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
[프롤로그]
“여기, 가져가세요. 그렇게 노래 부르시던 돈이요.”
나는 돈뭉치가 가득 든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걸로 레트랑 가문과의 악연은 끝내고 싶네요.”
맞은편에 앉아 나를 쏘아보던 중년 여성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네까짓 게 이만 한 돈을 벌어왔을 리는 없고. 어디 몸이라도 팔았나 보지? 아니면 훔쳤다던가.”
내 입에서 짤막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와, 역시. 뭐 눈엔 뭐 밖에 안 보인다더니. 말씀이 정말 천박하세요.”
“… 무, 뭐야?”
내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자 나무 바닥에 긁힌 의자가 거칠게 드르륵거렸다.
“당장 앉지 못해?”
“제가 여기서 앉으면 진짜 등신이죠.”
여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는 가방에 손을 넣어 잡히는 대로 돈을 집어 들었다.
“진짜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기어코 제가 바닥을 보게 만드시네요.”
촤라락.
공중으로 내던져진 돈 뭉텅이가 바닥으로 흩어졌다.
“요구하셨던 것보다도 많을 테니, 주워서 세보시던가요.”
내가 싱긋 웃자 여자의 얼굴이 터질 듯 시뻘게졌다.
“이… 이게 지금 무슨…!”
“그럼 이만.”
나는 그대로 찻집의 문을 박차고 나왔다.
당황으로 물든 여자가 어버버 하는 것도 잠시. 문 너머로 찢어질 듯 날카로운 분노의 외침이 들려왔다.
근데 뭐 어쩔까?
문은 닫혔고, 이제 그녀와 난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텐데.
레트랑가(家)와의 질긴 악연은 이제 정말 끝이다.
자연스럽게 내 연인, 라튼 레트랑에게도 이별을 고한 셈이다.
나는 지금 그의 엄마 면전에 돈다발을 집어 던지고 나온 길이니까.
나이 스물둘 먹도록 제 엄마 없이 아무것도 못 하던 라튼 레트랑. 곧 그도 오늘 내가 자신의 모친에게 저지른 짓을 알게 될 터였다.
분노로 길길이 날뛸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내 염려를 할까?
사실 그가 어떤 모습을 보이건 조금도 상관없다.
이제 난 이곳에 없을 테니까.
누군가 내게 지금 도망치는 거냐 묻는다면….
그래, 맞아.
나 도망치는 거야.
아무도 날 모르고 그들이 없는 곳으로, 멀리멀리.
아 참, 이걸 먼저 말해야겠구나.
사실 내가 말이야.
로또에 당첨됐거든!
잘 있어라, 이 무자비한 세상아!
1.
“자네, 에벨 가문이라고 들어봤는가?”
“에벨이라면…. 아, 몇 년 전에 망했다던 백작가(家)가 아닌가?”
“그래. 그 무식한 백작이 가문을 싹 말아먹었지.”
“기억나는군. 그런데 갑자기 그 가문은 왜?”
“아 글쎄, 저기 저 잡화점에서 일하는 여자가 그 에벨 백작의 딸이라는군!”
“세상에! 그 잘나가던 가문의 딸이 결국 시장에서 일한다고?”
“그런데 말이야. 그 여식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고 하네만. 어찌나 더러운지, 한번 물면 안 놓는 개라고 그러던가?”
나는 나에 대해 열띤 담소를 나누며 걷는 두 남자의 어깨 사이로 얼굴을 쑤욱 내밀었다.
체구가 작은 남자가 곧바로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 크흠!”
“그래요?”
“아 그렇대도! 어제도 시장 광장에서 머리채를 잡고 싸우던….”
그제야 어색한 공기를 읽은 뚱뚱한 남자가 말을 멈췄다.
“우와.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났나 봐요.”
“뭐, 뭐야 넌!”
“아, 소개가 늦었네요.”
나는 한껏 미소를 머금었다. 잡화점에서 손님을 맞이할 때 지어 보이는, 아주 무해한 미소였다.
“제가 바로 그 ‘개’입니다.”
두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럼 그건 못 들으셨어요? 저한테 까불던 그 여자애, 두 번 다신 뒷머리가 안 자랄지도 몰라요.”
“아니…. 난 그저 들은 대로….”
“제가 다 뽑아놨거든요.”
