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3권) (7/9)

진짜 연애.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면 뭔가 거창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크게 변한 건 없었다. 재하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았고, 다비는 재하의 쏟아지는 애정 공세에 욕을 내뱉으며 쑥스러워했다.

100일 계약 연애와 달라진 거라면, 둘 사이에 섹스가 추가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둘의 속궁합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맞았다.

문제는 너무 잘 맞아서 큰일이라는 거였다.

***

재하가 다비에게 달라붙어 잘생긴 얼굴에 잔뜩 뽀뽀를 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비가 재하의 손목을 붙잡았다.

“뭐야. 이게 끝이야? 왜 하다가 말아?”

“네? 형,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은데….”

“너 아직 부족하잖아.”

“부족하긴 하지만, 형이 지친 것 같아서 이제 참으려고요.”

“내가 지쳤다고?”

다비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섹스 잘하는 체력 좋은 연하남을 잘 키워서 온전히 제 취향으로 길들여 놨는데 지칠 리가. 좋아 죽으면 모를까. 재하는 이렇게 자주 자신을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다루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난 더 해도 되는데….”

재하는 몸을 숙여 땀에 젖은 다비의 머리를 쓸어 올려 주고 이마에 입 맞춰주었다.

“형 지금 힘들어요. 몸도 저한테 깨물려서 엉망이고. 여기서 더 물면 형 피 봐요.”

“그럼 약 바르고 다시 해.”

“형 이제 안 서던데….”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집에 온 둘은 그날부터 닷새 동안 미친것처럼 섹스만 했다. 다비의 성격상 일상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한 건 아니지만 눈만 마주치면 들러붙었다는 소리였다. 밥을 먹다가, 설거지하다가, 청소나 빨래를 하다가.

닷새 만에 재하가 잠깐 이성이 돌아와 정신 차리고 다비의 몸을 걱정해줬더니, 다비가 더 하라며 재하를 부추기고 있었다. 재하로서는 환영할 일이지만, 다비의 몸을 생각하면 여기서 멈춰야 했다.

“형. 지금 이런 소리 하면 안 믿겠지만, 형하고 섹스하려고 사귀는 거 아니에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밖에 나가요. 마트도 갔다가, 공원도 산책해요. 마트에 가서 형 좋아하는 술도 사 오고, 안주도 사 오고.”

“너 권태기야?”

“…네?”

재하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다비를 바라보았다. 매일 행복에 겨워 죽을 것 같은데, 뜬금없이 권태기라는 단어를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재하를 보며 다비가 미간을 구겼다.

“어제보다 줄었잖아. 난 더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자꾸 나가자고 하고. 싫증 났어?”

어제는 6번, 오늘은 5번을 했다. 한 번 덜했다고 권태기냐니. 재하는 아직도 다비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어서 다비의 이목구비를 제대로 확인한 지도 오래된 참이었다. 평생 얼굴도 제대로 못 보면 어떡하나 이런 고민을 하는 자신에게 어떻게 그런 심장 철렁한 소리를 할 수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 와중에도 한 번 덜했다고 권태기냐는 말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재하는 눈치 없이 다시 뻣뻣해지는 제 하반신을 이불로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권태기라뇨. 제가 싫은 게 아니라. 형이 지금 힘들어서 그러는 거라니까요.”

“내가 안 서도, 박는 건 너니까 문제없잖아.”

“형.”

적극적인 다비는 좋지만, 단순히 섹스가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로 보이지 않았다. 재하는 다비를 꼭 안아주고 입을 맞췄다.

“사랑해요, 형.”

“나도 알아. 너 지금 섹스하기 싫어서 말 돌리는 거지?”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데 참는 거죠. 형 지금 뭔가 많이 불안한 것 같은데 말 안 해줄 거예요? 우리 이제 같이 이야기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

다비는 대답 대신 얼굴을 먼저 붉혔다. 불안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다른 문제였다. 너랑 하는 섹스가 너무 좋아서 그렇다는 말을 하기가 부끄러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고 빨아대면서 온전하게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녀석의 애정이 좋아서 한시도 떨어지기 싫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미친 것처럼 말이다. 이런 말을 하려니까 조금 쪽팔려서 다비는 우물거리며 간단하게 불안을 말했다.

“며칠 후면 나 촬영 가야 하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터 조금씩 줄여야죠. 몸도 좀 쉬고.”

“가면서 회복하면 되니까 더 해. 떨어져 있어도 너만 생각나게 계속… 하란 말이야.”

재하는 빨갛게 달아오른 다비의 어깨를 깨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연애를 시작했더니 내 남자친구가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하고 있었다. 100일 동안 보여준 건 맛보기였나 보다. 잘생기고 멋지고 섹시한데 귀엽기까지 했다.

자신을 마음껏 좋아할 수 있게 된 다비는 서툰 말 대신 몸으로 좋아한다고 표현하려 애쓰고 있던 거였다. 하, 정말 가둬두고 싶다. 오지로 촬영 간다지만, 혼자 다니는 것도 아니니 불안했다.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기라도 한다면, 본 사람의 눈알이라도 파버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재하는 제 안의 나쁜 마음을 억누르며 다비를 꼭 끌어안았다.

“그럼 잠깐 쉬었다가 자기 전에 한 번 더 해요. 그럼 어제하고 똑같아지네.”

“이따 할 거야?”

“…지금, 아니. 이따 꼭 해요. 형, 우리 일단 밖으로 나가요. 나 배고픈데 형은 배 안 고파요? 내 걸 너무 먹어서 배가 안 고픈가?”

“아, 뭐라는 거야. 그런 말 하지 마. 아저씨도 아니고. 귀엽게 굴라니까 왜 징그럽게 굴어.”

“…이런 말은 취향이 아니구나. 이해했어요. 그럼 이제 산책 준비할까요? 형은 절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산책시켜줄 의무가 있잖아요.”

다비가 사랑스러운 개 취급을 해줬더니 이젠 스스로 알아서 개처럼 굴었다. 이건 귀여워서 다비는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제 어깨를 잘근거리는 재하의 뒤통수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이따 할 거면 지금은 산책해야지. 나 먼저 씻는다.”

다비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성큼 들어갔다. 그렇게 시달렸는데 걸음걸이 하나 흐트러짐 없는 다비의 체력이 대단해 보였다.

재하는 빨리 씻고 나가자며 욕실로 들어갔다가 다비에게 등짝을 맞고 문 앞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다른 곳에서는 뭐든 다 좋다고 하면서, 욕실은 내외하는 의외성도 사랑스러웠다.

***

진짜 연인이 된 다비는 전보다 확실히 달라졌다. 사람이 많지 않은 길에서는 손도 잡아주고, 재하가 갑자기 입을 맞춰도 등짝을 때리지 않았다. 재하가 말을 걸면 금세 웃어주고 곧잘 장난도 잘 받아주었다. 계약 연애를 할 때도 다정하게 대해주었지만, 그때는 뒷맛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면 지금은 받은 만큼 더 자신에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게 눈에 보였다.

가장 큰 변화는 사람들을 대할 때였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던 다비가 재하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거리감을 유지했다. 물론 다비 입장에서는 재하의 입이 댓 발 나올 것 같아서 먼저 거리를 두는 거지만, 재하는 그게 매우 만족스러웠다. 자신을 남자친구로 제대로 봐주고 있다는 증거라 그저 흐뭇하게 웃으며 다비를 졸졸 따라다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비가 재하에게 물었다.

“넌 언제부터 공연이야? 리온이 말로는 봄부터 다시 공연한다던데.”

“형하고 스케줄 맞춰서 짜놓은 거라서요. 형 촬영 들어갈 때쯤 저도 공연 준비 들어가요.”

“그렇구나. 그럼 너 심심하진 않겠다.”

“제 걱정했어요? 심심할까 봐?”

“어. 나 없으면 너 분리 불안증 생길까 봐.”

재하가 그 말에 얼른 다비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불쌍한 척했다.

“그렇지 않아도 저도 그게 걱정인데. 형 없으면 이제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을 것 같아요. 그냥 첼로 그만두고 형 따라다닐까요?”

“뭐래. 그렇게까지 말하지 마. 첼로를 왜 그만둬.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그럼 잠깐 쉬는 건 어때요? 지금처럼….”

“공연 잡혔다며. 그리고 나 너 첼로 연주하는 거 좋아해. 그러니까 그만두거나 쉬지 마.”

재하는 미소 지으며 곧장 환한 얼굴로 다비에게 물었다.

“정말 제 연주 좋아해요? 삼촌 연주보다 더요?”

“어. 나 그거 좋아해. 너 한복 입고 고궁에서 첼로 연주한 동영상.”

“그거 봤어요? 진짜요? 형이 제 연주 동영상을 보다니…. 진짜 영광….”

“아니. 본 건 난데, 왜 네가 영광스럽다고 해. 게다가 나만 봤나. 본 사람들 어마어마하게 많던데. 작년 영상인데 1억이 넘게 보지 않았나, 그거.”

“뷰 수와 상관없이 형이 봐준 게 중요해요. 다른 동영상들도 많은데 형은 왜 그게 마음에 들었어요?”

감상을 원하는 재하의 말에 다비가 걸음을 멈췄다. 재하를 보며 뭔가 입을 열려고 벙긋거리는데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눈에 보였다. 재하가 눈을 곱게 접으며 “뭔데요?” 하고 대답을 재촉하자, 다비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그 영상에서는 처음으로 좀 섹시해 보였어.”

“…와. 앞으로 한복만 입어야겠네요.”

“아니, 그건 아니고. 분위기나 음악이나 뭐…. 복합적으로 말이야. 그전까지는 계속 열일곱 살 유재하로 보였는데, 그 동영상에서는 좀 그랬었지.”

고작 그 이유로 얼굴이 이렇게 빨개질 리가 없었다. 기어코 다비의 입으로 원하는 대답을 들을 속셈인지 재하가 귓가에 소곤거렸다.

“그 영상 보면서 꼴렸어요?”

“…너. 내가… 막…. 클래식 들으면서 막… 어? 그런 놈인 줄 알아?”

“몇 번 했어요?”

“아니라고. 안 했어. 이게 예쁘다 예쁘다 해주니까….”

“했는데? 형 얼굴 지금 터질 것 같아요.”

아무래도 너무 놀린 모양이었다. 정말 얼굴이 터지기 직전인 다비가 발로 재하를 걷어차며 씩씩거렸다.

“세 번 했다. 됐냐?”

“아야. 뭐야. 세 번밖에 안 했어요? 난 형 사진 보면서 몇백 번은 한 것 같은데.”

“아니, 아름다운 자연을 찍은 사진으로 대체 뭔 짓을….”

“형이 그걸 너무 사랑스럽게 보니까 그렇죠. 나는 이제야 그 시선을 받는데, 걔들은 그냥 존재만으로도 쉽게 받으니까.”

“미친, 진짜. 뭐, 뭐라는 거야.”

다비는 부끄러웠는지 혼잣말로 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재하는 다정하게 웃으며 주위를 살폈다.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얼른 다비의 뺨에 입 맞췄다.

“형이 또 오지로 촬영 가면 그 사랑스러운 시선은 제가 아니라 자연물에 쏟아지겠죠. 난 그 생각만 하면 질투 나요. 형이 인물 사진작가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에요. 인물을 그런 시선으로 봤으면, 형 남자친구는 벌써 범죄자가 됐을지도 모르니까.”

분명 무시무시한 말인데, 사랑스럽게 들렸다. 이런 말로 설레는 걸 보면 역시 자신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당당하게 인물은 찍지 말라고 하는 녀석이 귀여워서 자꾸 입가가 느슨해졌다. 생태 사진작가인 자신을 칭찬해주면서 다비는 재하의 귀여운 질투를 달래주었다.

“네가 알아둬야 할 게 있는데, 연애하고 처음으로 일하러 가는 거야. 그래서 이번 사진은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 나도 솔직히 몰라. 다만, 이런 상태라면 나는 계속 네 생각 하면서 촬영할 것 같아.”

재하는 자신의 사진을 기가 막히게 해석하는 녀석이라 미리 말해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꺼낸 말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촬영 중에 재하 생각을 안 할 자신이 없었다. 나중에 제 사진을 보고 또 놀려댈까 봐 말했는데, 그 말이 재하의 인내심을 지금 뚝 끊어놓을 줄은 몰랐다.

“형.”

“어.”

“오늘 제가 한 번만 하고 자자고 했던가요?”

“어. 왜? 안 하게?”

“아뇨? 아닌데요? 지금까지 다섯 번 했으니까, 다섯 번 더 해서 열 번을 채울까 싶어서요.”

10번은 너무 양심 없는 숫자였다. 이건 심한 거 아니냐고 말하려고 했더니, 재하의 눈이 맛이 간 상태였다. 대체 어디에서 저렇게 흥분해서 애가 미친개가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여… 열 번은 처음인데.”

“오늘 도전해봐요. 못 하겠으면 언제든 말해줘요. 그런데 형은 열 번 다 채울 것 같아.”

저 말에 학을 떼야 하는데, 꼴렸다. 아무래도 유재하를 만나려고 자신의 몸이 놀라울 정도로 튼튼했던 모양이었다. 가끔 미친개 같아도 제 말은 충견같이 잘 들으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하고 어느새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사실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한 것도 한몫했다.

“그럼 해볼까?”

다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하의 제안을 수락하자, 약속이라도 한 듯 집까지 가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

“하, 재하야….”

