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도.
‘형, 왜 내 연락 안 받아요? 육지에서 계속 연락한다고 했잖아요.’
‘바빠서 그랬어. 육지에서 적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네. 학교생활도 바빠. 전화 받기 힘들어서 그래. 앞으로는 문자로 연락해.’
[형, 잘 지내고 있어요? 학교는 아직도 적응하기 힘들어요? 저번에 섬에 왔다고 들었는데, 왜 그냥 갔어요?]
[형, 어디 아픈 곳 없죠? 아줌마하고 아저씨가 형 소식 들려주셨어요. 전화도 매일 한다던데…. 저 시험이라서 연락 없는 거죠? 시험 끝나면 연락해줄 거예요?]
[형,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는데…. 너무 잠깐 보고 가서 기분이 이상했어요. 형이 피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다른 형들하고 같이 있어서 그랬다는 거 아는데 그냥 내가 그런 기분이었다는 거예요. 여기가 눈치 보이면, 다음에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 조금 있으면 방학인데 형 자취방에 놀러 가야겠다. 주말에 형 쉴 때 가도 돼요?]
[형, 많이 바빠요? 대학생들은 방학 빨리 하는 거 아니었나.]
[다비야. 우리 그만 만나자. 솔직히 이번에 너 변한 거 보고 마음이 심란해. 진짜 남자다워져서… 너는 성장기가 와도 계속 예쁠 줄 알았는데. 진짜 남자랑 사귈 생각은 아니었거든. 너도 그렇잖아. 그냥 호기심 같은 거.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전화 받아요. 나하고 이야기 좀 해요. 난 형이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 난 원래 남자였어요. 형도 알고 사귄 거잖아요. 전화로 이야기해요. 나는 형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고.]
[우리 좋게 헤어지자. 앞으로도 계속 볼 사이잖아. 네가 이러면 내가 이장님한테 연락하는 수밖에 없어. 내가 이러는 건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잖아.]
[말이 안 맞잖아. 내가 이제 남자 같아져서 싫어졌다면서, 어디가 날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건데. 형, 전화 받으라니까요. 제발….]
‘다비야. 문자로 내가 말이 좀 심했지? 미안해. 문자로 통보하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이렇게 전화로 다시 이야기할게. 음. 우리 좋게 예쁜 추억 안고 헤어지자. 형이 이렇게 부탁한다. 네가 날 정말 좋아한다면 들어줄 수 있잖아.’
‘형. 나는 형이 왜 이러는지 아직도 정말 모르겠고….’
‘지금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나중에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네가 힘든 만큼 나도 마음이 많이 아파. 그래도 우린 여기까지인 것 같아. 이미 내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아서 그래. 넌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내가 너 행복하라고 기도할게. 그러니까 너도 내 행복 좀 빌어줘. 우리 다비 착하잖아. 응?’
‘어떻게 형이… 아니에요. 알았어요. 행복하게 잘 지내요.’
그래서 헤어졌다. 아름답게 행복을 빌어주면서. 남자다워져서 싫다는 게 이유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를 알고 나자 핑계 댔던 이유가 차라리 나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100장도 넘는 그의 사진이 전부 가식적인 웃음이었다는 걸 알았다. 모아와 함께 있는 그의 미소가 진짜라는 걸 알고서야 헤어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딱 부러지고 야무진 김모아보다 물러터지고 정에 약한 김다비가 가지고 놀기 더 쉬웠고, 김모아와 닮지 않은 김다비는 그 남자에게 더는 필요가 없다는 걸.
바보 같은 김다비는 그 순간에도 멍청했다. 이런 일을, 이런 아픔을 겪지 않은 게 모아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가슴에 묻기로 했다.
바보같이. 그게 평생 가는 상처가 될 줄도 모르고….
그런 쓰레기를 첫사랑이랍시고 매달렸던 자신이 병신이었다.
이제는 연애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갈구하며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사랑받고 싶었지만,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재하도 놓아줘야 했다. 그게 맞는 거였다.
‘형, 나는 포기하지 않아요. 변하지도 않을 거고요. 형은 날 좋아해요.’
나는 자신 없어, 재하야. 영원한 사랑을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
‘형의 마음은 아직도 사막인가요?’
사막이냐고?
다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많은 꽃이 피어 있는데, 하늘에선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그칠 생각이 없었고, 사막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씨앗이 버티고 있었는지, 계속 꽃이 피어서 이제는 사막이라고 부를 수도 없게 되었다.
정말, 이 비가 그치지 않는 건가. 그렇다면 정말로 좋겠는데….
***
다비는 꽃이 가득한 들판에 서서 끝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는 꿈을 꿨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맞고 있는 게 제법 괜찮은 기분이었지만, 어쩐지 깨고 나니까 심장이 지끈거릴 정도로 아프기 시작했다. 분명 아주 개 같은 꿈을 꾼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에 꾼 행복한 꿈이 너무 기분 좋으면서도 너무 아팠다.
“집에 괜히 왔어. 마음만 심란해지고… 하필 조금 있으면 또 설이야. 그냥 미국에 있을걸.”
다비는 지금 고향인 오지도에 와 있었다. 미국에서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재하가 떠나는 걸 확인한 후 곧장 한국으로 왔다.
“이대로 끝인 건가.”
솔직히 며칠만 지나면 재하 쪽에서 먼저 연락할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한다고 말하며 끊임없이 자신에게 애정을 갈구했던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말은 진심인 듯, 벌써 한 달째 재하는 공항에서 인사를 나눈 이후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끊기지 않았던 문자가 뚝 끊기니까 정말로 무서웠다. 자신이 먼저 연락해도 되는데, 재하가 받지 않을까 봐 연락하는 걸 망설이다 보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아, 몰라. 집에만 있으니까 계속 걔 생각만 나고…. 오늘은 좀 나가야지. 훈이도 좀 만나고.”
오지도에 와서 첫날만 마을을 돌아다녔고, 그 후로 쭉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훈에게 몇 번 전화가 왔지만, 귀찮아서 미뤘더니 녀석도 먼저 연락하는 일이 없었다. 어차피 마을에서 또래라고는 훈이 놈밖에 없으니 여기서 나가면 만날 사람도 그놈 하나였다.
다비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잘생긴 김다비는 한 달간 폐인처럼 살았음에도 결점 하나 없이 잘생긴 얼굴이었다.
“살이 좀 빠졌나. 턱선 살아난 거 봐라. 더 잘생겨졌네.”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거울로 확인하고, 다비는 몸을 씻었다. 씻고 난 후, 1층으로 내려오며 큰 소리로 인기척을 냈다.
“아빠!”
아빠를 찾았지만, 집엔 아무도 없었다. 막냇동생 율리도 없어서 넓은 집이 적막했다.
“…밥 먹으라고 깨우지도 않고. 우리 율리는 어디 간 거야. 다들 너무하네, 진짜.”
그나마 식탁에 차려놓은 밥상에 서운함이 풀렸다. 망으로 된 밥상 덮개를 들추자, 어촌 계장님 배를 타고 다른 섬에 갔다 온다는 메모와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입맛은 없었지만, 여전히 시골 마을의 이장으로 새벽부터 바쁠 텐데도 아들내미 밥상은 잊지 않고 챙겨준 것이 고마워 끝까지 전부 먹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다비는 곧장 외출 준비를 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응, 다비야.
“고 사장, 어디야?”
-…고 사장이라고 부르지 좀 말지?
“어디냐고.”
-나 양식장. 왜? 여기로 오게?
“어. 오늘 땡땡이치고 나하고 놀아주라.”
다비는 건들거리며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 앞이 바다와 가까워서, 언제든 바다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좋았다. 고 사장이라고 놀리지 말라던 훈이 놈은 또 대답 없이 음, 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배 끌고 가서 너 태우고 오면 되잖아. 하여간 답답해.”
-아, 그러면 되겠구나. 내가 배 끌고 가면, 진이 형은 여기서 어떻게 집에 오나 고민 중이었는데. 역시 척하면 척이네, 김다비.
“금방 간다. 준비하고 있어.”
-그래.
명절이 코앞이라 바쁠 텐데도 훈은 별다른 말 없이 놀아주겠다고 했다. 다비는 배 키를 챙겨 이장의 배를 타고 양식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모는 배인데도 어렸을 때부터 몰았던 거라 그런지 어제 탔던 것처럼 익숙했다.
다비의 고향인 오지도는 전복과 새우, 미역과 다시마를 양식하는 어촌이었다. 최근에는 건전복 사업이 잘되면서 조용한 어촌 마을이 매일 바쁘다고 들었다. 건전복 사업을 운영하는 것은 자신의 친구 고훈이었고, 훈은 다비와 이제 17년 불알친구였다.
“이것도 전부 Y·F그룹이랑 연관이 되어 있네.”
훈과 리온이 사귀면서, 오지도는 Y·F그룹과 인연이 맺어졌다. Y·F그룹에서 지역 특산품화 사업을 제안했고, 훈이 받아들이며 건전복을 특산품으로 만들었다. 그 제안을 한 게 지금 Y·F그룹의 총수인 유지온 회장이었다.
리온의 첫째 형이자, 재하의 아버지인 그는 오지도에서는 섬을 부흥시킨 영웅과도 같았다. 전부 훈이 리온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어 생긴 일이었지만, 둘의 관계를 모르는 척해주는 마을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서 복을 받은 거라고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말해주었다.
단순히 사랑의 힘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훈은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일했고, 그 와중에 독일을 오가며 리온을 보살폈다. 한결같은 마음과 무한한 사랑이 이뤄낸 일이었다. 다비는 그래서 훈과 리온이 연애하는 걸 항상 부러워했었다.
다비가 모는 배는 훈의 전복 양식장에 가까워졌다. 어마어마해진 양식장의 규모에 저도 모르게 질겁하게 됐다. 훈은 중3 때 양식장 한 칸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양식장 천 칸을 운영하는 양식업자였다. 거기에 사업과 원거리 연애까지. 자신도 꽤 부지런하다고 생각하지만, 고훈에 비하면 한량이었다.
양식장 위에서 덩치 큰 곰 같은 녀석이 손을 흔들었다. 다비는 귀찮아서 대충 손을 저으며 가두리 가까이에 배를 댔다. 훈과 훈의 둘째 형인 진이 다비를 맞이했다. 다비는 몸을 숙여 진에게 먼저 인사했다.
“진이 형, 오랜만이에요.”
“어, 그래. 다비는 어째 외국물 먹더니 점점 잘생겨지네. 사진작가라더니, 모델 해도 되겠는데?”
“그렇죠? 저도 어디까지 잘생겨질지 궁금하다니까요. 이러다 조만간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거 아닌지 몰라요.”
“넉살도 여전하고.”
“그렇죠, 뭐. 아무튼, 오늘 훈이 좀 빌려 갑니다. 바쁘신데 죄송해요.”
“아니야. 나 혼자도 충분해. 훈이 녀석 좀 데리고 놀아줘. 저 녀석은 놀아도 돼.”
훈은 다비의 배에 올라타면서도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진을 보며 말했다.
“형,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연락 안 해. 다비하고 좀 놀아라.”
“…어. 알았어. 먼저 갈게.”
훈이 다비에게 가자고 말하자, 다비는 곧장 배를 몰아 마을로 향했다.
해를 넘어 이제 막 27살이 된 고훈은 여전히 어마어마한 몸과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몸이 좋다고 생각했던 재하도 훈에 비하면 아주 날씬해 보일 정도였다.
“너는 스물여섯… 아니. 스물일곱이나 됐는데 아직도 성장기냐? 어째 볼 때마다 몸이 점점 울퉁불퉁해지냐.”
“우리 리온이가 좋아해서. 아무리 바빠도 운동은 계속해.”
“…씨발. 그래. 예쁜 사랑하세요.”
“응. 고맙다.”
훈은 다비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부담스럽게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승전리온으로 끝나는 저건 죽었다 깨어나도 못 고칠 것만 같았다.
선착장에 도착해 배를 세우고 뭍으로 나오자, 훈이 다비에게 말했다.
“우리 집으로 갈까? 밥은 먹었어?”
“어. 아빠가 밥 차려주고 계장님하고 대도 가셨더라. 방금 먹었어. 커피 타줘.”
“그래. 집에 가자.”
훈은 다비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소박한 오지도와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이 집도 리온의 부모님이 선물로 지어주신 집이었다. 그런 재벌 집에서 편견 없이 둘을 인정해줬다는 건,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도 여전히 다비에겐 믿기지 않고 신기하기만 했다.
집으로 들어오자, 훈은 곧장 주방으로 가서 다비가 마실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다비가 식탁에 앉아 커피 내리는 모습을 구경하자, 훈이 다비를 살피다 넌지시 물었다.
“커피가 아니라 술이 필요한 거 아니야?”
“뭐래. 대낮에 뭔 술…. 그리고 나 요즘 금주 중이야.”
“금주? 차라리 네가 김다비가 아니라 김모아라고 말해라. 그럼 내가 믿어줄게. 김다비가 금주?”
“아, 진짜라고. 그럴 만한 일이 있어. 그러니까 네가 내 앞에서 술을 흔들어도 안 마신다.”
다비의 금주 선언에 훈은 커피를 내어주며 심각한 얼굴로 다비를 걱정했다.
“다비야. 그럼 그냥 말해. 그러려고 온 거잖아.”
“뭐래. 나 지금 너 보고 싶어서 온 건데?”
“많이 힘든가 보네. 네가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걸 보면.”
다비는 입을 다물었다. 역시 불알친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척 하면 척이라고 훈이 놈은 자신이 왜 오지도에 왔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래도 삐딱한 김다비는 곱게 말하기 싫었다.
애초에 100일 여행도 다 저 훈이 놈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재하를 만나기 전에 훈이 놈이 재하랑 잘해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제 속을 뒤집어 놓지만 않았어도 섹스 파트너라는 말로 재하를 자극하지 않았을 거였다. 그랬다면 100일 연애 같은 것도 안 했을 테고, 여전히 형, 동생으로 지냈을 터였다. 지금쯤 하루에 몇백 통씩 쌓여가는 문자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읽으면서 낄낄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건 전부 고훈 때문이었다.
다비는 술 마시듯 얼음이 잔뜩 들어간 커피를 벌컥 마셨다.
“야, 내 얼굴 반질반질한 거 안 보이냐? 나 요즘 겁나 행복해서 돌아가실 것 같거든?”
“너 재하하고 무슨 일 있어?”
재하의 ‘재’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콕 집어 말하는 훈 때문에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 다비는 뜨끔한 마음에 훈에게 짜증 냈다.
“네가 자꾸 그딴 식으로 재하랑 날 엮으니까 내가….”
“다비야, 여기 우리 둘밖에 없어. 그러니까 편하게 말해도 괜찮아.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길래 네 얼굴이 그렇게 힘들어 보이는 건데.”
“…….”
좋은 친구가 곁에 있다는 건 정말로 축복받은 일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그런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성공한 삶이라던데, 자상하고 든든한 벗이 제 곁에는 네 명이나 있었다. 그중에서도 고훈은 인생을 갈아서라도 곁에 두고 싶은 녀석이었다.
다비는 결국 훈에게 힘든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열다섯 살에 게이라는 걸 알았을 때, 솔직히 섬에 소문나는 게 무서웠어. 이장 아들이 게이라는 거 알면, 사람들이 수군거릴까 봐. 우리 마을이 다 좋은데, 소문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잖냐. 어른들이 그럴 분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다른 문제니까. 부모님이 자식 교육 잘못시켜서 내가 게이가 된 거라고 욕할 것 같아서 악착같이 숨겼거든. 뭐, 열여덟 살 때 너한테 털어놓은 건, 너는 입이 무거우니까.”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청소년기에 성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춘기 소년에게 두려운 일이었다. 인구도 적은 곳에서 같은 성 소수자를 만날 수도 없으니 고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도 어려웠고, 인터넷에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것도 누군가 알아낼까 봐 두려웠었다.
그랬던 자신이 훈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알린 것은 충동적이었다. 정말 그때는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훈은 전혀 놀라워하지도 않았고, 평소처럼 자신을 대해주었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너희들 사귀는 게 그렇게 예쁘더라. 열아홉 살에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게이라는 거 우리 가족들이 알아도 별문제 없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 정말 말할 생각은 없지만.”
“그랬었구나.”
“난 너희가 부러웠고, 지금도 부러워. 같은 성별이고 이렇게 좁아터진 시골에서 둘이 당당하게 사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서로 믿고 이렇게 지내는 거.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야. 정작 게이인 나는 전부 실패만 했는데.”
훈은 고개를 저으며 다비의 말을 부정했다.
“무슨 소리야. 네가 뭘 실패해.”
“…재하가 사귀자고 했어.”
“아, 그랬군. 넌 또 속 꼬여서 거절했고?”
“거절은 아닌데… 거절한 거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
“거절이면 거절이지, 마찬가지는 무슨 소리야.”
“재하가 나보고 연애하고 싶어지면 연락하래.”
재하의 마음을 예전부터 알고 있던 훈은 뭔가 변한 듯한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다비를 마지막으로 본 게 지난 추석이었다. 그때 훈은 재하와 사귀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지만, 속이 꼬인 다비는 오히려 재하와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말하고 섬을 떠났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뒷이야기가 생겼다. 갑자기 섬으로 돌아와 한 달이나 잠수했던 자신의 친구는 재하가 사귀자는 말에 거절 비슷한 것을 했는데, 재하가 갑자기 연애하고 싶어지면 연락하라고 했고, 다비는 그 말에 연애할까 말까 고민하는 중…. 훈은 꼬여가는 머릿속을 털어내듯 고개를 저었다.
“중간이 너무 잘려나가서 지금 이해가 하나도 안 되는데….”
“나는 너희처럼 사랑할 자신이 없어.”
중간 이야기는 해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훈은 그냥 다비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했다. 듣다 보면 대충 상황을 알아들을 수도 있으니 집중해서 들어줄 생각이었다.
“우리가 어떤데?”
“너는 한국에 있고, 리온이는 독일에 있잖아. 한 달에 겨우 한 번 만나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고. 그런데도 싸움 한번 없이 계속 서로 믿으면서 질리지 않고 꾸준히 사랑하고 연애하잖아. 나는 그렇게 못 해.”
“그럼 네가 바라는 연애는 어떤 건데?”
“생각해본 적 없어. 바란다면 그냥 계속 함께 있는 거. 눈뜨면 옆에 있고, 같이 밥 먹고, 같이 놀고, 같이 대화하고… 뭐든지. 나한테서 멀어져서 눈에 안 보인다는 거 자체가 싫어. 난 분명 그걸 못 견딜 거야. 상대방이 사정이 있다고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고 의심만 할 거야. 결국, 상대방도 지치겠지.”
훈은 다비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다비의 고민이 뭔지는 알 것 같았다. 한때 자신이 했던 고민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장거리 커플로서 생기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고민이었다. 훈은 같은 고민을 했던 선배로서 다비에게 말해주었다.
“다비야, 지금 네가 하는 그 걱정을 재하하고 이야기해. 나한테 말했던 것처럼 재하한테 말해야 해. 해결할 방법이 없더라도 이야기를 나눠.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이런 애새끼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해. 나는 너하고 떨어져 있으면 계속 불안해할 거라고, 결국 둘 중 하나는 지쳐서 결국엔 헤어질 거다. 이딴 이야기를 걔한테 하라고?”
“해야지. 나하고 이야기해서 해결되는 거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어. 하지만 해결해줄 사람은 내가 아니고 재하잖아. 네가 재하하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네 마음을 제대로 듣지 못한 재하는 해결해주고 싶어도 기회조차 없는 거야.”
“그래도 쪽팔리잖아. 이야기해도 재하는 다 괜찮다고 할 놈이란 말이야.”
“그럼 뭐가 문제야. 내가 본 재하는 네 문제라면 누구보다 더 진지하게 고민할 애야.”
훈은 리온을 만나러 독일을 오가며, 재하를 자주 만났다. 모르는 척해주려고 해도 다비에게 향한 그 마음이 너무나 티가 나는 녀석이라 지난 시간 동안 그의 짝사랑을 응원해주었다. 재하라면 오랜 친구의 아픔과 상처, 흉까지 전부 지워줄 거라 믿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변함없이 두드리더니, 열리지 않았던 마음을 드디어 연 모양이었다. 다비가 이런 고민을 할 정도로 재하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훈은 다비의 변화를 환영했다.
“나도 리온이한테 말하지 않고 나 혼자 고민하고 결론 지으려고 한 적이 있었어. 그게 옳은 거라고 착각해서 리온이하고 이별을 준비했었고. 그런데 리온이가 알아차리고 내가 고민하지 않게 단단히 붙잡아주더라. 당장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해졌었어. 그 후로 가능한 숨기지 않고 대화하려고 해. 소중한 걸 잃는 거보다 잠깐의 쪽팔림이 낫잖아.”
“쪽팔린 거만 문제면 내가 이러겠냐.”
“왜. 또 뭐가 있는 거야?”
