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연애. (2)
재하가 손꼽아 기다리던 뉴욕 생활의 끝이 다가왔다.
재하는 새벽부터 다비를 깨워 빨리 집에 가자고 졸라댔다. 버스를 타고 4시간 30분을 가야 한다는 다비의 말에 재하가 비행기를 타고 가든가, 차를 사자고 했다가 등짝을 맞고 얌전히 버스로 이동했다.
버스 안에서 다비는 계속 재하에게 집이 좁으니까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다비의 집이 비닐하우스였어도 아방궁으로 느꼈을 재하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형은 거짓말을 잘하네요.”
다비의 집을 본 재하의 첫 감상이었다.
다비가 사는 곳은 생각보다 깨끗하고 제법 운치 있는 3층짜리 아파트였다.
재하는 안으로 쉽게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부터 눈에 담느라 제자리에서 고개만 이리저리 돌려댔다. 그 모습이 귀엽게 하찮아서 다비는 재하의 등을 톡톡 두드리고 입구를 가리켰다.
“그만하고 안으로 들어와. 아니면 들어가기조차 망설여질 정도로 집이 구리냐?”
“아뇨? 아닌데요. 여기가 형이 사는 집이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기쁘고 영광스럽….”
“…그만하자. 저런 대답 나올 줄 알았으면서 물어본 내 주둥이가 잘못했지. 난 이제 들어갈 건데, 넌 계속 서 있든가.”
다비가 한 걸음 옮기자 재하가 얼른 다비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3층에 있는 다비의 집은 거실과 주방, 침실이 따로 있는 형태였다. 게다가 털털해 보이는 성격과 달리 집 안은 놀라울 정도로 깨끗했다.
“형, 이거 꿈 아니죠. 내가 다비 형 집에 있어.”
재하는 금방이라도 감격에 겨워 울 것처럼 폼을 잡았다. 다비는 질색하며 재하의 등을 찰싹 내려쳤다.
“울지 마라.”
“…안 울었는데요.”
“울 거였잖아.”
“맞은 게 억울해서 그런데 울어도 돼요?”
“하지 마. 아무튼, 청소부터 할 테니까 넌 소파에 앉아 있어.”
다비는 거실에 짐 가방을 내려놓고 환기를 위해 창문부터 열었다. 겨울이 시작됐다는 걸 알리는 듯 차가운 바람이 방으로 들이닥쳤다.
“전에는 더운 바람이 불었는데. 페루에서 두 달 있었고, 그 후로… 얼마 만에 여기 온 거야. 거의 넉 달 만에 집에 왔네. 청소 좀 해야겠다.”
명색이 집에 손님이 온 상황이라 다비는 묵힌 먼지를 청소하려고 바쁘게 움직였다. 오랜만에 들어왔다는데도, 재하가 보기에 이 집은 매우 깨끗했다. 오히려 생활감이 없어 보였다. 사람 사는 집치고는 조금 삭막한 편이랄까. 일반적인 미국식 가정집과 다르게 무채색으로 인테리어된 다비의 집에는 가구도 얼마 없었다.
“집을 자주 비워서 그런지 딱 필요한 것만 있네요.”
“어. 아무래도 직업이 그래서. 덕분에 청소는 금방 끝나. 집도 좁고.”
“생각보다 넓어서 당황하고 있어요. 전 형이 계속 좁아터졌다고 하기에 우리 둘이 있으면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런 방 생각했는데….”
다비가 청소기를 꺼내 들며 피식 웃었다.
“나 스무 살에 여기 왔을 때는 정말 그런 집이었어. 1년에 한두 번씩 집 옮기면서 정착한 게 그나마 여기야. 미국 와서 이 집 계약하기 전까지 진짜 온갖 일은 다 겪어봤다. 촬영 갔다 왔더니 집 털린 적도 있었다니까. 이상한 집주인도 만나보고…. 말해 뭐 하냐. 이미 지난 일을. 아무튼, 여기가 내가 살던 곳 중에서 제일 좋은 곳이야.”
“그렇군요.”
다비가 보낸 문자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다. 항상 자신이 일상을 이야기하고 다비는 그냥 거기에 대한 반응을 보내곤 했다. 도둑을 맞았다거나, 이상한 집주인을 만났다는 정말 큰일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었다. 훈이 독일에 와서 다비 이야기를 가끔 꺼낼 때도 그런 말이 없었던 걸 보면, 불알친구에게조차 말하지 않고 혼자 해결했던 모양이었다.
재하는 그런 삶을 살아본 적 없어서 다비가 하는 이야기를 전부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고생했다는 이야기에 마음 아팠다.
“형, 집 사줄까요?”
시끄럽게 울리던 청소기 소리가 뚝 멈췄다. 다비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재하를 바라보았다.
“뭔 생각을 해야 집 사준다는 결론이 나오는 거냐? 그렇게 이 집이 이상하냐?”
“아뇨. 그게 아니라 집을 소유하면, 계약이나 그런 거에서 자유로워지니까. 관리하는 건 사람 쓰면 되고. 아, 비용은 제가….”
“뻑하면 돈 쓸 궁리만 하네. 너 그거 되게 안 좋은 버릇이야.”
“형한테만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문제….”
가만 보면, 재하는 기죽은 척하면서도 제 할 말은 다 뱉는 녀석이었다. 일부러 저러나? 사람 열받게 하려고? 마음 같아서는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다비는 성질을 좀 죽이고 재하를 타일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말은 잘 듣는 녀석이니까.
“재하야,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살아. 그리고 내가 한 말 뭐로 들었어. 난 여기에 오래 머물지 않으니까 이것보다 넓은 집은 필요 없어. 그리고 나 그렇게 돈 없는 거 아니다. 네가 보기에 없는 거지. 나도 꽤 벌어. 우리 집도 잘살고.”
“그래서 그런 거 아니고… 형한테 뭐든 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좋아하니까.”
재하가 시무룩해하던 순간, 축 늘어진 귀가 보였다. 다비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미친 게 분명했다. 다비는 손 틈 사이로 재하의 머리를 다시 보았다. 축 늘어진 귀가 사라져 있었다. 다행이다. 아직 덜 미친 모양이었다. 여기서 뭐라고 한마디만 더 하면 울 기세라 다비는 재하의 뺨을 쓸어주며 일단 달래주었다.
“뭐든 해주고 싶으면 예쁜 짓 하라니까. 돈 말고. 귀여운 짓도 좋고. 돈 말고. 우리 리온이는 돈 안 쓰고도 예쁜 짓 잘만 하던데, 우리 재하는 왜 그걸 못할까.”
“…삼촌은 존재만으로도 예쁘잖아요. 전 그냥 잘생기기만 했으니까 못하죠.”
“…시무룩한 와중에 잘생긴 건 아는구나. 주제 파악이 잘 되어 있는 네 모습, 조금 귀여웠다.”
“그럼 뽀뽀해줘요.”
씨발. 다비는 돌아버릴 것 같았다. 저보다 큰 놈이 내려다보면서 징그러운 짓을 하고 있는데, 그게 귀여워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차라리 평소처럼 들러붙어서 잘근거리는 게 나을 정도로 민망하고 어색했다. 뽀뽀해달라고?
“뽀뽀해도 돼요? 가 아니고?”
“네. 해줘요. 받고 싶어요. 형한테.”
“징그러우니까 그런 거 하지 마. 왜 귀여운 척하고 난리야.”
“귀여운 짓 하라고 한 건 형인데, 왜 귀엽냐고 하면….”
“시끄러워.”
말은 그렇게 뱉으면서도 다비는 재하의 목덜미를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재하는 입술과 가까워져 오는 타이밍에 맞춰 입을 벌려 다비의 뽀뽀를 키스로 바꿔놓았다. 다비를 꽉 끌어안고 벌어진 입 안을 훑고 빨았다. 질척이는 소리가 농밀해질수록 재하의 목덜미를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재하가 다비의 허리를 손으로 훑자, 다비가 입술을 물리고 허리를 조물거리는 재하의 손을 붙잡았다.
“뽀뽀해달라더니….”
“뽀뽀가 키스가 되고, 키스가 야한 짓까지 가는 거죠.”
“뻔뻔하기까지. 일단 집부터 좀 치우자. 그래야 침대에 누워서 야한 짓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냐.”
“침대.”
재하가 굳게 닫혀 있는 침실 문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침실이 하나라 이번엔 같이 잘 수 있겠네요.”
“뭐래. 언젠 같이 안 잤던 것처럼. 아, 베개 쿠션이 하나밖에 없다. 그건 네가 써라. 여기에 올 사람이 없어서 베개가 하나밖에 없어. 커버는 새로 갈아줄게.”
“전 괜찮아요. 형이 저 팔베개해주면….”
“까분다. 아오. 이제 그만. 좀 치우자.”
다비는 중단한 청소를 다시 시작했다. 재하는 다비의 자제력이 놀랍기만 했다. 분명 키스할 때 흥분한 것 같았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 움직이는 다비가 신기하기만 했다. 자신은 지금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힘든데. 역시 형은 대단해.
재하가 그런 생각을 하며 흥분을 유지하고 있을 때, 털털한 성격일 것만 같았던 다비는 청소의 신처럼 꼼꼼하게 집 전체를 청소하고 있었다. 청소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재하의 눈에는 깨끗하기만 한 집인데 다비는 먼지 한 톨이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기세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가까이 있으면서 지켜본 다비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잘하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형은 어떻게 청소까지 잘해요?”
“…뭐? 이게 보통 아니냐? 뭐야. 넌 청소해본 적 없어?”
“전 그냥 정리만…. 청소는 일해주시는 분이 해주셔서요.”
“그 삶이 더 부럽네. 나는 이장 아들이란 이유로 내 방 청소도 모자라서 마을 대청소도 하고 다녔는데, 이 작은 집 하나 청소 못 하는 게 이상하지. 너는 귀하게 태어났으니까 귀하게 살아.”
“형도 귀해요.”
“어. 알아. 나도 우리 부모님 보석이니까 당연히 귀하지.”
“…나한테 귀하단 소리였는데.”
진짜 어디서 교육받나? 저런 소름 돋는 말을 대체 누가 알려주는 건지 모르겠다. 낭만적인 뭐, 그런 애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저런 거 교육받고 자라고 막 이러는 건가? 이러다가 또 꼴릴 것 같아 다비는 시무룩한 재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장 욕실로 향하며 옷을 훌훌 벗었다.
“으, 먼지. 난 일단 씻고 온다. 너도 이따 씻어. 여긴 아쉽게도 욕실이 하나라서.”
“네. 그럴게요. 벗은 옷은 어디에 둬요?”
“주방 쪽에 문 하나 있어. 거기에 세탁기 있거든. 그 앞에 세탁 바구니 있으니까 그냥 쑤셔 넣어놔. 나중에 내가 알아서 할게.”
재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비가 허물처럼 벗어놓은 옷을 하나씩 주웠다. 집은 깨끗하게 하면서 옷은 바닥에 막 던져 놓다니. 정말 생활 습관까지 독특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좋은 거지만. 재하는 세탁기 앞 바구니에 옷을 잘 놓아두고 냉장고 앞에서 멈춰 섰다. 몇 달 만에 온 집이라니까 냉장고에 있는 음식은 다 상했을 것 같아, 다비가 씻는 동안 청소해줄 생각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
냉장고에 술과 생수병뿐이라니. 어째서 냉장고에는 눈길조차 안 줬는지 안을 살피자 이해가 됐다. 재하는 혼자 남아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좁은 걸 빼면 정말 괜찮은 곳이었다. 재하의 눈이 침실로 향했다.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침대는 둘이서 자도 남을 정도로 넓었다. 재하는 침대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새로 깔아놓은 무채색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안 나네. 안 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안 나네.”
“뭔 소리야.”
언제 씻고 나왔는지, 다비가 침실로 들어와 있었다. 재하를 유심히 살피는 다비는 목에 수건만 두른 채 알몸이었다. 재하가 시선을 한곳에 고정한 채 넋이 나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형. 오, 옷….”
“아, 옷 놔두고 들어가서.”
다비는 곧장 침실에 붙어 있는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보통 속옷부터 입는 거라 생각했는데, 다비는 티셔츠부터 꺼내 입었다. 재하는 그 모습에 참지 못하고 이제야 속옷을 꺼내는 다비에게 달려들었다.
“형.”
“또 발정 났냐? 뭐, 내 몸이 좀 예술이긴 하지. 그런데 어쩌냐.”
“네? 뭐가 어째요?”
“여긴 벽이 얇아서 벽간 소음 심해. 너 또 하다가 울려고? 옆집에서 다 듣는다.”
“안 울면 해도 돼요? 그럼 참아볼게요.”
“아, 진짜 미친 거 같아. 날이 이렇게 밝은데 뭔….”
다비는 재하의 허벅지를 찰싹 때리고는 입던 옷을 마저 입었다. 조각 같은 엉덩이가 트레이닝복 바지 속으로 사라져서 재하는 아쉬워했다.
“아, 그런데 너 아까 왜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서 시트에 얼굴 파묻고 있었어? 난 우는 줄 알고 식겁했네.”
“…그렇게 자주 울진 않아요.”
“뭐래. 내가 본 게 몇 번인데. 아무튼, 왜 그러고 있었냐고.”
“형 냄새 나는지 확인했어요. 그런데 새 이불인지 안 나더라고요.”
“아오. 미친놈. 안 되겠네, 이거. 너 그러다 내 옷장에 들어가서 자는 거 아니냐?”
다비가 질색하며 말하는데, 정작 비꼼을 들은 재하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으로 다비의 옷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비가 정색하며 발을 들어 재하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었다.
“하지 마라. 너 표정 지금 진지해.”
“잠깐 코만 갔다 오면 안 될까요?”
“뭔 소리야. 뭐가 갔다 오든 안 되니까 꿈 깨세요.”
“형 냄새 맡고 싶어요. 어떻게 형 집인데, 형 냄새가 조금도 안 날 수가 있어요? 전 여기 오면 제일 먼저 형 냄새로 가득한 공간에 제 호흡을 섞어보고 싶었는데.”
“아니, 미친. 좀… 그런 거… 하지 마.”
진지하게 개소리를 늘어놓는 재하 때문에 다비는 얼굴을 붉히며 적응 안 된다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또라이 같은 짓을 하는데 왜 심장이 나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너는 정말, 부모님께 감사드려라.”
“…왜요? 항상 감사하고 있긴 하지만,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하네요.”
아무래도 제 심장이 이렇게 나대는 이유가 저 잘생긴 얼굴과 훈훈한 몸 때문인 것 같았다. 어느새 제 취향이 된 녀석이 개소리를 늘어놓으면 제 심장이 나댄다는 결과를 알게 된 다비는 재하에게 사실대로 말해줄 수 없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그런 소리를 했다가 재하가 얼굴과 몸으로 덤비기 시작하면 정말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네 삶이 아름다워 보여서 그랬다. 물론, 나도 제법 찬란하고 아름답게 살고 있고.”
“형이 찬란하게 사는 건 제가 더 잘 알죠.”
재하가 진심을 담아 말하자, 다비가 다시 정색했다. 정색한 표정은 그대로인데 전과 달리 금방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재하는 가만히 달아오른 다비를 보며 은근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비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피부가 하얀 편이라 그런가. 금방 빨개지네, 하고 신기해하는데 다비가 손을 들어 재하의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렸다.
“중성화 수술하기 전에 그만 좀 발정해라. 시도 때도 없이 아주 발정 난 눈으로 쳐다보고 있고. 그것까지 내가 교정해줘야 진짜 사람 될 거냐?”
“전 항상 그런 눈으로 봤는데 새삼 왜 그래요. 전 예전부터 형 생각하면서….”
“제발….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 귀엽고 예쁜 짓 많이 했으니까 이제 그만해.”
“네. 그만할게요. 형, 냉장고에 물하고 술밖에 없던데….”
다비가 그 말에 “아! 맞다.” 하며 거실로 튀어 나갔다.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서 뭘 해 먹는 편은 아니었다. 그럴 시간에 잠을 더 자고, 작업을 더 하는 게 이득이라 주로 대충 사 먹는 편이었지만, 손님을 허투루 대접할 수는 없었다.
섬을 떠난 지 오래됐는데도, 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 그런지 사소한 습관들이 몸에 배어 있었다. 지금처럼 손님을 대접하는 것도 그랬다. 섬에서는 손님 대접을 시원치 않게 하는 건 매우 나쁜 뜻이었다. 찾아온 손님을 잘 대접해서 육지로 보내는 게 아주 당연했고, 그걸 보고 자란 다비 역시 재하에게 엉성한 대접을 할 수 없었다. 하물며 재하는 그냥 손님이 아니지 않은가.
“장 봐야겠다.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마트 있어. 먹고 싶은 거 있어? 만들어줄게.”
“전 아무거나 잘 먹으니까 형이 편한 거로 해줘요.”
“그럼 지금 나가자. 넌 갔다 와서 씻어. 청소 안 했으니까 먼지 안 묻었을 거야.”
다비가 청소할 때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먼지를 흡입했던 재하는 그냥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대로 마트에 가기로 했다.
“형, 우리 이러니까 꼭 신혼부부….”
“그래. 신혼부부 같다.”
“진짜요?”
“어. 밖에서도 그렇게 말하면 이혼할 거야.”
“조용히 할게요.”
다비는 큭큭거리며 재하의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
집으로 돌아온 재하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비가 인상을 팍 구겼다.
“갑자기 왜 또 그래. 누가 날 만지길 했냐. 네가 말하는 호감 눈빛을 쏘길 했냐. 버릇 고쳐놓은 줄 알았더니, 또 시작이네.”
“다들 친한 척하잖아요.”
다비와 마트에 가서 이곳에 있는 동안 쓸 물품과 음식을 사 오는데, 그사이에 만난 사람들이 다들 다비에게 데이비드라고 부르면서 친근하게 굴어댔다. 다비 역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인사하며 알은척했다. 과장 조금 보태면 물건 사는 시간보다 사람들과 인사한 시간이 더 길다고 말할 정도였다.
촬영 때문에 미국에서는 잠깐 머문다면서, 마을 토박이처럼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다비의 친화력에 속상해졌다.
“왜 다들 데이비드라고 불러요?”
“그게 내 이름이니까. 뭐래. 너도 처음에 나보고 데이비드 작가님이라고 해놓고.”
“그게 아니라, 성까지 부르든가…. 이름만 부르잖아요.”
“내가 그렇게 부르라고 했어. 왜. 나까지 뭐라고 하게?”
재하는 대답 대신 못마땅한 표정만 지었다. 대체 사교성까지 좋으면 어쩌라는 건가. 일도 잘하고, 돈도 잘 벌고, 보유한 자격증만 여러 개에 청소, 요리 같은 집안일까지 잘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라도 못 하면 그 빈틈을 노려보겠는데, 정말 틈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완벽한 사람이었다. 이러니까 자신이 눈에 안 들어오는 건가 싶어 그게 불만이었다.
“형은 나한테만 특별해야 하는데. 형이 너무 잘나서 다들 형을 특별하게 생각하잖아요.”
“진짜… 가지가지 한다.”
다비는 어이없어하며 피식 웃었다. 살면서 그렇게 자신이 특별하다고 여겨본 적 없었다. 박사 출신인 부모님에게서 태어났지만, 명석한 두뇌는 쌍둥이 남매인 모아가 전부 물려받았다. 어려서부터 명석한 두뇌로 주목을 받은 모아를 사람들은 모두 특별한 아이라고 불렀다. 뒤늦게 사진에 재능을 보여 이렇게 직업으로 삼게 되었지만, 세상에는 저보다 훨씬 특별한 사진작가들이 많았다. 물론 자신이 사진을 잘 찍으니까 사진작가로 먹고살 수 있는 거라 생각은 해도, 재하가 말하는 수준의 특별함을 지니고 있단 생각은 한 적 없단 소리였다.
작가로서 자신을 특별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자신을 사진 외에 특별하다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재하밖에 없었다. 사사건건 질투하는 녀석이 예쁜 말을 툭툭 던지는 게 제법 귀여워서 답례로 듣기 좋은 소리를 들려주었다.
“다비라고 부르는 건 미국에서 너 하나뿐이야. 아니, 모아도 미국에 있으니까 꼭 너 하나뿐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다비라고 부르는 건 외지인 중에서 너 하나뿐이지.”
“…좋은 거예요?”
“어. 좋은 거야. 다비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나하고 제일 친한 사람들이란 소리잖아. 데이비드는 직장에서도, SNS에서도 다 그렇게 부르는 흔한 이름인걸?”
“좋은 거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이제 고 주둥이 좀 넣어줄래? 아니, 생긴 건 다르면서 삐지는 것까지 리온이하고 똑같냐. 귀엽게.”
재하의 입술이 보란 듯이 더 튀어나왔다.
“형, 진짜 우리 삼촌 좋아했구나.”
“아, 아니라고.”
“그럼 빨리 저만 귀엽다고 해줘요.”