여덟 번째까지는 숫자를 셌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현관에서부터 미친개가 된 재하가 물어뜯기 시작해서… 어떻게 됐더라.

“형, 무슨 생각 해요? 발기가 안 되네. 아니면 이제 힘들어요?”

“안 힘드니까 그만 좀 물어보고 그냥 하라고.”

재하가 허리를 뒤로 물리더니 성기를 깊은 곳까지 쑤셔 넣었다. 다비가 허리를 들썩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으… 그거 존나 좋아.”

“아프진 않고요?”

“응. 배 속이 꽝꽝 울려서 기분 좋아. 좆이 크니까 이게 좋네.”

“하, 형 지금 너무 야해요. 어쩌려고 자꾸 이러지?”

재하는 젖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몸을 바로 하고 다비의 다리를 붙잡아 제 앞으로 바짝 잡아당겼다. 밑동까지 전부 집어삼킨 부위가 재하의 시선에 들어왔다.

다비가 처음이라 모든 사람이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비의 회복력이 보통은 아니라는 건 알 것 같았다. 제 성기가 작은 것도 아니고 며칠 쉬다 한 것도 아닌데, 산책하러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삽입하기 힘들 정도로 좁아져 있었다. 이제야 편하게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풀어져서 재하도 끝까지 밀어 넣을 수 있었다.

빨갛게 물든 다비의 피부는 보는 것만으로도 자극적이었다. 그런데 성기까지 꽉 물고 놔주질 않으니 금방 사정할 것 같아 잠시 호흡을 고르며 다비의 다리에 입을 맞췄다. 재하가 느릿하게 허릿짓을 이어가자, 다비가 재하를 멍하니 보며 물었다.

“힘드냐?”

“아뇨. 금방 사정할 것 같아서 잠깐 쉬고…. 형 지금 너무 야해서 형이 숨만 쉬어도 사정할 것 같아요.”

“뭐래. 나는 지금 딱 기분 좋은데. 싸고 또 해도 되니까 일단 움직여 봐.”

“형이 원하신다면….”

재하는 허리를 뭉근하게 돌리며 다비의 몸을 달구기 시작했다. 조금 전 사정을 해서 늘어졌던 다비의 성기가 조금씩 힘을 받아 다시 단단해지고 있었다. 다비가 참지 못하고 욕을 뱉는 심정을 요즘 알 것 같았다. 자신으로 인해서 야해지는 다비를 보는 건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재하는 다시 빠르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 읏.”

다비는 참지 못하고 신음을 터트렸다. 재하의 성기가 안을 뭉개듯 드나드는 감각에 온몸이 오싹거렸다. 제 안에서 기분 좋다는 듯 미간을 살포시 구기고 느끼고 있는 재하의 표정도 좋았다. 뒤로 물러날 땐 허전하다가 안으로 퍽 치고 들어올 때 울리는 진동까지 살 떨리게 좋았다. 잔뜩 흥분해서 가라앉은 목소리도 듣기 좋았다.

“형, 사랑해요.”

재하가 곧 사정할 모양인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빠르게 허리를 털었다.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는 순간, 다비가 오싹한 기운을 느끼고 도리질 치며 재하를 불렀다.

“아, 재하… 윽. 잠깐… 천천히….”

“조금만, 요. 금방 사정….”

“아냐. 이상…. 하, 씹. 이거….”

눈앞에 별이 튀기 시작했다. 성기는 만지지도 않았는데 사정감이 느껴졌다. 온몸이 잘게 떨렸다. 기분 좋은 소름에 다비는 저도 모르게 비음을 흘렸다.

“흐읏, 아, 이거… 하으.”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가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누군가 제 앞에서 조명을 마구 껐다 켜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 같은 기분에 서둘러 재하의 손을 꽉 붙잡고 하염없이 재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재하야. 천천히…. 나 잠깐…. 아, 아으.”

“형, 잠깐… 너무, 아…. 조이… 조이는데.”

“하, 씹… 흐읏.”

다비가 고개를 젖힌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목에 핏대가 팍 솟으며 다비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갛게 피가 몰렸다. 그 순간 재하는 제 성기가 잡아 뜯길 정도로 강한 조임을 느껴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내벽이 멋대로 꽉꽉 물어대며 재하의 성기에 달라붙었다. 기분 좋은 감각에 재하가 먼저 눈을 질끈 감고 한숨과 함께 다비의 안에 사정했다. 재하는 사정이 끝날 때까지 숨을 고르다, 천천히 눈을 뜨고 다비를 바라보았다.

“하, 형. 갑자기…. 안에서… 형?”

다비의 눈이 풀려 있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재하를 멍하니 보고 있어서 재하가 다비를 가만히 부르며 상태를 살폈다. 몸을 물리자니 안에서 계속 경련이 일어나고 있어서 함부로 빼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형. 괜찮아요?”

“…….”

“다비 형?”

넋이 나간 다비의 표정이 기분은 좋아 보이는데, 의식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재하는 덜컥 겁이 났다. 눈뜨고 기절한 건가 싶어 손으로 다비의 뺨을 가볍게 툭툭 치며 이름을 불렀다.

“김다비. 다비 형? 괜찮아요? 김다비. 대답 좀 해.”

멍하던 눈이 일순 깜빡거렸다. 경련하던 안도 조금 나아졌다. 재하는 천천히 몸을 물리면서도 다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다비가 눈을 천천히 끔뻑거리다 재하와 똑바로 눈을 맞췄다.

“괜찮아요? 형 기절했던 거예요?”

“…와. 뭐지?”

다비가 힘겹게 내뱉은 말은 의문형이었다. 재하야말로 묻고 싶었다. 방금 뭐였냐고 말이다. 다비는 눈을 연신 깜빡이더니 갑자기 재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와, 나. 방금 드라이로 갔나 봐.”

“…드, 뭐요?”

다비가 시선을 아래로 내려 제 배를 살피다가 신기한 듯 웃음을 흘렸다.

“미친, 드라이…. 씨발. 내가 드라이. 살다 살다 미친….”

“형, 그게 뭔데요. 위험한 거였어요?”

“아니. 위험한 건 아닌데 겁나 위험하게 좋은 거.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 정신 나가는 거네. 와, 내가….”

사정도 없이 온전히 재하의 성기로 느껴서 뒤로만 오르가슴까지 달했다는 것에 신기하면서도 웃겼다. 섹스가 아파서 제대로 사정조차 하지 못했던 몸이 재하와 고작 며칠 몸을 섞었다고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경험하고 나니까 정말로 새로운 세상이었다. 이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온 다비는 곧장 재하에게 드라이 오르가슴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네가 기분 좋게 해줘서 내가 뒤로만 느꼈단 이야기야. 나 지금 사정 안 했잖아. 신기해. 난 이런 거 못 느낄 줄 알았는데. 네가 느끼게 해줬어. 처음 느끼면 기분이 이상하다는데, 난 겁나 좋은데? 천국 갔다 온 기분…. 이래서 속궁합 속궁합 하는구나.”

걱정했던 건 해결됐지만, 재하는 지금 미칠 것 같았다. 힘이 다 빠져서 축 늘어진 채로 대단한 경험을 한 것처럼 잔뜩 들뜬 얼굴로 ‘네 테크닉 쩔어.’ 하며 조잘대는 다비가 참기 힘들 정도로 귀여웠다. 일부러 이러나. 또 하고 싶어서?

재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다비의 입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형. 나는 점점 형이 좋아져서 큰일이에요. 앞으로 형 없이 어떻게 살죠?”

“뭐래. 나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형, 지금 안 돼요. 손도 못 움직이면서 무슨 소리예요. 몸 닦아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요. 물도 다 마셔서 없네. 새로 갖다줄게요.”

재하는 침실 밖으로 나가서 따뜻한 물수건과 생수를 가지고 들어왔다. 다비에게 물을 먹이고,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자 다비가 주위를 살폈다.

“우리 몇 번 했냐?”

“안 알려줄래요.”

“왜?”

“형 이렇게 될 때까지 계속할 것 같아서요. 제가 테크닉을 더 공부할 테니까 우리 숫자에 집착하는 건 그만두기로 해요.”

“그러든가. 아무튼, 청소하고 이불 빨아야 하는데. 콘돔도 치우고….”

다비가 몸을 일으키려고 달싹거리자, 재하가 손으로 다비를 다시 눕히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할 테니까 형은 이제 쉬어요. 일단 이불만 바꿔줄 테니까 피곤하면 그대로 자요.”

“네가 하면 시원찮은데….”

“꼼꼼하게 할 테니까 얼른 쉬어요.”

재하가 몸을 숙여 다비의 이마와 뺨에 다정하게 입술을 내리자, 다비도 곧장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하가 이불을 새로 바꿔 다비에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분주히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비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재하가 정리하고 이불을 세탁기에 돌리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 다비는 이미 곤하게 잠이 들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입가가 느슨해져서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다비의 곁으로 가 무릎을 꿇고 다비의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진짜 큰일이네. 형 없으면 진짜 못 살 것 같아서….”

재하는 준비했던 선물을 다비에게 줘야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

이제 정말로 각자의 일을 해야 할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다비는 촬영을 위해 정글로, 재하는 공연 준비를 위해 독일로 떠나야 했다.

재하는 다비의 뒤에 서서 다비의 몸을 구경했다. 바닥에 앉아서 짐을 챙기는 다비의 몸에는 조금 전까지 재하가 물어뜯은 자국이 가득했다. 마지막 날까지 둘의 섹스는 계속됐단 소리다. 그런데도 다비는 생생하게 잘도 돌아다녔다. 놀랍도록 튼튼한 다비가 남자친구라서 재하는 행복했다. 자신이 남긴 자국을 보면 뿌듯했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게 아쉬웠다.

재하는 다비의 뒤에 매달려 목을 잘근 깨물었다. 다비가 하던 걸 멈추고 피식 웃으며 재하를 쓰다듬어주었다.

“부족해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애교 부리는 거야?”

“공연 취소하고 따라가고 싶어요. 형 짐 가방에 저 넣어서 데리고 다니면 안 돼요?”

“되겠냐? 우리 집에 네 덩치를 집어넣을 만한 가방이 있을 리가. 보고 싶더라도 참아. 너도 일할 거잖아.”

“형은 안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도 어쩌겠냐. 앞으로 우리도 이렇게 지내는 거에 익숙해져야지.”

둘이 사귀게 되면 원거리 연애는 당연히 따라붙는다는 걸 알면서도 이 순간이 싫었다. 둘 다 여기저기 이동하는 직업이라 이렇게 다시 만나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는 게 쉽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형은 이번에 몇 개월이에요?”

“이번엔 짧아. 다큐 촬영 팀 보조로 가는 거라서 길어야 한 달에서 두 달? 빨리 찍으면 몇 주? 가봐야 아는 거라서 자세히는 모르겠네.”

“길어지면 제 공연 날짜하고는 안 맞겠네요.”

“넌 언제인데?”

“다음 달에 공연 들어가요. 일정은 한 달이고, 이번에는 독일에서만 해요.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 쾰른. 이렇게 돌기로 했어요. 그리고 상반기에는 유럽 쪽으로 돌고, 남미하고 아시아투어는 하반기부터 연말까지요.”

재하의 일정을 듣던 다비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바쁘구나. 그럼, 내년까지 못 보는 건가.”

재하가 얼른 다비의 앞으로 와 앉아서,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만날 건데요?”

“아, 나도 이번 촬영 끝나면 아프리카에 갔다가, 여름 이후엔 중국으로 갈 생각인데 그게 좀 길어. 반년은 있다가 나올 예정이라서….”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가면 되죠. 형이 촬영 가도 계속 오지에만 있는 거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너도 바쁘면서 어떻게 와.”

그러려고 한 건 아니지만, 다비는 저도 모르게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재하가 아는 동생이었을 때는 바쁜 일정을 응원하며 서로 알아서 잘 지내겠거니 했지만, 이제는 연인 사이였다. 관계가 달라지니 바쁜 일정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너랑 사귈 줄 알았으면 스케줄을 좀 느긋하게 잡아둘걸.”

재하는 다비를 꼭 안아주며 서운함을 달래주었다.

“형, 저 돈 많아요. 시간이 없으면 돈으로 해결하면 돼요. 형하고 만날 날짜 잡고 형이 있는 곳으로 제가 가면 되잖아요. 돈 많은 남자친구 두고 뭘 그렇게 걱정해요.”

“당장은 그렇게 한다고 치지만, 내가 정말 오지로 작정하고 들어가면 너도 못 와.”

“거기가 어디가 됐든, 전 꼭 형 찾아갈 건데요?”

“오지 우습게보지 마라. 차나 오토바이가 가지 못하는 곳도 있고, 절벽을 타고 오르내리기도 해. 강물을 헤치고 지나갈 때도 있어. 그런 곳은 대부분 전기도 통신도 닿지 않거나, 시설이 낙후해서 연락하기조차 힘들어. 내가 괜히 촬영 들어가서 잠적하고 그러는 게 아니라니까.”

재하는 다비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굳어졌다. 사진으로 볼 때는 예쁘고 지상 낙원이 따로 없던데, 정작 그곳을 찾아가는 다비에겐 고난의 행군이었다. 생각보다 더 힘든 곳에 있다는 걸 듣자, 자신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재하는 자신의 짐 가방에서 잘 포장된 케이스를 꺼내 다비에게 건네주었다. 다비가 케이스를 보더니 눈썹을 씰룩거리다 재하를 보았다.