말해보라는 듯 다독이는 다정한 목소리 때문인지, 커피에 술을 탄 것도 아닌데 다비는 터진 마음을 훈에게 털어놓았다. 마치 오래전 그날, 비밀을 알았던 그날처럼…. 엉엉 울면서 훈에게 제 정체성을 고백하고 너는 연애하지 말라며 각서를 받았던 그 여름밤처럼.
“재하하고 섹스 못 해. 섹스도 못 하는데 영원한 사랑을 어떻게 해.”
“…사귀지도 않는데 섹…. 그거… 부터 했다고?”
“못 했다니까.”
그래도 시도는 한 거 아니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훈이 그런 걸 물어볼 만큼 대담한 성격은 아니었다. 놀란 가슴을 일단 진정하고 훈은 다비에게 물었다.
“어, 어쩌다가 못 하게 된 건데?”
“나도 몰랐어. 내가 그렇게까지 지난 일에 사로잡혀 있을 줄은…. 해보려고 노력했는데 마음처럼 안 되더라고. 사귀고 나서도 계속 그러면 서로 괴롭잖아.”
“지난 일이라니…. 설마 그 사람 때문에 그래? 아직도?”
훈은 다비의 흑역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비가 전부 이야기해주진 않았지만, 그로 인해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여전히 아픔 속에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다비야. 그냥 누군지 나한테 말해주면 안 될까? 네가 왜 그렇게 상처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그런다면 보통 일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 누군지만 알려줘.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응? 그리고 너는 그냥 재하하고 잘 지내봐. 잊고 살 수 없다면, 재하하고 같이 지워가. 너는 그냥 행복해져도 되는 녀석이라고.”
“내가 병신 같아서 생긴 일인데, 왜 남이 해결을 해줘. 나만 참고 살면 조용해질 문제를 이제 와 꺼내서 해결하라고? 재하 만나기 전까지는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이대로 연락 안 하고 지내면 다시 예전처럼 나도 괜찮아지겠지.”
“그럼 너는. 네 행복은? 정말 네가 원하는 게 그거야?”
“…….”
다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훈에게 하고 싶은 일 잘하고 열심히 잘 사는데, 네가 왜 멋대로 내 행복을 재단하느냐고 툭 쏘아붙여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거?
인생을 살면서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삶이 아니냐고 말할 정도로 순탄한 삶이었다.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고, 잘하는 일로 먹고살고 있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착한 사람들이라 이렇게 자기 일이 아닌데도 내 일처럼 여겨주고 진심으로 걱정해주니, 나름대로 행복하다고 여겼다. 여기서 더 욕심내면 벌 받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욕심이 났다. 정말 원하는 것을 욕심내도 괜찮을까.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좋아하는 사람한테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고, 계속 듣고 싶어. 그런데 재하가 힘들어질 거야. 나같이 꼬인 놈 만나면 고통이라고.”
“그건 같이 해결해야지. 왜 너 혼자 재하가 어떨지 짐작하고 그래. 사랑은 혼자 하는 거 아니야. 네가 지금 행복해지고 싶다면 어서 연락해.”
“내가 정말 그래도 돼? 넌 지난 시간 계속 나 봤잖아. 나도 너희들처럼 그런 사랑 욕심내도 돼?”
훈은 다정한 눈으로 손을 들어 다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너흰 너희들만의 사랑을 해야지. 우리하고는 또 다른 예쁜 사랑. 다른 커플하고 비교하지 말고 둘이 하나씩 만들어가는 거야.”
“리온이하고 연애하더니 너까지 낭만적으로 변했네.”
“우리 리온이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재하도 널 행복하게 해줄 거야. 다른 놈이라면 더 고민하라고 할 텐데, 재하는 내가 7년 넘게 봤잖아. 내가 너한테 아무 놈이나 만나라고 할 사람으로 보이냐?”
마을에서 가장 말 없고 무뚝뚝하지만 성실함의 대명사인 녀석이었는데 훈이 놈은 리온과 사랑하는 동안 연애 박사가 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훈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많았고 그때마다 자신이 훈을 도와줬지만, 지금은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제 일처럼 걱정해주는 훈 덕분에 다비는 마음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럼 설 끝나고 전화할래.”
“왜? 당장 하지. 마음 변하기 전에….”
“지금 전화하면 횡설수설할 거 같아서. 그리고 내일부터 연휴라 우리 집 바쁘잖아. 여유 있을 때 재하하고 제대로 차분하게 이야기하고 싶어. 그동안 계속 고민했던 일이라 며칠 만에 마음 변하진 않을 거야.”
훈은 다비가 좋은 쪽으로 결정을 내린 것 같아서 한시름 놓기로 했다.
“그래. 저녁 먹고 가라. 밥해줄게. 내일은 너도 음식 하느라 바쁘잖아.”
“어. 아무래도. 명절엔 우리 집이 미어터지니까. 그런데 이번 설에는 리온이가 이쪽으로 오는 거냐?”
“응. 이쪽으로 온다고 했어. 할머니가 리온이 보고 싶어 하셔서.”
“그렇구나. 오랜만에 우리 리온이 만나겠네.”
“너 자꾸 우리 리온이라고 할래? 우리 리온이가 왜 네 리온이야. 고구마밭 땅 안 얼었다. 너 묻기 딱 좋은 상태라는 거지.”
능글맞게 굴어대는 다비를 보자, 훈도 마음이 놓여 다비에게 장난치듯 으름장을 놓았다. 다비 역시 훈의 장난에 오랜만에 키득거리며 웃음을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 리온이었거든. 아, 리온이 뒤통수 만지고 싶다. 동그란 게 손에 착 감겨서 만질 맛 나는데. 내려오면 실컷 만져야지.”
“그런 생각 넣어둬. 웃음기 빼고 말하는 거다. 진짜 밭에 가서 삽질 좀 해줄까?”
“고구마 이야기하니까 고구마 먹고 싶다. 야식으로 고구마 구워줘.”
“그래. 더 먹고 싶은 건 없고?”
“어. 다른 건 네가 만들어주고 싶은 거로 해. 오랜만에 고훈이 해주는 밥 좀 먹어보자.”
훈이 다비의 어깨를 토닥이고, 부담스럽게 다정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다비가 질색하며 제 어깨에 올린 훈의 손을 쳐냈다.
“아, 좀 그렇게 웃지 마. 너나 재하나 하나같이 왜들 그렇게 부담스럽게 웃어. 너는 네 리온이한테 그렇게 웃으세요. 나한테 그렇게 웃지 말고.”
“너 혹시 나 좋아했냐? 우리 리온이는 이 웃음만 보면 막 흐물흐물해지는데. 너도 이런 웃음 보면 설레고 나한테 두근거려서 싫어하는 거지?”
“뭐래. 재하 때문에 질투한 건 너 아니었냐? 나 붙잡고 재하하고 무슨 사이냐고 막 그랬잖아. 너야말로 이실직고하시지?”
“…그만하자. 이건 아닌 거 같다.”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누가 내 흉내 내면서 비꼬래.”
서로에게 상처만 남은 개소리에 둘은 잠시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켰다. 속을 진정시킨 다비가 잘생긴 미소를 지으며, 훈의 팔뚝을 툭 쳐주었다.
“고맙다. 마음 다잡게 해줘서.”
“네가 우리 도와준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난 정말로 네가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이야. 도와달라고 말만 해. 언제든 내 일처럼 나설 테니까. 우리 그런 사이잖아.”
“그래.”
“내일 밤에 음식 다 하고 우리 집으로 와. 리온이가 얼마 전부터 막걸리 먹고 싶다고 해서 막걸리 담가뒀다. 내일 먹을 수 있으니까.”
“술 안 마신다니까.”
“안 마셔도 와. 어차피 리온이 뒤통수 만지고 싶다며. 10초 만지게 해줄게.”
“쪼잔한 새끼. 10초가 뭐야. 알았어. 내일 밤에 올게.”
다정하고 든든한 훈이 놈이 자신의 친구라서 고마웠다. 그리고 막걸리 이야기에 재하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안주 준비해서 술상 봐준다고 약속했던 말이 떠오르자 정말 보고 싶어졌다.
***
역시 명절은 피해서 오는 게 나았을 거라고 다비는 생각했다.
이장 아들 김다비는 설 전날부터 이장을 도와 음식 하느라 다른 여유를 부릴 새가 없었다. 설에 회관에서 어르신들께 세배드리고, 마을 사람들과 먹을 떡국을 준비해야 하는 다비는 오전에 한석봉 어머니에게 빙의해서 가래떡을 미친 듯이 썰어댔다. 점심에는 명절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빴고, 오후에는 전을 부치느라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결국, 과한 노동에 불만이 가득해진 다비는 아빠에게 투덜거렸다.
“오랜만에 아들이 왔는데 일꾼 취급 진짜…. 아니,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무슨 전을 이렇게 많이 부쳐. 이러니까 내가 전 마스터가 되는 거지.”
“우리 다비가 전을 잘 부치니까 아빠가 이렇게 너한테 시키는 거지.”
“전만 부친 거 아니잖아. 떡도 썰었잖아. 요즘은 썰어달라고 하면 굳혀서 다 썰어준다고.”
“우리 다비가 기계보다 칼질을 더 잘하니까 시키는 거지. 아빠가 요즘 율리 안아주느라 손목에 힘이 없어서 그래.”
그 말에 다비는 말문이 막혔다. 육지에 있는 해양대학교에서 해양생물과 교수로 있는 엄마는 막냇동생을 낳고 반년간 쉬다가 복직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일이라서 아빠는 엄마를 위해 막냇동생을 혼자 돌보았다. 정확히 따지자면 훈의 조카인 해원이와 같이 컸고, 마을 어르신들이 함께 키워주신 거지만 그래도 주 양육자는 아빠인 셈이었으니 이렇게 아빠가 엄살을 부리면 멀리 있어서 동생을 같이 키워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힘없으면 운동해. 훈이랑 같이. 그나저나 엄마는 내일 와?”
“응. 엄마 요새 논문 때문에 바쁘잖아.”
“교수 그만두지. 주말 부부로 살면 안 힘들어? 율리는 아빠하고만 지내는데 엄마 안 보고 싶대?”
“엄마가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 그리고 가끔 오는 너희들도 좋아하는 율리가 주말마다 보는 엄마를 싫어할 리 있겠어? 주말 되면 아빠 외롭다. 율리가 엄마 껌딱지 돼서.”
엄마와 아빠는 여전히 사랑꾼이었다. 함께 있어도,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곁에 이런 사람들 천지인데, 왜 자신만 이 모양이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지만 애써 의식하고 싶진 않았다.
“우리 율리는 모아처럼 딱 부러졌으면 좋겠어. 나처럼 해달라는 거 다 해주는데도 용돈도 한 푼 못 받는 호구 아들 되지 말고.”
“나가서 돈 버는 아들이 아빠한테 용돈이 받고 싶어?”
“어. 이렇게 노동하면 일당은 받아야겠는데요. 이장님.”
“너도 먹을 거면서 그런다.”
“안 먹어. 훈이네 가서 놀 거야. 이장 집이라고 명절마다 사람들 잔뜩 몰려오는데, 내가 먹을 게 어디 있어. 이번에도 잔뜩 올 거잖아.”
다비는 투덜거리면서도 전 부친 것들을 열 맞춰 예쁘게 채반에 담았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부친 전은 세계 최고인 것 같았다. 흐뭇한 얼굴로 자신이 부친 10여 종의 전을 보고 있는데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항상 그렇지. 이번에도 다들 올 모양이던데. 오늘 저녁에 올걸? 아, 경호하고 일수가 결혼한다던데 이야기 들었어? 너희 친했잖아.”
비뚤어진 전 대열을 맞추던 다비의 손이 크게 움찔거렸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입가를 의식해서 풀고 이장을 보며 다비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어? 경호 형이랑 일수 형이 결혼해?”
“응. 일수는 대학 때 사귀던 여자친구하고 결혼한대. 다들 첫사랑하고 결혼해서 좋겠다고 그러더라고. 경호는 속도위반이라고 얼마 전에 혼자 내려와서 이야기하고 이번엔 신부 될 사람하고 같이 내려온다더라. 다들 어린 티 폴폴 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럴 나이야.”
“뭐래. 아빠 아들도 27살인데, 다른 형들도 다 그럴 나이가 됐겠죠. 나 전 다 부쳤으니까 이제 씻고 훈이네 가도 돼? 저녁에 애들하고 술 마시기로 했는데.”
아빠는 다비가 부쳐둔 전을 식탁에 올려두고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주었다.
“정리는 아빠가 할게. 도와줘서 고맙다, 아들. 여기 일당.”
“…됐어요. 일당 받아서 뭐 해. 오지도에 가게도 없어서 쓰지도 못하는 거. 주고 싶으면 나중에 달러로 통장에 쏴주시든가. 모아 돈 잘 벌잖아. 아빠한테 용돈 자주 보낸다며.”
“잘 벌면 뭐 해. 바빠서 한국도 못 오는 딸내미 얼굴 잊어버리겠는데.”
“바쁘니까 못 오지. 다음엔 모아 끌고 같이 올게요. 난 씻으러 가. 으, 기름 냄새.”
다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항상 욕실에 들어가면 의식처럼 하는 거울 보기도 잊을 만큼 다비는 급했다. 빨리 씻고 훈이네로 도망갈 생각만 들었다.
“씨발. 진짜 미친 거지. 미친 거야. 개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욕을 내뱉을 시간도 아까웠다. 저녁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빠는 이장을 맡으면서 섬에 헌신하셨다. 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전부 살피면서 섬의 살림을 꼼꼼하게 하다 보니 그만큼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섬을 떠난 사람들도 명절에 돌아오면 꼭 아빠에게 들르곤 했다. 지난 추석에는 안 보이더니 이번 설에는 온 모양이었다. 개만도 못한 새끼. 뻔뻔하기도 하지.
빨리. 마주치기 전에 빨리.
다비는 서둘러 씻고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채 옷만 갈아입고 1층으로 뛰어 내려왔다.
“아빠. 나 훈이네 가.”
“그래. 술 적당히 마시고. 잠도 거기서 잘 거야?”
“봐서요. 이따 전화할게. 갑니다.”
“머리 말리고 가. 밖에 추워.”
“훈이네 가서 말릴게.”
다비는 신발도 대충 구겨 신고 대문을 넘었다. 대문을 넘자마자, 귓가에서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아오, 씨발. 깜짝이야.”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다비는 정말 의외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흠칫거리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예상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재하였다.
“야…. 너…. 왜?”
재하는 멋쩍어하며 웃었다.
“삼촌한테 끌려왔어요.”
멋쩍게 웃는 재하를 아주 오랜만에 본 거 같아 계속 얼굴로 시선이 향했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재하야.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일단… 훈이네로 가서 이야기하자.”
“아, 지금 못 가는데….”
“어? 왜?”
“삼촌하고 훈이 형…. 오랜만에 만나서 지금….”
재하는 차마 끝까지 말을 뱉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만 내려다보는 재하의 표정에 그 둘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니, 이것들은 진짜 왜 그러냐. 너 그래서 쫓겨난 거야?”
“쫓겨난 건 아니고… 그냥 나왔어요. 형한테 인사도 할 겸.”
“내가 언제 나올 줄 알고 여기서 서 있었어. 날도 추운데.”
“나온 지 얼마 안 됐어요. 훈이 형이 저녁에 형 올 거라고 말해줘서요. 기다리면 곧 나오겠지 했죠.”
재하는 정말 반갑다는 얼굴로 다비를 계속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개 같은 유재하의 표정에 어쩐지 얼굴에 열기가 느껴졌다. 재하가 먼저 다비의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다비는 저도 모르게 주위를 살피며 재하의 손을 붙잡았다.
“밖에서 뭐 하는 거야.”
“어. 그게 아니라 머리가 젖어 있어서 그런 건데. 그렇게 있으면 감기 걸려요.”
“지금 감기가 문제가 아니고. 아, 진짜 어떡하지.”
“제가 와서 곤란한 건가요? 그런데 저도 여기 오기 전까지 형이 여기에 있는 줄 몰랐어요. 삼촌한테 그냥 끌려온 거라서…. 훈이 형이 이야기해줘서 형이 여기 있다는 거 알았는데. 화났어요?”
“아니? 아닌데. 곤란하지도 않고, 화난 것도 아니야. 그냥 조금 놀란 거지.”
자신의 행동 때문에 재하가 오해한 것 같아서 다비는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다. 걱정하고 있는 젖은 머리는 일단 후드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해결했다.
“너는… 잘 지냈어?”
“네. 형은 살이 좀 빠졌네요. 턱선이 날렵해져서 더 잘생겨진 것 같고. 아, 오늘은 형 흔들려고 온 거 아니에요. 삼촌 손님으로 오지도에 온 거니까 참을게요. 그래도 이렇게라도 보니까 세뱃돈으로 건물 받은 기분이네요.”
“…너네는 세뱃돈으로 건물 받고 그래?”
“가끔요. 그만큼 기쁘단 이야기였어요.”
저만 보면 좋아 죽겠단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게 좋았다. 오랜만에 보는 눈빛과 표정이 반가워서 다비는 서둘러 뛰어나온 것도 잊고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도. 갑자기 보니까 반갑고 놀랍고 복잡하네.”
“형도 내가 반가워요?”
“어. 반가워. 그나저나, 우리 여기서 계속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거실에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사실 소리는 안 들렸는데, 두 시간째 2층에서 안 내려오고 있어서 나온 거예요.”
“두 시간…. 아오. 훈이, 이 짐승 새끼. 진짜 걔는 미친놈 같아.”
훈에게 시달리는 리온이 불쌍하지만, 지금은 스스로 나왔다고 해도 쫓겨난 거나 다름없는 재하가 가장 불쌍했다. 다비는 안쓰러운 마음에 재하의 팔을 톡톡 치며 훈의 집 방향으로 턱짓했다.
“여긴 바닷바람 불어서 추워. 일단 1층이든 어디든 따뜻한 곳으로 가자.”
“네.”
둘이 훈과 리온의 집으로 몸을 트는데,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저거 다비 아니야?”
“어? 맞네? 다비네.”
“다비야!”
“김다비!”
“다비야.”
재하는 다비의 몸이 살짝 굳어지는 걸 확인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재하의 눈에는 보였다. 다비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얼른 몸을 돌렸다. 다비 쪽으로 7명의 남녀가 오고 있었다. 다비는 무리를 향해 꾸벅 인사하고 입가에 미소를 띠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억지로 지어졌다는 걸, 재하는 알아차렸다. 그것만 보고도 다비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재하는 빠르게 일행을 살폈다.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해두었던 얼굴들이었다.
저 중에, 그 남자가 있었다.
남자를 찾기 위해 이곳에 온 건 맞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재하는 다비의 반응에 곧장 주먹을 꽉 쥐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저 중에 누구인지 찾는 게 우선이라 모든 신경을 다비에게 곤두세웠다.
같은 또래로 보이는 일행들이 다비에게 다가와 알은체했다.
“다비, 오랜만이네. 미국에 있다더니 명절이라고 한국 들어온 거야?”
“아, 네. 형도 오랜만이네요. 애들은 잘 크고 있죠? SNS에서 봤는데 형수님 닮아서 다행이더라고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 남자는 아니었다. 조금 긴장했지만, 다비는 남자와 악수할 때 자연스러웠다. 재하는 머릿속에 저장한 남자의 정보를 삭제했다. 남자와 가벼운 안부를 주고받은 후, 다른 사람이 다비에게 말을 걸었다. 여자였기 때문에 재하는 경계하지 않았다. 또 다른 남자가 다비에게 말을 걸었다.
“훈이네 가는 거야?”
“네. 저희 항상 명절엔 거기서 모이잖아요.”
“훈이가 진짜 대단해. 어렸을 때부터 부지런하더니 잘 컸어.”
“그렇죠. 그 자식은 좀 게을러져도 되는데, 할머니 닮아서 부지런하다니까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다비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재하는 그게 답답했다. 싫은 사람이 저기에 껴있으면 대충 둘러대고 빠져나오면 좋으련만, 정신없이 쏟아지는 질문과 안부를 전부 받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남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재하는 다비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다비와 이야기하면서도 재하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재하는 말없이 다비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우느라 다른 사람의 시선엔 관심이 없었다.
또 다른 사람이 다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비가 웃는 걸 보니 이 사람도 아닌 것 같았다.
“다비는 날이 갈수록 잘생겨지네. 형 기죽는다. 그만 좀 잘생겨져.”
“에이. 그게 제 맘대로 되는 건가요. 타고난 걸 어쩔 수는 없죠.”
“이장님 안에 계시지?”
“네. 안 그래도 형하고 누나들 온다고 해서 지금 신났어요. 들어가 보세요.”
“이따 다른 애들도 더 온다고 했어.”
대단하지도 않은 질문이 계속 이어질 때쯤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과 전부 친한 모양인지 사람들은 다비를 스스럼없이 만지며 친근함을 표시했다. 그때 누군가 다비의 팔뚝을 쓸어내리자, 다비의 턱이 잘게 떨리는 게 재하의 눈에 들어왔다.