“미친놈. 귀여워서 돌아가시겠네. 됐냐?”
“네. 형한테 미친놈이 형 돌아가실 때까지 귀여워 보이도록 노력할게요.”
다비는 재하의 뒤통수를 마구 흐트러트리다 사 온 물품을 정리했다.
“하다 하다 이제 네 삼촌까지 질투하고 앉았냐. 아, 우리 집에 와서 하는 말인데 여기선 얼마나 있다가 다른 곳에 갈 생각이야?”
“이번엔 생각 안 해 봤는데요. 마음 같아서는 형네 옷장에 세 들어 살고 싶을 정도로 여기가 마음에 들어서요.”
“세 안 줘. 하지 마.”
계획이 없다는 말에 다비는 마음이 조금 심란해졌다. 그럼 마지막 날에 여기서 헤어져야 하나. 그건 별론데. 이곳에선 좋은 추억만 남겼으면 좋겠는데. 아니면, 이대로 계속 같이 있어도 괜찮고. 재하하고 둘이 이렇게 있으면 정말 어디든 상관없을 것 같기도.
생각에 빠져 있느라 정리하는 손이 느려진 다비를 보자, 재하가 곧장 말을 걸었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전 여기 정말 좋은데, 형이 가보고 싶은 곳 있다면 말해도 돼요.”
“어? 아니. 나도 당장은 없어. 생각해 봐라. 넉 달 만에 온 집인데 당장 어디 떠나고 싶겠냐? 좀 놀다가 지겨워지면 그때 생각하면 되는 거지.”
“하긴, 그렇겠네요. 저도 독일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다른 나라 공연 다닐 때는 독일 집이 먼저 생각나더라고요.”
“그렇지? 그러니까 일단은 여기서 좀 놀자. 아, 너 매운 거 잘 먹어?”
아무거나 잘 먹는다던 재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뇨. 김치 정도는 먹어도 그 이상은 힘들어요. 못 먹는 건 아니지만… 형은 매운 거 좋아해요?”
“어. 완전. 그런데 너 못 먹으면 고추만 빼면 되겠다.”
“뭐… 만들려고요?”
“샥슈카. 샥슈카에 빵 구워서 찍어 먹게. 빵 다 먹으면 남은 거에 파스타 비벼 먹어도 맛있어.”
재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 생소했다. 모르는 눈치라 다비가 다른 이름을 불러주었다.
“에그 인 헬(egg in hell)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훈이가 만들어준 적 없나?”
“…이름에 헬 들어가는 음식치고 안 매운 거 없던데. 제가 훈이 형 음식을 다 먹어본 건 아니라서 잘 모르겠어요.”
“고추 빼니까 매콤하지도 않아. 우리 율리도 먹을 수 있을 만큼 안 매워. 6살짜리 꼬맹이가 먹는 걸, 설마 네가 못 먹겠단 소리는 안 하겠지.”
율리는 다비와 모아의 막냇동생이었다. 이중국적자라 다비네 남매는 스웨덴 이름과 한국 이름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다비의 스웨덴 이름은 데이비드였고, 모아의 스웨덴 이름은 그대로 모아였다. 스무 살 터울의 막냇동생 율리의 스웨덴 이름은 줄리앙이었다.
재하는 율리의 사진을 본 적 있었다. 다비가 보여준 건 아니고, 제 삼촌인 리온이 친조카 앞에서 오지도 조카들이라면서 가짜 조카들을 자주 보여주었다.
오지도에 자주 가는 리온은 가끔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오는데, 그중 하나가 다비의 동생 율리였다. 그래서 재하는 다비가 율리의 이름을 꺼냈을 때 그동안 묻고 싶었던 것을 생각난 김에 물었다.
“형, 그런데 율리는 금발에 푸른 눈이던데 어머니 닮았나 봐요. 처음에 삼촌이 보여준 사진 보고 형 동생인 줄 몰랐어요.”
“아, 우리 율리 사진 봤어? 예쁘지? 아주 예뻐 죽겠어. 맞아. 우리 엄마 닮았어. 나하고 모아는 잘 섞여서 금발에 파란 눈은 아니지만, 어릴 적에는 나하고 모아, 둘 다 금발 기가 있긴 했지.”
재하의 시선이 웨이브 진 다비의 갈색 머리로 향했다. 다비의 금발이라.
“형은 어떤 머리 색이어도 다 잘생겼을 것 같아요. 금발도 잘 어울렸겠다.”
“아니. 예전에 지수가 금발로 염색해준 적 있었는데. 너무 외국인 같으니까 난 좀 낯설어서 별로.”
스웨덴이 또 하나의 국적인 이중국적자 데이비드가 외국인 같아서 낯설다는 이해하기 힘든 말을 뱉고 있었다. 재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다비가 조금 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나도 반은 동양인 피가 섞였는데 금발로 염색하니까 뭔가… 진짜 서양인 피만 남은 느낌이라서 어색했다고. 내가 외국인이 아니란 소리는 아니고.”
“이해했어요. 전 그냥 형이 금발이면 왕자님 같겠단 생각을 좀 했죠. 아, 그럼 모아 누나도 금발이었겠네요? 와. 이상하게 쌍둥이인데 모아 누나는 쉽게 상상이 안 되지? 둘이 너무 달라서 그런가.”
다비가 정리를 다 끝내고 손을 씻으며 픽 웃었다.
“그런 말 마라. 어릴 때는 모아하고 완전히 똑같아서 다들 일란성으로 착각할 정도였어.”
“그래요? 그럼 모아 누나가 잘생겼다가 예뻐진 거예요? 그것도 신기하네.”
“…넌 정말 세상이 날 중심으로 돌아가냐? 어렸을 때 애기가 잘생겨봤자 얼마나 잘생겼다고 모아가 잘생겼다가 예뻐졌을 거란 생각을 해?”
“그럼 다비 형이 변한 거예요? 난 그게 더 상상이 안 되는데요. 전 어렸을 때부터 잘생겨서….”
처음 만났던 19살의 김다비는 앳된 얼굴이긴 했지만, 잘생겼단 느낌이 강했다. 모아와 쌍둥이라고 했을 때도 확실히 이란성은 다르구나, 할 정도로 둘은 가족이란 느낌은 있었지만 닮은 구석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별로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기다려 봐.”
다비가 바지에 물기를 대충 닦아내며, 소파에 던져 놓은 휴대폰을 들고 왔다. 재하 쪽으로 걸어오면서 열심히 무언가 넘겨대더니, 재하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사진에는 어린 시절 모아와 다비가 부모님과 함께 있었다. 둘은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헤어스타일에 똑같은 표정이었다. 다비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재하에게 물었다.
“이게 우리 가족사진인데. 둘 중 누가 나로 보여?”
“여기요. 다비 형.”
재하는 고민 없이 어릴 적 다비를 찾아냈다. 곧장 찾아내는 재하를 보며 다비는 정말로 소름 끼쳐 팔을 쓸어댔다.
“너 진짜 소름 돋아. 어떻게 찾았어? 우리 엄마 아빠는 아직도 이 사진은 매번 헷갈리는데.”
“다비 형이 더 잘생겼잖아요. 누나보다. 그런데 얼핏 보면 정말 닮았네요. 일란성으로 오해받을 만했겠어요.”
“자세히 봐도 모르거든. 곧바로 찾아낸 사람 네가 처음이야.”
“그래요? 내 눈엔 형밖에 안 보이는데. 그런데 귀엽다. 이땐 몇 살이었어요?”
“…어. 열 살. 한국 오기 전에 스웨덴에서 찍은 거.”
내 눈엔 형밖에 안 보여? 다비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자신을 좋아해야 저렇게 될 수 있는지 옆에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자신이 좋아해주지 않는데도 이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는 건가? 단순히 팬심으로 좋아했다고 보기에는 재하는 너무나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걸 몰랐던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녀석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재하를 보던 다비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밥이고 뭐고 이대로 침실로 끌고 가서 덮치고 싶었다. 하지만 물고 빨든 덮치든 일단 밥은 먹여야 하니까 다비는 진정하기 위해 얼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재하는 다비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사진에 정신이 팔린 채 다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형은 언제부터 잘생기게 변신한 거예요?”
다비는 말을 걸어준 재하가 고맙게 느껴져서 얼른 입을 열었다.
“내가 변신 로봇이냐. 변신하게…. 뭐, 남자애들이 그렇듯이 2차 성징 시작되면서? 변성기 오고 크기 시작했어. 고1 겨울 방학 때 성장통 앓으면서 고2 시작할 때 확 컸으니까… 변신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
“아. 그렇구나. 그럼 전 변신 후의 형을 만났던 거네요. 그런데 전 사진으로 봐서 그런가, 변신 전에도 둘이 쉽게 구분되는데요.”
“성장기 전까지는 모아하고 계속 키까지 똑같았어. 목소리로도 구분 못 할 정도였으니까 다들 일란성이라고 착각했었는데….”
신나게 말하던 다비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재하가 사진 속 저를 알아봐 준 게 기뻐서 너무 많이 떠들어댄 것 같았다. 그쯤이 자신의 흑역사가 있던 때라, 그 시절 이야기는 먼저 꺼내는 편이 아니었고,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말하면서도 나쁘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재하가 많이 편해진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 사진 알아본 기념으로 너한테 사진 보내줄게.”
“진짜요? 크게 프린트해서 독일 집에 걸어놓고 매일 아침….”
“하지 마라. 사진 아직 안 보냈다.”
“…안 할게요. 주세요.”
다비는 큭큭 웃으며, 재하에게 자신의 가족사진을 보내주었다.
***
“형. 형.”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다비는 눈썹을 들어 올려보았지만, 쉽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눈을 뜨고 주위를 살피기엔 달라붙어 있는 것이 너무 따뜻했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너무나 듣기 좋아서 이대로 다시 자고 싶었다.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도 기분 좋아서 다비는 계속해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외면했다.
아, 재하 산책 시간인가. 다비는 눈을 감은 채, 입만 열었다.
“…왜.”
“밖에 눈 와요.”
“겨울이니까 오겠지.”
“…우리 첫눈인데.”
다비는 그 말에 일단 몸부터 일으켰다. 어깨까지 덮고 있던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서늘한 공기가 다비의 맨몸을 감쌌다. 옆에 누워 있던 재하가 다비에게 이불을 다시 건네주자 다비는 이불을 꽉 잡고 멍한 눈으로 밖을 쳐다보았다. 첫눈이라고 하기에 소리 없이 폴폴 흩날릴 거라 생각했는데,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겁나 많이 오네.”
“나갈래요?
“…이 시간에?”
“네. 같이 눈 맞고 잠깐만 걷다 와요.”
다비는 그 말에 제 옆에 누워 산책을 조르는 재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눈 오면 강아지들이 그렇게 신나서 난리라던데 재하가 하는 모양새가 딱 그 짝이었다. 낭만적인 뭐, 그런 녀석들은 첫눈이라면 눈보라가 몰아쳐도 밖으로 나가고 싶은 건가. 하지만 이 시간엔 정말 나가고 싶지 않았다.
“재하야. 날 밝으면 나가자. 밤엔 위험해.”
“멀리 가자는 건 아니고….”
“내가 진짜 애새끼를 만나고 있는 건지, 개새끼를 만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눈 보면 막 뛰쳐나가고 싶고 그래?”
“아뇨. 그건 아닌데요. 그리고 저는 애도 아니고 개도 아닌데, 애하고 개는 이런 거 안 하잖아요.”
재하는 다비를 끌어당겨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가 그대로 다비의 입 안으로 들어가 안을 헤집어놨다. 자다 깨서 난데없이 당한 키스에 다비는 멍한 얼굴로 재하를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냥 배 째라는 식으로 드러누웠다.
“그렇게 귀엽게 굴어도 안 나가. 저 정도 오면 아침에 눈 잔뜩 쌓였을 거야. 날 밝으면 나가자. 진짜 졸려.”
“네. 그럼 그렇게 해요. 형이랑 같이 눈 내리는 거 구경하고 싶었어요. 뽀뽀도 하고 싶었고. 다 이뤘으니까 이제 자도 괜찮아요.”
“그래. 너도 조금만 구경하다가 얼른 자.”
어쩐 일로 재하는 더 조르지 않고 순순히 다비를 재워주었다. 다비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이불 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정말 졸렸던 듯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재하는 다비가 들어 있는 이불 무덤을 손으로 토닥거렸다.
“기억 안 나나 보네.”
조금 전 다비는 악몽을 꿨었다. 끙끙거리면서도 벌떡 일어나거나 화장실로 뛰쳐나가는 일은 없었다. 대신 자신을 찾으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품속에 파고든 건 좋았지만, 계속 끙끙거리기에 눈을 핑계로 다비를 깨울 수밖에 없었다. 깨고 나서도 악몽을 꿨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다비는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는데. 뭐든지 다 잘하는 다비가 저에게 의지하는 게 이런 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냥 좋아해 줘요. 그럼 계속 곁에서 이렇게 편하게 잠들 수 있게 해줄게요.”
재하는 다비가 만든 이불 무덤을 꼭 끌어안고 다시 잠을 청했다.
***
집으로 온 이후, 다비의 행동이 묘하게 변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재하가 사진 속 쌍둥이를 단번에 구분한 이후 다비가 예전보다 더 많이 받아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발정 나서 들러붙는 재하를 대낮부터 받아주기도 했고, 가끔은 다비가 먼저 재하를 만지기도 했다. 키스나 뽀뽀는 이제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여전히 섹스는 못 하고 있지만, 둘에게 그건 더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쯤 되면 말만 안 했지 거의 사귀는 거나 다름없는 게 아닐까, 하고 재하는 생각했다. 이제 자신에게 좋아한다는 말만 해주면 될 텐데, 삐딱한 사람이라 몸으로는 보여주면서 곧 죽어도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눈에 보이게 표현해주고 있으니까 귀로 듣지 않아도 재하는 정말 괜찮았다.
문제는 다비가 자신을 아무 때나 받아주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솟아나는 욕구가 문제였다.
마치 발정기라도 온 것처럼 정말 시도 때도 없었다.
***
다비는 지금 진지하게 유재하가 자신을 좋아하다 못해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유재하는 마치 발정기라도 온 것 같았다.
24살, 곧 있으면 25살이 될 재하가 한창때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온종일 물고 빨고 했는데도 부족하다는 듯 굴었다. 그동안 참았던 게 터진 건지, 원래 정력이 넘쳐서 이렇게 시도 때도 없는 건지는 유재하가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지금은 어지간한 변태 짓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다비조차 꽤 경악할 정도라는 사실이었다.
“하으… 형, 다비 형. 좋아해요.”
다비는 가까운 곳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버렸다. 어두운 방 안에서 들리는 야릇한 소리에 다비는 차마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실눈을 살짝 뜨자 재하가 침대 밑에서 저를 빤히 보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모든 상황을 느릿하게 종합해보자 유재하는 지금 자위 중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야, 이 미친놈아,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하지 말라고 혼을 내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재하의 시선이 느껴져서 이제 와서 깨어났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상황이었다.
자기 전에 분명 많이 뺀 거 같은데…. ‘부족했나?’가 첫 번째로 든 생각이었다. 아니, 오늘은 하루 종일 그 짓만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부족했다고?’가 두 번째로 든 생각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하고도 모자란 듯 구는 녀석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 이러면… 안 되는데… 형.”
알면 그만해, 하고 지금이라도 일어나야 하는데, 흥분한 재하의 목소리가 솔직히 듣기 좋아서 계속 내버려 두고 싶었다. 자신이 좋다고 이 어두운 새벽에 갑자기 발정 나서 저러는데 그걸 가지고 나무라기도 민망했다. 눈 뒤집혀서 물어뜯는 것보단 자위가 더 건전하지 않냐며 재하의 행동을 합리화하기까지 했다.
“형… 만지고 싶, 다.”
환청이 들렸다. 어디선가 낑낑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침대 밑에서 강아지가 졸라대는 거 같아 다비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만지고 싶다잖아. 음란한 김다비가 본체에게 바람을 넣었다. 대체 뭐가 만지고 싶단 거지. 다비는 점점 잠에서 깨고 있었다. 아니, 잠은 이미 깬 지 오래고 다시 잠들기는 그른 상태였다. 손부터 줘볼까.
다비는 뒤척이며 손을 재하 앞에 툭 내려놓았다. 몰래 한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인지 순간 재하가 급하게 숨을 죽였다. 그나마 양심은 있는 녀석이라며 다비는 속으로 재하를 칭찬했다.
숨죽였던 재하가 미동 없는 다비를 살피더니 다시 숨을 내쉬며 끙끙거렸다.
“형….”
빨고 싶다고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기특하단 생각이 들었다. 빨라고 내어준 손인데 재하는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그게 제법 기특해서 다비는 다시 몸을 뒤척이며 재하의 입 앞까지 손을 대주었다. 재하의 입술에 손끝이 톡 닿자 재하가 앓는 소리를 내며 더운 숨을 뱉었다.
“조, 금만. 미안해요. 형, 좋아해요.”
재하는 다비에게 사과와 고백을 동시에 하고 손끝에 입을 맞췄다. 뜨겁고 말랑한 입술이 닿았다가 살짝 떨어졌다가 곧 다비의 중지와 검지에 따뜻하고 축축한 것이 닿았다. 재하는 다비의 손가락을 입에 담고 혀로 손가락 사이를 핥으며 성기를 다시 흔들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는 다비가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냐면, 매트리스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하는 다비의 손가락이 성기라도 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 핥고 입 안에 넣으면서 신음을 울렸다. 제 손가락을 핥으며 자위하는 유재하라니. 솔직히 좋았다. 자신의 성기를 물고 있는 재하의 표정이 어떤지 다비는 여러 번 봐왔다. 저와 눈을 맞추고 반응을 살피며 제 성기를 입에 물고 잔뜩 흥분한 녀석의 표정이 눈을 감고 있는데도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씨발. 미치겠네.
“으읏.”
다비가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제 입에서 터진 소리에 다비는 얼른 입을 막아보았지만, 재하의 움직임이 멈춘 것으로 보아 재하 역시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찰나가 영원 같은 시간이었다. 서로 민망하기 짝이 없는 순간일 터라 다비는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재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계속 빨아도 돼요?”
“…….”
다비의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는지 재하는 다시 손가락을 입에 담았다. 깨어 있는 걸 알면 그만둬야지 왜 계속하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다비의 성기도 매우 급한 상황이었다. 다비는 제 손가락을 핥고 있는 재하를 보며 말했다.
“올라와. 궁상맞게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올라가서 자위해도 돼요? 형 보면서 할 건데.”
“안 돼.”
“그럼, 여기서 계속할게요. 형은 계속 자요. 손은 이대로 계속 두고요.”
저렇게 뻔뻔하게 나오니까 다비도 더는 참지 못했다. 어쩌겠는가. 같이 뻔뻔하게 나가줘야지.
“나도 꼴리니까 올라와서 같이 하자고.”
재하가 그 말에 다비의 손을 따라 입을 맞추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 와중에 바지는 추켜올리는 걸 보면 완전히 맛이 간 건 아닌 모양이었다. 재하는 올라오자마자 다비에게 몸을 포개고는 입부터 맞춰왔다. 혼자 놀기 심심했으니 이제 같이 놀아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열렬한 키스였다. 재하는 입을 쪽 맞추며 바짝 하반신을 붙여왔다.
“형, 안 힘들어요? 오늘 많이 싸서 금방 잠들었잖아요.”
“아는 놈이 밑에서 그러고 있었냐?”
“아니까 밑에서 혼자 했죠. 형도 섰네. 빨아줄까요?”
다비가 속옷을 벗으려고 밴드에 손을 올리자 재하가 다비의 손을 잡고 벗는 걸 도와주었다. 바짝 성이 난 성기가 모습을 드러내자 재하가 입술을 혀로 적시며 몸을 아래로 내려 다비의 기둥에 입을 맞췄다.
“형, 이거 빨면서 자위해도 돼요?”
“안 돼.”
“…네.”
어둠 속에서 시무룩한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다비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같이 하자고 말했잖아.”
“같이. 형도 저 보면서 자위하려고요?”
“넌 대체…. 순진한 건지 야한 건지 모르겠어. 이럴 때 보면 아는 게 없는 것 같은데, 하는 짓은 겁나 꼴리고. 기다려.”
다비는 상체를 비틀어 스탠드를 켜고 협탁에서 젤을 꺼냈다. 재하가 그걸 보더니 당황한 듯 물었다.
“섹스하게요? 괜찮겠어요?”
“아니. 하고 싶어도 몸뚱이가 따라줘야 하는 거지. 무리할 생각 없어. 오늘은 다른 거 할 거야.”
다비는 더 설명하지 않고 손에 젤을 듬뿍 짜내 손으로 비비더니 재하를 보며 다리를 활짝 벌려 젤이 묻은 손으로 제 성기를 훑기 시작했다. 재하가 그 절경에 목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숙여 다비의 무릎에 입술을 비볐다.
“형, 혼자 하는 거예요?”