“이건 뭐냐?”

“선물이요.”

“너, 또…. 이런 거 그만 줘도 된다니까.”

“그건, 정말 우리 둘한테 꼭 필요해요. 진짜로요.”

재하가 간절하게 보며 낑낑거리자, 다비는 어쩔 수 없이 포장을 풀었다. 사이즈가 제법 커서 시계가 아닐까 했는데, 역시나 시계였다.

“전자시계네? 나 이런 거 많아. 스마트 워치도 있고.”

“그거하고는 조금 달라요. 앞으로 그건 절대 빼지 말고 다른 시계도 착용하지 마세요.”

“왜. 뭐, 위치 추적기 이런 기능이라도 있는 거야?”

때려 부수고 쾅쾅 터지는 영화를 좋아해서 첩보물도 제법 본 다비가 농담처럼 꺼낸 말이었는데, 재하가 용한 무당이라도 만난 것처럼 놀라워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뭐야. 진짜야? 이게 이제 사귀니까 대놓고 또라이짓 하네?”

“형이 오지에 있다가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떡해요. 이야기 들어보니까 위험한 곳도 다니는 거 같은데, 형 남자친구로서 어떻게 가만히 있냐고요. 그래서 준비한 거예요.”

“무슨 영화도 아니고….”

다비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시계를 이리저리 살피며 의심스럽게 바라보자, 곁에 찰싹 달라붙은 재하가 판매 사원에 빙의해 시계의 기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위험한 거 아니에요. 그냥 미아 방지용으로나 납치, 유괴, 테… 당했을 시에 추적용으로 사용하는 거라서 안전해요. 마음 같아서는 생체 이식을 하고 싶었는데, 그건 시간이 없으니까. 우선 그거라도….”

“아니, 무슨 현실감 없는 소리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해? 생체 이식?”

“전 어렸을 때 이식했는데요? 삼촌도요. 우리 집안에서 어린애들을 그냥 유학 보낼 리가 없잖아요. 그냥 일반인들도 아니고, 재벌 집 자식이니까.”

“리온이도 했다고?”

“네. 전 스무 살 되자마자 뺐지만, 삼촌은 아직도 있을걸요. 우리 집 어른들이 삼촌을 끔찍하게 아껴서….”

평온한 말투에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영화 내용을 귀로 듣는 기분이었다. 다비가 시계를 멍하니 보고 있다가, 갑자기 재하를 보았다.

“너, 열일곱 살 때, 리온이 찾아올 수 있었던 게 그거 때문이야? 내 사진에 찍힌 리온이 손보고 왔다며?”

“형 사진 보고 삼촌 손인 거 알아냈단 이야기였죠. 위치를 칩으로 찾아낸 거고요. 제가 삼촌 직계가 아니라서 추적 승인 나는 데 한 달 넘게 걸렸어요.”

“난 사람 고용해서 찾아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있고요.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썼거든요.”

그동안 궁금했던 재하의 소름 끼쳤던 스토커 짓을 듣고 나자 궁금증은 풀렸지만, 그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됐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전히 시계를 들고 있기만 한 다비에게 재하가 종알거렸다.

“그 시계는 위치 추적만 되는 게 아니라 바이오메트릭 정보도 같이 기록해주는 거라서, 형 신체에 문제 생기면 바로 수색할 수 있어요. 전 세계 어디에 있더라도 말이죠. 사실 시판할까 하다가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상용화는 안 됐지만, 소문 듣고 필요한 사람들은 이렇게 구해요.”

“너희 기업에서 만든 거야?”

“네.”

쟤네 집이 이상한 건지 재벌들이 원래 다 이렇게 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시민인 다비에겐 그저 꿈같은 이야기로만 들렸다. 다비가 여전히 망설이고 있자, 재하는 다비의 손을 잡고, 눈썹을 떨군 채 간절한 눈으로 졸라대기 시작했다.

“형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요. 안전하게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고요.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오지잖아요. 제가 문자를 왜 그렇게 많이 보냈던 건데요. 형이 걱정되니까 매번 불안해서 보낸 거였어요. 이 시계 차면 제가 덜 불안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냥 착용해주면 안 돼요?”

당당하게 자신을 추적하겠다고 말하는 녀석에게 소름이 끼쳐야 하는데, 나쁘지 않았다. 지구 어느 곳에 있어도 자신의 행방을 언제든지 알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게다가 보고 싶으면 알아서 찾아오겠다는데. 생체 이식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시계만 차면 되는 거라면 문제없지 않나? 다비는 어느새 시계를 팔목에 대고 있었다.

“이거 튼튼해? 나 험한 데 다녀서 이렇게 성능 좋은 건 박살 날까 봐 무서운데.”

“튼튼해요. Y·F 전자에서 허투루 만들진 않죠. 거래 대상들이 보통 사람들도 아니고…. 아무튼, 내구성은 세계에 손꼽혀요. 수심 깊은 곳에 들어가도 문제없고, 영하 50도에서도 문제없어요. 용암은 모르겠지만 불에 던져도 타지 않고요. 탱크가 밟아도 흠집조차 안 나는걸요.”

“지독한 시계네. 외계인을 얼마나 고문한 거야. 차고 있기만 하면 알아서 막 되는 거야?”

“초기에 고유 번호 등록만 하면…. 그 후부터는 그냥 시계랑 똑같아요. 특별하게 복잡한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자주 충전하지 않아도 되고요. 오지에 있는 형에게 딱이죠.”

다비가 시계를 착용하려 하자, 재하가 얼른 시계를 받아서 다비의 손목에 냉큼 채워주었다. 바로 옆에 두지는 못하지만 이로써 당당하게 다비를 추적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재하는 한시름 덜어낼 수 있었다.

“고마워요. 이제 조금 안심할 것 같아요. 그런데 정말 아무 때나 빼면 안 돼요. 착용 해지하려면 3단계 본인 인증을 거쳐야 문제가 없어요. 아까 말했듯이 납치, 유괴 같은 위기 상황 때문에 존재하는 거라. 그냥 빼버리면, 곧바로 수색 들어가요.”

“…그런 건 채우기 전에 말하면 안 되겠냐? 아니, 무슨 영화 속 주인공도 아니고….”

“아직 설정 안 했으니까 지금은 빼도 괜찮아요. 형이 정 싫다면 빼도 괜찮지만, 전 다시 불안해지겠죠.”

입꼬리가 축 처지고 눈썹까지 축 처지니, 보이지도 않는 귀까지 처진 개 같아서 다비는 손을 들어 재하의 눈썹을 엄지로 꾹꾹 밀어 펴주었다.

“알고 착용하겠다는 거잖아. 이걸로 네가 안심한다면 계속 끼고 있을게. 그런데 나는 너한테 이런 거 못 달아줘? 이래서는 너만 날 감시하는 거잖아.”

“감시라뇨. 저도 확인 못 해요. 지금은. 형이 저하고 파트너 등록하면 서로 확인할 수 있어요. 저도 그 시계를 착용해야 하고요. 정말 괜찮아요? 이러면 형하고 저하고 계속 추적할 수 있는데.”

“해. 할 거면 똑같이 감시해야지.”

재하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화끈해서 정말 좋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질색할까 봐 망설였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반지 줄 때 시계도 같이 줄 걸 그랬단 아쉬움까지 들었다.

재하는 가지고 온 자신의 시계를 착용하고 등록했다. 겉보기에는 그냥 시계와 똑같이 생겨서 재하가 하는 이야기가 전부 거짓말 같았지만, 휴대폰과 노트북에 프로그램을 깔아주고 실행시키자 둘의 위치와 심장 박동, 체온이 뜨는 걸 확인하고 믿게 되었다.

재하는 다비의 시계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형, 고맙고, 사랑해요. 이걸로 형이 어디에 있는지 전부 알 수 있게 돼서 기뻐요.”

“이거 있으니까 문자는 앞으로 작작 보내라. 알았냐?”

“문자는 이제 습관인데, 안 돼요?”

“그럼 좀 줄이든가. 오지에서 배터리 충전하는 거 아깝다고.”

“…네. 알았어요.”

서로에게 비싸고 멋들어진 커플 족쇄를 채워놓고, 그렇게 둘은 장거리 커플의 길을 걷게 되었다.

***

2주간의 촬영을 마치고, 포인트를 옮기기 위해 잠시 도시에 나왔던 다비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재하에게 속았다.

“서로 감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곳에서는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시계는 제대로 작동되는 것 같았지만, 자신은 재하가 뭘 하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재하만 자신이 어딜 돌아다니고 있는지 확인하는 아주 불공평한 상황이었다.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쉬운 이야기였는데, 그때는 제 앞에서 귀여운 척하던 재하 때문에 그 간단한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귀여웠던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땐 왜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귀엽다고 느껴진 건지. 뭐에 홀린 기분이었다. 일방적으로 자신만 감시당하는 기분이 얼마나 좆같은지 깨닫고 나자 불합리한 상황에서 촬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물론, 보는 사람들은 잘 찍었다고 입을 모아 말했지만, 재하가 보면 ‘우리 형 사진이 이렇게 허접할 리 없어요.’ 같은 소리를 내뱉을 게 분명했다.

해서, 다비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인터넷에 연결했다.

“나도 이제부터 너 감시할 거야.”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지난 2주간 재하의 동선을 확인했다. 독일에서 있겠다고 했던 말처럼 재하는 독일에 있었다. 매서운 눈으로 동선을 확인하던 다비는 노트북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수가 있나?

“…얘 진짜 재미없게 사는구나.”

2주간 재하의 동선은 일정했다. 숙소에서 연습실, 연습실 주위의 식당과 카페가 재하의 지난 일정이었다. 쉬는 날도 없이 매일 똑같은 패턴. 떠나는 순간까지 공연하기 싫다며 징징거리고 울먹이던 게 어딘가 하찮아 보였는데, 자신이 없는 곳에서 녀석은 묵묵하게 자기 일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성실하게 말이다.

유재하와 유리온은 현재 최고의 기량을 떨치는 젊은 첼리스트였다. 특히 재하는 프로 연주자로 데뷔하는 순간부터 ‘첼로의 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실력과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 후에 리온이 데뷔하면서 지금은 쌍벽을 이루고 있지만, 어쨌든 재하가 천재라는 것에는 현재까지 음악계에서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다비도 그래서 그냥 타고난 재능으로 명성과 부를 얻었겠거니 생각했는데, 지금 동선을 확인하니 알 것 같았다. 천재가 노력까지 하니까 20대에 그런 명성과 부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아니면 제가 언제 써보겠어요. 바빠서 쓰고 싶어도 못 써요.’

돈 쓸 곳이 없어서 자신과 계약 연애를 할 때 펑펑 쓰는 거라고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평소에 저렇게 살면 정말 돈 쓸 시간이 없어 보였다. 자신이 없는 동안 방에 틀어박혀서 울고 있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저렇게 다 가진 녀석도 열심히 사는데, 열심히 살아야겠네.”

뜻밖의 자아 성찰을 하게 된 다비는 프로그램을 종료한 후, 밀린 숙제를 처리하기로 했다. 지난 시간 동안 다비가 오지에서 촬영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면 의식처럼 하는 행동이 있었다. 촬영하는 동안 재하가 보낸 문자 폭탄을 읽는 것인데, 몇 년을 해오다 보니 이제 문자 폭탄을 다 읽어야 진짜 촬영이 끝나는 기분을 느낄 정도로 길들여져 있었다.

다비는 휴대폰에 쌓인 ‘+999’를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2주간 쌓인 문자니까 밤을 새워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재하의 문자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문자를 읽기 시작한 지 3시간 만에 다비의 입에서 중얼거리며 나온 말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다비는 중얼거리며 다시 문자를 확인했다.

“뭐지? 왜 줄었지?”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재하의 문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전부 세볼 수는 없어서 일단 어제와 오늘 보낸 문자 수만 대충 훑어가며 세어보았다. 오늘 보낸 문자는 296통이었다. 어제 보낸 문자는 367통이었다. 자신의 입으로 줄이라고 했지만, 이건 너무 많이 줄어들었다. 남들이 보면 기함할 숫자지만, 지금까지 재하는 하루에 거의 500통 가까이 보낼 때도 있었다. 눈에 보일 만큼 확 줄어든 문자가 믿을 수 없어서 자꾸 화면에 눈이 갔다.

“바쁜 거겠지. 그동안 불안해서 보냈다잖아. 이제 사귀는 사이기도 하니까 안심하고 있는 건가 보지. 응. 그런 걸 거야.”

다비는 곧바로 긍정 회로를 돌리며 재하의 줄어든 문자 수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부정적인 생각이 입으로 튀어나왔다.

“아, 씨발. 이거 뭐지? 기분 더럽게…. 줄이라고 진짜 이렇게 확 줄여?”

사귀기 전에는 공연이 한창일 때도 평행 세계의 유재하가 문자를 보내는 건가 싶을 정도로 문자가 쏟아졌었다. 문자를 읽고 있는데도 문자가 계속 들어와 쌓이는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세 시간 동안 문자를 읽고 있는데도 들어오는 게 없었다.

“누가 갑자기 이만큼 줄이라고 했나?”