“…….”
“아저씨도 그 개한테 한 번 물려보시렵니까?”
“핫…. 크흠! 큼! 여 봐! 얼른 가세!”
그들은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뚱뚱한 남자가 양옆으로 뒤뚱거리자 마른 남자의 몸이 얇은 고목나무 가지처럼 흔들렸다. 비틀거리는 뒷모습이 퍽 우스꽝스러운 콤비였다.
“어휴, 욕을 하려면 좀 안 들리게 하던가. 앞에선 말도 못 하는 놈들이!”
나는 혀를 쯧 차며 잡화점 ‘로지하우스’로 들어갔다.
딸랑- 울리는 종소리가 유난히 청아했다. 계산대로 이어지는 짧은 길을 걸으며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아늑하고 포근한 나무 내음이 코끝에 몽실하게 뭉쳐 들어왔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실내는 진열된 상품을 비추는 램프를 제외하곤 조명이 거의 없어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그 덕에 마법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로지 아줌마, 저 왔어요.”
“시아라?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더 쉬다 오지. 아직 얼굴에 상처도 그대론데.”
“어차피 할 것도 없는걸요. 괜찮으니까 먼저 들어가세요.”
로지 아줌마는 마음이 불편한지 계속 뒤돌아보며 발걸음을 멈칫했다.
“진짜 괜찮아요.”
“시아라. 애써 밝은 척 안 해도 돼.”
벌써 십 년 넘게 함께 일하고 있으니, 아줌마는 나를 꿰뚫어 본다. 그러나 나 역시 안다. 이렇게 웃음 짓는 것이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라는 걸.
아줌마가 떠나고 홀로 남자 카운터 의자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뾰족 모자를 쓴 마녀 목각인형의 태엽을 감으며 왼쪽 뺨을 카운터 위에 기댔다. 기괴한 마녀의 표정과는 다르게 제법 부드러운 선율이 잡화점을 채웠다.
계산대 옆 유리 진열대에 내 모습이 거울처럼 반사됐다. 자연스레 시선이 얼굴에 난 붉은 흉터로 향했다.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상처를 훑자 아까 두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너무 사실만 말해서 반박할 게 없긴 했지.’
그들이 말한 세 가지 사실은 자명했다.
첫째, 내 아버지 에벨 백작은 가문을 몰락시키고 죽었다.
둘째, 먹고 살아야 하는 나는 시장 잡화점에서 일하는 중이다.
셋째, 나는 어제 시장 광장에서 한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싸운 일이 있다.
그래도 그들의 무자비한 팩트 폭격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 법이다.
*
“유모, 우리 망한 거야?”
“아니에요, 아가씨. 주인님은 이 가문을 절대 포기하시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모두의 바람과 다르게, 망했다. 내 가문이 쫄딱 망해버렸다.
내 이름, 시아라 에벨.
에벨 백작 가문의 단 하나뿐인 자식이자 어릴 적 입양된 수양딸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칠 된 외벽, 벽면을 장식한 커다란 태피스트리와 그 주변을 장식한 화려한 사치품들. 너무 넓어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는 에벨 백작의 저택으로 오게 된 것은 내가 일곱 살 때였다.
모든 것이 과분하리만큼 넘쳤다.
보육원에 살 때 내게 주어진 것이라곤 허름한 이불 하나와 솜이 다 빠진 베개가 다였다.
하지만 에벨 저택에 와서는 같은 옷을 또 입어 본 적이 없었고, 하루도 고기가 빠진 식사를 한 적이 없으며. 매일 아침, 내 방문 앞에는 양부모님이 준비해주신 선물꾸러미가 놓여있었다.
내일은 또 뭐가 있을까?
푹신한 침대에 누워 매일매일 설레서 잠 못 들던 그 순간. 얼마나 좋았던가!
하지만 그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내 양부 에벨 백작에겐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손대는 사업마다 아주 거하게 말아먹는. 그런 신비롭고 놀라운 능력 말이다.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첫 사업 이후, 그의 두 번째 사업이 연이어 실패하며 반짝이던 복도가 거미줄과 먼지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세 번째 사업을 정리할 땐 저택을 가득 메우던 하인들이 사라졌고, 네 번째 사업으로 영지를 지키던 사병들도 전부 내보내야만 했다.
