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중국으로 가기 전, 잠시 독일에 머물고 있던 다비는 재하의 이야기에 좀처럼 볼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만 볼 수 있는 애교 섞인 희귀한 표정에 재하는 다비에게 이야기하길 잘했단 생각을 했다. 다비는 조금 전 들었던 말을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한국에서 촬영한다고?”
“네. 작년에 계획했던 거예요. 그런데 형이 그 영상을 좋아할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촬영할 걸 그랬나 봐요.”
다비가 재하의 연주 영상 중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고궁에서 한복을 입고 첼로 연주했던 걸 다시 한다는 소리에 다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재하가 미소를 띠며 짓궂게 굴었다.
“형, 이번 영상으로는 몇 번 할 생각이에요?”
“뭐, 뭐라는 거야. 안 해. 그냥 너한테 잘 어울리니까 좋단 소리인데….”
“정말 안 할 거예요?”
사귀게 됐다고 제법 능글맞아진 녀석의 눈빛에 다비가 능글맞음의 진수를 보여주기로 했다. 잘생긴 미소와 능글맞은 눈웃음을 생글거리며 재하의 턱 밑을 손으로 간지럽혔다.
“네가 있는데 내가 왜 영상을 보면서 해. 뭐, 네 앞에서 영상 틀어놓고 한 번 빼줄까? 내가 빼는 동안 너는 나한테 손도 대면 안 되고 오직 눈으로만 지켜보면서…. 어때. 마음에 드냐?”
“…잘못했어요. 내 앞에서 그러지 말아요. 영상도 질투할 거 같으니까. 정말… 형, 사랑해요. 야해서 더 좋아요.”
“그러니까 왜 이기지도 못할 거 알면서 덤비고 그래. 귀엽게.”
자신을 잔뜩 귀여워해 주는 다비가 좋아서 재하는 헤실 웃으며 다비를 꼭 껴안았다.
“형 이겨서 내가 뭐 해요. 그럴 시간에 형을 더 사랑하고 말지.”
“미친….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워오는 거야. 귀여운 새끼. 아무튼, 한국에는 언제 가는 건데?”
재하는 다비의 목덜미에 입을 쪽쪽 맞췄다. 고개를 조금만 숙이면 쉽게 입술이 닿는 위치라 다비의 목은 재하가 물어뜯기 너무나도 좋은 곳이었다. 1년 가까이 물고 빨았더니 이제 목에 달라붙는 건 익숙한지 간지러워하지도 않고 받아주었다.
“형이 중국 들어가기 전에요. 한국 간 김에 좀 쉬면서 추석도 지내려고요.”
“그래? 그럼 나도 너 따라서 한국 들어갔다가 거기서 중국으로 넘어갈까.”
얌전히 입 맞추던 재하가 갑자기 뭐에 흥분했는지 다비의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다비가 인상을 찌푸리며 흥분한 재하를 토닥였다.
“아야. 갑자기 왜 물어뜯어? 뭐가 불만인데.”
“아뇨. 좋아서…. 형이 저 따라온다고 처음 말해준 거라서요. 그 전엔 제가 끌고 다녔잖아요.”
“참나. 별걸 다 좋아한다, 진짜.”
다비가 피식 웃으며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재하가 몸을 떨어트리고 다비와 눈을 맞췄다. 눈빛이 아주 초롱초롱한 것이 불길해서 다비는 재하가 말하기도 전에 고개부터 저었다.
“안 돼.”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뭔지 몰라도 나한테 별로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서 그래. 뭐, 일단 들어는 줄게. 뭔데?”
“저 촬영할 때 같이 가서 사진 찍어주면 안 돼요?”
“거봐라. 내가 예전부터 말했는데, 인물 사진은 부탁 안 받는다고.”
쉽게 응해줄 것 같지 않은 분위기자 재하는 다비에게 찰싹 매달려 애원하기 시작했다. 말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계속 치대면 마지못해 들어주는 사람이 김다비라는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이렇게 나오면 피식 웃으며 알았다고 하면서 예뻐해 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형이 봐주면 연주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같이 따라가 주는 건 괜찮죠?”
“따라가는 건 어렵지 않아. 그런데 인물 사진은 좀….”
“형이 찍고 싶어서 찍는 건 괜찮아요?”
“그런 거라면….”
다비가 인물 사진 의뢰를 꺼리는 이유는 단순했다.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서 어색하게 있는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자연 사진을 찍는 이유 역시 같았다. 자연물은 카메라 앞에서 어색해하지 않으니 언제나 자연스러운 사진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사람의 자연스러운 찰나를 찍고 싶지만, 타인을 멋대로 촬영할 수 없으니까 인물 사진을 찍는 걸 꺼리게 되었고 그게 점점 쌓여서 지금은 자신을 잘 아는 지인 위주로만 찍어주는 실정이었다. 그것마저 다비가 찍고 싶다고 느껴질 때만 찍는 거라서 다비의 인물 사진은 매우 희귀했다. 다비의 SNS에도 인물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재하가 자신의 사진을 탐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반허락이 떨어지자, 재하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다비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그거면 돼요. 내가 찍고 싶어지게 만들면 되니까.”
“자신만만하네? 그래, 어디 한번 홀려봐라. 내가 넘어가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국 재하를 찍을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첼로 켜는 유재하를 앞에 두고 사진 찍고 싶단 생각을 수없이 많이 했었던 다비였다. 작정하고 찍으라고 판을 벌여주는데 어떻게 안 넘어가겠는가. 하지만 정말 찍고 싶은 건 자신이 원할 때 카메라를 드는 것이니까 지금 같은 조건이 다비에겐 딱 좋았다.
다비는 촬영 팀원들에게 중국에서 합류하겠다는 연락을 남기고 재하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갔다.
***
재하의 고궁 연주 영상을 보면서 한복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실물로 보는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보정을 이기는 비주얼이라니. 저런 놈이 남자친구라는 생각에 자꾸 입가가 느슨해졌다.
구군복을 모티브로 만든 한복은 색감마저 재하와 잘 어울렸다. 흑자색 의복에 얇은 가죽으로 된 완대를 팔에 차고, 금장으로 장식된 허리 대대를 차자 아랫단이 풍성해지며 한층 더 고풍스럽고 우아해 보였다. 거기에 거문고나 아쟁이 아닌 첼로를 들었는데도 묘하게 어울렸다.
다비가 넋을 놓고 재하를 쳐다보고 있자, 스태프들 앞에서 멋진 모습만 보여주던 재하가 배시시 웃으며 다비에게 다가왔다. 다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재하의 한복을 손으로 매만지며 구경했다. 가까이에서 본 한복은 옷감에 은은하게 무늬가 들어가 있어서 더 화려했다. 재하는 온 신경이 한복에 집중되어 있는 다비를 보며 입고 있던 한복을 질투하려다가, 결국 만지는 건 저니까 내버려 두기로 했다.
“형, 마음에 들어요?”
“어. 잘 어울리네. 소매 때문에 그런가. 사냥하러 가는 의복 같기도 하고, 무관 의복 같기도 하고. 여기에도 장신구가 있구나. 한 번 찍는 영상이라서 이렇게까지 디테일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꽤 신경 많이 썼네.”
“형 홀려서 잡아먹으려고 사냥 룩이에요.”
“놀고 있네. 그런데 진짜 잘 어울린다.”
다비는 재하의 손을 붙잡고 팔에 딱 달라붙은 완대를 매만지며 감탄했다. 손에 스치는 가죽 질감이 부드러워서 계속 만지작거렸다. 입혀주는 대로 입어서 한복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재하도 완대만큼은 용도 설명을 할 수 있었다.
“소매 넓은 의복도 있는데, 그건 이따 영상 찍을 때 멋 내는 용이고 연주할 때는 계속 차고 있을 거예요. 소매 넓은 건 연주할 때 불편하고 첼로도 가려져서요.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저 구경해요. 알았죠?”
“알았어. 너만 보고 있을게.”
완대에서 눈을 못 떼던 다비가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재하에게 소곤거렸다.
“이 의상 그냥 주는 거야?”
“아, 이거 제 한복이 아니라 넷째 삼촌이 사극 촬영할 때 입었던 거 빌린 거예요. 조금 수선한 거라서 같은 한복으로는 안 보이겠지만, 가져가지는 못해요.”
“아. 그렇구나.”
다비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재하의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형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여기 밖인데…. 사람 미치게 하려고 이러는 건가? 갑자기 귀엽게 구는 다비 때문에 재하는 연주고 뭐고 다비를 호텔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만 가득해졌다. 하지만 이런 말을 꺼내면 다비가 정색하면서 등짝을 때릴 거라는 걸 아니까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연인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게 죄라면 죄였다.
“이런 스타일 마음에 들면 우리 결혼식 때 예복 대신 이걸로 맞춰 입을까요? 스웨덴에서 결혼할 때 커플 한복으로 맞춰 입으면 진짜 좋을 텐데, 형 생각은 어때요?”
아직 부모님께 인사도 안 했는데 벌써 계획을 잡고 종알거리는 건 좀 귀여워서, 평소라면 정색할 다비도 피식 웃으며 기분 좋게 받아주었다.
“그래. 그거 입고 첫날밤 보내면 되겠네. 옷고름 푸는 맛이 있겠어.”
“하, 못 참겠다. 오늘 촬영 끝나고 바로 한복 맞추러 가요.”
“됐어. 어느 계절에 입을 줄 알고…. 촬영하려나 보다. 얼른 가봐. 연주 잘하고. 잘 들을게.”
재하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뽀뽀해주면 더 잘할 수 있는데, 연주 끝나고 받을게요.”
“참을 줄도 알고 많이 컸네. 그래. 이따 많이 해줄게.”
다비는 재하의 팔을 토닥여주고 현장으로 돌려보냈다. 촬영이 시작되면 주변 경관을 구경하려고 했더니 아무래도 그른 것 같았다. 한복을 입은 유재하가 어찌나 청순해 보이는지 자꾸 눈길이 갔다.
오늘 연주는 한국의 문화 체육 관광부에서 주관하는 한국 홍보 영상으로 쓰임과 동시에 재하의 새로운 앨범 오피셜 연주 비디오로 쓰인다고 했다. 젊은 국악인들과 콜라보레이션을 한 연주는 국악가요, 현대 느낌으로 편곡한 판소리, 드라마 OST와 재하의 메인 테마곡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궁을 배경으로 한국의 현악기와 서양의 현악기로 연주하는 곡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절묘하게 잘 어울렸다. 합주이고 재하만 있는 게 아닌데도 다비의 눈에는 재하밖에 보이지 않았다. 첼로만 연주해도 재하가 예뻐 죽을 것 같은 다비는 결국 카메라를 들 수밖에 없었다. 어쩌겠는가. 제 눈에는 저 많은 연주자 중에 재하가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을.
다비가 카메라를 들자, 재하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기분을 느낀다는 건 한계를 더 뛰어넘을 힘을 갖게 된다는 거였다. 독일에서 다비가 공연을 보러 왔을 때도 그랬고, 지금 이곳에서도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오늘도 재하는 더 오싹하고 독보적인 연주를 보여주었다.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따로 따기로 했음에도 재하의 열정적인 연주에 다른 국악인들 역시 시너지 효과를 얻으며 공연장을 방불케 하는 열기를 띠었다. 그 덕에 촬영하는 스태프들까지 조금이라도 현장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더 좋은 구도, 배경을 따기 위해 모든 현장이 활활 타올랐다.
모두 다비가 카메라를 든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재하에게 다비는 자신의 세계를 더 찬란하게 만드는, 그런 존재였다.
열정적인 촬영이 끝나고 재하는 국악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곧장 다비를 찾기 시작했다. 다비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면 그곳에 다비가 있었다. 오늘 처음 본 스태프들일 텐데, 다비는 벌써 친해져서 사람들 중심에 서 있었다. 정말 놀라운 친화력이었다.
“사진. 내가 먼저 보고 싶었는데….”
저도 모르게 사라졌던 미소를 억지로 다시 지으며 재하는 다비에게 성큼 다가갔다. 다비가 예뻐했던 옷을 입고 미운 얼굴을 보일 수는 없었다.
“형, 사진 잘 찍었어요?”
다비에게 질문했는데, 눈치 없는 스태프들이 옆에서 열광하며 재하에게 답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작가님 자연물만 잘 찍으시는 줄 알았더니, 인물 사진이 장난 아니에요. 재하 씨 지금까지 찍었던 사진보다 훨씬 더 멋있게 나왔어요. 항상 실물이 잘 안 잡혀서 아쉬웠는데, 작가님 사진에선 실물하고 똑같게 나온 거 있죠.”
“이야. 나는 재하 씨 실물 제대로 못 담아서 카메라 기술이 더 발전해야 된다고 생각한 사람인데, 아니었어. 포토그래퍼가 바뀌니까 확 달라지네. 사진 얼른 봐봐.”
“이거 이번에 앨범 프로필 사진으로 쓰려고요. 유럽에서도 잘 먹힐 것 같은데.”
다비가 사진을 잘 찍는다는 거야 잘 알았지만, 대체 얼마나 멋지게 찍었기에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칭송을 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재하는 얼른 다비의 곁으로 다가가 사진을 모니터로 확인했다.
모니터에 있는 얼굴은 자신의 얼굴이면서도 조금은 낯선 표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다비를 볼 때 자신의 얼굴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본 적이 처음이었다. 행복하면서도 조금은 들떠 있는 눈빛에 욕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비를 볼 때 숨겨지지 않는 소유욕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 모습을 멋있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꽤 잘 숨긴다고 생각했는데, 다비는 그 찰나를 이렇게 잘도 캐치해서 사진에 남겨버렸다. 정말이지 마음을 보는 것도, 남기는 것도 능숙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사진을 찍으며, 남은 다비의 마음도 함께 읽혔다. 다비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고 예뻐하는 마음이 남은 사진은 재하를 참지 못하게 만들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재하는 다비를 꽉 껴안고 말았다. 다비가 정작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재하의 돌발 행동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정색하며 밀어내진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더 능글맞고 부드럽게 넘어가려는 듯 재하를 꽉 마주 안아주고 등을 토닥이며 특유의 잘생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사진이 마음에 들었냐? 어때. 이참에 인물 사진작가로 전향할까?”
“안 돼요. 그냥 제 전속 해주세요.”
“뭐라냐. 나 되게 비싼데.”
“줄게요. 우리 소속사하고 이야기해요. 섭섭지 않게 줄게요.”
다비와 재하가 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사진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재하가 다비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하기로 했다. 비록 둘이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끼고 있지만, 우정 반지 뭐, 그런 것도 있으니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설사 둘이 그런 관계라고 하더라도 이런 효과를 낼 수 있는 관계라면 오히려 응원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오늘 촬영은 지금까지 함께 작업하면서 쉽게 볼 수 있었던 장면이 아니었다.
그냥 연주해도 최상이었던 유재하가 전설급 연주를 보여줬다. 그게 전부 다비가 있어서 그랬다면, 정말 재하의 말대로 전속으로 계약을 맺고 옆에 계속 붙여두고 싶었다. 요즘 세상에 그게 흠은 아니라지만, 한국은 보수적이라고 들었다. 재하의 매니저인 필립이 대표로 얼른 재하의 곁에 다가와 주위를 환기시켰다.
「재하, 이제 정리해야지.」
다비가 매니저의 말을 듣고 재하를 떨어트리려 했지만, 재하는 떨어지지 않고 더 달라붙었다. 다비가 곤란해하며 재하에게 소곤거렸다.
“야, 현장 정리한다잖아. 너 한복 반납해야 하는 거 아니냐?”
“저 지금 섰어요.”
“아니. 미친? 어디서 갑자기 꼴려서 또 이 난리…. 한복 풍성하니까 티 안 나. …안 날걸? 아마?”
양심 없이 큰 유재하의 성기가 발기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만, 그래도 한복은 티 나지 않을 것 같았다. 확인하겠다고 손을 뻗거나 만질 수는 없으니 다비는 얼른 매니저에게 둘러댔다.
「오늘 연주가 힘들었나 봐요. 조금 쉬고 싶다고 하니까 먼저 정리해주세요.」
「아. 오늘 재하가 평소보다 더 힘내서 연주했죠. 그럼 잠시 쉬게 두세요. 재하 좀 부탁할게요.」
「네.」
매니저는 다비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재하를 맡겼다. 몸을 돌려 눈치 빠르게 한국 스태프들에게 상황을 알렸고, 스태프들과 연주자들은 곧장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다비는 발정 난 유재하를 토닥이며 진정시켜주느라 애썼다.
“야. 이렇게 붙어 있으면 더 난리 나는 거 아니냐?”
“그러게요. 안 가라앉네.”
“아니.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르지 않아? 조금 전까지 너 진짜 멋있었다고.”
“꼴릴 만큼요?”
“…어?”
현장 정리로 주위는 시끄럽고 바쁜 상황인데, 세상에 단둘밖에 없는 것처럼 재하는 뻔뻔하게 굴었다. 오히려 다비에게 더 안겨 귓가에 습한 목소리로 수작을 부렸다.
“영상으로 세 번 뺐을 정도면, 현장에선 더 꼴렸을 텐데…. 형은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런 도발에 넘어갈 만큼 다비가 급한 건 아니었다. 아니, 조금 급하긴 했지만, 분위기 파악을 못 할 만큼 상식이 없는 건 아니었다. 결국, 이 녀석을 달래야 하는 것이 자신의 몫임을 아는 다비는 이성을 단단히 붙잡고 소곤거렸다.
“너처럼 때와 장소 구분 못 하고 막 발딱 세우고 그러는 놈 아니니까. 아무튼, 진짜 너 이거 어쩔 거야.”
“차로 갈래요?”
“안 돼. 그런 거 싫어. 확실하게 현장 정리하고 호텔로 가. 말 잘 들으면 오늘 불알 텅텅 빌 만큼 해도 돼.”
“형…. 사랑….”
이성을 잃고 입을 맞추려는 애새끼 같은 유재하의 입을 손으로 턱 막으며 진정시켰다. 예쁘고 솔직하게 구는 건 좋지만, 주위 상황을 안 보는 건 정말 곤란했다. 여긴 한국이고 한국 사람들도 많아서 외국에서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시끄럽다. 얼른 진정해.”
“내일 일정이 없어서 참 다행이네요. 옷 갈아입고 올게요.”
“그래.”
재하는 곧장 스태프들에게 걸어갔다. 다비는 재하의 뒷모습을 보며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저밖에 없는 것처럼 구는 녀석이 싫은 건 아니지만, 전부 받아주다 보면 어느 날 길에서 섹스할 것 같아 자신이라도 정신 차려야 했다.
“가만, 촬영 끝나고 뒤풀이 같은 거 안 하나? 한국에선 그러잖아?”
일이 끝나도 곧바로 호텔로 못 간다는 사실은 조금 서운했지만, 재하의 사회생활을 막을 수는 없으니 조금만 더 참기로 했다. 하지만 다비의 고민은 허무하고 쉽게 끝났다. 재하가 한국의 회식 문화가 익숙하지 않다며 칼같이 잘라내고 다비와 함께 호텔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눈치 안 보고 저 좋을 대로 하는 게 딱 재하다웠다.
