 있는 상처가 더 심각해 보이는군요.”
“아. 이, 이건….”
그녀가 손을 들어 재빨리 제 얼굴의 흉터를 가렸다. 높게 묶은 금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어깨 끝에서 흔들렸다.
글썽거려 붉어진 눈가와 창피한지 따라서 새빨개진 귀, 머리카락 끝이 마주 닿는 그녀의 하얀 목 언저리. 그러나 차례로 시선을 옮기던 카시안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제 팔의 상처로 이야기를 돌렸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전쟁의 상처는 저 같은 사람에겐 영광과도 같을 테니.”
“전쟁…. 군인이신가 봐요.”
“비슷합니다.”
“신기하네요. 제 남자친구도 곧 황실 근위대의 장병이 될지도 모르거든요!”
울상이었던 그녀의 얼굴에 다시 처음과도 같던 미소가 떠올랐다.
‘남자친구….’
“아 참! 만년필을 보여드린다는 게 그만. 다시 한 번 보시겠어요?”
카시안은 카운터에 올라온 세 자루의 만년필을 보다가, 무심코 진열대 제일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이거. 이게 좋겠네요.”
“앗! 이 만년필의 가치를 알아봐 주시는 분은 처음이에요. 색깔이 별로라고 인기가 없었거든요. 제 눈에는 예쁘기만 한데.”
그녀가 잠시 울적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배시시 웃었다.
“제 눈에도. 제일 예쁘네요.”
딸랑-.
그때, 잡화점의 문이 열렸다.
“시아라! 나 입단 테스트에 통과했어!”
붉은 머리의 남자가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한달음에 그녀를 안았다.
그 행동은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웠다.
“정말이야? 진짜로?”
“응! 아직도 실감이 안 나. 꿈이면 어쩌지? 내 심장 떨리는 거 느껴져?”
“응. 느껴져.”
그들은 어느새 자기들만의 세상에 있었다. 눈앞의 손님은 그들 사이에 낄 틈이 없었다.
“아…. 맞다, 라튼! 잠시만, 손님이 계셔서….”
그제야 붉은 머리의 남자가 고개를 돌려 카시안을 응시했다.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그녀의 곁에서 살짝 떨어졌다.
“죄송해요. 좋은 소식이 들려서 그만…. 포장도 해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혹시라도 셔츠를 새로 사시려면 꼭 다시 찾아주세요. 전 언제나 여기에 있으니까요.”
“그러도록 하죠.”
카시안은 계산 후 짧은 인사를 마치고 잡화점을 나왔다.
그의 뒤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카시안은 수도 자택으로 돌아와 한참이나 집무실에 있었다.
새로 산 만년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책상 서랍에서 오래된 그림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아이가 그린 듯 삐뚤빼뚤한 그림 속엔 샛노란 머리카락에 푸른 눈의 어린 소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그녀를 ‘시아라’라고 했던가.
‘이름이 또 하필….’
카시안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푸른색 바디에 황금처럼 노란 만년필 촉. 이게 예쁘지 않을 리가.
그의 손에서 만년필이 미끄러져 툭, 떨어졌다. 데구루루 굴러가던 그것이 그림 위에서 멈췄다. 그러자 그가 더는 보기 힘들다는 듯 그림을 뒤집었다.
오늘 처음 만난 여자를 보고 첫사랑을 떠올리는 꼴이란.
우습구나.
그것도 이제 세상엔 있지도 않은 아이를.
추하다, 카시안.
아직 때 묻지 않은 황금색 만년필 촉이 불빛에 반짝거렸다.
카시안은 그것을 무심하게 검은색 잉크병에 푹 담갔다 뺐다.
어느새 금색 펜촉이 검은 얼룩으로 물들었다.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무감했다.
만년필을 아무렇게나 책상 위에 내던지고 엄지와 중지를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툭, 하고 펜촉이 부러졌다.
“흐음. 다시 사러 가야겠네.”
어쩔 수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