“모아랑 지수는 훈이네에 있어?”
“…모아는 미국에 있어요. 바빠서 못 왔고. 지수는 내일 올 거라고 연락받았어요.”
“그렇구나. 나 서울에서 열렸던 네 사진전 간 적 있었는데. 너 못 만나고 그냥 왔네.”
“그랬어요? 아쉽네요.”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지만, 재하의 눈에는 다비의 모든 행동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피하려고 애쓰는 시선, 잔뜩 굳은 몸, 꽉 쥐었다 펴는 주먹, 불쾌하다는 듯 잘근 깨무는 입술. 다른 사람들과 닿았을 때와 확실하게 다른 반응이었다.
찾았다. 그 남자였다.
이제 이곳에서 볼일은 끝났다. 재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다비를 감싸며 제 쪽으로 바짝 잡아당겼다.
“형, 훈이 형이 왜 안 오느냐고 연락했어요.”
“아, 이제 가야지.”
재하가 말을 꺼내자, 모두의 시선이 재하를 향했다. 재하는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감을 주는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꾸벅 인사했다. 사람들은 이미 재하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유재하입니다. 훈이 형과 다비 형하고 인연이 있어서 이번 명절에 내려오게 됐습니다.”
“유… 아! Y·F그룹.”
“첼로 한다는 그?”
이야기가 길어지는 건 질색이었고 다비를 이곳에 더 두고 싶지 않았다. 재하는 적당히 사람 좋은 미소를 하고 고개를 까딱이며 벽을 쳤다.
“훈이 형이 빨리 오라고 성화라서, 저흰 이만.”
남자를 찾은 건 기뻤지만, 다비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다비는 모르고 있고, 다비에겐 언제나 말 잘 듣는 착한 유재하로 있고 싶었다. 다비도 자리가 불편했던 모양인지, 재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럼 놀다 가세요.”
“응. 오래 있진 않을 거야. 내일 회관에서 보자.”
“네.”
다비는 재하와 함께 훈의 집으로 향했다.
긴장했던 것치고는 생각보다 꽤 견딜 만했다. 헤어지고 그놈과 처음 다시 만났을 때는 너무 놀라서 도망치듯 훈의 집으로 달려가다 시멘트벽에 얼굴을 갈아 먹은 적도 있었다. 세월이 지났다고 어색하긴 하지만 허둥거리며 도망치지도 않았고, 적당히 대꾸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재하가 옆에 있어서 괜찮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다비가 재하를 흘끔 바라보자, 재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마을 사람들하고 친한가 봐요. 하긴, 형은 어디서나 사람들하고 친했죠.”
“이장 아들이라 그렇지 뭐. 명절만 되면 사람들이 찾아와서 밤새고 술 마시고…. 그거 시끄러워서 모아하고 지수하고 나하고 훈이네로 도망치고 그랬어.”
“그렇구나. 그래도 아무나 형 만지게는 하지 말아요. 나는 형 닳을까 봐 아까워서 막 만지지도 못하는데.”
“뭐래. 그게 참는 거라고? 터지면 나 죽는 거 아니냐? 살살 해.”
다비는 재하의 뒤통수를 쓰다듬어주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웠던 다정한 손길에 재하가 걸음을 멈추고 다비에게 물었다.
“정답은 찾았어요?”
“…아.”
정답은 찾았다. 재하를 다시 만난 순간, 갈등하던 것들이 무색하게 재하를 봤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다만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었다. 여기서 말했다가, 참고 있다는 재하가 터지면 정말 훈과 리온을 만나기도 전에 큰일 날 것 같았다. 그래도 삐딱하게 굴고 싶지 않아서 다비는 재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찾긴 찾았는데, 지금은 말 안 할래. 이따 꼭 이야기해줄게.”
“좋은 대답이었으면 좋겠네요.”
“글쎄….”
재하는 당장 다비를 안고 싶었지만, 기다리기로 했으니까 마음을 꾹 참았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얌전하게 형, 동생으로 있기로 했다.
둘이 집에 돌아왔을 때, 다행히 훈과 리온은 1층에 있었다. 훈과 이야기하고 있던 리온이 현관으로 후다닥 달려오며 다비를 반겼다.
“다비야!”
27살인데도 여전히 소년 같은 미소가 예쁘기도 했다. 리온은 재하와 같은 첼리스트였다. 재하와 같은 소속사에 있고, 유럽에서는 재하와 쌍벽을 이루는 연주자로 많은 이의 사랑을 받으며 활동 중이었다. 그래도 친구들 앞에서는 언제나 귀엽고 하찮은 유리온일 뿐이었다. 다비는 잘생긴 미소를 지으며 리온의 팔뚝을 톡 쳐주었다.
“리온이, 안녕.”
리온이 헤실 웃으며 다비의 팔뚝에 솜방망이를 날렸다.
“다비도 안녕. 잘 지냈지? 추석 때 보고 오랜만이다.”
“그러게. 오자마자 고생 많았네.”
리온은 다비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나 어제 서울 본가에서 자고, 헬기 타고 와서 고생한 거 없는데?”
“그 고생 말한 거 아닌데. 훈이 놈 저 짐승 새끼한테 시달려서 고생했단 소리인데.”
일부러 짓궂게 말하자 리온이 눈을 크게 뜨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 어떻게 알았어? 재하가 말했어? 재하가 뭐 들었던 거야? 여기 방음 잘된다고 했잖아, 훈아.”
리온은 창피해하며 훈을 바라보았다. 소리가 안 들려도 시간이 그렇게 흘렀으면 눈치채는 게 당연한데, 들킨 이유가 소리 때문이라고 믿고 있는 리온이 귀여워서 훈은 웃음을 흘렸다.
“응. 방음은 잘되는데… 들킨 이유가 소리는 아닌 거 같은….”
“아…. 미안해. 그렇지 않아도 내려왔는데 재하가 없어서…. 으아. 미안해. 왜 자꾸 들키지.”
다비는 리온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큭큭 웃으며 리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작고 동그란 머리통이 손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고3 때부터 리온의 머리통은 다비의 힐링이었다. 쓱쓱 쓰다듬으며 고훈을 흘끗 바라보았다.
“리온이가 잘못한 건 없지. 시간 조절도 못 하고 달라붙은 훈이 놈이 나쁜 거야. 재하까지 데려다 놓고 너한테 정신 빠진 저기 짐승 새끼 같은 고훈이 쳐죽일 놈이지.”
“…훈이 쳐죽일 거야?”
“미친, 귀여워. 여전해서 더 귀여워.”
재하가 뒤에서 지켜보다 리온의 머리 위에 얹힌 다비의 손을 떼어냈다. 누가 봐도 명백히 질투하는 표정이었다.
“형, 제가 오늘 삼촌 손님으로 오긴 했는데. 그래도 제 앞에서 자꾸 이러면 훈이 형한테 말할 거예요.”
“…뭘. 아니, 미친. 아니라고. 좀.”
리온이가 취향이라고 거짓 고백했던 걸 훈에게 말하겠다고 협박하는 녀석 때문에 다비는 얼른 훈의 눈치를 살폈다. 정작 훈은 음식 준비를 마무리하느라 바빠 보였다.
리온은 손짓하며 안으로 둘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래도 다행이다. 독일에서 재하가 계속 기운 없어 보였거든. 걱정돼서 데리고 왔는데, 데려오길 잘했어. 난 재하 그렇게 초췌한 거….”
“사, 삼촌? 내가 언제 초췌했다고….”
“아니야. 너 진짜 초췌….”
“삼촌이 잘못 봤겠지. 나 아무렇지도 않았… 던 건 아니지만.”
재하는 웅얼거리며 다비의 눈치를 봤다. 공항에서 헤어지고 난 후, 다비에게 연락이 없는 동안 피가 마르는 나날이었다. 숨을 쉬어도 답답했고, 무엇을 먹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을 자도 깨어 있는 것 같았고, 온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예민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까칠해지기 시작한 재하를 보다 못한 리온이 이곳에 억지로 끌고 왔다. 다비를 보자마자 모든 증상이 씻은 듯 나았지만, 그래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들키고 나니 민망해졌다.
정작 다비는 자신이 빠르게 연락해주지 않아서 재하가 그렇게 힘들어했다는 사실을 알고 미안해졌다. 오늘은 꼭 이야기하고 서로 편안해질 생각이었다.
훈이 거실에 있는 세 명을 불렀다.
“밥 먹자.”
“훈아, 나 막걸리.”
“리온아, 밥 먼저 먹고 술상 차려줄게. 너 빈속에 술 마시면 또 애들하고 이야기 못 하고 잠들어.”
“그건 싫어.”
“착해라. 얼른 속 채우고 먹자. 일부러 밥 조금만 차렸어.”
훈의 말과 달리 대형 식탁에는 음식이 가득했다. 다비가 어마어마한 양에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을 사람들 와서 7박 8일은 먹어도 되겠다. 만한전석이냐.”
“무슨 소리야. 이 정도면 우리 리온이 딱 배부르게 먹겠는데. 너하고 재하 와서 조금 더 만들었어. 재하도 거기 앉아.”
꽤 오랜만에 네 명이 모여 식탁에 마주 앉았다. 리온은 예전에 이렇게 함께 있던 때가 떠올라, 금세 생글거리며 웃었다.
“우리 이렇게 네 명이 함께 모인 거, 훈이하고 다비 군대 갔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따로 따로는 자주 보는데 이렇게 모이기는 힘든 거 같아.”
다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쳐주었다.
“다들 바쁘게 사니까 그렇지. 지수는 내일 온다고 하고, 모아는 올 명절에 못 온다고 하고. 우리 다 바빠서 작년 추석에야 겨우 첫 동창회 했던 거 기억하지? 그런데 재하나 리온이 너는 특히 더 바쁘잖아. 이렇게 보는 게 신기한 거 아니냐?”
“모아까지 왔으면, 동창회 또 할 수 있었는데 아쉽네. 재하도 있으니까 제주도 멤버 다 모인 건데.”
“다음 추석 때 만나면 되잖아. 그땐 내가 모아 꼭 끌고 올게.”
“응!”
오랜만에 만난 네 명은 식사 시간 내내 떠들면서 명절 분위기를 만끽했다. 멀리 있어도 고향으로 오는 이유는 이렇게 반가운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함께 공유하는 순간이 좋아서였다. 식사를 마치고 함께 술을 마시려 할 때였다.
리온이 잠시 2층에 올라간 사이에 재하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독일에서 전화가 와서요. 공연 준비 때문에.”
안주를 준비하던 훈과 다비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비가 전 하나를 집어 재하의 입에 쏙 넣어주고 팔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갔다 와. 오늘은 같이 술 마시겠네.”
“기대하고 있어요. 전, 진짜 맛있네요. 금방 갔다 올게요.”
“어. 오래 안 걸리니까 멀리 가지 마.”
“네.”
재하가 나가고 2층에서 리온이 내려왔다. 다비가 예쁘게 부친 전을 보더니 금세 눈이 초롱초롱해져서 “우아.” 하며 홀린 듯 주방으로 들어왔다.
“다비는 고기도 잘 굽고, 전도 잘 부쳐.”
“훈이보다?”
“어…. 음…. 훈이도 전 잘 부치는데 다비도 잘 부쳐.”
“고기는?”
“다비!”
망설임 없이 즉답하자, 훈이 회를 뜨다 말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리온을 보았다.
“다비가 구워주는 고기가 그렇게 좋으니?”
“…그렇지만, 사실인데. 훈이 너도 잘 굽는데, 다비가 구워주는 고기는 진짜 너무 예술이잖아. 나 가끔 자다가도 생각난다? 독일에서 생각나면 그날은 하루 종일 연주도 안 될 정도야.”
“야, 김다비. 너 이거 어떡할 거야. 우리 리온이가 네 고기 때문에 연주를 못 한다잖아. 너 당분간 촬영할 생각 말고 독일로 따라가서 리온이 고기 생각 안 나게 실컷 구워….”
“아오, 이 미친놈은 진짜. 주접 좀 작작 떨라고.”
다비가 질색하며 훈의 튼튼한 허벅지를 퍽 소리 나게 걷어찼다. 옆에서 이야기하던 리온이 깜짝 놀라 흠칫거리자, 다비가 전 하나를 손에 들어 리온의 입 앞으로 대령했다. 리온이 입을 아 벌리고 다비의 전을 받아먹는 모습을 보고 훈이 다비에게 맞은 허벅지를 손등으로 쓸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리온아, 내가 아무한테나 음식 받아먹지 말랬잖아.”
“다비가 아무나는 아니지.”
“아무나가 아닌 건 맞는데, 아 하면서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럽게 덥석 받아먹지 말라는 거야. 그런 건 나한테만 보여주라니까.”
“고훈 질투하는 거 귀여워.”
“난 항상 네가 귀여워.”
다비는 둘의 염병에 전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잠시 나가 있을까 하다가, 재하에게 맛있는 술과 안주로 첫 술을 알려주기 위해서 참기로 했다. 다비는 리온의 입에 전을 하나 더 넣어주며 잘생긴 미소로 웃었다.
“내일 지수 오면 고기 실컷 구워줄게. 여기 있을 때 많이 먹고 가. 그럼 되겠지?”
“응! 좋아. 흐, 전 진짜 맛있다. 빨리 막걸리 먹고 싶다.”
리온은 식탁에 앉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훈아, 그런데 재하는 어디 갔어?”
“독일에서 공연 문제로 전화 왔다고 통화하고 온다던데?”
리온이 듣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고? 이상하네.”
“왜?”
“재하 지금 일 없는데?”
다비는 리온의 말에 재하가 한동안 쉰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훈은 독일을 오갔지만, 재하가 다른 나라에 공연 가는 일이 잦아서 최근까지 안 보였던 이유가 공연 때문인 줄 알았다. 둘 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리온을 보자, 리온이 말을 이었다.
“재하가 반년 동안 쉬고 싶다고 해서, 추석 전에 캐나다 공연 이후로는 일 없었어. 아마 봄부터 활동 시작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앨범 녹음도 없을 텐데. 일이 바쁜 건 나지.”
리온의 이야기에 다비는 기분이 이상했다. 오지도에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 시간에 뭘 사러 간 건 아닐 테고 재하를 아는 사람은 지금 이 집에 있는 사람들이 다였다.
“그럼 왜 나간 거지?”
“금방 오겠지. 애도 아닌데, 설마 길 잃어버리겠어?”
리온이 안심하라는 듯 말하자, 훈이 옛날 추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우리 리온이는 섬에 온 첫날 길 잃어버렸는데. 나 처음 보고 무섭다면서 울먹거리던 거 아직도 생생하다. 귀여웠는데….”
“이젠 안 잃어버려.”
“그럼, 우리 리온이는 천재니까 이제 길 안 잃어버리지.”
시도 때도 없는 염병할 소리에 다비는 고개를 저으며 주방을 빠져나왔다.
“재하 얘는 진짜 어딜 간 거야.”
리온의 말대로 재하가 애는 아니었지만, 자꾸 어딘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
재하는 지금 다비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대문 너머로 들리는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를 가만히 들으면서 그 남자를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아 기다렸더니, 대문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장님, 전 이만 가볼게요. 내일 회관에서 봬요.”
“그래. 술 많이 마셨으니까 조심해서 가.”
“네.”
재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담장에 기댔던 몸을 바로 했다. 잠시 후, 대문이 열렸고 남자가 추위에 몸을 웅크리며 대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손일수 씨?”
술에 취한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저보다 훨씬 큰 남자의 모습에 몸을 잠시 움찔거렸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네. 그런데요. 누구… 아, 다비하고 훈이 아는 동생이라고 했던가.”
“유재하입니다.”
“아, 맞다. 맞아. 그 첼로 하는 Y·F그룹. 그런데 저를 왜요?”
길가에 켜진 가로등 불빛으로 보아도, 남자는 꽤 많이 취한 듯 보였다. 재하는 집 앞에서 바로 보이는 새카만 바다에 당장에라도 남자를 처박고 싶었지만, 다비의 집 앞에서 이성을 잃을 수는 없었다. 재하는 적당히 남자를 구슬려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제가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어서요. 손일수 씨한테요.”
“나요?”
“네. 다비 형이 어렸을 때 친하게 지냈다고 그러더라고요. 제가 다비 형하고 각별하게 친해서요. 이야기 나눠보고 싶었어요.”
“아. 다비가 그래요? 친했다고? 음. 친하긴 했죠.”
남자는 다비보다 2살 연상이었다. 키는 다비보다 작지만 보통 성인 남성의 키 정도는 됐다. 좋은 대학을 나와 나쁘지 않은 회사에 다니고 직급은 대리. 성실하고 주위의 평판이 좋음. 여자친구와 올해 결혼하기로 예정. 여자친구와는 대학 때부터 사귐. 주위에 여자친구가 첫사랑이라고 말하고 다님. 알아주는 순정남으로 이미지 메이킹.
씨발 새끼.
재하는 감정이 끓어오르는 걸 참고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비 형하고 많이 친했어요?”
“섬에서 학교 다닐 땐 친했어요. 제가 졸업하고는 명절에나 잠깐 보는 사이? 다비가 미국 간 후로는 계속 엇갈려서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건데…. 흠, 다비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했길래 날 이렇게 따로 보려는 건지 모르겠네요.”
“다비 형 문제로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자리를 좀 옮길까요?”
그제야 일수는 재하가 왜 자신을 찾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일수의 눈이 야비하게 가늘어졌다. 입꼬리를 씰룩이더니 어깨를 빳빳하게 세우고는 재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피식 웃었다.
“난 여기서 이야기해도 상관없어요. 다비하고 심각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친하게 지냈던 건 벌써 8년은 더 된 이야기고요. 곤란해지는 건 내가 아니라 재하 씨 아닌가? 아니면 다비?”
거들먹거리는 남자의 작태에 재하는 몸을 곧게 펴고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재하는 기본적으로 매너가 있는 편이고, 사람을 대할 때 적당히 맞춰주는 스타일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내킬 때뿐이었다. 남자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적대감을 가진 상태라 재하는 상대에게 예의를 차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다비 형하고 친하다고 해서 제가 다비 형하고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다비 형은 착해서 당신 보면서 생글거렸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감히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볼 만큼 내가 만만한 사람은 아니거든.”
“무슨….”
“이 섬이 먹고사는 거, 그 뒤에 누가 있다고 생각해요? Y·F그룹이 이 섬에 투자한 돈이 얼마인지 귀가 달렸으면 들어봤겠지. 당신 부모님도 전복 전량 우리 쪽으로 넘기는 거로 알고 있는데. 게다가 당신 지금 다니는 회사도 우리 계열사인 거 알고 있죠? 이래도 내가 그냥 다비 형 아는 동생으로만 보입니까?”
섬에 연고를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섬의 발전에 Y·F그룹의 대대적인 지원이 크게 이바지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지원을 밀어준 사람은 지금의 Y·F그룹의 총수 유지온 회장이었다. 그의 아들이 눈앞에 있는 남자였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Y·F그룹의 손이 닿지 않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재하가 말한 대로 일수가 다니는 회사는 그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였다.
일수의 눈빛에서 건방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곧바로 대단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어려워하는 표정을 짓자, 재하의 속이 더 끓어올랐다.
“알아들은 것 같네요.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사람들이 잘 안 오는 곳으로요.”
일수는 재하와 이야기하기 위해 작은 해안가를 찾았다. 불빛 하나 없는 밤바다는 달빛에 반짝이는 수면만 보였고 주위는 어두웠다. 재하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자, 밤하늘엔 별이 쏟아질 듯 가득했다. 다비가 말했던 오지도의 밤하늘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어쩌다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이 나온 건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해해주기도 싫었다.
일수가 재하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비하고 무슨 사이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내가 그걸 당신한테 말해야 하나?”
“뭔가 오해하시는 게 있어서 말하는 건데, 전 다비가 미국으로 가고 난 이후로 올해 처음 보는 거예요. 다비하고 특별하게 말을 섞은 적도 없었고요.”
“오해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합니다.”
겨울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보다 더 차갑고 매서운 목소리에 일수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재하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일수에게 물었다.
“과거에 다비 형한테 나쁜 짓 한 적 있습니까?”
차마 다비에게 상처가 될 만한 단어들을 꺼낼 수가 없어서 돌려 말했더니 일수가 어둠 속에서 강하게 부인하기 시작했다.
“제가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다비가 저랑 친하게 지냈다고 그랬다면서요.”
“다비 형 얘기 확인받자고 여기 온 거 아닙니다. 당신 대답을 들으려는 거지. 나쁜 짓을 한 적 없었다. 정말?”
“재미 삼아 장난친 건 있지만, 나쁜 짓은 정말 없었어요. 다비도 좋아했었고….”
“난 왜 그게 자꾸 거짓말로 들리지? 술 마셔서 머리가 안 돌아간다 해도 눈치 없어요? 그 많은 사람 중에 당신만 콕 집어서 여기로 데려온 거면 내가 당신 뒷조사, 과거 조사 다 하고 왔을 거란 거 견적 안 뽑히나?”