곧장 호텔 룸으로 갈 줄 알았던 재하는 다비를 데리고 호텔에 있는 한식당으로 들어갔다. 고급스러운 내부를 둘러보며 다비가 픽 웃었다.
“뭐냐. 난 급하게 호텔로 가자기에 회식도 마다할 만큼 꼴렸나 했더니, 생각보다 밥 먹을 여유도 있었네?”
“여유가 있다기보다는… 든든하게 먹여야 형이 내일까지 버티니까 지금 많이 먹여두려고요.”
“미친놈. 귀엽긴…. 얼마나 해대려고 많이 먹인대.”
“내일까지 밥 생각 안 날 만큼?”
속궁합이 잘 맞으니 재하의 말이 질린다기보다 오히려 기대됐다. 몸을 섞으면 섞을수록 점점 좋아져서 저 능글맞은 말이 애교로 들렸다. 다비가 기분 좋게 웃자, 재하가 예쁘게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형이나 나나 둘 다 텅 빌 때까지 하려고요. 내일은 룸서비스 시킬 거고, 밖으로는 안 나갈 거니까 지금 맛있는 거 많이 먹어둬요.”
“오냐. 먹고 힘낼게.”
다비와 재하는 마지막 후식까지 완벽하게 다 비우고 곧장 룸으로 향했다.
***
문이 닫히자마자 재하가 달려들었다. 이럴 거라고 예상한 다비가 곧장 손을 들어 달려드는 재하를 막아냈다.
“어허, 기다려.”
“형, 못 참겠어요.”
“씻자, 좀. 우리 아침부터 밖에 있었다고.”
“형은 안 씻어도 깨끗해요. 오전에도 씻었으면서….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급하니까 같이 씻어. 씻으면서 내가 빨아줄게. 어때?”
다비가 손을 동그랗게 말아 입 앞에 대고 앞뒤로 흔들어대며 재하에게 윙크했다. 경박하고 질 낮은 제스처임이 분명한데 다비가 하니까 섹시하게만 느껴졌다. 참으라는 건지 미쳐버리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재하는 숨을 터트리며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형은 그런 걸 해도 왜 멋있어요?”
“뭐래. …아니, 뭘 했다고 좆이 그렇게 터질 거같이 됐냐?”
“형이 빨아준다고 할 때부터요.”
“미치겠네. 징그러워야 하는데 귀여운 걸 보면 나도 미친 듯. 가자.”
다비 역시 옷을 훌훌 벗으며 욕실로 향했고, 언제나 그렇듯 재하는 다비의 옷가지를 하나씩 주워 정리하면서 뒤를 따랐다.
습하고 따뜻한 공기가 가득한 곳에서 바닥으로 쏟아지는 물소리와 함께 질척한 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재하는 물에 젖은 다비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 좋… 좋아해요.”
재하의 성기를 입에 가득 물고 있는 다비는 대답 대신 성기를 목 안으로 더 깊게 밀어 넣었다. 재하의 허벅지에 잔뜩 힘이 들어가며 잘게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다비는 이 순간이 즐겁다는 눈을 하고 즐기고 있었다. 재하는 손을 뻗어 다비의 머리통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시… 싫어요. 지금 사정…. 안 할래요.”
벌써 이러기를 여러 차례라 다비도 터지기 직전인 재하의 성기를 뱉어내며 미간을 구겼다. 싸지도 않을 거면서 자꾸 입에 처박는 건 어디서 배워온 못된 버릇인지 모르겠다.
“싸고 싶어서 아주 질질 흘려대는 주제에 뭘 버텨. 그냥 한 번 빼면 될걸.”
드디어 성기의 해방을 얻은 재하가 무릎 꿇고 있는 다비를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손을 뻗어 다비의 입구를 매만지며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은 여기에 전부 쏟아내고 싶어서요. 텅 빌 때까지….”
“정자 보존에 참 애쓴다. 위로 먹으나 아래로 먹으나 내 안에 싸는 건 똑같은데,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리네.”
“안 똑같은데요. 형은 아래로 먹을 때 좋아 죽잖아요.”
“하, 씨발. 여우 같은 새끼. 좋아. 다 씻었으니까 나가서 실컷 처먹여라.”
흥분하면 여전히 말이 거칠어지는 다비지만 얼굴은 벌써 터지기 직전이었다. 괴팍한 성격이 여전히 사랑스럽고 오싹거려 재하는 배시시 웃으며 다비를 번쩍 안아 침실로 향했다.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재하는 잔뜩 풀어진 다비의 입구에 곧바로 삽입하며 키스를 퍼부었다. 다비가 나른한 신음을 흘리며 재하를 받아들였다. 잔뜩 풀었음에도 버거울 정도로 큰 성기지만 그만큼 안이 꽉 들어차는 기분 좋은 감각에 저절로 팔에 소름이 돋으며 오싹거렸다.
“하, 진짜 좋아. 유재하 없으면 앞으로 어떻게 사나 싶을 정도라니까.”
“아읏…. 형.”
삽입만 하고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재하가 몸을 움츠리며 다비를 꽉 껴안고 끙끙거렸다. 안에서 꿈틀거리는 감각에 다비가 황당해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야, 설마 지금 넣자마자 싼 거야?”
처음 섹스했을 때도 이렇게 빠르진 않았는데 너무나 뜬금없이 보인 조루 현상에 다비의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욕실에서 벌써 몇 번의 사정 위기를 넘겼으니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다만 잔뜩 센 척하다가 이렇게 하찮아질 때 너무 귀여워서 웃겼던 건데 괜한 오해로 애가 기죽을까 봐 다비는 얼른 재하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아니야. 귀여워. 기죽지 마. 크흡. 미친…. 귀여워.”
“형이 나 없으면 어떻게 사냐는 말을 할 줄 몰라서 그랬어요. 그리고 그 말이 그렇게 자극적인 말일 줄은 방금 처음 알았네요. 기 안 죽어요. 금방 세울 수 있고, 형이 너무 좋아서 싼 거니까.”
“얼마나 날 좋아해야 넣자마자 쌀 수가 있냐. 진짜 신기하네. 전에도 펠라 처음 할 때 빨아주다가 싸버렸잖아. 그냥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되는 거야?”
다비가 자신을 귀여워해 주는 것도 좋아서 재하는 다비의 얼굴에 잔뜩 입 맞추며 진지하게 답했다.
“형은 형이 생각하는 거보다 더 야한 사람이고, 나는 형이 생각하는 거보다 형을 더 많이 사랑하거든요. 그래서 형이 날 보고만 있어도 세울 수 있고, 형이 혀를 내밀고 입술만 핥아도 쌀 수 있어요. 형이 저한테 싸라고 한마디만 해도 길에서 사정할 수 있을 만큼 형을 사랑해요.”
“아, 미친. 말하는 게 죄다 변태 같은 소리인데 예뻐 죽겠어. 씨발. 내가 단단히 홀렸지.”
“단단히 홀렸으면, 오늘 각오해요. 농담 아니고 진짜 둘 다 한 방울도 안 나올 때까지 할 거니까 지치지 말아요.”
재하는 순한 얼굴을 한 채 허리를 뭉근하게 돌리기 시작했다. 피식 웃던 다비도 금세 열기에 취해 재하가 주는 쾌락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새벽을 지나, 아침, 점심, 저녁까지 둘은 서로의 체력에 감탄하며 떨어질 줄 모르고 계속 붙어 있었다. 속궁합이 잘 맞고 체력이 받쳐준다는 것은 둘에게 큰 축복이었다.
***
재하가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다비는 팀원들과 중국에서 만나기로 했다. 다비를 따라 공항으로 배웅 나온 재하가 잔뜩 시무룩한 얼굴로 다비의 소매를 붙잡았다.
“형, 정말 안 가면 안 돼요?”
“왜 이러실까. 이번엔 오래 안 걸린다고 했잖아. 잠깐 나갔다가 들어오는 건데. 몇 달씩 촬영 가는 건 잘 참아놓고 이번엔 왜 이렇게 붙잡아?”
“그냥…. 기분이 좀 그래요.”
독일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붙어 있어서 그런지 재하는 어리광이 많이 늘었다. 아침부터 다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온갖 핑계를 대고 붙잡고 있는 재하 때문에 공항에서도 아슬아슬한 시간밖에 남지 않아서 다비는 마음이 급해졌다. 매몰차게 굴 수도 없고 계속 달래주었는데도 재하의 어리광이 계속되자 다비는 재하와 눈을 맞추고, 재하가 좋아하는 잘생긴 미소를 보여주었다.
“재하야, 뭐가 그렇게 불안해. 이번 중국 촬영만 끝나면 퇴사하고 독일로 가겠다고 했잖아. 게다가 이번엔 답사처럼 잠깐 가는 거라 추석 전에는 한국 들어올 거라니까. 길어야 2주인데 왜 이렇게 붙잡지? 이러면 형이 네 걱정으로 가득한 사진만 찍다 오게 되잖아요. 예쁜 얼굴로 보내주면 안 될까? 우리 재하 그거 잘하잖아. 응?”
“꿈이… 불길했어요. 이대로 형 보내면 안 될 거 같은 꿈이라서 그래요. 평소에 이런 꿈 잘 안 꾸는데 이상하게 기억에 남아서…. 차라리 추석 때까지 나하고 같이 있다가 다음 스케줄에 중국 가면 안 돼요?”
다음 촬영에 들어가면 반년은 중국 오지를 돌아다녀야 했다. 모든 면에서 꼼꼼한 성격이지만 사진은 더 완벽하고 꼼꼼하게 챙기는 다비라서 재하의 꿈 이야기가 핑계로만 들렸다.
“무슨 꿈이었는데?”
“말 안 할래요. 꿈 내용을 말하면 정말 그렇게 될 거 같아서 말 못 하겠어요.”
“그냥 붙잡고 싶으니까 아주 깜찍한 이유를 다 대네. 그래, 무서운 꿈 때문이었구나. 난 그런 거 잘 안 믿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 정 걱정되면 차라리 기도해. 잘 다녀오라고 말이야.”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다비가 떠나려고 하니 재하도 어쩔 수 없었다. 정말 꿈 때문이었지만 재하는 다비의 손을 잡고 마지막 당부를 했다.
“형. 무슨 일이 있어도 시계는 절대 빼지 말아줘요. 나 놀라게 해준다고 한국에 갑자기 들어오더라도 이번엔 정말 빼지 말아요. 네?”
“그래. 알았다. 나 이제 들어갈 건데 계속 울상 지을 거냐?”
다비가 걱정하는 건 싫으니까 보내주기로 한 이상 재하는 최대한 예쁘게 웃어 보였다. 다비도 그제야 편하게 미소 지으며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갔다 올게. 얌전히 추적 프로그램이나 보고 있어. 돌아오면 잘 기다린 만큼 상 줄 테니까.”
“네. 조심히 다녀와요. 정말 사랑해요, 형.”
스케줄 때문에 다비를 따라갈 수가 없어서 재하는 속이 타들어 갔다. 게이트로 들어가는 다비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재하도 공항을 빠져나갔다.
다비는 울상이었던 재하의 얼굴이 자꾸 눈에 밟혔다. 이번에 촬영 가는 곳은 지금 시기에 가야 예쁜 사진을 많이 건질 수 있고, 다비가 꼭 찍으러 가고 싶은 곳이라서 욕심이 좀 났었다. 금방 돌아올 거니까 괜찮겠지. 갔다 돌아오면 잔뜩 예뻐해 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재하의 울상이었던 얼굴을 잠시 지우기로 했다.
***
마지막 촬영 날까지 재하가 걱정하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의 오지 역시 다른 나라의 오지처럼 험준한 산행이었다. 차가 드나들 수 없는 산길은 위아래로 가파른 경사로 이루어졌고, 길이라고 해봤자 폭은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다행히 이번 촬영 팀원들은 이런 산길에 익숙한 베테랑들이라 암벽등반에 가까운 산행이 그렇게 문제 될 것들은 없었다.
험난한 길인 만큼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경관도 카메라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장관이었고 희귀한 종류의 동식물들도 많았다. 답사로 짧게 온 것치고는 꽤 건진 게 많은 일정이었다.
팀장인 제임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 오겠는데? 이제 그만 철수하는 게 좋겠어.」
다비를 비롯한 팀원 4명도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제임스의 말에 동의했다. 이런 오지에서 비는 굉장히 위험했다. 빗길에 발을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고 재수 없으면 산 위에서 흙더미가 무너져 내려오거나 낙석이 발생하는 일도 생겼다.
비가 내리기 전에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게 중요했기에 다들 촬영을 접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마지막 날까지 좋은 사진들을 많이 건져서 다들 만족한 상태였던 것도 빠른 철수에 도움이 됐다.
「다음 촬영 올 때는 더 안쪽으로 들어가도 괜찮겠어. 길이 좁긴 하지만 이 정도면 다닐 만한데?」
「데이비드가 활약했지. 희귀한 건 죄다 데이비드가 발견했잖아. 덕분에 우린 편하게 찍었고.」
「거기서 그걸 발견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데이비드가 갑자기 산으로 뛰어 들어갈 땐 오, 이 친구가 드디어 실성했구나, 했는데 그걸 발견했을 줄이야.」
2주간의 촬영 중 다비가 발견한 것은 희귀종으로 지정된 원숭이 서식지였다. 함께 따라간 생물학자는 등록되지 않은 새로운 서식지라며 발견한 다비에게 고마워했고 조만간 연구팀을 꾸려 관찰하기로 했다. 그리고 관찰할 때 다비의 팀 일부가 함께 합류해 촬영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뜻밖의 행운이 함께한 순간이라 벌써 며칠째 팀원들은 다비를 칭찬하고 있었다.
칭찬이 계속되는 분위기에 다비도 겸손을 포기하고 으스대기로 했다. 사실 이런 일이 자주 있어서 다비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길 때마다 각 팀에서 데려가고 싶어 하는 사진작가였다. 물론 성격도 좋고 사회생활 만렙인 것도 이유였지만, 지금은 그걸 으스댈 건 아니었다.
「나랑 같이 간 팀들은 다 그렇게 말하던데. 이쯤 되면 날 그냥 행운의 마스코트로 지정해줘도 될 듯.」
「토끼 발 같은 거?」
서구권에서 행운의 상징이라는 토끼 발은 말 그대로 토끼의 발을 똑 잘라서 그걸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장신구이자 부적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다비는 기분이 찜찜했다. 행운의 상징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토끼 발에 비교할 줄이야. 네잎클로버 같은 걸 생각했는데 토끼 발이라니, 심지어 자연 다큐멘터리를 찍는 팀에서 그런 소리를…. 괜히 제 발이 아픈 기분이었다.
그때 가이드가 팀을 향해 외쳤다.
「서둘러야겠어요! 하늘이….」
좁은 산길을 일렬로 나란히 걷던 팀원들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몰려드는 형상이 어째 심상치 않았다. 숙소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 해서 다들 잡담을 멈추고 걸음을 빨리했다.
중간쯤 왔을 때 우려했던 일이 생겼다. 비가 한두 방울 톡톡 떨어지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서 폭우가 되었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 땅이 점점 질어졌고, 진 땅은 미끄러워졌다. 걸음은 점점 느려졌고, 비는 더욱 거세졌다. 이럴수록 급하게 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팀원들은 모두 침착하게 좁은 길을 걸어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폭우 속에서 아무 말도 없이 앞만 보고 가려니 다비는 지루해졌다. 그래서 행복한 생각을 하며 지루한 길을 즐겁게 걷기로 했다. 다비의 행복한 생각은 당연히 재하였다.
공항에서 저를 붙잡고 가지 말라며 징징거리던 녀석을 떠올렸다. 역시 재하가 걱정이 많았던 거였다. 오늘은 촬영 마지막 날이고 꽤 좋은 사진들을 많이 건졌다. 자잘한 부상조차 없이 모두 건강하게 숙소로 돌아갈 정도로 지난 2주는 아주 무난하고 평온했다. 게다가 뜻밖의 행운까지 얻었으니, 이번 촬영은 정말 오길 잘한 일이었다.
불길한 꿈을 꾸었단 깜찍한 거짓말로 자신을 붙잡아두려던 노력은 생각할수록 귀여웠으니까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었다고 역시 그 꿈은 개꿈이었다며 며칠 동안 놀려대기로 다짐했다.
“보고 싶다.”
그때 산 위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팀원들 모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엄청난 속도로 흙더미가 무너져 내려오는 걸 확인했다.
「어! 조쉬!」
흙더미는 대열 끝에 있는 조쉬를 향해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조쉬는 당황해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아. 씨발.”
왜 하필 이 순간 제 소매를 붙잡고 울먹이던 재하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왜 자신의 발이 멋대로 조쉬에게 향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쓸데없이 착한 걸까. 재하가 걱정할 텐데.
다비는 조쉬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멍하니 있는 그를 붙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기고 팀원들 쪽으로 밀어냈다. 조쉬가 안전해졌다는 걸 확인하고 벗어나려는데 짙은 흙 내음과 엄청난 압박감, 통증, 암흑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재하 말을 들을걸….
그게 마지막 생각이었다.
***
‘형! 눈 감지 말아요. 제발.’
‘형! 나 보여요? 아니, 안 돼요. 눈 떠요. 형!’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았다. 다비는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원이었다면 차라리 현실감이 느껴졌을 텐데. 아니면 하다못해 폭우가 쏟아지던 그 산이었다면 나았을 텐데. 눈을 뜬 곳은 꽃이 가득한 들판이었다. 다비는 어이없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와. 나 죽었나 봐.”
오지를 탐험하며 사진을 찍는 동안, 촬영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죽는 것만큼 행복한 건 없을 거라 생각하며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공포를 뛰어넘을 만큼 하는 일이 너무나 좋았기에 위험한 순간을 겪을 때마다 오히려 즐겁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사진 촬영만큼 좋아하는 것이… 아니, 촬영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마지막을 맞게 될 줄은 몰랐다.
한때였지만, 모아와 달리 오컬트나 사후 세계에 관심이 많았던 적이 있었다. 모아는 그런 건 전부 허상이고 증명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눈으로 보니 알 수 있었다. 사진으로 찍어서 모아한테 보여주고 싶을 만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저승이라는 곳은 오색 빛이 찬란한 강이 있고,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손짓을 한다거나, 환한 빛이 가득한 공간을 넘나들거나, 형형색색의 꽃밭이 가득한 곳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이 본 것은 아름다운 꽃밭이었다. 꽃 사이로 보이는 바닥은 버석거리지만 반짝이는 모래였다. 물기 하나 없는 사막 같은 모래밭에 어울리지 않게 풍성한 꽃을 보고 있으니 정말 죽은 게 실감 났다.
“내가 죽었으면, 조쉬는 살았나? 개죽음이면 어떡하지?”
