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은 또 무슨 소리야. 아무튼, 난 네 의견에 동감하지 못해. 일단 게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길에서 뽀뽀하는 거 싫거든?”
“형, 이럴 때는 되게 보수적이네요. 한국에서는 조심하면 되잖아요. 그럼 문제없죠?”
“아. 한국이든, 외국이든….”
기분 좋게 일어나서 다정한 인사를 나누며 모닝 키스를 주고받지는 못할망정, 일어나자마자 날벼락을 맞았다. 막무가내인 재하를 진정시키려면 강하고 단호하게 나가야 했다.
“아니. 싫어. 그리고 뭐가 불안해? 분리 불안증 말고 또 불안한 게 있었어?”
“형 인기 많잖아요. 왜 잘생겨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어요. 내 거라고 빨리 세상에 알려야겠어요.”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그 인기는 내 얼굴이 아니라, 내 사진 때문이거든?”
“형 연락처 많이 받잖아요. 한번 만나자고. 제가 모를 줄 알았어요?”
얼굴을 공개한 이후로 그런 연락을 받은 적은 있었다. SNS에 공개적으로 적어놓은 사람들도 있었고, 은밀하게 개인 쪽지로 연락이 온 적도 있었지만 연애할 생각이 없던 다비는 전부 좋게 거절했었다. 그것도 재하를 사귀기 전의 일이었고, 재하를 만난 이후로는 녀석의 성격을 알기에 단호하게 거절하거나 차단하기도 했다. 한때 스토커 같았던 재하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치사하게 인제 와서 그걸 들먹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한 명이라도 만난 적 있었냐?”
“이상형을 못 만나서 그렇잖아요. 갑자기 하늘에서 형 이상형에 맞는 남자가 뚝 떨어지면 어떡해요. 아무리 내 남자친구라고 해도…. 사람들은 모르니까 연락할 거고….”
“이 새끼가 나를 지금 뭐로 보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질투하는 게 어이없으면서도 그 와중에 콩깍지가 잔뜩 낀 재하가 하찮고 찌질해서 귀엽게 느껴졌다. 다비는 화가 나는데 웃음이 터져 재하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내가 그렇게 좋으냐?”
“네. 너무 좋아요.”
“대체 어디가? 과거에 반했던 계기는 알고 있으니까 됐고, 지금은 뭐가 그렇게 좋은 거야? 세상에 알리고 싶을 만큼 내가 매력 있어?”
“형은 정말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르는 거 같아요. 형의 매력을 설명하려면 저 오늘 공연 못 갈 텐데, 괜찮겠어요?”
“요약해.”
다비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재하는 다비의 손을 꼭 붙잡고 눈을 맞췄다.
“전부 다 좋아요. 강한 것 같은데, 은근히 약해서 쉽게 밀어내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이 좋아요. 제가 가끔 가짜로 우는 거 알면서도 마음 약해지는 형의 다정함도 좋고요. 가족들을 너무 사랑해서 형의 아픔을 알리지 않고 혼자 전부 참으려는 그 마음도 사랑해요. 상처가 있는데도 세상을 따스하게 보는 그 시선은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사랑받으면 나도 행복해질 것 같아요. 형은 욕조차 따뜻한 사람이거든요. 저한테 형의 외모는 그냥 부수적이라고 해야 하나.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잘생겼을 뿐, 형이 잘생겨서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욕하는 거지?”
“욕 아니고 사랑 고백인데요?”
다비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인기 많은 거로 따지면 재하가 훨씬 많았다. 유명한 첼리스트라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대기업의 로열패밀리로 현실판 왕자님 같은 존재였다. 거기에 외모, 키, 전부 되는 녀석이 저보다 더 많이 불안해하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었다. 다비는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설득에 나섰다.
“네가 불안해할 이유는 없어. 네가 불안해한다는 것들은 내가 제대로 선 그어놓으니까 걱정하지 마. 7년 넘게 따라다닌 널 거절했던 나야. 내 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너밖에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조용히 사귀자. 우리 사이가 들키면 잃을 게 많은 건 나보다 너잖아.”
“형, 전 잃을 거 없어요.”
“잃을 게 왜 없어.”
“우리 집안은 스무 살이 되면 재산 분배받아요. 집에서 더 받아먹을 것도 없어요. 그리고 제가 모은 돈이 얼마라고 생각해요? 형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벌었어요. 가진 것도 많고요.”
“재산이야 그렇다 치지만, 네 삶은? 첼리스트로서 네 명성에 흠집 잡히는 일이야.”
다비의 걱정에 재하는 단호하게 말했다.
“형은 계속 첼로 하라고 말했지만, 전 당장 첼로 그만둬도 상관없어요. 아니, 사실 그만두고 싶어요. 형 촬영하는 거 따라다니고 형 수발들면서 사는 삶도 나쁘지 않아요. 오지는 경험한 적 없는데, 형하고 함께라면 어디든 전부 좋을 것 같아요. 형하고 떨어져 지내는 건 제가 못 견디겠더라고요. 이번에 또 떨어지면 어떻게 버텨야 할지 걱정돼요.”
“저런, 우리 재하가 생각보다 분리 불안증이 심했나 보네?”
“네. 그러니까 빨리 안심시켜 줘요. 아, 스웨덴은 동성 결혼 합법이라면서요. 저 그냥 형한테 장가갈까요? 이민이 필요하다면 이민도 갈게요. 저 정말 진지하게 연애만 하려고 형하고 사귀는 거 아닌데….”
결혼 이야기까지 나오니까, 다비도 웃음을 거두고 슬슬 심각하게 재하의 분리 불안증을 받아들였다. 이 녀석은 장거리 연애를 할 타입이 처음부터 아니었다. 위치 추적에 문자 폭탄, 붙어 있으면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행동이 그 증거였다. 그렇다고 재하하고 헤어질 생각은 아니라서 다비는 진지하게 재하의 말에 답해주었다.
“재하야, 결혼 이야기는 지금 나올 순서가 아니라고 생각해. 너 아직 어려. 사실 나도 거기까지 뭘 생각해본 적도 없어서 결혼 문제는 뭐랄까… 조금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아. 우선 분리 불안증부터 해결해 보자. 이게 더 우리한테 급한 거 같으니까.”
“형이 그렇게 말한다면 일단 결혼은 조금만 뒤로 미뤄둘게요.”
“그래. 뭐, 그 와중에도 결혼하겠다고 주장하는 게 참…. 아무튼, 이유야 어찌 됐든 난 공개 연애는 반대야.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아. 우연히 우리가 사귄다는 게 알려질지언정 우리가 먼저 오픈하는 건 반대야. 부모님께도 알리고 싶지 않아. 우리 부모님이 편견 있는 분들은 아니지만, 그건 남들을 봤을 때 시선이고, 당신 자식이 게이라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사실 모르겠어. 이건 너희 부모님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해.”
“전 부모님께 이미 이야기했는데요.”
“뭐?”
재하의 말에 머리로 망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이건 또 뭔 개소리인가 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혼날 것 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재하가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스무 살 되자마자, 재산 분배 끝나고 바로 말씀드렸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첫사랑이라고 전부 말했어요.”
“그럼… 부모님은 알고 계신다고?”
“네. 그때는 짝사랑 중이었으니까…. 저 혼자 독단적으로 말했어요.”
다비가 한숨을 내쉬자 재하가 슬쩍 눈치를 보며 혼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다비는 재하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너, 부모님하고 잘 지내? 혹시 나 때문에 절연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혹시 우리가 사귀는 것도 알고 계셔?”
재하는 다비의 걱정에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혼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에 제 걱정부터 해오는 사람을 좋아하게 돼서 감동했다. 재하가 울상을 짓자, 다비는 곧장 속상해하며 한층 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재하와 눈을 맞췄다.
“뭐야. 진짜 절연했어? 사귄다고 말했어? 너, 그래서 설에 섬으로 왔던 거야? 서울로 가기 힘들어서? 리온이가 너 데려온 것도 그런 이유였어?”
“사랑해요. 형을 사랑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엉뚱한 대답을 하는 걸 보니 정말 절연한 것 같아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때는 사귀고 있진 않았지만, 설에도 재하가 부모님과 담판이라도 짓고 내려온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부모님과 틀어진 게 속상해서 사귄다고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자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재하가 눈치를 슬쩍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명절에는 정말 삼촌이 끌고 내려온 거였어요. 다른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에요. 그리고 부모님하고 잘 지내는 건 아니지만, 나쁘지 않아요.”
“나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좋은 것도 아니란 소리네. 그런데 너희 아버지 리온이 큰형님이잖아.”
“네.”
자신이 리온과 훈에게 들었을 때, 둘이 사귀는 걸 집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응원했던 사람이 재하의 아버지였다. 그런데 정작 재하와는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아니라면 어머니 쪽에서 반대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 역시 훈에게 들었을 때, 재하의 어머니도 그렇게 둘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훈에게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셨고 지금도 사이가 좋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넌….”
“어머니는 그렇게 반대하시진 않았어요. 대신 조용하게 지내라고. 삼촌들 전적이 있어서 걱정하긴 하셨지만….”
“…삼촌들?”
“아, 아니요. 아버지는 형 SNS도 알고 계세요. 반대하시는 건 아니지만, 조금 불편하신가 봐요. 막내 삼촌은 아버지 동생이니까 뭘 해도 괜찮지만, 전 아들이라서 그런지 받아들이는 게 다른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런 거지 형을 싫어해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게다가 아직 사귀는 건 모르세요. 이건 형하고 상의해야 할 부분이니까 아직 말 안 했어요.”
가족들에게 제대로 응원받지 못하니까 불안함이 자신보다 심했던 모양이었다. 재하의 분리 불안증이 왜 심한지 알고 나니, 마음이 짠해졌다. 다비는 일단 두 팔을 벌렸다. 재하가 곧장 다비의 품에 폭 안겼다. 다비는 재하의 등을 쓸어주었다.
“부모님께 말해줘서 고마워. 네가 지난 시간 동안 짝사랑하는 걸 지켜보셨으니 부모님도 속상하셔서 그러신 걸 거야. 내가 너무 늦게 네 마음을 받아줬나 보다. 많이 속상했겠네.”
“아, 아뇨. 저 진짜 괜찮… 흑.”
재하가 말을 잇지 못하고 다비의 품에서 엉엉 울었다. 다비는 재하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말없이 등을 토닥이며 기다려주었다. 재하의 울음이 잦아들고 잠시 후 재하가 훌쩍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눈물이 많은 녀석이 혼자 마음고생 했을 걸 생각하니 짠한 마음에 괜히 코가 찡해졌다.
“많이 속상했구나. 이제라도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했다.”
“속상해서 우는 거 아니고 형이 위로해줘서 기뻐서 우는 거예요. 그냥 인정받고 싶었나 봐요. 그래서 제가 너무 막무가내로 굴었죠. 죄송해요. 우리 집안 사람들은 다들 첫사랑하고 잘 됐는데, 나만 왜 이렇게 힘든가, 하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 괜찮아요. 형하고 결국 사귀었잖아요. 그게 좋아서 알리고 싶었어요.”
“그래. 그랬구나. 그래도 알리는 건,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해.”
“형, 진짜 단호하네요. 이렇게까지 울었는데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형을 정말 사랑해요.”
훌쩍거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재하 때문에 다비가 숨죽여 웃으며 재하와 눈을 맞췄다. 예쁘게 우는 녀석이라지만, 지금 우는 건 조금 마음 아파서 눈가를 쓸어주고 입 맞춰주었다.
“일단 1년, 1년 동안은 조용하게 연애만 해보자. 원래 연애는 사계절을 다 겪어봐야 하는 거래. 네 마음이 변하진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우리가 1년 동안 무탈하게 잘 지내고 나야, 어른들한테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 알리는 것보다 난 이게 더 나아 보이는데. 네 생각은 어때?”
“형이 그렇게 생각하면….”
“아니. 네 생각. 이건 같이 의논할 문제니까. 이 이야기를 듣고도 네가 당장 알리고 싶다면 내가 생각을 바꿔보려고.”
재하가 자신을 오랫동안 진지하게 짝사랑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귀고 있는 지금도 재하가 자신에게 지극정성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비도 재하와 더 진지하게 연애를 생각해보고 싶었다. 훈과 리온처럼 모두에게 환영받는 동화 같은 사랑은 아닐지라도, 둘이 세상의 반대에도 무너지지 않게 마음을 쌓으려면 1년은 더 겪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비의 진심이 통했는지,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형 생각이 맞는 거 같아요. 1년 동안 조용하게 형하고 사귈게요. 형이 계속 제 곁에 있어준다면, 부모님께 알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형하고 떨어져 있는 것도 이제 괜찮을 것 같아요. 1년 동안은요. 그 후에는 우리 또다시 이렇게 이야기 나눠요.”
“그래. 그러자. 이제 안 울고 잘 기다릴 수 있겠어?”
“네. 그런데 우리 사계절 같이 지냈는데….”
“그건 또 뭔 소리야?”
다비가 뜬금없는 소리에 재하를 멍하니 보자, 재하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추석 끝나고 우리 100일 연애했잖아요. 그때 가을이었고, 곧바로 섬에 가서 여름도 같이 보냈고, 뉴욕에서 가을 보내고, 형 집이랑 캐나다에서 겨울 보냈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봄이고요.”
“짧은 시간 동안 우리 참 다양한 경험을 했었구나.”
“네. 형이 말하는 사계절이 표면적인 사계절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어요. 마침 봄이니까.”
“그래. 봄까지 우리 사계절 같이 있었던 게 맞네. 귀여운 새끼.”
이 와중에도 낭만적인 생각을 하는 녀석이 귀여워서 다비는 재하에게 잔뜩 뽀뽀해주었다.
사계절은 사계절이고, 일단은 1년 동안 둘의 애정을 더 쌓고, 서로 떨어져도 불안해하지 않도록 장거리 연애에 익숙해져 보는 걸 목표로 잡았다.