재하의 말에 일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들춰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재하가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화낼 이유도 없었다. 그렇지만 함부로 대하기엔 어려운 사람이라 일수는 최대한 좋게 말하기로 했다.
“다비하고 사귀었던 거 말하는 거라면, 사귄 적 있습니다. 한 1년? 섬에 있을 때 잠깐.”
“정말 사귄 거 맞습니까?”
“네. 맞아요. 그냥 남들 사귀는 것처럼 사귀었다가 제가 육지로 가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졌어요. 그게 다인데. 왜요? 다비가 저한테 돌아올까 봐 걱정돼서 확인하는 겁니까? 걱정 마세요. 서로 깨끗하게 정리한 사이니까.”
“깨끗하게 정리…. 왜 이렇게 화가 나지?”
뻔뻔하게 나오는 남자의 태도에 재하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다비의 과거를 지워버린 것도 모자라 다비와 있었던 일조차 아무것도 아닌 셈 치려는 건 사귀었던 사람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고, 사람으로서 할 짓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어린 다비에게 했던 짓을 단순히 장난이었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쓰레기 짓은 정말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냥 죽여버릴까.”
“무슨…. 이봐요. 무슨 대답을 원해서 자꾸 이러는 겁니까? 난 다비하고 끝난 지 오래고. 다비도 자기 인생 잘 살고 있는데, 왜 이제 와서 나한테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 애가 뭐라고 했습니까? 뭔지 모르겠지만 그거 다 헛소리예요.”
“헛소리라. 하아, 우선 이거 받아요.”
재하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 하나를 일수에게 건네주었다. 어두워서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는 일수를 위해 재하가 명함을 준 이유를 친히 설명해주었다.
“우리 집안 전담해주시는 변호사님 명함입니다. 정말 실력 좋으신 분이죠. 한 번도 지는 걸 본 적이 없거든요. 지금부터 내가 손일수 씨를 때릴 건데, 억울하면 신고하고 거기로 연락하세요.”
“진짜 왜 이러는….”
“일단은 그 입에서 다비란 이름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게 못마땅해서 때리는 거라고 하죠. 사실 나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거든. 그런데 당신이 하는 말 뒤에 뭐가 더 있는 것 같아. 지금부터 알아볼 생각입니다. 맞으면 기억나겠지.”
“뭐, 뭐야. 이거.”
“깽값 줄 테니까 처맞아요. 처맞으면서 형한테 잘못한 게 떠올랐으면 말해요. 들어는 줄 테니까.”
재하가 농담하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건 술에 취했어도 알 수 있었다. 일수가 도망가려 하자, 재하가 알아차렸다는 듯 긴 팔을 뻗어 가볍게 일수를 붙잡았다. 어둠 속에서 재하의 눈이 매섭게 빛이 났다. 일수를 바짝 끌어당긴 재하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도망가면 답이 나와요?”
재하에게 멱살이 잡힌 채 발이 허공에 들리자 일수가 재하의 팔을 붙잡고 다급하게 나불거렸다.
“오래된 일을 어떻게 기억해요! 이미 지난 일인데!”
“그러니까 기억해보라고 시간을 주잖아요.”
그때, 어디선가 희미하게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오자 일수가 소리치기 시작했다.
“여기요! 사람 살려…. 읍.”
재하는 일수의 입을 막은 채 자갈로 이루어진 바닥에 처박고 짓눌렀다. 자갈이 잔뜩 깔린 바닥에 짓눌린 일수는 신음과 함께 몸을 뒤틀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재하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난 애써 참고 있는데 왜 자꾸 자극하지? 진짜 죽고 싶어서 그러나?”
재하는 화가 났다. 고작 이런 남자 때문에 다비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는 게 화가 났고, 상처가 생길 만큼 이 남자가 쓰레기라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러면서 잘 포장된 선물처럼 살고 있는 인생에 더 화가 났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태어나는 순간도 기억난다는데,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해보죠.”
재하는 일수를 일으키고 바다 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한겨울의 바다는 아무리 따뜻한 남쪽이라고 해도 몸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섬 출신인 일수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파도 소리가 가까워져 오자, 일수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자신을 붙잡은 재하의 팔을 아프게 잡아 뜯으며 격렬하게 반항했다.
“반항해도 소용없어요. 생각나면 알아서 풀어줄 테니까, 그럴 시간에 머리를 굴려봐요.”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생각은 무슨. 씨팔. 김다비가 뭐라고.”
“여기서 더 소리 지르면 생각할 시간도 안 줄 겁니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던 오토바이 소리가 점점 가까이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일수는 재하의 팔을 계속 쥐어뜯고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재하는 꿈적도 하지 않고 바다로 성큼 들어갔다.
바닷물이 재하의 무릎을 적실 때, 갑자기 뒤에서 불빛이 비쳤다. 일수는 그 불빛이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재하를 쥐어뜯던 팔을 풀어 손을 흔들었고, 재하는 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얼음보다 시린 바닷물이 순식간에 둘을 적셨다.
재하의 뒤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재하, 재하야!”
재하는 그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길 바랐건만, 다비의 목소리였다.
재하는 다비에게 이런 모습을 들킨 게 무서웠다. 다비에게는 착하고 순한 모습만 보여야 하는데. 이런 모습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다비가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두려웠지만,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재하는 일수를 그대로 바다에 처박았다. 일수를 쥐고 있는 손에 힘줄이 불거졌다. 물속에 처박힌 일수가 버둥거리는 느낌이 손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대로 더 물에 담가두고 싶었지만, 편안한 죽음은 그에게 사치였다. 물에서 꺼내자 일수가 숨을 몰아쉬며 재하를 붙잡고 버텼다. 일수는 정말로 공포에 질려 다비에게 크게 소리쳤다.
“김다비. 뭐 하고 있어! 빨리 말리지 않고!”
“형. 오지 말아요.”
“다비야!”
다비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잠시 당황했다가, 곧장 바다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대체 왜 재하와 저 남자가 한자리에 있고, 둘이 왜 바닷물에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이 상황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비는 성큼 바다로 들어가 일수와 재하를 붙잡았다. 재하의 팔을 꽉 붙잡고 매달려 있는 일수를 보자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씨발. 미친 새끼가….”
다비의 욕지거리에 일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이 사람 미친 거 같아.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 다짜고짜 끌고 와서….”
“입 닥쳐. 애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씨발. 이 손이 어떤 손인데… 이렇게 귀한 손을 쥐어뜯고 지랄이야. 재하야, 너 괜찮아? 이 사람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 저 새끼가 여기로 끌고 온 거야?”
“…다비야?”
다비는 일수를 재하에게서 떼어놓고 곧장 휴대폰을 비춰 재하의 손부터 살폈다. 여기저기 쥐어뜯긴 자국에 제 손이 뜯긴 것처럼 미간을 구기며 혀를 찼다.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냐? 피 나는데? 일단 여기서 나가자. 너 또 몸살 난다.”
“…형.”
재하가 누구에게 끌려다닐 덩치는 아니었는데도 다비는 재하의 손을 붙잡고 걱정부터 하고 있었다. 이런 반응은 생각하지 못해 재하도 순간 당황했다. 계속 본성을 보여도 되는 건지, 이대로 모르쇠를 해야 하는 건지. 재하는 저를 생각하는 다비의 마음에 찡해져서 일단 다비의 뜻대로 약한 척하기로 했다.
“형. 나 손 아파요. 피도 나요? 어쩐지 쓰리더라. 어두워서 몰랐어요.”
“하, 씨발. 이 손이 어떤 손인데…. 병원 가야겠다. 너 빨리 물 밖으로 나가. 겨울 바다가 얼마나 차가운데 이러고 있어.”
다비는 재하의 등을 떠밀며 물 밖으로 나가도록 했다. 재하에게서 풀려난 일수도 해변으로 뛰쳐나왔다. 지금 상황이 매우 못마땅했는지, 일수는 곧장 다비에게 억울함을 알렸다.
“너 뭔가 오해하고 있는데… 저 남자가 먼저….”
“내 사람들 건드리지 말아요. 나는 괜찮은데. 내 사람들 건드리면 가만 안 있을 겁니다.”
“그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저 애가 뭘 알아서 형을 괴롭혀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어주지. 형이 뭔가 눈치채고 얘를 협박했겠지. 사람 좋은 척해가면서.”
“좀 들어! 씨팔. 저 사람이 내가 너하고 사귀었다는 거 알았다고. 그래서 너하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따져 묻다가 갑자기 먼저 덮쳤단 말이야.”
다비는 일수의 말에 재하를 보았다. 재하는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다비를 지켜보았다. 일수는 둘을 살피더니, 재하가 다비 몰래 일을 진행했다는 걸 알았다. 재하가 다비에게 약하게 구는 걸 보고 곧장 다비에게 나불거렸다.
“나 방금 저 사람한테 죽을 뻔했어. 우리 사귀었던 거 때문에 말이야. 이게 말이 돼? 이미 오래전 일 아니야? 네가 뭐라고 말했기에 저 사람이 나한테 이러는 거야. 내가 너한테 대체 무슨 나쁜 짓을 했는데? 솔직히 우리 꽤 좋아….”
재하가 그 말에 참지 못하고 다시 일수에게 달려드는데, 다비가 먼저 남자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나한테 그렇게 말을 하면 안 되지.”
“뭐야. 이거 안 놔?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김다비, 어디 형을….”
“좋았다고? 개만도 못한 새끼가 주둥아리만 살아가지고. 내가 지금 당신 몸뚱이를 조각조각 포 떠서 바닷물에 절이고 싶다는 거 모르지?”
다비의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그의 분노를 말해주고 있었다. 콱 움켜쥔 다비의 손을 뿌리쳐 보려 했지만, 예전과 달리 다비를 쉽게 뿌리칠 수 없었다. 일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도리어 다비에게 화를 냈다.
“무슨 헛소리야. 우리 좋게 헤어진 거 아니었어? 뭐가 그렇게 억울해서 이제 와서 이래.”
“억울? 사람 바보 만드는 거 여전하네. 알아듣게 이야기해줘요? 네가 좋아했던 사람 나 아니었잖아. 개새끼야.”
“…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일수가 말을 더듬으며 시선을 피하자 다비가 움켜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고 바짝 잡아당겼다.
“내가 모아 대신이었다는 거 모를 줄 알았어요? 왜. 증거 없을 거 같아서 모르쇠예요? 어쩌나. 내가 증거 없이 이러는 거 같아요? 내가 병신 같았던 게 쪽팔려서 조용히 살았던 거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던 거 아닌데. 지금까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면 그건 그거대로 좆같네.”
다비의 말에 뻣뻣하게 굴던 일수가 곧장 고개를 저었다. 다비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는지 계속 다비의 이름을 더듬거리며 말하던 일수가 멱살이 잡힌 채, 다비를 붙잡고 애원했다.
“다, 다비야. 내가… 그때 나는 어려서 그랬던 거야. 우리 이러지 말고. 모, 모아 좋아했던 건 사실인데 그것도 지난 일이야. 모아는 정말 멀리서 보기만 했어. 말도 안 걸어봤다고. 그리고 우리 사귈 때 좋았잖아. 나도 너 좋아했고. 정말….”
“입 다물어라. 네 입에서 내 이름이나 모아 이름 나오는 거 더러우니까. 그리고 당신, 나 좋아한 거 아니에요. 좋아하는 사람이 사람을 그딴 식으로 취급하는 건 아니죠. 내가 겪어보니까 그 차이를 알겠더라고. 세상 어떤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한테 소리 내지 말라고 입 틀어막고, 살 닿는 것도 싫어하고, 뒷모습만 보여달라고 하냐고. 이래도 좋아했단 소리가 나와요?”
재하는 다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 전부 꿈이길 바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한 이야기에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사람이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러 놓고 지금까지 사람처럼 살았다는 게 혐오스러웠다.
“다비 형. 그만해요. 저한테 시켜요. 내가 어떻게 해줄까요. 죽여달라면 죽이고 살리라고 해도 죽일게요.”
“아니야. 이런 놈 때문에 네가 더러워질 필요가 뭐 있어. 이건 내 문제인데 내가 직접 해결 봐야지.”
“하지만, 형. 저런 사람은 반성 같은 거 안 해요. 차라리 여기서 확실하게 끝내는 게….”
“재하야. 마음은 고마운데, 저놈하고 같은 급으로 놀지 말자. 진정해.”
다비는 저보다 작아진 일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때는 그렇게 커 보였는데, 이제는 자신이 훨씬 더 커졌다. 아주 오래전, 어린 다비는 차마 묻지 못했던 그 말을 이제야 물어보고 싶었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나한테 미안하긴 합니까?”
“미안해. 네가 그걸 알고 있는 줄 몰랐어. 하지만 나도 그렇게 갑자기 헤어지려고 한 건 아니었어. 무서웠어. 네가 점점 남자 같아지니까….”
“씨발. 진짜 뭐라는 거야. 난 처음부터 남자였다고. 너보다 더 큰 좆 달린 사내새끼요. 분위기 못 읽나? 그게 미안한 사람 태도야? 내가 지금 당신 때릴 줄 몰라서 참고 있는 줄 알아?”
17살의 김다비는 작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힘으로도, 체격으로도 다비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자 일수가 급하게 꼬리를 말았다.
“미안, 미안해. 다비야. 내가 잘못했다. 오래전 일이어도 그건 내가 잘못했어. 사, 살려주라. 나 조금 있으면 결혼해. 마을에 그런 소문 나는 거 싫고 조용히 마무리하고 싶어. 내가 어, 어떻게 해야 하냐? 돈? 돈 필요해? 아니면 무릎 꿇고 빌까? 네가 하란 대로 할 테니까. 제발 조용히 끝내자. 부탁할게.”
멱살이 잡힌 채로 제 앞에서 손을 싹싹 빌고 있는 남자를 보자, 갑자기 허무하고 허탈해졌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왜 그동안 피하고 무서워했던 건지. 조금 더 일찍 이런 기회가 왔다면, 재하하고 아무런 문제 없이 사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자 화가 나면서도 그 기회를 피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가요. 그만…. 이렇게 보니까 불쌍하네. 이런 걸 좋아했던 내가 너무 불쌍하다고. 미안하다는 말은 작고 예뻤던 김다비한테 했어야죠. 잘생기고 키 큰 나는 지금 당신이 뭘 해도 용서해줄 생각이 없거든.”
이대로 끝내려는 다비를 보고 재하가 도리질 치며 다가왔다. 이건 아니었다. 저런 사람에게까지 착할 필요는 없는데, 왜 이대로 끝내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쉽게 용서해주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말 잘 듣고 착한 유재하가 다비에게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얌전히 있을 수 없었다.
“형, 죽이는 게 꺼림칙하면 때려요. 형 분이 풀릴 때까지. 합의금이든 치료비든 내가 다 낼 테니까…. 이렇게 용서해주는 게 어디 있어요. 형이 저 사람한테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큰데. 이건 아니에요. 다시 생각해요. 네? 못 하겠으면 내가 할게요.”
“때린다고 속 풀릴 일이었으면 진작 찾아가서 죽였어. 그런데 그게 정말 속이 편해지겠냐. 이 새끼가 쓰레기라고 같이 쓰레기 짓 하고 싶지 않아.”
다비는 멱살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고 일수를 놔주었다.
“앞으로 우리 섬에 오지 마요. 내가 있든 없든, 이 섬하고 연을 끊어요. 부모님 보고 싶으면 당신 사는 곳으로 불러서 만나요. 이 섬에 들어왔다는 거 내 귀에 들어오는 순간, 당신이 나한테 한 짓 마을에 전부 소문내고 부모님까지 쫓겨나게 만들 테니까. 난 이제 무서울 거 없거든요. 형 효자잖아요. 부모님 자랑 손일수. 앞으로 두 번 다시 보지 맙시다.”
“그래. 그럴게. 네가 하란 대로 할게. 우리 부모님한테는 절대….”
“입 열지 말고 그만 꺼지라고.”
일수가 허둥거리며 도망쳤고, 다비는 그냥 손을 탈탈 털어냈다. 재하가 도망가는 일수를 붙잡으려 하자 다비가 재하를 불렀다.
“내버려 둬. 그리고 너는 나하고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형. 우선 저 사람부터….”
“난 저 새끼보다 네가 더 급해.”
재하는 몸을 움찔거리며, 다비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해명해야 할 시간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동안 완벽하게 잘 속였는데, 다비가 이런 모습을 보고 실망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걱정부터 들었다. 좋은 대답을 준비했던 다비가 자신에게 나쁜 대답을 들려줄까 봐 무섭기까지 했다.
재하는 다비 앞으로 얌전히 걸어갔다.
***
오토바이를 세워둔 곳에 서 있던 훈은 해안에서 뛰쳐나오는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를 확인하자마자 항상 다정하기만 했던 훈의 얼굴이 매서워졌다.
일수가 겁에 질린 채 뛰어오고 있었다. 훈은 일수를 보고 당황했다. 다비에게 상처를 준 남자가 이 사람일 줄은 전혀 몰랐다. 일수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었다. 공부도 제법 잘했고, 운동도 잘했다. 아이들과 어른들에게도 서글서글하게 굴어대서 마을 사람들도 일수를 예뻐했다. 사회에 나가서도 열심히 살고 있다고 일수의 부모님이 자랑하는 걸 들었다. 게다가 이번에 첫사랑하고 결혼한다고 들었다.
언젠가 다비가 갑자기 집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저를 보자마자 엉엉 울어대기에 깜짝 놀랐다. 항상 웃고 씩씩했던 녀석이 뜬금없이 우는 게 이상해서 다 울 때까지 기다려줬더니, 다비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좋아하는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이 사귀자고 말해서 서로 마음이 통한 줄 알았어.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나 봐. 내가 병신 같았지. 이렇게 좁아터진 곳에서 게이가 또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내가 병신이었지. 사귈 때도 이 형이 진짜 나를 좋아하는 건가? 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열심히 하면 그게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더라. 몸 주고 정 줘도 떠날 새끼는 떠나더라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너는 섬에서 연애하지 마라. 사귈 때는 좋았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까 소문날 것 같아서 무서워. 게다가 계속 마주쳐야 하잖아.’
‘나는 연애 안 할 건데. 아니, 못 하는 거지. 누가 이 섬까지 와서 나하고 연애를 해.’
‘그럼 나하고 각서 써. 너도, 나도 둘 다 솔로로 살자. 연애 따위 좆 까라 그래.’
실컷 각서까지 써놓고 녀석은 다시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다고 엉엉 울면서, 자기가 한 이야기를 잊어달라고 했었다. 이별의 상처가 크고 오래간다고 생각했는데 상대가 일수라는 걸 알자마자, 훈은 마음이 너무나 불편했다. 사람들에게 첫사랑하고 결혼한다고 소문이나 내지 말 것이지. 누군가에게 상처로 남은 첫사랑을 누군가는 영원히 지우려 했다는 게 화가 나서 훈은 일수를 보며 알은체했다.
“형, 옷이 많이 젖었네요. 무슨 일 있었어요? 이렇게 추운 날씨에 수영하신 건 아니겠고,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요. 데려다줄까요?”
훈은 마을 사람들에게 성실하고 착한 녀석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보살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묵묵히 남의 일을 도와주는 정말로 착한 녀석이었기에 일수는 훈에게 선뜻 도움을 청했다.
“후, 훈아. 나 좀 데려다주라. 우리 집. 우리 집으로.”
“어휴. 술도 많이 드셨네. 일단 타세요.”
“고마워.”
“뭘요. 당연히 제가 할 일인데.”
훈은 일수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해안을 빠져나왔다. 목적지가 남자의 집이 아니라, 고구마밭이라는 건 일단 훈만 알고 있었다.
***
해안에 남은 둘은 서로 말이 없었다. 너무나 허무한 용서에 재하는 대신 화가 나면서도 이런 모습을 들켰다는 걱정도 함께 들었다.
“형. 그러니까….”
“언제부터 알았냐.”
“확신하게 된 건 제 생일 때였지만 형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건 그전부터 알았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그 남자인 건 오늘 알았어요. 형이 남자 멱살 잡고 했던 이야기들도 지금 처음 알았고요. 저는 그저 형이 지나가듯 말했던 것보다 더 힘든 과거가 있었겠다는 추측만 했어요. 형은 자세히 말해줄 것 같지 않아서 제가 직접 확인하고 싶었어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쓰레기일 줄은 몰랐지만, 찾아내면 형 대신 복수해주고 싶어서….”
그렇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재하는 한 번도 티 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다정하게 굴었고, 저밖에 모르는 녀석이 된 것처럼 맹목적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도 재하만은 모르길 바랐다. 어딘가 아픔이 있다는 걸 들킨 것도 미안했는데, 그 아픔을 전부 다 알았으니 부끄럽고 더 미안해졌다.
“씨발. 쪽팔리게, 진짜. 이미 지난 일이야. 섬사람들 다 가족처럼 지내니까 나만 입 다물면 되는 걸…. 하필 네가….”