팀원 걱정을 하던 다비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이 와중에도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는 게 우스웠다. 살아남은 사람은 알아서 앞으로 인생을 살겠지만, 자신은 이걸로 끝이었다. 죽어서까지 착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이왕이면 조쉬는 살았으면 좋겠다. 조쉬에겐 사랑하는 부인이 있었고, 아이도 있었으니까 그 삶이 계속됐으면 좋겠다.
그래도 조금 슬펐다.
이번 촬영만 끝나면 재하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재하와 사귀고 난 후로 뭔가 잘해준 기억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불안해했고, 불안하게 만들기만 했었다. 가지 말라고 붙잡았을 때, 그냥 가지 말걸.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 녀석 가슴에 대못을 박아버렸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소식을 들은 녀석은 아마도 묶어서라도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며 평생을 자신을 원망하고 후회하면서 보낼 터였다. 죽은 건 괜찮은데, 그 녀석이 울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자 그건 속이 많이 아팠다. 이런 것 때문에 다들 맘 편히 죽지 못하고 귀신이 되는 모양이었다.
“우리 재하 어떡하지. 그놈은 나밖에 없는 녀석인데….”
재하를 떠올리자 눈물이 펑펑 흘렀다. 눈물이 꽃망울이 되어 바닥으로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 끝도 없는 꽃밭을 만들 만큼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울고 저승으로 떠났을 거라 생각하자, 서러움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기엔 너무 어렸다. 다비는 바닥에 엎드려 꽃을 펑펑 쏟아냈다.
하늘에서 투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꽃망울이 활짝 피어나기 시작했다.
‘형, 좋아해요.’
떨어지는 빗방울이 다비를 적시고 감싸며 속삭였다.
‘형, 사랑해요.’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가 다비에게 간절하게 부딪쳤다.
‘그러니까 다시 나한테 돌아와요.’
엎드려 있던 다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눈부시게 환한 빛이 다비를 비추고 있었다. 쏟아지는 재하의 사랑 고백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직은 저승이 아니었나 보다. 여긴 재하가 심어놓은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서럽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포근해졌다.
“돌아가야겠다. 재하에게….”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랑스러운 개 같은 내 재하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다비는 빛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재하는 병실 침대에 누워서 자신을 멍하게 바라보는 다비와 눈을 맞췄다.
지금까지 몇 번, 의식이 없는 상태로 다비가 눈을 뜬 일이 있었다. 오늘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늘은 제대로 의식이 돌아오는 게 아닐까, 하고 기대하게 됐다. 깨어나자마자 울어버리면 저번처럼 다시 눈을 감아버릴 것 같아서 재하는 다비의 손을 슬며시 쥐며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일어났어요? 몸은 어때요? 어…. 부모님은 지금 식사하러 가셨어요. 제가 잠깐 자리 지키고 있었어요. 의사 선생님 부를게요. 잠깐만요. 눈 감으면 안 돼요.”
듣기 좋은 목소리가 한없이 편안해서 다비는 조금 서운해졌다. 눈을 뜨자마자 저한테 안겨서 엉엉 울어야 유재하인데, 생각보다 많이 놀라거나 울먹이는 거 없이 침착하게 대응하는 모습이 아쉬웠다. 참으로 못됐다. 일어나자마자 재하가 우는 모습이 보고 싶어 짓궂은 생각부터 드는 걸 보면 말이다.
“너, 누… 구….”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한 번쯤 생각해봤던 장난이었다. 태어나고 자라기를 워낙 튼튼함으로 무장했더니 기절할 일이 하도 없어서 생각만 해봤는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써먹나 싶어 딱 한 마디 건넸을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침착하게 미소를 보이던 재하가 그 한마디에 잔뜩 심각해지는 걸 보고 곧바로 후회가 들었다. 다비는 얼른 재하의 손을 맞잡고 입을 열었다.
“아니. 나 진짜 괜….”
“기억 안 나요? 우리 연인인데. 내가 형 남자친구예요. 양가 부모님 허락받고, 결혼 앞두고 있었는데, 형이 중국에 촬영 갔다가 사고가 났어요. 아. 반지는 몸이 붓기 전에 미리 뺐어요. 제가 가지고 있고요. 여기.”
재하가 주머니에서 다비의 반지를 꺼내서 보여주며 연인 사이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다비는 반지를 멍하니 보다가 의아한 설명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가 양가 허락을 받았어? 언제?”
의식이 없는 동안 추석이 지났던 건가? 아니면 재하가 여기서 부모님과 벌써 이야기를 끝낸 건가? 눈을 뜨자마자 재하가 부모님이 식사하러 갔다고 말했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병원에 같이 있어야 하니까 미리 말을 했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뜻밖의 말이 재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사귀자마자 곧바로 허락받았잖아요. 그러니까 형 스무 살 때요. 지금 형은 스물일곱이고요.”
“…뭐?”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태연하게 내뱉는 거짓말이, 정말 기억을 잃었다면 재하의 말을 그대로 믿었을 뻔할 정도로 진지했다. 기억조작이라도 할 셈인지 재하가 배시시 미소 지으며 거짓 속의 기억을 회상했다.
“우리 진짜 행복했는데…. 형도 나도 서로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라면서 좋아했거든요. 형 인기 엄청 많았다고 들었는데, 연애도 사랑도 전부 내가 처음이라고 해줘서 진짜 기뻤어요. 형이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내가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과거의 일을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어요.”
재하의 거짓말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놈과의 연애를 지워주려는 재하의 마음이 너무 예뻤다. 이런다고 지워질 과거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재하가 서로의 첫사랑이라고 정의해줬으니 그렇게 살고 싶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서로가 마음을 주고받는 연애라는 건 이게 처음이었다. 이 와중에도 저밖에 모르는 녀석 덕에 다비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후드득 쏟아냈다. 조금 전까지 태연하게 기억조작을 시도하던 재하가 화들짝 놀라며 다비를 살폈다.
“아, 아파요? 아파서 그러는 거예요?”
“…해.”
“네? 형 못 들었어요. 미안해요. 다시 말해줘요.”
“사랑해.”
“…아. …읏.”
다비가 자기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혼란스러운데, 울면서 한다는 말이 거짓말을 의심하는 말이 아니라 올곧은 사랑 고백이자 재하도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며 다비를 꼭 끌어안았다.
“나도 형 사랑해요. 형 없으면 저 죽어요. 그러니까 만수무강하고 무병장수하란 말이에요. 착하게 살지 말고…. 제발.”
“천성이 그런 걸… 아니. 아니다. 응. 네 말 들을게. 네 말이 정답이야.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재하는 다비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같이 울어주었다. 다비가 기억상실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새로운 추억들을 많이 만들면 되니까, 기억을 잃어도 상관없었다. 다비가 깨어났다는 게 지금은 가장 중요했다. 살아서 저에게 안겨 흘리는 눈물이 반가웠다.
다비의 울음이 그치자 재하는 의료진을 불렀고 이어서 다비의 부모님을 불렀다.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 재하는 다비의 손을 놓지 않고, 다비가 다시 잠들지 않도록 계속 말을 걸었다.
“형 팀원은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조쉬라는 사람이 계속 고마워하다가 갔고요.”
“살았구나. 다행이네.”
“앞으로는 무모한 짓 하지 말아요. 시계 아니었으면 그 오지에서 며칠을…. 있어야 했을지 모른다고요.”
“아, 시계로 찾아낸 거구나.”
이전까지는 단순히 스토킹 용도로 사용됐던 시계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한 셈이었다. 다비의 신체에 이상 징후가 뜨자마자 곧바로 수색팀이 꾸려졌다. 중국의 협조로 수색은 빠르게 이뤄졌고 다비와 팀원들을 찾아내 구조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다비가 위험했을 거란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 있으니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형이 무사하니까 됐어요.”
“응. 그럼 우리 부모님은 중국으로 오신 거야? 율리도 온 건가?”
“여기 한국인데요? 이왕 입원하는 거 한국에서 지내야 여러모로 편하니까 이쪽으로 옮겼어요.”
“오늘 며칠이야?”
“그날부터 2주 만에 의식 돌아온 거예요. 형 부모님도 서울로 올라오신 지 2주 됐어요.”
중국에서 한국까지 옮겨졌다는데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의식이 없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뒤늦게 시야에 발목을 감싼 깁스가 보였다. 흙더미에 깔린 것치고는 큰 부상이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부터 들었다. 다비의 시선이 깁스에 고정되어 있자, 재하가 설명해주었다.
“근육이나 신경이 손상된 건 아니래요. 뼈도 깔끔하게 똑 부러져서 잘 붙을 거라고 했어요. 재활만 잘하면 예전하고 거의 같을 거라고.”
“아. 다행이다.”
“다리보다 의식이 안 돌아와서 큰일이었죠. 그래도 다시 돌아와서 기뻐요.”
지난 2주 동안 다비는 여러 번 고비를 넘겼다. 눈을 떴다가 다시 의식을 잃는 게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오늘도 그런 하루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다비가 정신을 차렸다. 의식 없는 다비를 지켜보던 일이 떠올라서 재하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지금도 어딘가 퀭한 얼굴이어서 마음고생이 심했겠다 싶었지만, 거기에 한층 더 우울한 얼굴이 되자 다비가 미안한 얼굴로 재하의 뺨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걱정 많이 했지?”
“다리가 똑 부러지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어요. 부러져도 내 손으로 부러트릴 생각이었는데….”
“이 새끼가 은근슬쩍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네.”
“그러니까 앞으로 다치지 말아요.”
재하는 뺨을 힘없이 쓰다듬는 손을 꽉 붙잡고 거기에 뺨을 비비고 입 맞추었다. 오랜만의 접촉에 다비는 손바닥을 움츠리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분위기가 아닌데 눈치 없이 재하와 입 맞추고 싶었다. 재하와 입을 맞춰야만 살아 있다는 게 실감 날 것 같았다.
“키스해줘.”
재하가 곧장 다비에게 가까이 붙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서로의 입술에 다다를 때쯤,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다비야!”
“내 새끼!”
다비의 부모가 병실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재하는 얼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다비의 부모를 위해 물러나 주었다. 다비의 아빠가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며 머쓱하게 웃는 다비를 보며 울음을 터트렸다. 다비가 머쓱해하며 얼른 아빠를 달랬다.
“왜 울어. 아들 완전 튼튼한데….”
“고맙다. 다비야, 고마워.”
다비의 부모는 그저 고맙다는 말만 반복하며 다비의 손을 붙잡아주었다. 그 이상의 말을 하면 아들이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의료진이 이어서 들어오고 다비는 곧바로 검사에 들어갔다. 부러진 다리를 제외한, 흙더미에 깔리면서 입은 찰과상은 누워 있는 동안 회복되었고, 그 외의 것들은 정밀 검사로 이미 이상이 없음이 확인된 상태였다. 2주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있던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상태가 양호했다.
정말 튼튼한 몸이었다. 자리에 앉을 수 있을 만큼 다비의 상태가 나아진 것을 확인하자 재하는 눈치껏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라며 식당에서 밥 먹고 오겠다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다비의 엄마는 재하가 나가는 걸 배웅하고 돌아와서 다비의 손을 잡아주었다.
“너 의식 없는 동안, 재하가 계속 곁에 있었어. 유 회장님께서 네가 구조되자마자 곧바로 한국으로 올 수 있게 손써주셨어. 여기로 넘어올 때도 제일 좋은 병원으로 잡아주고. 친하게 지낸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실 줄은 몰랐는데 정말 좋은 분들이셔.”
“그냥 친한 거 아닌데.”
“그럼?”
다비는 침대 모서리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모아가 없는데 괜찮을까. 이렇게 갑자기 말해도 되는 걸까. 재하가 오면 말을 할까. 재하는 뭐라고 말을 해둔 걸까. 엄마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직은 제대로 이야기한 것 같지 않은데, 지금 말할 타이밍이 맞는 건가.
조금 머리를 굴렸다고 골이 지끈거렸다. 다비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은 부모님의 보석이다. 그러니 부모님은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주실 분들이었다.
“내가… 내가 재하를 많이 좋아해. 허락해준다면 스웨덴에서 재하하고 결혼하고 싶어. 우리 가족들이 축하해주는 분위기였으면 좋겠어.”
다비의 말에 부모는 침묵했다.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다비는 죄인처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잘못한 게 없으니 조금 더 당당해야 하는 걸 알고 있지만, 부모님이 받을 상처 앞에서 미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축하해달라고 말하진 않을게요. 그렇지만 사귀는 거로 뭐라 하진 말아주세요. 이것 역시 제 선택이고, 무엇보다 재하가 있어서 지금 너무 행복하거든요.”
평소에 안 쓰던 존댓말까지 써가며 내뱉는 진심에 엄마가 먼저 다비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들을 잃을 뻔한 부부에게 다비의 고백은 심각한 게 아니었다. 재하가 다비의 곁에 있는 동안 보여주었던 정성을 이미 눈으로 확인했다. 둘의 관계가 일반적인 형, 동생은 아니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오히려 다비의 말로 인해 안심됐다.
“우린 항상 너희들의 결정이 우선이었단다. 네가 좋다고 하는 사람을 우리가 반대하진 않아. 너와 모아의 결정을 우린 언제나 지지하고 있어. 우리가 너희의 부모가 되었을 때부터 나눴던 이야기야. 우린 너희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주자고 말이야.”
“그래. 네 엄마 말대로 우린 언제나 너희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삼아. 네가 행복해지고 싶다는데 우리가 반대할 수 없지. 아프지 말고 건강하면 돼.”
부모의 말에 다비는 코끝이 찡해졌다. 부모님이 꽉 막힌 분들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자식의 일은 다른 법이라 내심 걱정했었다. 아마 쉽게 받아들이시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자식이 상처받는 것보다는 응원해주는 걸 택할 분들이니까 이렇게 받아들여주는 거라 생각했다. 다비는 웃으며 양팔을 벌리고 부모님을 품에 안았다.
“꼭 행복할게요.”
다비의 부모에겐 더할 나위 없는 다짐이었다.
재하가 식사를 끝내고 병실로 들어왔다. 2주를 다비의 부모님과 함께 지내면서 친해졌는지 두 분 모두 재하라고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다비가 언제 깰지 알 수 없어서 세 명이 병실에서 합숙하며 다비의 곁을 지켰단다. 특실이고 보호자 침구와 침실이 따로 있다고 하지만, 혈연관계가 없는 재하가 여기서 버티고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들어보니 재하가 죽을상을 하고 다비 곁에 자신이 있어야 한다며 부모님께 사정해서 남게 되었단다. 부모님이 쉽게 허락해줄 정도로 의식이 없을 때 재하가 자신에게 얼마나 열정적으로 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저녁에 보호자 침대에서 잘 수 있게 된 재하가 감격에 겨워하며 다비의 부모에게 고마워했다.
“아, 아버님. 어머님. 제가 여기서 자도 괜찮은 건가요? 형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함께 주무시지 않고요?”
다비의 아빠가 조금은 어색해하며 웃음을 보였다. 재하가 싫은 건 아니지만 아직 낯설어서 저절로 나오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이장으로 있는 오지도와 협업하고 있는 대기업인 Y·F그룹 회장의 아들이었다. 어렵고, 고맙고, 낯설고. 복잡함이 표정에 드러났지만, 재하가 싫은 건 아니었다. 지난 2주간 다비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걱정하던 그 모습을 직접 보았으니 싫어할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다비가 깨어나길 바랐는데, 다비가 일어났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나눠야지. 독일로 가는 것도 미루고 계속 곁에 있었잖아.”
“고맙습니다. 그럼 침실에서 편히 쉬세요. 제가 오늘은 형 옆에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두 분 다 계속 못 주무셨잖아요.”
다비는 자신의 부모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재하를 보며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저 모습을 아들이 애교가 없다고 서운해하던 유 회장님이 봤어야 하는 건데. 곁에서 보고 있는데도 낯간지러울 정도로 애교를 떠는 모습이 귀엽고 예뻐서 저한테만 했으면 좋겠단 생각에 다비는 서둘러 재하를 불러들이기로 했다.
“엄마, 아빠. 주무세요. 재하는 이리 오고. 네가 그러고 있으니까 울 엄마 아빠가 쉬러 못 가시잖냐.”
“아, 그런 거예요? 어서 주무세요. 제가 너무 붙잡았네요. 푹 쉬세요.”
재하의 배웅으로 부모님은 거실 옆 보호자 방으로 들어갔다. 재하는 다비의 침대 옆 푹신한 보호자 침대를 흘끗 보다가 테이블 의자를 끌고 와 다비의 곁에 냉큼 앉았다. 다시 둘만 남자 재하가 흐물흐물한 표정으로 예쁘게 미소 지으며 다비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링거 바늘이 꽂힌 손등의 테이프를 물끄러미 보던 재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형, 정말 몸 괜찮아요?”
“응. 정말 괜찮아. 다 나아봐야 알겠지만 일단 씻고 먹고 하는 데 전혀 문제없었잖아.”
“여기서 푹 쉬어요. 어차피 우리 아버지가 병원비 다 내줄 텐데요.”
“내가 아픈데 그걸 왜 너희 집에서 내. 우리 집 돈 없는 집 아니라니까. 우리 아빠도 양식으로 돈 많이 벌고… 엄마랑 모아도 돈 잘 벌거든. 나도 잘 벌고.”
“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에요. 형이 우리 집안 예비 사위니까 신경 쓰는 거잖아요.”
“아, 뭐라냐. 예비 사위라니…. 낯간지럽게.”
호칭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건지 다비의 뺨이 발그스름해졌다. 오랜만에 보는 다비의 부끄러워하는 얼굴이라 재하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에 앉아 있는 다비에게로 몸을 향했다.
“익숙해져야죠. 우리 스웨덴에서 결혼할 거잖아요. 양가 허락도 받았고 형만 건강해지면 곧바로….”
“뽀뽀하고 싶다, 재하야.”
다비의 말에 재하가 홀린 듯 다비에게 가까이 다가가 입술에 살짝 입 맞추고 떨어졌다. 아쉬운 건 저뿐이 아닌지 다비가 물끄러미 재하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하가 예쁘게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뽀뽀만요?”
“아니.”
재하는 다시 다비의 입술을 가볍게 물며 입을 맞췄다. 혀를 내밀어 다비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밀어 넣고 안쪽을 훑고 빨고 문질러댔다. 다비가 제 품을 떠나고 난 이후로 내내 그리워했던 입맞춤이었다. 어쩌면 영영 하지 못할 뻔했다. 자신의 혀를 물고 쪽쪽 빨아대는 다비가 고마워서 재하는 저도 모르게 코를 훌쩍였다. 다비가 미간을 찌푸리며 재하의 혀를 뱉어냈다.
“깨어나자마자 씻었는데, 그렇게 키스하는 게 싫으냐?”
“아니요? 흡…. 그게 아니라….”
