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종료.
캐나다에서 100일의 기간이 끝났다.
둘은 국제공항으로 향할 때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다비는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했고, 재하는 그런 다비가 생각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공항 앞에서 다비가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우리.”
재하는 코트 안에 있던 티켓을 다비에게 주었다.
“오늘까지 함께해서 기뻤어요. 형과 함께한 시간 모두 즐겁고 소중했어요.”
작별 인사 같은 말에 다비는 서둘러 티켓을 확인했다. 미국으로 향하는 자신의 티켓을 확인하고 재하의 것을 살폈다. 재하의 티켓은 독일행이었다.
“재하야.”
“지금까지 제 억지 들어주고, 막무가내로 끌고 다녔는데도 어울려줘서 고마워요. 마지막까지 형에게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다비는 당황했다. 여기서 헤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자신이 결정하지 않는다면 어느 곳에서 헤어지더라도 똑같았을 거였다.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조금 전까지 아무 말도 없다가 이렇게 헤어지면….”
“헤어지는 거 아니에요. 전 변한 거 없어요. 여전히 형을 좋아하고 앞으로도 형한테 더 잘하고 싶어요. 형과 지냈던 시간이 전부 소중하고 아름다웠어요. 앞으로도 계속 저는 지난 시간 보였던 제 노력과 마음만큼 형을 좋아할 생각이에요. 형만 마음을 정해준다면 전 세상에서 누구보다 형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갑작스러운 이별에 당황한 다비와 달리 재하는 평소와 달리 차분해 보였다. 항상 자신을 볼 때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단 얼굴이 아니라서 어쩐지 재하가 낯설어 보였다. 재하는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비와 눈을 맞췄다.
“처음 100일만 달라고 했을 때, 전 100일 동안 형이 제게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으면 포기하겠다고 했어요. 기억하죠?”
“…어. 그랬지.”
다비도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만 용기를 냈으면 재하에게 더 만나보자는 말을 했을 테지만, 앞으로 기약 없는 연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워서 마지막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재하와 함께했고 끊임없이 옆에서 좋아하는 마음과 행동을 확인받았지만, 지금부터 연애를 시작하면 서로 멀리 떨어져서 연애해야 한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갈등은 계속되고,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재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포시 웃었다.
“형은 날 좋아해요. 그래서 전 포기하지 않으려고요.”
“무, 무슨 소리야. 나는 그런 말….”
“형은 날 좋아하고 있어요. 다만, 고민하는 거죠. 이제부턴 떨어져서 지내야 하니까요. 제가 변할 것 같아서….”
“네가 변할까 봐 그러는 건 아니야. 끝이 정해지지 않은 연애가 싫을 뿐이야.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다시 연애하는 게 자신이 없어서 그래.”
“하지만 형은 날 좋아하게 됐어요.”
세뇌라도 하는 것처럼 재하는 올곧은 눈으로 다비를 보며 같은 말을 이야기했다. 그럴수록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건지 점점 알 수 없어서 다비는 저도 모르게 재하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마음을 재하가 멋대로 정의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반박도 할 수 없는 건 정말로 혼란스럽고 마음이 복잡해서였다.
재하는 다비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따라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이제부터는 다비가 움직여야 할 때였다.
“항상 말했듯이 형이 원하신다면, 전 언제든 그럴 준비가 되어 있어요. 형의 행동이 전부 정답이고요. 형은 지금부터 정답을 찾아야 해요. 형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 결정할 때까지 전 형을 흔들어 놓을 생각 없어요. 다시 연락해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테니까,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다비는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매달리지 않는 재하의 행동에 어떻게 해야 할지 점점 알 수 없었다. 유재하가 좋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불투명한 미래가 무서웠다. 재하가 그 사람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지만, 자신이 변해서 그 무한한 사랑을 더럽히게 될까 봐 두려웠다.
“이대로 네가 가버리면 내가 영영 연락 안 할 수도 있잖아.”
“형, 솔직하게 말하면 전 지금이라도 울면서 형을 붙잡고 싶어요. 전 또다시 내 세상이 사라질까 봐 무섭거든요. 형하고 단절되는 게 무서운 건 누구보다 저예요.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형이 진심으로 저를 원해야 영원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예요. 그래서 참아보려고요.”
차라리 매달리지. 엉엉 울면서 이대로는 못 헤어지겠다고 책임지라고 자신이 알던 재하처럼 굴 것이지. 왜 이런 순간에 갑자기 낯선 얼굴로 어른스럽게 구는 건지.
재하는 손을 들어 다비의 가슴을 가리켰다. 차마 닿지 못하고 가까운 곳에서 멈춘 재하의 손이 어쩐지 울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시렸다.
“형의 마음은 아직도 사막인가요?”
그 질문을 끝으로 재하는 커다란 짐 가방을 손에 쥐더니, 다비에게 꾸벅 인사했다.
“전 앞으로도 형을 계속 사랑할 거예요. 그래서 형이 더 진지하게 절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이제 가볼게요.”
“…그래.”
겨우 입을 열고 나온 말이 고작 그것뿐이냐고 생각하면서도, 다비는 재하를 붙잡을 수 없었다. 진지하게 더 많은 고민을 하고 자신을 봐달라는 재하의 부탁에 즉흥적으로 휘둘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100일 동안 울고, 웃고, 달라붙어 저를 물고 빨아대던 재하는 너무나 깔끔하고, 단정하게 웃으며 다비를 등지고 떠났다.
“끝까지 낭만적인 녀석 아니랄까 봐… 사막이니 뭐니….”
스스로 생각하고 결론 지으라는 어른스러운 재하의 말에 부끄러워졌다. 재하가 곁에 없는 동안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저를 위해 울지 않고 떠난 녀석을 봐서라도 자신의 불안함을 마주해야 할 것만 같았다.
다비는 손에 쥔 미국행 티켓을 바라보며 공항에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미국 가기 싫다. 집에 갈까.”
둘의 계약 연애는 다비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론으로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