***
연애하면서 의외로 둘 사이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비가 속에 있는 말을 조금씩 꺼내기 시작하면서 재하의 분리 불안증이 많이 나아졌기 때문이었다. 훈이 알려준 대로 갈등이 일어나기 전에 대화로 해결을 봐서 그런지 재하도 안심하고 다비의 걱정이나 애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장거리 연애에 적응하기 시작한 재하와 연애하는 동안 다비가 느낀 건, 돈 많고, 체력 좋고, 일편단심인 연하남과의 연애는 정말 최고라는 거였다.
언제든 보고 싶다고 말하면 지구 반대편에 있다가도 날아오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빈말이라도 보고 싶다는 말을 못 하는 부작용이 생겼지만, 정말 보고 싶어지면 언제든 오는 녀석이라 든든했다.
가끔 다비가 재하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면 눈물을 휘날리며 제 품에 안겨 잔뜩 애교도 부려댔다. 힘들게 와놓고도 불러줘서 고맙다고 하는 녀석이었고, 멀리까지 와줘서 고맙다고 하는 녀석이라 다비도 재하에게 항상 고마움을 갖게 되었다.
다비는 이제 악몽을 꾸지 않았다. 대신, 자기만 봐달라고 잔뜩 꼬리치며 징징거리는 재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에서조차 사랑한다고 잔뜩 말하는 녀석 덕분에 매일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가장 좋은 점은 한결같은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이었다. 매일 사랑한다고 종알대는 녀석 덕분에 다비 역시 자연스럽게 재하를 믿게 되었다.
연애가 이렇게 좋은 거였구나. 이런 장르도 나쁘지 않네.
다비는 매일 감사하며 재하와 행복한 연애를 하고 있었다.
***
촬영과 공연으로 바빴던 연인은 오랜만에 미국에 있는 다비의 집에서 만나 여유로운 휴일을 보내게 되었다. 만나자마자 달라붙어 사랑을 나눈 후, 다비의 품에 안겨서 잇자국을 손으로 세고 있던 재하가 베갯머리송사라도 읊듯 말을 툭 던졌다.
“형, 정말 결혼 안 할 거예요?”
다비는 눈썹을 으쓱이며 저를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마주했다. 결혼이라. 또 시작이네.
“그게 그렇게 중요해? 지금처럼 사귀면 안 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몰래 사귀는 거 같아서요. 난 형하고 이렇게 사랑한다고 떳떳해지고 싶은데. 형이 싫다면 어쩔 수 없고요.”
재하의 분리 불안증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결혼에 대한 집착은 계속됐다. 가끔은 사귀는 이유가 자신이 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한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어서 이러는 건가 싶을 때도 있었다. 정확히 이유라도 알면 진지하게 고민해보겠지만, 재하는 그저 제 눈치만 보고 아니다 싶으면 곧장 입을 다물어버렸다.
거절당해서 속상한 듯 눈썹이 툭 떨어지는 걸 보자, 다비의 예전 버릇이 나오고야 말았다. 저도 모르게 혀를 쯧, 차고 정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어차피 울지도 않을 거면서 버릇처럼 눈썹부터 떨어트리고 있는 녀석을 가만히 보다가, 마음이 괜히 불편해져 다비는 재하의 머리를 쓸어주며 성질을 죽였다.
“이유가 그것뿐이라면 난 이대로가 좋아. 그런데 네가 계속 조르는 걸 보면 뭔가 이유가 더 있는 거 같은데 왜 말을 안 해?”
“그냥 대단한 이유는 아니라서 그래요. 형이 가족들한테 알리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는데도 자꾸 조르게 돼요. 계속 조르면 언젠가 들어주지 않을까 싶어서요.”
“네가 그렇게 애새끼 같지 않다는 거 이제 알아. 대체 뭐가 문젠데.”
사귀는 동안 다비는 재하에 대해 파악이 거의 끝났다. 단순하게 굴지만, 사실 저 머리통 속은 꽤 시커멓게 복잡하다는 것도 알고, 이유 없이 무턱대고 조르는 녀석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잘 우는 거 같지만 사실은 정말 필요한 거 아니면 눈물을 잘 흘리는 녀석도 아니었다.
다비가 지금 걱정하는 건, 재하가 자신에게 너무 맞추려고 무리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또라이가 될 것 같아서였다. 정신 차리고 보니 스웨덴의 어디 교회에서 마주 보고 결혼식을 하고 있다거나, 뜬금없이 은퇴를 선언하고 저를 따라다니기로 했다며 미국으로 넘어온다거나 하는 일 말이다. 실제로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여행을 가자더니 스웨덴으로 간 적도 있었고, 갑자기 휴가를 얻었다며 짐 싸 들고 자신이 촬영하던 곳으로 들이닥쳤던 적도 있는 녀석이었다.
다 자기가 좋아서 그러는 거라 혼도 내지 못하고 잘 타일러서 지금까지 왔지만, 1년이 가까워져 오는 시점부터 봉인이라도 해제한 것처럼 만나기만 하면 결혼 타령이라 다비도 걱정이 들었다.
“재하야.”
“네. 형.”
“결혼하고 싶어?”
“형이랑요.”
“그럼 내가 일을 그만둘까?”
재하가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건 형이 좋아하는 일이니까 계속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회사 그만두고 독일로 넘어가서 네 공연 따라다니면서 유재하 화보 찍어서 팔아먹는 건 어때? 사진이야 취미로 찍지 뭐. 유재하 돈 많다고 맨날 자랑했잖아.”
“형 사치 부리면서 먹여 살릴 재력은 넘치는데…. 그럼, 형 독일 오면 나하고 결혼해줄 거예요?”
“…아니. 그냥 동거.”
“그럼 안 해요.”
누가 유리온 조카 아니랄까 봐 재하가 제 삼촌처럼 고개를 휙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옷만 입고 있었다면 분명 멱살을 잡고 잘잘 흔들며 짜증을 퍼부을 만큼 얄미웠다. 다비는 움켜쥐었던 주먹을 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생각 좀 해보자. 네가 왜 진짜 이유를 말 안 하고 입 꾹 다물고 있는지 내가 알아낼 테니까, 그 깜찍한 이유는 계속 유재하 맘속에 가둬두고 있어.”
“형, 제가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그냥 일주일 동안 섹스만 하면 안 돼요?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화났어요?”
“화 안 났고, 섹스 안 해. 이게 어디서 섹스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귀엽게 굴어도 소용없어. 오늘 누가 이기는지 어디 한번 해보자고.”
“형, 지금 화내면서 나 귀엽다고 했는데요. 저 좀 귀여웠어요?”
“애교 부리지 마. 난 거실에 있을 거니까 넌 침실에 있어. 밖으로 나오면 나 이 상태로 뛰쳐나가 버릴 거야.”
다비는 속옷만 입은 상태로 거실로 나가버렸다. 재하는 닫힌 문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발을 파닥거렸다.
“계속 내 생각만 해요, 그렇게.”
다비가 자신의 분리 불안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그간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연락하지 않으면 먼저 연락하지 않던 다비가 매일 시간 맞춰 전화를 걸어주고 영상 통화도 건넸다. 가끔 불안하다고 하면, 독일로 날아와 주기도 했다. 촬영에 가도 통신이 연결되기만 하면 할 말이 없더라도 꼬박꼬박 연락을 해주었다.
만났을 때만 느꼈던 애정을 떨어져 있어도 받고 있단 생각에 계속 어리광을 부렸더니, 다비가 자신을 다 받아주었다. 오히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까 의식하고 좋은 말만 해주고 다정하게 굴어서 불안하지 않아도 불안하다고 거짓말을 할 때도 있었다. 너무 오래 질질 끌면 다비가 힘들어할 것 같아서 최근에 분리 불안증은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래도 다비는 버릇이 됐는지 예전처럼 계속 연락해주었다.
결혼 이야기도 사실 그런 거였다. 부담스러워하는 건 알지만, 그때마다 진지하게 고민해주니까 자꾸 꺼내게 되었다. 어쩔 수 없었다. 고민하는 다비의 모습을 지켜보면 누구나 그 말을 계속 꺼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때리고 싶은데 참으려고 애쓰는 모습이라든가, 욕을 하려다가 참으며 손으로 쓸어주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기회를 어떻게 놓친단 말인가. 다비가 자신을 위해 참아주는 걸 보는 건 사랑받고 있는 것 같아 좋았다.
“형은 마음이 너무 약해서 큰일이에요. 이러다 진짜 결혼하자며 들어올 것 같은데…. 형이 먼저 청혼해줬으면 좋겠다.”
재하는 다비가 더 고민할 수 있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
다비는 다른 건 다 잘하면서 연애에 서툴렀다. 하지만, 재하와는 조용히 오랫동안 평안하게 사귀고 싶었다. 녀석의 말대로 결혼까지 가능하다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싶었다.
재하의 불안증이 혹시 자신의 서툰 행동 때문일까 걱정된 다비는 주위의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마침 둘의 사이를 알고 있고, 자신들처럼 장거리 연애를 오래 하면서도 갈등 없이 꽃길만 걷고 있는 커플이 가까이에 있었다.
-응,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어. 솔직히 이런 이야기에 공감해줄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리온이 너도 훈이랑 떨어져 있을 때 그렇게 불안해했나 궁금했거든.”
-나는 안 불안했는데?
단호하고 해맑은 리온의 대답에 상담자를 잘못 고른 것 같다고 잠시 후회했다. 훈이가 그렇게 정성을 쏟으니 같은 조건이어도 리온은 불안함 같은 걸 못 느꼈을 텐데 어쩌자고 얘한테 전화를 걸었는지 모르겠다.
그때, 리온이 다비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렇지만, 재하처럼 불안해하는 케이스는 많이 봤어. 아무래도 우리 직업이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는 직업이다 보니까, 연애하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잖아. 나야 훈이가 내가 어디에 있든 꼭 와주고 하루에 몇 번씩 영상 통화하면서 얼굴도 확인하지만, 모든 사람이 훈이 같지는 않으니까 오래 사귀기 힘들거든.
“그럼 다른 사람들은 그럴 때 어땠어?”
-그래서 결혼하는 사람도 있어. 아무래도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관계보다 법적으로 이어져 있으면 정신적으로 안정되니까.
재하의 정도가 조금 심할 뿐 일반적으로 느끼는 불안감이라는 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서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고 생각하자, 자신에게 부담을 줄까 봐 입을 다물었던 게 이해가 됐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약해지는 자신을 잘 아는 녀석이니까, 제대로 생각해보라고 시간을 주는 모양이었다.
“결혼하면 좀 나아져? 다른 사람들도 그랬어?”
-글쎄. 겉보기엔 안정적으로 보였어. 그런데 왜? 재하가 결혼하고 싶다고 그래? 미안해. 우리 재하가 집착이 좀 심하지? 그런데 다 받아주진 마. 그러다가 어느 순간 너 일도 못 하게 돼.
“아,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그리고 재하 생각보다 말 잘 듣는 놈이야.”
-…재하가? 진짜?
리온이 못 믿겠다는 듯 되묻자, 다비는 어쩐지 재하를 감싸주고 싶었다. 변명이라고 보기에는 사실이라서, 말하는데 그다지 거리끼거나 양심의 가책은 들지 않았다.
“재하가 집착은 좀 있지만, 애가 순하고 착해. 그리고 내가 통제 못 할 만큼 엇나가는 녀석도 아니고.”
-힉? 진짜? 재하를 통제할 수 있다고? 혹시 조련사 자격증도 있어?
“뭐래. 내가 그런 게 왜 있어. 너는 무슨… 조카를 들짐승처럼 말하고 그러냐.”
-아니. 재하가 착하긴 하지만 가끔…. 음…. 어…. 아니야. 아무것도. 네가 통제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 같은데. 우아, 다비 멋있다. 재하를….
칭찬 같지 않은 칭찬에 다비의 기분이 묘해졌다. 정말로 재하는 유순하기 짝이 없고 눈물도 많은 녀석인데, 가장 가까이에서 재하를 보는 리온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리온아, 혹시 재하가 너 아직도 괴롭히고 그래?”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재하 착하고 순한 거 맞아. 그냥… 가끔…. 가끔….
“뭐, 미친놈 같다고?”
-헉? 알고 있어?
그냥 한번 찔러본 말인데 리온이 크게 놀라워했다. 모르고 사귀는 것도 아닌데, 딴에는 삼촌이라고 조카를 감싸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마냥 아이 같을 줄 알았더니 조카 일이라고 제법 윗사람처럼 구는 모습이 기특했다.
“알고 사귀는 거야. 그리고 그것도 통제할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응. 말 못 해서 미안해. 그거 빼고는 착한 애야. 그래도 재하가 네 말은 잘 들어서 다행이다.
“그래. 오늘 도움 되는 이야기 많이 들었어. 고맙다.”
-아니야.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 정말 우리 재하 잘 부탁해.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리온과 통화 후, 다비는 재하의 결혼 타령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재하는 자신과 결혼하고 싶지만, 동정심으로는 하는 건 싫었나 보다. 그렇다고 자신이 원할 때까지 마냥 기다리면 기약이 없으니 이런 식으로 툭 던지며 계속 고민하게끔 했던 거였다.
“미친, 애새끼 아니라고 했더니…. 애새끼였네. 누가 결혼을 동정심으로 해줘.”
이유를 알아냈으니 망설일 게 없었다. 다비는 침실로 향했다.
침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재하가 몸을 일으키고 다비를 반겼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잠깐 떨어져 있었던 건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실거리는 녀석에게 곧바로 다가가 잡아먹을 듯 재하의 입술을 덮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다비가 입을 맞춰주니까 재하는 좋아서 다비의 입맞춤을 받아주었다. 다비는 입술을 떼어내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내가 동정심으로 너한테 결혼하자고 할 거 같아서 무서웠냐?”
“…네?”
“그래서 말 못 한 거잖아. 아직도 불안해하면서.”
“누구하고 통화한 거예요?”
“너랑 같은 직업군에 있는 사람한테 조언 좀 얻었지. 공연 다니면 계속 떠돌아다니니까 단순히 사귀는 거로는 불안해서 안정적인 형태를 원한다고 그러던데?”
“삼촌이네. 우리 삼촌이 그런 이야기도 할 줄 알아요?”