“혼자 하게 두긴 할 거고?”
“아뇨. 그러니까 이제 알려줘요. 같이 하게.”
젤이 잔뜩 묻은 다비의 성기가 스탠드 불빛에 번들거렸다. 재하는 당장에라도 손으로든 입으로든 다비의 성기와 닿고 싶었다. 하지만 다비가 허락하지 않아서 참아야 했다. 한숨이 가득한 목소리로 형, 하고 부르자 다비가 감싸 쥐던 손을 벌리고 재하의 다리 사이를 발로 꾹 누르며 말했다.
“뭐 해. 같이 비벼.”
“…뭘. 아.”
알아들었다는 듯 재하는 곧장 옷을 벗었다. 비싼 돈을 주고 트레이너에게 관리된 탄탄한 몸의 굴곡을 따라 스탠드 불빛이 깊은 음영을 만들었다. 돈을 주지 않았는데도 타고난 흉흉한 성기는 멋들어진 복근 아래까지 바짝 솟아 있었다. 다비가 발을 뻗어 배의 굴곡을 매만지자 재하가 다비의 발을 낚아채 입을 맞추며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재하는 다비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다비의 성기에 잔뜩 발기한 제 성기를 손으로 눌러 맞췄다. 다비가 활짝 벌렸던 손을 오므리고 두 성기를 감쌌다. 재하가 마주한 성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입을 열었다.
“이런 방법이… 있었는데 왜 그동안 안 알려줬어요?”
“…나도 방금 생각났어.”
재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비의 손을 제 손으로 감쌌다. 다비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허리를 움직여야지. 이건 내가 잡고 있을 테니까.”
“그렇구나. 형은 진짜 다 잘해서 큰일이네요.”
수줍어하는 얼굴과 달리 재하는 허리를 뒤로 물렀다가 곧장 허리를 쳐올렸다. 다비의 성기와 손에 묻은 젤 덕분에 움직임이 수월했다. 손바닥과 다비의 성기가 같이 비벼지자 재하가 새로운 쾌감에 눈을 뜬 듯 감탄 섞인 신음을 흘렸다.
다비 역시 몸을 흠칫 떨며 제 성기에 오는 자극을 받아들였다. 머리로는 온갖 지식을 습득했지만, 이렇게 몸으로 직접 하는 것들은 죄다 재하가 처음이었다. 재하가 받는 첫 자극만큼 다비 역시 낯선 쾌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재하는 다비의 다리를 손으로 붙잡아 벌리고 본능적으로 허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다비를 내려다보았다.
“하, 혼자 할 때보다, 더 좋아. 형하고 같이 하니까… 후, 형은요?”
다비는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면 신음이 터질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재하의 굵은 성기가 제 것을 비비는 자극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답 대신 두 성기를 잡은 양손에 힘을 더 주었다. 더 좁아진 틈새를 들락거리던 재하는 몸을 숙여 다비에게 입을 맞췄다.
“이러니까 진짜 섹스하는 거 같아요. 진작 배울걸.”
섹스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제 밑에서 흥분한 다비의 표정이 좋아서 나온 말이었다. 신음을 참는 건지 다비의 목에 핏대가 솟았다. 재하는 다비의 목에 이를 박아 넣었다.
“하윽.”
숨과 함께 터지는 소리에 재하의 허릿짓이 더 빨라졌다.
“형, 더… 더, 들려줘요.”
재하가 목을 잘근거리며 재촉하자 다비 역시 기분 좋은 감각에 취해 꾹 참았던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어버렸다.
“읏, 아, 큭.”
다비의 신음에 재하의 성기가 크게 반응하며 꿈틀거렸다. 재하는 못 참겠다는 듯 숙였던 몸을 다시 일으켜 다비의 다리를 손으로 꽉 붙잡은 채 거세게 허리를 움직였다. 방 안은 질척이는 젤 소리와 살이 붙었다 떨어지며 나는 음란한 소리, 재하와 다비가 터트리는 숨소리로 조용하면서도 시끄러웠다.
계속된 자극에 다비는 먼저 사정할 것만 같았다. 저절로 허리가 들썩거리고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재하가 알아차리고는 더 움직이며 다비의 사정을 도왔다.
“으, 재하야….”
“형, 좋아해요.”
“아윽, …씨발. 이거… 좋아.”
“그래요? 저도요. 자주 해, 요. 우리.”
“흣.”
다비가 상체를 들썩이며 한숨을 터트렸다. 다비의 손 사이로 불투명한 흰 액체가 픽 튀어 올랐다. 자위는 재하가 먼저 했는데 사정은 다비가 더 빨랐다. 재하가 저를 내려다보며 흥분에 들떠 좋아 죽겠단 얼굴을 하고 아래로는 난폭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재하는 제 허릿짓으로 다비가 사정한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금방 사정감을 느꼈다.
“형, 저도 사정할 것 같은….”
“아, 아직. 나 방금 싸… 윽. 움직… 아읏.”
다비는 도리질 치면서도 성기를 감싼 손을 놓지 않았다. 재하의 살이 맞붙었다 떨어지며 음란한 소리가 적나라했다. 정말 재하가 말한 것처럼 섹스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재하하고 하면 아프지 않을 것 같은데, 마음은 벌써 하고 싶어 죽겠는데 몸이 안 따라주니 아쉬움만 가득했다.
“하, 형… 큿.”
난폭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허릿짓 끝에 재하의 성기에서도 하얀 액체가 울컥하고 쏟아져 나왔다. 절정에 오른 재하는 미간을 살짝 구기고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거칠게 호흡을 내뱉었다. 다비의 손안에서 성기를 빼지 않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마지막 여운을 잠재우고 있었다. 스탠드 불빛 때문인지 그 모습이 매우 나른하고 잘생긴 짐승처럼 보였다.
넋이 나간 눈으로 재하를 바라보던 다비는 다시 꼴릴 것 같아 먼저 찬물을 뿌렸다.
“진짜, 새벽에 자다 말고 이게 뭔 짓인지….”
“전 좋았어요. 가끔 새벽에 일어나서 형 보면서 자위해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 마.”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재하는 다비의 상체에 잔뜩 묻은 액체를 손으로 만져 섞어버렸다. 손에 묻은 정액을 입으로 가져가려는 재하를 보고 다비가 경악하며 재하의 손을 붙잡았다.
“이 미친놈이. 뭘 퍼먹어.”
“항상 먹던 건데, 새삼스럽게 왜요.”
“그, 그거하고 이건 다르지. 이건 이미 밖으로 나온 거고 그건 네가 안 빼주고 삼켰으니까…. 진짜, 발정기라도 온 거냐. 정말 시도 때도 없어.”
“발정기라도 있으면 좋겠네요. 좀 참아보게.”
발정기는 기간이라도 있지, 자신은 기간도 없이 계속 발정한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뻔뻔한 재하 때문에 다비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진짜 미친 것 같았다. 저 말도 귀엽다고 느껴지는 걸 보면 말이다.
기분 좋게 웃는 다비를 보던 재하는 부드럽고 순하게 미소 지으며 몸을 숙여 다비에게 쪽쪽 입을 맞췄다.
“좋아해요, 형.”
“그래. 알았으니까 이제 씻고 자자.”
다비는 재하를 토닥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하는 같이 씻자고 따라갔다가 등짝을 맞고 문 앞에서 다비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씻었다.
***
밖에 눈이 많이 내려 꼼짝없이 집 안에만 있어야 하는 날, 둘은 소파에 앉아 다비의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재하의 취향인 로맨스 영화와 다비의 취향인 액션 영화를 번갈아 가며 보던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재하는 더 이상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다비가 소파에 길게 누워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눕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다비의 머리가 점점 허벅지 안쪽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재하는 다비의 영화 감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참았다. 하지만 영화의 액션이 강해질수록 다비가 자꾸 뒤통수를 젖히며 재하를 자극했다. 자극을 받으면 반응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다비는 점점 반응하는 재하를 오히려 나무랐다.
“아, 거참. 진짜 시도 때도 없네.”
“…억울해요.”
“억울한 놈이 이러세요?”
“이건 진짜 억울해요.”
“뭐래. 좀 죽여 봐. 감상에 방해된다.”
“형.”
재하는 정말 억울했다. 이번엔 정말 영화만 볼 생각이었는데, 다비가 자신을 먼저 이렇게 만들었다. 재하는 억울함을 풀기 위해 다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얌전히 영화 볼게요.”
“그래. 넌 좀 참아야 할 필요가 있어.”
“그러게요. 형이 너무 좋아서 자꾸 이러네요.”
미안하다고 말하며 재하는 다비의 머리카락을 쓸고 귓바퀴도 만져주었다. 귀는 다비의 예민한 성감대 중 한 곳이었다. 귓불을 손으로 조물거리다가 귓가를 쓸며 재하는 능청을 떨었다.
“액션 영화는 정말 취향이 아닌데, 형하고 같이 보니까 재밌어요.”
“…그, 그러냐.”
다비의 어깨가 움찔거렸고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매일 다비의 몸을 물고 빨아댄 지 60일째였다. 이젠 어둠 속에서도 정확히 성감대만 물고 빨 수 있게 됐으니, 이렇게 훤히 보이는 곳에서 다비를 자극하는 것은 재하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재하는 다비의 귀와 머리카락을 만지며 계속 능청을 떨었다.
“형, 그럼 저 주인공은 개 때문에 저렇게 된 거예요?”
“어. 그런데 그냥 개가 아니었잖아. 목숨 같은 의미가 있는 개였다고. 나 같아도 저러겠…읏.”
다비가 몸의 변화를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황급히 몸을 웅크렸다. 재하는 모르는 척 계속 말을 이었다.
“아. 잔인해서 그렇지, 사랑이 주제인 영화였군요.”
“으…. 그, 그런 셈이지. 씨발.”
“왜요?”
“…저 새끼가 나쁜 놈이라 욕한 거야. 다른 뜻… 없, 어.”
“그렇구나.”
재하는 영화에 집중하면서 계속 다비의 귀를 만져주었다. 피가 난무하는 액션신이 펼쳐질 때쯤, 다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 못 참겠네.”
“왜요? 저 부분이 재미있는 거 아니에요?”
“몰라. 안 봐.”
다비는 소파에 앉아 있는 재하의 위에 올라타 곧장 하반신을 가슴에 바짝 붙였다. 확연하게 느껴지는 단단한 감촉에 재하는 모르쇠를 시전하며 깜짝 놀란 척했다.
“왜… 이렇게 됐어요? 형은 저런 영화 보면 꼴려요?”
“어. 그러니까 빨리 세워.”
뻔뻔하고 능글맞게 픽 웃으며 저를 내려다보는 다비를 도무지 이길 수 없었다. 이 사람을 이기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애초에 그럴 수 있기나 한 건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발정한 다비를 위해 같이 발정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다비의 허리를 손으로 부드럽게 매만지며 재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이 원하신다면….”
***
12월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제 완연한 겨울이었다.
다비는 자다가 한기를 느껴 몸을 움츠리며 제 옆에 누워 있는 재하를 찾았다. 손을 뻗기 전에 먼저 저를 품에 안아주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비는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들어 올려 옆자리를 살폈다. 옆자리에 당연하게 있어야 할 재하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 침대 가장자리로 눈을 돌렸지만, 그곳에도 없었다. 다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침실 문을 열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다비의 후각을 자극했다. 저절로 고개가 주방 쪽으로 향했다.
“거기서 뭐 하냐?”
불 앞에 서 있던 재하가 다비의 목소리를 듣고는 몸을 돌려 예쁘게 웃었다. 잘생긴 녀석이 아침부터 예쁘게 웃어서 다비도 잘생긴 미소로 답해주었다.
“이따 깨우려고 했는데, 벌써 일어났네요. 더 자도 괜찮은데…. 피곤하지 않아요?”
“푹 잤어. 자다가 추워서 일어났어.”
춥다면서 속옷만 입고 있는 모순적인 행동에 재하는 다비를 보며 낮게 웃었다. 답답해서 잘 때는 속옷만 입고 자는 다비지만, 정작 일어나서 보면 자신에게 찰싹 달라붙어 자고 있었다. 그게 좋아서 재하는 옷을 껴입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비는 제자리에서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려고 노력했다.
“배고파서 일어난 거야? 깨우지.”
“배고픈 게 아니라….”
눈을 비비던 다비가 식탁에 정갈하게 차려진 한 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누구 생일이야? 아침부터 뭘 이렇게 잔뜩… 얼씨구. 미역국도 있네?”
무심하게 나오는 소리에 재하가 오히려 놀란 눈으로 다비를 쳐다보았다.
“오늘 형 생일이잖아요.”
“아, 그런가.”
남 이야기하듯 덤덤한 다비의 반응에 재하가 먼저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경악했다.
“어떻게 자기 생일을 잊어버려요?”
“생일 챙기는 건 어렸을 때나 챙기는 거지. 우리는 전부 외국에 있으니까 서로 문자나 전화만 보내. 우리 부모님은 지금 율리 보느라 바쁜데, 뭘 우리까지 신경 쓰이게 해. 생일이 뭔 대단한 일이라고.”
재하는 세상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생일 때는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던 다비가 정작 본인 생일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게 속상했다. 재하는 곧장 다비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왜 대단한 일인지 알려주기로 했다.
“대단한 일이죠. 형이 태어난 건데. 이 세상에 김다비가 나타난 거잖아요. 아, 모아 누나도. 뭐…. 아무튼,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태어난 날인데, 어떻게 그 대단한 날이 대단하지 않다고 저한테 그렇게 무심하게 말할….”
“아, 그러지 마. 제발. 아침부터 진짜…. 아니, 아침 차려준 건 고맙고, 생일 기억해준 것도 고마워. 내가 그런 말에 안 익숙해서 그래. 그냥 생일 축하한다는 이야기만 해줘도 충분하거든. 그러니까 그 말만 해줘.”
아침부터 낯간지러운 말을 들은 다비는 팔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며 질색했다. 재하는 그런 다비에게 가까이 다가가 뺨에 입을 쪽 맞추며, 부담스럽게 다정한 눈을 하고 미소를 지었다.
“형, 세상에 태어나줘서 고마워요.”
“…어. 고맙다. 그런데 너 요리할 줄 알았어?”
“잘하는 건 아니지만, 훈이 형한테 조금 배웠어요.”
말과 달리 식탁은 제법 그럴싸하게 차려져 있었다. 전복과 소고기가 들어간 오지도식 미역국에 밥과 나물, 케첩으로 하트를 그려놓은 계란말이와 다비가 담근 김치가 예쁜 식기에 각각 담겨 있었다. 소박하지만 미역국까지 갖추고 있으니 완벽한 생일상이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세팅하면 설거지하기 귀찮을 텐데 그냥 한 접시에 대충 차리지.”
새벽부터 일어나 고생했을 녀석이 안쓰러워 삐딱한 마음이 튀어나왔다. 어색해하는 다비의 표정을 보고 재하는 배시시 웃으며 다비를 끌어안았다.
“설거지도 제가 할 테니까, 형은 맛있게 먹어주면 돼요.”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무튼, 고맙다. 공연하느라 바쁜 녀석이 훈이한테 언제 이런 건 다 배웠대.”
“형하고 같이 생일을 맞게 되면 제가 직접 형 생일상 차려주고 싶어서 조금씩 배웠어요. 사실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어요. 지금 만들고 있는 저거하고요.”
재하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전기 레인지 위에서 무언가 끓고 있었다. 달콤하고 익숙한 향기에 다비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갈비찜이야? 이것도 훈이한테 배웠어?”
“네. 갈비찜은 독일에서 훈이 형이 자주 해줬거든요. 삼촌이 워낙 좋아해서 거의 한 달에 한 번씩은 먹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삼촌 핑계 대고 갈비찜은 제대로 배웠어요.”
“나는 생일날 불고기 해줬는데, 네가 갈비찜을 하면 어떡하냐. 미안하게.”
“전 말을 안 해서 그런 거잖아요. 불고기 맛있었다니까요. 그런데 제가 만든 게 형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어요.”
“괜찮아. 맛이 중요하냐. 정성이 중요한 거지. 한국에 있을 때 생일이면 아빠가 차려주긴 했지만, 나 미국에서 생일상 받는 거 처음이야. 촬영이랑 겹치거나, 바빠서 잘 안 챙겨 먹었거든. 모아가 미국 살긴 해도 끝과 끝이라서 서로 챙겨주기 힘들고. 진짜 고맙다. 항상.”
재하는 지난 시간 동안 다비에게 잊지 않고 매년 생일 축하 문자를 보냈던 녀석이었다. 자신에게 생일 문자를 보내주는 사람이 재하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어느 나라에 있든 시차에 맞춰 가장 먼저 축하를 보내는 사람은 재하였다. 그런 녀석이 직접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어 요리를 배웠다는 말이 예쁘고 고마워서 오늘은 의식하고 좋은 말만 해주기로 다짐했다.
“나 얼른 씻고 올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덤덤하게 말해놓고 기분이 좋아 보여서, 재하는 어설픈 실력이지만 생일상을 차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비가 씻고 나오자, 식탁에는 갈비찜까지 세팅되어 있었다. 이것까지 오르자 정말 생일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재하는 자신 없어 하며 겸손을 떨었다.
“마음은 형이 제 생일상 차려준 것처럼 차리고 싶었는데,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한계예요. 정성을 봐서라도 맛있게 드세요. 생일 축하해요, 형.”
“응. 고맙다. 갈비찜에 뼈만 빼고 네가 만든 음식 깨끗이 먹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 입맛 그렇게 까다로운 편 아니야. 잘 먹을게.”
다비는 재하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전복은 어디서 났어?”
“한인 마트에서 사 왔어요. 마침 있더라고요.”
“…한인 마트는 여기서 좀 먼데. 어떻게 갔다 온 거야?”
“우버요. 공연 왔을 때도 자주 이용했던 거라서 어려운 건 없었어요.”
“아, 그렇구나. 전복 들어간 미역국 진짜 오랜만이다. 어렸을 때는 미역국에 전복 들어간 거 진짜 질렸었는데, 덕분에 몸보신하겠네.”
다비는 말과 함께 미역국을 떠먹었다. 겸손을 떤 것 치고는 맛이 상당했다. 훈이 알려줬다고 하지만 초보가 이렇게 고기와 전복을 둘 다 부드럽게 끓이는 게 쉽지 않은 음식이었다. 재하의 미역국은 둘 다 부드러웠고 잡내가 없이 진하고 시원한 맛이 나는 진짜 오지도 미역국이었다.
“이거 맛있다. 유재하 제법이네. 요리에 소질 있는 거 아니냐?”
“입맛에 맞아요? 다행이다.”
“과장 아니고 진짜 맛있어. 간도 딱 맞아. 밥 말아야겠다.”
다비는 미역국에 밥을 말았다. 간단히 차려낸 나물도 깔끔하게 맛있었다. 하트가 신경 쓰였지만, 계란말이도 예쁜 색으로 잘 부쳤고 특히 갈비찜은 진짜 훈이 만든 것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뭐든 배우면 잘하는 녀석이 있다던데, 재하가 그런 사람이었나 보다.
“갈비찜은 진짜… 훈이가 만든 거 네가 가지고 온 줄 알았다. 아니면 훈이가 간밤에 여기 왔다 간 거 아니냐?”
“그 정도예요?”
“어. 진짜 맛있어. 뼈까지 씹어 먹고 싶을 정도로. 너도 얼른 먹어. 난 이제 먹는 데 집중할게.”
다비는 재하가 차린 생일상을 정말 뼈만 빼고, 싹 비웠다. 재하는 빈 그릇을 보자 뿌듯해졌다.
밥을 먹고 정리한 후, 재하가 다비와 함께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잠시 쉬고 있었다.
“형, 생일인데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어요?”
“미역국 먹었으면 생일 끝이지. 겨울엔 돌아다니는 거 싫어. 밖에 눈도 왔는데 발 질척거리는 것도 싫고.”
“그래도 형 생일인데. 아니, 제가 형 생일 챙겨주고 싶어서 그래요.”
“그냥 집에서 뒹굴….”
그때, 다비의 휴대폰이 바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다비는 흘끗 액정에 눈길을 주었다가 곧장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잠깐만, 문자 와서.”
다비는 잘생긴 미소를 지으며 문자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답문을 보내는 손길이 바빴고, 눈을 예쁘게 휘며 입가에 미소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다비의 미소가 짙어질수록 재하의 얼굴이 살벌해졌다. 재하는 다비를 저렇게 웃게 만드는 상대가 누군지 정말로, 매우, 엄청 궁금해졌다.
“형. 누구예요?”
“어. 가족 대화방. 생일 축하한다고 문자 온 거야. 밥 먹었냐고 물어봐서 끝내주는 생일상 받았다고 지금 자랑 중.”
“아. 가족들이었군요.”
다비의 미소가 자신이 차린 생일상 덕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재하는 솟구쳤던 질투심을 얼른 쑤셔 넣었다. 문자를 다 보낸 다비가 재하를 보고 몸을 흠칫거렸다. 재하가 저를 보며 매우 부담스럽게 그윽한 눈으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어서였다.