“그럼 형은요? 형이 입 다물면 형 상처는 누가 낫게 해주는데요? 형이 제일 아픈데, 왜 형이 참아요? 그거 사랑 아니에요. 형 몰래 이런 일 벌인 건 미안한데, 그 사람한테는 안 미안해요. 형이 못 하니까 내가 대신 해준 거잖아요. 형이 용서해줬다고 해도 내가 안 되겠어요. 죽여야 마음이 풀릴 것 같아요.”
재하가 다시 살벌한 표정으로 해변을 걷자, 다비가 얼른 재하의 손을 붙잡았다.
“재하야, 잠깐만. 진정해.”
“이야기 들어보니까 제대로 사과도 안 했나 본데, 형 앞에 무릎 꿇고 싹싹 비는 거라도 봐야 속이 편하겠어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형 좋아하니까. 아니, 오늘은 이런 이야기 안 할게요. 형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처럼 이럴 거예요. 당장 훈이 형만 해도 이거 알았으면 죽였을걸요. 우리 삼촌도 마찬가지고.”
다비가 손을 놓고 재하에게서 등을 돌렸다. 흥분했던 재하도 아차 싶어서 얼른 눈치를 보았다.
“형, 화났어요? 미안해요. 제가 나쁜 말 해서 싫어졌어요?”
“잠깐만… 생각 좀 정리하고. 너도 일단 진정해.”
다비가 앞장서 걷자, 재하가 그 뒤를 졸졸 따랐다. 어두운 바다에는 자갈 밟는 소리와 파도 소리만 들려왔다. 다비는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들을 정리하느라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심란했다.
재하가 전부 알아버렸다. 그런데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자신을 대신해 화를 내주었다. 솔직히 물에 쫄딱 젖은 일수를 봤을 때 조금 통쾌했다. 재하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그 사람이 신경 쓰여 편치 못한 명절을 보냈을 터였다. 누군가가 내 편에 서준다는 건 정말 든든한 일이었다. 앞으로도 재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줄 사람은 없다는 걸 알았다. 다비는 더 이상 뜸 들이고 싶지 않았다.
다비는 걸음을 멈췄다. 뒤에 졸졸 따라오던 발소리도 우뚝 멈췄다. 기운 쪽 빠진 재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처럼 똑같이 싸가지 없어서 실망했죠. 형이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렇게 성질 못 고쳐서….”
“재하야.”
“네. 형.”
다비가 몸을 돌리고 재하를 보았다. 남들에겐, 세간에서 말하는 유재하와 자신이 알고 있는 유재하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오늘 바다에서 보여주었던 그 모습도, 지금 보여주는 순한 모습도 전부 거짓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떤 유재하든 전부 자신을 너무나 좋아하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네가 봤다시피 내 첫 연애는 이따위였어. 처음에 내가 연애 못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이유기도 해. 이런 과거 쪽팔려서 너한테 알리고 싶지 않았어.”
“형. 그거 연애 아니에요. 그건 연애라고 볼 수 없어요. 형이 잘못한 것도 없잖아요. 그 사람이 나쁜 거잖아요. 그런 생각하지 말고 나하고 그냥 연애해요. 내가 더 노력할게요.”
“나는 아마 연애하고 나면, 네가 멀리 있다는 이유로 많이 불안해할 거야. 어쩌면 네가 굉장히 피곤해질 수도 있어.”
“괜찮아요. 내가 형이 불안하단 생각 들지 않게 노력할게요. 저 그거 잘하잖아요. 문자도 전화도 자주 할 수 있어요.”
“앞으로도 섹스 못 할 수 있어.”
“그건… 같이 노력하면 되잖아요. 하나씩 좋은 기억으로 덮어가다 보면 형도 언젠가 할 수 있을 거예요. 형이 하기 싫으면 안 할 거예요. 그런데 형이 하고 싶다면, 같이 노력해요.”
재하는 다비가 자신을 거절할 것 같아서 필사적이었다. 들려주려는 대답이 나쁜 쪽이라면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다. 형 몰래 그 자식을 반은 죽여놨어야 했는데. 들킨 게 천추의 한이었다. 어차피 나쁜 대답이 나올 거라면 아까 눈치 보지 말고 그냥 바닷물에 던지고 밟아버릴걸.
“형. 정말 저하고 연애 못 하겠….”
“우리 해보자, 연애.”
“…네?”
“너하고 연애하고 싶다고. 내가.”
재하는 그 이야기에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다비를 바라보았다. 오만 인상을 다 쓰면서 눈썹이 팔자로 툭 떨어지자 다비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재하가 흐느끼며 다비에게 말했다.
“저, 집착 심해요. 스토커 같은 짓도 잘해요. 형이 너무 좋아서 감금할지도 몰라요. 누가 형 좋아하거나 싫어하면 그 새끼 죽여버릴지도 몰라요. 그동안은 참았는데, 어쩌면 이제 못 참을지도 몰라요.”
재하는 잠시 숨을 고르며 훌쩍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다비가 손수건으로 재하의 뺨을 닦아주며 어둠 속에서 잘생긴 미소를 지었다.
“뭐래. 너 싸가지 없는 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어. 너 집착 심한 거 문자 폭탄 보면 뻔하지. 감금? 이미 섬에서 한 번 한 적 있지 않냐? 뭘 새삼스레 고백해. 다 알고 연애하자는 거잖아.”
“형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 전부 질투할 거예요. 꿈도 내 꿈만 꾸라고 억지 부릴 건데 괜찮아요?”
재하가 말하는 억지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이건 좀 귀여워서 다비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어떡하냐? 나 요새 악몽 잘 안 꾸는데. 꾸긴 꾸는데 자꾸 꿈에 네가 나와서 악몽은 생각도 안 나. 벌써 억지 부리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래 줄 거야?”
재하가 그 말에 엉엉 울며 다비를 꼭 끌어안았다.
“형, 내가 진짜 사랑해요.”
“그래. 나도 너 좋아해.”
“형이 좋아한다고 말했어. 이거 꿈 아니죠? 꿈이면 안 되는데….”
다비가 재하의 뺨을 손으로 감싸고 입술을 맞대었다. 겨울바람에 차가워진 입술이 포개지며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재하도 다비를 꽉 끌어안고 입맞춤을 열렬하게 받아들였다. 오랜만에 맞닿은 입술은 떨어질 줄 모르고 한참을 붙어 있었다.
다비가 입술을 떼어내고 재하에게 말했다.
“꿈 아니야. 나 너 좋아해. 그래서 앞으로 일어날 걱정 같은 거 전부 무시하고 너하고 연애하고 싶었어. 네가 준 진심들이 너무 많이 피어서 처치 곤란이야. 사막이 아니라 네 덕분에 꽃밭이라고.”
“하…. 정말요?”
“응. 그리고 오늘 일 고맙다. 네가 아니었다면, 그런 식으로라도 사과받지 못했을 거야. 그것도 사과라고 마음이 좀 나아졌네.”
“정말 그걸로 되겠어요?”
다비는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음을 보였다.
“응. 일 더 키우는 거 싫고, 그거면 충분해. 그리고 너하고 제대로 된 연애 할 거니까. 이제 됐어.”
“그게 형이 원하는 거라면 어쩔 수 없죠.”
“아! 너 손! 아씨. 이건 진짜 화나네. 이게 어떤 손인데…. 미친놈이. 얼른 집에 가서 치료하자.”
다비가 자신의 손을 잡고 걱정하는 모습에 재하는 일단 다비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무엇보다 다비가 자신과 연애하겠다고 결심했는데, 다른 문제로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해변을 벗어나자 다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훈이 놈 바이크 어디 갔냐. 같이 왔는데.”
“먼저 집에 간 거 아닐까요? 우리 꽤 오래 있었잖아요.”
“…그런가. 그놈이 말도 없이 먼저 갈 리가 없는데.”
“저하고 형하고 손잡고 같이 오라고 빠져줬나 보죠.”
재하의 말이 제법 그럴싸해서 다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훈도 리온 때문에 낭만적인 녀석이 됐으니까, 재하하고 사고방식이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럼 가자. 가자마자 씻어야겠다. 바지 쫄딱 젖어서 너 진짜 또 몸살 나겠어.”
“이번엔 별로 안 추워요. 형이랑 같이 있어서 그런가. 아, 캐나다 거기는 너무 추웠고 막 돌아다녀서 그런 거고요. 저 그렇게 약골 아니에요.”
“그래. 이번엔 아프지 마라. 같이 술 마셔야지.”
“네. 형, 좋아해요.”
“그래. 나도.”
재하는 어두울 때를 틈타 길 한복판에서 다비에게 잽싸게 도둑 뽀뽀를 하고 헤실 웃었다. 다비는 피식 웃으며 재하의 손을 잡고 훈의 집으로 향했다.
다비는 이렇게 사과를 받고 풀어진 모양이었지만, 재하는 아니었다. 애초에 이렇게 간단하게 끝낼 마음이 없었다. 다비와 사귀게 된 기념으로 남자친구로서 제대로 그 남자에게 복수할 생각이었다.
일단 남자의 결혼부터 망칠 생각이었다. 그런 남자와 결혼할 여자가 불쌍했다. 여자에겐 선택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재하의 코트 안주머니에는 휴대용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 남자가 다비와 사귀었다고 시인하는 부분들과 남자의 쓰레기 짓들만 골라서 다비의 이름이 노출되지 않게 편집하고, 여자에게 보내줄 것이다. 그래도 결혼하겠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판단은 여자가 할 테니까 기회를 주는 건 거기까지였다.
두 번째로, 남자는 가까운 미래에 가벼운 사고가 날 예정이었다. 수술이 필요할 만큼 부상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죽지 않으니까 가벼운 사고라고 할 참이다. 이 또한 다비를 괴롭혔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가벼운 벌이었다. 남자에겐 크고 작은 사고가 앞으로 계속 일어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직장에서 승진의 기회를 놓칠 터였다. 자영업을 하지 않는 이상 어느 직장으로 옮겨도 그렇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을 하더라도 그가 바라는 대로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발악을 한다면, 도박꾼으로 전업시켜줄 생각이었다. 빚에 허덕여 죽음을 생각해도 어디선가 의인이 나타나 그의 삶을 연명케 할 것이다.
다비가 괴로웠던 만큼, 딱 10년. 10년 동안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삶이 재하가 그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Y·F그룹이 안 하는 것뿐이지, 못 할 것이 없다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남자는 알아야 했다. 물론, 죽을 때까지 자신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모를 테지만 말이다. 어차피 남자가 국내에서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 다비는 외국을 누비며 반짝거리며 살 테고, 자신 역시 지금처럼 바쁘게 살 테니, 남자는 자신의 꼬인 인생을 누구에게 탓하지도 못한 채 하늘을 원망하겠지.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만들어 놓고, 남들처럼 평범한 인생을 살려고 했던 그 사람에게 딱 맞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가혹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재하에겐 그것도 너무나 부족했다. 다비는 그런 일을 당하기에 너무나도 어렸고, 아름다워야 할 첫사랑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 영향이 지금도 미치고 있을 만큼 상처를 받았다. 그 아픔에 비하면 제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판 모르는 이의 아픔과 고통에는 관심 없었다. 하지만 다비의 아픔과 고통이었다. 그 아픔이 조금이라도 씻겨나가면, 제 마음도 조금 더 봐줄까 싶어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다. 이 일을 다비가 안다면 빚을 진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니 당연히 이 일은 다비에게 비밀이었다. 우연히 그 남자의 몰락을 먼 훗날 듣게 된 다비가 인과응보라며 동정조차 하지 않게 만드는 게 재하의 목표였다.
둘이 사이좋게 훈의 집으로 향하는데, 오르막길로 향하는 곳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훈과 마주쳤다. 다비는 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갔다 오냐?”
“응. 일수 형 묻… 아니. 데려다주고 왔어. 술을 아주 많이 마셨더라고.”
“…묻었어?”
“응. 뭐, 술 깨면 빠져나올 만큼 살살 묻었어. 몸살로 된통 고생은 하겠지만 죽진 않을걸?”
“아니, 너 어쩌려고.”
섬의 밤은 조용해서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크게 들렸다. 훈도 같은 곳에 있었으니 어느 정도 이야기가 들렸을 터였다. 그 남자의 정체를 알았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파묻었을 줄 몰랐다. 파묻었다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게끔, 오토바이 뒤에 실린 삽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다비가 걱정하자 훈이 다정한 미소를 보였다.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일수 형이 탈출에 성공해서 내가 파묻었다고 이장님 마이크에 떠들어도, 어른들은 우리 훈이는 그럴 리가 없다, 하시면서 안 믿어주실 거야. 내가 이러려고 그동안 착하게 산 것 같다니까.”
“그건 그래. 그래도 너까지 그렇게 나설 필요는 없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거밖에 없다. 사정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그거면 됐지. 든든하다.”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오가는 걸 듣고 있던 재하가 진지한 얼굴로 훈에게 물었다.
“파묻었으면 생매장 같은 거예요?”
“에이. 그러면 범죄고. 이건 그냥 장난 같은 거야. 목만 내놓고 땅에 파묻는 정도의 장난은 어린 시절에 누구나 다 하지 않나?”
“…오지도에서는 장난으로 그래요?”
“파묻힐 만큼 잘못했으니까 파묻는 거지. 산 중턱이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밤새 소리쳐도 여기까진 안 들릴 거야. 그리고 정말 죽일 생각이었다면 바다에 던져버리지.”
“아, 그래서 바다에 들어갔을 때, 그렇게 난리를 쳤던 거구나.”
재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훈이 다비와 재하를 번갈아 보며 다정한 미소를 보였다.
“어떻게, 둘은 잘 해결된 거야?”
“어. 덕분에. 고맙다.”
“고맙긴. 음, 재하야.”
“네. 형.”
“우리 다비가 속이 좀 꼬이긴 했어도 착한 녀석이야. 그러니까 우리 다비 잘 챙겨줘.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이 녀석 친구라서 그래. 다비가 또 아픈 건 보고 싶지 않고. 네가 그럴 녀석은 아니지만, 다비 눈에서 눈물 나게 만들면, 네가 아무리 리온이 조카라고 해도 내가 고구마밭에 묻어버릴 거야. 묻어놓고 흙은 발로 밟아 단단하게 다질 거고.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다비가 훈이한테 묻힐 거라며 무서워하던 게 그냥 농담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다정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살해 예고를 하는 훈을 보며 재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행복해서 흘리는 눈물은 괜찮아요?”
“어. 그건 우리 리온이도 자주 그러니까 허용해줄게.”
“고맙습니다.”
다비가 듣다가 안 되겠는지 훈의 튼실한 팔뚝을 후려치면서 질색했다.
“내가 네 새끼도 아니고…. 무슨 상견례 하냐? 재하를 네가 왜 묻어? 묻어도 내가 묻을 거니까 재하한테는 손대지 마. 그리고 얼른 올라가자. 리온이 기다리겠다.”
“리온이한테는 늦는다고 먼저 연락해놨지. 그래도 보고 싶으니까 먼저 올라간다.”
훈은 다비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먼저 윗길로 오토바이를 몰고 올라갔다. 다비는 윗길로 사라지는 훈을 보다가 재하의 손을 잡았다.
“재하야, 나는 쟤들처럼 예쁜 사랑은 할 줄 몰라. 그래도 네가 나한테 보여준 만큼 나도 열심히 노력해서 보여줄게.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네 진심 많이 심어주길 바란다.”
“네. 그건 제가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의미로 뽀뽀해도 돼요? 한 달이나 못했더니, 부족해요.”
“미친, 한 발자국에 한 번. 뭐, 이런 거라도 하면서 가자고?”
“역시 형은 천재인 것 같아요. 정말 그래도 돼요?”
“그래. 그래라. 오늘부터 1일이니까 그런 것도 허락하는 거야.”
재하는 “고마워요, 형.” 하더니 다비에게 곧장 입을 맞췄다. 둘이 훈의 집까지 올라가는 동안 몇 번의 뽀뽀를 했는지는 전부 세어본 재하만 알고 있었다.
리온은 현관을 열어주다가 다비와 재하의 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싸웠어? 훈이는 흙투성이로 들어와서 지금 씻고 있는데…. 너희는 왜 그래? 다 젖었어. 아래 욕실 비었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씻어.”
재하가 걱정하는 리온을 보며 안심시켰다.
“싸우다니. 내가 누구하고 싸워.”
“힉! 재하야. 얼굴이랑 손이 왜 그래? 누가 그랬어?”
리온의 말에 재하의 얼굴을 보던 다비가 더 놀라서 재하를 붙잡고 얼굴을 살폈다. 밝은 곳에서 재하를 보자, 어두운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상처가 눈에 보였다. 일수가 버둥거리며 재하의 몸 여기저기를 긁어댔는지 피부가 드러난 곳은 온통 긁힌 자국투성이였다. 다비가 미간을 찌푸리며 상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오. 미친놈이 진짜. 손도 모자라서 잘생긴 얼굴까지 이 모양을 만들어놨네. 안 되겠다. 팔이라도 부러뜨려야지.”
자신의 상처에는 폭력을 참던 다비가 제 상처에는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말에 재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 남자와 다시 만나게 두는 건 싫어서 재하는 얼른 엄살을 부렸다.
“형, 많이 아파요. 씻고 나면 형이 치료해줘요. 어디 가지 말고.”
“많이 아파? 그래. 그러자. 어디 안 갈게. 네가 먼저 씻어. 난 훈이 놈 씻고 나오면 씻을게.”
둘을 살펴보던 리온이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잔뜩 속상해했다.
“재하야. 누가 그런 거야? 우리 섬에 그런 짓 할 만한 사람 없는데. 누가 우리 재하를. 빨리 고소해. 누군지 몰라도 찾아서 평생 콩밥 먹게 해줄 거야. 큰형님한테 전화해야겠다.”
재하가 얼른 리온의 손을 잡고 웃어 보였다. 아버지가 아시면 자신의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그 남자의 인생이 끝날 테니 그건 싫었다.
“아니야, 삼촌. 다 해결했어. 훈이 형도 그것 때문에 흙투성이로 들어온 거고. 조용히 처리했으니까 그만 화내.”
2층에서 씻고 내려오던 훈이 재하의 말을 듣고 1층으로 헐레벌떡 뛰어 내려왔다.
“우리 리온이가 화를 냈어? 왜? 무슨 일 있었어? 리온이 화내는 거 보고 싶었는데…. 리온아, 지금 화난 거야? 얼굴 좀 보자. 누가 우리 리온이 화나게 했어?”
“훈아, 재하 얼굴하고 손 좀 봐. 네가 해결했다는데 무슨 말이야? 누가 감히 우리 재하를 이렇게 만들어 놔. 나 지금 너무 속상해.”
“…아, 내가 혼내줬어. 두 번 다시 그러지 못할 거야. 우리 리온이는 어떻게 화내는 것도 이렇게 예쁠 수가…. 아니지. 재하하고 다비 얼른 가서 씻고 와. 옷 챙겨서 문 앞에 둘 테니까. 감기 걸릴라. 씻고 나오면 재하는 치료하고.”
다비는 재하를 보며 혀를 쯧, 찼다. 저 때문에 생긴 상처라 속상해 죽을 맛이었다. 재하는 걱정하는 다비를 안심시키려는 듯 생글거리며 다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씻으러 간 사이에 훈은 다비와 재하가 갈아입을 옷을 욕실 문 앞에 두고, 놀란 리온을 안아주고 달래주었다. 명절이라 술 마신 사람하고 시비가 붙어서 그랬다는 그럴싸한 변명을 둘러댔지만, 리온에게 거짓을 고한 게 못내 미안했다. 하지만 당장 경찰을 부르겠다며 아르릉거리는 리온에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리온에게 사과했다.
재하가 먼저 욕실에서 나왔고, 한참 후에 다비가 빨갛게 익은 채 욕실에서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푹 익은 다비의 얼굴이 반가워 재하는 입가에 미소가 잔뜩 걸렸다. 다비는 헤실거리는 재하를 보자 어딘가 부끄러워서 훈이 챙겨준 약을 손에 쥐었다.
“뭐 해. 얼른 와서 치료해.”
“네. 훈이 형이 해주겠다는 거 사양하고, 형한테 받으려고 기다렸어요.”
“…그래. 잘했다고 칭찬해줘야 하는 거지?”
“네. 빨리 칭찬해줘요.”
“어. 착하다.”
다비는 영혼 없이 재하의 머리를 툭툭 쳐주고, 소파에 앉아 상처에 약을 발라 주었다. 얼굴의 상처를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미간이 자꾸 구겨지자 재하가 다치지 않은 손을 들어 다비의 미간을 쓱쓱 펴주었다.
“형은 인상을 써도 잘생겼네요.”
“뭐, 뭐래. 손 이리 내.”
한층 더 붉게 물든 다비의 얼굴을 보자 재하는 오랜만에 불끈거렸지만, 이곳이 삼촌 집이라는 걸 잊지 않았다. 다비는 재하의 손을 보더니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재하가 보기에는 그냥 살짝 긁힌 정도인데 다비의 눈에는 살점이라도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씨…. 이거 연주 못 하는 거 아니냐? 진짜 병원 안 가도 돼?”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손등도 살짝 까진 것뿐인데요. 어? 형.”