훈과 항상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더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기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삼촌의 성장을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다비에게 이렇게 허무하게 들키고 싶진 않았다. 재하는 조금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형이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에요. 제가 다스려야 하는 걸 형한테 떠넘기고 싶진 않으니까요. 그래도 계속 이야기 꺼내면 형도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줄 것 같아서 말만 던져본 거예요. 꼭 하자는 건 아니니까 부담 같은 거….”
“진지하게 생각해볼게.”
“…네?”
“나는 네가 내 곁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게 중요해. 내가 너한테 받은 애정이 얼마나 많은데, 불공평하게 너는 아직도 불안해하냐. 내가 너한테 제대로 못 해줬단 소리 같잖아. 동정심 아니고 네가 좋으니까 네 안정감을 위해서 내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다고.”
단순히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다비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재하는 다비의 결정이 좋으면서도 미안했다.
“형, 자꾸 잘해주면 저 욕심나요.”
“욕심내.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테니까 뭐든 말해. 우리 지금까지 그런 줄 알았더니 나만 그랬나 보네.”
“어쩌면, 형 한동안 촬영 못 할지도 몰라요. 그렇게 잘해주면 계속 내 옆에서만 있어 달라고 조를 거예요.”
“이번 추석에 우리 부모님께 인사 갈래?”
프러포즈 같은 말에 재하가 결국 참지 못하고 다비를 꽉 끌어안았다. 평소엔 우유부단하면서도 한번 결정하면 최선을 다하는 올곧은 사람이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해요, 형.”
“그래. 그때까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제대로 준비해서 인사 가보자. 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나올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거든.”
지난 시간 동안 둘은 다른 사람의 반대에 굴하지 않을 만큼 애정을 주고받았다. 부모님이 반대하더라도 그걸로 애정이 금이 가진 않겠지만, 조금 슬플 것 같았다. 재하 역시 다비의 그런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라서 조금이라도 덜 아플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아, 형. 모아 누나를 우리 편으로 먼저 만들어 놓으면 안 돼요?”
“모아라….”
부모님의 자랑이자 보물인 모아를 설득해두면 확실히 나쁘진 않았다. 아군이 하나라도 있으면 아무래도 마음이 든든해지니까 말이다. 다비는 좋은 작전을 말해준 재하에게 고마움의 입맞춤을 해주었다.
“생각은 좋은데, 모아가 우리 편이 되어줄지는 모르겠네. 걔가 누구 편들어주고 그런 성격은 아니거든. 아니, 어쩌면 너무 들어줘서 반대할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쌍둥이는 뭐가 막 통한다면서요. 부모님보다 더 가까이에서 있었으니까 형을 더 감싸주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모아 누나가 말은 차가워도 정이 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정은 많은데, 지금은 경우가 다르잖아. 게이라는 걸 밝히는 것도 모자라서 상대가 너라는 거 알면, 모아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안 가서. 훈이하고 리온이 때는 쿨하게 넘어가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가족이라서 쿨해질 수 없는 때도 있으니까…. 그래도 모아가 우리 편이 되면 부모님 설득하는 게 더 쉽긴 할 텐데….”
다비가 모아 생각으로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재하의 손이 은근슬쩍 속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다비는 엉덩이를 주물거리는 버릇없는 손을 붙잡으며 어이없어 픽 웃었다.
“너 뭐 하냐.”
“진지하게 고민하는 형을 보고 있으니까 갑자기 꼴려서?”
“뭐래. 뭐, 이번 추석에 모아도 끌고 가겠다고 이야기해뒀으니 추석 전에 모아를 한 번 만나긴 해야겠네. 지금 당장 급한 일도 아니니까 일단 급한 불부터 끌까?”
다비가 제 가슴을 잘근거리는 재하의 뒤통수를 팔로 감싸 안으며 재하의 애교를 받아주었다. 조금 전까지 몸을 섞었던 터라 다른 준비도 필요 없었다. 재하는 다비의 속옷 허리 밴드에 손을 걸었다.
그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며 재하의 머리를 쓸어주던 다비가 상체를 틀어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비의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자, 재하가 연한 살을 살짝 깨물며 투정 부렸다.
“형, 우리 섹스할 건데 지금 어딜 보고 있어요?”
“밖에서 소리가….”
“무시하면 가겠죠.”
“그런데… 아읏.”
재하가 못마땅한 듯 이를 박아 넣으며, 속옷을 확 내렸다. 다비가 재하의 머리통을 감싸고 몸을 움츠렸다. 몸은 달궈지는데, 자꾸 문소리가 거슬렸다. 노크 소리가 이상하게 익숙한 리듬이었다. 다비는 속옷을 다시 추켜올렸다.
“잠깐만, 재하야. 기다려봐. 아무래도 신경 쓰여.”
“형, 지금 그렇게 입고 나가려고요?”
“어. 뭐 어때. 이러고 나가면 민망해서라도 빨리 이야기하고 가겠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만큼 다비의 몸이 예술이긴 하지만, 남들에게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온몸이 울긋불긋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야한데, 그 몸을 대체 누굴 보여주려고. 재하는 다비를 침대에 앉히고 일어나서 티셔츠를 입었다.
“제가 나갈게요. 형, 몸까지 멋있는 거 남들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중요한 일 아니면, 다음에 보자고 하면 되는 거죠?”
“어. 그러면 돼.”
재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을 나갔다. 다비는 무언가 자꾸 신경 쓰였다.
공동현관에서 벨을 누르는 게 아니고 직접 문을 두드렸으니 같은 건물 사람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 노크 소리가 낯익었다. 공동현관을 열 수 있는 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기까지 생각하던 다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미친.”
다비가 노크의 주인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침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꼭 맞아떨어지는 건지.
“…모, 모아야.”
재하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쌍둥이인 모아였다.
모아는 시선이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는 재하와 속옷 바람으로 침실에서 뛰쳐나온 다비를 번갈아 가며 보다가, 일단 무심한 얼굴로 다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김다비, 일단 들어오라고 이야기 좀 하지?”
이 와중에도 침착한 걸 보면, 정말 모아가 확실했다.
다비가 옷을 갖춰 입는 동안 재하가 모아를 맞이했다. 모아는 거실 옆에 작은 캐리어를 내려놓고 익숙한 듯 소파에 앉았다. 예전에 봤을 때는 그냥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다비가 어렸을 때 모아와 똑같았단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과거의 다비를 만나고 있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묘해졌다.
“누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어. 재하도 잘 지내는 거 같네.”
“네. 얼마 전에 유럽 투어 끝나고 잠깐 시간이 나서 놀러 왔어요.”
“그랬구나. 난 이쪽에서 학회가 있었거든. 돌아가기 전에 다비 얼굴이나 잠깐 보려고 온 건데….”
모아는 말을 하다 말고 다비의 침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옷을 입고 나온 다비가 모아와 눈이 마주쳤다. 다비는 짧은 순간 모아의 상태를 살폈지만, 워낙 덤덤한 스타일이라 겉으로 보기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기가 힘들었다. 다비가 먼저 모아에게 말을 걸었다.
“너 여기 갑자기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학회 때문에 왔어. 그리고 메일도 보내고 문자도 보냈어. 전화는 안 받더라.”
“아, 전화 무음이라…. 내가 확인 안 했네. 아무튼, 바쁜 거 아니야?”
“바빠. 그렇지만 아무리 바빠도 네 얼굴 볼 시간은 있어서 온 건데, 내가 방해한 모양이다.”
“방해는 무슨…. 아, 자고 갈 거야? 자고 갈 거면 시트 바꾸려고.”
모아는 대답 대신 재하를 보았다.
“내가 여기서 자면 둘이 불편할 거 같은데?”
재하는 속으로 모아의 말에 동의했지만, 상대는 다비의 가족이었다. 게다가 아군으로 만들어 두어야 하는 사람인데 스스로 와줬으니 이참에 잘 보여야겠단 생각이 우선이었다. 재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불편한 거 아닙니다.”
“재하가 거짓말이 서투르네. 밤 비행기 타고 갈 거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내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도 아니고.”
다비가 모아의 뒤에서 손으로 눈을 가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들키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차라리 눈으로 보는 게 이해는 더 빠르니까, 이렇게 들킨 게 차라리 더 나은 거라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어…. 마, 많이 놀랐지?”
“전혀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겉보기엔 이 집에서 가장 평온해 보이는 사람이건만 놀랐다고 말하는 게 거짓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모아가 쓸데없는 일로 거짓말하는 애는 아니라서 다비는 멋쩍게 웃으며 소파를 넘어와 모아의 곁에 앉았다. 그제야 재하도 대각선 맞은편 소파에 앉을 수 있었다.
다비는 재하에게 이렇게 된 거 지금 설명하는 게 나을 거라고 눈짓했다. 재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가 말하겠다고 눈짓했고, 다비는 고개를 저으며 자기가 말하겠다고 눈짓했다. 눈으로 오가는 말이 한창일 때, 모아가 가만히 말했다.
“그냥 말해. 듣고 있을 테니까. 내 말은 너희들 이야기 듣고 할게.”
다비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잘못한 건 아니니까 모아한테 미안한 건 아니었지만, 가족한테 말하지 못했던 걸 말하려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 언젠가 말하려고 했던 건데. 나 게이야. 그리고 보다시피 지금 재하하고 사귀고 있어. 사귄 지는 좀 됐어. 둘이 시간이 나서 오랜만에 만난 거야. 일은 제대로 하고 있고 서로 좋아해. 어… 그래서 결혼하려… 아이 씨, 나 지금 뭐라냐.”
가족에게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려니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꼬이고 있었다. 모아가 자신을 비난하거나 이상하게 볼 애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서로 떨어져 지낸 지 7년이라 예전과 달리 모아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재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다비를 보다가 옆에서 얼른 말을 보탰다.
“형은 계속 싫다고 했는데 제가 형 좋아해서 계속 사귀자고 따라다녔어요. 형이 그런 성향이 아니었어도 제가 어떻게든 사귀려고 했을 거예요. 형은 진짜 계속 안 받아줬거든요. 저희 진짜 힘들게 사귀었고 지금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러니까 나쁜 말 하시려거든 저한테 하시면 돼요.”
모아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둘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다비와 재하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아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자, 그제야 모아가 입을 열었다.
“둘이 좋아서 사귄다는데 뭐 어쩌겠어. 나한테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다비가 게이인 것도 알고 있었고, 재하가 다비 좋아해서 따라다닌 것도 알고 있었거든. 그런데 사귀는 걸 몰라서 놀랐을 뿐이야. 정말 몰랐거든.”
다비가 모아의 말을 듣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되물어야 할지 몰라 입을 벙긋거렸다. 무심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짚어야 할 핵심이 너무 많았다.
“…내가 게이인 거 알았다고?”
“어. 너 어렸을 때부터 여자애들한테 관심 없었잖아.”
“야, 여자애들한테 관심 없었다고 내가 게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넌 정 많은 애라서 되게 티 나. 어렸을 때부터 네 취향인 애들…. 뭐 그게 이유가 다는 아니지만, 재하 앞에서 과거사 운운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거기까지만 말할게.”
“어. 추측할 수 있게 말 다 해놓고 참 고맙다. 아무튼, 재하가 따라다니는 것도 알았다고?”
“이건 지수도 알걸? 재하가 대놓고 티 냈는데, 그거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문제 있는 거 아닌가? 리온이라면 모를까.”
재하와 다비가 모아의 뛰어난 통찰력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아무리 쿨하다지만, 이렇게까지 쿨할 수 있는 건가 싶을 때 모아가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결혼 이야기는 나한테 조금 영향이 가니까 문제네. 둘이 지금 나한테 편들어 달라고 할 생각이지?”
재하가 눈을 크게 뜨며 용한 무당을 만난 것처럼 놀라워했다.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미리 말하는 게 꼭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해서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사실 누나 도움이 필요해서요. 추석에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자고 이야기는 했지만, 다비 형이 걱정이 많거든요. 그래서 누나가 명절에 형 옆에서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렇게 도움이 안 될 텐데. 그리고 우리 부모님도 외국 생활 오래 하신 분들이라 그런 거에 편견 없는 분이셔. 놀라긴 하겠지만, 반대하실 분들은 아니야. 다만 재하가 Y·F그룹 사람이라는 게 조금 걸려. 너희 집에서는 반대 안 하셨어?”
“아직… 사귀는 건 말 안 했어요.”
“단순 교제도 아니고 결혼 이야기가 나오면 너희 집에서 쉽게 허락해주실 것 같진 않은데. 리온이하고 훈이는 양가 허락을 받고 사귀는 거지만, 결혼한 건 아니잖아. 너희도 그냥 사귀는 건 안 돼?”
재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비는 왜 그런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재하의 아버지가 이 관계를 불편하게 여기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다비는 나름대로 자신의 부모님을 먼저 만나고 인사시키려고 했던 거였는데, 모아가 재하의 기를 죽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 약한 애인데, 모아의 말이 맞는 말이라고 해도 재하가 시무룩한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재하나 나나 특성상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직업이잖아. 멀리 떨어져서 지내니까 조금 더 돈독하게 법적으로 이어지고 싶어서 그래. 우리끼리 스웨덴에서 결혼할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가족들한테 축하받으면서 하고 싶었어. 특히 너한테는 더 축하받고 싶다.”
“난 네가 행복하면 언제든 축하해줄 수 있어. 하지만 상대 쪽에서 반대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물론이고 부모님도 그런 결혼 허락해주실 리 없잖아. 네가 뭐가 아쉬워서 반대를 당해. 난 네가 찬란하고 아름답게 살길 바라. 그래서 네가 조금이라도 아픈 건 싫다, 다비야. 재하하고 사귀지 말라는 게 아니야. 결혼하고 싶으면 재하네 허락부터 재하가 받아오라는 거지.”
지금은 떨어져서 살지만, 다비와 모아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함께 붙어 있던 사이였다. 태어난 후로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함께 자랐다. 쌍둥이라는 걸 증명하듯 둘은 고1 때까지 일란성처럼 똑같았다. 떨어져 지내는 지금도 서로 말로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다비가 모아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처럼 모아도 다비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그러니까 모아는 다비가 조금이라도 상처받는 게 싫었다. 그때처럼.