당장 재하에게 전화를 걸어 문자가 왜 줄었느냐고 따지려고 했지만, 줄이라고 한 건 자신이었다. 심지어 촬영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직접 문자 좀 줄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걸 가지고 재하한테 씩씩거리는 건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라 다비는 갈 곳을 잃은 분노를 삭여야만 했다.

프로그램을 열어 재하의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연습실이었다. 재하가 있는 곳을 확인하고 안심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프로그램을 괜히 깔았나. 이거 은근히 신경 쓰이네. 아, 나 조금 찌질해 보이는데…. 아, 몰라. 재하한테 문자만 넣고 그냥 내 할 일 해야겠다.”

다비는 재하에게 도시에 나왔다고 간단하게 문자를 보낸 후, 욕실로 가 씻고 나왔다. 촬영한 것들을 살펴볼까 하다가 조금 귀찮아져서 곧바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2주간 야외에서 숙식을 해결했더니, 그리 좋지 않은 침대도 최고급 침대 못지않았다. 저절로 눈이 감기고 의식이 아득해져 가는데, 갑자기 재하와 했던 섹스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가 쓸어내렸다.

“먹튀인가?”

다비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은 그동안 재하에게 뭔가 신이나 우상 같은 존재였다. 간절히 원하지만, 갖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결국 재하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원할 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다가 정작 갖고 나니 질려버린 게 아닐까? 섹스했다고 이제 싫증 났나? 아니, 너무 문란해 보여서 실망했을까? 너무 느껴서 나중엔 신음도 막 내뱉었는데, 그 소리가 싫었던 건가? 계속하자고 졸라대서 질려버린 건가.

“전부 처음이었는데….”

누구한테 온전히 사랑받고 배려받는 섹스는 처음이었다. 그게 좋아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느꼈던 거였다. 몸이 조금 힘들어도 그걸 뛰어넘을 만큼 재하가 좋아해 줘서 적극적으로 보인 건데 그게 싫어질 수도 있단 생각을 그땐 미처 하지 못했다.

이런 감정에 익숙하지 않은 다비는 이런 게 고민이 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연애를 하게 되면 자신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감정의 갑을이 바뀌었다. 바뀌지 않았더라도 재하를 중심으로 감정이 움직이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고작 문자 수가 줄었다고 이렇게 불안해하고 있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재하가 그럴 녀석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스멀스멀 치밀어 오르는 이 불안함이 끔찍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자신이 다스려야 하는 감정이라 더 싫었다. 차라리 계속 처박혀서 촬영이나 할걸, 문자를 보지 말걸.

계속 안 좋은 생각만 할 것 같아, 다비는 술이라도 마시고 자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재하라는 두 글자가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어.”

-형! 촬영 끝난 거예요? 아니면 잠깐 재정비하려고 나온 거예요? 문자도 봤네요? 연습 때문에 형이 보낸 문자를 이제 봤어요. 죄송해요.

받자마자 종알거리는 녀석의 목소리만으로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불안감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사라져버렸다. 아, 정말로 재하를 좋아하는 거구나. 새삼스럽게 다시 그 감정이 차올랐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나 변덕스러운 기분 변화에 어쩐지 코끝이 찡해졌다.

“미안하긴. 연습 바쁘다면서.”

-이제 안 바빠요. 아니, 바빠도 안 바쁘죠. 형이랑 2주 만에 통화하는 거잖아요. 저한테는 그 어떤 시간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시간인걸요. 형은 어땠어요? 촬영 잘했어요? 엄청 오래 돌아다니던데, 원래 한자리에서 자리 잡고 촬영하는 거 아니었어요?

“뭐래. 연습 안 하고 나만 추적했냐?”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어요. 연습하기 싫은데, 프로그램을 조금 바꿨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연습하고 있어요. 형 목소리 들으니까 진짜 좋다. 형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도 당장 갈 수 없으니까, 더 안달 나는 거 있죠. 형은 안 그랬어요?

“난 촬영하느라 바빠서…. 그리고 인터넷 연결 안 되는 곳에서는 프로그램 못 보더라.”

-헉? 그래요? 그건 몰랐네. 제가 알아보고 알려줄게요. 형, 형도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알려주면 안 돼요?

“너부터 말해봐.”

재하는 기다렸다는 듯 다비에게 종알거렸다. 잔뜩 들뜬 목소리에 재하가 어떤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지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다비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재하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문자가 왜 줄었는지 물어보지 못할 만큼 재하의 들뜬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다. 재하는 지난 2주 동안 다비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일정이 어땠는지, 앞으로 어떻게 지낼 건지, 문자로 보냈던 내용을 다시 떠들어댔다.

-형, 이제 형 이야기 들려줘요.

“나는 그냥 촬영했지. 덥고 습해서 숨 막히더라.”

-형 힘들었겠다. 그럼 뭐 찍었어요? 다큐 팀하고 갔다면서요.

“아. 이번에 극락조 촬영했어.”

-극락조요? 들어본 거 같긴 한데….

그때 재하 쪽에서 누군가 재하를 급히 찾았다. 조금 전까지 들떠 있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지더니 독일어로 뭐라고 몇 마디 하다가 다시 다비에게 말을 꺼냈다.

-형….

“거긴 아직 오후라서 연습할 시간인가 보네. 가서 연습해.”

-죄송해요. 전 연습 안 해도 되는데, 이번에 협연하는 연주자가 자꾸 맞춰달라고 해서.

“아, 협연하는구나.”

-네. 피아니스트 니키타 테레스치옌코. 꽤 실력 있는 연주자예요. 혹시 누군지 알아요? 꽤 유명한 피아니스트인데.

둘이 이야기하는 시간에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니까 기분이 이상해졌다. 조금 있으면 끊어야 하는데 왜 다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다비는 저도 모르게 퉁명하게 말을 뱉었다.

“내가 클래식은 잘 몰라서….”

-네, 좋은 자세예요. 형은 나만 알고 있으면 돼요. 아, 맞다. 거긴 지금 밤이죠. 오랜만에 숙소에 왔을 텐데 푹 자요. 형 목소리 더 듣고 싶다. 사랑해요, 형.

정말 예쁜 말만 하는 녀석이었다. 눈앞에 있었다면,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상이라고 뽀뽀도 잔뜩 해줄 텐데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아쉽고 마음이 허전했다. 보고 싶다고 말하면 당장이라도 올 녀석이라 다비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참았다.

“그래. 연습 잘하고.”

-형은 이야기 안 해줄 거예요?

“뭘?”

-사랑한다고요.

자신더러 그 말을 해달라는 소리인데, 재하에게 두 번 이야기 들은 기분이었다. 들은 만큼 재하에게 들려주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하고 나면 촬영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독일로 가고 싶어질 것 같아서 다비는 얕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붙잡았다.

“내가 그런 거 조금 쑥스러워해. 말로 안 해도 알잖아. 너하고 마음은 같은데, 내가 표현하는 게 서툴러. 그러니까 오해하지는 마.”

-네. 오해 안 해요. 형이 나 사랑하는 거 알고 있어요. 촬영은 어떻게 된 거예요? 내일도 쉬는 거면 형 일어날 시간에 맞춰서 전화하려고요.

“아, 내일 다시 포인트 옮겨서 이동할 거야. 이제 내일 떠날 준비 해야 해. 날은 계속 좋아서 촬영하는 거 빨리 끝날 거 같아.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

-그렇구나. 알았어요. 사랑해요, 잘 자요.

재하와 통화를 끝내고 나니, 조금 전보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자신이 연애하는 것도 신기한데, 장거리 연애를 하는 건 더 신기했다. 이렇게 힘든 걸 훈과 리온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하기만 했다. 옆에 없다고 바닥을 기어 다닐 것처럼 우울해졌다가, 목소리를 들었다고 구름 위를 동동 떠다니는 기분이라니. 장거리 연애는 장수에는 그다지 도움 되는 건 아니었다.

“피아니스트 니키타….”

다비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고 재하와 같이 공연할 사람을 찾아보기 위해 영상 사이트로 들어갔다. 내일 다시 문명과 멀어진 삶을 살면 정보를 알아볼 수 없게 되니 궁금함이 들었을 때 얼른 확인하기로 했다.

유명하다더니 정말로 구독자 수가 꽤 많은 연주자였다. 나이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다. 젊은 연주자라서 그런지 의상도 꽤 파격적이었다. 무엇보다.

“예쁘네.”

다비는 짧게 연주자에 대한 첫인상을 말하고, 연주 영상을 눌렀다. 방 안에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졌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다비는 연주를 보는 동안 저도 모르게 정자세로 앉아 감상하고 있었다. 솔직히 조금 소름 돋았다.

다비에게 음악이라는 건 작업할 때 듣는 노동요 같은 개념이었다. 특히 클래식은 끽해야 리온의 연주를 보거나 가끔 재하가 링크해준 연주 영상을 억지로 보는 게 다였다.

재하와 리온의 연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연주할 때 둘의 모습이 눈부시게 반짝거렸기 때문이었다.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멋지게 표현할 줄 아는 둘이 좋았다. 니키타 역시 재하와 리온처럼 저절로 눈이 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연주하는 것이 너무 즐겁다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라서 영상으로 보는데도 반짝거렸다.

재하와 독일에서 함께 있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다비는 클래식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음악에도 무지하고 귀로 듣고 좋으면 그냥 좋은 음악이라고만 생각했다. 훈은 리온과 사귀기 전에는 자신보다 더 심할 정도로 음악만 들으면 자는 녀석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첼로에 대해서 전문가 수준으로 알고 있고, 클래식에도 조예가 깊어졌다. 리온은 전복 생태는 몰라도 여러 음식 속에서 훈이 만든 음식을 기가 막히게 찾아낼 만큼 훈의 음식엔 통달했다. 재하도 카메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자신의 사진을 감성적으로 해석하는 재주가 있었다.

모두가 서로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데, 자신은 재하에 대해 아는 게 그리 많지 않았다. 재하가 자신의 모든 걸 문자로 그렇게 많이 보내줬는데도 말이다. 재하는 신경 쓰지 말고 자신만 좋아하면 됐다고 말했지만, 혼자 노력을 안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찜찜해졌다.

다비는 휴대폰 화면에서 여전히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하는 연주자를 바라보았다. 재하와 같은 연주자, 매력 있고 음악에 대해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

만약, 재하의 세계를 쉽게 이해해주고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때도 재하가 자신을 과연 지금처럼 좋아해 줄까? 그런 생각을 하자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째서 이런 걸 고민하는 거지?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머리가 멋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역시, 연애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장르였다.

***

재하는 다비에게 문자를 보냈다. 자신이 보낸 문자는 며칠째 읽히지 않은 상태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촬영에 들어가면 늘 있는 일이라, 재하는 쌓이는 문자와 상관없이 문자를 또 하나 더 보냈다.

“극락조.”

문자를 보낸 재하는 이번엔 극락조를 검색했다. 다비가 촬영하고 있는 곳에는 여러 종류의 극락조가 서식하고 있었다. 수컷들은 암컷에게 선택받기 위해 각기 화려한 깃털과 춤, 독특한 구애 방식을 갖게 되었단다. 암컷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수컷들의 처지가 과거의 자신과 비슷해 보였다. 자신도 다비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구애 활동을 펼쳤는가. 재하는 수컷 극락조의 구애를 응원하며 글을 읽어나갔다.

“형은 지금 이런 녀석들을 찍으러 다니는 거구나.”

다비가 극락조를 촬영하는 모습을 상상하던 재하가 미간을 구겼다. 저런 이상한 새들에게 그런 사랑스러운 시선을 주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응원했던 걸 전부 취소했다. 극락조 망해라, 암컷에게 전부 차여버려라. 극락조가 아니더라도 다비의 피사체는 모두 사랑스러운 시선을 받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지구를 전부 폭파해버리고 싶었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다비의 사진은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기 때문에 그런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었다. 자신의 삼촌도 그런 사람이었다. 세상을 아름답고 순수하게 보는 사람들은 음악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매개체가 다를 뿐 세상에 자신의 아름다운 마음을 보여주는 능력을 갖췄다.

다비도 리온과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아픔이 있는데도 세상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올곧은 시선을 가진 강한 사람이었다. 그 시선이 오롯이 자기에게만 향했으면 좋겠다. 7년을 넘게 구애해서 이제야 연인이 되었는데, 그 시선이 지금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단 걸 아니까 더 갈증이 났다.

그래서 예전만큼 문자를 보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보내는 문자를 읽는 것조차 질투가 났다. 정작 보낸 사람은 시선을 못 받는데, 문자가 그 시선을 받는다는 게 생각할수록 너무 짜증 났다.

내 건데.

이제 막 사귀기 시작했는데, 이런 마음을 표현하면 다비가 질색하며 헤어지자고 할까 봐 조금 자제했다. 문자를 보내는 순간마다 다비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졌다. 재하는 참고 꾹 참다가 못 참을 때 한 번씩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하, 형 또 이동하네. 이번엔 뭘 찍으러 가는 거지? 아니면 못 찾았나? 그래도 전보다 이동 범위가 넓진 않은데…. 그쪽이 서식지인가?”

그때 갑자기 재하의 뒤에서 쾅! 하며 피아노 소리가 크게 울렸다. 니키타가 피아노를 신경질적으로 내리치며 재하를 노려보았다.

「재하, 이런 식으로 하면 같이 합주 못 해. 집중하라고 말했잖아.」

「잠깐만, 내가 지금 연주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시간 날 때마다 문자를 보냈던 걸 갑자기 줄이려니 금단증상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이 순간에도 다비는 자신을 잊고 저렇게 열심히 돌아다니며 촬영에 몰두해 있을 거란 생각에 연주하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진 지 오래였다.