너무 좋아서, 형이 다시 깨어나서 저를 향해 사랑을 말하는 게 좋아서 우는 거라고 해야 하는데 눈치 없는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 잘 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도 자신의 식구들이 알면 경악하며 부인할 이야기였다. 다비의 모든 행동이 저를 웃게 하고 울게 했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펑펑 흐르자 재하는 손바닥으로 제 눈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형, 사랑해요.”
저 모습이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다비의 하반신이 움찔거렸다. 변탠가? 거실 건너편에 부모님이 계신다는 걸 알면서도 꼴리는 걸 보면 답도 없는 상변태가 틀림없었다. 다비는 재하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토닥였다.
“잡아먹기 전에 그만 울어. 여기서 너랑 섹스하면 우리 부모님 뒷목 잡고 쓰러지신다. 내가 아무리 막 나가도 부모님 앞에서는 차마 못 하겠거든. 참을 수 있게 좀 도와주지?”
“흑. 전 이미 섰는데요.”
“진짜…. 너도 나만큼 답 없는 새끼야. 둘 다 참자. 다시 뽀뽀해줄게. 이리 와.”
둘은 그동안 못했던 키스를 오늘 다 채울 생각인지 한참을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
다비가 의식을 찾았단 소리에 병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다비를 보러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훈과 리온, 지수와 모아가 다녀갔고 다비의 동료들이 먼 한국까지 찾아왔다. 조쉬는 다비가 눈을 떴단 소식에 가장 먼저 미국에서 날아와 한참을 울고 감사를 표했다.
조쉬가 사고의 순간을 설명해주었다. 자신을 안전한 쪽으로 잡아당기고 다비가 자신 대신 흙더미에 휩쓸려 파묻혔을 때, 다른 팀원들이 달려와서 다비를 붙잡아 주었단다. 그래서 가까스로 벼랑으로 떨어지는 사고까진 일어나지 않았지만, 흙더미에 섞인 돌과 나무 조각들로 인해 다비는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 어디가 어떻게 골절이 됐는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비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 다들 애를 먹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오래지 않아 다비를 구조하기 위해 사람들이 왔다고 했다.
조쉬는 설명하면서 다시 울었고 다비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며 평생을 모시겠다고 맹세했다. 그 말을 들은 재하는 당신이 재빠르게 행동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속으로 부글거렸으나 겉으로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다비가 둘 다 살았으니 된 거 아니냐는 속 편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재하는 결국 조쉬를 쫓아냈고, 다비에게 매달려 엉엉 우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비의 사고로 인해서 계획했던 많은 것들이 변경되었다. 예정대로라면 중국에서 1차 촬영을 끝마치고 재하와 함께 있다가 추석에 모아와 만나 셋이 함께 오지도로 내려가 재하와 사귀는 것을 알리는 게 첫 번째 계획이었다.
하지만 추석도 병원에서 보냈고, 부상으로 촬영에 합류하는 것도 그만두게 되었다. 마지막 촬영을 그만둔 김에 퇴사하기로 마음먹었고, 다비는 백수가 되었다.
게다가 병실에서 이미 부모님이 둘의 사이를 알고 허락하게 되면서 모아의 지원이 필요 없어졌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나면 양가 어른들과 함께 상견례 겸 식사를 하며 스웨덴에서 결혼할 생각이라고 발표하려 했지만, 이 역시 어긋나버렸다.
분위기 좋은 식당을 예약하고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려 했던 것은 다비의 입원으로 병실에서 이루어지고 말았다.
다비의 부모보다 먼저 다비와 재하가 사귄다는 걸 알게 된 재하의 부모가 다비가 눈을 떴단 소식에 병실로 찾아왔다. 다비가 의식 없이 한국에 도착해서 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미 재하와 다비의 부모가 만난 적이 있었으나, 그때는 다비의 부모가 둘의 사이를 짐작하지 못할 때여서 그저 좋은 병원을 잡아줘서 고맙단 이야기만 오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졸지에 병실에서 상견례를 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한국 병원 중 가장 시설이 좋은 특실이고 그에 걸맞게 인테리어도 좋았지만, 병원에서 상견례는 정말이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재하의 아버지인 유 회장이 먼저 다비의 부모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상견례가 시작되었다.
“우리 재하가 다비를 많이 좋아합니다. 어려서부터 한결같이 좋아했습니다. 제게는 너무나 자랑스러운 아이지만, 사돈께서 성에 안 차실까 걱정입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사돈이라는 말에 다비의 부모가 펄쩍 뛰며 어려워했다. 상대가 누구인가. 한국 경제를 이끌어가는 기업 중 최고라 일컫는 Y·F그룹의 총수였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그 그룹의 총수가 섬마을의 이장에게 고개를 숙이며 자식을 예뻐해 달라고 부탁한다는 걸 상상하지 못해서 나오는 반응이었다.
둘이 사귄다는 걸 알았을 때 부부는 대기업과 연을 맺는 걸 걱정했었다. 다비가 힘든 길을 걷게 된 것 같아 부모로서 든든하게 뒤에서 응원해주자고 매일 다짐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다비를 예뻐해 주고 있었다.
이장은 유 회장과 이미 안면이 있었다. 오지도가 Y·F그룹의 지원을 받으면서 사업상 알게 됐고, 상생 프로젝트 역시 유 회장이 직접 총괄해서 사업 초반에 훈과 함께 자주 만났었다. 사업적으로 만났을 때 유 회장은 매우 어려운 사람이었다. 직위를 떠나 매우 빈틈없고 꼼꼼한 성격인 데다가 초대 회장인 유수한 회장의 아들답게 카리스마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은 부모 대 부모로 만나는 자리라서 그런지 조금 더 인간적인 분위기라 마음이 약간 편안해졌다.
이장은 맞절하듯 함께 고개를 숙이며 유 회장의 말에 답했다.
“다비가 의식이 없는 동안 재하가 지극정성으로 다비 곁을 지켰습니다. 그 마음 하나만 봐도 너무 예뻐서 좋은 생각만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사귄다고 했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가 재하의 노력 때문이었는걸요. 오히려 저희가 고마워해야 합니다.”
부모들은 서로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나 위치 같은 것을 전부 내려놓고 그저 한 아이의 부모로서 이 자리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같은 성별이라는 큰 장벽 같은 건 문제가 전혀 없다는 듯 가볍게 흘려 넘기면서 말이다.
오지도의 이장이자 다비의 아빠인 김두만 씨는 아들이 게이라는 건 이번에 알았지만, 게이나 동성 커플을 처음 보는 게 아니었다. 오지도에서 태어나 20년, 일본에서 10년, 스웨덴에서 10년 그리고 다시 오지도에서 17년을 살며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었다. 그 인연 중에는 게이 친구도 있었고, 동성 커플의 결혼식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다비의 엄마인 안나 역시 열린 마인드의 소유자라 다비의 결정을 쉽게 받아들였다.
유 회장 부부 또한 동성 커플에 대해 어느 정도 면역이 있는 상황이었다. 밑으로 네 명의 동생이 있는데 그중 세 명이 동성 커플이었다. 재하마저 같은 성별을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충격을 받긴 했지만, 금방 이해하려고 했던 것도 동생들이 짝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걸 지켜보았던 덕분이었다. 때문에 재하의 부모는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게다가 상대가 다비였다.
재하가 부디 친하게 지내길 바랐던 오지도의 착한 아이를 좋아한다는 말에 부부는 더 빨리 재하를 응원해줄 수 있었다. 상대가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단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을 만큼 부부는 다비를 알게 된 순간부터 다비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니 양가 어른들의 입에서는 좋은 말만 나오고 있었다.
재하는 흐뭇해하며 부모님의 낯간지러운 칭찬을 듣고 있었고, 다비는 도저히 맨정신으로 들을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던 고난과 역경의 분위기는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병실 상견례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라 이 병실에 있는 사람 중 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다비뿐이었다. 다비만 부끄러워 손을 말아 쥐고 고개를 들지 못했고 다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유 회장은 재하의 엄마인 지연우 여사의 손을 잡고 다비의 부모를 보며 말했다.
“다비가 퇴원하고 나면 사돈께서도 오지도로 내려가실 테고, 그러면 다시 만나기도 어려우니까 이렇게 자리가 만들어졌을 때 바로 결혼 이야기까지 전부 나누고 싶은데, 사돈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혼 날짜 이야기까지 나오자 다비가 고개를 들어 당황스러운 눈으로 재하를 마주 보았다. 브레이크 없이 저돌적인 재하의 성격의 출처가 어딘지 너무나 쉽게 알게 되어버렸다.
만나자마자 자식 칭찬이 오가더니, 곧바로 결혼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상견례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상견례가 되어버렸다. 재하와 결혼하는 게 싫어서 당황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까 고민한 쪽이었다. 그 과정이 험난한 가시밭길이 될 거라 생각했고, 그렇게 되면 서로 사랑으로 버티며 그 힘든 길을 걸어보자고 재하에게 힘을 줄 생각이었는데, 웬걸. 잘 뚫린 고속도로이다 못해 아우토반이었다.
이렇게 아무 문제 없이 술술 진행돼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막힘없었다. 아직 이장 부부가 대답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부모님이 이걸 반대하실 분들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다비를 존중해주는 분들이라 결혼 이야기가 나오면 적극적으로 나설 분들이었다. 역시나 부모님은 생각한 그대로 반응을 보이셨다.
“다비가 스웨덴 국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스웨덴에서 제대로 식을 올리고 결혼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야 법적으로 어렵다지만 스웨덴에서는 동성 결혼이 이상한 게 아니니까요. 아이들의 결혼을 온전히 받아들여 주는 나라에서 하고 싶습니다.”
스웨덴에서 결혼하고 싶다고 말은 꺼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부모님이 나설 줄 몰랐다. 막연히 생각하던 것들이 현실로 하나씩 이뤄지는 걸 눈으로 지켜보니 다비는 코끝이 찡해지고 있었다.
부모님들께 감사했고, 어려운 길을 쉬운 길로 바꿔준 재하의 진심이 고마웠다. 그놈과 사귀었을 때는 게이라는 사실이 죄처럼 느껴지고 흠인 것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축복이었다. 게이였기 때문에 재하를 피할 수밖에 없었는데, 게이라서 재하와 결혼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이 상황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울먹이는 다비를 보던 재하는 참지 못하고 부모님 옆에서 벌떡 일어나 곧장 다비의 곁으로 가서 다비를 안아주었다. 의젓하게 있고 싶었지만 다비가 우는 걸 보면서까지 의젓하게 있고 싶지 않았다. 다비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형, 기뻐서 그런 거면 울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조금이라도 나쁜 생각이 들어서 우는 거라면 울지 말고 웃어줘요. 좋은 날인데 나쁜 생각 하며 우는 건 너무 아깝잖아. 귀한 김다비 눈물인데….”
“흐즈므르. 쯕플르느끄.”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낭만적인 말투에 눈물이 쏙 들어간 다비가 이 상황을 부끄러워하며 이를 악물고 재하에게 소곤거렸다. 그냥 찡했을 뿐이었는데 울지 말라며 다독여서 졸지에 결혼 허락을 받아 감격에 겨워 우는 거로 오해받게 되어버렸다. 그게 부끄러워서 다비의 얼굴과 목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팔불출이 따로 없는 재하가 그걸 보며 배시시 미소 짓더니 양가 어른들 앞에서 속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우리 형, 꽃 같아졌다. 온통 새빨갛게 됐어요.”
때와 장소를 분간하지 못하고 나오는 재하의 부끄러운 말에 다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른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상황을 부모님들이 흐뭇하게 보고 있는 게 정말 쪽팔렸다.
유 회장 부부는 아들의 다정하고 말랑한 모습을 처음 보는지 놀란 눈으로 기념사진까지 찍고 있었다. 다비는 이런 분위기에 도무지 적응하기 어려웠다. 혼자만 동방 예의를 찾고 있을 만큼 보수적이었고, 저만 빼고 다들 개방적인 분위기라 견딜 수 없었다.
재하가 떨어질 생각이 없자 흐뭇해하며 보고 있던 어른들은 둘을 내버려 두고 결혼식 날짜를 정하고 있었다. 좋은 날을 받아서 하면 좋겠지만, 어차피 외국에서 하니까 한국 미신을 굳이 따르지 않아도 될 것 같다며, 양가 가족들이 맞출 수 있는 날짜로 받자는 이야기로 결혼 이야기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나가서 식사라도 하자며 부모끼리 의기투합이 되어 밖으로 나가는 걸 배웅하고 재하와 다비가 병실에 남았다. 다비는 폭풍 같은 상견례를 끝마치고 기가 쪽 빨린 얼굴로 재하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 누웠다. 재하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헤실거렸다.
“다 끝났네요. 고생했어요, 형. 이제 정말 형하고 결혼하는 일만 남았나 봐.”
“너무 쉬워서 이상할 지경인데…. 정신이 하나도 없다.”
“쉽다뇨. 형의 마음을 얻는 데 몇 년이 걸렸는데 쉽단 이야기를 해요.”
재하가 서운한 듯 다비의 손을 잡고 이마를 비비며 한껏 투정 부렸다. 재하에겐 오랜 기간이 있었다는 걸 깨닫고 다비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미안…. 너희 부모님도 알고 계셨지. 네가 힘들었을 거란 생각을 못 했어. 지켜보고 계셨던 부모님도 같이 힘드셨을 텐데 난 내 생각만 했네.”
“괜찮아요. 이제 정말 법적으로 형하고 이어질 수 있게 됐으니까, 지난 시절은 전부 꽃길이 됐어요.”
“예쁘게도 말하네. 이리 와.”
다비는 재하를 가까이 불러 입술에 입을 맞춰주었다. 가벼운 입맞춤이 키스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부모님도 안 계시고, 몸도 많이 좋아져서 퇴원을 앞둔 상황이라 몸이 불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다비가 손을 뻗어 재하의 바지 앞섶을 매만졌다. 다비의 혀를 물고 빨다가 움찔한 재하가 혀를 뽑을 것처럼 빨며 신음을 흘렸다. 재하의 반응에 다비가 눈웃음을 지으며 부풀어 오르는 성기의 윤곽을 따라 손에 힘을 주었다.
“할까?”
“아, 안 돼요.”
“안 돼? 진짜?”
“부, 부모님들 언제 오실지 모르고…. 오, 오랜만에 하는 건데 번갯불에 콩 볶듯이 후다닥 끝내고 싶지 않아요.”
“헐. 진짜 참을 거냐?”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변태인가 보다. 자신과 하고 싶다고 덤비는 유재하도 꼴리고, 참겠다고 글썽거리는 유재하도 꼴리는 걸 보면 말이다. 다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음흉하게 굴어댔다.
“네 좆이 터질 거 같아. 조금만 만져줘도 질질 쌀 거 같은데. 진짜 안 돼?”
“흡. 형…. 자꾸 유혹하면 형 죽어요. 겨우 회복됐는데, 저 때문에 퇴원 늦어지는 거 싫단 말이에요.”
“하, 씨발. 우는 것도 존나 꼴리네. 더 울어봐. 너 우는 거 보면서 자위할래.”
다비가 재하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혀로 핥아대자, 재하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침대 위로 올라와 곧장 하반신을 맞붙이고 은근하게 비벼댔다. 한숨을 낮게 내쉬더니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하고 다른 손으로 옷을 끌어 내려 성기를 맞붙였다.
“오랜만이라서 금방 쌀 거예요. 빨리 끝낼게요.”
“나도 오래는 못 버틸 것 같아.”
“형은 가만히 있어요. 내가 움직일 테니까.”
재하는 큰 손으로 조금 세게 움켜쥐고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미 흥분한 상태였던 둘은 강한 자극에 금세 쿠퍼액을 흘리기 시작했다. 질척한 소리와 감촉에 다비와 재하가 동시에 숨을 터트렸다.
“하, 네 손 커서 진짜 좋아. 조금만 더 꽉 쥐어봐.”
“형, 허리 움직이지 말아요. 환자가 이렇게 야하면 어떡해요.”
“몸이 멋대로 들썩거리는 걸 어쩌라고. 읏, 못 참겠다.”
다비는 재하의 손을 맞잡고 빠르게 움직였다. 손아귀 힘에 압박이 느껴지자, 지탱하던 재하의 팔에 힘이 풀렸다. 다비의 몸에 부딪히기 전에 팔을 굽힌 채로 버티고, 다비에게 입을 맞췄다.
입 안을 훑고 빨아대며, 손을 분주히 놀리자 어느 순간 다비가 재하의 혀를 빨아대며 신음을 흘려댔다. 재하는 병실 밖으로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다비의 입을 제 입으로 꽉 틀어막았다. 호흡이 가빠지며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게 되자, 다비는 점점 몽롱해지며 주어진 쾌락에 충실해졌다.
다비가 곧 사정할 것처럼 몸을 파닥거리자, 재하는 손을 더 분주히 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바짝 붙은 상태로 절정에 도달했다.
병실은 가쁜 숨소리와 쪽쪽대는 소리만 가득했다. 재하는 오랜만에 다비와 접촉하는 거라 사실 부족했지만, 환자한테 이 이상 했다가는 정말 큰일 날 것 같아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나머진 퇴원하고 해요. 알았죠?”
“응. 그러자. 막상 해보니까 병원이라 그런지 스릴 있다기보다는 좀 불편하네. 퇴원하면 그동안 못 한 거 전부 몰아서 하자.”
“그래요. 형이 도저히 못 하겠다고 울 때까지 해보죠.”
“뭐래. 우는 건 너지. 아무튼, 일단 싸질러 놓은 것부터 닦아내자. 환기도 좀 시키고….”
재하는 몸을 일으켜 다비를 닦아주고, 어른들이 오기 전까지 병실을 정돈했다. 어른들이 도착했을 때 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굴었지만, 앞으로는 병실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회복력이 좋은 다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퇴원할 수 있었다.
***
퇴원하자마자 유씨 집안에서 빠르게 결혼을 진행하는 바람에 해를 넘기기 전에 스웨덴으로 곧장 날아갔다.
다비를 제외하고 재하, 양가 어른들은 한 번뿐인 결혼식이니 이왕이면 화려하게 하자고 주장했지만, 다비는 그걸 부담스러워했다. 자신에게 마음을 써주는 게 고맙긴 해도, 지인들을 전부 스웨덴으로 불러서 결혼식을 성대하게 할 마음은 없었다. 복에 겨운 소리를 한다고 남들이 뭐라 하든 다비는 정말로 서류에 사인만 하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어른들과 재하는 다비의 뜻에 따라주었다. 시청에서 결혼식을 간략하게 올리고 다비의 외가에서 피로연을 치르기로 했다. 양가 부모님과 다비의 친구, 재하의 친구들이 스웨덴으로 초대되어 결혼식에 참석해주었다.
다비는 이날 재하의 친구들을 처음 보았다. 재하에게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대학 시절에 길거리 공연 멤버들이었단 사실에 또 한 번 놀라워했다. 니키타 역시 그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니키타를 포함해서 음악을 잘 모르는 다비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연주자들이었다. 다비 쪽 하객들도 고향 친구들을 포함해 만만치 않게 유명한 사람들이라서 구성 인원으로만 보면 조촐한 결혼식은 아니었다.