“나는 네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 하지만, 네가 굉장히 힘들어했던 시기가 있다는 건 알아. 난 그때 네가 언제든 나에게 말해주길 바라고 기다렸어.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으니 그게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난 네가 이제 아프지 않았으면 해.”
편을 들어주겠다는 말보다 더 고맙고 든든한 말에 다비는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그거면 될 것 같았다.
“우리 모아는 꼭 이럴 때만 누나처럼 군다. 그런데 어떡하냐. 난 재하네 부모님이 반대해도 재하하고 계속 같이 지내고 싶거든. 그 과정에서 아플 수는 있지만 힘들다고 생각은 안 하려고. 편들어 달란 소리 안 할게. 지금처럼 든든하게 있어줘.”
모아는 재하를 보았다. 재하가 어릴 적부터 다비를 좋아했다는 건 알았지만 다비는 재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끝까지 숨기려고 했던 애였고, 자신에게 이런 상황을 들켰어도 모르는 척 넘어가려고 했다면 모아 역시 모르는 척해줬을 터였다. 하지만 다비는 재하와 제대로 잘해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참견해달라고 손을 내밀었으니까 모아는 이번 일에 참견하기로 했다.
“재하야, 난 다비처럼 사교성이 좋지 못해. 말이 조금 직설적이라서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맞추는 일은 못 하거든. 그래서 지금 내가 하는 말이 기분 나쁠 수도 있어. 하지만 난 다비가 정말 행복하길 바라서 하는 소리야.”
“네. 말씀하세요, 누나.”
“결혼하고 싶다면 너희 부모님께 네가 제대로 허락을 받고 와. 만약 우리 부모님이 반대하신다면 그건 내가 막아줄 테니까. 난 다비가 속상한 게 세상에서 제일 싫고 불쾌하거든. 너희 집안이 대단한 집안이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다비가 이유 없이 반대당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재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들은 다비 형을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좋아하세요. 반대하는 게 아니라 불편하신 거예요. 저 때문에요. 그건 제가 설득해볼게요. 그러니까 모아 누나는 계속 다비 형 편에 있어 주세요. 형이 행복해야 저도 행복해지니까요.”
“그래. 그런 거라면 조금 마음이 놓이고.”
“부럽네요. 그런 우애 같은 거요. 전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어렸을 때 제가 일찍 유학 가서 그런지, 지금은 그냥 남남 같더라고요. 제가 살가운 편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래서 사이좋은 가족들을 보면 부러워요.”
재하의 칭찬에 다비와 모아가 서로를 마주 보더니 불쾌해하며 동시에 말했다.
“우리 둘이 친하다고? 내가? 김모아랑?”
“나 지금 굉장히 불쾌한데. 다비하고 친한 건 아니야. 내가 친한 건 지수지.”
“보기 좋네요.”
말을 할수록 부러움을 사고 있어서 괜히 민망해진 다비가 재하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가족끼리 친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통하는 게 가족인걸. 너도 네 동생하고 몇 마디 나눠보면 금방 좋아질 거야. 우리 율리도 어쩌다가 한 번 보는데도 우리가 형이랑 누나라고 낯가리는 것도 없이 금방 따르고 예쁜 짓만 하더라.”
재하는 다비가 위로해줬다는 사실에 기뻐 히죽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다비가 흐뭇해하자 모아가 썩은 눈으로 창밖을 보며 말했다.
“…율리 보고 싶네.”
“나도. 그런데 지금 거긴 한밤중. 이따 전화해. 그리고 몇 시 비행기야?”
“저녁 먹고 가면 돼.”
“그냥 자고 가지. 여기서 오래 걸리잖아.”
“비행기에서 자면 돼. 정말 네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던 거야.”
단호하게 잘라내는 게 정말 모아다워서 다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밥해줄까?”
“아니. 사 먹자.”
재하와 다비, 모아는 저녁을 함께 먹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모아의 근황을 물었던 다비가 심해 해양 생물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잔뜩 듣고 현기증을 일으켰다. 공부 머리는 모아에게 다 갔다고 하더니, 다비의 행동을 보니까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재하와 다비는 공항까지 모아를 배웅하러 따라갔다. 모아는 혼자 갈 수 있다고 했지만, 다비가 매달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주었다. 다비는 모아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추석에 너 끌고 갈 거야. 마을 사람들이 전부 너 안 오냐고 찾더라.”
“바빠. 연구실에서 좀비처럼 살고 있으니까 찾아오지 마.”
“나 추석 때 재하 데리고 인사하러 갈 건데, 진짜 안 올 거냐?”
“…알았으니까 불쌍한 척하지 말지? 시간 맞춰 볼게. 건강하게 잘 먹고 다녀. 넌 여기저기 돌아다니니까 건강이 제일 중요해.”
“뭐래. 너나 잘 먹어. 연구실에서 좀비처럼 살지 말고. 추석 때까지 살 좀 찌워놔. 엄마하고 아빠가 걱정한다고.”
“너나 잘 먹어.”
“나는 잘 먹는다고…. 우리 뭐 하냐. 애새끼처럼. 얼른 들어가라.”
마지막까지 투닥거리더니 괜히 울컥했는지 둘은 코를 동시에 훌쩍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모아나 다비나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면 괜히 코끝이 찡해지는 게 어쩔 수 없는 한 핏줄이었다. 모아가 먼저 다비의 팔을 토닥이며 애써 웃었다.
“잘 지내고 있어. 다음에 보고.”
“어. 조심히 가라.”
“재하야.”
“네, 누나.”
모아는 재하에게 손짓해서 가까이 불렀다. 재하가 성큼 가서 몸을 숙여주자 모아가 낮게 속삭였다.
“우리 다비 진짜 마음 여린 애니까, 얘 울리면 정말 가만 안 둘 거야. 훈이 시켜서 너 고구마밭에 묻어버리고 발로 땅을 꾹꾹 눌러 다져놓을 거야. 이거 농담 아니니까 새겨들어라.”
“두 번째 살해 예고네요.”
“뭐? 나 말고 누가 또…. 훈이가 먼저 말했구나. 그럼 더 거리낄 거 없네. 너희 둘 다 행복하길 바라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다비가 우선인 건 어쩔 수가 없다. 다비한테 잘하면, 다비도 너한테 잘할 거라는 거, 나보다도 네가 더 잘 알겠지. 말이 길어졌네. 너희들 인생인데 나답지 않게 자꾸 참견했다.”
“괜찮아요. 저 형한테 진짜 잘할게요. 형이 왜 가족들에게 이야기 안 했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누나가 덤덤하게 받아줘서 의외였어요.”
“다비가 착해서 그래. 만에 하나 일어나지 않을 일로 가족들이 실망하게 될까 봐 무서웠던 거지. 그런 애가 용기 내서 우리 가족들한테 말하겠다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정말 잘해.”
이야기가 길어지자 다비가 둘 사이에 파고들어 떼어 놓았다. 재하가 계속 기쁜 듯 히죽거리는 표정이 묻지 않아도 모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다비가 모아를 보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간을 구겼다.
“김모아, 너 내 흉봤냐?”
“티 났나. 들켰으니 이만 가 봐야겠다. 건강히 지내고 명절에 봐. 그 이전에 볼 수 있으면 보고.”
“그래. 얼른 가라.”
다비가 모아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자, 모아도 다비의 등을 영혼 없이 토닥여주다가 떨어졌다. 모아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던 다비가 뒤늦게 고개를 숙이고 훌쩍거렸다.
모아는 자신에게 가족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자신을 반대하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조금은 두려웠다. 하지만 모아는 역시 모아였다. 둘을 응원해주는 것조차 모아답게 쿨해서 고마운 마음이 울컥 터져 나왔다. 세상이 모두 반대하더라도 모아만큼은 영원한 제 편이었다.
훌쩍 소리에 재하가 몸을 숙이며 다비의 상태를 살폈다.
“형, 울어요?”
“아니? 안 우는데?”
다비가 고개를 치켜들자, 재하가 어쩐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맞췄다. 눈이 촉촉해지긴 했지만 정말 울고 있지는 않아서 의외였다.
“모아 누나 때문에 울면 조금 서운할 것 같았는데, 막상 안 울고 있으니까 그건 그거대로 아쉽네요.”
“뭐라는 거야. 내 눈물이 얼마나 비싼데, 그걸 그렇게 쉽게 보려고 해.”
“비싼 눈물이니까 내 앞에서만 흘려요. 나 때문에 울면 더 좋고. 돌아가서 울 때까지 하던 거마저 할까요?”
조금 감동 좀 하려고 했더니, 마지막 말에 다비가 재하를 발로 툭 걷어차며 정색했다.
“넌 대체. 이런 분위기에 음란함을 끼얹어야겠냐?”
“싫어요? 좋아할 줄 알았는데….”
“좋은데? 얼른 가자.”
둘은 이번 휴가에서 무너지지 않을 만큼 든든한 아군을 확보하게 되었다.
***
‘이번에 집에 가면 부모님께 형하고 사귄다고 이야기할게요.’
‘내가 같이 안 가도 돼?’
‘모아 누나가 그랬잖아요. 제가 직접 허락받고 오라고. 제가 먼저 이야기해볼게요.’
…라고 재하와 몇 주 전에 통화했던 것 같은데,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김다비 씨 번호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출장 때문에 미국에 오게 됐는데, 시간 되면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해서 만나게 된 사람은 다름 아닌 재하의 아버지였다. 사무실이나 카페에서 만날 거라는 생각과 달리 지온이 직접 다비의 집으로 찾아왔다.
재하의 아버지인 유지온 회장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훈과 동반 입대로 같은 부대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훈을 면회 온 사람 중 한 명이 재하의 아버지였다. 훈과 다비의 면회가 겹쳐서 종종 본 적이 있지만, 전역한 이후로는 딱히 만날 일이 없었다.
재하의 말을 떠올린다면, 재하가 20살에 부모님께 짝사랑 상대를 말했다고 했었다. 그때 다비가 군대에 있을 무렵이었으니, 재하의 아버지는 짝사랑 상대가 다비라는 걸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생각하니 조금 민망했지만 이제 와서 자기도 몰랐던 과거에 민망함을 갖는 것도 이상했다. 일단은 재하의 아버지를 만나는 지금을 중요하게 여기기로 했다.
재하가 부모님께 이야기 잘했다고 했는데, 회장이 찾아왔다는 건 그리 좋은 이야기가 나올 징조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라면 반대하러 왔다고 보는 게 거의 정확했다. 회장이 이런 곳으로 출장을 올 리가 없었다. 출장을 핑계로 자신을 보러 온 거겠지. 연인의 부모와 마주한다는 건 살면서 생각해본 적 없어서 다비는 지온과 마주 앉아 있는 이 순간이 불편하고 당혹스러웠다.
재하의 미래를 쉽게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재하와 닮은 지온의 시선이 다비에게 닿았다. 다비는 저도 모르게 각을 잡고 앉을 만큼 바짝 긴장했다. 유 회장은 잠시 다비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바라보다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소에 담긴 느낌이 어딘가 다정해서 다비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우리 재하하고 사귀게 되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날카로운 시선과 달리 지온은 다비의 말에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오히려 그런 행동에 드라마에서 봤던 온갖 반대 유형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러다 갑자기 물을 끼얹거나, 돈 봉투를 던지거나, 뒷목을 잡고 쓰러지거나. 지온은 어느 타입일지 궁금해하는데, 다비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재하가 협박했나요?”
“…네? 잘 못 들었습니다.”
“우리 재하가 뭔가 약점 같은 걸 잡아서 다비 씨를 강제로….”
“네?”
다비가 같은 말만 반복하자 지온의 눈에 갑자기 근심이 가득해졌다. 지온은 만년필을 꺼내 들어 메모지에 글을 써나갔다.
『도청되고 있는 거라면 그냥 고갯짓으로 답하면 됩니다.』
다비는 도무지 지온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얼른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거 없습니다.”
다비의 말에도 지온은 안심하지 못했다. 지온을 따라온 경호팀을 불러 도청 감지기로 다비의 몸과 집 내부를 수색했다. 다비는 협조하면서도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재하가 자식인데, 이런 취급은 조금 이상해 보였다. 도청 장치가 없다고 확인받은 후에야 지온은 안심하며 다비를 자리에 앉혔다.
“아,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비 씨가 보호 대상으로 등록되어 있는 걸 확인했을 때부터 조금 걱정스러웠거든요. 혹시 재하한테 부당한 일을 강요당한 게 아닌가 싶어서요.”
“아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재하가 그럴 애는 아니죠.”
“다비 씨가 우리 재하와 사귀게 되었단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재하는 어떻게든 막아볼 테니까, 다비 씨는 잠시 숨어서 지내는 게 나을 겁니다. 이쪽에서 다비 씨의 안전을 우선으로….”
“아뇨. 잠시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제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아버…. 아니, 일단 유 회장님께서 저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제가 이해하기 쉽게 먼저 설명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지온은 다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침착해졌다.
“다비 씨가 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재하는 집착 성향이 꽤 심한 아이입니다. 재하를 생각하면 다비 씨가 우리 재하와 사귀는 걸 고마워해야 하지만, 다비 씨의 남은 인생을 생각하면 헤어지는 게 나아서요.”
“대체….”
다비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알던 유 회장은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다. 동생인 리온과 리온의 연인인 훈에게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재벌답지 않게 꽤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은근히 냉정한 사람이었다.
서로 떨어져 있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자식에게 더 엄한 사람인 건가. 유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거라고 배웠다.
“회장님께서 재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지금까지 봐온 재하는 착하고 순합니다. 집착 성향이 있는 거 알지만, 상대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애는 아니에요. 혼자 괴로워할지언정 제게 무언가를 억지로 강요한 적은 없습니다. 전부 이야기를 나누고 제 동의를 받았으니까요.”
“정말 다비 씨하고 제대로 이야기하고 재하가 행동했습니까? 다비 씨가 재하의 고집을 들어준 건 아니고요?”
“그건….”
재하가 끌고 가면 끌려다니긴 했지만, 그게 싫진 않았다. 전부 자신을 위해 했던 행동이고 재하의 마음이 예뻐서 들어주었다. 적어도 강압적으로 군 적은 없었다. 다비는 말을 이었다.