재하는 제 손을 치료해주던 다비의 손을 놀란 눈으로 보다가 다시 방실 웃었다.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반지가 다비의 손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반지 끼웠네요.”
“…내 거니까. 끼우라고 준 반지인데 끼고 있어야지.”
“아깐 안 끼고 있어서….”
“음식 하느라 빼놓은 거야. 평소엔 손에 끼고 있었어.”
어째서 이곳이 삼촌네 집인 것일까. 재하는 그게 너무 아쉬웠다. 그래도 다비가 제 손을 조물거리며 치료해주는 건 행복해서 입가에 미소는 계속 지어졌다.
훈과 다비가 만들어 놓은 안주를 옮기던 리온이 소파에 마주 앉아 있는 재하와 다비를 보더니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원래부터 친하긴 했는데, 오늘따라 더 친해 보이는 모습에 자꾸 눈이 향했다.
“리온아, 그거 갖다 놓으면 이거…. 뭐 보고 있어?”
안주를 그릇에 옮겨 담던 훈이 자리에 멀뚱히 서 있는 리온을 보고 묻자 리온이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재하가 저렇게 웃었던가? 재하의 웃는 모습을 많이 봤던 리온이었지만, 저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꼭 사랑스러운 걸 보는 것처럼 따뜻하고 다정한 미소였다.
네 명은 거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술을 마실 준비를 했다. 회와 육전, 해물파전과 회무침이 메인 안주였고, 그 외에 다른 안주들로 상이 가득했다. 훈은 지수의 할머니에게 배운 오지도 곡주를 주전자에 가득 담아 거실로 나왔다.
“술과 안주는 넉넉하게 있으니까 많이 먹어라.”
술잔으로 쓰는 대접에는 막걸리가 가득 차올랐다. 이번에는 재하의 잔에도 술이 가득했다. 음식을 준비한 훈이 먼저 술잔을 손에 들었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고, 하는 일 지금처럼 전부 잘되길 바라. 건강이 가장 중요해. 즐기면서 잘 먹고 행복하게 살자.”
훈의 건배사와 함께 모두 대접을 부딪쳤다. 재하는 찰랑거리는 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훌쩍거렸다. 다비가 마시던 술을 탁자에 내려놓고 재하를 살폈다.
“아니, 술을 보다가 갑자기 왜 울어. 첫 술이 그렇게 좋으냐?”
“기뻐서요. 제 짝사랑이 드디어 결실을 보고 형과 오늘부터 1일인데, 그걸 기념하는 것처럼 오늘 이렇게 술도 함께 마시니까…. 그게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네 눈물은 정말…. 귀엽게 굴지 말고, 그만 울어.”
다비가 재하의 눈물을 소매로 닦아주는 걸 멍하니 보고 있던 리온이 뒤늦게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헉? 너희들 사귀어? 진짜? 언제부터? 우아. 난 전혀 몰랐는데…. 훈이는 알았어?”
훈과 다비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리온을 보았다. 재하가 그렇게 티가 나게 굴었는데도 제일 가까이에서 살던 리온이 지금까지 전혀 몰랐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훈은 리온을 꼭 끌어안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첼로하고 나밖에 모르는 우리 리온이 내가 정말 사랑해.”
다비는 리온의 둔함에 감탄했다.
“그 정도면 그냥 눈치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데….”
재하는 익숙하다는 듯 리온의 반응에 무덤덤했다.
“삼촌은 어렸을 때부터 관심 있는 거 외엔 시선을 안 돌려요. 대신 관심 있는 거엔 집중력이 엄청나죠. 예전에는 첼로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래도 지금은 시야가 많이 넓어진 편이에요.”
리온은 뒤늦게 재하와 다비의 손에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자신의 둔함에 민망해져 주위를 돌리기 위해 얼른 대접을 손에 들었다.
“추, 축하해. 그런 의미 깊은 술이니까 첫 잔은 원샷 하자. 언제부터 서로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이 잘 돼서 좋다. 둘 다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조카하고 친구라서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 우리 재하가 가끔 소름… 아니. 집착하는 게 심해서 그렇지 애는 착해. 다비가 그건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정말 축하해.”
리온의 축하에 다들 다시 한번 대접을 부딪치고 술을 마셨다. 다비는 재하가 술을 마시는 걸 지켜보았다. 재하는 대접에 담긴 술을 입에 가져다 댔다. 부드럽고 구수한 향이 먼저 입 안에 가득 퍼졌다. 쓰거나 독하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맛에 재하는 입을 대고 단번에 끝까지 쭉 들이켰다. 그 모습을 다비가 흐뭇하게 보았다.
“와. 이거 진짜 맛있어요. 그렇게 독하지도 않고, 음료수 같아서 술 못 마시는 사람도 제법 먹을 수 있겠는데요.”
술을 담근 건 훈인데 다비가 뿌듯해하며 재하의 입에 육전을 쏙 넣어주었다. 육전은 질기지 않고 부드러웠고 고기를 감싼 계란 덕에 고소함이 두 배였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입에서 사르르 녹아버려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육전을 처음 먹는 것도 아닌데, 이건 정말 처음 먹는 것 같아요. 식감이 어떻게 이렇게 부드럽지? 진짜 맛있어요.”
“그렇지? 이제 다시 마셔봐.”
다비가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를 재하의 대접에 콸콸 쏟아부었다. 다비가 시키는 대로 막걸리를 마시자, 입 안에 남아 있던 기름기가 말끔하게 사라지고 다시 전이 당겼다. 신기한 경험에 재하의 눈이 조금 커지는 걸 보고 다비가 옆에서 씨익 웃으며 반응해주었다.
“전이 또 당기지? 그런 식으로 계속 먹으면 막걸리 세 주전자는 그냥 사라진다.”
“이래서 오지도에서 좋은 술로 배우라고 한 거군요. 진짜 맛있는데요? 이걸 정말 훈이 형이 담갔어요? 팔아도 될 것 같아요. 술도 맛있고, 안주도 맛있고. 좋은 사람에 좋은 분위기까지…. 그동안 참고 기다리길 정말 잘했어요.”
“참느라 고생했다. 4년 동안 참느라… 아니, 해 넘겼으니 햇수로는 5년인가?”
“1,500일이요. 오늘이 딱 1,500일이에요.”
“…어. 그래. 그런 것도 일일이 다 세고 사는구나. 1,500일 동안 참느라 고생했다. 다들 먹자.”
재하의 첫 술 감상을 시작으로 술과 덕담이 오가는 훈훈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술을 좋아하지만 하찮은 주량을 자랑하는 리온은 훈의 관리로 조금씩 홀짝거리며 술을 마셨다. 술 대신 안주를 열심히 집어 먹다가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던 리온이 “우아.” 하며 감탄하기 시작했다.
“눈 온다.”
리온의 말에 세 명이 바깥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하늘에서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따뜻한 곳이라 눈이 잘 오지 않는 지역이지만, 가끔 이렇게 내리는 눈이 반갑고 신기했다. 그때 훈이 뒤늦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저 훈이인데요.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네. 다름이 아니라 일수 형이 오늘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더라고요. 네. 아직 안 들어갔죠? 아. 아까 저하고 마주쳤는데, 고등학교 때 생각이 났는지 자꾸 땅에 묻어달라고 하더라고요. …네. 맞아요, 거기. 제가 지금 손님이 와 있어서 거기로 갈 수가 없어서 연락드렸어요. 지금 밖에 눈 오더라고요. 아니에요. 사과하실 필요는…. 탈출 놀이가 하고 싶다고 막무가내로 굴어서. 너무 혼내지 마시고요. 형 잘 챙겨주세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네. 회관에서 봬요.”
훈은 통화를 끊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눈에 파묻히면 좋겠지만, 그랬다가는 섬에 경찰이 오가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여기서 풀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미리 이야기해놨으니 어른들은 자식의 술주정보다 성실하고 착한 자신의 말을 찰떡같이 믿어줄 것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에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이제 마음이 편해진 사람들은 다시 앉아 술을 주고받았다. 결국, 석 잔이 한계인 리온이 먼저 기절하듯 쓰러지면서 술자리는 끝이 났다.
뒷정리를 끝내고 훈이 다비를 불렀다. 훈의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1층에서 자. 시트랑 이불은 전부 새로 빨아 놓은 거니까 그냥 자면 돼.”
“어. 알았어.”
“그리고 이건 고3 때 빚진 거. 이자 쳐서 넣었다. 잘 자라.”
“빚? 무슨 소리야.”
훈은 소파에 늘어진 리온을 안아 올려 2층으로 올라갔다. 다비는 봉지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뭐야. 이거…. 고훈 왜 이렇게 변했지?”
검은 봉지 안에는 콘돔과 젤이 들어 있었다. 예전에 자신이 선물로 준 적이 있다곤 하지만, 그게 이자까지 붙어서 돌아올 줄은 몰랐다. 봉지 안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 다비에게 재하가 가까이 다가왔다.
“형, 그게 뭐예요?”
“어. 콘돔하고 젤. 훈이 놈이 선물이래.”
“…그래요? 이거 우리가 써도 되는 거예요?”
“쓰라고 준 거 아닌가?”
재하는 1층 방을 보았다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시선을 돌리며 거리를 가늠했다. 삼촌 집인데 이래도 되는 건가 고민하다 다비의 의견을 먼저 묻기로 했다.
“저기… 형.”
“재하야.”
“네. 형.”
“오늘 이거 써볼래?”
“…어. 네?”
다비의 말에 재하는 이곳이 삼촌 집이라는 걸 그냥 잊기로 했다. 우리는 오지도라는 섬으로 놀러 온 커플이라고 세뇌하며 다비를 바라보았다.
“이거 쓴다는 이야기는…. 형 괜찮겠어요?”
“어. 오늘은 괜찮을 거 같은데. 그, 준비도 아까 다 했고….”
순식간에 얼굴이 확 빨갛게 달아오르는 다비를 보며, 재하는 실낱같은 이성이 끊어지지 않게 단단히 붙잡았다. 길게 숨을 내쉬며 다비가 들고 있는 봉지 안을 살폈다.
“100개. 이거 오늘 다 쓰면….”
“되겠냐?”
“…네. 그렇죠. 안 되겠죠. 그런데 정말 형 괜찮….”
다비는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소곤거렸다.
“장소가 낭만적이지 않아서 싫어?”
“아뇨? 아닌데요? 그럴 리가요. 형이 있는 곳이 전부 아름답고 낭만적인걸요.”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럼, 우리도 들어갈까?”
“네. 형.”
재하는 다비에게 홀린 듯 순순히 방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걸어 잠근 재하는 다비를 꽉 끌어안았다. 등에 맞닿은 재하의 가슴이 쿵쿵 요동쳤다. 등으로 전해지는 박동에 다비도 저절로 긴장되기 시작했다. 재하와 살을 맞대는 게 처음도 아닌데,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재하의 숨결마저 낯설고 자극적이었다. 재하가 다비의 목덜미와 귓가에 느른하게 입술을 내리며 낮게 속삭였다.
“형, 정말 잘할게요.”
“뭐를…. 섹스를?”
“그것도 노력하고요. 뭐든 다. 형한테는 잘해주고 싶어요. 형은 지금처럼 저한테만 예쁘다고 해주고, 귀엽다고 해줘요.”
“정말 그걸로 되겠어?”
다비가 몸을 돌려 재하와 마주 보았다. 저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죽겠다는 저 얼굴이 보기 좋아서 다비는 손으로 재하의 뺨을 어루만져주었다. 재하가 눈을 감으며 다비의 손을 붙잡고 뺨을 비벼왔다. 그리웠던 감촉에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재하야, 너만 노력하지 마. 연애는 같이 노력하는 거래. 나한테 뭐든 맞추려고 하지 마. 나도 너한테 맞춰줄 테니까.”
“형이 저한테 맞춰주기 시작하면 형은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요. 지금도 형이 사귀어준다고 해서 당장 제 곁에 묶어두고 싶은걸요. 이런 건 맞춰주지 말고 혼내요.”
“그래. 네가 그래도 상식은 있어서 다행이다. 그건 칭찬해줄게. 그나저나, 술 마셨는데 너 괜찮겠냐?”
다비가 떠보듯 피식 웃으며 재하를 보자 재하가 다비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하반신을 바짝 맞붙이고 예쁘게 눈웃음쳤다.
“형이 생각하기엔 어떤 것 같아요?”
다비는 뺨을 만지던 손을 미끄러지듯 움직여 재하의 뒤통수를 감싸고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입술이 맞붙을 만큼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다비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좋은데?”
“형, 사랑해요.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게요.”
재하는 곧장 다비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다비가 재하의 티셔츠를 붙잡아 걷어 올리자, 재하의 손길도 바빠졌다. 티셔츠를 벗길 때만 입술이 잠깐 떨어졌을 뿐, 재하는 침대로 향하는 동안 떨어지지 않고 바짝 붙은 채로 다비의 옷을 전부 벗겨냈다.
다비를 침대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 한참을 다비와 눈을 맞췄다.
“센 척했지만, 정말 보고 싶었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형한테 연락하고 싶어서 혼났어요. 백 일을 함께 있었는데 갑자기 형이 없어지니까 하루가 천 년 같았어요.”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어딘가 조금은 퀭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비 역시 고민하는 시간 동안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재하에게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휴대폰을 계속 들고 다녔고, 잠을 자다가도 옆자리가 휑해서 깨어나기 부지기수였다. 밥을 먹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고, 재밌는 이야기를 들어도 재미있지 않았다. 이렇게 긴말을 다 하기엔 조금 쑥스러워서 다비는 재하의 머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나도 그랬어. 대답 늦어서 미안해.”
“이제 괜찮아요. 전부 다 괜찮아졌어요. 내가 형 거니까 그 시간도 이제 소중해졌어요.”
재하는 제 머리를 개 쓰다듬듯 쓸어대는 다비의 손을 붙잡아 내리고 손바닥에 입을 쪽쪽 맞추었다. 손바닥에 닿는 부드러운 입술에 손가락이 저절로 움츠러들자, 재하는 다비와 눈을 맞춘 채 손가락을 핥아 올렸다. 손가락 틈으로 보이는 붉은 혓바닥이 새삼 꼴렸다. 다정하게 웃는 주제에 눈빛은 벌써 저를 통째로 씹어 먹을 듯 이글거렸다.
아, 기다리고 있는 거구나. 개 같은 유재하는 지금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다비는 잘생긴 미소를 지으며 재하에게 명령했다.
“뭐 해. 평소처럼 물고 빨아야지.”
다비의 명령에 재하는 곧장 입을 맞추며 다비를 물고 빨기 시작했다. 100일 동안 물고 빨았던 몸인데도 처음처럼 두근거리고 설렜다. 낯선 바디 워시 향과 섞여 은은하게 다비의 체향이 느껴졌다. 익숙한 체향을 찾아낸 재하는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형 냄새. 정말 그리웠어요.”
코끝으로 다비의 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달아오른 피부는 벌써 어깨까지 빨갛게 익어 있었다. 자신 때문에 흥분한 다비가 너무 좋아서 재하는 참지 못하고 다비의 목을 잘근 깨물었다.
“아으, 또 버릇없어졌네.”
“한 달이나 못 해서 다 잊어버렸어요.”
“교육을 다시 해야 하나.”
“기분 좋게 깨무는 것도 안 돼요?”
다비의 가슴에 턱을 대고 저를 물끄러미 보며 애원하는 재하의 얼굴이 귀여운데 야해서 죽을 맛이었다. 다비는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분 좋게….”
허락을 받자마자 재하는 곧장 다비의 가슴을 입에 담았다. 100일 동안 물고 빨렸던 몸은 재하에게 빨리 반응했다. 혀로 유두를 굴리자 돌기가 금세 바짝 솟아올랐다. 이로 잘근 깨물었더니 다비의 입에서 숨이 터져 나왔다. 다비의 한숨에 팔뚝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재하를 다비가 손으로 밀어 다른 곳으로 강제 이동시켰다. 재하가 피식 웃으며 기꺼이 옮겨진 위치를 입에 머금고 세게 빨았다. 또 다른 성감대인 옆구리로 직접 이동시키는 다비가 너무 좋아서 이번에도 이를 세워 콱 깨물어 주었다. 다비의 허리가 들썩이더니 듣기 좋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흐, 읏. 씹….”
잇자국이 선명한 옆구리를 혀로 핥으며 달래주던 재하는 곧장 다비의 하체 쪽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잔뜩 발기한 다비의 성기에서 맑은 액이 주룩 흐르고 있었다. 당장 입에 머금고 싶었지만, 이제 겨우 상체만 괴롭혔을 뿐이라 재하는 꾹 참았다. 제일 맛있는 건 마지막에 먹는 평소 성격이 이럴 때도 나왔다. 다비의 발등과 복숭아뼈를 잘근 깨물며 서서히 입술을 위로 올렸다. 다비는 재하의 행동에서 눈을 떼지 않고 기분 좋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허벅지 안쪽에 빼곡하게 잇자국을 남기자, 다비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요구했다.
“애태우지 말고, 빨리 빨아.”
재하가 눈을 곱게 휘며 다비의 성기를 입에 담았다. 재하의 입 안으로 들어가자 다비는 재하의 머리를 쓸어주며 감촉을 즐겼다.
“하, 진짜 좋아.”
다비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건 기분 좋을 때 자주 해주는 버릇이었다. 재하는 자신을 예뻐해 주고 있는 다비가 참을 수 없이 좋았다. 다비의 허리가 저절로 들썩일 때, 재하가 몸을 물리며 다비의 성기를 입에서 빼내었다.
“형, 오늘은 전부 빨아도 돼요?”
“…뭐? 뭐래. 언젠 안 그랬던 것처럼 말한다?”
“생각해보니까 전부는 아니었더라고요.”
“왜. 눈알이라도 핥을 생각이야?”
“아뇨. 그런데 거기도 안 핥아봤네요. 거긴 나중에 핥아봐도 돼요?”
“안 돼.”
“그럼 오늘은 거기 빼고 다 허락해줘요.”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서 다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갑자기 재하가 다비의 허리 사이에 쿠션을 밀어 넣었다. 하체가 붕 뜨는 감각에 다비가 당황하며 상체를 반쯤 일으키고 재하를 바라보았다.
“뭐….”
재하는 기둥을 손으로 훑으며 음낭 아래 회음을 혀로 꾹 누르며 핥아 올렸다. 꼬리뼈를 타고 찌릿한 감각이 머리끝까지 치솟자, 다비가 얼른 재하의 머리를 붙잡으며 도리질 쳤다.
“재하, 재하야….”
“허락했잖아요.”
“거기, 거기…. 이상… 이상해.”
“좋은 쪽으로? 나쁜 쪽으로?”
질문을 했으면 대답을 들을 것이지, 재하는 질문만 던져 놓고 하던 걸 계속 이어갔다. 금방이라도 회음 아래에 고개를 파묻을 것 같이 굴어서 다비는 지금 느끼고 있는 감각이 좋은지 싫은지조차 말하기 힘들었다.
“읏, 모르겠어. 하읍.”
“형 지금 앞에 엄청나게 젖었어요. 내가 보기엔 좋은 것 같은데. 소리 들려요?”
일부러 들으라는 듯 재하는 기둥을 손으로 감싸고 흔들기 시작했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자극적인 감각에 민망해진 다비가 손을 붙잡았다.
“벌써 싸면 쪽팔리니까 그만해. 밤은 길잖아.”
다비가 잘생긴 미소를 무기로 사용했다. 재하는 예쁜 미소로 답하며 다비의 손에 입을 맞췄다.
“형이 원하신다면….”
재하는 다시 다비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이번에도 성기가 아닌 회음을 빨아대기 시작했다. 다비는 재하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재하가 이러는 게 어쩐지 창피했다. 무슨 짓을 해도 괜찮지만, 이건 정말 민망한 행위였다.
“동정이 너무 하드하게 노는 거 아니냐? 이러다 진짜 구멍까지 빨 생각이야?”
“그러면 안 돼요? 전 처음부터 해보고 싶었는데. 다른 건 형이 긴장해서 못했지만, 이건 왠지 괜찮을 것 같아서요. 만약 형이 힘들 것 같으면 바로 이야기해줘요. 억지로 하고 싶진 않으니까요.”
이 와중에도 제 생각을 해주는 녀석의 말에 다비는 갈 데까지 가보라는 심정으로 허락해주었다. 정말로 재하의 혀가 곧장 입구로 향했다. 다비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촉에 몸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숨을 크게 삼키다가, 차마 지켜볼 수 없어 시트에 누워버렸다. 부드러운 것이 제 뒤를 핥고 또 핥아댔다. 발가락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고 다리가 자꾸 오므라들었다. 질척거리다 못해 난잡한 소리에 온몸이 오싹거렸다. 낯선 쾌락이 주는 감각에 다비가 버티지 못하고 신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아, 재, 하야. 읏. 그거…. 그거, 하읏.”