재하 쪽에서 원하던 초호화 결혼식은 아니었지만, 피로연에서 재하와 리온을 비롯한 유명 연주자들의 축하 연주는 그야말로 초호화 공연이었다. 홈 파티 수준으로 규모가 작은 대신 축하해주는 사람들의 마음과 기쁨은 여느 성대한 결혼식 못지않았다.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다비는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가족들에게 평생 감추고, 명절 오지랖 중 하나인 결혼이나 연애 이야기를 무난히 지나갈 답변을 준비하거나 게이의 노년을 홀로 풍족하게 살기 위해 준비하는 걸 상상한 적은 많았다.
하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을 모두가 받아들여주고 축하해준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고, 욕심내지 않았다. 이런 변화가 전부 재하를 만나고 사랑해서 생긴 일이라 재하에게 고마웠다.
무엇보다 재하가 기뻐하고 있었으므로, 다비는 그것만으로도 결혼식에 의의를 둘 수 있었다. 이것으로 자신에게 무한한 사랑을 보내주었던 녀석이 행복할 수 있길 바랐다. 불안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사라진다면, 몇 번이고 결혼해줄 수 있었다. 물론 자신도 이 결혼식이 매우 기쁘고 행복했다.
둘은 법적으로 묶인 진짜 부부가 되었다.
***
스웨덴에서 결혼하고 독일에서 신혼 생활을 즐기는 둘은 매일 뜨거웠다.
특히 재하는 인생의 모든 행운을 요즘 다 끌어다 모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을 뜰 때부터 일어나는 좋은 일 덕분이었다. 눈을 뜨면 품에 다비가 있었다. 어떤 날은 자신이 다비에게 폭 안겨 있을 때도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앞으로도 계속 함께 맞이하는 아침이라는 행운은 너무나 행복했다.
잠결에 들려오는 소리에 재하의 귀가 조금씩 밝아졌다. 동시에 다리 사이에서 야릇한 감촉도 함께 느껴졌다. 눈을 뜨기 전에 웃음부터 흘러나왔다.
“형, 잘 잤어요? 깨우지…. 심심하다고 혼자 놀고 있으면 어떡해요.”
재하의 성기를 깊숙이 물고 있던 다비가 기둥을 쭉 빨아올리더니 상체를 일으켜 재하와 눈을 맞추고 잘생긴 미소를 지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자고 있는 게 하도 예뻐서 계속 자라고 내버려 뒀지. 난 일찍 일어난 김에 잠깐 네 좆하고 아침 인사 좀 했고.”
“응. 잘했어요. 그런데 아침 인사가 이걸로 끝은 아니죠?”
자기 전에 실컷 해놓고도 재하의 성기는 다비의 인사로 한껏 힘을 받아 꺼떡거리고 있었다. 다비는 픽 웃으며 재하의 위에 올라타 몸을 숙이고 입 맞췄다.
“당연히 이대로 끝낼 수 없지. 아침 운동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재하에게 입을 맞추면서 손을 뒤로 뻗어 재하의 기둥을 붙잡고 곧장 제 입구에 가져다 문지르자, 재하가 손을 내려 다비의 엉덩이를 주물러댔다.
“안 풀어줘도 되겠어요? 어제 자기 전까지 했다고 해도 형은 워낙 회복력이 좋아서 조금만 시간 지나면 꽉 다물어지는데.”
“그래서 네 거 빨면서 좀 풀어놨… 지. 봐. 잘, 들어가… 잖… 하, 좋아.”
성기를 감싸며 달라붙는 기분 좋은 감각에 재하와 다비가 동시에 한숨을 터트렸다. 풀어줬다고 하지만 삽입할 때는 여전히 좁아서 말과 달리 다비도 힘겹게 밀어 넣고 있었다. 재하는 다비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아 벌리고 허리를 들썩이며 삽입을 도왔다.
“우리 형이 이렇게 아침부터 적극적이라 항상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어요. 고마워요.”
“으응. 나도… 아침마다 네가 발딱 서 있어서 좋아. 아으… 꽉 차. 미친…. 윽.”
“다리 조심해서 움직여요. 다음 주면 깁스 푸는데, 무리하지 말고.”
“응. 알았으니까, 일단 이것부터 어떻게 좀 해봐.”
위에 올라타 자신을 내려다보는 다비의 표정이 음란하고 야릇해서 상쾌한 아침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재하는 참지 못하고 허리를 탁 쳐올리며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다비가 상체를 곧게 뻗으며 재하의 성기를 가득 품고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떨었다.
“하, 씹…. 진짜 어떻게 매번 좋지?”
“저도요. 매번 처음, 하는 거같이 설레고…. 좋아요.”
“아, 거기. 읏, 좋아.”
“여기?”
“아, 읏. 흐응. 좋아.”
재하는 다비가 느끼는 부위를 곧장 찔러대며 사정을 부추겼다. 가슴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다비가 자지러질 듯 신음을 흘리며, 재하의 움직임에 호응했다. 예전에는 신음조차 내뱉지 못했던 사람이 이제는 솔직하게 터트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만든 사람이 자신이라는 게 참을 수 없이 좋았다.
“형, 좋아요?”
“응. 조금, 만. 더… 아읏.”
“사랑해요.”
“나도. 사, 아…. 씹.”
지난밤에도 오랜 시간을 해놓고도 둘은 오랜만에 만난 연인처럼 몸을 섞었다. 사정하는 순간까지 사랑을 속삭였다. 재하의 배 위에 흥건하게 정액을 쏟아놓고 다비는 만족스러워하며 재하의 몸에 포개졌다.
“산책하러 나가야지.”
“나가서 아침도 먹고 들어와요. 같이 씻을까요?”
“어. 빨리 씻고 나가자. 후. 아침부터 운동했더니 제법 덥네.”
“이걸 운동이라고 하면, 아침부터 건전하지 못한 운동인데요?”
“원래 운동은 즐겁게 해야 하는 거야. 씻고 나가자.”
건전하지 못한 아침 운동을 끝내고 둘은 샤워 후 집 근처 작은 공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아침부터 꽤 격렬했음에도 다비는 쌩쌩하게 움직였다. 건강하게 움직이는 다비를 눈으로 볼 때마다 재하는 언제나 튼튼한 그의 체력에 감사함을 느꼈다.
사고 후 근육이 빠졌다고 충격받은 다비가 발목을 조심해가며 근력 운동에 매달리더니 몸이 예전보다 더 매끈하고 탄력 있어졌다. 거기에 체력까지 더 좋아져서 종일 섹스만 해도 지치지 않을 정도로 다비의 컨디션은 최고였다. 그래도 사고 이후라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비가 조금이라도 빨리 걸으면 재하는 뒤를 바짝 쫓으며 다비를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형, 어제오늘 너무 무리한 거 아니에요? 난 좋은데, 형이 걱정돼서….”
“너는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걸 보면서도 걱정되냐?”
“네. 제가 이 세상에서 걱정하는 유일한 하나는 형밖에 없어요.”
“어이고. 그렇게 걱정되면 섹스를 좀 줄이시던가요.”
“그건 싫고요. 대신 오늘 아침은 좀 든든하게 먹을까요? 체력 보충 겸.”
“미친. 아침부터 또 귀여운 짓 하네.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게.”
산책이 끝나고 식사를 한 후, 집에 들어가면 또 한 번의 섹스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둘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전을 질펀한 섹스로 보내고 난 후, 재하가 다비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오늘 있을 스케줄을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형, 오늘 저 공연 가요. 가까운 곳이라서 오늘 저녁에 공연 있고, 내일 돌아올 거예요.”
“어. 필립한테 들었어.”
재하의 매니저에게 일정을 들었다는 이야기에 재하가 뚱한 표정으로 다비를 쳐다보며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내었다.
“내 스케줄인데 왜 필립한테 들어요? 그리고 언제 그렇게 또 친해졌어요?”
“아, 뭐래. 네 스케줄 관리하는 사람이 필립이니까, 필립이 나한테 알려준 거지. 네 일정도 너한테 직접 들어야 하는 거였어?”
“네. 앞으로는 제가 이야기할 테니까, 다른 사람한테 제 일정 듣지 말아요.”
별걸 다 질투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대놓고 질투하는 게 차라리 귀엽기라도 했다. 다비는 픽 웃으며 재하의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알았다. 네가 앞으로 스케줄 보고해. 그리고 지금처럼 당일에 발표하지 말고 일정 나오자마자 연락해. 나도 네 일정에 맞춰서 계획 잡아야 하니까.”
“형은 저 없는 동안 뭐 할 건데요?”
“할 거 많지. 이번에는 유재하 방해 없이 사진 찍으러 다녀보려고.”
“…어디로 갈 건데요?”
“그냥. 동네 한 바퀴?”
몸이 회복된 후로 다비는 재하와 거의 한 몸인 것처럼 붙어 다녔다. 카메라를 들고 밖에 나가긴 하지만, 혼자서 작업하는 게 편했던 다비는 재하와 함께 다니면서 마음껏 사진을 찍지 못했다. 가끔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찍고 싶었고, 때로는 엎드려서 찍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차마 재하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어서 참아왔던 걸 이번 기회에 해보려 했다.
정작 재하는 목적지가 궁금했던 모양인지, 동네를 돌아다닐 거란 말에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다비에게 쪽 뽀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 가지 말아요. 시계 꼭 차고 다니고요. 차 조심하고, 빨리 걷지 말고, 다리 조심….”
“알았다. 짐 챙겨놓을 테니까 얼른 가서 씻고 와.”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진짜 좋다. 형이 내 짐 싸주고 이러는 거 진짜 부부라는 느낌이라서 정말 행복한 거 있죠.”
“진짜 부부 맞는데? 뭐, 무슨 소리 하는지는 알 것 같으니까 설명할 필요는 없고….”
재하는 법적으로 부부가 된 이후로 정서적으로 많이 안정된 상태였다. 국경을 넘나드는 공연은 아직이었지만, 예전처럼 문자를 자주 보낸다거나 전화를 걸어대며 모든 시간을 쓰는 일은 많이 줄었다고 필립에게 전해 들었다. 연주야 예전부터 완벽했고, 지금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는 말을 건네며 필립이 다비에게 고마워했던 게 며칠 전이었다. 자신이 재하에게 무언가 도움이 된다는 말에 조금 기뻤던 순간이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비는 능숙하게 재하의 짐을 정리했다. 짧은 일정이라 챙겨야 할 물건은 많지 않았다. 고작 이틀뿐인데, 멀리 떠나보내는 것처럼 마음이 심란했다.
샤워를 끝마친 재하가 다비에게 다가와 뒤에서 다비를 끌어안았다. 따끈한 몸에서 나는 익숙한 바디 워시 향에 다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재하는 다비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한숨을 내쉬었다.
“같이 갈래요? 거기도 예쁜 곳 많은데, 형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됐다. 너 졸졸 따라다니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냐. 의부증 걸렸다고 뒷말 나와. 그리고 오늘은 우리가 사는 곳을 찍고 싶거든.”
“부부가 같이 다닌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요. 같이 가요, 네?”
어디서 흥분했는지 모르겠지만 붙어 있는 동안 징그럽게 해댔는데도 모자란다는 듯, 재하의 부푼 성기가 다비의 엉덩이를 찔러대고 있었다. 다비는 손으로 재하를 밀어내며 혀를 쯧, 하고 찼다가 양손을 들어 재하의 뺨을 꾹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기분 좋게 보내줘야 저 녀석이 편안하게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아 성질을 죽이고 재하를 달래주었다.
“귀엽게 굴어도 소용없어. 너 이러다 공연 중에 발기한 채로 연주할 것 같아서 안 갈래. 어째 이렇게 시도 때도 없냐, 네 좆은….”
“신혼이잖아요.”
“시끄럽고, 슬슬 적응해야지. 언제까지 붙어 있을 거야. 나도 이제 조금씩 돌아다니면서 촬영 다닐 생각인데, 그거 연습한다 생각하고 이틀짜리부터 익숙해져 보자. 응? 얌전히 잘 다녀오면, 잔뜩 예뻐해 줄게.”
재하는 제 뺨을 짓누르는 다비의 손을 꼭 붙잡고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혼도 했고, 법적으로 부부가 됐으니 의젓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래도 홀가분해 보이는 다비의 표정에 금세 시무룩해졌다.
“나 없는 동안, 다른 사람들하고 친해지지 말아요.”
“알았다. 얌전히 사진만 찍고 있을게. 찍다가 마음에 드는 거 나오면 문자 보낼 테니까 그만 좀 의심해라. 아니, 바람피우지 말란 소리도 아니고, 친해지지도 말라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의심하는 것도, 형을 못 믿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을 못 믿는 거죠. 형이 너무 잘생겼으니까 이건 평생 어쩔 수 없어요. 누군가와 친해지려면 제 옆에서 친해져요.”
“아오. 징그러운 새끼. 근데 그게 귀여우니 나도 징그럽다, 진짜. 알았으니까 얼른 가. 뽀뽀해줄 테니까 고개 숙여.”
다비가 건들거리며 손을 까딱이자, 재하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며 가까이 다가왔다. 다비는 재하의 뒤통수를 감싸고 입을 맞춰주었다. 뽀뽀는 곧장 키스가 되었고 재하가 몸을 붙여왔지만, 다비는 단호하게 잘라내며 재하의 손에 짐 가방을 쥐여 주고 현관까지 내몰았다.
“잘 다녀와, 자기. 기다릴게?”
“형. 지금 자기라고 하셨….”
재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쾅 닫혔다. 그런 섹시하고 야릇한 눈빛으로 ‘자기’라는 말을 던져 놓고 차갑게 내모는 다비가 너무 좋았다. 당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여기서 더 지체했다가는 늦을 것 같아서 재하는 문에 바짝 기대 작별 인사를 건넸다.
“갔다 올게요.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연주도 잘할게요.”
“그래. 잘 다녀와. 연락 자주 하고.”
“네. 사랑해요.”
“나도.”
밀어내지 않았다면 계속 집 안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재하라서 다비가 문밖으로 밀어냈지만, 재하의 인사를 받기 위해 다비도 문에 바짝 붙어 기다리고 있었다. 문 하나를 두고 절절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아주 먼 곳으로 떠나는 모양새였으나, 재하가 있는 곳에서 공연하는 장소까지는 차로 2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재하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떼어내 몸을 움직였다.
다비는 한참을 문에 붙어 있다가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게 돼서야 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텅 비어 있는 밖을 둘러보고 재하가 확실히 없는 걸 확인한 후, 한숨을 얕게 내쉬었다.
“겨우 보냈네. 나도 저 없으면 허전하긴 마찬가지인데…. 그렇다고 계속 붙어 있을 수는 없잖아. 먼저 정신 차려야지 어쩌겠어.”
다비는 밖과 안을 살피다가 집 안으로 들어가 곧장 카메라를 손에 쥐었다. 재하가 없는 집에 있으면 괜히 기분이 처질 것 같았다.
생태 사진을 전문으로 찍지만, 꼭 자연물만 찍는 건 아니었다. 사진을 처음 시작할 때 섬에서 살면서 접하던 것들이 자연물이라서 자연스럽게 그걸 다른 것보다 더 잘 찍을 뿐이라 진로를 그렇게 잡은 것이었다. 찍고 싶은 것을 마음껏 찍는 것이 원래 다비의 스타일이었다. 다만 인물 사진만큼은 허락을 받고 찍어야 하는 번거로움과 피사체의 부자연스러운 모습 때문에 꺼릴 뿐 친한 친구들을 찍고 싶거나 찍어야 할 때는 즐겁게 찍는 편이었다.
독일로 넘어온 이후부터 다비는 살고 있는 지역을 찍기 시작했다. 도시나 관광지, 공원의 자연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한창 작업 중이었다. 재하와 함께 길을 걷고 주위의 공기를 느끼다 마음에 드는 공간이 나타나면 휴대폰이든, 카메라든 손에 들고 그저 찍어댔다. 재하는 다비가 작업하는 걸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촬영하는 순간의 다비를 좋아했고, 카메라에 담아둔 세상을 모니터에서 새롭게 탄생시키는 다비를 좋아했다.
거리로 나와 사진을 찍던 다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촬영을 중단했다. 다리도 조금 아팠고, 옆에서 종알거리며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던 녀석이 옆에 없다는 것만으로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느껴졌다. 주위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득한데, 세상이 고요했다. 이방인과 여행객, 그 어딘가에 있는 기분이었다.
“좀 백수 같다.”
혼자 실컷 작업할 수 있겠다고 신났었으면서 막상 그런 상황이 오자 의욕이 뚝 떨어져 버렸다. 재하와 같이 다닐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기분에 다비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멍하니 돌아다니는 중에 재하에게 도착했다는 문자와 사진이 왔다. 다비는 곧장 재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전화를 하지 않는 다비가 재하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런 건지 연결음이 들리자마자 곧바로 재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형?
“아…. 어. 잘 도착했나 궁금해서.”
-잘 도착했죠. 바로 밑인데요. 형은 지금 촬영하고 있어요? 시끄러운 걸 보니 밖인가 봐요.
“어. 아직 밖이야.”
다비는 재하의 목소리를 들으며 거리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낯설어 보이던 거리가 재하와 함께 거닐고 시간을 보냈던 익숙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유재하 없으니까 세상이 아주 반짝거린다. 찍을 게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네.”
재하의 목소리만으로도 같은 공간이 달라지는 마법 같은 일을 겪은 게 어쩐지 부끄럽고 창피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쑥스럽고 부끄러우면 솔직해지지 못하고 버릇처럼 삐딱한 말이 튀어나오곤 했다. 이런 말을 하면 재하가 속상해한다는 걸 아니까 고쳐야 하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미운 말에 조금 속상해지고 말았다.
-난 외로워요. 형이 없으니까 세상이 암울해요.
“…어?”
-형이 싫다고 해도 끌고 올 걸 그랬어요. 벌써 형이 보고 싶어요. 이래서는 공연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미치겠네, 진짜.”
자신과 달리 재하는 숨김이 없었다. 얼굴을 긁고 싶을 정도로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녀석이라 매번 당혹스러웠지만 그래서 좋았다. 재하가 아니었다면 자신들의 관계는 여전히 아는 형과 동생 사이로 남았을 터였다. 다비는 입가가 느슨하게 풀린 채 멋쩍어하며 피식 웃었다.
“연주 잘하고 와. 외롭지 않게 많이 예뻐해 줄게.”
-형한테 예쁨받으려면 정말 열심히 해야겠네요. 아, 저 이제 리허설 들어가야 해요. 형하고 더 통화하고 싶은데 일 제대로 안 하면 형이 싫어할 테니까 참고 리허설 할게요.
“그래. 알아서 예쁜 짓 하네. 잘하고 와. 밥 잘 챙겨 먹고.”
-네.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형. 끊을게요.
시간이 촉박한지 재하는 얼른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재하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마음이 편했는데, 끊기자마자 다시 허전해졌다. 보고 싶다는 재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참나, 누가 할 소리인지.”