“뭐냐. 왜 갑자기 그렇게 웃고 있냐.”
“아, 형 문자 보내는 거 보니까 제가 문자 보냈을 때, 형이 그런 표정으로 제 문자도 읽어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형 표정이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어요.”
자신이 무슨 표정을 어떻게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재하 때문에 다비는 얼굴이 따끈해지고 심장이 간지러웠다. 오늘은 정말 좋은 말만 해주려고 했는데, 부끄러워져서 삐딱한 마음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너, 너는 문자를 너무 많이 보내서… 이런 표정 안 나올걸. 너한테 답장 보내는 건 꽤 힘들거든. 한두 개여야 웃으면서 보내지.”
“정말요? 지금까지 정색하면서 답장했어요?”
“어. 그러니까 좀 줄여. 아닌 게 아니라 네가 문자 안 보내니까 내 여유 시간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라니까.”
“제 문자가 그렇게 지겨웠어요? 그럼 앞으로 보내지 말아야 하나요?”
재하가 시무룩해하자 다비가 그제야 웃으면서 농담이라고 얼러주었다.
“네 문자 읽는 거 재미있어. 너무 많이 보내서 가끔 부담스럽긴 해도 7년이 넘게 문자를 보냈는데 나도 익숙해졌지. 이제 그거 없으면 허전할 정도니까 앞으로 문자 계속 보내도 돼.”
“네. 형이 원하신다면 앞으로도 계속 노력….”
“아니, 노력은 하지 말고 좀 줄여. 줄이라는 말은 진심이야. 해가 갈수록 문자 수가 늘어나. 내년에는 더 늘어날 거 같으니까 이렇게 얼굴 보고 있을 때 미리 말해둬야지. 남들이 보면 문자 보내는 게 본업이고 첼리스트가 부업인 줄 알겠다.”
“제가 문자 보낸 시간 다 합쳐봐야 하루에 서너 시간 정도밖에 안 돼요. 제가 문자를 빨리 보내서 그렇지 틈날 때마다 보내는 거라서 제 일상에 문제가 될 만큼 보내는 건 아니에요.”
다비가 문자 하나를 재하에게 보낼 때, 재하는 몇십 통씩 보내곤 하니까 재하가 손이 빠르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재하는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하는 것 같았다. 첼로만 잘하는 손인 줄 알았더니, 요리도 제법 하고, 빨래도 예쁘게 잘 개고 청소도 옆에서 몇 번 보더니 곧잘 따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몸을 쓰다듬는 손이라든가, 만지는 것도 알려주면 금방 배웠다. 손만 아니라 몸도 잘 쓰는 녀석이었고…. 의식의 흐름을 음란한 김다비가 제어하는 중인지 갑자기 저를 물고 빨아대던 유재하가 떠올랐다.
문자 이야기를 하다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당황하고 있는데, 재하가 몸을 숙여 다비와 눈을 맞춰왔다.
“형? 제 이야기 들었어요?”
“…어? 뭐, 뭐라고 했는데?”
“선물 준비했다는 이야기… 인데.”
재하가 붉어진 다비의 얼굴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 또 꼴렸어요? 이번엔 어디에 꼴렸는지 알려주면 안 돼요?”
“아니. 안 꼴렸는데?”
“얼굴 지금 엄청 빨개요. 형은 야한 생각 하면 얼굴에 다 티 나는데….”
“아니라고. 진짜 아니야. 아니라니까? 너, 그렇게 웃지 마라. 변태 새끼 같으니까.”
“맞아요. 전 항상 형을 생각하면 변태 새끼 같아져요. 그러니까 알려줘요. 무슨 생각 했어요?”
이 순간만큼은 왕성한 제 혈액 순환과 혈액 순환이 티 나게 드러나는 제 피부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이건 삐딱하게 굴어도 제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니 숨길 수도 없었다. 오늘은 재하에게 좋은 말만 해주겠다던 다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미간을 팍 구기며 손을 내밀었다.
“서, 선물 준다며. 빨리 내놔. 변태 새끼야.”
“변태 새끼가 형 생일 선물로 이 아파트 사려고 했거든요.”
“하지 마.”
“네. 그래서 안 했어요. 대신 차를 사려고 했죠. 차 없으니까 좀 불편해서.”
“난 안 불편하니까 사지 마. 샀으면 취소해.”
“네. 형 촬영 때문에 여기에 오래 없으니까 안 샀어요.”
놀리는 것 같은 말투에 다비가 재하를 쳐다보자, 재하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이제야 얼굴 보여주네.” 하며 미소 지었다. 다비가 다시 고개를 피하려는데 재하가 다비의 뺨을 붙잡고 눈을 맞췄다.
“형 생일 선물 준비하는 게 좋으면서 어려웠어요. 어떤 걸 골라야 형이 싫어하지 않을까, 어떤 걸 받아야 기뻐할까. 하데스 데려올 때보다 더 고민했던 거 같아요. 그렇게 형 생각하면서 준비한 거예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재하는 다비의 뺨을 놓아주고 침실로 들어가서 포장된 선물을 가지고 나왔다. 부피가 매우 커 보이는 포장을 보고 다비는 인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인형을 안고 나오는 것 같은 자세도 그렇고, 재하는 낭만적인 걸 좋아하는 녀석이니까 자연스럽게 사고가 그렇게 흘렀다.
‘형, 저 없으면 대신 이 녀석을 저라고 생각하고 꼭 안고 자요. 꼭이요?’라는 말을 하면서 제 품에 인형을 안겨주는 녀석을 상상하니 조금 귀여운 것 같아 입가가 느슨해졌다.
“생일 축하해요.”
재하는 다비에게 선물을 안겨주었고, 인형이라고 생각했던 선물은 생각보다 꽤 묵직했다. 생각했던 인형이 아니자 재하보다 더 낭만적인 생각을 한 것 같아 다비가 당황했다.
“…이거 뭐야? 돈다발이냐? 선물은 현금으로… 뭐 이런 거야? 뭐가 이렇게 묵직해?”
“아, 그걸로 준비할 걸 그랬나요. 그것도 후보 중에 있었는데, 그건 써버리면 흔적이 안 남아서 제일 먼저 탈락….”
“아니야. 아니라서 다행이야. 뭔진 모르겠지만, 고맙다. 풀어봐도 돼?”
“네.”
다비는 거실 바닥에 앉아 재하가 준 선물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재하는 다비 앞에 마주 앉아 다비의 반응을 기다렸다.
포장지에서 나온 물건은 방수되는 부츠와 모자, 장갑과 스웨터, 내복과 두툼한 양말 같은 것들이었다. 제일 밑에는 고가의 패딩이 들어 있었다.
다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재하를 보았다.
“여기가 그렇게 추웠어?”
“…네?”
“아무리 추워도 이렇게까지 껴입을 정도로 춥진 않아. 이건 거의 극지방 패션인데?”
난방을 더 올려달라는 무언의 시위를 하는 건가, 생각하는 찰나 재하가 선물의 목적을 말했다.
“오로라 보러 가요, 형.”
뜬금없는 이야기에 다비의 고개가 저절로 기울어졌다.
“오로라?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 원래 계획했던 거였어요. 섬에서 짠, 하고 겨울옷을 보여주면서 생일 축하하고 싶었는데, 조금 틀어졌지만요.”
그럼 그렇지. 역시 재하는 낭만적인 뭐, 감수성 예민한 그런 녀석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여행을 계획했는지 궁금해졌지만, 자신의 반응을 잔뜩 기대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보자 다비는 아무래도 좋아졌다.
“오로라. 볼만하지.”
“…본 적 있어요? SNS에 올라온 사진은 없었는데. 촬영도 그쪽은 아직 안 갔고.”
“뭐래. 넌 내 사전 조사를 하려면 좀 제대로 하지 그랬냐. 나 외가가 스웨덴인데 거기서 오로라 한번 못 봤을까 봐 이런 이벤트를….”
다비는 버릇처럼 말을 내뱉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전부 자신을 생각해서 짠 계획인데, 굳이 이렇게 초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섬에서 있다가 오로라를 보려고 했던 거라면 오래전부터 계획했다는 소리였다. 그걸 방금 무시한 것 같아 다비는 미안해졌다.
“그러니까…. 내, 내 말은 오로라 좋다는 이야기였어. 그리고 또 봐도 좋고. 그래! 무엇보다 너하고 보는 건 처음이잖아. 그게 중요한 거지. 안 그래?”
재하는 다비의 화법에 이미 적응한 터라 크게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오로라를 이미 봤다는 건 예상 밖이었지만, 다비의 말처럼 자신과 함께 오로라를 보는 건 처음이니까 상관없었다. 그런데 다비가 제 생각을 말로 해준 게 매우 기뻐서 조금만 시무룩한 척하기로 했다.
“제가 형에 대한 애정이 부족했나 봐요. 형 외가가 스웨덴인 건 알았는데, 그쪽은 오로라가 지나가는 곳이 아닌 아랫지방이어서 몰랐어요. 외가에 갔을 때 여행 삼아 갔다 왔었군요. 죄송해요. 다음엔 제대로 준비할게요. 제가 캐나다에서 공연했을 때, 오로라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전 아직 오로라를 본 적 없어서 형하고 꼭 같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어. 그랬구나. 가자, 캐나다. 나도 캐나다 오로라는 못 봤어. 내가 본 곳은 어렸을 때, 스웨덴하고 아이슬란드밖에 없어. 캐나다 오로라는 정말 처음이야.”
“아이슬란드도 갔었구나. 그럼 제 생일 선물이 그렇게 신나진 않겠네요.”
어깨가 축 처진 재하를 보던 다비가 얼른 바닥에 늘어놓은 선물을 손으로 쓸어 담아 품에 소중하게 안고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무, 무슨 소리야. 이건 진짜 실용적인데 내가 왜 싫어해. 돈 낭비했단 소리도 안 했잖아. 어차피 추운 지방도 촬영하러 다녀. 이런 건 있을수록 좋아. 이번만 쓸 거 아니고 앞으로도 쓸 수 있는 거잖아. 진짜 마음에 들어. 아, 캐나다 오로라 여행도 마음에 들고. 정말이야.”
“마음에 들어요?”
“응. 진짜 마음에 들어. 고마워.”
“그럼 뽀뽀해줘요.”
“응. 그래. …어?”
다비는 그제야 재하에게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뱉으며 끌어안고 있던 선물을 내려놓았다.
“이거 개새끼인 줄 알았더니 여우 새끼였네.”
“네. 여우 새끼는 지금 형한테 뽀뽀 받고 싶으니까 빨리 해줘요.”
“미친, 귀여운 새끼.”
다비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재하를 붙잡아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재하가 다비를 끌어당겨 안으면서 뽀뽀는 질척한 키스로 이어졌다. 한참을 비비던 입술이 떨어지고 다비가 숨을 고르며 재하에게 물었다.
“캐나다는 언제 갈 건데?”
“연말에요. 오래 있을수록 오로라 볼 확률이 높대요.”
“아. 연말. 잠깐만. 그때 리온이 생일 있잖아. 너 독일에 안 가봐도 돼?”
“훈이 형 있는데요, 뭐. 어차피 제가 가봤자 커플 사이에 껴서 방해만 되고요. 그리고 연말에 독일에 있으면 피곤해요. 그나저나 이런 분위기에서 삼촌 이야기가 나올 줄이야. 형, 우리 삼촌 정말로 좋아했어요?”
“아니라니까. 너 훈이 만나서 그런 소리 하기만 해봐라. 농담이라고 해도 나 진짜 훈이 놈한테 죽는다고.”
“그럼 제대로 입 막아줘요.”
하찮은 협박이 제법 귀여워서 다비는 재하에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재하는 다비의 허리를 매만지며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형, 우리 갈 곳에 야생 동물 보호 구역이 있어요. 사진 촬영 가능하대요.”
“그거 뭐야. 갈래. 진짜 좋아.”
다비는 재하의 생일 선물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
거리가 온통 꼬마전구와 화려한 장식들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길 때, 재하와 다비는 캐나다에 도착했다. 캐나다 역시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 조명들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다비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엔 관심 없었지만, 야생 동물 보호 구역에서 촬영할 수 있단 걸 알고부터 계속 들떠 있었다.
“이동하는 비행기는 언제 타? 저녁에?”
“이틀 후에 이동할 거예요. 일단은 밴쿠버에서….”
“지금 가고 싶다고오.”
“형, 지금 말끝 늘이면서 애교 부리는 거예요? 그거 좀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귀여우면 빨리 비행기 데려와.”
마음 같아서는 재하도 그러고 싶었지만, 한창 성수기인 터라 각국에서 여행객들이 몰려 재하조차도 쉽게 예약하기 어려웠다. 해주고 싶은데, 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이틀 동안 저렇게 귀엽게 굴 거란 생각을 하자 구할 수 있어도 구하기 싫어졌다. 일단 재하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다비를 달래주었다.
“죄송해요. 1년 전에 예약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오로라 투어가 인기가 많더라고요. 가는 건 어렵지가 않은데, 숙소 구하는 게 어려울 것 같아요. 짧게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린 꽤 오래 있다 보니… 이건 돈이 있어도 힘드네요. 하지만 형이 원한다면 제가 어떻게든 지금 바로 숙소하고 항공권 알아볼게요.”
솔직하게 사정을 말하는 재하를 보자 다비가 도리어 미안해졌다. 북극여우와 무스에 눈이 멀어 애새끼 짓을 한 기분에 다비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재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인데 네가 왜 미안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내가 너무 나댔다. 도시도 좋아. 캐나다는 촬영 때문에 몇 번 왔는데, 정작 도시에선 안 놀아봤어. 여기도 좋으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지 마.”
“그럼 일정대로 움직일까요?”
“응. 당연하지.”
확실히 다비가 자신에게 맞춰주려는 방법이 부드러워졌다. 전에는 같은 말을 하더라도 조금 퉁명스러웠는데, 지금은 방긋방긋 웃으며 잘생긴 얼굴을 무기로 쓰고 있었다. 좋은 변화를 눈으로 확인한 재하는 만족한 듯 미안한 표정을 풀고 미소 지었다.
“일단 숙소에 가요. 공연할 때 묵었던 곳인데, 꽤 괜찮더라고요.”
“그래. 가자.”
도착한 숙소는 이번에도 역시 좋은 곳이었다. 혹시 오로라를 보러 가는 곳도 숙소가 많은데, 재하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서 못 구했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재하에게 받은 만큼 돈으로 돌려주려고 하면 금방 울먹이니 그냥 받고 신나게 놀아주는 거로 보답하는 편이 서로에게 나았다. 그래도 소시민인 다비는 어쩔 수 없이 계산기를 튕길 수밖에 없었다.
“재하야. 진짜로 너 이렇게 돈 막 써도 돼?”
“네. 지금 아니면 제가 언제 써보겠어요. 바빠서 쓰고 싶어도 못 써요. 그리고 지금 쓰는 만큼 서울에서 전부 채워지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아. 건물주… 부럽네.”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서 계약만 떼버리면 그 건물이 다 형 거….”
“떼든 붙이든 네 건물이 왜 내 건물이 되냐. 그건 네 거지. 아무튼, 여기 좋다.”
다비는 창가에서 서서 밖을 구경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 사이로 사람들이 저마다 한껏 들뜬 얼굴로 길을 걷고 있었다. 추석이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연말이라는 게 실감 나지 않을 만큼 재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 이게 마지막 여행이려나.”
“…….”
재하의 한숨 소리가 들리자 다비가 당황하며 몸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재하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시무룩해져 있었다. 재하가 울먹이면 어째서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다.
“아, 아니. 내 말은 네가 계획한 백 일 여행에서 마지막이 되겠단 소리였어. 뭘 그렇게 세상 무너진 표정을 하고 있냐.”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세상 무너지는 소리인지 몰랐네요. 형이 말해서 그런가.”
쉽게 표정이 나아지지 않는 재하를 보자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찌릿해져서 다비는 재하에게 다가가 달래기 시작했다.
“재하야. 나는 네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때리고 싶다가도 달래주고 싶기도 하고 그래. 그런데 네가 웃으면 예쁘다는 건 알아. 그러니까 차라리 예쁘게 웃어주라.”
“웃으면 예쁘다고요? 제가요?”
“어. 좀 꼴리기도 하고. 아무튼 우는 것보다 웃는 게 훨씬 나아.”
“그럼 항상 예쁘게 웃을 수 있게, 형이 저 좀 받아주면 안 돼요?”
다비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재하는 재촉하지 않고 그냥 다비의 손을 잡았다.
“아직 시간 있으니까 더 생각해 봐요. 제가 계속 노력할게요. 대신 예쁘게 웃으면 형이 뽀뽀 많이 해줘요. 그건 괜찮죠?”
“그래.”
재하가 미소 짓자 다비가 곧장 입을 맞춰주었다. 마지막 여행이지만, 둘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서로를 위해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기로 했다.
둘의 마지막 여행이 시작되었다.
***
밴쿠버에서 이틀을 보내고 여행지에 도착한 건 깊은 밤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둘은 곧장 잠을 청했다.
이른 새벽,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재하는 잠에서 깨어났다. 미국에서는 항상 자신이 먼저 일어났는데, 눈앞에 있는 다비는 벌써 외출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형?”
“뭐 해. 안 일어나고. 빨리 나가자.”
“…이, 이 시간에요?”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는데, 다비는 어리둥절한 재하를 보며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 준비해야 조식 시간 맞춰 나갈 수 있어. 그리고 밖에 눈 많이 왔더라. 지금도 오고 있어. 나가자.”
미국에서는 춥다고 안 나가고, 눈이 와서 안 나가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비는 잔뜩 들떠 있었다. 밝게 웃으며 산책을 조르는 모습이 잠이 확 깰 정도로 잘생겨서 재하는 다비를 품으로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형, 밖에서는 그렇게 웃지 말아요.”
“뭐래. 내, 내가 뭘 어떻게 웃었는데. 괜한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나가자.”
“나가기 전에….”
재하는 다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아랫배로 가져갔다. 다비의 손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져서 재하가 낮게 웃었다. 다비는 손으로 더듬거리며 은근한 눈으로 재하를 바라보았다.
“새벽부터 발정하느라 고생이 많다. 재하야.”
“형이 태양보다 더 밝게 웃어서 이렇게 된 거니까 같이 해요.”
“미친놈. 이거 진짜 어떡하냐.”
다비는 헛웃음을 짓더니, 곧장 외투를 벗어 던지고 재하의 위에 올라탔다.
“한 번만 하고 나갈 거야.”
“네.”
도시에 있을 때보다 더 밝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다비를 보자, 역시 도시보다 자연에 풀어놓는 게 더 어울리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이라던 약속은 지키지 못했지만, 조식 시간에는 늦지 않았다.
***
오로라를 보러 왔지만, 도착하자마자 내린 눈이 폭설이 되는 바람에 이틀 동안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작은 시골 마을은 눈에 파묻혀서 온 세상이 하얗기만 했다. 재하가 빌린 숙소는 아늑하고 편의 시설이 잘되어 있는 곳이라서 안에서 지내도 심심하진 않았다.
“형, 내일은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오. 다행이다. 여행 끝날 때까지 여기서 계속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보름은 있을 예정인데 설마요. 전 내일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이대로 여기서 지내야 하는 건가 걱정했어요.”
“크리스마스이브…. 아, 그랬지.”
“이브니까 선물로 오로라 제대로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재하가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다비를 보며 웃었다. 다비 역시 일단 같이 웃어주었다.
“어. 그래. 나는 동물 보호 구역이 기대되는데.”
“내일 열심히 놀려면 일찍 자야겠네요.”
“응. 그래. 먼저 씻어. 난 카메라 손 좀 봐야겠다.”
재하가 욕실로 향하자, 다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 했다고 벌써 크리스마스이브지?”
분명 캐나다에 도착했을 때까지는 공항의 트리를 보며 곧 크리스마스라는 걸 기억했었는데, 이곳에 온 이후로 아무 생각 없이 날짜를 그냥 숫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에는 거의 마음 맞는 사진작가들과 보내거나 친구들과 보냈고,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다비는 매우 난감했다.
연인끼리는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내는 거지?
다비는 조금 전 머릿속으로 연인이라고 재하와의 관계를 정의한 것에 충격받았다. 얼마 후면 사라질 계약인데, 연인이라니. 다비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지금은 계약 ‘연애’ 중이니까 연인이 맞는 거라고 말이다. 그럴싸한 자기 최면으로 낯간지러운 관계 정리를 끝낸 다비는 다시 고민했다.
그래서 연인끼리는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내지?
재하의 권유로 시작한 일이라지만, 재하의 생일에는 몸으로 대충 때웠다. 그래놓고 자신의 생일에는 오로라 여행과 방한 풀 세트를 받았다. 크리스마스까지 어리바리하게 지나가면 그야말로 양심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재하에게 이번에는 꼭 제대로 된 선물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자마자 또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유재하는 부자였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고, 거기에 스스로 노력해서 부와 명성을 얻은 첼리스트였다. 이런 녀석에게 물질적으로 필요한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구하려면 뭐든 구할 수 있는 재하에게 자신이 아무리 좋은 걸 해준다고 하더라도 보잘것없을 것 같았다.