“제가 받아줄 수 있는 건 받아줬습니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잘랐고요.”
“사귀고 난 후에 다비 씨는 일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뭐든 가져야 하는 아이였습니다. 제 손에 들어오면 애지중지 아껴주지만, 남의 손에 들어가는 걸 정말 싫어하는 아이였죠. 물건을 얻는 게 어려운 환경도 아니었고 원하면 손에 넣는 걸 당연하게 여겼죠. 그랬던 재하가 다비 씨를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면, 재하는 행복할지 모르지만 다비 씨는 힘들어질 겁니다. 정말 괜찮겠어요?”
지온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다비는 자꾸 인상이 찌푸려졌다. 리온도 그렇고 지온도 재하에게 꽤 부정적이었다. 리온은 그럴 수 있었다. 과거에 재하와 문제가 있었던 사이였으니 은연중에 재하에 대해 무서운 게 있을 수 있다지만, 아버지가 자식보다 자식의 연인을 더 걱정하며 도망치란 조언을 한다고?
차마 어른에게 버릇없이 굴 수는 없어서 다비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헤어지라는 말씀을 되게 어렵게 말씀하시네요. 제가 직접 선택하게끔 말이죠.”
“걱정돼서 그러는 겁니다. 재하는 어릴 적에 리온이에게 집착했던 아이예요. 그러다 리온이와 재하 둘 다 아팠던 경험이 있어요. 저는 그 집착이 다비 씨한테 옮겨간 거라 생각해서 걱정하는 겁니다. 오랫동안 다비 씨를 원했던 아이예요.”
“아무리 재하가 일찍 품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재하에 대해 너무 모르시네요. 그동안 재하는 많이 컸습니다. 몸만 큰 게 아니라 마음도 그만큼 자랐습니다. 참을성도 제법 있고요. 뭘 걱정하시는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자식을 믿어줘야 한다는 건 압니다. 뭔가 바뀌었단 생각이 자꾸 드네요. 제가 재하를 의심하고 무서워하면, 유 회장님께서 우리 재하는 그럴 애가 아니라고 말씀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온의 모습이 낯설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런 어른을 대하는 게 낯설었다.
아이는 언제나 미숙한 존재이므로 여러 상황에 도전해보고 조금씩 완성되어가는 조각 같은 존재였다. 아이가 어떻게 작품이 되어가느냐는 주위에서 응원해주는 사람들의 태도에 달려 있었다. 정성과 사랑으로 아이를 돌보면, 어른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아이들은 제 몫을 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란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도 유일하게 아이처럼 굴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그게 바로 부모의 품이었다. 어른이 된 자식들도 부모님 앞에서는 아이처럼 구는 게 당연했고, 부모님들은 다 큰 자식들을 아이처럼 대해주었다. 섬에서 그걸 자연스럽게 보고 자라서 그런지, 다비는 재하를 대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매우 속상했다. 그래서 조금 화가 났다.
“제 걱정을 하시는 것보다 재하를 먼저 믿어주셔야죠. 재하도 아픈 아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그렇게 대하시는 겁니까. 그럴 거면 그냥 제게 주세요. 제가 계속 키울 테니까요.”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갑자기 눈물이 훅 쏟아졌다. 자신과 다른 세상에서 자란 재하가 어딘가 불쌍해서. 조금 더 빨리 보듬어주지 못한 게 미안해졌다. 차라리 이런 걸 나한테 말을 하지. 그랬으면 더 빨리 데려와서 사랑만 주고 예쁘게 클 수 있게 해줬을 텐데.
속상하고 안쓰러워서 다비가 울고 있는데, 그런 다비를 보며 지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손수건을 꺼내 다비에게 건네며 지온이 말했다.
“어째서 재하가 다비 씨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네요. 말이 조금 심했죠.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울려버렸네요. 미안합니다.”
“…네?”
다비가 손수건을 받아들고 멍한 표정으로 지온을 보았다. 지온은 다비를 보며 자상한 미소를 보였다. 본의 아니게 어린아이를 울려버린 것 같아 미안했지만, 재하에게도 재하의 아픔을 공감해주고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매우 기뻤다. 오지도에 처음 갔을 때, 훈에게 다비의 SNS를 소개받은 그 순간부터 지온은 이렇게 다비와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리온이에게 훈이가 있는 것처럼, 재하에게도 훈이 같은 좋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오지도에서 착하고 좋은 가르침을 받고 자란 올바른 사람이요. 그러면 내 아이도 아픈 게 좀 나아질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지온은 말을 잠시 멈추고 다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비와 몇 마디 나누면서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훈과는 또 다르게 올곧고 바른 아이였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당찬 모습도 있었고 그러면서 착했다. 그가 찍은 사진처럼 말이다.
“다비 씨에 대해 잘 모르지만, 다비 씨의 작품들은 꽤 알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사진들이었죠. 다른 사진들보다 더 따뜻한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이런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재하와 친해지면 좋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래서 꽤 욕심냈습니다.”
재하가 다비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지온은 다비에게 미안한 마음부터 들었다. 재하는 다비가 자신을 받아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굴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재하도 좋은 사람을 만나서 리온처럼 행복하길 바라는 부모의 욕심 때문에 다비가 그 끈질긴 구애에 시달리는 걸 알면서도 방관하는 게 불편했다.
하지만 다비는 재하를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그때도 참견하고 싶었지만, 부모가 아들의 짝사랑에 개입하는 건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참견하고 말았다. 그룹의 총수가 되었을 때, 지온은 제일 먼저 지역 상생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대기업의 후원으로 지역 특산품을 개발하고 판매할 수 있는 판로를 열어주는 프로젝트였다.
여러 지역 중 오지도가 가장 많은 지원금을 받았다. 리온을 잘 돌봐주는 훈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지만, 다비의 아버지인 이장에게 좋은 점수를 미리 받아두고 싶었다. 먼 훗날 재하가 조금이라도 예쁨받았으면 좋겠다는 사적인 마음도 가득했다.
재하의 짝사랑은 계속됐다. 그러나 재하는 다비에게 좋은 영향을 계속 받으며, 착실하게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온은 이대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재하가 짝사랑에 실패하면 조용히 위로해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그러다 작년 추석에 재하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건넸었다. 그 이후로 다비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그러더니 어느 날 다비가 T-Watch 보호 대상에 등록됐다는 보고를 받았다.
처음에는 집안사람들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사고나 납치, 범죄 등을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만든 보호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다 각국의 몇몇 VIP들에게 요청을 받으며 엄격한 심사를 통해 보호 프로그램을 승인하는 식으로 운영했다. 하지만 위치 추적이 가능한 만큼 악용될 소지가 있어 상용화하지 않았는데, 그걸 재하가 다비와 함께 서로 위치 추적이 가능한 동반자 등록까지 했단 소리에 지온은 심장이 철렁했다.
다비가 받아주지 않은 것에 낙담한 재하가 결국 스토킹하려고 다비에게 몰래 시계를 선물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재하에게 확인해서 다비의 직업상 필요한 것 같아서 선물했고, 다비도 시계의 기능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나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다 지난주, 재하가 집에 찾아와서 뜻밖의 말을 건넸다. 다비와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다며, 허락해달라고 했다. 사귄다는 것도 놀라운데, 결혼 이야기까지 나오자 지온은 기쁘면서도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동안 밀어내기만 하던 다비가 어째서 허락했는지 궁금했다. 혹시라도 재하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거나 협박 같은 걸 당한 건 아닐까 걱정돼서 찾아오게 된 거였다.
다행히, 다비도 재하를 같은 마음으로 좋아한다는 걸 직접 확인하고 이제야 안심하고 축하해줄 수 있게 되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습니다. 재하가 다비 씨와 잘 됐다고 했을 때, 당장 결혼이라도 시키고 싶을 정도로 기뻤습니다. 그런데도 다비 씨를 따로 찾아온 이유는 다비 씨가 나중에 상처받을까 봐 걱정돼서였습니다. 재하의 집착을 모르고 사귀는 거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 같아서요. 그런데 기우였네요. 다비 씨는 그걸 알고도 우리 아이를 많이 좋아하는군요.”
정말로 자신을 걱정해서 왔다는 소리에 다비는 뺨이 화끈거렸고, 연인의 아버지에게 제 마음을 들키고, 털어놔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게다가 재하가 말한 대로 지온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호의적인 태도였다. 거기에 대고 버릇없이 군 것 같아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저, 버릇없이 굴어서 죄송합니다. 반대하시는 줄 알았어요. 거기다 재하한테 모진 분이라고 생각해서….”
“아니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바른 사람이라서 좋았습니다. 제겐 오지도가 환상의 섬 같아요. 거기서 만난 사람들은 전부 도시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착한 사람들만 있어서요. 우리 재하도 이렇게 다비 씨하고 인연이 이어져서 전 정말 다비 씨에게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오지도도 사람 사는 곳이라 모두 착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 대부분은 착한 사람들이죠. 하지만 재하도 착하고 순합니다. 제 말도 잘 듣고요. 정말 과분할 정도로 잘해줘요. 그러니까 저한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재하가… 다비 씨 말을 잘 들어요?”
“네.”
지온이 처음 들었다는 듯, 놀라워하며 다비를 신기하게 살폈다.
“다비 씨도 이런저런 자격증이 많은 거로 알고 있는데, 혹시 맹수 조련사 자격증 같은 것도 취득했어요?”
“…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리온과 지온이 똑같은 걸 물어왔다. 모르긴 몰라도 재하가 자신이 없는 곳에서는 제법 성깔 있게 구는 모양이었다. 제 앞에서는 영락없는 개 같은 유재하인데. 이건 조금 우쭐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다비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자격증은 없지만, 재하는 순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제 앞에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얌전하고 온순했어요. 그러니까 회장님께서도 제 걱정은 거두시고 안심하셔도 됩니다.”
“재하가 짝을 아주 잘 만났네요. 아, 그런데 다비 씨가 우리 회사 사람도 아닌데 회장이란 호칭은 좀 그러네요.”
“아, 그럼… 어떻게….”
“여러 가지 있잖아요. 아버님이라든가, 아버님이라든지, 아버님 같은 편한 호칭이요. 아빠도 괜찮고요. 앞으로도 계속 불러야 하니까 지금부터 익숙해지는 것도 좋겠네요.”
유재하의 능청스러움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눈앞에 있었다. 이런 장르에 질색하는 다비는 차마 어른 앞에서 정색할 수 없어서 사회성 가득한 미소를 띠며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노력해보겠습니다.”
“다비 씨.”
“네.”
“우리 재하 받아줘서 고마워요. 사귀지 않았을 때도 재하한테 신경 많이 써줬다는 거 압니다. 다비 씨한테 항상 고마웠어요.”
지온이 고마움을 표하자 다비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재하도 저 때문에 상처받았을 거예요. 조금 더 일찍 받아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우리 재하가 혹시라도 서운하게 하면 나한테 말해요. 그런 거에 서툰 녀석이라 사귄다니까 자꾸 걱정되네요.”
“재하는 절대 저 서운하게 안 할 겁니다. 지금도 잘하고 있는걸요. 서운하게 하더라도 제가 해결해야죠. 그리고 재하가 있어서 저도 힘든 일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재하에게 고마워요. 제 인생에 둘도 없을 만큼 과분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염려 마세요. 편견 없이 절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회… 아니, 아… 버님.”
다비가 잘생긴 미소를 지으며 지온을 바라보자, 지온은 가슴 어딘가 몽글거리고 따뜻해졌다. 애교까지 있는 성격이라니. 재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결혼 같은 거 안 하고 평생 삼촌 따라서 첼로 연주만 하겠다던 무뚝뚝한 아들이었는데, 그 아이가 사랑도 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말할 만큼 장성했다.
자신을 닮아 보는 눈도 뛰어나서 이렇게 멋진 사람을 얻은 모양이었다. 애교도 있고, 용기도 있고, 인물도 훤한 데다가 마음조차 착한 아이가 아버님이라고 부르니까 귀국하기 싫어질 정도였다.
“한 번만 더 불러주세요. 우리 재하는 애교가 너무 없어서. 아니, 청하도 똑같구나. 자식들이 애교가 없어서 다비 씨가 그렇게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간질간질하네요.”
“불러드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재하가 애교가 없진 않은데요. 애교가 너무 많아서 리온이보다 더 심하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다비는 느낀 그대로 말했건만, 지온은 못 들을 걸 들었단 표정으로 다비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애교하고는 담쌓고 지냈던 아이였는데, 다비에겐 다른 모양이었다. 지온은 곧장 얼굴을 풀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재하한테는 정말 다비 씨밖에 없나 보네요. 제가 알던 아이가 아닌 것 같아 신기할 정도로요. 어쩌면 다비 씨가 재하를 잘 다루는 걸지도 모르겠지만요. 다비 씨가 우리 재하를 좋아해 줘서 다행입니다.”
자꾸 고맙다고 하니까 조금 부끄러워진 다비가 목덜미를 손으로 쓸며 머쓱하게 웃었다. 지온이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너무 오랜 시간 다비 씨를 붙잡아뒀네요. 같이 식사라도 하면 좋겠는데, 정말 출장 때문에 온 거라서 이제 일어나봐야겠어요.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했어요. 다음엔 재하와 함께 봤으면 좋겠습니다. 아이 엄마가 굉장히 좋아할 거예요.”
“네. 다음에 꼭 뵀으면 좋겠습니다. 그땐 재하하고 같이 찾아뵙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재하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떠나는 지온을 배웅하고 다비는 의자에 느슨하게 기대앉았다. 부모님께 이렇게 쉽게 허락받은 게 얼떨떨해서 현실감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너무 좋게 봐주셔서 그런지, 뭔가 학부모 상담 같은 만남이었다.
“아, 정신없어. 내가 모르는 유재하는 뭐 하는 놈인 거야. 이쯤 되니까 궁금해지네.”
재하의 의외의 모습을 봤던 건, 설에 오지도에서 일수를 바다에 처넣었을 때뿐이었다. 그런데 그건 너무나 이해되는 부분이라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재하와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재하를 그렇게 표현하는 걸 보면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나도 해볼까. 유재하 스토킹.”