결국, 그 넓은 집에 대대로 백작 가문을 모셨던 집사와 나를 돌보던 유모. 딱 둘만 남았다.
그리고 식탁에 올라온 건….
“휴, 풀밖에 없네.”
생기 넘치던 내 목소리에 근심이 섞이기 시작한 것은 이 년. 입양되고 딱, 이 년이면 충분했다.
몰락 귀족. 그 단어가 내 가문을 표현할 가장 적절한 단어였다.
그래도 거지 같던 보육원 생활을 해봐서일까. 나는 오래지 않아 주제 파악을 할 수 있었다.
[“얘야. 난 너처럼 불행이 깃든 아이는 좀처럼 본 적이 없구나.”]
가문이 망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제일 먼저 보육원 원장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불행이 깃든 아이. 우습게도 나는 그 한마디에 안정을 되찾았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온 기분이랄까?
내가 그간 누렸던 것들은 누군가의 실수로 잘못 주어진 거야. 난 불행하고, 자격이 없는 아이인걸.
그래. 이건 다, 꿈이었어.
그래서 딱히 슬프지는 않았다.
당연히 주변 귀족들의 동정 어린 시선이나 삿대질 역시 아무렇지도 않았다.
“맞아, 우리 집 이제 거지야. 불만 있니? 거지한테 한 번 맞아볼래?”
그렇게 어깨 한번 으쓱해주면 어린 귀족들은 오들오들 떨며 빠르게 사라졌다. 가끔 마음이 심약한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그것까진 굳이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그러나 내 부모님은 달랐다.
그들은 뼛속까지 귀족이었다. 그런 시선을 온전히 감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양부는 잇따른 사업 실패의 충격으로 쓰러져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장례에 참석한 일가친척들도 가문을 통째로 말아먹었다며 그를 비난했으니 참으로 비참한 죽음이었다.
숨만 붙어있을 뿐 죽은 사람 같기는 양모도 매한가지였다.
간혹 그녀의 텅 비어버린 눈동자가 예전처럼 반짝이는 날도 있었지만, 과거를 추억할 뿐이었다.
다시 일 년. 내가 열 살이 됐을 즈음 끝까지 남아있던 집사와 유모마저 떠나보내야 했다. 저택엔 나와 엄마만 남았다. 한때 나라의 녹을 먹고 살았던 아빠의 몫으로 황실에서 위로금이 나왔으나, 그것으로도 빚을 다 갚기는 무리였다.
따라서 더는 그 저택에 살 수 없었다.
우리는 엄마 가문에서 보내 준 약간의 돈으로 도망치듯 나와 수도에 작은 집을 구했다.
그날, 엄마는 나를 꼭 껴안았다.
“오, 시아라. 이제 내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오직 너뿐이란다.”
그녀의 품에 안긴 것은 가문이 망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온기가 너무 따뜻해서 나 역시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내게 얼마나 커다란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었는지.
나는 엄마를 대신해 이 집의 가장이 되었다.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엄마는 늘 장작도 때지 못해 차가운 방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제국의 수도라 한들 열 살짜리 여자아이가 할 수 있는 돈벌이는 거의 없었다.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신문 배달을 하거나 시장에 나가 구걸을 하거나. 한동안은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
로지 아줌마를 처음 만난 것도 시장 골목 구석이었다.
퉁퉁한 체격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그녀가 나를 보며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집이 없는 거니?”
“아니요. 집은 있어요.”
“그럼 왜 아침부터 이 길거리에 앉아있는 거지?”
“일자리를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파서요.”
로지 아줌마는 콧잔등에 내려앉은 동그란 갈색 뿔테안경을 고쳐 썼다.
“흠…. 따라오너라.”
그 한마디와 함께 나는 자그마치 12년 동안 시장의 잡화점에서 일할 수 있었다.
가슴 아래서 제멋대로 구불거리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높게 올려 묶고 환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던 나는 로지하우스의 마스코트였다.
내 덕에 가게를 찾는 손님이 늘었다며 월급에 보너스를 약간씩 챙겨주시던 로지 아줌마 덕분에 우리 집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그 사이 엄마도 그나마 정신을 차렸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물론 아직도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투덜대긴 하지만.
그러나 내 인생이 늘 그래왔듯 모든 일이 잘 굴러가는 법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