“독일로 그냥 데려올걸. 아니면 내가 형을 따라다녔어야 했는데.”

재하는 첼로에 기대 휴대폰 화면을 보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니키타가 한심하단 눈으로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시간에 그냥 연습하지? 프로그램도 일방적으로 바꿨으면 협조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지금은 연주 못 한다니까. 게다가 더 연습 안 해도 될 정도로 완벽하잖아.」

「완벽한 건 알지만…. 오, 네가 이런 애인 줄 정말 몰랐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어. 5분만 쉬었다가 해. 잠깐, 쉿. 지금 이동 중이야.」

재하는 니키타에게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어차피 연주는 완벽했다. 지금 당장 공연에 들어가도 실수 같은 걸 할 리가 없었다. 니키타는 그저 심심하니까 자신에게 놀아달라고 저러는 거라서 재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재하는 휴대폰 화면에서 다비의 위치가 고정될 때까지 지켜보았다. 다비가 이동하지 않고 한자리에 멈춰 있는 걸 확인한 후에야, 허리를 곧게 펴고 숨을 쉴 수 있었다. 재하는 서둘러 다비에게 문자를 짧게 보냈다.

[형, 보고 싶어요.]

문자를 보낸 후, 시간을 확인했다. 니키타와 약속했던 5분이 돼서 휴대폰을 뒤집어두었다.

손에 휴대폰 대신 활을 드는 걸 확인하자 니키타도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니키타는 재하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고, 이번 공연이 처음도 아니었다. 예전에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지만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뭐에 홀린 듯 휴대폰에 집착하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 인터넷에서 봤던 ‘고양이에게 어항을 설치해줬을 때 벌어지는 일’이라는 제목을 가진 사진을 인간화 버전으로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제정신을 차리고 연주하는 재하는 짜증 날 정도로 완벽한 인간이라 저 정도 괴팍함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재하, 이제 시작해? 정말 해도 되는 거지?」

「시작해.」

재하가 연주자의 눈으로 돌아왔다. 니키타를 보고 고개를 까딱이자, 니키타가 연주를 시작했다. 뒤이어 재하도 니키타의 선율에 자신의 선율을 얹기 시작했다.

조만간 무대 위에서 사람들을 전율하게 할 만큼 매력적인 소리가 연습실에 울려 퍼졌다. 첼로의 신과 피아노의 여제가 만들어내는 화음은 강렬했다. 재하는 더 완벽한 무대를 위해 지금은 연습에 집중하기로 했다.

***

‘형, 니키타 씨는 제 세계를 이해해주는 사람이었어요. 연주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을 느꼈죠. 이런 게 소울메이트라는 건가 봐요. 그래서 전 니키타 씨와 연애해보려고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잘 지내요.’

재하가 웃으며 자신에게 이별을 고했다.

“야, 이 개새끼야!”

다비는 욕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이라는 걸 알자마자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꿈에서 이별을 고하던 재하는 너무나 음악가다운 이유를 들먹였다. 재하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재하를 믿지 못해 그런 꿈을 꿨다는 것에 진저리가 났다.

“아, 대체 뭐냐고. 왜 머리가 따로 놀고 있냐고.”

희귀하다는 새들을 빨리 찾아낸 덕분에 추가 촬영이 일찍 끝나서 다비는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촬영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안 들었는데, 도시로 돌아오자마자 처음 꾼 꿈이 이런 거였다. 이런 꿈을 꾸게 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문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다비는 손을 뻗어 충전이 끝난 휴대폰을 확인했다. 세 시간 정도 자는 사이에 온 문자는 83통. 예전에는 그 세 배였다. 조금 예민해진 것 같아 문자를 확인하지 않고, 곧장 냉장고로 향해 물을 꺼내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 열기를 식히자, 머리가 조금 맑아진 것 같았다. 그제야 다비는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형, 촬영 중이라 인터넷 연결 안 된다면서 SNS에 사진 올렸네요. 저 그거 보고 행복했어요. 저 보고 싶어요? 나도! 나도 보고 싶어요. T^T]

[지금 형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전에는 돌아다니더니, 이번엔 한 곳에 계속 있더라고요. 3D 맵 켜서 형 있는 곳 구경했어요. 밀림이라 그런지 뭐 보이는 건 없었어요.]

[연습이 안 되고 있어요. 형이 너무 보고 싶어서.]

[형, 혹시 도시예요? 왜 거기에 있는 거로 뜨지?]

[형, 촬영 끝났어요? 왜 거기에 있어요?]

[형, 피곤해서 전화 안 받는 거죠?]

[연습하고 올게요! 연습 정말 싫어요. T^T]

[형, 그거 아니에요. 저 정말 형밖에 없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형이 안 봤으면 좋겠어요. 진짜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데 진짜 도시에 왜 있어요? 촬영 끝났어요? 저 내일 공연인데. 오라는 건 아니고 그냥 공연이라고요. 피곤해서 안 받는 거죠?]

중간에 이상한 소리가 쓰여 있긴 했지만, 자는 사이에 자신이 도시로 나왔다는 걸 알고 신이 난 모양이었다. 문자를 확인했는데, 추가 문자가 오지 않는 걸 보니 바쁜 것 같았다. 이곳이 지금 저녁이면 거긴 이제 막 점심때니까 재하는 연습하느라 바쁠 시간이었다. 답장을 보낼까 하다가, 이런 기분으로 보내기는 뭐해서 조금 이따 보내기로 했다.

“공연이 내일이면…. 갈까?”

생각보다 촬영이 일찍 끝나서 재하의 공연 일정에 맞출 수 있게 되었다. 독일로 갈까 생각하다가 말도 없이 갑자기 찾아가면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동성 연인이 찾아가면 곤란해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녀석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머뭇거릴 때마다 이런 자신이 더 한심하게 느껴졌다.

“뭐 어때. 재하가 곤란해하면, 리온이랑 놀다 오면 되는 거지. 그냥 가. 겸사겸사 녀석 공연도 보고 오고….”

다비는 비행기 표를 알아보려고 휴대폰을 들었다. 재하의 공연도 예매할 겸 인터넷에 들어가서 재하의 이름을 영문으로 쳤는데, 이상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세기의 음악가 커플 탄생 예감』

어두운 밤에 흐릿하게 찍힌 사진은 재하와 그 피아니스트가 서로를 보며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이었다. 기사의 내용은 둘이 같은 대학 출신으로 오랜 인연이 있었고, 그간 여러 번 협연했던 사이였다는 것과 함께 밤에 밀회를 즐긴 것 같다는 추측성 이야기였다. 기사 마지막에는 둘이 함께 독일에서 공연한다는 홍보성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런 사진들은 꼭 흐릿하더라. 휴대폰으로 찍어도 이거보다는 선명할 듯.”

아니라고 믿으면서도 기분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진만 가지고 전후 상황을 멋대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사진작가인 자신이 모를 리 없었다. 당연히 머리로는 같이 공연하니까 이런 사진은 얼마든지 찍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꿈을 꾸고 난 후에 본 첫 기사가 하필 이런 거라 괜히 마음만 심란해졌다.

“하, 김다비 다 죽었네. 왜 이러지? 재하가 그럴 놈 아닌 거 알잖아. 정신 좀 차려.”

다른 데서는 덤덤하고 무던하게 받아들이는데, 이상하게 연애만큼은 어려웠다. 제 감정인데,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짜증 났다. 이럴 때는 몸을 피곤하게 만들어 생각을 잠시 멈추는 것도 방법이었다. 다비는 잠시 휴대폰을 멀리하고 운동을 하며 마음을 다스리기로 했다.

땀에 절어버릴 만큼 아무 생각 없이 운동하고 나니까 조금 개운해졌다.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 속옷만 입은 채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 표 예매해야 하는데. 독일로 가야 하나. 그냥 미국으로 돌아갈까.”

다비는 일단 침대에 던져두었던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부재중 전화가 70통?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재하에게 전화가 다시 왔다. 다비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전화를 받았다.

“어.”

-형, 일어났어요? 형이 계속 도시에 잡혀 있어서 전화 걸어봤는데, 받아서 다행이에요. 아까는 잤던 거예요?

“어. 좀 잤어. 지금은 씻고 오느라 전화 못 받았어.”

-아, 씻었구나. 저는 형이 저 피하는 줄 알고….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 차가웠던 건지 잔뜩 들떠 있던 목소리에서 힘이 쪽 빠져나갔다. 이런 목소리를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100일이 넘게 재하가 허투루 달라붙어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목소리만 듣고도 녀석이 어떤 표정으로 통화를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다비는 목을 가다듬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하야.”

-형이 그 기사를 봤는지는 모르겠는데, 미리 이야기하려고요. 니키타 씨하고 같이 있는 사진이 찍혔는데요. 그거 연습실에 나올 때 찍힌 사진이에요. 니키타 씨하고 정말 동료예요. 그냥 작별 인사한 거예요.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게 맞는 거겠지.”

-정말이에요.

재하의 목소리가 듣기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믿어주지 않을까 봐 겁에 질린 녀석에게 자신의 불안함을 퍼붓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먼저 해명하는데, 거기에 대고 화를 내는 건 연인으로서도 할 짓이 아니었다. 다비는 자신의 불안함보다 재하의 불안함을 먼저 진정시켜주기로 했다.

“재하야, 나 사진작가야. 그런 허접한 사진 한 장으로 너 의심할 만큼 사진 보는 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불안해해. 진짜 둘이 뭔가 있으면 추적해서 결정적인 증거를 찍었겠지. 없으니까 그런 애매한 사진을 기사 사진으로 쓴 거잖아. 내용도 뭐 별거 없던데.”

-기사 봤구나. 그래도 그런 기사 기분 나쁘잖아요. 저는 형한테 조금의 오해도 만들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알았어. 믿어. 내가 안 믿어주면 누가 믿어주냐.”

의심하거나 불안해하는 건 자신이면 족했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나아질 테니까 지금은 어른스럽게 이해심 많은 연인이 되고 싶었다. 재하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왔다.

-그런데 형, 참지 말아요. 형이 조금이라도 의심스럽고 못 믿겠으면 저한테 욕하고 화를 내요. 형은 나한테 그래도 되는 사람이잖아요. 나는 형이 속으로 끌어안고 참고 있을까 봐 걱정이에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게 뭐가 됐든 전부 말해줘요. 제가 아무리 형 스토… 아니, 형을 사랑한다지만 말로 안 하면 모르는 것도 있단 말이에요.

재하의 말에 가슴이 뭉클거리며 뜨거워졌다. 재하는 항상 애새끼처럼 굴다가도 가끔 이렇게 저보다 어른스럽게 굴 때가 있었다. 이럴 때마다 나중 일은 생각하지 않고 정말 응석이라도 부리고 싶었다. 그래도 되는 건가? 정말 그래도 재하는 다 받아줄 수 있는 건가. 다비는 아주 조금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나… 지금 독일로 가도 돼? 여기서 오래 걸려서 공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고 싶은데 괜찮겠어?”

-여기로요? 정말요? 나 보고 싶어서 오는 거예요?

“…어.”

-네? 형 다시 길게 이야기해주면 안 돼요? 저 지금 잘 못 들었어요.

“너 보, 보고 싶으니까 독일에 가고 싶어졌다고. 너 곤란하게 만드는 거면 그냥….”

-아니요? 아닌데요? 왜 곤란하다고… 흑. 형이 나 보고 싶다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해요. 형이 정답… 정답이라니까….

수화기 너머로 재하가 훌쩍거렸다. 그 소리를 들으니까 더 보고 싶어졌다. 목 끝까지 차올랐던 불안함이 재하의 눈물로 전부 씻겨 내려간 기분이었다. 다비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눈물 많은 연인을 달래주었다.

“공연 시간에 맞춰서 갈 거니까 울지 말고 예쁜 모습 보여줘야지. 눈 팅팅 부은 채로 무대에 오를 생각이냐?”

-저 울어도 눈 안 붓는데요. 그래도 예쁘게 있을 테니까… 빨리 와요. 사랑해요, 형.

“그래. 짐 풀어놓은 거 없으니까 곧바로 갈게. 넌 일단 공연 준비에 집중해. 아 참, 나 시계 빼놓을 거다. 나 어디만큼 왔나 추적하느라 너 잠도 안 잘 거 같으니까.”

-그건 싫은데…. 그럼 출발하기 전에 셀카 하나만 찍어서 보내주면 안 돼요? 형 보고 싶어 죽겠어요.

“안 돼. 너 그거 보면서 자위할 거 같아.”

-…해도 되는 거면 보내줘요. 그리고 전 형 셀카 아니어도 형이 찍은 사진….

“뭐, 뭐래. 얼른 끊어. 준비할 거야. 이따 보자.”

다비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에어컨이 시원하게 틀어져 있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가슴이 뒤늦게 콩닥거렸다. 조금만 솔직해지면,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는 걸 알았다. 자신의 행동이 정답이라는 재하의 해답에 빨리 독일로 가고 싶었다. 만나서 안아주고 보고 싶었다고 마음껏 응석 부리고 싶었다.

다비는 재하에게 자신의 사진을 하나 찍어서 보낸 후, 곧바로 독일로 향했다.

***

재하는 공연 전까지 거울을 보고 또 보았다.