그동안 혼자 작업해왔는데 고작 몇 달 만에 재하가 있고 없다는 게 자신의 작업에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다. 고작 몇 시간 만에 작업하기 힘들 정도로 녀석이 보고 싶어질 줄이야. 다비는 반지를 보며 헛웃음 쳤다.
“내일 온다고 했던가.”
식욕도 없고 의욕도 생기지 않아서 다비는 거리를 멍하니 쉬엄쉬엄 돌아다니다가 어둑해질 무렵 집으로 겨우 돌아갔다.
재하가 연주하러 갈 때 집에 혼자 있었던 적은 많았는데, 밤을 비운 건 처음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혼자 있는 게 낯설었다. 이럴 땐 차라리 일찍 자버리는 게 나았다. 다비는 우선 샤워부터 하기로 했다.
따끈해진 몸을 이끌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새로 깔아둔 이불에서 포근한 섬유 유연제 향이 느껴졌다. 몸을 누인 침대에서 재하와 많은 밤을 보냈었다. 오늘 아침에도 보냈었다. 몸이 회복되자마자 재하와 엄청 몸을 섞어댔다. 머릿속에 갇혀 있던 음란한 생각들이 터져 나오자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하고 싶네.”
다비는 침대에 엎드린 채 손을 아래로 내려 반쯤 부푼 성기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자기 손인데도 감싸 쥐는 감촉이 낯설어서 잠시 머뭇거렸다. 어느새 재하의 손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재하의 손은 자신보다 약간 더 큰 편인데, 첼로를 연주하는 손이라 그런지 은근히 손끝이 거칠었다. 그러면서도 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그 손으로 자신을 어떻게 만지는지 떠올리자 성기가 힘을 받았다. 어디선가 재하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형, 섰어요?’
“하… 재하야.”
‘내가 만져줬으면 좋겠죠?’
“응.”
‘아니죠. 형은 앞보다 뒤를 만져줘야 좋아하잖아요. 내 것으로 가득 채워야 만족하면서…. 정말 앞만 만지는 거로 만족해요?’
상상 속 재하의 말대로 부족했다. 다비는 침대 옆에 있는 협탁으로 손을 뻗어 젤을 꺼냈다. 손에 쭉 짠 후, 그대로 뒤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이런 거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사정을 해야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귓가에서 재하가 소곤거렸다.
‘부족하죠?’
“하아, 흣.”
재하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구가 멋대로 움찔거렸다. 나른한 숨이 터지고 저도 모르게 허리가 들썩거렸다. 다비는 재하의 베개에 이마를 부비며 끙끙댔다.
“재하야, 유재하….”
매일 함께 몸을 섞었던 침대인데, 침구에선 섬유 유연제 냄새만 가득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트를 갈아대니 체향이라는 게 조금도 남지 않았다. 다음부턴 재하가 먼 곳으로 공연하러 가면, 시트를 바꾸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재하의 체향이 없는 새 시트에서 재하를 연상하며 자위하는 건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물론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손이나 허리가 멈추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 허전해서, 다비는 재하의 연주 영상이라도 보면서 할까 싶어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렸다. 두말할 것도 없이 유재하였다. 다비는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상상하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형, 저 공연 끝났어요.
“어….”
-이제 숙소에 들어가는 중이에요. 들어가서 전화하려다가 형 너무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그래.”
지금 들리는 듣기 좋은 들뜬 목소리와 달리 침대 위에서 재하가 어떤 울림을 가졌는지 알고 있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였던 재하의 할머니는 그에게 많은 재능을 물려주셨다. 음악적 감성과 함께 깔끔하고 듣기 좋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 역시 유재하의 재능이었다. 그 목소리로 신음을 터트릴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이제는 눈을 감아도 또렷하게 보일 만큼 많은 밤을 다비는 재하와 함께 보냈다.
“하, 씹….”
-…형?
스피커 너머로 들리던 소란스러운 소리가 잠시 무언가에 막힌 듯 조용해졌다. 웅웅거리며 재하의 독일어가 들렸다. 먼저 갈게, 하는 짧은 독일어가 들리고 곧이어 다급한 발소리와 목소리가 이어졌다.
-형. 지금… 뭐 하고 있어요?
“글쎄.”
-제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죠?
“으음. 맞을걸?”
-하아, 미치겠네.
발소리가 빨라지면서 재하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졌다. 이제야 침대 위에서 들렸던 목소리와 비슷해져서 다비는 만족하며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비의 호흡에 집중하던 재하가 애원하듯 징징거렸다.
-형, 아니요. 이건 아니죠. 혼자 그렇게 재미 보면 안 돼요. 어떻게 나를 두고 그럴 수가 있어요?
“너 지금 길거리 아니냐? 그렇게 막 그런 말 해도 되는 거야?”
-어차피 한국말인데 알게 뭐예요. 난 지금 형이 혼자 뭘 하는 중인지 알아버려서 그게 더 미칠 것 같은데, 형은 지금 제 주위 상황이 더 중요한 거예요?
“그럼 어쩌라고. 너는 여기 없고, 나는 지금 꼴리는데….”
-다음부턴 데리고 다녀야겠네요. …자, 잠깐. 손도 넣었어요? 앞만 만지고 있는 거 아닌 거 같은데?
길바닥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눈치 빠르고 뻔뻔한 유재하 때문에 다비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입구 안으로 손가락 하나를 더 집어넣었다. 재하의 목소리 덕인지 수월하게 들어가는 손가락에 다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재하야. 더 말해봐.”
-형. 잠깐만요. 나 숙소 다 왔어요. 혼자 가지 말아요. 안 돼요. 그거 싫어요. 왜 혼자…. 너무해요. 기다려요.
재하가 참지 못하고 뛰기 시작했다. 저 때문에 안달 나서 구두를 신고 뛰고 있는 재하를 상상하자 자꾸 괴롭히고 싶어졌다. 정신없이 뛰면서도 재하는 사정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징징거리는 녀석의 목소리가 제법 귀여워서 다비는 일부러 신음을 참지 않고 소리 내었다.
-형, 다 왔… 후. 다 왔어요. 숙소 근처라 정말 다행…. 참아요. 조금만 더. 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부스럭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요란한 소리에 귀가 따가워진 다비는 미간을 구기며 재하를 나무랐다.
“뭐 하는데 이렇게 시끄러워. 도착한 거 맞아?”
-아, 네. 숙소…. 블루투스 이어폰. 잠깐… 지퍼가… 안 열려. 하, Verdammt Scheiße.
욕을 낮게 내뱉으며 초조해하는 재하의 목소리에 다비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즐거워했다.
“천천히 해. 안 싸고 기다릴게. 그러다 바지 벗기 전에 또 싸겠다.”
달래주는 말투에 재하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기를 붙잡고 흔들고 있는 모양인지 금세 소리가 다시 거칠어졌다. 수화기 너머로 형, 하며 끙끙 앓는 재하의 소리가 들려왔다. 재하를 기다려주느라 잠시 멈췄던 다비도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 내 손가락이 아니라 네 좆이 여기에 들어와야 하는 건데….”
-미안해요. 못 가서. 내일… 하아, 끝나자마자 곧바로… 읏, 갈게요.”
“그래. 일단 여기에 집중하자. 나 지금 조금만 더 만지면 쌀 것 같은데. 너 때문에 자꾸 만지다 말아서 앞만 질질 흘려대고 있거든?”
-큿, 일부러…. 그런 말 하는 거예요?
미치겠다, 형 때문에, 하는 한탄 섞인 소리가 한숨과 함께 들리더니 집중했는지 재하는 계속 거친 숨소리만 들려주고 있었다. 다비도 호흡에 보답하듯 아낌없이 기분 좋은 소리를 들려주었다. 상상 속의 음란한 말들보다 재하의 숨소리가 더 자극적일 줄이야. 정말로 이 녀석의 숨결까지 좋아하고 있단 생각이 다비를 빠르게 흥분시켰다.
“읏, 재하야.”
-형. 사랑해요.
서로를 부르며 둘의 사정은 거의 비슷하게 끝났다.
전화로 둘이 질펀하게 뒹군 건 좋았는데, 젤과 정액으로 엉망이 된 손을 보자 다비는 빠르게 현자 타임이 찾아왔다. 게다가 평소에 얼굴을 마주할 때는 잘 내지 않던 신음을 전화로는 잔뜩 들려주고 난 후라 부끄럽고 목도 아팠다. 다비는 휴대폰에 입을 바짝 붙이고 말했다.
“고, 공연 잘했지? 내일 저녁에 온다고 했나?”
-네? 네. 인터뷰 있어서 저녁에 갈 거예요.
“그래. 그럼 인터뷰 잘하고 와. 문자 좀 그만 보내고.”
-네. 형, 뽀뽀해줘요.
시도 때도 없는 귀여운 연인의 요구에 가라앉았던 성기가 꿈틀거렸다. 이러다 2차전에 돌입할 것 같아 다비는 재하를 나무랐다.
“나, 낯간지럽게 뭘 해달라는 거야. 내가 전화기에 대고 뽀뽀하고 막 그럴 사람으로 보이냐? 아무리 결혼했다고 해도 부끄럽게 그런 걸 요구하는 건 아니지.”
-휴대폰으로 자위하는 건 들려주고 뽀뽀는 안 된다고요?
“어. 난 그런 사람이야. 알고 결혼한 거 아니었냐?”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제가 하죠, 뭐.
“야. 너 하지 마. 하기만 해….”
쪽쪽, 하고 젖은 소리가 허공으로 퍼졌다. 동시에 다비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음이 미칠 듯이 간지럽고 입가가 느슨해졌다. 어떻게 이렇게 낯간지러운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건지. 유재하의 낭만적인 감성에는 아직 적응하기 힘들었다. 계속되는 쪽쪽 소리를 참지 못하고 다비는 황급히 재하를 막았다.
“공연하고 오느라 피곤할 텐데 얼른 자라. 돌아오면 이야기 많이 하고.”
-조금만 더 통화하면 안 돼요?
“안 돼. 너 지금 좆만 덜렁 내놓고 있는 거 아니냐? 그리고 아직 문 앞이지? 씻어야지.”
-조금 전엔 급해서…. 지금 다시 옷 입고 있어요.
“내가 피곤해서 그래. 졸렸는데, 네 생각나서 자위만 하고 빨리 자려다가 네 전화 받았던 거야. 손도 엉망이고 씻고 싶다.”
-알았어요. 쉬어요. 사랑해요, 형.
작별 인사라는 핑계로 5분 동안 더 사랑 타령을 애절하게 나누고 나서야 통화가 끊어졌다. 말라붙어 가는 정액과 젤을 허무하게 바라보던 다비는 얼른 씻고, 자기로 했다.
***
한참 기분 좋게 자고 있는데 파도에 몸을 맡긴 듯, 몸이 힘없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지진일 리는 없을 텐데. 기분이 이상하고 야릇했다. 허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형, 일어났어요?”
“…어?”
꿈인 줄 알았다. 아니. 여기에 있으면 안 될 녀석의 목소리가 들리니까, 이건 당연히 꿈이었다. 다비는 팔로 눈을 가리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 내가 유재하가 겁나 보고 싶은가 보다. 자기 전에 그렇게 뺐는데, 꿈에서까지 너하고 이러고 있네. 하… 근데 진짜 하는 거 같아. 기분 좋아.”
“그래요? 다행이다. 너무 좋아서 꿈처럼 황홀하고 그런 거죠?”
“어. 꿈 진짜 실감 난다. 맨날 꿨음 좋겠…. 어?”
재하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생생했다. 아래를 헤집고 있는 묵직한 것의 감촉도 생생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현실감이 넘쳤다. 다비의 정신이 뒤늦게 깨어나기 시작했다. 제 다리를 활짝 벌리고 안을 들쑤시는 저 흉흉한 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면서 알아차렸다.
“아, 뭐야. 왜 네가… 아읏, 여기… 있냐?”
“형 보고 싶어서 잠깐 왔어요.”
“뭐?”
잠에서 깨지 않아 멍한 얼굴로 재하를 보고 있자, 재하가 몸을 숙이고 다비의 얼굴에 입술을 내렸다.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입맞춤과 달리 하반신은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형 자는 거 보고, 안 깨우고 옆에서 얌전히 잠만 잤어요. 그런데 형이 먼저 제 잠옷 안으로 손을 넣고 주물거려서 세우잖아요.”
“내가? 읏. 구라치지… 마.”
“진짜예요. 참아보려고 했더니 형이 왜 안 박냐고 화냈잖아요. 형한테 세 번 허락 받고 섹스하는 중인데. 형 잠꼬대 귀여워서 녹화해놨어요. 이따 이거 끝나면 보여줄게요.”
“아, 쓸데없는 데서 주도면밀한 녀석이네. 진짜 내가 시켰다면 할 말이 없잖아. 읏, 할 말 없으니까 일단 하던 거 계속해봐. 난 계속 기분 좋게 느끼고 있을게.”
“형이 원하신다면….”
재하는 다시 몸을 일으키고 다비의 다리를 팔로 단단히 붙잡고, 허릿짓을 시작했다. 잠결에 나른한 상태로 재하가 찔러주는 곳을 느끼며 다비는 금방 절정에 도달했다. 재하가 사정할 때까지 계속 버티다가, 중간에 한 번 더 사정했다.
재하가 물수건으로 다비의 몸을 닦아주며 뒷정리를 하고 다비의 곁에 누웠다. 다비에게 폭 안기자, 다비가 손으로 재하를 토닥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 시간에 어떻게 온 거야?”
“운전해서 왔죠. 두 시간 반밖에 안 걸리는걸요. 내일 오전에 다시 내려가야 하지만, 형하고 떨어져서는 못 자겠더라고요.”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나도 너하고 떨어지니까 오늘 조금 힘들었어.”
솔직하게 말하는 재하의 진심과 잠결이라는 시너지 덕분인지, 다비도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재하가 “정말요?” 하며 바짝 달라붙는 것도 귀여웠다. 다비는 재하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파묻고 웅얼거렸다.
“응. 정말로. 당분간은 같이 다녀.”
“네. 내일 같이 내려갔다가 거기서 좀 놀다 올까요?”
“그래. 그러자. 일단 자자. 너 피곤해.”
“그럴게요. 사랑해요. 잘 자요.”
“그래. 나도 사랑….”
다비는 재하를 곰 인형 껴안듯 꽉 끌어안고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야 낯설었던 이곳이 온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외롭지 않은 행복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다비는 재활을 열심히 한 덕분에 발목이 예전 상태로 거의 되돌아왔다. 움직임에 제약이 없어지자 밖으로 나도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재하와 함께 다니며 경관이 좋은 곳도 찍지만, 도시 사진들도 제법 많이 찍어댔다. 자연스럽게 다비의 SNS에는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찍은 사진들이 늘어났다.
SNS에 도시 사진이 늘어날수록 언제나 자연 풍경이나 동물 사진을 올리던 자신이 도시 사진을 올리면 변했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조금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건 기우였다.
“음. 희한하네.”
“뭐가요?”
SNS에 올라온 댓글을 확인하던 다비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제게 기대는 재하를 손으로 쓰다듬어주며 질문에 답했다.
“SNS 반응 말이야. 이런 적은 없었는데…. 자기가 사는 도시를 찍어달라는 댓글이 부쩍 늘어서.”
예전에 자신이 올렸던 사진에는 보통 감상이 대부분이었다. 아름답다거나, 환상적이라거나. 하지만 도시 사진을 올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감상과 함께 도시를 방문해달라는 댓글들이 많이 늘어났다. 사진을 찍는 스킬이 변한 것도 아니고 후보정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게 신기할 뿐이라 의아해했더니 재하가 다비의 뺨에 쪽 키스하더니 소리 없이 웃었다.
“난 알겠던데.”
“안다고?”
“네.”
“뭔데?”
다비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재하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사진을 가장 잘 해석하는 광팬이 눈앞에 있는 유재하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팬의 입장이고 사진 해석도 잘하니까 녀석이라면 제 궁금증을 해결해줄 수 있었다.
재하는 자신을 빤히 보며 정답을 원하는 다비를 넋 놓고 감상했다. 몇 번이나 생각하지만 다비의 직업이 배우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사랑해요, 형.”
“…어. 나도.”
다비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재하의 입술에 쪽 입 맞추고는 재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대답을 재촉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재하는 흐뭇하게 웃었다. 다비는 이제 먼저 애교를 부리고 사랑하고 있다는 표현을 숨기지 않았다. 아주 가끔 삐딱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 다비를 이렇게 변화시킨 게 자신이라는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흐뭇함에 몸부림칠 정도였다.
“내가 형을 많이 사랑해서 그래요.”
“…엥? 그게 뭔 소리.”
“말 그대로예요. 행복과 사랑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거죠.”
자연물을 찍던 다비의 사진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환상이었다. 그가 찍은 세상은 지상 낙원과도 같았다. 많은 사람이 그의 사진을 보며 잠시 숨 막히는 현실에서 벗어나 행복한 낙원을 꿈꾸며 열광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법한 평화롭고 아름다우면서 비현실적인 그의 사진은 모든 이들을 위로해주는 안식처였다.
그랬던 그가 사람들이 가득한 도시를 찍었다. 현실과 가장 가까운 곳조차 그의 손과 마음을 거치며 지상 낙원이 되었다. 내가 살던 삭막하고 답답한 도시가 그의 손을 거치면 낙원이 된다. 다비의 도시 사진에 열광하는 이들은 자신이 사는 도시도 지상 낙원이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신이 사는 현실도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는 행복감이 생길 테니까. 그렇게 위안하며 도시에서 또 살아갈 수 있으니까.
과거의 아픈 기억을 가지고도 아름다운 사진을 찍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픔을 씻어내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며 사랑이 충만한 감정을 갖게 됐다. 그런 감정으로 사진을 찍으니 무엇을 찍어도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끌어낸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내가 형을 많이 사랑해서 형도 날 사랑하게 됐으니까. 나와 함께한 모든 시간과 장소들이 아름다워질 수밖에요.”
“…뭐, 뭐라는 거야. 나는 사람들이 왜 이러느냐고 묻는데. 모르겠다, 네 감수성. 뭐, 그렇다고 치자. 서로 사랑하는 건 사실이니까.”
다비는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설명해주는 재하의 행복한 표정이 좋아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번엔 또 어디 가는 거야? 일정은 바로바로 이야기하라고 했더니 오자마자 어딘지 알려주지도 않고 짐부터 싸래.”
투덜거리면서도 다비는 이미 여름 계절에 맞는 옷 위주로 짐을 싸두었다. 재하는 다비에게 바짝 붙어 뺨을 비비며 소곤거렸다.
“좋은 곳에 가려고요.”
“뭐?”
다비는 황당한 얼굴로 재하를 보았지만 재하는 웃을 뿐 공항에 도착하기 전까지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
오랜 비행시간 끝에 도착한 곳은….
“섬이네. 그것도 이번엔….”