궁금함을 참지 못한 다비는 시계를 해제하고 재하에게 몰래 가보기로 했다.
***
[재하야. 중국 촬영이 조금 일찍 시작됐어. 이번엔 잠깐 들어갔다가 나올 거야. 비행기 타니까 시계는 잠시 꺼둘게. 걱정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 ]
[형! 얼마나 있다가 오는 거예요?]
[글쎄. 가봐야 알 것 같은데. 아무튼, 전화할 수 있으면 할 테니까 너도 공연 준비 열심히 하고 있어. 넌 독일에 있는 거야?]
[네. 독일에 있어요. 건강 챙기면서 촬영해요. T^T 벌써 보고 싶어서 큰일이에요. 얌전히 기다릴 테니까 잘 다녀와요. 사랑해요.]
[ㅇㅇ ]
[사진]
[중국 가는 티켓이야. 확인했지?]
[네. 도착하면 연락해요.]
[ㅇㅇ]
재하에게 보여준 티켓은 사자마자 곧장 날짜를 변경했다. 그리고 가장 빠른 비행기로 13시간을 날아 독일에 도착한 다비는 곧바로 숙소를 잡았다. 중국까지 가는 시간이 대략 40시간. 재하는 아직 자신이 하늘을 날고 있다고 믿고 있을 터였다.
다비는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노트북을 켜 위치 추적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휴대폰을 켜뒀다가 재하가 전화라도 걸면 곤란해지니까, 한동안 휴대폰은 꺼두기로 했다.
다비는 어쩐지 첩보 영화에 출연하는 기분이라 조금 재미있었다.
“하루 동안 유재하가 뭐 하는지 살펴봐야지.”
재하의 위치를 확인한 다비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위치 추적 프로그램을 살피지 않았던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 진짜 재미없게 사네. 또 연습실이야?”
독일이든, 공연 때문에 다른 나라를 가든 재하의 위치는 기가 막힐 정도로 단순했다. 저렇게 살면 재미있나 싶을 정도로 일, 집, 식당 외에는 다른 곳이 이동 경로로 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연습실은 곤란한데….”
연습실에서 재하가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건 어려웠다. 재하가 있는 곳은 연습실을 사용하는 사람이 동행하지 않으면 로비 외엔 돌아다닐 수 없는 곳이었다.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는 있었다. 재하를 따라 연습실에 간 적도 있었고, 리온도 독일에 있으니까 리온을 데리고 들어가는 법도 있지만, 그러면 스토킹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다비는 우선 재하가 밖으로 나올 때까지 호텔에서 얌전히 있기로 했다.
다비는 시간을 확인하려고 습관처럼 손목을 들었다가, 휑한 손목을 보고 피식 웃었다. 재하가 채워준 손목시계가 가방 안에 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노트북 밑에 표시된 시간을 확인하고 다비는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우리 재하 밥 먹을 시간이네.”
재하는 점심시간이 되면 연습실 근처의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허브차를 주문해 식사를 해결하곤 했다. 사람이 제법 있는데도 재하의 예약석이 따로 있을 정도로 단골이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다른 식당에도 들렀지만, 자신이 없을 때는 거의 그곳에서 빠르게 점심을 먹고 연습실로 돌아갔다. 가끔 공원을 배회하다가 들어가는 때도 있으나 그 코스에서 그다지 벗어난 적은 없었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순한 눈으로 종알거리던 재하가 떠올라서 다비는 픽 웃으며 먼저 가서 자리를 잡기로 했다. 직업이 사진작가라 그런지 주변을 관찰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데, 재하의 지정석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재하를 관찰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그 자리를 차지해야 재하의 스토킹을 무사히 시작할 수 있었다.
카페에 도착한 다비는 유리창 너머로 카페 안을 살폈다. 재하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곧장 안으로 들어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 얼음을 듬뿍 넣어달라는 주문을 하고 잽싸게 자리를 맡았다. 재하의 지정석엔 예약된 자리라고 메모가 적혀 있었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재하의 지정석에서 자신의 자리가 보이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왔다.”
유리창 너머로 재하의 모습이 보였다. 다비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재하 녀석은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 체형을 숨기려고 일부러 품이 큰 옷까지 입고 나왔다. 재하를 본 게 기뻐서 그런 건지 허무하게 들킬까 봐 긴장해서 그런 건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재하는 카페 주인에게 인사하고 메뉴를 말하고는 곧장 예약된 자리에 앉았다. 재하가 근처를 스치듯 지나갔다. 재하가 자주 뿌리는 향수의 향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자, 심장이 쿵쿵 날뛰기 시작했다.
다비는 슬쩍 곁눈질로 재하를 살폈다. 자신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게 조금 재밌어서 다비는 소리 내서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제 앞에서는 항상 생글거리던 재하의 예쁜 얼굴이 혼자 있으니 무심해졌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재하는 휴대폰을 손에 들고 엄청난 속도와 가벼운 터치로 액정을 눌러대고 있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보내는 문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휴대폰을 호텔에 두고 와서 정말 다행이었다. 저한테 문자 보낼 때만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는 녀석을 보니 휴대폰을 확인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재하는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한 손으로 익숙한 듯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저런 속도니까 그렇게 문자가 쏟아질 수밖에 없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알았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재하가 문자 보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같이 있는 동안에는 휴대폰도 그다지 살피지 않는 녀석이라 재하가 문자를 보내는 걸 지금 처음 보는 셈이었다. 자신이 보지 못한 재하의 모습을 이렇게 훔쳐본다는 게 꽤 재미있었다.
혼자 있는 유재하는 밥 먹는 것조차 정말 재미없는 녀석이었다. 고개를 돌려 밖을 보거나 카페 내부를 살필 줄 알았는데, 오로지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재하는 식사를 마치고 떠날 때까지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재하가 카페를 나간 후 다비도 따라 나갔다.
연습실로 곧장 갈 줄 알았던 재하는 가까운 공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다비와 함께 있을 때는 산책 시간마다 이 공원에서 함께 산책했었다. 다비는 멀리서 재하의 뒤를 따랐다. 재하는 한 걸음 걷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문자를 보내는 행동을 공원에 도착할 때까지 반복했다. 길에서 휴대폰을 사용하는 건 매우 위험한 행동이니까 반드시 고치라고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공원에 도착한 재하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다비도 따라서 하늘을 보았다. 저 녀석은 낭만적인 녀석이니까 하늘을 보면서 자신이 타고 있는 비행기를 떠올리고 있을 것 같았다. 하늘이 아니라 네 뒤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상상했던 게 얼추 비슷했는지, 재하가 한숨과 함께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재하의 뒷모습을 보면서 문득 다비는 계약 연애가 끝났을 때를 떠올렸다. 재하의 뒷모습을 이렇게 본 적은 그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항상 제 옆에 바짝 붙어서 걷거나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녀석이었다는 걸 낯선 뒷모습을 보면서 알아차렸다. 그 모습이 외로워 보이는데, 사랑스러워서 다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뒷모습도 잘생겼네. 뽀뽀해주고 싶게.”
말을 뱉어놓고 들킬까 봐 얼른 숨었지만, 재하는 그저 무심하게 걷고 있었다. 혹시라도 재하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면 잽싸게 숨을 장소를 찾아보며 조심스럽게 따라다녔지만, 재하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냥 휴대폰과 산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비는 재하의 뒤를 흐뭇한 미소를 짓고 졸졸 따랐다. 이렇게 함께 산책하고 있는데 재하는 혼자 산책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머릿속에 온통 자신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함께 산책할 때는 쉴 새 없이 떠들던 재하는 혼자 있을 때는 다른 모습이었다. 공원을 걷는 동안 중간에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는 것 외엔 그저 걷기만 하고 있었다.
사실은 그날, 너하고 같이 산책했다고 말해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공원을 빠른 속도로 걷던 재하는 제자리에 서서 문자를 잔뜩 보내고 나더니, 곧장 연습실로 들어가 버렸다. 아마도 밤이 될 때까지 계속 연습실에 있을 테니 다비의 스토킹도 끝난 셈이었다. 기대했던 것치고는 너무나도 허무한 스토킹이었다.
“뭐, 지나가는 사람하고 어깨라도 부딪치면 사람 하나 죽일 기세로 으르렁거릴 줄 알았는데, 별거 없네. 대체 저런 애를 왜 그렇게 걱정하는 거지?”
함께 있을 때와 혼자 있을 때의 유재하는 별다를 게 없었다. 제 앞에서만 보여주는 순하고 흐물흐물해지는 표정이 아닌 것과 배터리가 걱정될 만큼 빠르게 문자를 보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상이 똑같았다. 이래서는 내일도 똑같을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온 거 서프라이즈라도 해주고 싶어서, 다비는 남은 비행시간까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중국에 도착했다고 말하면서, 재하를 연습실 밖으로 불러낸 후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다. 서프라이즈에 감격해서 자신을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거릴 재하를 생각하자, 당장 재하를 보고 싶은 마음을 조금은 참을 수 있었다.
“더 보고 싶어지기 전에 얼른 호텔로 돌아가야겠다.”
다비는 호텔로 돌아가서도 첩보원에 빙의한 것처럼 유재하의 동선을 추적했다. 정말 의미 없는 추적이었다. 연습실에서 나와 근처 피트니스 센터에서 머물다 숙소로 돌아가는 것으로 재하의 하루는 끝이 났다.
별거 아니었지만, 제법 재미있는 스토킹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재하를 마음껏 관찰할 수 있었던 것도 재미있었고, 유재하는 혼자 있어도 자신이 전부인 것처럼 구는 녀석이라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해서 꽤 행복한 경험이었다.
다비는 재하를 만날 생각을 하며, 기분 좋게 잠을 청했다.
***
다비는 자다가 부스스 일어나, 멍한 눈으로 탁자 위에 놓인 시계를 보았다.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깥은 벌써 날이 훤했다. 시간으로 따지면 다비는 중국에 도착하고도 5시간을 더 넘긴 상태였다. 다비는 얼굴을 손으로 쓸며 혀를 쯧, 하고 찼다.
“아, 늦잠 잤네. 서프라이즈 해줘야 하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씻고 연습실로 곧장 찾아가 재하를 불러내기로 했다. 오늘 연습은 땡땡이치고 같이 데이트나 하자며 유재하에게 수작을 부리려고 제법 공들여서 잘 차려입었다. 거울에 비친 잘생긴 김다비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크, 작정하고 차려입으면 진짜 돌아다니기 무서울 정도라니까.”
자화자찬하다가 테이블 위에 있는 노트북 앞으로 다가갔다. 노트북을 캐리어에 넣기 전에 마지막으로 재하를 추적했다.
“어? 얘가 왜 여기에 있어?”
다비는 재하의 위치를 확인하고 의아해했다. 이 시간이면 연습실에 있어야 할 재하가 집에 있었다. 재하의 심박수와 체온이 여전히 기록되고 있는 걸 보면 시계를 두고 간 건 아니었다.
“집으로 가지 뭐.”
가끔은 게을러지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쉽게 생각하기로 하고 재하의 집으로 목적지를 바꿨다.
재하의 숙소가 있는 건물에 도착한 다비는 넉살 좋게 관리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비의 얼굴을 기억한 관리인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다비를 반겼다. 다비도 미소로 화답하고 재하의 숙소로 올라갔다.
“가만, 서프라이즈를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마침 불러낼 사람도 있는데.”
다비의 계획은 이랬다.
재하의 아래층에는 리온이 살고 있었다. 재하의 집에 가기 전에 리온에게 협조를 구해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서 리온이 대신 문을 두드리고 문 앞에 서 있게 두는 것이다. 리온의 목소리를 확인한 재하가 의심 없이 문을 열 때, 자신이 짠, 하고 재하 앞에 나타난다. 갑자기 찾아온 저를 보고 감동한 재하가 눈물을 펑펑 쏟으면 리온을 돌려보내고 재하와 재회의 섹스를….
“좋네. 응. 좋아.”
계획이 마음에 든 다비는 리온의 집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그동안 도와준 게 많았으니 이 정도 도움은 받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 갑자기 찾아온 건데. 리온이는 연습실 갔으면 어떡하지?”
걱정과 함께 리온의 숙소 벨을 누르자,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처럼 곧바로 안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찾았어? 나한테 연락 온 건 없…. 힉?”
리온에게 서프라이즈를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리온이 다비를 보자마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다비는 손을 내밀어 리온을 일으키며 큭큭 웃었다.
“누굴 기다렸는데, 그렇게 놀라. 훈이가 아니라서 놀란 거야?”
“다, 다비야. 너… 너 중국 간 거 아니었어? 여기 어떻게?”
“아, 재하 보려고. 연습실에 있어야 할 애가 집에 있어서 이쪽으로 왔지. 놀라게 해주려고 몰래 왔어. 아직 재하는 몰라.”
“아, 몰래 온 거구나. 재하…. 재하는 지금…. 어….”
리온은 다비의 눈치를 살피며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어딘가 겁에 질린 얼굴로 다비를 붙잡았다.
“조, 조금만 여기에 있다가 올라갈래?”
“왜? 무슨 일 있어? 그보다 넌 왜 이렇게 비 맞은 강아지처럼 덜덜 떨고 있어?”
“떠, 떨긴 누가…. 아니. 지금 올라가는 게 나으려나.”
리온은 다비를 붙잡은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다비와 눈을 맞췄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표정에 다비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리온을 보았다.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다비의 물음에 리온이 눈치를 보았다. 다비는 재하가 미친놈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했으니까, 차라리 지금 올라가서 재하를 조련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리온은 우물거리며 다비에게 말했다.
“재하가 지금… 좀 화가 많이 났거든. 그래도 괜찮겠어?”
“화가 나? 왜?”
“아, 그게…. 이, 일단 올라가자. 재하한테 들어. 널 보고도 진정이 안 되면…. 내, 내가 어떻게든 막아볼게. 그사이에 넌 도망… 도망….”