다른 때라면 공연 전까지 다비에게 문자를 보내며 연주자들과 시간을 보낼 텐데, 오늘은 대기실 거울에 달라붙어 계속 외모를 살피는 데 시간을 보냈다.

대기실 문이 열리며 재하의 매니저가 들어왔다. 재하가 곧장 몸을 돌려 매니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물었다.

「왔어?」

「아직….」

「무슨 일 생긴 거 아닌가? 비행기도 도착했잖아. 형이 이 공연장 처음 온 건 아닐 텐데.」

「곧 오겠지. 일단 진정하는 게 어때? 리허설 때부터 지금까지 평소답지 않아서 걱정돼.」

다비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게 신경 쓰여 재하는 매니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계도 빼놓고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계속 연락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항으로 마중 갈 것을 그랬다며 재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라이언은? 왔어?」

「리온도 아직 안 왔어. 아! 훈은 도착했고.」

「그럼 그를 불러줘. 지금.」

「알았어.」

매니저가 밖으로 나가자 재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연하면서 이렇게 떨어본 적이 없었다. 수많은 콩쿠르에 나갔을 때도 긴장한 적 없던 자신이 다비가 온다는 사실에 손을 떨고 있었다.

“하, 어디로 간 거야.”

다비만 생각해도 코끝이 찡해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귀고 나면 이 증상이 나아질 줄 알았더니 더 심해졌다. 하지만 오늘은 예쁘게 보여야 하니까 울음을 꾹 참았다.

대기실 문이 열리고 훈이 들어왔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어오는 걸 보고 재하가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형. 오셨어요?”

“응. 무슨 일인데 날 찾아?”

“다비 형 왔단 연락 받으셨어요? 전 못 받아서…. 오늘 온다고 했거든요. 독일로 오는 비행기 탄다고 말했는데 그 후로 연락이 없어요. 형은 알아요?”

“아, 그거. 연락받긴 받았는데….”

“다비 형이 형한테 연락했어요?”

자신한테는 연락도 안 해주더니 훈한테는 연락했다는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안색이 굳어버렸다. 훈이 고개를 저으며 재하를 달래주었다.

“나 아니고 리온이한테 연락했어. 어디 좀 들러야 한다고 해서, 금방 올 거야.”

“삼촌한테 연락했어요? 왜?”

“리온이하고 같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공연 시간 늦지 않게 올 거니까 넌 진정하고 공연 준비해. 인상 펴고.”

훈의 지적에 매서운 얼굴로 한기를 뿜던 재하가 얼른 순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이미 볼 거 다 본 훈은 재하의 팔을 토닥여주며 숨죽여 웃었다.

“무서운 얼굴도 할 줄 알았네. 다비는 알아?”

“죄송해요. 형 앞에서는 얌전하게 있긴 했는데, 아마 섬에서 알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형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 훈이 형한테 인상 썼다고 하면, 다비 형이 화낼 거 같아요.”

“인상 좀 썼다고 다비한테 쪼르르 가서 이르고 그런 사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예민해져서 그런 거잖아. 어쨌든 애들 시간에 맞춰서 올 테니까 얼른 공연 준비해. 리온이가 다비 온다고 해서 좋은 자리로 잡아놨으니까 무대에서 잘 보일 거야.”

“네. 형 오는 거 확실하다니까 이제 안심돼요.”

“그럼 나 가볼게. 이따 보자.”

훈은 재하를 토닥이고 대기실을 나갔다. 재하는 다비가 온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이제 다비에게 잘 보일 준비만 하면 됐다.

***

무대 뒤에서 니키타와 대기하고 있던 재하는 손으로 머리를 정돈하다 니키타를 보며 말했다.

「니키타, 나 지금 어때 보여?」

「…뭐?」

「나 지금 예뻐?」

「…뭐? 갑자기 왜 이래? 연인이라도 왔어? 유재하가 안 하던 짓을 하네?」

니키타는 진심으로 비아냥거렸는데, 재하가 뺨을 감싸며 수줍어하고 있었다.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모습에 니키타가 질색하며 미간을 구겼다. 지금까지 협연하면서 이렇게 엉망인 재하는 처음 보았다. 이런 질문 자체를 한 적 없었다. 무대에 나가기 전까지 음악 이야기 외에는 사적인 이야기를 제대로 나눈 적이 없었는데, 대체 잠시 쉬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천하의 유재하가 나사가 빠진 것처럼 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보이는 행동으로는 연인이나 그 비슷한 사람이 온 모양이었다.

「무대에서도 그렇게 굴면 공연 중간에 나가버릴 줄 알아. 난 완벽한 무대를 원하는 거지 엉망인 무대에서 망신당하고 싶진 않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들러리가 되고 싶지 않으면 정신 제대로 차리고 따라붙을 생각이나 해.」

「진짜 얼굴하고 첼로 말고는 볼 거 없는 남자라니까.」

「돈은 왜 빼먹어.」

투닥거리는 중에 스태프가 다가와 입장 사인을 내렸다.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무대로 올랐다. 재하는 무대 중앙으로 이동하면서 조도가 낮아진 관객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돌리기 전에 곧바로 다비를 찾을 수 있었다.

잠깐만.

재하는 하마터면 걸음을 멈출 뻔했다. 하지만 심장은 쿵 하고 멈췄다. 정장 차림의 다비가 관객석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머리까지 세팅하고 나타났다. 아무렇게나 막 입어도 잘생겼는데, 작정하고 차려입고 나타난 다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멋있었다. 무대 위에서 발기할 것 같았다. 자제력이 없었으면 정말로 발기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장을 입은 김다비라니. 당장 벗겨버리고 싶었다.

머릿속으로는 그런 음란한 상상을 하고 있었지만, 겉보기에는 누구보다 무대 위에서 진지하고 카리스마 있는 얼굴로 등장부터 분위기를 휘어잡고 있었다. 깔끔하고, 단정하게 잘생긴 얼굴에 엷은 미소가 드리워졌고, 제 옆에 있는 니키타와 비즈니스적인 다정한 포옹을 나눴다. 둘은 지휘자와 악장에게 인사를 건넨 후, 각자의 자리에 앉아 연주 준비를 했다.

재하는 의자에 앉아 다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자신의 첼로인 하데스를 품에 안았다. 단단한 첼로가 몸에 닿자, 첼로가 아닌 다비를 무대 위에 올려놓고 다비의 몸을 연주하고 싶어졌다. 활로 다비의 몸을 연주하는 건 질투 나니까 제 손으로 다비가 느끼는 모든 곳을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기분 좋은 곳을 스치면 하데스보다 더 좋은 소리가 날 것 같았다. 하, 연주하기 싫다. 이 역시 머릿속에서만 이어지는 상상이었다.

니키타가 우아하고 아름다운 손짓으로 건반을 두드리며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뒤이어 오케스트라단이 니키타의 연주를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재하는 다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연주를 시작했다.

재하는 지금까지 기사에서 그를 형용했던 것처럼 ‘나이에 맞지 않는 성숙한 무대 매너와 관록 있는 연주자’에 맞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었다. 다만, 다비에게 더 잘 보이고 싶어서 다른 때보다 더 진심으로 연주하고 있다는 게 조금 달랐다.

니키타가 재하의 첼로 소리를 듣고 짙게 미소 지었다. 어린 녀석이 벌써 이런 소리도 낼 줄 알았다. 정신 차리고 제대로 따라붙으라고 하더니, 이러려고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모양이었다. 자신 역시 반주자로 이 무대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재하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평소보다 더 진지하게 연주에 임했다.

두 천재의 연주에 관객들은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한 실황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

다비는 재하의 연주회에 온 것이 처음이었다. 시간이 맞지 않았고, 시간이 남을 때는 재하가 먼 곳에서 공연해서 굳이 찾아가려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재하가 무대에서 반짝거리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첼로 연주하는 모습은 직접 본 적도 있었다. 그때는 예쁜 것, 하며 들었던 연주였는데, 오늘은 연주를 끝까지 듣기 힘들었다.

오늘따라 재하가 자신을 집요하게 보며 연주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게 첼로가 아니라 김다비 너, 라고 하는 것처럼 소름 끼치게 야한 얼굴로 말이다. 연주하던 재하가 한 번씩 미소를 지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좌석 손잡이를 움켜쥐고 숨을 멈췄다. 이 새끼가 무대 위에서 섹스 쇼라도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관능적인 눈빛 때문에 연주가 좋았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쁜 모습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숨 막히게 섹시한 연주였다. 고상한 곳에서 연주를 들으면서 발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재하의 시선 때문에 당장 화장실로 달려가고 싶다는 품위 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행히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중간 쉬는 시간이 생겼다. 재하가 무대에서 벗어나며 시선이 사라지고 나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다비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무대에서 원래 저렇게 섹시했던가? 이건 너무 심한데?

「잠깐 쉬더니 무슨 일이 있었나? 재하가 더 섹시해진 것 같아.」

「나도. 몰입하다가 한 번씩 웃을 때마다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고 싶더라. 그 곡이 그렇게 섹시한 곡인 줄 정말 몰랐어.」

「니키타 때문인가? 니키타도 지금까지 들었던 연주 중에서 제일 에너지 넘쳤지.」

「아, 니키타 연주 너무 멋있어. 둘 다 내 거였으면….」

다른 사람들의 감상평도 다비와 다를 바 없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기사 내용도 함께 들렸다. 니키타 덕분에 재하가 섹시해진 거 아니냐는 말이 들렸을 때는 저 새끼를 섹시하게 만든 건 자신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다비는 꾹 참아냈다.

둘의 사이가 어찌 됐든 무대 위에서 보여준 모습은 둘 다 강렬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리온과 훈이 다가와 다비를 데리고 로비로 나가 잠시 열기를 식힐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 리온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마음에 평안을 얻은 덕인지 다음 연주부터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들을 수 있었다.

2부 공연에서도 둘은 조금도 지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 연주를 이어갔다. 음악에 몰입한 두 연주자는 흘리는 땀까지 무대장치처럼 보일 정도로 극적인 연주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곡을 연주할 때는 첼로와 피아노 연주만 이어졌다. 무대에서 내내 야한 얼굴이었던 재하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지더니, 봄바람 같은 선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강렬한 연주를 하던 니키타 역시 가벼운 터치로 재하의 연주를 받쳐주고 있었다. 지금 계절에 딱 맞는 아름다운 마무리로 둘의 무대가 끝났다.

관객들은 지금까지 봤던 둘의 협연 중에서 최고였다는 평을 나누며 객석을 빠져나갔다.

다비는 재하의 숙소로 향하려고 리온과 훈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리온이 오늘 연주에 흥분했는지 잔뜩 들떠서 감상을 늘어놓고 있었다.

“재하하고 니키타, 너무 섹시했어. 우리 재하 언제 그렇게 컸지. 안 그래도 잘 켜는 애가 오늘은 작정하고 연주하는데… 우아. 연주하고 싶다. 연습실 갔다 오고 싶어.”

“리온아? 자기야. 오늘은 다비도 있으니까 내일 가서 연주해. 얼마 전까지 계속 공연하느라 피곤할 텐데 하루쯤은 쉬어. 내일 연습실에서 먹을 도시락 싸줄 테니까 가서 실컷 연주해.”

“헝, 도시락. 훈이 너무 좋아. 내일 연주해야겠다. 다비는 어떤 곡이 제일 좋았어? 나는 탱고. 우아, 나도 탱고 연주하고 싶다.”

다비는 리온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전부 좋았는데, 특히 마지막 곡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곡이라 귀에 익었고 연주하며 저를 보는 재하의 표정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그게 좋았다.

“마지막 곡. 앙코르곡 전에 들었던 거. 많이 들어봤는데 뭔진 모르겠지만. 프로그램 설명 놓쳐서 제대로 제목을 모르겠네.”

“아! 그거. 그거도 좋았지. 재하하고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잘 어울렸지. 그런 표현도 할 줄 알고. Liebesfreud, 사랑의 기쁨이란 곡이야.”

“아.”

제목을 듣자마자 다비의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연주한 이 곡은 짝을 이루는 곡이 하나 더 있어요. 언젠가 형 앞에서 그 곡을 연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뉴욕에 있는 공원에서 재하가 ‘사랑의 슬픔’을 첼로로 연주하고 자신에게 고백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로 그 곡을 이런 큰 무대에서 연주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사랑하고 있어서 기쁘다고 사람들에게 연주를 들려주는 재하의 표정이 다시 떠올라 다비는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낭만적인, 뭐 그런 녀석들은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하, 꼴려서 돌아가시겠네.

리온이 다비를 손으로 툭툭 쳤다.

“다비야, 우리 먼저 가야겠다.”

“…어? 나도 같이 가야지. 너희만 가게?”

“저기. 재하 오고 있어.”

리온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재하가 장난감을 물고 주인을 향해 뛰어오는 개처럼 뛰어오고 있었다.

“다비 형.”

재하가 뛰어오는 걸 보던 리온이 훈을 붙잡아 빠져주자고 눈으로 말했다.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훈은 리온이 눈치가 생긴 것에 기뻐하며 다비에게 말을 건넸다.

“재하가 찾네. 우리는 이만 가볼게. 짐은 내일 가져가라.”

“아, 어. 그래. 오늘 고마웠어. 먼저 가.”

다비는 매우 쑥스러워하며 리온과 훈을 보냈다.