탑승 전에 목적지를 확인했는데도 다비의 묘한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다비는 간절히 바랐다. 차라리 섹스 파트너, 아니 계약 연애 때처럼 공항에서 내리면 경비행기를 타고 배를 타고 깊숙이 외딴 섬으로 들어가는 코스이기를.
그러나 이번엔 조금 달랐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것은 맞지만 그때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곳을 고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필 이곳이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산호섬이라니.
“재하야, 뜬금없이 여긴 왜….”
“서프라이즈-.”
재하는 언젠가 다비가 제게 했던 것처럼 양팔을 벌리며 그저 웃을 뿐이었다. 자신이 할 때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재하가 하니까 좀 얄미워서 발로 걷어차 주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온통 커플 천지였다. 다비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프라이… 후. 그래. 놀랐어. 너무 놀라서 고개를 들 수가 없구나. 아니, 많고 많은 곳 중에 왜 여길….”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이곳 경관이 예쁜 건 알지. 전에 촬영 때문에 와 본 적 있으니까. 다만….”
“형이 여기 왔었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런데 나하곤 처음이잖아요.”
솔직히 이곳이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남자 둘이서 이곳에 온 것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하필이면 비행기 도착 시간이 한국과 비슷했는지 주위에 한국말을 쓰는 커플들이 보였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제법 보여 공항이 북적거렸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혼자 오거나 단체로 온 사람들까진 찾았지만, 역시 남자 둘이서 온 건 자신들밖에 없었다.
다비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재하에게 바짝 붙어 소곤거렸다.
“여, 여긴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곳이잖아.”
“그래서 온 건데요?”
“뭐?”
“우리 결혼하고 신혼여행은 안 갔잖아요. 전부 제 공연 따라다닌 것밖에 없었고…. 부부가 신혼여행지로 온 게 문제라도 되나요?”
“…아오. 이 미친놈이 왜 한동안 얌전한가 했다. 이제 이런 식으로 사람 돌게 만드네.”
신혼여행지라면 다른 좋은 곳도 얼마든지 있었다. 자신이 아는 단둘이서 여행하기 좋은 코스들만 수십 곳이었다. 자신에게 미리 물어봤으면 이곳보다 좋은 곳을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었을 텐데…. 이 녀석이 가끔 이렇게 대책 없는 걸 종종 잊곤 했다.
다비가 부끄러움을 넘어 난감한 표정이 되자 재하가 다비를 달랬다.
“신혼여행지라서 온 것도 있는데, 전에 형이 여기서 촬영했을 때 못 찍은 거 있었잖아요. 형이 그걸 되게 아쉬워했던 게 계속 생각나서 여기로 정한 거예요.”
“어?”
다비가 무슨 소리냐고 묻기 전에 재하가 귓가에 쏙쏙 박히게 한 음씩 또박또박 끊어 말해주었다.
“고, 래, 상, 어.”
다비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놀란 눈으로 재하를 바라보았다. 하마터면 너무 좋아서 공항이라는 것도 잊고 제자리에서 팔짝 뛰다가 재하를 껴안고 뽀뽀할 뻔했다.
이곳을 촬영하러 온 이유는 희귀한 바다 생물이 많기 때문이었다. 초대형 가오리인 만타 가오리를 비롯해 산호초에 사는 수많은 해양 생물들, 그리고 고래상어! 하지만 어쩐 일인지 고래상어는 촬영 마지막 날까지 찍지 못했다. 오히려 다른 희귀한 것들은 많이 찍었는데 높은 확률로 볼 수 있다는 고래상어를 정작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게 계속 아쉬웠다. 못내 마음에 걸려서 이곳을 찍은 후 SNS에 ‘Whale shark.’라고 딱 한마디 써놨었는데 그걸 재하가 알아차리고 기억한 모양이었다.
다비는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내리고 재하에게 활짝 웃어주었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었냐?”
“저도 사랑해요, 형.”
“흐. 그런데 이왕 갈 거면 멕시코로 가지. 거기는 야생 고래상어인 데다가 훨씬 크고 수도 엄청 많은데….”
재하가 그 말에 잠시 시무룩해졌다. 재하는 여전히 남들에게 다비와 자신과의 관계를 알리고 싶다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부러 다른 사람들 눈에 쉽게 띄어서 소문나라고 한국 사람이 많은 곳으로 정했건만 제 속을 알아주지 못하는 다비에게 서운해졌다. 변호사 붙이고 기사 한 줄만 냈으면 다비가 원하는 멕시코 수백 번은 가줬을 텐데.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다비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할까 봐 속내는 꾹 삼켰다.
“형. 우리 주목적은 신혼여행인 거고 고래상어는 부수적인 거예요. 그건 잊지 말아줘요. 고심해서 고른 장소인데…. 정말 싫어요?”
“아, 아니? 좋아. 완전 좋아. 고마워. 기특해. 예뻐.”
다비가 생글거리며 손을 들어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손길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어 재하가 기분 좋게 웃으며 쓰다듬을 받고 있을 때였다.
「오! 세상에. 데이비드!」
그 소리에 재하는 불길한 기운부터 느껴졌다.
***
공항에서 짐을 챙겨 스피드 보트를 타고 워터 빌라에 도착했다. 물 위에 지은 리조트는 단독으로 되어 있고 생각보다 남들 시선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다비는 안심하고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재하와 리조트 안으로 들어갔다.
고래상어 덕에 기분이 한껏 업된 다비는 재하의 팔을 붙잡고 침실 구경부터 했다. 커다란 양 문을 활짝 열자, 침대 위에 하트 모양으로 놓인 꽃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재하야, 저거 봐. 침대 위에 또 꽃이 있어. 네 섬에 갔을 때 생각난다.”
“…네. 그러네요. 신혼여행지답네요.”
잔뜩 신나서 세상이 아름답고 긍정적인 다비와 달리 재하의 목소리는 힘이 쪽 빠져 있었다. 재하가 그러거나 말거나 다비는 바닥에 앉아 짐 가방에서 짐을 풀어놓을 준비에 한창이었다. 어찌나 신이 났는지 콧노래까지 부르는 다비를 보자 재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다비의 앞에 털썩 주저앉아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형. 지금이라도 멕시코로 가요.”
“엥? 갑자기 왜….”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뭐가.”
“형은 어떻게 이런 곳에서까지 친구가 있어요?”
다비는 옷을 손에 든 채 재하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어째 계속 시무룩하다 했더니 공항에서 만난 친구 때문인 모양이었다.
“네 말대로 친구야. 그냥 친구. 게다가 여자잖아. 남자가 알은체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먼저 알은체했는데 그걸 어떻게 모르는 척해.”
“그건 알지만….”
공항에서 만난 사람은 다비가 이곳에 촬영 왔을 때 함께 했던 해양 생물 학자 엠마였다. 새끼 고래상어를 연구하기 위해 팀과 함께 이곳에서 머무는 중에 다비를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었다. 신혼여행이라고 말하기 뭐해서 그때 못 본 고래상어를 촬영하러 왔다고 대충 둘러댔더니 엠마가 마침 잘됐다는 듯 다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오늘 오기로 한 포토그래퍼가 일이 생겨서 이틀 후에나 연구팀에 합류하게 됐다며 하루, 아니 몇 시간이라도 좋으니 수중 촬영을 해달라고 부탁해왔다. 다비는 고래상어 이야기를 괜히 꺼냈다며 속으로 후회했다.
어쨌든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엠마가 솔깃한 제안을 걸어왔다. 페이는 당연히 지급하고 덤으로 연구팀 포인트에서 원 없이 고래상어를 볼 수 있게 해주겠단 조건이었다.
사람들의 손을 탄 고래상어와 달리 엠마가 연구하는 고래상어는 좀 더 먼 바다에 있어 야생성을 더 간직했고 여러 마리를 관찰할 수 있단다. 게다가 고래상어 무리 중에 한 녀석은 무려 18m란다.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포인트가 아니라 연구원들만 접근할 수 있는 구간에서 시간 제한 없이 마음껏 구경하라며 촬영을 부탁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다비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재하를 보며 허락을 구했다.
애교 가득한 얼굴을 본 이상 재하도 그 자리에서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귀한 표정에 대한 보답이었지만, 리조트로 오는 동안 아무리 생각해도 다비가 여행 목적을 헷갈리고 있단 생각이 들어 자꾸 기운이 빠지려고 했다.
“그래도 우리 신혼여행인데….”
시무룩한 재하의 얼굴을 본 다비가 곧장 손에 쥔 옷을 집어 던졌다. 재하는 다비가 화가 났나 싶어 얼른 시무룩한 기분을 풀려고 노력했으나 쉽게 풀리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자존심도 좀 상했다. 자신이 준비한 고래상어 투어보다 엠마가 제안한 야생 고래상어 관찰이 훨씬 좋아 보여서 질투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화가 난 다비를 풀어주는 게 우선이라 재하는 제 마음을 우선순위에서 내려놓았다.
“형.”
“미안해.”
재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비가 먼저 재하를 품에 폭 안아주었다.
“알아, 우리 신혼여행 온 거. 안 잊었어. 난 너도 멋진 장면을 같이 봤으면 싶은 마음에 엠마의 제안에 응했던 거야. 투어로 다니면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그랬어. 너는 내 주위에 사람 많은 거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런데 오해했구나. 고래상어에 넋 나간 놈으로 보였다면 미안해. 네가 고심해서 이곳으로 장소를 정한 게 기뻐서 난 너하고 더 좋은 추억 만들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다비는 저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사람을 녹일 수 있는 건지 신기했다. 다비가 저를 위해 웃어주고, 울어주고,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부정적인 감정은 전부 사라지고 빈자리에 사랑만 가득 차올랐다. 다비의 말이 정답이었다. 다비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재하는 그대로 다비를 마주 안으며 서운함과 질투심을 전부 날려버렸다.
“내가 형을 어떻게 이겨.”
“마음에 안 들면 취소할까?”
“아뇨. 마음에 들어요. 취소하지 말아요. 기분 풀렸어요.”
재하가 금세 기분을 풀자, 다비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재하에게 입을 맞춰주었다.
“그럼 이제 꽃밭에서 신혼여행 온 기분 좀 내보자.”
재하는 다비가 이끄는 대로 침대로 끌려갔다. 꽃으로 가득한 침대 위로 다비가 재하를 밀어 넘어트렸다. 정성스럽게 하트 모양으로 자리 잡았던 꽃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흐드러진 꽃 사이로 재하가 누워 제 위로 올라온 다비의 허벅지를 감싸 안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다비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하, 미친…. 예뻐서 돌아가시겠네.”
“많이 예뻐해줘요.”
다비는 서둘러 재하가 입고 있는 하얀색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다비의 취향으로 잘 다듬어진 몸은 여전히 트레이너에게 잘 관리되어 보기 좋은 굴곡을 드러냈다. 살짝 젖혀진 셔츠 사이로 손을 넣고 가슴을 훑어내리자 재하가 다비와 눈을 맞춘 채 행복하단 표정을 지었다.
한결같은 녀석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를 향한 시선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었다. 아니, 그때보다 더 깊은 감정으로 저를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해주지 않았을 때부터 자신을 사랑하던 녀석은 사랑을 받은 후로 눈부시게 예쁜 녀석이 되었다.
너의 사랑은 어떻게 이렇게 무한할 수가 있을까. 그 끝이 어딘지 알려면 평생을 함께해도 모자랄 것만 같았다.
다비는 참지 못하고 서둘러 카메라를 들고 와 재하의 위에 다시 자리 잡았다. 카메라를 들고 자신을 비추는 다비가 넘어지지 않도록 재하는 다비의 허벅지를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예전에는 찍어달라고 졸라도 내키지 않으면 찍어주지 않던 다비가 요즘은 자주 카메라를 가져와 저를 찍어주었다.
네가 예쁠 때마다 찍는 거라고 말하던 다비는 매일 자신을 카메라에 담았다. 재하는 다비가 카메라를 들 때마다 그를 더 사랑할 수 있었다. 서툴지만 솔직한 사람이었다. 카메라를 든 다비가 좋았다. 다비가 카메라로 보는 세상은 아름답고 찬란했다. 그런 사랑스러운 시선이 자신을 선택했다.
그토록 바라던 김다비의 세상이 유재하로 채워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사랑해요, 형.”
마음이 흘러넘친 재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다비를 향해 웃었다.
셔터 소리가 들린 후, 다비는 카메라를 치우고 곧장 몸을 숙여 재하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다비의 허벅지를 꽉 붙들고 있던 손은 주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비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
“정말 안 들어갈 거야?”
“…물 안에 상어 있다면서요. 으, 안 들어갈래요.”
“네 덩치가 상어한테 더 위험해.”
“전 여기서 형 구경할래요. 형도 마음 편하게 촬영하고 와요.”
이러면서 꼭 섬으로 오는 녀석이 어이없었다. 섬에만 오면 하찮아지는 유재하답게 재하는 배 중앙 기둥에 바짝 붙어 물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수영 선수같이 잘빠진 몸매가 아쉬울 정도로 수영을 싫어하는 녀석을 억지로 물에 끌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심심하니까 스노클링이라도 해.”
“아니요. 전 물 위에서 형 구경하는 게 더 좋아요.”
이렇게 하찮으면 재하는 몇 배나 더 귀여워졌다. 하마터면 연구원들 앞에서 입 맞출 뻔했다. 다비는 뺨을 쓸고 목덜미를 감싸려던 손을 틀어 재하의 머리에 올리고 가볍게 토닥여주며 웃었다.
“그래. 내가 물 안에서 사진 많이 찍어올게. 너는 여기서 구경해. 고래상어들은 물 위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까 배에 남아있는 연구원들이 잘 설명해줄 거야. 다들 영어 쓰니까 대화는 어렵지 않을 거고.”
“알았어요. 즐겁게 구경하고 와요. 사진 기다릴게요.”
재하 역시 입 맞추고 싶었는지 연신 입술을 혀로 적시며 다비와 눈을 맞추다가, 참으려는 듯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다비는 눈웃음으로 입맞춤을 대신한 후 수경과 호흡기를 착용하고 난간에 걸터앉아 그대로 물에 뛰어들었다. 물속으로 사라지는 다비가 인어 같아서 재하는 난간을 붙잡고 거품이 이동하는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다비의 말대로 수면 위로 고래상어의 몸통 일부가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는데도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저렇게 크면 위험한 거 아닌가. 아무리 먹는 게 플랑크톤이나 작은 물고기라지만 사람을 삼킬 만큼 입이 크잖아.”
재하는 괜히 섬뜩해져 배 난간을 붙잡고 물을 살폈다. 조금 깊은 바다로 나와서 그런지 물이 짙은 파란색을 띠고 있어 다비가 잘 보이지 않았다. 다급해진 재하는 배 위에서 연구원 하나를 붙잡았다.
「혹시 고래상어가 사람을 삼킨 사고가 일어난 적은 없습니까?」
「사람을 삼킬 만큼 입은 크지만 적어도 이 근처에서 사람을 삼킨 고래상어는 단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덩치는 저래도 굉장히 온순한 녀석이거든요.」
「하지만 만일이라는 게 있잖아요. 가까이에서 촬영하다가 빨려 들어가거나, 연구팀이 실수해서 위기 상황이 와서 데이비드가 대신 입속으로 뛰어들거나….」
처음엔 농담을 건네는 건가 생각했던 연구원은 재하가 다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보였다. 재하의 모습이 어딘가 물가에 자식을 내놓은 부모 같은 느낌이라서 그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데이비드는 수중 촬영 베테랑이에요. 나이에 비해 실력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해양 생물 쪽 지식은 어지간한 학자들 못지않고요. 사진만 잘 찍는 게 아니라 바다에 강한 사람이라 그와 작업하는 걸 좋아하는 겁니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무모한 짓은 절대 하지 않아요. 누구보다 안전에 신경 쓰는 사람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친구분이 걱정할 만큼 우리 연구팀들도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고요. 안심해도 괜찮아요.」
“친구 아닌데….”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 보세요. 방해해서 미안해요.」
자신보다 더 깊은 신뢰를 드러내는 연구원의 말을 듣자 재하는 부끄러웠다. 다비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분야에서 이미 굳건하게 인정받고 있었다. 사진만 끝내주게 잘 찍는 게 아니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다비라서 많은 이들이 그를 믿고 따랐던 거였다.
타인이 이렇게 다비를 믿고 있는데 자신이 다비를 못 믿고 걱정하는 건 안 될 일이었다. 다비의 사고 이후로 잔걱정이 너무 많아졌다. 이젠 몸도 완전히 나았고 바다라면 자신보다 베테랑이었다. 게다가 사람들도 이렇게 많이 있으니까 큰일은 없겠지. 재하는 안심하고 다비를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자 수중에 있던 일행들이 수면 위로 거품과 함께 떠올랐다. 재하는 단번에 다비를 찾아내고 다비와 가까운 곳으로 이동했다. 다비 역시 재하를 발견하고 물에 푹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린 후 수경을 벗고 눈을 맞추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햇살에 젖은 머리가 반짝거렸다. 젖은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날렵한 턱선을 따라 수면 위로 뚝뚝 떨어졌다.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헤이즐넛 색의 맑은 눈동자가 유독 빛이 났다. 바다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의 모습 때문에 이렇게 자꾸 섬으로 여행을 오는 것이었다.
일행의 도움을 받아 배로 올라온 다비는 텅 빈 산소통을 벗어던지고 재하를 보며 연신 방긋거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상상 이상의 것을 물속에서 잔뜩 보고 온 모양이었다. 그의 찬란한 미소가 보기 좋아 재하는 걱정하며 기다렸던 시간까지 전부 행복한 시간이 되어버렸다.
다비가 다가오자 재하가 미소 지으며 반겼다.
“잘 보고 왔어요? 사진은 많이 찍었어요?”
다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하의 팔을 붙잡고 재잘거렸다.
“완전 좋아. 진짜 행복했어. 못 찍었던 걸 찍어서 그런지 정말 기분 좋더라. 전에 알비노 혹등고래 촬영했을 때보다 더 짜릿했어. 재하, 네 덕이야. 진짜 좋은 경험 했어. 이곳에 데려와 줘서 정말 고맙다.”
“형이 즐거워해서 다행이에요.”
“그나저나 넌 제대로 못 봐서 어떡해?”
“난 다른 건 필요 없어요. 형이 찍은 것만 보면 돼요.”
이 말엔 거짓이 없었다. 재하는 다비의 시선을 한 번 더 거친 사진을 통해야만 세상이 아름답고 감동을 느꼈다. 다비는 워낙 그 소리를 많이 들었던 터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 내 사진을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그럴 것 같아서 정말 공들여서 찍었어. 네가 이걸 제대로 느꼈으면 좋겠단 생각하면서. 보고 난 후에 너무 좋아서 울지나 마라.”
“저 요즘 잘 안 울었는데….”
“얼른 와. 사진 보여줄게.”