갑자기 장르가 공포나 스릴러로 바뀐 것같이 리온이 겁에 질려 있었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자신이 계획한 서프라이즈는 취소해야 할 것 같았다. 재하와 지금은 사이가 좋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겁먹은 애를 데리고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혼자 올라갈게. 그렇게 떨면서 어딜 가려고.”
“다비야. 재하가 조금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러는 거야. 어쩌면 너 보고 기분 나아질 수도 있는데 혹시 모르니까…. 나하고 같이 가자. 재하가 누굴 때리는 건 아니니까….”
“됐어. 넌 여기에 있어. 훈이하고 통화하면서 진정 좀 해라.”
다비가 리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집 안으로 고갯짓하자 리온이 금세 울상을 지으며 속상해했다.
“다비야. 우리 재하가 원래 착한 애인데….”
“알아. 알고 있으니까 어서 들어가. 걱정하지 말고. 응?”
“문 안 잠글 테니까 혹시 재하가 제정신이 아니면 여기로 바로 내려와. 알았지?”
대체 유재하가 뭘 어쩌고 있기에 리온이 저렇게까지 반응하나 싶어서 다비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리온을 안심시켰다. 리온은 마지막까지 다비를 걱정하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는데 생각보다 조용했다. 물건을 집어 던지는 녀석은 아닌 것 같았다. 재하의 숙소 앞에 서서 벨을 누르려는데 재하가 문 앞에 서 있는 건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것도 못 하면서 돈 받을 생각을 합니까? 놓쳤다고 말하면 내가 ‘아, 그렇습니까. 유감이네요.’라고 대답해줘야 하는 거고요. 중국으로 간 거 확실한지 그것부터 알아내세요. 찾기 전까지 연락할 생각 말고.”
낮게 깔린 목소리가 너무나도 낯설었다. 차갑게 내뱉는 말에 분노가 끓어 넘쳤다. 이야기만 대충 들어도 누구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나저나, 사람을 붙였어?
위치 추적기에 문자 폭탄도 모자라 사람을 붙였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부터 자꾸 웃음이 피식 터져서 곤란했다. 역시 유재하답단 생각이 먼저 드는 걸 보면 자신도 미친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쩔 수 없었다. 쟤가 지금 미친 이유가 온전히 저 때문이 아닌가.
재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게 당신들 할 일이잖아! 내가 그쪽으로 가서 얼굴 보고 이야기해야 정신 차릴 겁니까?”
스토킹하려다가 애꿎은 사람들이 욕먹고 있으니 괜히 미안해져서 빨리 사태를 진정시켜야겠단 생각에 다비는 벨을 눌렀다. 한기 가득한 재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삼촌. 미안한데 그냥 내려가. 나 지금 삼촌한테 화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또라이는 또라이인데 상식 있는 또라이라서 다행이었다. 화가 나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녀석이 이렇게나 기특할 줄이야. 재하네 집안 식구들은 이런 걸 무섭다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제 눈에는 귀엽기만 한데. 다비는 가만히 문을 두드렸다.
“다비 형 소식 가져온 거 아니라면 그냥 내려가라니까. 아니면 문자로 이야기해. 삼촌 겁먹는 거 보고 싶지 않아.”
“착하네. 삼촌 아낄 줄도 알고, 우리 재하.”
다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눈앞에 하얗게 질린 재하가 보였다. 매우 놀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데, 화가 가시지 않아 매서운 눈빛에 팔뚝이 오싹거렸다. 곤란했다.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치 없이 꼴리려고 해서 곤란했다.
다비는 양팔을 활짝 벌리며 능청스럽게 굴었다.
“서프라이… 억.”
웃음기 하나 없는 재하가 다비를 끌고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 쾅 닫히는 문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우와. 집이 왜 이래.”
벌건 대낮인데 거실이 어두컴컴했다. 커튼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빛에 물건이 마구 굴러다니고 있다는 걸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던져서 조용했던 거구나. 도착 시간에서 고작 5시간… 아니, 6시간 좀 더 지났을 뿐인데 그사이에 던질 수 있는 건 다 집어 던진 모양이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 다비는 침착하게 굴 수 있었다.
“거실에 불 좀 켜라. 커튼을 걷든지.”
“어떻게 된 거예요?”
“뭐긴, 문 앞에서 말했잖아. 서프라이즈….”
“중국이라고 했잖아요.”
많이 놀란 건지 화가 난 건지, 목소리가 계속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다. 말을 뱉을 때마다 막귀인 자신조차 오싹거렸으니, 청력이 예민한 리온이 벌벌 떨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다비한테는 그게 귀엽게 느껴졌다. 자신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데 싫을 리가 없었다.
다비는 손을 뻗어 재하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웃어 보였다.
“나 없어져서 놀랐구나. 응응. 그랬구나.”
“갑자기 사라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어이구. 내가 갑자기 사라질 것 같아서 사람 붙이셨어요?”
“네. 시계 꺼놓으면 형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없으니까 사람 붙였어요. 그런데 독일에 있는 줄은 정말 몰랐네요.”
변명도 없이 뻔뻔하게 나오는 게 정말 유재하다웠다. 다비는 재하에게 달라붙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능글맞게 굴었다.
“미안하단 말이 먼저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
“뭐가 미안해요. 형이 갑자기 사라진 걸 더 미안해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말없이 사라지는 것만 하지 말아 달라고 했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았다. 스토킹하겠다는 사명감에 잠깐 잊고 있었다. 이건 조금 미안해서 사과하려고 했는데, 재하가 자신을 보지도 않고 등을 돌린 채로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다. 다비는 어쩔 수 없이 뒤에서 재하를 꼭 안아주며 달랬다.
“미안. 난 내가 없을 때, 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비밀로 하고 온 거였지. 사라져서 싫은 거지, 갑자기 찾아와서 싫은 건 아니지?”
“…하, 정말.”
등으로 전해지는 재하의 심장 박동이 심상치 않았다. 몸도 잘게 떨고 있고 호흡도 거칠었다.
“어이쿠. 우리 재하, 화 많이 났어?”
“아니요. 걱정한 거예요. 결혼 허락받았다고 했을 때 좋아했던 형이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져버리니까 별생각이 다 들어서….”
“그랬구나. 나는 유재하 스토킹하고 싶어서 어제부터 너 따라다녔는데….”
“어제 여기에 왔어요?”
재하가 놀라서 다비를 바라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비가 재하에게 폭 안겼다.
“어. 유재하 재미없다는 거 확인하고 오늘 중국 도착 시간에 맞춰서 전화한 후에 너 직접 만나려고 했는데, 내가 늦잠 자서…. 계속 화낼 거야? 우리 오랜만에 얼굴 봤는데….”
다비가 재하의 앞섶에 손을 대고 조물거리자 재하가 곧장 다비의 손을 떼어냈다. 이렇게 뿌리쳐진 건 처음이라 다비도 웃음기를 지웠다.
“뭐, 만지는 것도 기분 나쁘다, 이거냐?”
“그게 아니라, 지금 형을 제대로 안을 자신이 없어서 그래요. 형이 반가운데, 조금 화도 나고 서운하고….”
“화풀이 섹스도 좀 꼴리네. 할까?”
“형, 저 지금 정말로…. 하.”
다비가 하반신을 바짝 붙이며 비벼대고 있어서 재하는 갈 곳 잃은 화를 어찌하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형.”
“미안해서 이러는 거잖아. 그냥 좀 봐줘라. 너 갑자기 사라지는 거에 트라우마 있다는 거 내가 잊고 있었어. 난 그냥 주위에서 하도 널 무서워하니까 궁금하고, 또 너 보고 싶어서 독일로 온 거였어.”
“그럼, 말을 하면….”
“그럼 스토킹이 아니지. 너도 나 스토킹하는데, 나도 너 몰래 네가 뭐 하는지 구경할 권리는 있지 않냐? 그런데 진짜 안 서네. 화 많이 났구나.”
다비가 자신에게 사과하며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보기 힘든 귀한 모습에 재하는 다비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참으려 애썼다. 사실 다비를 눈앞에서 보는 순간 화가 반은 풀렸다.
다비가 도착할 시간에 공항에 나타나지 않았단 연락을 받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막상 결혼 허락을 받으니 부담스러움을 느끼고 도망간 건가 싶어서 무서웠다. 처음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자 불안해졌다. 갑자기 사라진 이유가 집착하는 자신 때문인가 싶어 슬프고 서운하기도 했다. 알고 사귀는 거라고 했으면서….
그런데도 다비를 놓아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에 찾아내면 정말 감금이라도 해서 제 곁에 붙여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역시 해지하면 그만인 시계보다는 칩을 이식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다비를 찾아내면 곧장 한국으로 들어가 이식부터 시켜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다비가 도망갔지.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화가 났다. 그때부턴 다비에게도 화가 났다. 아무리 싫어도 이건 너무했다. 차라리 말을 해주지, 말도 없이 사라지다니. 갑자기 사라진 제 세상 때문에 정말로 미칠 것만 같았다.
다비가 나타나기 전까지 6시간 동안 재하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맛봐야만 했다.
하지만 다비가 나타나 품에 안겨 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나쁜 생각은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화를 풀어주겠다고 이렇게 노력하는데 화가 풀리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건 그렇고 화풀이 섹스라…. 그건 어떻게 하는 거지? 화내면서 난폭하게? 형 이런 거 좋아하나? 생각해보면 섹스 중에 물어뜯으면 다비의 반응이 제법 좋았다. 차마 다비를 때릴 수 없어서 물어뜯는 것만 해봤는데 이참에 엉덩이라도 좀 때려볼까 하는 음심이 솟았다.
살면서 이런 기회가 얼마나 올지 알 수 없으니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 화는 다 풀렸지만 엉덩이를 때리기 위해 재하는 계속 화가 난 척하기로 했다.
“형은 지금 사과하려고 섹스하자는 거예요? 섹스로 얼렁뚱땅?”
“오늘은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는데, 너도 잘한 건 없잖아. 사람 붙이고 감시하는 건 진짜, 나이도 어린 게 어디서…. 뭐, 나쁘지 않았으니 그건 내가 용서해줄게. 네가 어디까지 집착하나 궁금하기도 하네.”
재하는 다비에게 바짝 붙어서 낮게 속삭였다.
“할 수만 있다면 나만 아는 곳에 가둬두고 내가 주는 것만 먹이면서 평생 곁에 두고 싶어요. 나하고만 이야기하고, 나하고만 눈 맞추고, 나한테만 웃어주고. 그러니까 이런 방법으로는 저 시험하지 말아요. 정말 실행할 수도 있으니까.”
“내가 미쳤나 보다. 그런 이야기 들으니까 갑자기 이렇게 되네.”
하반신에 느껴지는 단단한 감촉에 재하가 숨을 나지막이 터트렸다. 정말이지 이 사람한테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흐물흐물해지려는 표정을 단단히 붙잡고 재하는 계속 싸늘하게 다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꼴리면 오늘은 직접 해봐요. 형은 용서해줬는데, 난 아직 형 용서 안 했거든. 화풀이 섹스든, 사과 섹스든 어디 해봐요.”
평소의 다비라면 이런 건방진 모습을 참고 넘기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재하가 저한테 이렇게 화를 내는 게 처음이라 오늘은 받아주기로 했다. 게다가 표정 없이 냉랭한 얼굴로 섹스하자는 말이 자비 없이 하반신에 직통으로 꽂혔다.
“침실로 가서 해. 그전에 나 따라다녔던 사람들한테 나 찾았다고 말은 해줘라. 다섯 시간 동안 내 행방 찾느라 고생했을 텐데. 아 참, 리온이한테도.”
재하는 무심한 얼굴로 문자를 보내놓고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신경 쓰이는 거 더 있어요? 섹스하자며 주위 상황도 볼 만큼 여유가 있네요?”
“난 아무리 꼴려도 제법 잘 참아서. 그런데 이제 없어. 지금부턴 우리 재하 기분 풀어달라고 내가 아양 좀 떨어보려고.”
재하는 느슨하게 풀리는 눈치 없는 입가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다비가 작정하고 애교를 부리면 자신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섹스가 끝날 때까지 화가 난 유재하를 유지해야 했으므로 재하는 몸을 휙 돌리고 웃음을 참았다.
“침실로 들어가죠. 얼마나 아양을 잘 떠는지 보고 싶네요.”
“너무 좋아서 울지나 마라.”
다비는 재하를 따라 침실로 졸졸 따라갔다.
난장판인 거실과 다르게 침실은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침대 옆 협탁에는 제가 준 사진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재하는 침대를 지나쳐 옆에 있는 커다란 소파에 앉았다. 앉은 채로 다비와 눈을 맞추다 제 다리 사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아차린 다비가 피식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다비는 머뭇거리는 것 없이 지퍼를 붙잡았다.
“빨아주는 게 좋았어? 말을 하지 그랬냐.”
“세워야 형이 좋아하는 섹스를 하니까요.”
“귀엽네. 끝날 때까지 화 안 풀리면 내가 매번 빨아줄게.”
재하는 팔걸이에 팔을 기대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미 화는 다 풀렸는데, 시작하기 전에 지고 말았다. 무표정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재하는 조금 전 6시간의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다비가 눈썹을 으쓱거리더니 재하의 바지를 벗겼다.
“아이고, 잡아먹겠다. 눈빛 살벌해지는 거 봐라.”
“그냥, 빨아요. 아무 말 하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다비는 입술을 적시려다 멈칫하더니, 미간을 구겼다. 몸을 위로 올리고 재하의 얼굴에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야, 그래도 우리가 사귀는 사이인데 키스는 먼저 해주지? 뽀뽀도 안 할 만큼 내가 싫….”
재하는 곧장 다비의 뒤통수를 감싸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어 입 안을 훑어댔다. 난폭하게 혀를 깨물다가도 곧장 부드럽게 핥아왔다. 거칠면서도 사랑스러운 키스에 다비는 재하에게 바짝 매달려 입맞춤을 받았다.
숨이 막혀 답답해질 때까지 입맞춤이 이어졌다. 만족스러운 키스에 다비가 먼저 고개를 뒤로 무르고 재하를 보았다.
“이제 얌전히 빨아줄게.”