재하가 히죽 웃으며 다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잔뜩 상기된 얼굴이 무대에서 보여준 얼굴과 너무나도 다르고 익숙해서 귀엽고 반가웠다.

“형, 오랜만….”

재하가 벌써 감격에 겨워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굴어 다비는 손수건을 꺼냈지만, 재하가 먼저 다비의 손을 붙잡았다.

“형이 제 공연을 보러 와서 진짜 좋았어요.”

“내가 온다고 말했잖아.”

“네. 그런데 무대에서 형 보니까 진짜 좋아서요. 평소보다 더 열심히 했어요. 형 말대로 예쁘게 있었는데, 정말 예뻤어요?”

있지도 않은 꼬리가 뒤에서 정신없이 붕붕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 다비는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잡힌 손을 빼내고 주위를 살폈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전부 재하의 연주를 들으러 왔던 관객들이라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졌다.

“재하야, 일단 여긴 사람 많으니까….”

“아, 네. 그렇죠. 집. 집으로 갈까요?”

“호텔.”

“…네?”

뜻밖의 말에 재하가 멍한 눈으로 다비를 보았다. 다비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우물거렸다.

“너희 아랫집, 리온이하고 훈이 있잖아. 저번에도 걔들 있는 곳에서 했는데, 이번에 또 그러는 거 민망해서 못 하겠어. 그런데 지금은 너하고 둘이 있고 싶고…. 뭐, 안 내키면 그냥 집….”

“아뇨? 아닌데요? 완전 내켜요. 가요. 호텔. 그런데 여기 호텔은 어디가 좋은지 모르는데.”

“아무 곳이나 괜찮으니까….”

“아. 형, 사랑해요.”

무대에서 그렇게 잡아먹을 듯 쳐다봐놓고, 다비가 유혹한 것처럼 수줍어하는 녀석의 요망한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무대도 무대였지만, 마지막 곡의 의미를 알고 난 후로 계속 몸에 열기가 올라 어디든 좋으니 재하와 단둘이 있고 싶었다.

“일단 좀 움직이자.”

“지하에 차 있어요. 가요.”

재하와 주차장으로 향해 차에 올라타려는데, 누군가 재하를 불렀다. 다비와 재하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니키타가 재하에게 알은체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연주를 해서 크게 봤는데 실물은 화면과 무대에서 보던 것보다 아담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재하와 나란히 서자, 차이가 더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작은 체구로 그렇게 열정적으로 연주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해 다비는 니키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니키타가 재하와 다비를 번갈아 보더니 방긋 웃으며 재하에게 독일어로 이야기를 건넸다.

「일찍 나가더니, 이제 가?」

「지금 나가려고. 오늘 공연 수고했어.」

「너도. 오랜만에 그렇게 몰입해서 연주한 거 처음이야. 내일도 잘 부탁해?」

「알았으니까 어서 가.」

재하가 빨리 쫓아내려는데, 니키타가 재하의 옆에 있는 다비를 흘끗 살피고는 재하에게 물었다.

「소개해줘야지. 친구?」

「친구 아닌데.」

「친구 아니면….」

재하의 갑작스러운 말에 다비가 서둘러 니키타에게 악수를 청하며 잘생긴 미소를 지었다. 놀랍게도 다비의 입에서 독일어가 흘러나왔다.

「데이비드입니다. 포토그래퍼예요. 재하보다 두 살 많아요. 그래서 친구라기보다는 친한 형입니다.」

「아, 그렇군요. 반가워요. 니키타 테레스치옌코예요. 재하보다 두 살 많으면, 나하고 나이가 같네요.」

니키타는 우아하게 손을 내밀며 다비의 손을 잡았다. 다비를 유심히 쳐다보던 니키타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예쁜 미소를 지었다.

「‘잠자는 숲.’ 작가님이죠?」

「…아, 네. 맞아요.」

니키타가 순식간에 스타를 만난 팬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비의 손을 양손으로 덥석 붙잡았다. 다비가 독일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에 놀라서 멍하니 있던 재하가 뒤늦게 손을 맞잡고 있는 둘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니키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렬한 눈으로 다비에게 말을 걸었다.

「와우. 이런 곳에서 작가님을 만나게 될 줄은…. 저 그 사진 정말 좋아해요. 그 사진 제가 샀는데.」

「아, 정말요?」

「어쩐지, 낯이 익다 싶었더니. 저 진짜 그 사진 보자마자 작가님한테 반했잖아요. 하늘은 쨍하게 밝은데 어두운 숲 때문에 밤으로 보이는 게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게다가 뭔가 보고 있으면 너무 사랑스럽고, 가슴이 막 두근거리고….」

니키타의 감상에 재하의 표정이 순식간에 경계 태세로 돌입했다. 다비의 손을 붙잡고 있는 니키타의 손을 얼른 떼어냈다.

잠자는 숲이라니. 재하가 군사 훈련을 받는 동안 팔려버리는 바람에 유일하게 보지 못한 사진이었다. 그 행방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다비가 유명해지며 그의 사진은 꽤 비싸게 팔리고 있었고, 순식간에 나가기 때문에 재하도 가끔은 다비의 사진을 놓칠 때가 있었다. 다비의 팬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 재하가 불퉁하게 말했다.

「데이비드 작가님 얼굴을 네가 어떻게 알고 있어?」

「요즘 핫한 포토그래퍼잖아. 인물 사진을 안 찍어서 너무 아쉬울 정도라니까. 작가님, 인물 사진은 왜 안 찍으시는 거예요? 우리 소속사에서 프로필 사진 여러 번 요청했는데, 계속 거절하셨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잘생겼다. 배우를 하시지.」

「니키타, 그만.」

니키타의 관심에 재하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니키타가 어떤 사람인지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이었다. 다비가 비록 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자신의 남자에게 관심을 과하게 주는 건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재하의 으르렁이 또 시작됐다고 생각한 다비는 얼른 니키타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전 자연물 위주로 찍어서요. 오늘 공연 잘 봤습니다. 연주할 때 정말 멋있어서 홀린 듯이 감상했어요.」

「오늘 연주 괜찮았죠? 아,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바쁜 거 아니면 자리를 옮겨서….」

재하가 재빨리 다비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불만 섞인 얼굴로 니키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나하고 선약이 있어.」

어린 남자의 명백한 경계에 니키타가 둘의 관계를 단숨에 알아차리고 묘한 미소를 지으며 피식 웃었다. 갑자기 마지막 연주곡을 바꾸자고 하더니, 그 곡의 주인공이 이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다비를 보고 나자 연습 내내 유재하가 나사 빠진 것처럼 굴었던 게 단숨에 이해가 됐다.

그런 매력적인 사진을 찍는 포토그래퍼가 외모까지 뛰어나니 그렇게 제정신이 아니었지. 어쩌다 유재하 같은 남자한테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집착을 오랜 시간 봐왔던 니키타로선 다비가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내일 무난한 공연을 위해서 니키타는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한발 물러났다.

「좋아. 그럼 나중에. 데이비드, 다음에 봐요. 재하도 내일 봐.」

니키타가 자신의 차에 올라타고 자리를 먼저 떴다. 니키타가 사라지는 걸 확인한 재하가 얼른 몸을 돌려 니키타가 붙잡았던 손을 잡아 소매로 박박 닦아내며 울먹거렸다.

“독일어는 언제 배웠어요?”

“그냥 세계를 편하게 다니면서 사진 찍으려고? 다른 나라 말들도 제법 하는 편인데….”

“대체 못 하는 게 뭐예요.”

“많아. 그런데 왜 손을 닦아대?”

“니키타 씨하고 악수했잖아요. 왜 악수해요.”

“…뭐래. 인사를 하는데 악수를 하지. 그럼 비쥬하듯이 포옹하면서 뺨이라도 비볐어야 했냐?”

“그게 아니라… 니키타 씨 취향이 형같이 잘생긴 사람이란 말이에요. 지금까지 남친이 전부 시원시원하게 잘생긴 얼굴, 모델 같은 스타일들이었는데 형은 진짜 니키타 이상형이란 말이야. 그래서 보여주기 싫었는데, 팬이라니.”

다비가 점점 아파지는 손바닥을 떼어내며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너는 내가 게이인 거 알면서도 질투를 하냐?”

“네. 전 할 거예요. 형 남자친구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러다 진짜 돌멩이도 질투하겠다?”

“하고 있어요. 이미.”

다비가 쳐다보는 모든 것에게 질투하는데, 인간을 질투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지금까지 겪어놓고도 모르는 체하는 다비가 야속해서 재하는 다비의 손을 잡아 입을 쪽쪽 맞췄다.

“형이 자꾸 잊고 있는데, 니키타 씨 말대로 인물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면 형 남자친구는 첼리스트가 아니라 범죄자가 됐을 거라는 거, 잊지 말아요.”

당당하게 질투하겠다는 재하 때문에 다비의 뺨이 화끈거렸다. 자신은 질투한다고 말하기조차 힘들었는데, 재하는 순수하게 뱉어내고 있었다.

“재하야.”

“네.”

“호텔…. 안 갈 거야?”

재하의 순수한 질투에 솔직히 좀 꼴렸다.

***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다비가 재하를 현관 벽에 세워두고 입부터 맞췄다. 얽혀오는 입맞춤에 재하가 다비를 바짝 끌어안고 키스에 응했다. 다비의 손이 재하의 앞섶에 닿자, 재하가 손을 붙잡아 막았다.

“형.”

“…왜.”

“안으로 들어가요. 오랜만인데 입구에서 급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저 샤워해야 하는데….”

“그냥 해. 내가 지금 좀 급한데. 싫어?”

재하의 집착이 좋았다.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런 순수한 질투를 겪으면 도무지 면역이 생기지 않았다. 정색하게 되면서도 가슴 어딘가에서 찡하게 반응했다. 심지어 음악으로 고백하는 낭만적인 것까지 사랑스러웠다. 재하가 너무 좋아서 빨리 사랑해주고 싶은데, 재하가 자꾸 여유를 부렸다. 하반신은 조급해서 난리인 주제에 느긋한 표정이 얄미웠다.

“뭐가 문젠데. 내가 괜찮다는데….”

“형, 불안했죠?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가?”

“네. 전 불안했어요. 형과 함께 있으면 좋다는 걸 알아버렸는데,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으니까 형 말대로 정말 분리 불안증이 왔거든요. 그렇지만 형 보니까 전부 괜찮아졌어요. 와줘서 고마워요.”

재하의 말에 다비도 인정해야 했다. 재하가 곁에 없는 시간이 정말 불안했다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것도 노력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다비는 쑥스러워하며 재하에게 말했다.

“맞아. 나도 그랬어. 네가 없으니까 불안하더라.”

“다행이다. 나만 그런 거 아니어서. 지금은 어때요? 지금도 불안해요?”

“지금은 괜찮아. 너하고 있어서.”

“정말요?”

재하가 다비를 유심히 살피며 관찰하자, 다비는 얼른 재하의 세팅된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피식 웃었다.

“정말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진짜 괜찮아졌어. 분리 불안증은 붙으면 괜찮아지는 거잖아.”

“네. 그런 의미로 우리 같이 씻을래요?”

“…꼭 같이 씻어야 해?”

“네. 저는 형하고 같이 있는 동안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거든요. 씻는 순간에도 같이 있고 싶어요. 욕실은 항상 허락해주지 않아서 조금 슬펐어요. 오늘은 허락해주면 안 돼요?”

저보다 큰 녀석이 눈썹을 툭 떨어트리고 저를 보며 허락을 구하고 있는 모습이 정말 못 견디게 귀여웠다. 재하와 리온이 왜 저렇게 눈썹을 잘 떨어트리나 했더니, 연주할 때 감정 연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으로 터득한 스킬이라는 걸 공연을 보고 깨닫게 되었다. 다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등짝 스매싱 대신 순순한 허락이 떨어지자 재하는 매우 기뻐하며 다비의 옷에 손을 댔다.

“그런데 갑자기 정장은 어디서 났어요?”

“아, 촬영지에서 곧바로 와서… 옷이 없었어. 거의 다 여름옷이고 멀쩡한 옷은 겨울옷이라서 지금 계절하고는 안 맞잖아. 그래서 급하게 여기 와서 샀지. 리온이한테 부탁해서.”

“그래서 삼촌하고 있었던 거구나. 저 무대에서 형 정장 차림 보고 솔직히 공연하기 싫었어요.”

“…그렇게 안 어울렸냐?”

“아뇨? 너무 잘 어울려서요.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질투 나서 보여주기 싫었어요. 막 입어도 멋있는데, 누굴 홀리려고 이렇게 작정하고 차려입어요. 앞으로 이렇게 입지 말아요. 입으려면 제 앞에서만….”

“미친…. 진짜. 못 당하겠네.”

다비가 제 옷을 벗기는 재하의 손을 붙잡고 눈을 맞추며 잘생기고 조금 야한 미소를 지었다.

“입은 모습은 누구나 봐. 그런데 벗기는 건 너만 할 수 있잖아.”

“그, 그렇군요. 아, 그렇구나. 그럼 자주 입어줘요. 하, 형 너무 멋있어요. 바로 넣고 싶다. 그냥 침대로 갈까요?”

“안 돼. 씻자고 한 건 너잖아.”

다비가 어림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잘라내고 욕실로 향하며 나머지 옷들을 벗어 바닥에 하나씩 던져두었다. 재하가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산새에 빙의해 옷가지를 하나씩 주워가며 다비의 뒤를 홀린 듯 따라가는 건 당연한 행동이었다.