다비는 배에 설치된 모니터에 카메라를 연결하고 사진 파일을 열어서 재하에게 보여주었다. 모니터에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거대한 고래상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면에 가까운 부근은 쏟아지는 햇볕과 물결로 인해 빛 그물이 드리워졌고 아래로 갈수록 심해인 것처럼 점점 어두웠다. 그 중심에 있는 고래상어는 빛과 어둠을 모두 품고 아름답게 자리 잡았다. 바다에 있는 것처럼, 우주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저 그림 같은 장면이 다비의 시선으로 본 바닷속이었다.
“와….”
재하는 사진을 보자마자 복잡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자신에게 쏟아졌던 그 사랑스러운 시선이 고래상어에게 쏟아진 것이 불만이었지만, 다비가 장담한 대로 사진 하나하나가 전부 정성스럽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너무 좋은데, 너무 싫은 상황이었다.
모니터에 집중한 채 사진을 한 장씩 넘겨주던 다비가 재하를 어깨로 툭 치며 물었다.
“사진 어때? 마음에 들어?”
“뽀뽀하고 싶어요.”
“고래상어한테? 그렇게 내가 잘 찍었냐? 모니터에 뽀뽀하고 싶을 정도야?”
“…형한테요.”
다음 사진으로 넘어가려고 키보드에 머물러 있던 다비의 손이 움찔거렸다. 이어서 다비는 고개를 푹 숙이며 “하, 씨발. 죽겠네.” 하며 한탄했다. 재하가 배시시 웃으며 다비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형도 뽀뽀하고 싶어요?”
“어. 당장.”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해줄 리가 없다는 걸 재하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말이라도 해주는 게 어디냐 싶어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스킨스쿠버 복을 벗은 엠마가 다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데이비드. 사진 다 옮겼어?」
「어. 확인해 봐.」
다비의 촬영을 확인하기 위해 연구진들이 몰려들었다. 다비와 이미 작업을 했던 사람들은 그의 실력을 알기에 모니터를 보자마자 감탄을 터트렸다. 특히 다비를 섭외한 엠마는 온갖 감탄사를 쏟아내며 좋아했다.
「역시 데이비드야. 사진이 더 좋아진 것 같아. 당장 이대로 손대지 않고 표지에 실어도 되겠어. 으, 계속 작업하고 싶네.」
「아쉽지만 촬영은 오늘까지야.」
「아, 정말 아쉬운데. 저녁엔 뭐 해? 시간 되면 같이 저녁 먹을래? 당연히 친구분도 같이.」
저녁을 권유하자, 다른 팀원들도 다비와 재하를 부추겼다. 재하는 그 순간 오늘 하루를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니까 같이 술 한잔 정도는 해줘야 내일부터 다비도 홀가분하게 자신과 놀아줄 것 같았다. 여기서 질투하면 소인배가 될 것 같아서 자신이 내려놓기로 했다.
「아니. 제안은 고맙지만, 사실 우리 허니문 중이라.」
그때, 다비가 연구팀을 향해 제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여주며 재하를 흘끗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비와 재하에게 쏠렸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흘렀지만 뜻밖의 소식을 들어서 놀라웠다는 의미였는지 일제히 다비에게 축하를 보내주었다.
엠마는 미안해하며 다비에게 말을 건넸다.
「너무한다. 결혼했으면 말을 해주지. 내가 눈치 없는 사람이 됐잖아. 미안해서 어떡해.」
「미안. 그에게 고래상어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서 수락했던 거니까 미안해하지 마. 덕분에 좋은 사진도 건졌고.」
「그래도 미안하잖아. 오, 세상에…. 친구 부부 훼방 놓으러 허니문 따라간 악마 친구가 된 기분이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 다만 이후부턴 우리 둘이서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말한 거야.」
「아무튼 정말 축하해.」
팀원들의 축하가 쏟아지고 있는 순간, 뒤에서 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한번 침묵이 이어졌다. 다비는 익숙하다는 듯 몸을 돌려 재하의 얼굴 쪽으로 손부터 뻗었다.
“아이고. 왜 안 우나 했다. 요즘 잘 안 울었다며.”
“…형이 갑자기… 흡. 그런 말을 할 줄은 정말 몰라서.”
“사람들한테 그 소리 한 게 그렇게 싫으냐?”
“아니? 아니요? 아닌데요? 너무 좋아서 우는… 감동해서 그런 거란 말이에요. 형이 다른 사람들한테 이렇게 말할 줄은 정말 몰라서….”
재하가 깜짝 놀라며 눈물을 뚝 그치자, 다비가 피식 웃으며 재하의 뺨을 닦아주었다.
“알아. 울지 말라고 해본 소리였어.”
“뽀뽀할래요. 여기서 당장.”
“안 돼.”
“너무해.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뽀뽀도 안 해줘.”
“내가 생각보다 보수적이라 그래. 돌아가면 실컷 해줄게.”
재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도 친한 친구들만 불러서 조촐하게 했고, 그 이후로도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남들에게 한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자신과 둘만 있고 싶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결혼했단 말을 꺼냈다. 다비가 그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건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재하였기에 사람들 앞인데도 울 수밖에 없었다.
“사랑해요, 형.”
“그래, 나도. 그러니까 그만 울어. 꼴리니까.”
“흡. 빨리 돌아가요.”
다비에게 잘 보이려고 온 여행인데, 다비에게 더 반해버린 여행이 되었다. 재하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리조트로 돌아가는 길에 울다 웃기를 반복했다.
***
“…뭐?”
감동해서 우는 녀석이 예쁘고 꼴려서 오자마자 씻고, 물고, 빨고 침대로 데려왔더니, 애가 또 미친개가 돼서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잠수했을 때 귀에 물이 들어가서 헛소리가 들리나 싶어 다비는 귀를 털고 재하에게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형이 앞으로 촬영 다니면 아주 가끔은 저 없이 갈 수도 있잖아요. 그때를 대비해서 지금부터 우리 익숙해져 봐요.”
“그건 맞는 소리인데….”
사실 재하와 갑작스럽게 신혼여행을 왔지만 다비는 지금 매우 바쁜 상황이었다. 사진 전시회 요청도 있었고, 사진집 출간 제의도 들어와서 거기에 새로운 사진을 몇 장 추가할 예정이라 출사 준비로 정신이 없던 터였다. 재하의 말대로 재하가 공연 일정이 없으면 같이 다니고, 재하가 공연이 있으면 혼자 출사를 다녀야 했다. 떨어지는 것에 다시 적응해야 하는 건 맞는 소리인데….
“그, 익숙해진다는 게…. 그건 좀 아니지 않냐?”
다비는 재하의 손에 들려있는 상당한 사이즈의 딜도를 보며 정색했다. 저건 대체 언제 준비한 거야, 이 미친놈이.
재하는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딜도를 손에 쥐고 응원봉 흔들듯 살랑거렸다.
“전에 독일에서 저 잠깐 자리 비웠다고 형 혼자 했잖아요. 손 넣고 마구 휘저으면 다쳐요. 난 형이랑 오래오래 사랑하고 싶으니까 좀 더 전문적인 관리….”
“야, 이 미친…. 사이즈가 존나 비전문적인데?”
“제 거보다는 작은 건데….”
“뭐래. 아무튼 그거 싫어.”
재하가 딜도를 뺨에 대고 저렴하다 못해 무료인 무릎을 꿇고 다비 앞에서 잔뜩 애교를 부렸다.
“지금부터 적응해야 혼자 있을 때 외롭지 않잖아요.”
“너 내가 아무 곳에서나 막 쑤셔 넣고 막, 어? 그러는 놈으로 보여?”
“안 보이죠. 그렇지만 제가 공연하러 가고 형만 집에 있으면요? 사진 작업한다고 집에 남아있을 때는 어떡해요? 그때 또 손 넣고 저하고 통화해서 저 미치게 만들려고요?”
“…그, 그땐 그냥 좀 꼴려서. 앞으로 자위 안 하면 되잖아.”
“그게 참아져요? 난 지금도 형만 보면 길거리에서도 발기할 것 같은데. 억지로 참지 말아요. 참지 말라고 사 온 거잖아요. 이거 진동도 되는 거라 넣기만 하면 된대요. 형 편하게 자위하라고 좋은 거로 사 왔어요.”
재하가 판매 사원에 빙의해서 손잡이 부분의 버튼을 작동시켰다. 위잉, 하며 덜덜 떠는 딜도를 보자 다비가 질색하며 침대 헤드 부분까지 도망갔다. 재하가 딜도를 손에 든 채 무릎걸음으로 다비에게 바짝 다가왔다. 다비가 딜도에 시선이 고정된 상태로 고개를 저었다. 실물로는 처음 보는 매끈한 딜도는 감상할 필요도 없이 그냥 충격적이었다.
“아, 씨발. 전원 꺼. 아, 끄라고. 웃지 마라. 변태 새끼야.”
재하는 이쯤에서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머리에선 그러는데 다비의 반응이 너무 신선해서 몸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벌써 발로 걷어차서 침대 밖으로 떨어트렸을 텐데 꾹 참으면서 도망을 선택하는 모습이 자신을 생각해주는 것 같아 행복했다.
누구를 괴롭히는 성향은 조금도 없었건만, 다비의 숨겨진 모든 모습을 전부 보고 싶은 제 욕망이 자신의 이성을 짓눌렀다. 재하는 일단 진동 모드를 끄고 시무룩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말 싫으면 안 할게요. 그렇지만 형은 소중하잖아요. 제가 변태 새끼라서 이러는 게 아니라 좋은 장비로 형이 안전하고 편하게 자위하길 바라는 제 사랑이라고 생각해주면 안 돼요?”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꼭 딜도를 쑤셔 넣어야 사랑인 거냐?”
“저번처럼 제가 독일에 있을 때 형이 그러면 괜찮아요. 내가 집으로 가면 되니까. 하지만 한국 공연이라든가, 더 먼 지역으로 공연 가면 내가 형한테 못 가잖아요. 그럴 때 형이 막 꼴리면 어떡해요?”
“…그, 그건.”
조금만 더 하면 허락해줄 것 같아서 재하는 눈썹을 아래로 툭 떨구고 다비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다비가 딜도와 재하의 표정을 번갈아 가면서 보더니 입으로 욕을 내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하면 멈추는 녀석인데 계속 졸라대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애가 얼마나 해보고 싶었으면 저럴까 싶어서 그냥 자신이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하, 씹. 저 흉흉한 걸 손에 들고 있는데도 귀여운 걸 보면 내가 진짜 제정신이 아닌 듯. 아, 해. 하자고.”
“정말요?”
“어.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해봐. 대신 기분 나쁘면 당장 뺄 거야.”
“사랑해요, 형.”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다비는 재하가 충분히 만족할 수 있게끔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로 했다. 침대에 납작 엎드려 엉덩이만 높이 쳐들고 손을 뻗어 엉덩이 양쪽을 잡아 벌렸다. 이 자세를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재하의 것이 아닌 다른 게 들어올 거라는 걸 아니까 벌써 온몸이 불타오를 만큼 창피했다. 어쩌겠는가. 자업자득이지. 유재하가 이렇게 뒤끝이 긴 녀석인 줄 알았다면, 그날 전화기에 대고 신음 같은 건 안 흘렸을 텐데….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쑤셔 넣으라는 딜도는 들어올 생각이 없고 재하 역시 아무 말도 없었다. 한 자세로 버티던 다비는 괜히 민망해졌다. 이럴 때 부끄러워하면 갑자기 저 녀석 눈이 돌아버려서 딜도를 꽂아버릴까 봐 다비는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고 말을 건넸다.
“야. 안 해?”
“아…. 해, 해야죠.”
재하는 다비의 자세에 잠시 넋을 놓았다가 허둥거리며 딜도에 콘돔을 씌웠다. 젤을 듬뿍 짜서 딜도에 골고루 펴 바른 후 다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자신이 가까워질 때마다 다비가 엉덩이를 벌린 손에 힘을 주며 움찔거렸다. 자리를 잡은 재하는 딜도를 다비의 엉덩이 사이에 가져다 댔다.
입구에 딜도 끄트머리를 가져다 대는 순간 재하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붉게 물든 살이 하얗게 질릴 만큼 양손에 힘을 꽉 주고 딜도의 출입을 기대하듯 입구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재하는 제 손에 들린 딜도를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분명 다비가 기분 좋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져온 건 사실인데, 이딴 막대기로 기분 좋아할 다비를 상상하자 갑자기 딜도가 싫어졌다.
내 건데.
형은 내 건데.
“뭐야. 안 넣을 거야?”
“…넣을 거예요.”
딜도 따위. 재하는 딜도를 뒤로 휙 던져버리고 바지를 벗어 던졌다.
“하읏….”
“후우….”
뒤에서 들리는 나른한 숨소리와 입구를 가르고 들어오는 압박감과 묵직함은 매우 익숙한 감각이었다. 재하와 여러 번 몸을 섞은 다비가 딜도와 재하의 성기를 구분 못 할 리가 없었다. 질투 많은 녀석이 어쩐 일로 딜도를 들고 저를 설득하려 드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넣을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익숙한 감각에 안도감이 찾아왔다. 이제야 허세를 좀 부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읏, 딜도 처박으면 입에는 네 좆 물고 빨 생각이었는데… 하아, 아쉽네.”
“조금 솔깃하지만, 싫어요. 형은… 내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내 거 이외엔 아무것도 넣지 말아요.”
“그럼 저건 어떻, 읏… 할 건데. 버려?”
“일단 집에 가져가서 다시 생각해보죠. 지금은 이것부터….”
재하는 다비의 허리를 꽉 붙잡고 허릿짓을 시작했다. 다비는 시트를 붙잡으며 밀리지 않도록 버텼다. 숨 쉬듯 내뱉는 사랑 타령과 제 안을 꽉 채우고 드나드는 익숙한 감각은 다정하고 사랑스러웠다.
재하를 사랑한다. 재하도 날 사랑한다. 서로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보인다. 그걸 믿기까지 너무나도 오래 걸렸지만 이젠 의심하지 않는다.
불타오르는 뜨거운 사랑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끊임없이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사랑을 원했다. 재하는 뜨거우면서 마르지 않는 사랑을 제게 주었다.
“사랑해, 재하야.”
“하아, 저도요. 정말 사랑해요.”
재하는 몸을 숙여 다비와 밀착하고 입술이 닿는 모든 곳에 입을 맞췄다.
자신의 세상은 오래전부터 김다비였다. 다비를 안고 사랑을 나누면 세상을 품에 안고 있는 것만 같아 행복했다. 이미 다비로 가득한 제 마음에 다비의 애정이 톡 떨어지면 너무나도 쉽게 마음이 흘러넘쳤다.
“사랑했어요. 사랑하고 있어요. 사랑할 거예요.”
“아읏-.”
재하의 계속되는 사랑 타령에 다비가 참지 못하고 먼저 정액을 울컥 토해냈다. 사정하며 안을 바짝 조이자 재하 역시 빠르게 절정에 달했다.
사정하는 순간에도 재하는 다비에게 입 맞추며 흘러넘치는 제 진심을 끊임없이 속삭였다.
***
물에 들어갔다 나온 건 다비인데 따라다니기만 한 재하가 먼저 잠이 들었다. 다비는 자연 앞에서 하찮은 유재하가 정말로 귀여웠다. 깊게 잠든 재하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침대 밑으로 내려와 노트북을 켜 카메라와 연결했다.
사진 파일들을 노트북에 옮기며 이곳에 온 순간부터 일어난 일들을 다시 회상했다.
“신혼여행….”
다비는 사진을 확인하다 이곳에 와서 찍은 재하의 사진을 모니터에 크게 띄워두고 잠시 감상했다. 꽃에 파묻힌 채 저를 보고 웃는 모습이 다시 봐도 참으로 예뻤다.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의 마음이 이렇게나 선명했다.
재하가 주위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꾹 참고 있었던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만 괜찮다고 말하면 재하는 당장에라도 내일 결혼했단 사실을 알리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오로지 저 때문에 참는다는 걸 알면서도 재하를 생각해 외면했다.
잃을 게 많은 녀석을 지켜야겠단 생각을 했었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녀석의 저 미소에 마음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조금 잃으면 어떠한가. 자신이 전부 사랑으로 채워주면 되는 것을. 저 녀석이 나를 이렇게나 사랑한다는데…. 쉽게 생각하자 그 후부터는 일이 쉬워졌다.
남들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정답이라는 재하의 버릇 같은 말을 믿고 꺼냈는데 다들 편안하게 받아 주었다. 솔직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보다 제가 한 말에 크게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녀석의 얼굴이 더 기억에 남았다. 행복해하던 녀석을 카메라에 담지 못해 아쉬울 정도였다. 그 얼굴을 보자 다비는 깨달았다.
녀석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었다.
다비는 몸을 돌려 곤히 자는 재하를 바라보다 재하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졌다. 신혼여행을 서프라이즈로 안겨준 녀석을 위해 다비 역시 서프라이즈를 선물해 줄 생각이었다.
녀석이라면 제 마음을 단번에 알아주겠지.
일을 끝마친 다비는 다음날 행복에 겨워 울고 있을 녀석을 상상하며 재하의 곁에 누웠다.
날이 밝아오자 재하는 손을 뻗어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시간을 확인하려고 한 행동인데 알림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재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 옆에 곤히 잠든 다비를 확인하고 다시 휴대폰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데이비드가 SNS에 새로운 사진을 올렸다는 알림이었다. 어제 찍은 고래상어인가 싶어 얼른 SNS에 들어갔다. 다비가 올린 사진을 확인하자마자 재하는 숨을 들이 삼켰다.
짧은 글과 함께 한 남자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얼굴이었다. 사진 속 남자는 꽃이 가득한 시트 위에서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눈 아래부터 상반신까지만 보이는 사진인데도 단지 미소만으로 남자가 카메라 너머의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이 훤하게 보였다.
다비를 볼 때마다 저렇게 쉽게 마음을 보였다는 게 부끄러우면서도 좋았다. 다비가 이렇게 제 마음을 확인해주는 게 고마웠다. 사진에 남은 다비의 진심에 마음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었다. 너무 사랑스럽고 예뻐서 카메라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는 그의 감정이 사진 곳곳에 흘러넘쳤다.
재하는 사진과 함께 올린 그의 짧은 글을 소리 내서 읽었다.
“My muse….”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감동적인 표현이었다. 자신이 다비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라는 사실이 매우 기뻤다. 제 세상이 다비이듯, 다비의 세상도 자신이었다. 이런 마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그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었다.
“흑. 내가 많이 사랑해요.”
사진도 좋았지만, 재하가 가장 감동받은 부분은 다비가 이 마음을 SNS에 올렸다는 것이었다. 다비의 SNS에는 자연물과 도시 전경만 올라왔었다. 사람의 신체 일부가 보조 출연을 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사람이 주제인 사진은 이게 처음이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재하는 너무나도 쉽게 알아차렸다.
그의 세상에 들어온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을.
재하는 다비가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그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기로 다짐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의 세상에 유재하만 가득하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기 위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라스트 비기닝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