다비는 몸을 내려 재하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반쯤 발기한 성기를 보자, 조금 심각해졌다. 예전엔 얼굴만 봐도 벌떡 세우던 녀석이 정말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다비는 재하의 성기를 손으로 잡아 입에 담았다.
머리 위에서 재하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입으로 몇 번 훑어주자 점점 부피를 키워나갔다. 그럼 그렇지. 다비는 제대로 반응하는 재하의 성기를 열심히 빨아주며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위에서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급했으면, 어제 찾아오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아양 떠는 사람은 형이 아니라 내가 됐잖아요.”
다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옷을 전부 벗었다. 입 안에 전부 담기도 벅찰 만큼 커진 성기를 뱉어낸 다비는 입가를 손등으로 닦았다.
“세우는 게 목표였으니까 여기까지.”
“…바로 넣으려고요?”
“어.”
“콘돔….”
이렇게 제정신인 애를 왜 다들 무서워하는 건지, 그 집안 식구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성실하게 콘돔을 찾는 재하가 기특했다. 화가 나면 그냥 쑤셔 박아도 되는데, 이상한 데서 교육 잘 받은 티를 내고 있었다. 이럴 것 같아서 콘돔은 미리 준비했다. 옷을 벗으며 시트에 올려놓았던 콘돔을 들어 올려 재하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재하가 콘돔을 가져가려고 하자, 다비가 포장을 뜯어 입술에 물었다. 재하가 당황한 눈으로 다비를 보자, 다비가 눈웃음을 지으며 재하의 성기를 다시 입에 물었다. 혀와 입을 이용해 콘돔을 씌워주는 걸 보고 재하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자꾸 이렇게 구는 거예요?”
“진짜 미친놈은 콘돔 같은 거 안 챙기지. 넌 아직 덜 미쳤어. 아니면 예의 바른 미친놈이거나. 아무튼, 이제 아양 좀 떨어볼까?”
다비는 몸을 돌린 채 재하의 위에 올라타고 손을 뻗어 재하의 성기를 붙잡았다. 재하는 버릇처럼 다비의 엉덩이를 손으로 움켜쥐며 입구를 넓히려 했다. 다비가 재하의 손길에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넣어도 돼. 만나자마자 섹스하려고 다 풀어놨어.”
“정말이지. 어디까지 음란한지 모르겠네.”
“그러게, 나도 좀 궁금하다. 일단 쑤셔 박고 생각할까?”
다비는 재하의 성기를 붙잡아 그대로 입구에 밀어 넣었다. 오랜만이라 역시 버거운 크기였다. 하지만, 성기가 제 안으로 들어와 휘저을 때 쾌감을 알고 있어서 이 정도 버거움은 참아낼 수 있었다.
“큿, 제대로 푼 거 맞아요? 좁은데.”
“제대로 풀었, 으니까…. 하아, 진짜 좋아. 유재하 좆. 흐으.”
귀두만 겨우 들어갔는데, 다비가 제 위에서 벌써 느끼고 있었다. 적나라하게 보이는 접합부와 좁은 입구에 재하는 참지 못하고 다비의 허리를 붙잡아 내리며, 단번에 하반신을 쳐올렸다.
“아윽….”
갑작스러운 침입에 눈앞이 하얘졌다. 단숨에 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묵직한 감촉에 다비는 몸을 굽히며 재하의 무릎을 붙잡고 몸을 떨었다.
“하, 유재하. 화나니까 무섭네. 이렇게 확 쑤셔 넣는 게 좋았으면서 그동안 어떻게 참았어?”
“움직여요.”
“그래, 알았다. 오늘은 뭘 해도 예뻐해 줄 테니까 많이 기어올라도 돼.”
다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지만, 사실 배가 뚫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이 놀란 상태였다. 하지만 놀람을 뛰어넘을 만큼 재하의 성기가 주는 쾌락은 어마어마했다. 이 자세를 위해 이렇게 커다란 소파를 침실에 들여놓았나 싶을 정도로 넓어서 여유로웠다. 재하의 다리를 붙잡고 시트 위에 무릎 꿇은 채 하반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을 주며 허리를 움직이자 저절로 입구가 바짝 조였다. 조임에 재하가 숨이 섞인 신음을 앓는 듯 내뱉었다. 뜨거운 숨결이 등에 닿자 다비는 다시 뒤를 꽉 조이며 느꼈다.
“하, 진짜 할 때마다 좋아져. 너는 어때? 아직도 시큰둥해?”
“그랬으면 벌써 제 성기가 죽었겠죠.”
“좋단 소리구나. 안이 터질 것처럼 네 좆이 꽉 채우고 있는 걸 보면?”
재하는 대답 대신 하반신을 쳐올렸다. 그때부터 다비도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직였다. 이런 자세로 섹스하는 건 처음인데, 체중으로 인해 재하의 성기를 전부 집어삼킬 것처럼 평소보다 더 깊이 삽입되었다. 다비가 자꾸 신음을 흘리자, 재하가 참지 못하고 다비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자신에게 바짝 붙인 후 등을 콱 깨물었다.
“아윽. 또 시작이네. 뭐, 물어뜯어라. 그것도 이제 기분 좋거든.”
다비는 재하에게 안긴 채 하반신을 움직여댔다. 위에선 재하가 깨물고 아래에선 다비가 재하를 물어뜯을 듯 붙잡고 있었다.
“하, 이 자세 처음인데, 이거…. 읏. 마음에 드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이것도 처음일 텐데. 좋은지 확인해볼래요?”
“뭐?”
재하는 눈앞에서 흔들리는 다비의 엉덩이를 손으로 찰싹 내리쳤다. 다비가 안을 바짝 조이며 몸을 흠칫거렸다. 당황스러운 재하의 행동에 다비가 움직임을 멈추고 몸을 뒤틀며 재하를 노려보았다.
“씨발. 왜 때리고 지랄이야.”
“아팠어요? 소리만 요란한데….”
“아프진 않지만, 기분 더러워.”
음, 이건 취향이 아닌 모양이었다. 재하는 다비 대신 허리를 움직이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좋아할 줄 알았죠.”
“맞는 거 좋아하는 성향 없어. 또 때리기만 해 봐라. 맞은 만큼 돌려줄 줄 알아.”
“네….”
깨무는 건 좋다면서, 때리는 건 싫다는 괴팍한 성격에 재하가 한풀 꺾인 채 대답했다. 다비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재하를 달래주었다.
“깨무는 건 괜찮으니까 기죽지 마. 아, 아무튼 계속 움직인다.”
“그런데, 이래서는 못 쌀 거 같은데요.”
“뭐? 그렇게 형편없냐?”
“아뇨. 형 얼굴이 안 보여서….”
“미친. 침대로 가, 그럼.”
다비가 일어나려고 하자, 재하가 다비의 다리와 허리를 꽉 붙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자세에 다비가 재하에게 바짝 등을 붙였다.
“야, 나 고꾸라진… 아윽. 미친 새끼야. 이건 아니… 흑.”
“몇 걸음만 걸으면 침대인데, 뭘 그렇게 겁먹어요. 밑은 좋아서 아주 꽉 조이고 난리인데.”
“하으. 돌은 새끼. 미친… 아응.”
걸을 때마다 안을 들쑤시는 감각과 떨어질 것 같은 자세에 죽을 맛이었다. 다행히 떨어지기 전에 무사히 침대에 도착했다. 다비가 침대에 안착하며 구시렁댔다.
“어차피 얼굴 보고 할 거면 한 번 빼야 하는데 뭘 넣고 와.”
“안 뺄 건데요.”
재하는 그대로 다비의 몸을 돌렸다. 내장이 꼬일 것 같은 회전에 다비가 경악하며 재하를 보았다.
“미친놈이. 네 좆이 좀 커야지. 안 그래도 꽉 차는데 내장을 비틀어버릴 셈이야?”
“안 꼬였네요.”
“하, 유재하 화나게 하면 안 되겠네. 애지중지할 땐 언제고 이렇게 막 다룰 줄이야.”
“막 다루는 것치고는….”
재하가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며 바짝 서 있는 다비의 성기를 붙잡고 훑었다. 다비가 상체를 들썩이며 신음을 흘렸다.
“형 자지는 좋다고 줄줄 흘리네요.”
“하, 미친.”
다비는 재하의 셔츠를 붙잡아 바짝 잡아당기고 입술을 맞대었다. 그게 신호인 것처럼 재하는 다비를 품에 안고 허릿짓을 시작했다.
가장 익숙한 자세에 안락함을 느끼며, 온전히 재하의 움직임에 맞춰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비가 먼저 사정감을 느끼고 재하에게 보채기 시작했다.
“재하야, 좀 더…. 금방 쌀 것 같아.”
“하, 사랑해요.”
“나도.”
몇 번의 허릿짓이 이어지고, 다비가 재하에게 바짝 안기며 사정하자, 재하도 움직임을 멈추고 다비의 안에서 사정했다. 재하가 몸을 물리지 않고 안에서 머문 채, 다비의 얼굴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다비가 재하의 등을 토닥이며 피식 웃었다.
“우리 재하로 돌아왔네. 화 다 풀렸어요?”
“…처음부터 풀렸어요. 어떻게 형을 보면서 화를 낼 수 있겠어요.”
“그럼 연기였어? 제법 살벌하던데.”
“그냥, 몰입 좀 했죠. 하지만 앞으로는 갑자기 사라지지 말아요.”
“응, 미안해. 앞으로는 시계도 안 빼둘게.”
듣고 싶었던 대답이 나왔는지 재하가 배시시 웃었다. 다비는 아직 훤한 바깥을 보다가 재하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이제 나 찾았으니까, 연습실 가겠네?”
“아뇨. 그냥 쉴래요. 형하고 계속 섹스하면서…. 형이 나 보고 싶어서 왔는데, 연습이 중요한가요.”
“예쁜 짓 하네. 그런데 안에서 왜 또 커지냐?”
재하가 수줍어하며 예쁜 척했다.
“형 보니까 좋아서….”
“진짜 미친놈 맞는데, 왜 귀엽고 난리인지 모르겠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다비는 다시 재하를 받아줄 준비를 했다.
***
저녁쯤이 돼서야 둘은 쉬기로 했다. 다비는 침대에 누워서 재하를 안아주었다.
“넌 너무 재미없게 사는 것 같아. 추적하는 보람이 없어. 스토킹 좀 해보려고 먼 곳까지 날아왔는데, 경로가 단순하니까 스토킹하는 맛도 안 나더라. 진짜 복사해 붙여넣기라도 한 것처럼 맨날 똑같은 일정이야.”
“형이 있어야 하루가 특별해져요. 그러니까 계속 곁에 있어요. 스토킹 못 해서 서운한 거라면, 내일 모르는 척해줄 테니까 제대로 따라다녀 볼래요?”
다비가 고개를 저었다.
“다 아는데 그게 무슨 스토킹이냐. 그럴 거면 나란히 손잡고 데이트를 하지.”
“그건 그러네요. 그럼 내일은 데이트해요.”
화난 척하는 유재하도 좋았지만, 다비는 이렇게 순한 개 같은 유재하가 더 익숙하고 좋았다. 앞으로 미친놈이 되지 않게 곁에서 잘 지켜봐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재하야.”
“네. 형.”
“나 이번 중국 촬영 끝나면, 퇴사할 거야.”
“…네?”
재하가 몸을 일으켜 다비를 살폈다. 덤덤하게 말하는 다비의 표정을 보니 갑작스럽게 결정한 건 아닌 것 같았다.
“형, 저 때문에 퇴사하는 거라면….”
“아니, 어차피 할 생각이었어. 이제 제대로 내가 찍고 싶은 것도 찍으러 다니려고. 프리랜서로 지내면서 여유롭게 살아보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제가 반대할 이유는 없죠. 그럼 오지도로 돌아가는 거예요?”
재하의 질문에 다비가 잘생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년에 독일로 올 생각인데, 네 생각은 어때?”
다비는 재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손부터 들어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재하가 울상을 짓더니 눈물을 후드득 쏟아내기 시작했다.
“진짜… 진짜요?”
“어. 너 있는데 내가 왜 오지도를 가. 뭐 당장은 아니지만, 1년 이내에 너하고 같이 살고 결혼도 할 건데. 사람까지 붙일 정도면 차라리 내가 네 곁에서 작품 활동 하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겠냐?”
“흡. 형이 프러포즈 해줬어.”
다비가 재하의 말에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야, 이걸 프러포즈라고 하면 안 돼. 우리 지금 홀딱 벗고 있는데, 분위기 깨지게…. 아니, 평소에 낭만 찾는 녀석이 왜 이럴 땐 낭만 안 찾고 프러포즈라고 하냐. 무효야. 그냥 미래 계획을 너한테 말한 것뿐이라고.”
“프러포즈 자체가 낭만적인데, 옷을 입고 하든, 벗고 하든 뭐가 달라요. 저한텐 전부 낭만적이니까 괜찮아요. 사랑해요, 형.”
재하가 다시 울며 다비에게 폭 안겼다. 듣는 사람이 낭만적인 프러포즈라고 정의를 내려버리니, 다비도 더 할 말이 없었다. 다비는 재하를 토닥이며 귓가에 입을 맞췄다.
“나도 유재하 사랑해.”
재하는 그 말에 통곡에 가깝게 울기 시작했다. 낯간지럽고 쑥스러워서 말 못 하던 진심이 말로 터져 나왔으니 울 수밖에 없었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들을 몇 분 만에 전부 다 듣게 됐다. 재하에겐 다비의 진심이 서프라이즈였다.
“형, 정말 사랑해요.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거예요.”
“응, 그래. 나도 계속 너 사랑할게. 그러니까 이제 사람 붙이는 건 그만두자. 알았지?”
“시계 안 빼면, 사람 안 붙여요.”
“착하네.”
다비는 재하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시 진심을 전했다.
“재하야, 내 마지막 사랑은 유재하 너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건 잊지 마. 알았냐?”
“네. 형은 내 첫사랑이고 나는 형한테 마지막 사랑이니까 그걸로 된 거죠. 물론 내 마지막 사랑도 형이지만. 정말 사랑해요.”
둘은 마음을 고백하고 입을 맞췄다.
다비의 마지막 사랑과 재하의 첫사랑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