“내 생에 이런 거로 고민할 줄은 정말 몰랐네. 내가 재벌하고 이런 인연이 리온이 말고 또 있을 줄은….”
유리온! 순간, 자신과 같은 고민을 했을 녀석이 떠올라서 다비는 곧장 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잠깐 들리고 끊어지더니, 섬에서 가장 목소리 좋은 녀석의 다정한 울림이 들려왔다.
-응, 다비야.
“야. 크리스마스에 너흰 무슨 선물 하냐?”
-다짜고짜 무슨 소리야.
“일단 말해봐. 너는 리온이한테 매년 크리스마스에 선물 뭐 해주냐고. 걔 생일도 같이 있어서 더 신경 써서 해줄 거잖아.”
리온은 재하의 친삼촌이었다. 즉 Y·F그룹 사람이란 소리였다. 같은 재벌이고, 고훈은 재벌과 연애 중이었다. 오래 사귀었으니 그만큼 노하우도 있을 것 같아 연락했는데, 돌아오는 소리는 역시 염병할 소리였다.
-우리 리온이는 내가 해주는 거면 뭐든 상관없이 다 좋아하는데.
“아, 그런 허접한 대답 말고.”
-정말이야.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뭔가 준비해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워해. 가격을 신경 쓰는 게 아니라, 결국 마음이 중요하다는 거지.
“아…. 아니, 그런 달달하고 막 손발 오그라들 것 같은 소리 말고 뭐 없어? 현실적인 거. 리온이가 유독 열광적으로 좋아해서 기절하려고 했던… 뭐 그런 선물 말이야.”
훈의 대답이 늦었다. 음, 하는 소리로 고민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도 한참 말이 없었다. 답답해진 다비가 훈을 재촉했다.
“야, 고훈. 너 이럴 거냐? 나 정말 궁금해서 숨넘어가도 좋아?”
-음. 그러니까.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어. 뭐든 일단 해봐. 아,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밥도 이거보단 빨리 뜸 들겠다.”
-그러니까… 일단. 고, 고추에 리본을….
“야! 이 미친 새끼….”
다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주 오래전 고훈의 질문에 자신이 알려준 방법이었다는 게 떠올랐다. 아, 그거 효과 좋았다고 했지. 그런데 그건 리온이가 훈의 생일에 해줬던 이벤트 아니었나? 고훈 이 미친놈도 결국 리본을 달았던 건가? 친구의 침대 사정을 듣고 싶지 않았지만, 뭔가 자기가 뿌린 씨를 거둬들인 기분이었다.
“그래. 미안하다. 알려준 내가 미친 새끼였네.”
-응. 알면 됐다. 아, 그런데 효과는 정말 좋았어. 리온이 기절 이야기하니까 그게 먼저 떠올라서….
“그만. 미안해. 그만 듣고 싶다. 끊자. 리온이 생일 잘 챙겨줘라. 생일 축하한다고 전해주고. 독일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라.”
-나 독일인 거 어떻….
매년 이맘때 거기에 있으면서 신기해하는 훈의 말을 가볍게 넘기고 전화를 끊은 다비는 답답함에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훈의 말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고추에 리본을 매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결국엔 마음이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이야기인데, 재하가 정말로 원하는 건 자신이 줄 수 없었다. 지금 여행의 최종 목적이 연애하기 위한 거라지만, 다비는 여전히 망설여졌다.
“고추에 리본….”
다비는 얼른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유재하 앞에서 고추에 리본을 달고 쇼라니. 술도 안 마시고 맨정신에 거기까지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궁금하네.
“미친 건가.”
한편으로는 재하의 반응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정말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면 재하가 눈이 돌아서 달려들 것 같았다. 완전히 눈이 돌아버리면 그냥 섹스로 이어지지 않을까. 차라리 재하가 참지 않고 해버리길 바랄 때도 있었다. 삽입하려고 할 때 몸이 덜컥 굳어버리는 것만 무시하고 곧장 섹스로 이어진다면 의외로 몸이 적응할지도 모른다.
다비는 섹스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에 갑자기 자괴감이 들었다. 얼마나 비싼 몸이라고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거창한 타이틀까지 달아야 하나 싶었다. 게다가 거부증이 나타나면, 그것 또한 분위기를 망치는 지름길이었다. 즐거워지자고 했다가 재하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느니 차라리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나아 보였다.
“아. 있다. 하나. 유재하가 환장하는 거.”
좋고 비싼 것만 해주려고 고민했던 다비는 훈의 말을 듣고 재하가 좋아할 만한 것을 다시 생각한 끝에 하나 찾아냈다. 이건 분명 재하가 좋아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비는 재하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결정하고 나서야 마음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
크리스마스이브의 축복인지 정말로 눈이 그쳤다. 드디어 둘은 여행 온 목적을 실행할 수 있었다. 재하와 다비는 혹한에도 끄떡없게 중무장을 하고 가이드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일정은 대부분 단순했다. 오전에는 이곳에서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즐기고, 오후에는 휴식 후 어두워지면 오로라를 보러 다니는 것이었다. 계획은 일단 그렇게 짰지만,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넉넉하게 날짜를 잡았으니 충분히 즐기다 갈 생각이었다. 이곳보다 오로라를 더 잘 볼 수 있는 지역이 있었으나 낮에 즐길 프로그램이 그리 많지 않아서 이곳으로 정했다는 재하를 다비는 아낌없이 칭찬해주었다.
일단 첫날은 다비가 가장 가고 싶어 했던 야생 동물 보호 구역으로 가기로 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과 버스를 타고 보호 구역으로 입장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포인트에서 촬영하는 식이었다. 가이드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야생 동물 보호 구역에 대해 설명해주며 좋은 취지를 알려주었지만, 아쉽게도 사람들은 가이드의 설명보다 야생 동물을 촬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랜만의 맑은 날 덕분인지, 동물들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미친, 북극여우. 진짜 귀여워. 너무 귀여워서 욕 나올 것 같아. 눈밭에 있으니까 눈하고 코만 보여. 귀 토실토실한 것 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도망도 안 가고. 여우야, 여기 보자.”
재하는 여행객들 대신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주며, 잔뜩 들떠 있는 다비를 감상하고 있었다. 다비가 웃을 때마다 차가운 공기에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양 뺨이 발그레해진 상태로 찍고 싶은 걸 마음껏 찍고 있는 다비의 표정은 미국에서 있을 때보다 더욱 생기 있었다. 소년이 된 것 같은 밝은 얼굴에 재하는 다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재하는 다비와 같은 곳에 서서 여우를 보았지만, 그냥 여우였다. 인터넷 사진에서 보던 딱 그 정도의 귀여움을 가진 여우. 다비에겐 북극여우가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해졌다.
“재하야. 얘 진짜 귀엽지 않냐? 봐봐.”
다비가 환하게 웃으며 재하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재하는 다비가 찍은 사진을 보고 나서야 감탄을 터트렸다.
“진짜 귀엽네요. 사랑스럽고. 사진을 너무 잘 찍는 거 아니에요? 실물보다 사진이 훨씬 나아 보이는데. 형 눈에는 북극여우가 이렇게 보이는구나.”
재하의 눈에는 정말 그랬다. 다비의 시선을 한번 거친 세상은 더 아름답고 반짝거렸다. 그래서 그의 사진을, 그의 마음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재하의 말에 다비가 오랜만에 질색했다.
“뭐래. 모델이 좋으니까 이렇게 사진발도 잘 받는 거지. 내가 찍는다고 쓰레기가 보석 되고 그러는 거 아니거든.”
“형이라면 가능할 거예요.”
“…으. 제발. 그런 말 하지 마.”
진심으로 한 말인데 다비가 부끄러워했다. 사람들 앞에서 이런 다비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 재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다비는 북극여우를 비롯해 산양, 스라소니 같은 여러 동물을 원 없이 잔뜩 카메라에 담으며 행복해했다. 재하는 다비가 얼어붙기 직전까지 함께 곁에서 돌아다녀 주었다.
따뜻한 차 안으로 들어오며 체온이 오르자, 다비의 코끝과 뺨이 한층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재하는 주머니에 있던 핫팩을 다비에게 건네주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채 핫팩에 볼을 비비는 다비가 괜히 야해 보여 재하는 다비에게 슬쩍 수작을 부렸다.
“밤까지 시간 많은데, 숙소에 가면 뭐 할 거예요?”
“자야지. 새벽까지 추운 데 있으려면 지금 가서 푹 자야 해. 왜. 어디 가려고?”
그거 아닌데…. 오로라에 심드렁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의욕적인 대답이었다. 오늘은 오로라를 보러 가는 첫날이니까 재하가 욕정을 참기로 했다. 추운 곳을 탈출해 숙소로 돌아오자, 다비를 부지런히 따라다녔던 재하도 결국엔 지쳐 다비 옆에서 얌전히 잠을 청했다.
***
“재하야, 이제 일어나서 밥 먹고 나가자.”
도시에선 부지런했던 재하는 자연 앞에서는 무기력한 인간이었다. 따뜻한 이불과 따끈한 다비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잔뜩 기대하고 있는 다비의 얼굴을 마주하자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저녁… 먹어야죠.”
“응. 옆 숙소에 스페인에서 온 커플이 식당 추천해줬어. 거기 꽤 괜찮다던데.”
“아. 그래요? 그럼 가야죠. 그런데 스페인 커플하고는 또 언제 친해졌어요?”
“너 자고 있어서 잠깐 바깥에 나갔다가….”
재하는 그 말에 잠이 확 깼다. 다비의 친화력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했다. 자신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룬다지만, 다비는 그 수준이 아니라 그냥 주위의 모든 사람을 친구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인간관계를 질투하면 끝도 없다는 걸 알지만 질투할 수밖에 없는 건, 그 친구라는 범위 중에 다비가 그어놓은 선을 성큼 넘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까 봐 불안해서였다.
“다음부턴 일어나면 저도 같이 깨워요.”
“곤히 자고 있으니까 그랬지. 얼른 준비하고 나가자. 밤부터 새벽엔 진짜 추워. 핫팩도 잔뜩 챙겨야 해. 날이 추우면 카메라 배터리도 빨리 방전돼서 신경 쓸 게 많아. 휴대폰 배터리도 엄청 닳는다. 보조 배터리 가져가도 충전 안 될 때도 있….”
재하는 침대에서 일어나 신나서 잘생긴 얼굴로 생글거리는 다비를 꼭 끌어안았다.
“좋아해요, 형.”
“그래. 잠 깼나 보네. 가서 씻어.”
“…네.”
수작 부린 건데 넘어오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 앞에서 반짝거리는 다비는 멋있고, 멋있는 만큼 철벽이 대단하니까 재하는 얌전히 말을 듣기로 했다.
씻고 낮보다 더 완전 무장한 둘은 커플이 추천해준 식당에서 고기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가이드와 만나기로 한 숙소 앞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남은 피로를 씻어냈다.
“며칠 후면 숙소 이동할 거예요. 호수 근처에 통나무집이 있는데, 거기서는 오로라 관측을 안에서도 할 수 있대요. 거기가 인기가 많아서 예약 잡기 힘들었어요.”
“오. 그렇구나. 난 지금처럼 헌팅도 좋은데.”
오로라를 관측하는 유명한 방법에는 한 곳에서 오로라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방법이 있었고, 오로라가 나타나는 지역으로 직접 차를 몰아서 오로라를 구경하는 방법이 있었다. 재하는 후자인 오로라 헌팅을 예약해두었다.
경험 많은 가이드가 따라붙어 오로라를 관측하기 좋은 장소로 안내해주기 때문에 다비가 주위 사람들 방해 없이 마음 편하게 촬영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 예약한 것이었다. 진짜 속내는 오로라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두면 새벽에는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되어 있을 것 같은 다비를 격리하는 거지만, 표면적인 이유는 일단 그랬다.
잠시 후 둘의 뒤에서 영어가 들려왔다.
「재하, 데이비드?」
약속 시각에 맞춰 카페 안으로 들어온 가이드가 둘을 곧장 찾아냈다. 시즌이 시즌인지라 가족이나 여러 명의 친구, 커플이 대부분인 곳에서 남자 둘만 온 건 재하와 다비뿐이었으니 눈에 띌 수밖에 없던 모양이었다.
다비가 먼저 일어나서 가이드와 인사를 나누었다.
「데이비드 킴입니다. 이쪽이 동행이고요.」
「반갑습니다. 유재하입니다.」
가이드는 둘과 악수하며 서글서글한 미소를 보였다.
「리암 스미스입니다. 리암이라고 불러주세요.」
생각보다 젊은 가이드의 등장에 재하는 일단 경계부터 시작했다. 가이드는 재하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의 임무에 충실하게 움직였다.
「프라이빗 투어로 신청하셔서 둘만 절 따라오면 돼요. 나갈까요?」
리암은 다비가 가지고 온 카메라 가방을 보며 말했다.
「장비가 상당하네. 이따 오로라가 나타나면 우리가 따라다니면서 사진 찍어주는데.」
「아, 사진은 제가 직접 찍을 겁니다.」
「그럼 도착해서 세팅해줄게요. 오로라는 그냥 찍는다고 찍히는 게 아니라서.」
「알려줘서 고맙지만, 그것도 제가 세팅할 수 있습니다.」
가이드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까딱하며 둘을 밖으로 안내했다. 철벽이 일상이라 정중하게 사양하는 다비가 멋있어서 재하는 리암에 대한 경계를 한 단계 낮추기로 했다. 둘을 태운 차는 마을을 떠나 어두운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도착한 곳은 그저 암흑이었다.
차에서 나오는 헤드라이트 이외에는 전부 어둠뿐인 곳. 재하는 살면서 이렇게 어두운 곳에 있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휭 하는 바람 소리만 가득한 이곳이 어쩐지 무서워져 저도 모르게 다비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형.”
“여기 괜찮네.”
“이렇게 깜깜한데요?”
“응. 주위에 나무도 없고. 오로라 관찰하기엔 딱 좋겠어. 리암이 좋은 곳으로 데려온 거 같네.”
다비는 마음에 들어 했지만, 재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어두우면…. 이벤트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장소가 마음에 든다는 다비에게 장소를 옮기자고 차마 말할 수 없어서 재하는 다음 장소에서 이벤트를 하기로 계획을 바꿨다.
“여기 사람들은 오로라를 노던 라이트(Northern light)라고 불러. 그런데 다들 오로라라고 하니까, 오로라라고 말해도 알아듣더라.”
“그렇군요. 오로라가 익숙해서 그런지, 전 오로라가 편하네요.”
“사실 나도 오로라가 더 편해.”
리암이 불을 끄고 시동을 켜둔 채 밖으로 나왔다.
「오로라는 내가 보고 있을게. 조금 있으면 나올 거야. 추우니까 차에 들어가 있어.」
차에서 이동하는 사이, 재하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리암과 다비는 단숨에 친해지고 말았다. 재하는 그게 매우 못마땅했지만, 다비 앞에서 대놓고 으르렁거렸다가는 등짝을 맞을 것 같아서 속으로만 불만을 표했다.
리암의 제안에 다비가 곧장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도 충분히 예쁜걸. 촬영할래.」
재하가 촬영하려고 카메라 가방을 열려는 다비를 붙잡았다.
“형, 이렇게 어두운데 무슨 촬영이에요. 가이드 말대로 차 안에 있다가 나와요.”
“재하야.”
“네.”
“나만 보고 있지 말고, 고개 들어봐.”
재하는 다비가 시키는 대로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재하의 입에서 감탄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와… 저게 다 별이에요?”
“예쁘지? 저렇게 예쁜 걸 두고 내가 어떻게 차에 들어가냐.”
하늘에는 별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빛이 없는 지상 덕분에 하늘에 별들이 쏟아질 듯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별이 유리 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거리는 광경을 재하는 실제로 처음 보았다.
“전 사진에서 보는 별들이 전부 보정이나 그래픽 작업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이럴 수가 있군요.”
“우리 섬에서도 겨울에 날 춥고 맑은 날에는, 저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하게 보여. SNS에도 종종 올렸는데.”
“네. 그러니까요. 전 그게 너무 말이 안 될 만큼 예뻐서 보정인 줄 알았어요.”
“후보정이야 하지만, 원본을 훼손하는 수준까지 손대지는 않아. 아무튼 밤하늘부터 일단 촬영하고 오로라 나오기 전에 차로 들어가자.”
다비는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면서도 정확하게 카메라를 설치했다. 어두운데도 익숙한 듯 촬영 장비를 세팅하는 소리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다비는 하늘을 향해 사진을 찍었다. 화면을 확인하더니 곧장 카메라를 세팅하고 다시 하늘을 찍었다.
“재하야. 어떠냐.”
“형 사진이야 항상 최고…. 우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많은 별들이 다비의 카메라에서 빛을 냈다. 어둡기만 한 밤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거기에 다비의 실력과 다비의 시선이 담겨 있어서 재하에겐 너무나도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형이 하늘에 있는 별들을 전부 낚아서 카메라에 담은 것 같아요. 하늘을 낚은 어부 같아. 멋있어요.”
“…어. 그래. 마음에 들었단 소리지? 응. 먼저 들어가 있어. 춥다. 난 몇 장만 더 찍고 곧바로 따라 들어갈게.”
“곧바로면 같이 들어가요. 형 사진 찍는 거 구경할래요.”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뭘 보겠다고. 뭐 그러든지.”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연신 터지는 셔터 소리에 다비가 매우 신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늘을 카메라에 가득 담고 다비가 카메라 가방을 손에 들었다.
“다 찍었어. 배터리 방전되기 전에 차 안에서 기다리자.”
다비와 재하가 차로 향하는데, 리암이 둘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나왔어.」
리암이 둘에게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곳에는 하얀 연기가 구름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재하가 의심스러워하며 리암에게 말했다.
「구름 같은데?」
「지금은 시작이라 그래. 카메라로 비추면 사진에서 보던 녹색 빛이 잡힐 거야. 봐. 데이비드는 벌써 촬영 준비하고 있잖아.」
「…저게 오로라라고?」
재하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바람에 나부끼는 녹색 커튼 같았는데 눈앞에 있는 오로라는 흰색에 희미하기만 했다. 재하는 오로라를 본 적이 있는 다비에게 다시 물었다.
“형, 저거 찍으면 정말 그 녹색 오로라로 보여요?”
“지금은 오로라 지수가 낮아서 그래. 카메라로는 잡히지만 눈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야. 그런데 오늘은 오로라 지수가 높다고 했으니까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오로라 댄싱도 볼 수 있을 듯.”
리암이 옆에서 한국말로 대화하는 둘에게 영어로 참견했다.
「첫날에 이렇게 곧바로 장관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둘은 정말 운이 좋아. 오늘은 오로라 지수가 8이나 되거든.」
「오. 진짜야?」
리암의 말에 대답하는 다비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녹색 오로라 말고 더 예쁜 거 찍을 수 있겠다. 8이면 감도를 더 낮춰도 되겠는데? 나도 녹색 오로라만 봤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헐. 재하랑 와서 그런가?”
“형. 좋은 거예요?”
“응. 장난 아니게 좋은 거. 운 좋아야 녹색이랑 자주색 섞인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데, 우린 지금 첫날에 그런 오로라를 볼지도 모른단 이야기거든. 나도 아직 그건 본 적 없어. 우리 재하가 진짜 복덩이네.”
다비가 손을 뻗어 재하의 두툼한 옷을 손으로 토닥토닥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좋아서 재하는 이곳에 온 보람이 충분한 것 같았다.
리암이 재촉했다.
「서둘러. 오로라가 더 퍼지기 전에 지금 움직여야 해.」
리암은 관측하기 좋은 장소로 서둘러 둘을 안내했다.
눈이 발목까지 푹푹 들어가는 곳을 걸어가는 동안, 어두웠던 하늘이 오로라로 인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눈이 잔뜩 쌓인 바닥도 조금씩 환해졌다. 리암이 안내해준 곳까지 걸어가는 동안 둘의 고개가 하늘로 저절로 향했다.
희미하게 초록빛을 뿜어내기 시작한 오로라가 별이 가득한 하늘에 모습을 보였다. 다비가 리암을 부르며 조급해했다.
「눈으로 보일 정도면 3에서 4 이상인데, 지금 촬영하면 안 되는 거야?」
「조금만 더 가서 찍어. 오로라는 이제 시작이야. 더 완벽한 장소에서 찍고 싶지 않아?」
「완벽한 장소. 좋아. 참아야지.」
다비는 곧장 얌전해진 상태로 현지인의 말을 듣기로 했다. 리암이 말한 대로 조금 더 걷자 시야가 확 트인 곳에 도착했다. 세상에 하늘과 바닥만 존재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곳이었다.
