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리 말하지만 나는 너한테 못 박아.”
“…네?”
“나보다 덩치 큰 녀석을 밑에 깔고 허리 들썩거리는 거 싫다고.”
“아. 아-.”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듯 재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섹스를 하려면 한 명은 넣고 한 명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재하는 너무나 당연하게 다비를 안을 생각만 했던 터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형은 정말 배려심이 많아서 좋아요. 전 그런 생각 못 했는데.”
다비는 눈썹을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정색했다. 대체 어딜 봐서 배려심이 느껴지는지 말한 자신도 모르겠는데, 재하의 말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오늘은 아무래도 입을 열면 마음과 다른 말이 계속 나올 것 같아,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 아무튼…. 이리 와.”
다비는 손을 뻗어 재하의 뺨을 감싸고 곧장 입 맞췄다. 입술이 닿자마자 재하가 입을 벌리며 다비를 맞이했다. 제 입술에 상처를 내고 부어오를 만큼 물고 빨아대더니 이제는 키스만으로 흥분할 수 있을 만큼 제법 능숙해졌다.
재하는 입을 맞댄 채 다비의 등을 받치고 침대에 눕혔다. 처음이라 긴장했지만 긴장한 티를 내면 다비가 어린 취급을 할 것 같아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섹스 전 단계는 지금까지 많이 했었고 다비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니 삽입 전까지는 평소처럼 할 생각이었다.
입을 맞추면서 다비가 입고 있는 목욕 가운의 끈을 풀어 헤치자 가운이 양쪽으로 스르륵 미끄러지며 활짝 젖혀졌다. 손으로 맨살을 쓸어 올리자 다비의 몸이 바짝 긴장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길고 늘씬한 목을 따라 입술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다비의 손이 재하의 머리에 얹어지며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미 자신이 남겨놓은 자국 위에 다시 붉은 자국을 덧칠했다. 꽃처럼 붉은 자국은 일시적으로나마 다비가 자신을 받아들여 주고 있다는 증거였다. 자신이 남겨놓은 자국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비가 이대로 자신을 영원히 받아주면 좋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흔적을 남기지 않아도 만족할 텐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자신의 흔적으로 빼곡히 채우고 싶은 마음에 재하의 입술은 오랫동안 집요하게 다비의 몸을 탐했다.
“재하야, 그만.”
셀 수 없이 많은 문자 폭탄이 말해주듯 재하는 아주 집요했고, 침대 위에서는 그게 더 심해지는 녀석이었다. 온몸을 물고 빠는 데 오랜 시간을 할애하는 재하의 입술이 간지러우면서도 묘하게 뜨거웠다. 입술을 떼어낼 때마다 재하는 씨를 뿌리듯 진심을 흩뿌렸다.
“형, 좋아해요.”
“그래. 알았으니까 그만 빨아대고 진도 좀 나가자.”
“펠라도 아직 안 했는데요?”
“됐으니까… 그냥 건너뛰어.”
평소보다 집요한 입맞춤을 참지 못하고 다비가 재촉했다. 섹스는 정말 오랜만이라 다비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재하가 처음이라서 더 걱정스러웠다. 흥분하면 이를 세워 제 몸도 물어뜯는 녀석이라 왠지 섹스도 참지 못하고 곧바로 쑤셔 박고 찔러대기만 할 것 같았다. 그건 정말 싫어서 미리 스스로 풀어뒀는데, 정작 재하는 섹스는 뒷전이고 제 몸을 물고 빠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러다 다시 풀어주기 전 상태로 돌아갈 것 같아 조급해졌다.
“재하야, 그만하고 얼른 집어넣어.”
“조금만 더요. 형 지금 몸이 많이 굳었는데. 긴장한 거 같아서… 아니. 제가 오늘 뭘 잘못하고 있나요? 기분 좋아 보이지가 않아….”
“난 괜찮으니까 그냥….”
“섹스는 같이 기분 좋아지는 거라고 했는데, 저만 기분 좋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는 모양인지, 재하는 다비에게 맞추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미 풀어놨으니 넣기만 하면 된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다비는 손을 뻗어 재하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바짝 솟은 재하의 성기에 조금 겁을 먹었다. 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클 줄 알았으면 조금 고민을 좀 해볼 것을 그랬다. 자신도 어디 가서 기죽지 않을 크기인데, 혼혈은 자신이 아니라 저 새끼였나 보다. 조금 더 풀어놓을걸. 그런데 진짜 크네.
조물거리는 손길에 재하는 숨을 터트리며 몸을 움츠렸다. 점점 부피를 키우는 묵직하고 두꺼운 존재감에 다비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재하를 보며 비웃듯 피식 웃었다.
“좆을 이만큼 키워 놓고 여유를 부렸어요? 너 이러다 또 그냥 싸겠다?”
“하아, 형. 다비 형. 소… 손 좀.”
다비는 농담이랍시고 말했겠지만, 재하는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첫 경험에 빨리 사정할 수도 있단 이야기를 들어서 재하는 욕실에서 벌써 두 번이나 빼고 온 참이었다. 그런데도 다비가 제 성기를 만졌다는 이유만으로 사정할 것 같아 입술을 질끈 깨물고 참았다. 그동안 다비에게 펠라티오도 해주고, 다비의 성기를 만지며 사정시킨 적은 많았지만, 다비가 자신에게 해주겠다는 말에는 항상 괜찮다며 사양했다.