지금까지 입구에 손이나 성기가 닿는 것만으로도 잔뜩 굳었던 다비가 처음으로 기분 좋아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재하는 더욱 욕심이 났다. 혀를 꼿꼿하게 세워 부드럽게 녹아버린 입구 안으로 밀어 넣자, 다비의 허리가 격렬하게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하, 으…. 이거… 뭐야. 아으읏. 재하야. 그거 진짜 이상…. 핫.”
다비가 다리를 바짝 오므리며 재하의 머리를 붙잡았지만, 재하는 다비의 다리를 활짝 벌려 붙잡고 더 집요하게 빨아댔다. 다비는 도리질 치며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으려 애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신음이 터져 나올수록 밑에서 나는 소리가 더 난잡해졌다. 부끄러우면서도 좋아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재하야. 으, 제발…. 못 참겠어.”
다비는 손을 뻗어 제 성기를 붙잡고 훑기 시작했다. 재하는 웃으며 다비의 손을 꽉 붙들었다.
“형, 아직이요. 지금 여기 엄청 부드러워요. 손가락 넣어봐도 돼요?”
다비는 사정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 고개를 얼른 끄덕거렸다.
“넣어. 빨리. 오늘은 내가 긴장하더라도 넣어줘.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니고 정말 하고 싶어서 그래. 너하고 처음 하는 거라서 긴장하는 거야. 알았어?”
“네. 대신 못 하겠으면 참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줘요. 우리 꼭 섹스 아니어도 다른 거로 충분히 즐길 수 있으니까요. 형이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알았으니까 어서….”
재하는 곧장 몸을 일으켜 다비에게 입을 맞췄다. 입 안을 헤집으며 재하는 손에 젤을 듬뿍 짜냈다. 키스는 계속 이어졌고, 다비는 재하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입맞춤을 받아들이며 몸에 힘을 빼려고 노력했다. 재하가 입구에 손을 댔다. 움찔거리는 감각이 느껴졌지만, 다비가 계속하라는 듯 재하의 혀를 제 입 안에 가두고 물고 빨아댔다.
녹진해진 입구는 금세 재하를 받아들였다. 손가락 하나를 시작으로 재하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입구를 넓혔다. 끝까지 넓히는 동안 다비는 예전처럼 긴장하거나 겁먹지 않았다.
“형, 고마워요. 받아들여줘서. 사랑해요.”
대단한 일도 아닌데 기뻐하는 재하를 보자, 다비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이 직접 준비하는 것과 달랐다. 넓히는 감각조차 기분 좋아진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다비가 다시 신음을 흘리자 안을 파고든 손가락이 더욱 분주해졌다.
“여기 어디에….”
재하는 손가락을 굽혀 안을 부드럽게 만지며 무언가를 찾아다녔다. 다비가 크게 퍼덕이는 걸 보고 재하가 예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형, 여기 기분 좋아요? 만져본 적 있어요?”
“없어. 없는데… 금방 쌀 것… 같아. 기분 나쁜 건 아니야. 좋아.”
“그럼 이번엔 싸요. 형 싸고 나면 바로 넣을 거예요.”
재하가 손으로 전립선을 누르며 비벼주자 다비의 몸이 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반응이라 재하는 다비가 느끼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가슴 언저리까지 빨갛게 열이 오른 다비가 보기 좋았다. 저 때문에 몸을 떨며 매혹적으로 변하는 눈빛이 좋았다. 사정감에 들떠 성기를 스스로 흔드는 야한 모습에 재하가 신음을 흘렸다.
“하, 형이 말하는 꼴린다는 게 뭔지 알겠어요. 진짜 꼴리네. 빨리 형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아으….”
다비가 입술을 꽉 깨물고는 흔들던 손을 멈췄다. 허벅지가 잘게 경련하더니 진한 액이 가슴까지 팍 튀어 올랐다. 재하는 곧바로 성기에 콘돔을 끼고 다비의 다리 사이에 몸을 밀어 넣었다.
“형. 이제 넣어도 돼요?”
“아직… 나 방금 쌌….”
말리려고 했는데, 재하의 눈이 맛이 가버렸다. 당장 넣고 싶어 죽겠다는 눈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여기서 넣지 말라고 하면 물어뜯을 것 같아서 다비는 고개를 얼른 끄덕여주었다. 허락이 떨어지자 재하가 크게 심호흡했다.
재하는 다비의 허락에 울고 싶었지만, 울면서 좆 세우지 말라는 말이 떠올라 감격과 기쁨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젤을 잔뜩 짜서 제 성기와 다비의 입구에 듬뿍 펴 바르고 재하는 성기를 입구에 맞췄다. 귀두로 입구와 회음을 느릿하게 비비며 다비의 긴장이 풀어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 모습이 먹을 것을 눈앞에 두고 기다리는 개 같은 표정이라 다비는 기특함에 다리를 스스로 벌려주었다. 아찔한 절경에 재하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형, 이제 넣을 거예요.”
“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넓힌 입구를 가르고 재하의 성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귀두부터 안으로 파고드는 감각에 다비는 저도 모르게 시트를 움켜쥐었다. 느릿하게 들어오는 감각이 낯설었다. 게다가 벌어지는 감각이 너무나 양심 없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씨발. 무슨 좆이….”
“…아파요?”
“아니. 아픈 건 아닌데. 대체….”
천천히 들어오는데 안을 꽉 메우는 압박감이 어마어마했다. 한계까지 벌어진 것 같은데도 마취라도 한 것처럼 아프진 않았다. 그러면서도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생생했다. 양심 없는 크기에 욕지거리가 튀어나왔지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쪽이라서 곤란했다.
“계속해. 기분 좋아. 좋아서 그랬어.”
“급하게 넣으면 안 돼요.”
“왜. 내 배가 뚫려서 죽을 것 같아서 그래?”
“…형의 모든 부위는 소중하니까.”
부정하지 않는 말에 괜히 오싹해서 다비는 입을 다물었다. 재하는 다시 천천히 밀어 넣으며 미간을 구겼다.
“하, 손으로 더 풀어줄걸. 너무 좁아. 형, 힘 좀 더 빼봐요. 아프게 하지 않을 테니까.”
재하는 다비의 아랫배를 손으로 쓸어주며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긴장을 풀어주려고 애썼다. 자신이 제일 급할 텐데 저를 우선으로 해주는 모습이 기특해서 다비는 배를 어루만지는 재하의 손을 잡고 다리로 재하의 허리를 감쌌다.
“그냥 넣어. 괜찮아. 거의 다 들어온 거 아니냐?”
다비의 질문에 재하가 다비의 손을 다리 사이로 이끌어 연결된 부위를 직접 만지게 했다. 안이 꽉 들어찬 것 같은데 아직도 들어가지 못한 기둥이 느껴졌다. 경악한 눈으로 바라보자, 재하가 배시시 웃으며 부끄러워했다.
“이제 반 넣었어요.”
“씨발. 진짜 양심 없는 새끼네.”
“점점 익숙해지면, 끝까지 넣기로 하고 오늘은 이대로 할게요. 지금도 조금만 움직이면 안쪽에서 조여대서 움직이고 싶어요.”
“그래.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네가 알아서 해. 윽.”
재하가 그대로 허릿짓을 시작하는 바람에 다비는 곧장 몸을 뒤로 젖히고 재하의 움직임을 받아들였다. 젤을 얼마나 쓴 건지 질척이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한계까지 벌어진 입구로 재하가 드나들고 있었다. 성기를 맞잡고 비빌 때보다 더 야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재하의 표정을 보자 비로소 섹스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아픔은 조금도 없었다. 사정으로 반쯤 죽어 있던 성기가 힘을 받아 꼿꼿해질 만큼 정말로 좋은 기분만 느껴졌다. 섹스가 이렇게 기분 좋은 행위라는 걸 27살이 돼서야 몸으로 직접 알게 되었다. 전부 재하가 노력해준 결과였다.
“재하야, 읏.”
“하, 형. 진짜, 좋아요. 형이 기분 좋아해서, 읏. 못 참겠어요.”
“더 움직여도 괜찮아. 기분 좋으니까 계속….”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았다. 재하의 난폭한 허릿짓에 애정이 가득했다. 하나로 이어진 이 순간이 눈물 나게 좋아서 재하가 계속 움직여주길 바랐다. 다비는 제 허벅지를 붙잡은 재하의 손을 붙잡아 제 품으로 잡아당겼다.
재하가 엎어질 듯 다비의 품으로 안겼다. 다비는 재하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허리에 감싼 다리를 더 꽉 조이며 재촉했다.
“참지 말고 계속해. 다 집어넣어도 괜찮아. 네가 생각하는 거보다 나 튼튼하니까.”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재하는 다비를 꽉 끌어안고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비는 재하의 귓가에 재하만 들을 수 있게 신음을 터트려 주었다. 기분 좋다는 그 음성이 지금까지 들었던 세상의 모든 음악보다 듣기 좋아서 재하는 정말 울고 싶었다. 자신을 받아들여준 다비가 고맙고 사랑스러워서 재하는 다비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속삭여 주었다.
재하의 성기가 기분 좋은 곳을 전부 비벼대고 있어서 다비의 사정은 빨리 찾아왔다. 재하는 섹스로 절정에 달한 다비의 표정이 보고 싶어 상체를 일으켰다.
“형, 쌀 것 같아요?”
“아, 응. 만져줘.”
재하가 허리를 움직이며 다비의 성기를 몇 번 훑어주자, 다비의 몸이 경련하며 금방이라도 사정할 듯 꿈틀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조이는 안쪽이 더 바짝 조여지자 재하도 미간을 구기며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재하야.”
“형, 싸도 돼요.”
“윽…!”
다비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곧이어 탁한 액이 다시 울컥 쏟아졌다. 잔뜩 붉어진 얼굴과 기분 좋아 보이는 다비의 표정에 재하도 움직임을 멈추고 뒤이어 다비의 안에서 사정했다. 자신의 성기를 바짝 조이며 경련하는 안쪽의 느낌이 좋아서 재하는 그대로 몸을 숙이고 다비의 뺨과 입술을 물고 빨아대며 여운을 즐겼다.
“형, 고마워요. 제가 많이 사랑해요.”
“하아. 나도 좋아해. 그리고 고마운 게 아니라, 좋았다고 하든가. 고맙다고 하니까 이상하잖아.”
“그럼, 좋았어요. 형만 괜찮다면 저 다시 세우고 또 하고 싶을 정도로요.”
말로는 허락을 구하면서 눈으로는 더 하고 싶다고 잔뜩 초롱초롱하며 어필하고 있었다. 역시 미친 게 맞는 것 같았다. 두 번이나 사정해서 피곤했지만 다비는 저 개 같은 유재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저를 위해 오랜 시간 참았으니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더 해도 돼.”
다시 2차전에 돌입하고, 새벽이 올 때까지 몸을 섞고 나서야 재하가 떨어져 나갔다.
***
피곤에 지친 다비가 침대에 힘없이 누워, 양심 없는 유재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좋으냐?”
재하가 다비의 몸을 닦아주며 배시시 웃었다.
“행복해요.”
배시시 웃던 녀석이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너무 행복해서, 형이 저 버릴까 봐 겁나요. 조금 전에는 너무 좋아서 정신없이 섹스했는데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아서.”
버림받기 싫다는 재하는 무슨 상상을 했는지, 금방 눈썹을 툭 떨어트리고 다비를 보았다. 재하가 울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다비는 고개를 저으며 얼른 양팔을 벌렸다.
“이리 와.”
재하가 다비에게 폭 안기자, 다비가 재하의 등을 쓸어주며 달래주었다.
“내가 처음 카메라를 선물 받은 게 열세 살이었어. 초보라서 험하게 다루긴 했어도, 지금도 내 방에 당당하게 전시되어 있어. 금방 부서질 것 같아서 사용하진 않지만, 나는 내 손에 들어온 건 절대 안 버려. 너도 마찬가지야. 내가 버릴까 봐 무섭단 생각하지 마. 난 절대 너 버릴 생각 없으니까.”
“카메라하고 동급이라니…. 정말 영광….”
“야, 그걸 기뻐하면 어떡하냐? 이거 진짜 사고방식이 왜 이래. 넌 내 애인이니까 절대 안 버릴 거라는 소리에서 기뻐해야지.”
“그럼 카메라보다 제가 더 위예요?”
“당연한 거 아니냐?”
재하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삭막하게 굴었으면 얘가 이러나 싶어서 다비는 미안한 마음에 재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카메라와 동급이 아니라는 걸 새겨주려고 다비는 재하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들려주었다.
“바다에 카메라하고 네가 빠지면 너부터 구해줄게.”
“흡. 사랑해요, 형.”
감격한 재하가 다비를 숨 막히게 끌어안았다. 그 갑갑함이 기분 좋았다.
어쩌면 열일곱 살 유재하가 제 손에 떨어졌을 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덩치 큰 녀석이 우는 게 꼴 보기 싫고 질색이었던 자신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재하가 우는 건 이상하게 괜찮았으니까 말이다. 꽉 닫힌 제 마음을 열고 들어와 준 재하가 고맙고 또 고마웠다. 받은 만큼 재하에게 잘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 생각을 끝으로 다비는 환해지는 방을 보며 잠이 들었다.
***
재하는 버릇처럼 제 옆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더듬어도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자 저절로 눈이 번쩍 떠졌다. 처음부터 혼자 잤던 것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방에 재하는 지난밤 일이 꿈이었단 착각이 들었다. 그게 꿈이라면 정말 중증이었다. 그렇게 생생한데 그게 꿈일 리가 없었다.
연인과 함께 보내고 일어나자마자 빈자리를 보는 건 너무 괴로웠다. 혹시 지난밤 너무 무리해서 병원에 실려 간 건 아닐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재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문에 달력을 찢어 뒷면에 휘갈긴 메모가 붙어 있는 걸 발견한 재하는 쏜살같이 문 앞으로 뛰어갔다.
『마을 회관 간다. 일어났으면 씻고 회관으로 와.』
간단한 글과 회관 약도가 그려져 있는 걸 보고 나서야, 놀랐던 마음이 진정되었다. 곤히 잠든 자신을 깨우기 미안해하며 이런 글을 썼을 다비를 생각하자 입가가 느슨해졌다.
“형은 글씨까지 잘생겼네. 그림도 잘 그리는구나.”
재하는 다비가 남긴 메모를 휴대폰에 찍어 저장하고, 곱게 접어 짐 가방에 넣어두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오전이었다. 이장 아들 어쩌고 하더니, 불려 나간 모양이었다. 다비가 더 힘들었을 텐데 이런 일에 불려 나간 게 속상했다. 빨리 씻고 회관으로 나갈 준비를 끝냈다.
밖으로 나가자 입김이 피어올랐다. 눈이 그치고 하루 사이에 기온이 많이 떨어졌다. 밤새 내린 눈이 제법 쌓여 있었지만, 길은 언제 치웠는지 쓸어낸 흔적이 가득했다. 이쪽 길에는 훈의 가족들만 살고 있어서 집이 두 채밖에 없는데도 넓은 길은 전부 청소되어 있었다. 정말 부지런한 곳이었다.
다비가 알려준 마을 회관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외부인인 자신이 들어가도 되나 망설이고 있는데 회관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떡국 모자라? 더 퍼야 해?”
다비의 목소리였다. 재하는 홀린 듯 소리가 나는 쪽으로 뛰듯이 걸었다. 회관 뒤편에서 다비가 두툼한 잠바를 입고 커다란 가마솥에서 떡국을 들통에 퍼 담고 있었다. 허리를 숙였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걱정돼서 곧장 곁으로 다가갔다.
“형, 여기서 뭐 해요?”
“어, 왔어? 타이밍 좋게 왔네. 떡국 먹어라.”
“국자 이리 줘요. 제가 할게요. 힘들잖아요.”
“뭐래. 네가 생각하는 거보다 튼튼하다고 말했잖아. 안 힘들고 개운하니까 걱정하지 마. 조금만 기다려. 네 떡국도 퍼줄게.”
리온이 회관에서 나와 다비를 찾았다.
“다비야. 떡국 조금만 담아. 한 세 그릇 정도만 통에 덜어…. 재하 왔네. 잘 잤어?”
“응. 삼촌도 여기서 일하고 있는 거야?”
“이게 왜 일이야. 같이 하는 거지. 무거운 것도 아니고. 마을 행사는 다 재미있어서 섬에 왔을 때 행사 있으면 참여하는 편이야. 나 방금 어른들한테 세배하고 세뱃돈 받았어. 여긴 서른 살 이하는 애기라고 다 세뱃돈 준다?”
리온이 복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몇 장을 꺼내며 재하에게 자랑했다. 요즘 세상에 천 원짜리로 뭘 살 수 있다고 저렇게 신이 났는지 재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리온이 싱글벙글하고 있는 게 보기 좋아 같이 따라 웃었다. 그사이 다비가 떡국을 들통에 퍼 담아 리온에게 건네주었다.
“넉넉하게 담았어. 네 그릇 정도 덜 수 있을 거야. 모자라면 더 이야기하라고 전해줘. 솥에 아직 떡국 많아.”
“응!”
리온이 들통을 들고 회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연기가 자욱한 곳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리온아, 가기 전에 수육 먹고 가. 떡국 다 돌리면 수육 배달해야 하니까 따뜻할 때 얼른 먹어.”
“수육이다! 먹을래!”
“우리 리온이 주려고 한 덩이 빼놨지.”
“훈아. 진짜 너 너무 좋아.”
훈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육을 커다란 도마에 올려서 썰고 있었다. 리온은 훈에게 가자마자 입을 벌리고 썰어진 고기를 날름 받아먹었다. 재하는 이런 광경이 낯설어 계속 신기한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설날에 전부 모여서 이렇게 보내요?”
“여긴 혼자 지내는 어르신들이 많은 섬이라 그래. 요즘은 젊은 사람도 늘긴 했지만, 어르신들은 적적하시잖아.”
“진짜 가족처럼 지내는군요. 이래서 다들 친하게….”
말을 하던 재하가 입을 다물고 매서운 표정으로 회관을 두리번거리며 잔뜩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요? 그 사람도 여기 왔어요?”
다비가 솥뚜껑을 닫다가 재하의 말에 갑자기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어제 물에 빠지고 땅에 묻혀서 지금 앓아누웠대. 아줌마가 그러시는데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애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훈이한테 오전 내내 미안해하시더라. 아저씨한테 오밤중에 빗자루로 맞았다고. 뭐, 그게 아니더라도 쪽팔려서 지가 여길 어떻게 와.”
“안 왔군요. 다행이네.”
“그러게. 왔으면 팔 좀 부러트리려고 했더니. 손은 괜찮아? 자는 사이에 소독 다시 해놨는데.”
“괜찮아요. 저보다 형이 더 걱정인데.”
남자가 이곳에 없다는 게 좋았고, 다비가 제 손을 걱정해주며 밝게 웃고 있어서 재하도 매서운 표정을 풀고 헤실 웃었다.
“훈아! 수육 다 썰었어? 리온이는 떡국만 가지고 오던데? 어머! 세상에. 재하니?”
기분 좋은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려와 재하가 몸을 돌렸다. 지수가 채반을 들고 재하 쪽으로 다가왔다. 리온이 오지도에서 고3 시절을 보낼 때, 같은 반 학우 중 한 명이었다. 섬에서 태어난 지수는 서울에 있는 큰 헤어샵에서 일하며 인기 많은 뷰티 채널을 운영하는 유명인이었다. 다비와 모아, 훈과 지수, 리온 모두 친하게 지냈고, 재하는 지수와 제주도에서 만나 친해진 사이였다.
재하는 고개 숙여 인사하며 지수를 반겼다.
“누나, 오랜만이에요.”
“응. 나도 오랜만에 본다. 리온이 따라서 온 거야?”
“네. 누나는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내지. 점점 멋있어지네. 아, 모아까지 왔으면 제주도 멤버 다 모이는 건데. 동창회도 하고 저녁에 같이 술도 마시고. 아깝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같은 소리를 내뱉어서 신기했다.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면 이렇게 생각도 같아지는 모양이었다. 재하는 이렇게까지 친한 사람들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음악적 교류로 친해진 사람들 역시 음악 관련 이야기만 나눌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비가 지수의 손에서 채반을 받아 가며 말했다.
“다음 명절에 모아 데려올 테니까 다들 모아 좀 그만 찾아라. 나 없을 때도 이렇게 찾아댔냐?”
“그래. 너 없어도 찾아댔고, 리온이 없어도 찾아댔다. 촬영 때면 잠수 타서 몇 개월 만에 소식 전하는 애가 뭘 그렇게 질투를 해. 관심받고 싶었어용?”
“아, 뭐래.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 수육 뜨거우니까 만지지 말고 거기서 기다려.”
“다음 추석에 진짜 모아 데려올 거야?”
“어. 모아도 부르고 재하도 불러서 같이 놀자.”
재하가 그 소리에 눈을 반짝거리며 다비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저, 저도 그때 와도 돼요?”