“미친, 장소 겁나 좋네.”
다비는 곧장 삼각대를 바닥에 꽂았다. 재하는 다비가 카메라를 세팅하기 쉽게, 챙겨온 손전등을 비춰주었다.
“아, 고마워.”
“그런데 아직은 그렇게 녹색이 아닌데, 카메라로 찍으면 달라져요?”
“아, 방법이 있어. 조리개를 가능한 개방해주는 게 좋아. 그런데 너무 개방하면 화질이 떨어지니까 조금 조여줘야 해. 감도는 조금 높게 설정해주고…. 이건 찍어봐야 알겠지만, 이 정도로 눈에 보이면 감도를 조금 낮게 잡아도 괜찮겠네. 셔터 스피드는 밝을수록 낮추는 게 좋은데…. 아, 뭐라고 설명해야 알아들으려나. 빛의 흐름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거… 이것도 어렵나? 아무튼, 한번 설정하면 계속 이대로 찍으면 되니까. 내가 세팅해서 넘겨줄게. 직접 찍어봐.”
“…제가 형 카메라 만져도 되는 거예요?”
“당연하지. 뭐 대단한 보물이라고.”
“형이 직접 만진 카메라를 제가… 진짜 영광….”
“이제 찍을 거다.”
다비는 재하의 말을 숭덩 자르고 곧바로 카메라와 하나가 됐다. 재하는 다비를 따라 휴대폰을 들고 하늘을 찍어보았다. 재하의 휴대폰에도 오로라가 희미하게 찍혔지만, 눈으로 보는 게 더 나아서 촬영은 포기했다.
“하늘에 갑자기 빛의 강이 나타난 것 같아요. 정말 바람에 나부끼는 초록 커튼 같기도 하고….”
“빛의 강이라…. 낭만적인 녀석.”
하늘을 가로지르던 오로라는 빠른 속도로 하늘을 꽉 채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는데, 오로라는 금세 모양을 바꾸며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육안으로도 확연하게 보이는 기다란 녹색 띠가 여러 갈래로 나뉘더니 제각각 물결치며 하늘 전체에 퍼져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인 현실에 재하는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오로라가 춤추는 거 같아요.”
“맞아. 오로라 댄싱이라고 불러. 진짜 예쁘지?”
어두웠던 지상은 오로라로 인해 달이 비춘 것처럼 환해졌다. 카메라로 아름다운 광경을 담고 있던 다비도 잠시 촬영을 멈추고 하늘에서 춤을 추는 오로라를 구경했다. 다비 너머의 하늘에도 오로라가 춤을 추고 있어서, 재하에겐 다비가 오로라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였다. 그 광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오로라도 아름답지만, 다비가 있어서 더 벅찬 광경이었다.
“형이 있어서 세상이 아름다워요. 그래서 더 두렵고요. 미안해요.”
놓고 싶지 않아서, 도망치더라도 붙잡고 싶어서, 싫다고 해도 포기하지 못할 것 같아서. 재하가 미안한 건 그것뿐이었다. 다비를 잃게 되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알고 싶지 않았다. 벅차고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모든 순간에 다비가 있었다. 다비는 재하의 표현에 픽 웃으며 대꾸해주었다.
“낭만적인 유재하 씨가 오로라 보고 감동했나 보네. 이럴 줄 알고 내가 손수건을 가져왔….”
“사랑해요.”
다비의 귓가를 시끄럽게 맴돌던 바람 소리가 뚝 끊어졌다. 가족들 외에는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SNS에서 사람들이 인사처럼 적어놓은 의미 없는 말이 아니라, 제 앞에서 저를 보며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재하가 처음이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이 해준 것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말을 해준 첫 사람이 재하라서 고마웠고, 재하라서 미안했다.
“재하야. 나는….”
“아, 분위기가 너무 낭만적이라서 제가 너무 지나쳤죠. 못 들은 거로 해요. 그냥 제 독백이었다고. 하필 바람이 안 불어서… 그게 들려버렸네.”
차라리 울 것이지. 속상하게. 허둥대며 서둘러 모른 척해달라는 가슴 아픈 말에 제 마음을 정확하게 대답해줄 수 없어서 다비는 그러기로 했다.
“고맙다. 크리스마스 선물이 정말 대단해서 기뻐. 이렇게 멋진 곳에서 너하고 함께하는 이 시간은 절대 잊지 못할 거야.”
“형, 이건 생일 선물인데. 크리스마스 선물은 따로 있어요.”
“…아니. 너는 대체. 뭘 자꾸 해주려고 이래. 나 이제 그만 받아도 될 것 같은데.”
재하는 이 분위기와 흐름을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둡기만 한 줄 알았던 곳은 오로라가 하늘을 가득 채우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준비했던 이벤트를 그냥 이곳에서 하기로 했다. 모르는 척해달라고 말은 했지만, 저도 모르게 벅차서 튀어나온 말을 다비가 더 의식하고 신경 써주길 바랐다.
“이건 제 욕심이고, 형이 그냥 받아줬으면 좋겠단 생각으로 준비한 거예요. 안 받아줘도 되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뭔데.”
재하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다비에게 내밀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작고 네모난 케이스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재하는 영악한 녀석이었다. 사랑한다는 말로 마음의 틈을 느슨하게 만들어 놓고 이런 식으로 거절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이런 곳에서 타이밍 좋게 반지를 꺼내는 건 정말 반칙 아닌가.
거절하지도 못하고 받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에 다비는 장갑을 빼고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 날까지는 안 빼고 있을게. 그거라도 괜찮다면 끼워줘.”
“정말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그 이상 의미는 없어요.”
재하는 서둘러 반지를 케이스에서 꺼냈다. 오로라가 절정에 이르러 하늘을 넘실거리고 있는 그림 같은 배경에서 재하는 다비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의미가 없다고 서로 선을 그었지만, 반지에 담긴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재하는 다비가 그걸 알면서도 받아주는 것이 기쁘고 고마웠다.
“좋아해요, 형.”
“그래. 사이즈가 딱 맞네. 이건 또 언제 측정한 건지. 아무튼 고맙다. 네 반지도 줘봐. 내가 끼워줄게.”
“같이 끼워도 되는 거예요?”
“어. 이런 거 하고 싶어서 반지 맞춘 거 아니었어?”
“아, 맞아요. 형하고 하고 싶었어요.”
재하가 내민 케이스에서 남아 있는 반지를 빼 손에 쥔 다비는 곧장 재하의 손을 잡고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다비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 빛이 나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나니 재하는 이 기분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형이 직접 끼워줄 거라고 생각 못 했어요. 받아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꿈일까 봐 무서워요.”
“무서운 것도 많다. 꿈 아니고, 내가 너한테 끼워주고 있는 것도 꿈 아니고.”
반지를 끼워주고 서로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갑자기 머쓱해져 다비는 얼른 입을 열었다. 재하가 무슨 잘못인가. 마음 약해서 오냐오냐 다 받아주는 제 성격이 문제지.
“추우니까 장갑 빨리 껴라. 감상은 나중에 하고. 크리스마스니까 내가 이런 것도 해주고 그러는 거야. 다른 날 줬으면 정말 매몰차게 거절했을 텐데.”
“네. 그래서 크리스마스를 노렸어요. 형한테 선물 받은 기분이에요.”
금세 기분 좋아져서 헤실거리는 재하를 보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지금은 제 얼굴색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테니까. 다비는 다시 촬영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내 크리스마스 선물은 숙소에 있어. 그때 줄게.”
“…제 선물이 있어요?”
“어. 그러니까 빨리 촬영 끝내게 이제 조용히 하고 오로라 구경해라.”
“네. 추우니까 끌어안아도 돼요?”
“안 돼. 가이드 있잖아. 추우면 차에 들어가 있어. 몸살이라도 나면 진짜 답 없다.”
“형하고 같이 있고 싶어요.”
결국, 재하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재하는 다비를 뒤에서 끌어안고, 다비는 끌어안긴 채 촬영을 해야만 했다. 재하는 다비의 카메라도 만져보고 오로라가 사라질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
새벽이 되어서야 촬영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다비는 따뜻한 물을 받아 재하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재하야, 너 먼저 씻어라. 뜨거운 물에 몸 담그고 푹 지져. 대충 물만 끼얹고 나오면, 너 진짜 내일 몸살 난다.”
“형은요?”
“난 너 씻고. 난 이런 환경에 익숙해서 버틸 만하거든.”
다비는 지금부터 재하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해야 해서 마음이 급했다. 다비가 막무가내로 자신을 밀어 넣자, 재하는 어쩔 수 없이 먼저 씻기로 했다.
재하를 집어넣고 다비는 곧장 카메라를 노트북에 연결했다. 카메라 모니터로 보는 것과 노트북 화면으로 보는 결과물이 다를 수도 있어서 다비는 연결되는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졌다. 사진을 확인한 다비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김다비, 막 찍어도 예술이네.”
눈으로 봤을 땐 보이지 않던 오색 빛이 다비의 사진에는 뚜렷하게 담겨 있었다. 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던 별들도 오로라와 함께 사진에 남았다. 자신이 찍었는데도 꽤 마음에 드는 사진이었다. 아주 조금만 보정하면 될 것 같았다. 노트북에 손을 올리던 다비가 어색하고 낯선 감각에 멈칫거렸다.
재하가 끼워주었던 반지를 지금에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매립되어 있는 심플한 디자인은 어딘가 결혼반지를 연상케 했다. 재하가 고른 반지니까 제 손에 반짝이는 이 다이아몬드는 진품일 게 분명했다. 이것과 똑같은 반지가 재하의 손에 끼워져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좋으면서도 싫은 느낌이 동시에 제 안을 돌아다니며 간지럽히고 있었다.
“…이건 뭐 프러포즈도 아니고… 진짜 어떡하냐.”
다비는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전에 얼른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재하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이 우선이었다.
재하가 씻고 나오자, 다비가 손짓하며 제 옆을 톡톡 쳤다. 재하는 곧장 다비의 곁으로 향했다.
“형, 안 씻을 거예요?”
“이따가. 일단 여기 앉아봐.”
“네.”
재하가 옆에 앉자 따끈따끈한 기운과 바디 워시 향이 진하게 퍼졌다. 어딘가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다비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너한테 뭘 선물로 줘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일단 내가 제일 잘하는 거로 준비했다.”
“형은 다 잘하는데…. 뭘 준비했…. 헉?”
다비는 말없이 노트북 화면을 재하에게 보여주었고, 재하는 화면을 보자마자 정말 놀란 듯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화면에 가득한 밤하늘은 조금 전, 자신과 다비가 함께 있었던 곳이었다. 눈으로 보았을 때는 이렇게까지 아름답지 않았던 것 같은데 화면의 밤하늘은 쏟아지는 오색 빛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다비의 시선으로 보는 밤하늘은 이렇게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이 사진은 너 줄게. 원본이 워낙 잘 나와서 보정은 거의 안 했어.”
“…정말 이거 주려고요?”
“어. 원본 파일로 보낼 테니까 벽지로 쓰든, 대형 액자에 걸어놓든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이게 내 선물이야.”
“형. 저 울어도 돼요?”
“안 돼. 우는 애한테는 선물 안 줘.”
재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비의 사진이 마음에 들었을 뿐 아니라, 그 사진에 행복해하는 다비의 마음도 남아 있어서 행복해졌다.
“고맙습니다. 독일에 가면 이걸로 집 전체를 도배할 거예요. 이불하고 베개 커버도 이걸로 싹….”
“아니. 그건 좀. 그렇게 마음에 들어?”
“네. 정말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뽀뽀해도 돼요?”
“그래. 네가 왜 그 소리 안 하나 했다. 밖에서 참느라 고생했을 텐데. 해라, 해.”
재하는 곧장 다비에게 입을 맞췄다.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다가 다비를 바닥에 눕히고 포개져서 키스를 퍼부었다. 한참을 쪽쪽 거리던 재하가 입을 떼어내고, 다비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형.”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그런데 나 일단 씻고 오면 안 되겠냐?”
“씻겨줄까요?”
“안 돼. 넌 사진 구경이나 해. 오늘 찍은 사진은 네가 갖고 싶다고 하면 전부 줄 테니까.”
“형, 제가 사랑한다고 말했던가요?”
“어. 했어. 씻고 온다.”
다비는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재하는 그 모습을 보며 헤실 웃다가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비가 씻고 온 후부터는 연인의 시간이지만, 그 전까지 유재하는 데이비드 작가를 너무나 사랑하는 광팬으로서 다비의 사진을 감상하기로 했다.
보정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다른 사진들도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사진을 보는 동안 오로라를 함께 보았던 그 장소에 다시 와 있는 것 같았다. 하늘을 가득 채운 별과 오로라, 지상에 끝도 없이 펼쳐진 하얀 눈밭, 그곳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마주했던 순간. 떠올리기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고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날 것처럼 벅차올랐다.
“내년 크리스마스도 함께하면 좋을 텐데….”
그때, 재하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재하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내용을 확인한 재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뚝 사라졌다. 다비는 보지 못할 싸늘하고 차가운 얼굴이었다.
“한국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선물인가.”
재하는 ‘그 남자’의 후보 명단을 선물 받았다.
명단을 살피려는데 다비가 씻고 나왔다. 재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휴대폰을 뒤집어 바닥에 내려놓고 다비를 보며 순하게 미소 지었다. 다비는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재하의 곁으로 다가와 바닥에 털썩 앉아 노트북을 보았다.
“사진은 골랐어?”
“형. 마음에 드는 게 너무 많은데 어떡해요?”
“욕심이 너무 많네. 그럼 마음에 안 드는 걸 빼. 그거 빼고 다 줄게.”
“…그냥 다 주면 안 돼요?”
전부 마음에 든다는 소리에 다비가 기분 좋게 웃으며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알았다. 다 줄게. 크리스마스고 예쁜 짓 했으니까 주는 거야.”
“크리스마스 선물 정말 고마워요. 그럼… 더 예쁜 짓 해도 돼요?”
허락을 구하듯 묻는 말과 달리 손은 벌써 다비의 허리를 지분대고 있었다. 다비가 피식 웃으며 재하의 응석을 귀여워했다.
“넌 아무리 봐도 내 사진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사진 받아서 그렇게 기분 좋으냐? 오늘따라 더 귀엽게 구네.”
“귀여워해주는 건 좋은데, 형보다 사진이 좋단 이야기는 정정해줘요. 형 사진도 좋지만, 형은 사진하고 비교도 안 될 만큼 좋아해요. 설마 아직도 헷갈려요? 팬심이 아니라 사랑이라니까요.”
이렇게 티를 내고 솔직하게 말하는 녀석인데 투명하고 깨끗한, 그 순수한 애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다비는 대답 대신 재하의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고 제게 당겼다. 재하가 순순히 이끌려 다비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다비의 입술에 머물러 있던 재하의 입술이 목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방금 씻고 나와 따끈한 다비의 몸은 벌써 발그레해졌다. 콩콩 뛰는 목 언저리를 혀로 핥다가 이를 세워 잘근 깨물자, 다비가 몸을 흠칫하며 재하의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고 나른하게 숨을 내쉬었다.
재하는 다비의 등을 손으로 받치고 그대로 바닥에서 침대 위로 끌어 올린 후 다비의 몸 위로 자신의 몸을 겹쳤다.
재하의 손이 다비의 가슴으로 향했다. 엄지로 말랑한 돌기를 살살 긁어주자 금세 단단해지며 톡 튀어나왔다. 재하의 뒤통수를 붙잡은 손에 잠깐 힘이 실렸다. 가슴으로 성감을 느끼는 다비가 사랑스러워서 재하는 다른 쪽 가슴으로 고개를 내려 혀로 핥았다.
“흐, 간지러워.”
“좋아요?”
“어. 계속 빨아봐.”
“가슴만?”
다른 대답을 원하는 게 빤히 보이는 질문에 다비는 삐딱하게 대답하려다가 크리스마스라서 참기로 했다. 재하의 뒤통수를 만지던 손에 힘을 주어 재하의 얼굴을 제 가슴에 바짝 밀착시킨 후 재하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가슴 먼저 빨다가 자지도 빨아야지.”
“읏.”
정답을 말하자 재하가 다비의 가슴을 괴롭히다시피 집요하게 만지고 빨아댔다. 손과 입으로 양쪽을 동시에 괴롭힘당하자 다비가 신음 대신 욕을 내뱉었다.
“하, 씹….”
다비가 내뱉는 소리를 더 듣고 싶어서 재하는 입술을 천천히 밑으로 내렸다. 탄탄한 몸을 베어 물듯 깨물며 지나간 흔적을 깊게 새겨 넣었다.
다비의 성기는 속옷 안에서 벌써 잔뜩 부풀어 있었고, 재하는 단단한 기둥을 아프지 않게 이로 잘근거렸다. 재하의 펠라에 길들여진 다비는 곧이어 찾아올 쾌락을 미리 맞이하려는 것처럼 허리를 들어 올려 재하의 입에 더 바짝 밀착시켰다.
“빨리… 빨아.”
재하는 속옷을 끌어 내리고 곧장 다비의 성기를 입에 담았다. 머리 위에서 신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으로 기둥을 훑고 입으로 깊게 빨아들이자 다시 욕이 터져 나왔다.
재하는 욕설을 싫어하고 천박하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다비를 만난 이후로 욕도 꽤 듣기 좋은 소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다비의 입에서 나오는 욕 한정이었다. 가끔은 악기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몸으로 다비를 연주하면 다비는 듣기 좋은 소리로 욕을 터트렸다.
“하, 씹…. 재하야, 더… 좀 더….”
재하는 다비가 마음껏 소리 낼 수 있도록 더 깊숙이 물고 빨았다.
“큿. 재하야. 나….”
절정을 알리는 신호에 재하는 다비가 몸을 뒤로 빼지 못하게 허벅지를 붙잡아 꽉 누르고 목 끝까지 성기를 밀어 넣었다. 잠시 후 목으로 진한 액체가 쏟아졌다.
다비의 사정이 끝나자 재하가 곧장 옷을 벗었다. 다비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잔뜩 흥분해 바짝 솟은 제 성기를 손으로 쥐고 흔들었다.
“형… 좋아해요.”
다비는 침대에 누운 채 재하의 행동을 눈으로 지켜보았다. 뜨거운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며 자위하는 재하를 보자 오늘도 삽입은 힘들 듯싶었다. 저렇게 흥분한 상태에서도 삽입을 안 하다니, 독한 새끼. 훈이 놈 말대로 고추에 리본이라도 묶어볼걸.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도 그 짓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것 같아서 다비는 다른 걸 선택했다.
“재하야.”
“후…. 네.”
“더 가까이 붙어봐.”
“아, 그런데 형 방금 사정했는데요.”
저번처럼 성기를 맞잡고 하려는 건가 싶어서 말을 꺼냈더니 다비가 고개를 저으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네가 생각하는 거 아니니까 일단 바짝 붙어.”
다비가 시키는 대로 하반신을 바짝 붙이며 다가오자, 다비가 베개 밑에서 젤을 꺼냈다. 재하가 베개와 젤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젤이 왜 거기서 나와요?”
“너 기분 좋게 해주려고.”
다비는 제 다리 사이에 자리한 재하의 성기에 젤을 쭈욱 뿌렸다. 체온보다 낮은 온도에 재하가 다비의 다리를 살짝 움켜쥐며 몸을 흠칫거렸다. 젤이 골고루 듬뿍 발린 걸 확인한 다비는 다리를 오므려 그대로 다리 사이에 재하의 성기를 가뒀다.
“내 다리 벌어지지 않게 꽉 잡고 비벼봐.”
“…아. 와. 형은 어떻게 이런 걸 다….”
“네 좆은 양심 없어서 가능할 듯. 움직여 봐. 나도 처음이라 이게 될진 모르겠다.”
재하는 다비의 다리를 제 어깨에 걸치고 허벅지가 벌어지지 않게 꽉 붙잡은 채 허리를 뒤로 뺐다가 다리 틈 사이로 밀어 넣었다. 탄력 있는 다비의 허벅지가 재하의 성기를 부드럽게 조여왔다. 손으로 맞잡고 비볐을 때와는 또 다른 감촉이라 재하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낮게 울렸다. 다비는 씩 웃으며 재하의 반응을 즐겼다.
“좋으냐?”
“읏. 네. 좋아요. 이런 건 배운 적 없는데…. 형은 대체 이런 걸 어디서….”
“궁금해할 여유도 있어?”
“아뇨? 아닌데요?”
재하는 서둘러 허벅지 사이를 빠르게 들락거렸다. 양심 없이 큰 성기가 다비의 성기를 누르고 비비며 자극시켰다. 자극받은 다비의 성기가 다시 힘을 받기 시작했다. 다비가 손을 내려 성기를 맞잡아주자 재하가 나른하게 숨을 내쉬었다. 다비를 내려다보는 눈에 애정이 가득했다.