샤워기를 틀고 씻던 다비가 제 몸을 더듬거리는 재하에게 물었다.

“너, 내 사진으로 어제 실컷 한 거 아니었어? 왜 이렇게 더듬어.”

“안 했어요.”

“뭐야. 당장 할 것처럼 달라고 하더니. 진짜 안 했어?”

“형 오는데 제가 왜 해요. 기다렸다가 형하고 해야죠. 씻었으니까 이제 빨아도 돼요?”

“나가서 하면 안 돼?”

“지금 하고 싶어요.”

말을 끝낸 재하는 다비의 앞에 무릎부터 꿇고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말랑했던 다비의 성기가 입 안에서 빠르게 부피를 키워나갔다. 머리 위에서 다비의 나른한 한숨 소리가 들려오자, 재하가 볼이 움푹 팰 만큼 다비의 성기를 빨아들였다.

“하, 그렇게 먹고 싶어서 한 달 동안 어떻게 참았냐.”

재하는 대답 대신 더 깊숙이 성기를 물었다. 더 맛있게 먹으려고 노력하는 듯 정성스럽게 빨아댔다. 젖은 소리에 다비가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차가운 욕실 벽에 등을 기댔다.

재하가 다비의 다리를 벌리며 음낭까지 정성스럽게 빨고 핥다가 입에 담았다.

“흐, 씹…. 하으.”

정성스러운 자극에 다비의 입에서 나른한 음성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너무 좋아서 터지는 감탄사라는 걸 알고 있는 재하는 다비의 반응에 행복했다. 다비의 것을 입에 계속 물고 있어서 타액이 저절로 입 밖으로 흘러내렸다. 다비와 눈을 맞춘 채, 계속 빨아대자 다비가 참지 못하고 재하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 그만… 빼. 쌀 것, 같아.”

재하는 도리질하며 더 깊숙이 성기를 담았다. 입천장을 긁으며 목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촉에 다비가 진저리를 치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나른한 신음과 함께 다비가 재하의 입에 사정했다.

진하게 느껴지는 다비의 맛에 재하가 만족하는 미소를 보였다. 최근에 한 적 없다는 사실이 기뻐서 다비를 보며 예쁘게 웃었다. 재하가 고개를 뒤로 물리고 기둥을 혀로 핥으며 마지막 마무리까지 끝마쳤다. 제 것을 보물처럼 다루는 재하의 모습에 다비는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예뻐해 주었다.

다비가 마주 앉아 재하의 성기를 눈으로 확인했다. 배까지 바짝 붙어 있는 걸 보고 손을 뻗어 성기를 감싸 쥐었다. 기둥을 천천히 훑는 손길에 재하가 목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다비에게 기대 숨을 헐떡였다.

“형, 전 괜찮… 흐으. 괜찮아요.”

“좆이 터지기 직전인데 뭔 소리야.”

“형 안에서 사정하고 싶어요. 안 돼요?”

“진짜, 미치겠네.”

솔직한 말에 다비가 얼굴을 붉히며 재하의 입을 집어삼켰다. 키스하며 다비는 스스로 제 뒤를 넓혔다. 입으로 느껴지는 자극에 뒤를 넓히는 자극까지 느껴져 오싹거렸다. 재하는 다비의 입 안을 훑어대며 손을 아래로 내려, 다비를 도와주었다.

“이제 넣어도 될 것 같아.”

다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뒤돌아선 상태로 제 엉덩이를 직접 잡아 벌리자 재하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형, 잠깐만요. 콘돔, 옷 주머니에….”

“그냥 해.”

“네? 아뇨. 손만 뻗으면 되니까… 읏. 형?”

다비가 재하의 성기를 붙잡아 제 안으로 넣으려고 시도했다. 콘돔 없이 섹스하면 안 된다고 배운 재하는 적극적인 다비가 너무 좋았지만,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 했다.

“형…. 자, 잠깐….”

“하, 들어… 흣, 좋아.”

“형, 정말….”

다비가 귀두를 반쯤 집어삼키자, 재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다비의 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거의 한 달 만에 하는 거라 풀어줄 만큼 풀어줬는데도 쉽게 들어가지 않았다.

“큿… 좁아.”

“난… 읏. 좋아.”

다비는 타일 벽에 기대 몸을 떨며 안을 벌리고 꽉 채우는 감각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조금 전에 사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성기가 다시 힘을 받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재하의 거친 호흡이 살갗에 닿자 기분 좋은 소름이 퍼졌다. 이젠 뒤로 하는 자세가 조금도 싫지 않았다.

재하가 깨물어댔던 몸은 그사이에 흉 하나 없이 깨끗해져 있었다. 어쩐지 아쉬워서 재하는 다비의 깨끗해진 몸에 이를 박아 넣었다. 다비의 신음과 함께 안이 바짝 조여왔다. 재하는 잘근거리며 웅얼거렸다.

“형, 진짜 좋아해요.”

“알아.”

“보고 싶었어요.”

“으응. 아… 알았, 흣.”

응석 부리는 말투와 달리 재하는 하반신을 급하게 움직여대고 있었다. 안을 들쑤시는 감각이 익숙하면서도 그리웠다. 재하와 다시 섹스하고 있단 사실이 매우 기뻤다.

벽에 바짝 달라붙어 있던 다비의 얼굴 사이로 재하의 팔이 들어왔다. 재하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벽에 스쳤던 이마가 이제는 재하의 팔에 부딪혔다. 급한 와중에도 다정한 녀석이라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다.

“키스… 키스해줘.”

재하가 곧장 다비의 등에 상체를 붙이고 다비에게 입을 맞추었다. 상체가 맞붙으며 성기가 더 깊숙이 들어왔다. 기분 좋게 오싹거려 다비가 신음을 터트렸다. 다비를 물어뜯으며 허리를 움직이던 재하가 급하게 허리를 뒤로 물렀다.

“형, 저 사정….”

“그냥 싸.”

“안 돼요. 그건 진짜… 아, 읏. 형….”

다비는 제 안에서 빠져나가려는 재하의 성기를 꽉 조이며 붙잡았다. 그 바람에 재하는 다비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울먹이는 신음을 토하며 다비의 안에 사정하고 말았다. 사정하며 쏟아내는 숨소리에 다비도 벽에 울컥 정액을 쏟아냈다.

둘은 서로 꽉 붙어 있는 채로 한참을 숨을 골랐다. 재하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다비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형, 죄송해요. 오랜만인데…. 안에… 어떡하지?”

“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도… 콘돔… 바로 옆에 있었….”

섹스할 때는 아주 신이 나서 물어뜯어 놓더니, 이제 와서 울상인 녀석이 조금 귀여워서 다비는 축 처진 입꼬리에 쪽쪽 입을 맞춰주고 뺨도 토닥토닥해주었다.

“너 교육 잘 받은 거 칭찬하는데, 한 번 했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니까 지금은 남자친구한테 뽀뽀해주면서 후희를 즐기는 게 어때?”

“침대에선 제대로 해요. 알았죠?”

“안 할 생각은 없고?”

“할 건데요? 우리가 얼마 만에 만났는데요.”

재하는 다비에게 입 맞춰주며 절대 다비를 재우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다비는 재하의 의지를 칭찬하며 후희를 즐겼다. 다비의 어깨에 다시 새겨진 잇자국에 흥분한 재하가 또 달려들어서 후희가 전희가 되었고, 다비의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정액에 또다시 흥분한 재하가 달라붙어서 욕실에서만 세 번을 더 하게 됐다.

씻고 나온 둘은 침대에서 새벽까지 떨어져 있던 아쉬움을 잔뜩 달랬다.

재하가 다비의 몸에 남은 잇자국을 뿌듯한 눈으로 보면서 손으로 하나씩 건드렸다. 다비는 움직일 힘도 없어서 재하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어째 떨어지고 다시 만날 때마다 입질이 심해지냐. 그놈의 이갈이는 언제 끝나는 건데?”

“평생. 형 몸에 제 흔적이 없으니까 이상해서 그래요. 내 사랑이 깨끗하게 지워진 거 같아서….”

“미친, 물어뜯는 이유까지 귀엽고 난리…. 그래. 피만 안 보면 됐지. 이리 와.”

다비가 제 어깨 쪽으로 눈짓하자, 재하가 얼른 다비의 어깨에 머리를 누이며 바짝 안겼다. 다비는 재하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재하의 머리를 꼭 안아주었다. 얼굴을 마주 보고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했던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나 솔직히 니키타 씨 질투했어.”

“…형이요? 기사 때문에요? 그거 신경….”

“아니. 기사 말고. 나는 클래식 같은 거 모르잖아. 사실 관심도 그리 많지 않고…. 그런데 네 주변에는 네 음악 세계를 이해해줄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알고 나니까…. 내가 좀 부족하고 너한테 정성이 없었단 생각이 들더라고. 그렇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그 사람들처럼 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네 세계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질투 났다고 해야 하나.”

재하가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더니, 다비가 끌어안은 팔에 바짝 힘을 주었다.

“나 무식하다고 이야기하는 거라 지금 쪽팔리니까 그대로 들어.”

“형,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저는 제 음악 세계를 이해해달라고 형을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하고 싶어서 형을 꼬신 거예요. 형이 내 세계에 관심 두는 건 좋지만, 싫다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돼요. 형이 관심 둬야 할 건 첼리스트 유재하가 아니라, 형 남자친구 유재하거든요. 내가 형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형의 관심을 받으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이런 걸 형이 더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건 내가 좀 아는데. 그걸로 괜찮겠어?”

재하가 다비에게 폭 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그거면 돼요. 그리고 형이 제 연주를 듣고 꼴리면 그걸로 충분해요. 제가 너무 멋있어서 그러는 거잖아요. 그것만큼 제대로 감상해주는 게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해요.”

“…네가 말하면 개소리도 참인 거 같아. 뭐 그럼 무리해서 공부할 생각은 안 할게.”

“네. 그래도 질투해준 건 너무 좋아요. 형 불안해하는 것도 좋아요. 의심하는 것도 좋고, 저 못 믿어도 좋아요. 관심만 끊지 말아요. 그러면 전부 해명하고 증명하고 보여줄게요. 형이 이해할 때까지 몇 번이고 계속이요. 그러니까 형의 생각과 관심이 저한테만 향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저밖에 모르는 녀석에게 참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해졌다. 앞으로는 불안해하지 않고 그럴 시간에 재하를 조금 더 생각하기로 다짐했다. 재하가 다비에게 안겨 있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형, 형이 불안하고, 질투 날 것 같으면 제가 주위 사람들한테 형이 내 연인이라고 말해둘까요? 아니다. 이번 공연에 그냥 저하고 같이 독일 여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문낼까요? 어디까지나 형이 괜찮다면요.”

다비는 대답 대신 재하를 보며 하찮다는 듯 피식 웃었다. 동성끼리 사귄다고 사람들에게 말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재하라도 그런 말을 정말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리온과 훈은 가족들에게 허락을 받고 부부처럼 살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친구 관계였다. 주위에서 전부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둘이 연인이라고 직접 밝힌 적이 없단 소리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정상이고 당연한 거였다. 모든 사람이 동성을 사랑한다는 것을 이해해주지 않으니까, 그걸 알고 있는 둘은 조용하게 연애했다.

재하 역시 리온과 마찬가지로 같은 성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게 되면 잃을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냥 듣기 좋은 허세라고 생각한 다비는 재하의 머리를 쓸어주며 졸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괜찮은데…. 너는 안 되잖아.”

“제가 왜 안 돼요? 전 당장에라도 형하고 사귄다고 알리고 싶은데요.”

“그러지 마.”

“형은 싫은 거예요? 저하고 사귀는 거 알려지는 게?”

“난 상관없는데, 네 생각 해서 안 된다고 하는 거야.”

“그럼 형은 괜찮다는 거죠?”

“그런가? 재하야, 내일 이야기하자. 비행시간도 길었고, 오자마자 섹스했더니 머리가 안 돌아가. 일단 자고 이야기해.”

잠결에라도 여지 같은 걸 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유재하가 또라이라는 걸 잠깐 잊고 있었다.

***

점심쯤 돼서야 다비가 눈을 떴다. 재하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비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형, 잘 잤어요? 일단 형한테 변호사 붙여놓을게요.”

“…어? 무슨 소리야?”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무슨 이야길 했는데 변호사가 나와?”

재하가 정말 잊어버린 거냐는 얼굴로 울상을 짓다가, 다시 예쁘게 웃으며 다비의 기억을 되살렸다.

“우리 연인 사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요. 형이 괜찮다면 전 말할 준비가 돼 있거든요. 그렇지만 우리가 연애한다는 거 알려지면 좋은 소리만 나올 리는 없으니까, 일단 그런 사람들 상대하려면 형한테도 전담 변호사가 붙어 있는 게 여러모로….”

“자, 잠깐만…. 뭐?”

유재하가 또라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지하게 의욕을 보이는 재하의 모습에 당황했다. 다비는 멍한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일단 재하의 말을 거절했다.

“…진짜 할 생각이야? 내 의견 때문이라면 하지 마. 안 해도 돼.”

“제가 불안해서 그래요. 난 형이 내 연인이라고 세상에 밝히고 어디서든 끌어안고 뽀뽀도 하고 싶거든요. 우리 집안 사람들처럼 애매하게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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