“제주도 멤버들 노래를 부르는데 그때 모여서 같이 술도 마시고 놀자. 아, 공연 있어서 안 되려나?”
“없어요. 있어도 없어요.”
“뭐래. 공연 있으면 오지 마. 지수야, 수육 받아가라.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뭐 더 필요한 거 있나?”
지수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육을 건네받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어. 수육이 끝. 왜?”
“아니, 난 이제 집에 가려고. 피곤해서 잠 좀 자게.”
“밤에 뭘 했는데 피곤해. 애들하고 술 마셨구나? 네가 그렇지.”
다비가 재하를 보며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어. 술도 마시고 뭐… 이것저것 겸사겸사? 그랬더니 되게 피곤하네.”
재하가 그 말에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날이 밝을 때 잠들었는데, 몇 시간 못 자고 나와서 이렇게 추운 곳에서 일했으니 몸이 성치 못할 것 같았다. 게다가 그냥 늦게 잔 것도 아니고 밤새 자신에게 시달렸다는 걸 알고 있어서 저절로 눈썹이 처지고 있었다.
“형, 많이 피곤해요?”
“아니. 그냥 좀 눕고 싶어서. 너도 갈래? 너도 얼마 못 잤잖아.”
지수가 재하를 보다가 다비에게 말했다.
“재하 방금 온 거 아니야? 떡국이라도 먹이지?”
“떡국 싸가면 돼. 어차피 얘는 마을 사람들 낯설어서 회관에 앉아서 밥 못 먹을걸.”
“아. 재하 낯가리는구나. 리온이도 처음에 낯 많이 가렸는데, 누가 삼촌 조카 아니랄까 봐. 그것까지 닮았어.”
딱히 낯을 가리는 건 아니지만, 다비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놓칠 재하가 아니었다. 다비와 함께 있으면서 다비에게 친한 척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경계했더니, 다비가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착한 오해는 매우 마음에 들어 다비의 이야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주었다.
“네. 같은 핏줄이라 낯을 좀 가려요.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 밥은 편한 곳에서 먹어야지. 체하면 아깝잖아. 그럼 이따 저녁에 훈이네서 보자.”
“네. 누나.”
다비가 커다란 그릇에 떡국을 푸짐하게 담고 뚜껑을 닫아서 재하에게 건네주었다.
“그거 들고 가자. 떡국 진짜 맛있어.”
“삼촌네로 가는 거예요?”
“뭐 들었어. 집에 간다니까.”
“…집이요?”
다비는 훈과 리온에게 인사하고 회관을 나섰고, 재하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
“우와.”
재하는 지금 성역에 들어와 있었다. 너무나 좋아하는 데이비드 작가의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꿈은 좀 꿨지만,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여러 기종의 오래된 카메라가 진열장에 놓여 있는 걸 눈으로 보자 저절로 덕심이 넘쳐흘렀다.
“여기가 데이비드 작가님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군요. 이런 곳에 제가 오다니, 정말 영광….”
“뭐래. 난 김다비로 너 초대한 건데. 뭐야. 데이비드가 필요한 거야?”
“아니요? 아닌데요? 그냥 카메라를 보니까 너무 좋아서요. 저 카메라로 그동안 수많은 사진을 찍은 거라고 생각하니까 저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막 생겨서요. 그나저나, 여기도 전부 어둡네요.”
미국 집만 그런 줄 알았더니 이곳도 어둡고 깔끔했다. 진열장과 책상, 침대만 있는 깔끔한 방은 새카만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다. 불을 끄고 문을 닫으면 빛조차 들어오지 않을 인테리어에 재하는 신기한 듯 두리번거렸다. 다비는 작은 상을 바닥에 펴주면서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가끔 필름 작업도 하거든. 암실 겸 쓰는 거야. 특히 여기서는 필름 현상해주는 곳이 없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이 인테리어였어. 미국도 뭐 같은 이유고. 왜. 내가 어둠의 다크니스 이런 거 좋아해서 이렇게 인테리어한 줄 알았어?”
“…네. 조금….”
“귀여운 새끼. 떡국 먹으면서 구경해. 배고플 텐데.”
“네. 형은 몸 괜찮아요?”
다비가 상에 떡국과 반찬, 명절 음식을 놔주면서 눈썹을 으쓱거렸다.
“아침부터 회관에 나가 일해서 피곤한 것 빼고는 몸은 괜찮아.”
“그래도 걱정됐어요. 일어났는데, 옆에 없어서 병원이라도 실려 간 거 아닐까 싶어서….”
“무슨 자신감이야. 자다 일어나서 나 찾을까 봐 대문짝만하게 쪽지 써놓고 갔잖아.”
그 와중에 자신을 생각하고 메모를 남겨둔 다비의 마음이 고맙고 뿌듯해서 재하는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네. 그거 보고 회관 찾아갔어요. 형은 어떻게 그렇게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려요?”
“그건 유재하 씨 눈에 콩깍지 필터가 껴 있어서 그런 거고요. 아무튼, 안 울고 잘 찾아와서 기특했다. 일단 먹어. 배고프겠다.”
“먹기 전에 뽀뽀해줘요.”
다비는 한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몸을 섞고 나니, 재하가 뭘 해도 귀여워 보여서 큰일이었다. 숟가락을 손에 쥐고 저를 보며 눈을 반짝거리며 뽀뽀해달라고 조르는 모습이 이렇게 미친 듯이 귀여울 줄이야.
“하, 돌아가시겠네.”
“왜요? 너무 귀여워서요?”
“…그건 또 무슨 자신감이야? 나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전 지금 형이 너무 잘생겨 보여서 큰일이거든요. 원래 잘생겼는데, 지금은 더 잘생겨 보여서 제가 형 얼굴을 좋아했던 건가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워요. 형한테서 막 빛이 나요. 이 방 불을 꺼도 형한테서 나는 빛 때문에 어둡지 않을 것 같을 정도로요. 형은 안 그래요? 나만 그런 건가.”
“넌 진짜…. 미친. 어떻게 그런 말을 막…. 씨발.”
다비는 재하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추었다. 떡국이 식기 전에 따뜻하게 먹이려고 했는데, 이건 재하가 먼저 시작한 거였다.
재하는 제게 달려든 다비를 꽉 안아주며 키스를 받아들였다. 다비가 이렇게 저를 원할 때마다 못 참을 정도로 소유욕이 치밀어 올랐다. 정말 평생 제 곁에만 두고 그 옆에 있으면 좋을 텐데. 서로 이어지고 나니 욕심이 더 생겼다. 자신을 받아주며 기분 좋아하던 지난밤 다비의 모습이 떠올랐다. 몸도 괜찮다니까 딱 한 번만 더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재하의 이성을 흔들고 있었다. 재하는 다비의 허벅지를 손으로 감싸고 은근하게 매만졌다.
“자, 여기까지. 얼른 밥 먹어라.”
조금 전까지 제 혀를 뽑을 듯 물고 빨아대던 다비가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하게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이렇게 자제력이 좋은 거지. 재하는 물러나는 다비를 다시 잡아당겨 제게 바짝 붙이고 불쌍한 척 굴었다.
“어떻게 여기서 멈출 수가 있어요?”
“여기니까 멈출 수 있는 거지. 우리 집에선 키스만 해. 그 이상은 안 돼.”
“정말 형의 자제력은 놀랍네요. 전 키스만으로도 벌써….”
재하의 표정에 가슴이 찡해졌다. 하지만 시무룩해하는 녀석의 모습을 모르는 척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이 사는 집에서 차마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저녁까지 아무도 오지 않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지냈던 이곳에서 재하와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이곳에 올 때마다 생각나서 시도 때도 없이 꼴릴 것 같았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다비는 잘생긴 미소를 무기 삼아 재하를 달래주었다.
“떡국 먹고 나면, 내 사진들 보여줄게. SNS에도 안 올린 것들….”
“잘 먹겠습니다.”
재하는 곧장 자리에 앉아 떡국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다루기 쉬운 녀석이라 참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다비는 재하가 먹는 걸 조금 지켜보다가,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다 먹으면 상은 문 쪽에 치워놔. 내가 이따 치울게. 컴퓨터에 사진밖에 없으니까 찾기 쉬울 거야.”
“지금 자려고요?”
“어. 몇 시간 못 잤더니 졸리네.”
“그럼 좀 자고 있어요. 방 구경하면서 기다릴게요.”
“응. 찬바람 맞고 따뜻한 곳에 들어오면 왜 그렇게 졸린지 몰라.”
“얼마 못 자서 그렇죠. 얌전히 있을 테니까 푹 자요.”
“응. 미안.”
다비는 눈을 감자마자 곧장 잠이 들었다. 재하는 그 모습을 보며 헤실거리다가 다시 떡국을 먹기 시작했다.
재하는 떡국을 먹고, 아래층으로 그릇을 들고 내려가 설거지까지 끝낸 후, 다시 다비의 방으로 돌아왔다. 다비는 많이 피곤했던 모양인지 처음 잠든 모습 그대로 곤히 자고 있었다. 재하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비를 한참 쳐다보았다.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자는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할 것만 같아 꾹 참고 컴퓨터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오래된 컴퓨터에 전원을 넣고 켜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다비가 편하게 잘 수 있게 커튼을 치고 방 안에 불을 껐다. 밖은 해가 떠서 밝은데 이 방은 모니터에서 나오는 불빛을 제외하고는 정말 깜깜했다.
모니터 화면에는 휴지통과 사진 편집 프로그램, 사진 폴더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재하는 곧장 사진 폴더를 열었다. 사진 폴더는 연도와 날짜별로 크게 분류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인물, 정물, 생물, 풍경 등으로 세세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말투나 행동을 보면 털털할 것 같지만, 다비는 의외로 섬세하고 꼼꼼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작은 손으로 사진을 찍고 그 사진들을 꼼꼼하게 분류했을 다비가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처음 찍었던 사진부터 차례대로 구경하기로 했다. 지금처럼 잘 찍은 건 아니지만, 처음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고 신났던 마음이 가득한 사진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다비의 지난 세월과 그때의 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재하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과 마음에 꼼꼼하게 사진을 담아두었다.
중학교 시절을 지나 고등학교 시절로 넘어갔다. 그동안 다비의 사진은 점점 전문가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많이 찍어댔으니 실력이 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거기에 담긴 마음은 언제나 예뻤다.
고1의 김다비를 만난 재하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사랑을 하던 다비의 사진들은 너무나도 예쁘고 찬란했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사진에 설렘과 사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이런 예쁜 마음을 짓밟은 그 남자가 떠올라 잠시 화가 났지만, 다비의 말대로 사진은 죄가 없으니까 참기로 했다.
다비의 사진에 찍힌 어린 시절의 친구들은 학년이 넘어갈수록 줄어들었다. 고1부터는 훈, 지수, 모아만 있었고, 마을 동생들의 사진만 가득했다. 고3부터 폴더에 리온이 추가되어 있었다. 새로운 친구의 등장으로 인해 리온과 함께한 사진들이 꽤 많았다.
재하는 삼촌 사진을 살피더니 피식 웃었다.
“우리 삼촌 좋아하는 거 정말 아니었구나.”
이번에도 삼촌을 귀여워하기에 농담인 줄 알았던 게 진심일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사진을 통해 오해를 풀게 돼서 정말 다행이었다. 고3 사진들을 살펴보다가 제주도 폴더를 발견했다. 재하는 그때 기억이 떠올라 얼른 사진을 클릭했다가 의아한 폴더 하나를 발견했다.
『재하(봉인)』
자신의 이름이 적힌 폴더를 보고 그냥 지나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재하 역시 자연스럽게 폴더를 클릭하고 사진을 열었다. 화면에 크게 나타난 건 자신의 모습이었다.
17살, 해를 지나 18살이 됐던 해 1월의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이 분명했다. 다비는 사진이 흔들려서 망했다며 독사진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었다. 다른 사람은 여러 번 찍어주고 자신은 딱 한 번만 찍고 말았으니 흔들려서 망한 사진이란 건, 이 사진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과 달리 사진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매우 선명했다.
하얀 설산을 배경으로 다비가 찍어주었던 독사진이었다. 형광 핑크색 티셔츠를 입고 코트를 걸친 앳된 자신이 카메라를 보며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7년이 넘게 다비의 스토커, 아니 광팬으로서 재하는 이 사진이 왜 봉인됐는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다비 역시 자신이 사진을 잘 해석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이 사진에 담긴 마음을 읽을까 봐 보내지 못했던 거였다.
다비가 자신에게 반했던 건 이때부터였다.
그런데도 감출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이 아팠다. 너는 예쁜 사랑을 하라고 했던 다비의 말을 이제야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고 싶지 않았던 그 복잡한 감정이 생겼던 과거가 다비를 그토록 오래 괴롭히고 있었던 거였다.
이런 사진을 본 이상 재하의 눈에 다른 사진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곧장 침대에 누워 있는 다비에게 향해 뺨에 입을 쪽쪽 맞춰댔다.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스러운 마음이 흘러넘쳐 그대로 입술을 빨아들였다.
자다가 난데없는 키스를 받은 다비는 결국 잠에서 깨고 말았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이래서 잠에서 깼나 싶을 정도로 격렬한 키스였다. 눈을 떴는데도 재하는 다비에게 계속 입을 맞춰댔다.
재하의 입술이 잠시 떨어졌을 때, 다비가 재하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뭐야?”
“나랑 해요.”
“…어? 뭘?”
“예쁜 사랑. 나랑 해요. 내가 끝까지 예쁜 사랑만 할 수 있게 해줄게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얘가 왜 이러나 싶어서 다비는 눈을 끔뻑거렸다. 재하는 어리둥절한 다비를 꼭 안고 말했다.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요. 그러니까 나만 믿어요.”
“…왜 이래. 뭐, 너 이러는 거 보니까 앞으로 심심하진 않겠다. 그 이야기하려고 키스로 잠 깨웠어?”
“아뇨. 사진 보다가 형한테 꼴려서요.”
“사진 보다가 왜 꼴려. 내가 야한 사진을 찍어 놓은 것도 아닌데. 하여간 핑계는….”
다비는 어이없는 변명에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모니터에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모니터에서는 18살 유재하가 예쁘게 웃고 있었다. 앞으로 재하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던 사진이었는데, 잠결에 사진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아, 봤구나.”
“저 때 형한테 사랑받고 싶단 생각 했어요. 형이 찍는 모든 피사체에 질투가 나더라고요. 하얀 눈꽃이 핀 나무를 찍으면서, 예쁜 연인을 보는 것처럼 표정을 짓는데 왜 나한테는 저런 시선을 주지 않을까. 형, 나를 그렇게 봐줘요. 형이 그런 눈으로 날 봐주면 좋겠어요. 이런 생각 하다가 아, 나는 형한테 사랑받고 싶었단 걸 깨달았죠. 그 말은 내가 형을 사랑하고 싶단 의미예요.”
다비 역시 봉인한 사진의 제목을 첫사랑의 순간이라고 짓고 싶을 정도로 재하의 마음이 훤히 보였었다. 그 감정을 재하의 음성으로 생생하게 전해 듣자, 제주도에서 다시 재하에게 고백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고장 난 것처럼 덜컥거렸다. 재하는 이런 식으로 갑자기 사람을 두근거리게 했다. 이런 것에 면역이 없고, 쏟아지는 애정이 자신에게 향하는 게 어색한 다비는 그 마음을 어떻게 돌려줘야 하는 건지 몰랐다.
다비는 제 위에 올라탄 재하를 안아주고 등을 쓸어주었다.
“이제 마음껏 해도 되잖아.”
“네. 그래서 행복해요.”
“하, 우리 집에 가고 싶다.”
“여기가 형 집 아닌가요?”
“미국 집 말이야. 그랬으면 이렇게 꼴릴 때 눈치 안 보고 섹스했을 텐데. 여긴 정말 안 돼. 우리 율리 갑자기 쳐들어오고 그런다고.”
섹스하려고 미국으로 가고 싶다는 말에 재하는 다비의 목에 입을 쪽쪽 맞추며 뜨거운 숨을 뱉었다. 이 형은 일부러 이러는 걸까. 꼴린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차단하는 고난도 스킬에 자신만 애가 달았다.
“형, 지금 갈래요? 세배도 했고, 떡국도 먹었으면 설날 끝이잖아요.”
“미국이 이웃집도 아니고 쉽게 말하네. 배 떠나서 지금 가고 싶어도 못 가요.”
“그렇지만 형 지금 꼴린다면서요.”
“나만 꼴린 것처럼 말하네. 너 지금 숨 엄청 축축하거든.”
“맞아요. 전 항상 발정 났으니까 이렇게만 있어도 꼴려요. 그런데 안 된다면서요. 미국에선 할 수 있다니까 지금 가요. 헬기 불러서 공항으로 바로 가요. 가면서 미국 가는 비행기 바로 잡죠.”
재하의 표정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도 눈이 풀린 것 같았다. 목에 닿는 숨결도 그렇고 슬쩍 스치는 치아의 감촉이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듯 바짝 날이 서 있었다. 숨겨지지도 않는 하반신의 도드라진 부위를 제 다리에 노골적으로 비벼대고 있었다. 이 짓까지 귀여운 걸 보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기다려.”
다비가 개 훈련하듯 단호하게 명령하자, 재하는 다비의 귓가에 낑, 하고 소리 내더니 코를 비비며 대놓고 귀여운 짓을 했다. 팔뚝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귀여워서 다비는 낮게 욕을 내뱉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일단 입으로 해줄까?”
“아뇨. 여기선 안 된다고 했으니까 참을래요. 저는 형 말이라면 뭐든 잘 들으니까요.”
“환장하겠네. 그래. 가자. 미국 가서 실컷 해.”
저녁에 잡아놓은 술 약속은 어떻게 할지, 부모님께는 갑자기 뭐라고 거짓말을 하고 떠나야 할지 막막했지만, 눈앞에 있는 녀석이 귀엽게 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연애 초기엔 다들 미친 짓 한 번씩은 하는 거라고 합리화하며 다비는 재하의 애교를 들어주었다.
***
리온이 다비를 보며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가는 게 어디 있어.”
“미안. 다음에 독일에 놀러 갈게.”
“어쩔 수 없지. 재하가 졸라서 끌려가는 거잖아. 재하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니고…. 조심히 가.”
훈과 리온이 아쉬워하며 헬기 착륙장까지 배웅 나왔다. 부모님께는 갑자기 촬영이 잡혀서 가야 한다고 둘러댔지만, 훈과 리온을 속일 수는 없었다. 다비는 훈의 팔을 툭 치며 멋쩍게 웃었다.
“여기서 오래 있었잖아. 지수는 명절 아니어도 주말마다 오는 애니까 또 봐도 되고. 다음에 또 보자. 이번엔 신세만 지고 가네.”
“신세는 무슨…. 여기 올 때보다 표정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게 지내. 여기서 열심히 너 잘되라고 기도할 테니까.”
“그래. 든든한 친구 덕에 항상 마음 편하게 산다. 너도 항상 건강히 지내. 지금처럼 리온이하고 예쁘게 지내고.”
훈은 섬에 들어왔을 때 어두웠던 다비의 표정을 알고 있었다. 도움을 청할 때까지 기다렸고, 자신에게 상담할 때 힘들어했던 다비를 기억했다. 갑자기 섬을 떠나면서도 어떤 때보다 후련한 얼굴이 보기 좋아 다비를 꽉 안아주었다.
“너도. 이제부턴 행복하기만 해라. 알았지?”
“새끼. 덩치는 곰만 한 게 마음은 여려가지고…. 알았다. 나 이제 정말 괜찮아.”
“응.”
다비가 손을 뻗어 훈의 등을 토닥여주자, 재하가 곧바로 둘을 떨어트려 놓았다.
“훈이 형, 다비 형 말고 절 안아주세요.”
“그래. 재하도 잘 지내고. 다음에 놀러 와.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훈은 곧바로 재하도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리온도 둘 사이에 껴서 가족끼리 나누는 작별 인사에 동참했다.
인사가 끝나고 재하와 다비가 곧바로 헬기에 올라탔다.
훈과 리온은 헬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고, 다비는 그런 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헬기 안에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지도에는 어른들이 섬을 떠나는 이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힘들고 마음이 아플 때, 오지도로 와. 맑은 바다에 네 걱정과 근심을 전부 버려. 바다는 모든 걸 품어줄 만큼 넓고 깊으니까, 너의 커다란 근심도 전부 받아줄 수 있어. 이곳에 전부 버리고 홀가분하게 떠나길 바라.
다비는 어른들의 가르침대로 홀가분한 마음과 행복을 가지고 섬을 떠날 수 있었다.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건 옆에 앉아 있는 재하 덕분이지만, 전부 설명하려면 아직은 쑥스러우니까 마음을 담아 재하의 손을 잡아주었다.
재하와 100일 여행을 떠나고 잠시 헤어졌을 때, 혼자 돌아가기 싫었던 미국으로 재하와 함께 돌아가게 되었다.
정말 연인으로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조금 두근거리고 설렜다.
3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