“하, 형. 진짜 좋아, 해요.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못 들은 척해달라더니 남발하는 녀석의 사랑 타령에 다비는 몸이 뜨거워졌다. 녀석의 진심이 무자비하게 제게 쏟아져 내렸다.
“하으, 재… 재하야.”
“어떡해야 해요? 이렇게 좋은데… 형이 너무, 좋아서… 자꾸 나쁜 마음이 생겨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아픈 과거를 심어준 그 사람을 찾아내면, 정말 제 손으로 죽이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죽이는 건 상관없는데 그것 때문에 착한 다비가 자신을 나쁘게 생각하고 지금처럼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재하는 다비의 종아리를 잘근 깨물고 핥았다.
“그래도 형은 날 미워하면 안 돼요. 미워하지 말아요.”
“아, 알았… 읏. 알았어. 내가 널 왜 미워해.”
“그래요. 나는 그거면 돼요.”
재하는 그 말을 끝으로 다비가 사정할 때까지 계속 몸을 움직였다.
몇 번이고….
다비가 지칠 때까지 연인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다비를 재운 후, 재하는 거실로 나와 명단과 함께 온 자료를 살펴보았다.
재하가 불러주었던 기간 동안 나간 남성들은 19명, 그중 졸업하고 사회로 나간 남성은 14명이었다. 다른 5명은 어린 다비가 형이라고 부를 연령대가 아니었으므로 재하는 곧바로 제외했다. 재하는 남은 인원의 신원과 범죄 이력을 꼼꼼히 읽어내려 갔다.
“…없어.”
14명은 정말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재하가 생각했던 오지도의 착한 사람들처럼 바쁜 도시에서 적응하여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었다. 기껏해야 주차 단속에 걸린 것을 제외하고 특별히 눈에 띄는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없었다.
“이럴 수가 있나?”
한 사람의 어린 시절을 악몽으로 만들어 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과 어울려서 편하게 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재하는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제외했던 남자들까지 전부 살폈다. 그들 역시 평범하게 도시에 적응하여 그곳에서 자식들과 살고 있었고, 일부는 요양원에서 요양 중이었다. 모두 이렇다 할 범죄 이력 역시 없었다.
모두 평범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성실함을 인정받으며 살고 있었다. 다비가 사회에 나와 열심히 살고 있듯이 다비를 상처 준 사람도 어디선가 열심히 살고 있었다. 사생활조차 깨끗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하, 형은 대체 뭐가 되는 건데.”
14명의 남자 중 30대는 거의 결혼했고, 20대는 곧 결혼을 앞두거나 연애 중인 사람들도 있었다. 전부 여성과 교제 중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는 여전히 힘들어하는 과거가 누군가에게는 없던 일처럼 전부 지워졌다는 게 끔찍했다.
재하는 자신이 알고 있는 걸 다시 정리했다. 다비는 자신에게 사귀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어떤 연애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나이대의 풋풋한 첫사랑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사랑받지 못했음에도 다비가 상대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악몽을 꾸는 걸 보면, 끝이 그리 좋지 않았다. 다비에게 그건 상처였다.
다비가 바라는 일이 아니더라도 재하는 그 남자의 행복을 무너트리고 싶었다.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비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라면 재하에게 그는 쓰레기였다.
“어떻게 찾아내지. 어떻게….”
재하는 갑자기 만나더라도 지나치지 않도록 일단 14명의 정보를 전부 머릿속에 기억하기로 했다.
너무나 행복하면서도 분노가 들끓는 크리스마스였다.
***
“형. 죄송해요.”
“뭐가 미안해. 미안한 거 아니야.”
“형이 그렇게 걱정해줬는데…. 결국 이렇게 돼서 면목 없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마.”
영하 38도의 혹한에 굴복한 도시 청년 유재하는 몸살이 나고 말았다. 연인의 시간 운운하며 다비를 물고 빨아댄 후, 한국에서 온 선물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결국 앓아눕고 만 것이다. 반면 똑같이 혹한의 바람을 맞으며 촬영했던 다비는 자연으로 나온 이후로 빛이 날 정도로 최상의 컨디션을 보였다.
“이거 은근히 약하네. 운동도 꾸준히 하더니 별로 효과가 없나 봐.”
“죄송해요. 몸살은 처음인데. 하필 이곳에서 몸살이 날 줄은 몰랐어요.”
“아픈 게 죄는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다비가 괜찮다고 말해도 재하는 계속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자신 때문에 일정이 전부 취소됐다는 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오늘은 온천에 가기로 했는데 저 때문에….”
“온천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루 이틀 머물다 가는 것도 아니잖아. 너 다 낫고 가도 되니까 그만 미안해하고 쉬어라.”
“그렇게 추웠는데, 형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아요?”
“일주일간 이런 날씨에서 난방 없는 텐트에서도 자 봤는데, 이런 것쯤이야.”
“촬영 때문에요?”
“아니. 음, 군대 이야기인데 괜찮겠어?”
신체 등급 특급으로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마쳤던 다비는 어깨를 으쓱하며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국제 콩쿠르 우승자라서 기초 군사 훈련만 받고 대체 복무로 전환한 재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거렸다.
“네. 해줘요. 형 군대 이야기 듣고 싶어요.”
“미친, 귀여운 새끼. 내가 혹한기 훈련을 받았을 때 말이야.”
다비는 재하에게 과장 없는 군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혹한기 훈련 때 영하 30도를 웃도는 야외에서 텐트 치고 자는 이야기를 하다가, 겨울에 하늘에서 내린 쓰레기를 치우는 이야기로 넘어가며 겨울 동안 겪었던 일을 떠들어댔다.
재하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아이처럼 다비의 군대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재하의 열광적인 리액션에 다비는 열변을 토하다가 재하가 환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아니, 아픈 녀석이 뭘 그렇게 열심히 끄덕거리면서 듣고 있어. 쉬어야 하는데….”
“누워서 듣기만 한걸요. 형은 훈련이 힘들었겠지만, 저는 형 군대에 있을 때 생각나서 좋았어요. 면회 갔을 때 봤던 모습하고 다른 모습도 상상할 수 있고. 더 들려주면 안 돼요?”
“다음에 또 들려줄 테니까 일단 뭐 좀 먹자. 몸살은 잘 먹고 푹 쉬어야 빨리 낫는 거야. 있어봐.”
다비는 재하가 편히 쉴 수 있게 자리를 봐주고, 밖에 나가 장을 본 후, 브런치 카페에서 빵과 수프를 사 왔다. 숙소에 오자마자 감기에 좋은 스웨덴 전통 음료 글뢰그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손질해 와인을 넣고 불에 올렸다.
수프와 빵을 챙겨 침대에서 먹을 수 있게 세팅해 재하에게 갔더니,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침대 위에서 생긋거리며 다비를 반겼다. 짠한데 어딘가 좀 귀여운 모습에 다비의 가슴이 찡해졌다.
“자고 있지. 왜 그러고 있어.”
“몸은 처지는데 잠이 안 와요.”
“그럼 먹고 자. 속 편하게 부드러운 거로 사 왔어. 저녁에는 죽 끓여줄 테니까 지금은 이거 먹어. 먹을 수 있겠어?”
아프니까 한층 더 다정해진 다비를 보고 재하는 이럴 때 아니면 들어주지 않을 어리광을 부리기로 했다. 수프를 스푼으로 떴다가 힘없이 내려놓고 곁에서 지켜보는 다비를 불쌍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형. 저 손에 힘이 안 들어가요. 먹여주면 안 돼요?”
“한 대만 때리고 먹여주면 안 될까?”
“네. 안 돼요. 열도 나고 몸도 으슬거려서, 살짝만 부딪쳐도 춥고 아파요.”
과장이 조금 섞였겠지만,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다비도 알고 있었다. 해열제를 먹고도 열이 38.3도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몸살이 나면 힘든 걸 아니까, 다비는 별말 없이 곧장 재하의 스푼을 들어 수프를 떠서 후후 불었다.
“입맛 없어서 안 먹혀도 먹어야 해. 아, 해봐.”
평소에도 다비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같이 약하게 굴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픈 저를 위해 직접 수발을 들어주고 있는 모습에 그동안 감기 한 번 안 걸렸던 재하는 이런 곳에서 처음 몸살에 걸리는 행운을 얻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몸은 생각보다 아팠지만, 마음은 다 나은 것만 같았다.
재하는 곧장 아기 새 모드로 입을 얌전하게 아, 하고 벌렸다. 다비는 재하가 수프를 받아먹는 모습을 보며 기특해했다.
“옳지. 먹을 수 있겠어?”
“네.”
“그래. 일단 먹어보고 더 못 먹을 것 같으면 말해. 빵에 찍어줄까?”
“네.”
“그래.”
다비는 부드러운 빵을 손으로 주욱 찢어 수프에 담가 적신 후, 손으로 받쳐 재하의 입에 넣어주었다. 재하의 입술에 묻은 수프를 엄지로 닦아 손으로 쪽 빨아먹고 다시 빵을 주욱 찢었다.
“그거 먹고, 해열제 한 번 더 먹고 푹 자.”
“그럼, 형은 점심 어떻게 해요?”
“아. 나는 너 재우고 이따 옆 옆 숙소 멕시코 커플과 스페인 커플하고 같이 밥 먹기로 했어.”
“멕시코 커플은 또 어디에서 친해졌어요? 아니, 그보다 커플 사이에 껴서 왜 같이 밥을 먹어요? 절 놔두고요?”
“뭐래. 너는 아프잖아. 그리고 커플이 둘 이상 모이면 그때부턴 그냥 친구 놀음이지. 자, 아 해.”
재하는 불만의 표시로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벌렸다. 다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아프다고 해서 병원 알려주고, 너 지금 먹고 있는 음식 파는 곳 소개해준 사람들이야. 내가 고마워서 점심에 밥 사주겠다고 한 거니까 그만 좀 질투해라.”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아팠어요.”
“그러니까. 왜 아프고 그래.”
“그러게요. 병원하고 저는 거리가 먼 사이였는데…. 아프면 안 되니까 정말 건강관리 열심히 했거든요. 감기 한 번 걸려 본 적 없는데, 몸살이 걸려서 쫓아가지도 못하고….”
아침에 재하의 상태를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품에 안겨서 자던 다비였다. 평소보다 더 높은 체온에 몸살이 난 걸 알았고, 몸살이라는 걸 알고 난 재하는 과할 정도로 다비에게 사과부터 했다. 그 반응이 일반적이지 않아서 다비는 궁금해졌다.
“그런데 왜 아픈 걸 미안해하는 거야?”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 했으니까요. 특히 이런 몸살은 제가 제 컨디션을 제대로 못 살피고 과해서 생긴 거잖아요. 지금도 제가 아파서 일정이 다 어긋났으니까 형한테 폐만 끼치고, 걱정하게 만들고요. 그러니까 미안하죠.”
“그러면 미안해하는 게 아니라 걱정과 보살핌을 받으면서 빨리 나을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사고가 그렇게 흐르냐. 아픈 것도 서러울 텐데.”
다비의 말이 맞을지 몰라도 재하의 세상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콩쿠르에 나가면서 겪은 세상이었다. 상장과 순위 하나가 경력을 바꾸는 세상에서 컨디션 조절과 건강관리는 당연한 일이었다. 콩쿠르 때 아파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봐왔다. 아파서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왜 그거밖에 못 하느냐고 다그치는 부모들도 옆에서 봐왔다. 성적이 떨어져서 우는 아이는 부모와 선생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했었다.
그러니 아픈 건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비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자, 무대 뒤에서 혼나던 아이에게 공감해주지 못하고 무심하게 지켜보던 자신이 부끄러워져 재하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게요. 아픈 건 죄가 아닌데…. 아픈 사람이 제일 서러웠을 텐데 말이죠.”
“뭐래. 남 이야기하듯이. 네 이야기예요. 서러우니까 얼른 나아라. 다 나으면 내가 밥 사줄게.”
다비는 다시 수프에 빵을 적셔 재하에게 먹였다. 밥을 다 먹이고 나자 다비는 주방에서 머그잔을 들고 다시 침실로 들어왔다.
“이거 마셔. 우리 집에선 겨울만 되면 이거 한 솥씩 끓여놓고 음료처럼 마셨어. 감기나 몸살에 직방이니까 먹고 푹 자라.”
재하가 받은 건 짙은 보랏빛 액체였다. 포도 주스라고 하기엔 향이 묘했고, 어딘가 익숙한 향이기도 해서 다비에게 물었다.
“이게 뭐예요?”
“글뢰그. 독일에선 글루바인이라고 부른다며.”
“아. 그거….”
와인과 과일, 정향과 팔각, 계피를 넣고 끓여낸 음료는 한국의 쌍화탕과 비슷한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겨울에 음료로 따뜻하게 마신다는 건 알았지만, 재하는 마셔본 적이 없었다. 재하는 머그잔을 들고 망설였다.
“이거 술….”
“끓이면서 알코올 다 날아갔으니까 술 아니야. 어린애들도 마시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꿀도 넣어서 달콤하니 쭉쭉 들어갈 거다. 너하고 약속한 게 있는데 내가 너 몰래 술 먹일까 봐 무서웠어요? 귀여운 새끼.”
다비의 놀림에도 재하는 다비가 약속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게 기뻐서 헤실 웃었다. 다비가 직접 만든 글뢰그는 달콤하고 매우 맛있었다. 무엇보다 전부 자신을 위해서 직접 만든 거니까 그게 정말 기뻐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전부 들이켰다.
“계속 아팠으면 좋겠어요.”
“까분다. 다 마셨으면 컵 이리 주고 한숨 자.”
“형, 정말 갈 거예요?”
“너 자는 거 보고 갈게. 놀다 오는 거 아니고 금방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픈 사람 두고 나가서 놀 만큼 인정머리 없는 사람 아니야.”
“그런 생각한 건 아니에요.”
“알았어. 금방 올게.”
다비는 안심하라는 듯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잘생긴 얼굴을 무기로 사용했다. 재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누웠다. 다비가 토닥여주는 손길이 자상하고 따뜻해서 재하는 금방 깊게 잠이 들었다.
다비는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밥을 사주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혹시나 일어나서 저를 찾을까 봐 걱정했는데, 재하는 나갔을 때 그대로 계속 자고 있었다.
다비는 잠든 재하의 옆에 앉아 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기운 없이 축 늘어진 재하가 묘하게 예뻐서 조금 가까이에서 재하를 감상했다. 귀하게 커서 그런지 항상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는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힘든지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예쁘게도 자네.”
땀에 조금 젖은 머리카락, 단정한 눈썹과 오뚝하고 곧게 뻗은 코, 열 때문에 빨갛게 달아오른 벌어진 입술, 색색 내뱉는 숨소리,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넓은 가슴….
다비는 얼른 눈을 감았다.
“아니야. 김다비 미쳤냐. 환자한테… 지금 무슨.”
열이 올라 나약해진 환자를 보며 꼴리는 짐승 새끼가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 있었다. 다비는 당황해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 때려서 그래. 바쁘게 움직여야지.”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가 저녁에 재하에게 먹일 죽을 끓이기 위해 한국인 커플에게 받아온 쌀을 물에 불려두었다. 식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눈밭에 바퀴가 헛돌던 차를 밀어주면서 친해지게 된 사람들인데, 숙소에 아픈 사람이 있다고 말했더니 선뜻 쌀을 내주었다. 역시 한국인은 아플 때 죽이지. 함께 받아온 라면은 식탁에 올려두고 김치는 냉장고에 잘 두었다.
숙소를 대충 정리하고 재하 곁에 앉아 재하가 골라놓은 사진들을 보정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재하가 일어나지 않자, 다비는 카메라를 들어 몸살이 처음이라는 녀석을 위해 기념사진도 찍어주었다.
밖이 어둑해질 때쯤에야 다비는 작업을 멈추고 일어나서 주방으로 나갔다.
“죽 먹을 땐 일어나야 하는데. 그땐 깨워야겠다.”
다비와 모아가 아플 때, 아빠는 항상 소고기와 채소를 듬뿍 넣어 죽을 쒀주었다. 쌍둥이라서 그런지 하나가 아프면 다른 하나가 곧바로 같이 아파서 아빠는 죽을 항상 넉넉하게 만들었다. 양이 항상 많은데도 서로 먼저 낫겠다고 마구 먹어대서 넉넉하게 만든 죽은 둘의 한 끼로 끝날 때도 있었다. 죽 덕분인지 워낙 건강 체질이라서 그런지 둘은 죽을 먹은 다음 날이면 쌩쌩해져서 아빠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다비에게 소고기 죽은 아빠의 사랑이자 걱정이었다. 그런 죽을 재하에게 만들어주려니까 괜히 쑥스러워졌다.
“그렇지만, 소고기 죽이 아플 때 직방인 걸 어떡하라고.”
나름 합리화하며 다비는 소고기 죽을 쑤었다. 바닥에 눌어붙지 않게 계속 지켜보며 저어주는 수고는 아파서 힘든 녀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이라도 많이 먹고 기운을 차려주면 좋겠건만. 살짝 먹어보니, 아빠가 만든 만큼 맛있는 건 아니지만 나쁘지 않았다. 다비는 숙소에 있는 제일 큰 그릇에 죽을 넉넉하게 담고 김치와 함께 트레이에 올려, 침실로 들어갔다.
그새 어두워진 침실에 다비는 손에 들고 있던 트레이를 소파 앞 탁자에 놓고 침대로 향했다. 스탠드를 켜고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재하를 흔들어 깨웠다.
“재하야. 밥 먹자.”
조용하게 불렀는데, 재하가 눈을 번쩍 뜨고 놀란 눈으로 다비를 쳐다보았다.
“형?”
“어. 뭘 그렇게 놀라. 저녁이야. 힘들어도 죽 먹고 약 먹고 다시 자자.”
“저녁이에요? 깨우지 그랬어요.”
“아픈 놈 깨워서 어디에 쓰려고. 어디 보자.”
다비는 손을 들어 재하의 이마를 짚었다. 아직은 따끈하지만, 자는 동안 기특하게 열이 조금 내린 모양이었다.
“열은 좀 내렸고. 땀 많이 흘렸네. 좀 닦아줄까? 찝찝하지?”
“…제, 제가 할게요. 아니. 씻고 올게요.”
“씻고 나오면 몸 확 식어서 다시 열 올라. 수건에 물 적셔올게.”
“저 괜찮은데….”
“안 괜찮아 보이니까 해줄 때 받으세요.”
다비는 욕실에서 따뜻한 물과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 재하가 갈아입을 옷을 옆에 두고 다비는 재하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옷 걷어봐. 닦아줄게.”
“…부끄러운데.”
“우리가 그런 거 부끄러워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그리고 그게 부끄러우면 팬티만 입고 자는 나는 뭐가 되냐. 이제 와서 내숭 떨지 말고 얼른 걷어.”
재하가 수줍어하며 티셔츠를 걷어 올리자, 다비는 곧장 따뜻하게 적신 수건으로 재하의 등을 닦아주었다. 수건이 피부에 닿자 잘 관리한 몸이 꿈틀거리는 걸 멍하니 보다가, 다비는 짐승 새끼가 되기 전에 얼른 평범한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자기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거봐. 몸살엔 땀 빼고 푹 자는 게 최고라니까.”
“형이 이렇게 지극 정성으로 봐주는데 얼른 나아야죠.”
“그렇지? 내가 애를 좀 잘 봐.”
“저 애 아닌데요.”
“너 애 아닌 거 아는데요. 이제 누워봐. 앞에 닦아줄게.”
다비의 말에 재하가 도리질하며 눕기를 거부했다. 다비는 반항하는 재하가 아프다는 것도 잊고 등짝을 찰싹 때려 강제로 눕혔다. 재하가 눕자마자 다비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바지를 입었는데도 티 나게 부풀어 오른 하반신이 눈에 들어왔다. 재하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부끄러워했다.
“그… 그게.”
“애 아닌 거 맞네. 응. 아주 확실하게….”
“죄송해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형이 닦아주는 게 기분 좋아서….”
“팔팔한 거 보니 내일이면 다 낫겠는데?”
다비는 손으로 재하의 상체를 닦아주면서 눈으로 재하의 팔팔한 하체를 구경했다. 조심스럽게 땀을 닦아주며 평안한 표정을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다비의 내부는 이성과 욕망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재하는 아프니까 괴롭히지 말자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 번 빼고 더 푹 자면 더 좋은 게 아니냐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결론적으로 아픈 녀석 몸을 보고 발정하는 자신이 구제 불능 짐승 새끼라는 자기반성으로 끝이 났지만, 다비에게 매우 힘든 싸움이었다.
“다 했다. 이제 옷 갈아입어. 죽 먹게. 딱 먹기 좋을 만큼 식었는데….”
“형.”
재하가 다비의 손을 붙잡았다. 저를 붙잡은 손이 따끈했다. 재하의 열기가 손으로 전해지는 모양인지 덩달아 몸에 열이 올랐다. 흥분한 티를 내고 싶지 않은 다비는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 불러.”
“형도 몸살이에요?”
“뭔 소리야. 뜬금없이. 얼른 옷 입….”
다비의 몸이 순식간에 재하 쪽으로 끌어당겨졌다.
“형 얼굴 빨개졌는데…. 몸살 아니면… 꼴린 건가?”
“아니… 아니거든? 너 사람을 뭐로 보고. 내가 환자보고 막 꼴리고… 어? 그런 파렴치한 놈인 줄 아냐?”
“저는 환자인데 섰는걸요.”
“어. 너는 그럴 수 있어. 그런데 난 아니거든. 꼴려도 아무 때나 덮치고 그러는 거 아니니까. 그만 놔.”
“뽀뽀해줘요.”
제정신이라면 저보다 큰 녀석이 살짝 갈라진 낮은 목소리로 애새끼처럼 졸라대는 걸 보고 징그럽다고 느껴야 하는데, 아무래도 미친 거 같았다. 저게 왜 귀엽지?
아픈 애한테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비는 재하에게 다가가 입을 맞춰주었다. 언제나 부드럽던 입술이 살짝 메마르고 뜨거웠기에, 다비는 재하의 입술을 물고 혀로 적셔주었다. 재하가 다비를 바짝 안고 혀를 빨아들였다. 뜨거운 입 안과 제 혀를 정신없이 빨아대는 재하 때문에 몸이 훅 달아올랐다. 재하의 뜨거운 손이 옷 안으로 들어올 때 다비는 겨우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
“자. 그만. 뽀뽀해 달래놓고 넌 왜 항상 그 이상으로 넘어가려고 하냐. 죽부터 먹어.”
“…형은 어떻게 여기서 멈출 수가 있어요?”
“네가 환자라는 걸 안 잊었으니까. 서러우면 빨리 낫든가.”
“너무해.”
시무룩해진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다비는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죽을 가지고 왔다.
“내가 끓인 거. 쌀은 한국 쌀이다. 한국인 여행객이 준 거야. 얼른 먹자. 아 해.”
“어째서 자고 일어나면 친구가 늘어나는 건지….”
재하는 다비의 놀라운 자제력과 친화력에 감탄했다. 친구가 더 생기기 전에, 뽀뽀로만 끝나는 게 계속되기 전에 빨리 나아야겠단 생각으로 다비가 먹여주는 죽을 열심히 받아먹었다.
다음 날, 재하는 다비의 병간호에 완벽하게 부활했다. 다비와 오전 내내 침대에서 뒹굴며 다 나은 걸 확인받았다.
***
캐나다에서 보내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오로라 빌리지에서 사람들과 새해 카운트를 하겠다는 다비를 겨우 말려 단둘이 숙소에서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 호수와 가까운 통나무로 지어진 숙소로 옮기고 난 후, 오로라가 뜨는 날에는 숙소 안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도 다비는 꼭 나가서 촬영하려 들었다.
다비는 낯선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어울리고 친구가 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즐겼다. 사람들과 어울려도 다시 몸살 나지 않게 재하를 제일 많이 신경 써주고 있어서 재하는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이후로 재하에겐 다비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손으로 계속 만지는 버릇이 하나 생겼다. 다비가 귀찮아해도 꿋꿋하게 만지자 어느 순간 다비도 포기하고 손을 내주었다. 지금도 재하는 다비의 곁에 찰싹 붙어 손가락을 만지면서 헤실거리고 있었다.
“전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서 좋아요.”
“왜?”
“한국은 지금 새해잖아요. 여긴 아직 아니니까 형하고 몇 시간이라도 더 오래 있는 느낌이라서요.”
“누가 낭만적인 녀석 아니랄까 봐 그런 것까지 계산하고 있는 거야?”
“낭만적이라서 계산하는 게 아니라, 형하고 하루하루가 소중하니까 계산하는 거죠.”
재하가 이런 식으로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올 때마다 다비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질색하며 거부했는데, 요즘에는 이런 말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차마 재하를 볼 수 없어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재하가 닳도록 만지고 있는 자신의 반지가 보였다.
“그런데 내 사이즈는 어떻게 그렇게 딱 맞췄냐? 반지도 그렇고, 전에 준 옷, 신발도 그렇고. 나 자는 사이에 막 측정하고 그래?”
“아뇨. 그냥 눈대중이 좋은 편이에요. 제 치수를 정확히 아니까 거기에 형을 비교해보고 차이를 가늠하는 거죠.”
“가늠하는 것 치고는 꽤 정확하던데. 신기하다.”
재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다비의 손가락을 만지며 말했다.
“제가 그만큼 형한테 집중하고 있으니까요. 매일 만지는 몸인데 모르는 게 이상하잖아요.”
“나는 모르는데?”
“형은 몰라도 괜찮아요. 제가 다 알고 있으니까.”
“씨…. 아니. 죽겠네.”
연속으로 낯간지러운 말을 들은 다비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재하는 빨개진 다비의 귀에 입을 맞추며, 수작을 걸었다.
“형, 얼굴이 빨간데….”
“네가 자꾸 그런 말을 하니까….”
“어떤 말이요? 전 형 질문에 대답한 거밖에 없는데, 알려줘요. 참고하게.”
다비는 자신에게 바짝 붙으며 제 몸을 더듬는 재하의 손을 붙잡았다. 처음에는 이런 것도 어색해하더니, 이젠 달라붙으란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달라붙고 더듬어대는 녀석이 되었다. 이러다가 새해 카운트고 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아 다비가 입을 열었다.
“나는 낯간지러운 말 같은 거 잘 못해. 말하는 것도 어색하고 듣는 것도 어색해. 그래서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마음 가는 대로 말하면 된다지만, 그것조차 모르겠어. 전부 몸으로 하는 것만 떠올라. 그게 더 편하고….”
연인끼리 주고받는 사랑을 경험해본 적 없는 다비는 재하의 애정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툭툭 던지는 애정 깊은 말이 낯설어서 기분이 자꾸 몽글거렸다. 자신도 그 마음을 표현해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몸으로 부딪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것조차 어려웠다. 자신이 어딘가 변하는 것 같아 무서웠다.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뭔가 어려워.”
재하는 혼란스러워하는 다비를 보고 웃음이 날 것 같아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이런 말에 기쁘다고 대답하면 놀리는 거냐며 등짝을 맞을까 봐 꾹 참았다. 다비의 유일한 서투름이 사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서툰 사람이 자신을 대하는 행동이 달라진 지 오래였는데, 그 변화를 이제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거기에서 혼란스러움을 느낀 것 같아서 재하는 다비의 변화를 환영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형이 하고 싶은 게 정답이니까. 형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내가 알아서 해석할게요.”
“뭐래. 너 좋을 대로 해석하는 거 아니냐?”
“그럼 형이 해석해주면 되죠.”
재하가 부담스럽게 다정하고 그윽한 눈으로 다비를 바라보자, 다비는 다시 기분이 몽글거려서 재하에게 얼른 입을 맞췄다. 숙소 앞에 있는 호수에서 불꽃이 터졌다. 재하가 수작 부리고 다비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에 한 해가 지나가고 말았다. 다비는 입술을 떼고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새해 인사야.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새해 인사로 다비 형의 뽀뽀라니. 정말 영광… 저 울어도 돼요?”
“하지 마. 새해부터 울면 복 나간다.”
“그럼 다시 뽀뽀해줘요.”
“너는 진짜… 새해니까 또 해주는 거다?”
다비는 피식 웃으며 재하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지금은 그게 정답인 것 같아서. 재하에게 입 맞춰 주는 자신의 행동이 정답이라고 재하가 그랬으니까 마음 편하게 입을 맞췄다.
캐나다에 있는 동안, 다비는 하늘과 땅을 오가며 수많은 오로라와 별이 가득한 밤하늘, 자연경관과 야생 동물들을 정말 원 없이 찍을 수 있었다. 눈 오는 날에는 숙소 앞에 있는 얼어붙은 호수에서 재하와 함께 걸으며 발자국을 남기고, 맑은 날에는 재하와 함께 자연을 즐겼다.
모든 시간과 추억들을 다비는 소중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
캐나다를 떠나는 마지막 밤, 그리고 재하가 제안한 100일의 마지막 밤이었다.
짐을 정리한 후 다비는 노트북으로 찍어둔 사진을 확인했다. 느긋하게 사진을 감상하며 남태평양과 미국, 캐나다에서 보낸 시간을 하나씩 떠올리면 좋겠지만, 그럴 시간이 많지 않았다.
“재하야. 사진 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뭘 이렇게 많이 달래.”
재하가 생글거리며 다비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마음 같아서는 찍은 것 전부 달라고 하고 싶은데, 형이 잘 나온 것만 골라줬잖아요. 그러니 그거라도 전부 받고 싶을 수밖에요.”
“하여간. 난 또 내 사진 가지고 가서 전시회라도 열려고 이러나 했지.”
“그것도 되면 하고 싶은데. 독일에서 사진전 할래요?”
“아니. 항상 같은 사진만 내거는 것도 지겹고, 한동안은 촬영에 집중하려고.”
“촬영하는 다비 형이라니… 따라다니고 싶다.”
이곳이 야생은 아니지만, 자연과 가까이 있을 때 더 빛나는 다비를 알고 난 재하는 정말로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올해에도 연말까지 공연이 잡혀 있어서 그럴 수 없다는 게 속상할 뿐이었다. 재하는 다비의 사진들을 보다가 남태평양에서 찍은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열여섯 살 때, 형 사진을 처음 봤다고 했잖아요.”
“어. 그랬지.”
“그 사진도 이 사진처럼 섬 전체를 찍은 사진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면 기억 못 해. 오래전인 데다가 내가 우리 섬을 한 장만 찍은 것도 아니라서.”
“제가 오스트리아에서 대학 다닐 때 발견한 사진이니까, 아마 형이 SNS에 올렸던 사진일 거예요.”
알쏭달쏭한 설명에 다비가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SNS에 올린 섬 사진도 한두 개가 아니거든.”
“그건 그렇죠. 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사진은 되게 특별했어요. 다른 사진하고 다르게 복잡했거든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기다려 봐.”
다비는 휴대폰을 들어 SNS에서 사진들을 찾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까지 거슬러 가느라 엄지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찾는 게 귀찮아서 그만두려다가, 재하가 이 비슷한 사진들을 정말로 구분할 수 있을지 궁금해져서 열심히 찾았다.
“이 중에 어떤 거야? 알아볼 수 있겠어?”
다비가 보여준 섬 사진은 날씨와 계절이 다르다는 걸 제외하고 비슷한 구도에 비슷한 모습이 여러 장이었다. 재하는 별 고민 없이 곧장 사진을 짚었다.
“이거예요. 제가 처음 형을 알게 된 사진이요.”
해무가 섬을 덮어 운치 있는 사진이었다. 일교차가 심할 때 종종 일어나는 현상이라 다비는 바다에서 자신의 마을을 가끔 그렇게 찍어 SNS에 올리곤 했다. 이런 사진은 꽤 많았는데, 재하가 짚은 사진에 다비가 당황하고 당혹스러워했다. 재하가 고른 사진은 너무나 아픈 과거였다.
“…이 사진을 본 거였어?”
“네. 이 사진은 다른 사진하고 다르게 눈에 띄는 사진이었어요. 아, 다른 사진도 좋지만 이 사진이 제일 형을 궁금하게 만든 사진이었죠.”
“어땠는데?”
사진의 감상을 묻는 말에 데이비드 작가를 너무나 좋아하는 광팬 모드로 돌변한 재하가 사진을 처음 본 그때로 돌아가 감상을 읊기 시작했다.
“정말 복잡한 감정이 담긴 사진이었어요. 사람의 양가감정이 동시에 보이는 입체적인 사진이었거든요. 평면적인 사진으로 3D를 보는 기분이었어요. 절망적이면서도 희망적이었고, 슬프다는데 기쁘다고 했고, 죽….”
“죽고 싶은데 살고 싶다고 했지.”
“…네. 맞아요.”
자신이 찍은 사진을 어떤 마음으로 찍었는지, 그 사진을 언제 찍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당연했다. 재하의 감상에 다비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심란해졌다.
“이 사진을 본 거였구나. 쪽팔리네. 하필 이걸 네가 볼 줄이야.”
“아뇨. 전 이 사진 정말 좋아해요. 형을 알게 해준 사진이라서요. 다른 의미도 있지만….”
“이 사진을 찍은 건 고2 여름방학 때였어. 그러니까 열여덟 살이었네. 스웨덴에 가기 전에 찍은 사진이야. 도저히 섬에 있을 수가 없어서 머리 좀 식히려고 빠져나오는데, 그날따라 섬이 그렇게 끔찍하더라. 그런데도 섬이 너무 좋고 예쁘더라고. 그래서 찍었던 거야.”
“섬이 끔찍했어요?”
다비의 과거 이야기에 재하는 저도 모르게 헤실대던 웃음을 뚝 그치고 다비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재하가 자신을 보고 있는 줄 모르고 다비는 사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비밀을 알아버렸거든. 그래서… 섬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날은 섬이 끔찍하더라고.”
“비밀이 뭐였는데요?”
“비밀이 왜 비밀이겠냐. 그건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 꺼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좀 그래. 그냥 흑역사야. 별거 아닌. 사람이라면 인생에 다들 흑역사 하나쯤은 가지고 있잖아.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떠오르면 발로 이불을 걷어차고 싶어지는…. 뭐, 그런 수준이야.”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다비는 말했지만, 재하는 곧장 그게 그 남자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 재하는 두루뭉술하게 돌려 말했다.
“그럼 지금도 이 사진이 싫어요?”
“사진은 사진이지. 사진이 왜 싫어. 그냥 네가 이 사진을 봤다고 하니까, 내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 좀 쪽팔린 거야. 뭐, 싫은 건 아닌데 다시 보니까 여전히 복잡하네.”
재하는 다비가 옛날 기억을 떠올릴까 봐, 얼른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비가 아직도 복잡해하는 그 과거를 지워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 사진에 담긴 형의 사정 같은 건 몰라요. 하지만 이 사진 덕분에 저는 형한테 고마워요. 정말로요. 이 사진이 없었다면 저는…. 형이 날 살렸어요. 운명처럼.”
“뭐래. 무슨 생명의 은인 대하듯 말하고 있냐. 왜, 죽음을 생각한 순간에 내 사진을 보고 인생을 새로 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뭐 이런 이야기야?”
“…….”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재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마치 정답이라는 듯 웃는 모습에 다비의 심장이 대신 철렁했다. 자신이 아는 유재하는 그런 생각을 할 녀석이 아니었다. 돈도 많고,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전 세계에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걸 떠나서라도 자신에게 문자를 보내던 재하는 그런 우울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오히려 꼬리를 붕붕 흔들어대는 사랑스러운 개를 떠올리게 만드는 밝은 문자를 많이 보냈다. 그런 재하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붙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야, 웃지 말고 말을 해. 아니지? 그런 거….”
“오래전 일이에요. 지금은 아니고요. 형을 만난 후로는 그런 생각 안 해요. 그냥 이 사진이 그런 의미였다는 거예요.”
“네가 뭐가 아쉬워서…. 잠깐만, 힘들었을 때 내 사진을 발견했다는 그 소리가 그런 의미였어?”
“기억하고 있네요.”
다비는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재하와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때가 정말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는데, 작가…. 아니. 다비 형 사진 하나가 학교 게시판에 올라온 적이 있어요. 바다 위에 안개가 낀 흑백 사진이요. 그 사진을 보는데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어요. 사진도 멋있었고요. 그래서 다비 형의 SNS를 찾았는데, 사진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정말로 작가님 덕분에 힘든 시기 잘 보낼 수 있었습니다.’
재하는 기억의 시작부터 항상 삼촌인 리온이 함께 있었다. 2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서 어른들은 리온과 재하를 함께 키웠다. 재하는 어미에게 각인한 새끼 오리처럼 리온을 졸졸 따라다녔고, 리온이 하는 건 전부 따라 하려 했다.
피아노를 처음 친 것도 리온이 피아노를 쳤기 때문이었고, 8살에 첼로로 전향한 것도 리온이 첼로를 켰기 때문이었다. 유학도 마찬가지였다. 리온이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음악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유학 준비를 했을 때, 재하 역시 삼촌이 가는 대학을 목표로 정했다.
그만큼 재하는 리온을 제 세상처럼 여겼다.
하지만 삼촌을 따라서 같은 대학에 입학한 재하는 오스트리아에서 그리 잘 지내지 못했다. 삼촌인 리온과 사이가 틀어지고 재하가 16살일 때, 리온이 갑자기 재하의 방에 첼로를 두고 홀연히 사라진 일이 있었다. 재하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리온이 한국에 있다는 연락을 받기 전까지 리온이 자신으로 인해 자살했을까 봐 공포에 질렸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가족들은 모든 잘못이 재하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리온의 건강을 위해 오지도로 요양을 보냈다. 그리고 재하에게 위치를 함구했었다.
그렇게 혼자가 된 재하는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다비의 SNS를 보았다가 다비가 올린 사진 한 장으로 리온을 찾아냈고, 그렇게 오지도로 오게 된 거였다.
재하는 다비에게 오스트리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정신적으로 힘들었단 식으로 가볍게 말했었다. 그냥 힘들었던 게 아니라 끔찍한 상상을 할 만큼 정말로 힘들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그때 말했어도 됐잖아.”
“이젠 오래전 이야기니까요. 삼촌하고 이야기도 잘 풀렸고, 형하고 이렇게 함께 있고요. 이제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니니까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거죠.”
“지금은 괜찮아?”
“네. 지금이 아니라 형을 만나면서 전부 괜찮아졌어요. 그러니까 저는 형을 만나게 해준 이 사진이 너무 좋아요. 형이 무슨 일을 겪고 이런 사진을 찍었는지 떠올리지 말아요. 그게 아픈 일이라면 더욱더 생각하지 말아요. 차라리 절 살린 은혜로운 사진으로 기억해줘요.”
다비는 그 당시에 처음 본 재하보다 친구인 리온을 위하느라 그 이야기를 그냥 가볍게 흘려 넘겼었다. 그 무심함에 갑자기 미안해져서, 재하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사진이 널 살렸다고….”
“네. 그 후로 정말 나쁜 생각한 적 없어요.”
자신의 아픈 기억이 담긴 사진이 누군가를 살렸다는 것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상대가 자신에게 살려줘서 고맙단 말을 건넸다. 자신의 사진으로 위로를 받았다는 재하를 너무나도 안아주고 싶었다. 다비는 재하를 보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리 와.”
재하는 얌전히 다비의 말을 따랐다. 품에 안기자 다비는 재하를 꼭 안아주었다.
“열여덟 살의 김다비가 너한테 고맙대. 내 사진으로 위로받고 열심히 살아준 열여섯 살의 유재하가 대견하다고 말이야. 스물일곱 살이 된 김다비가 열여섯 살의 유재하한테 말해줄게. 너만 잘못한 거 아니야. 살아줘서 고마워. 너는 가까운 미래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훌륭한 첼리스트가 되었으니까 앞으로는 나쁜 생각하지 말고 예쁜 생각만 하면서 살아. 네 세상은 무너지지 않고 계속 찬란하고 아름다울 테니까.”
16살의 유재하가 가장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너의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고. 누구라도 좋으니까 그렇게 말해주길 바랐던 때가 있었다. 오래 걸렸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자 16살의 어린 재하가 진심으로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재하는 다비를 마주 안았다.
“고마워요. 그 이야기가 듣고 싶었어요. 전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 정말 웃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정도로요. 형의 사진을 보지 않았더라면, 오지도에서 형과 훈이 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제가 어떤 인생을 살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항상 고마웠어요. 이제라도 형한테 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재하는 울지 않았다. 지나간 상처는 이미 아물었고, 흉도 지워진 지 오래였다. 자신의 상처를 지우는 데 다비의 도움이 가장 컸다. 그래서 재하는 자신의 상처와 흉을 지워줬듯이 다비의 아픔과 흉도 지워주고 싶었다.
“내일이면, 이 사진을 처음 본 날부터 삼천 일이 되는 날이에요. 형이 날 살린 그날부터 오늘까지 형은 제 세상이었어요. 멋대로 제 세상으로 만들어서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재하의 맹목적인 사랑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멋대로 제 세상으로 만들었다는 소리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망가진 자신이, 누군가에게는 삶을 살 수 있게 한 존재가 되었다는 게 매우 기뻤다. 재하를 살렸다는 그 사진이 갑자기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미안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자. 그리고 네 덕분에 나도 그 사진이 다른 의미로 덧씌워진 것 같아. 앞으로 저 사진을 볼 때마다, 누군가를 살린 희망적인 사진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를 거야. 내게 말해줘서 고맙다, 재하야.”
재하가 다비의 사진을 처음 본 날부터 2,999일. 재하는 다비에게 큰 위로를 받았고, 다비가 상처를 받고 섬을 잠시 떠났던 아픈 과거는 이제 재하의 기억으로 덧씌워졌다.
둘의 마지막 날은 서로의 과거를 보듬어주고 안아주며 차분하게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