다비가 만진다면 그걸로 끝날 것 같지 않아 참았던 거지만, 오늘은 그 이상을 할 거니까 다비가 만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다비가 기둥을 따라 손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자꾸 신음이 터졌다. 항상 제 머리를 쓰다듬던 상냥한 손이 지금은 성기를 쓰다듬고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자극적이었다. 다비도 그걸 느꼈는지 성기를 만지며 키득거렸다.
“오, 유재하. 여기서 더 커지네? 내가 만져주는 게 그렇게 좋으냐?”
“네. 형, 좋아… 좋은데. 못 참겠….”
“그러니까 참지 말고 빨리 넣으라고.”
“아, 알았어요. 손… 놔주세요.”
다비가 손을 풀자, 재하가 시트 옆에 놔두었던 콘돔을 뜯었다. 처음 착용하는 데다 긴장해서 조금 허둥거렸지만 빠르게 준비를 끝마쳤다. 재하는 누워 있는 다비를 내려다보며 정말 해도 괜찮은지 상태를 살폈다.
“형, 이제 할게요?”
“그런 건 묻지 말고… 좀.”
역시 풀어놓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냥 집어넣을 모양이었다. 다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순간 몸이 휙 뒤집혔다.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에 다비가 깜짝 놀라며 몸을 뒤틀자, 재하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놀랐어요? 죄송해요. 처음엔 이 자세가 편하다고 해서요.”
“…….”
“제가 아니라 형이 받아들이기 편한 자세라고 들었거든요. 처음엔 좀 힘들다고 해서.”
“…어. 그래.”
“제가 풀어줄게요.”
“…아니.”
다 했으니까 그냥 넣으라고 하면 되는데, 뒤집힌 순간부터 자꾸 머리가 깜빡거렸다. 재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귀로 듣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해석이 되지 않았다. 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졌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기 시작해서 혼란스러웠다. 재하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웅웅 울렸다.
“형, 정말 좋아해요. 허락해줘서 고맙고요. 또.”
“…재하야, 그냥… 그냥 넣어.”
다비의 목소리에 재하는 젤이 가득한 손을 다비의 엉덩이 사이로 가져다 댔다. 재하의 손이 닿자 다비가 숨을 크게 들이 삼키며 시트를 콱 움켜쥐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바짝 긴장한 몸에 재하는 손을 거두고 다비를 살폈다.
시트를 움켜쥔 손은 하얗게 질려 핏기가 없었다. 어깨가 눈에 보이게 떨리고 있었고, 호흡은 불안정해 보였다. 긴장한 것치고는 지나치게 떨고 있는 모양새가 무서워하는 반응과 비슷해 보였다.
“형, 괜찮아요?”
“…….”
“형?”
다비는 재하의 부름에 대답하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도 전혀 몰랐던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재하가 자신을 뒤집었던 순간부터 숨이 턱 막혔다. 재하의 목소리라는 걸 아는데, 정작 머리에서 인식하고 있는 건 우습게도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졌다고 생각한 그놈 목소리였다.
“…아, 아니, 아니야.”
뒤에 있는 사람은 재하다. 유재하. 자신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개 같은 유재하. 그러니까 괜찮다고, 그놈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자신을 다독일수록 비웃듯이 기억은 점점 선명해졌다. 한번 떠오른 기억은 다시 가라앉을 생각도 없이 계속됐다. 바깥의 파도 소리가 자신을 그놈이 있던 오지도로 데려다 놓은 것만 같았다.
뒤에서 금방이라도 그놈이 나타나 씨근덕거리며 저를 붙잡고 꿰뚫을 것만 같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비는 덜덜 떨며 재하에게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형?”
재하는 다비의 반응에 당황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시트 밖으로 떨어지려는 다비를 빠르게 붙잡아 품에 안았다. 품에 안긴 다비는 이상할 정도로 몸을 떨며 자신에게 매달렸다.
“형, 왜 그래요? 괜찮아요?”
“…재하, 재하야.”
“네.”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넣어. 그냥 박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얼른….”
“어떻게 그래요. 이렇게 덜덜 떠는데. 안 할게요. 안 할 테니까 일단 진정해요. 추워요? 추워서 그래요?”
재하는 서둘러 에어컨을 끄고, 다비의 몸을 이불로 둘둘 감싸고 품에 꼭 안아주었다. 그래도 쉬이 진정되지 않는지 다비의 호흡이 계속 거칠었다. 재하는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어서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자신의 기분보다 다비의 상태가 더 걱정됐다.
“형, 병원 갈래요? 얼굴까지 창백해. 잠깐 누워 있어요. 고모할머니네 쪽에 의사 있어요. 이쪽으로 불러올 테니까, 형은 잠깐 누워서 쉬어요.”
“아니, 괜찮아. 별거 아니야.”
“얼굴이 완전히 창백한데 어떻게 별거 아니란 말이 나와요? 제가 뭔가 실수했죠? 아니면 하기 싫었는데, 무리한 거예요? 아니, 일단 쉬어요.”
재하는 다비를 눕히고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다비는 저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는 재하의 표정을 보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팠던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 점점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옷을 대충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가려는 재하를 다비가 불렀다.
“나 진짜 괜찮아. 병원 안 가도 되고, 의사 안 불러도 돼. 그냥 물 좀 주라.”
재하는 곧장 다비가 마실 물을 대령했다. 다비는 컵 하나 제대로 쥐지 못할 정도로 손을 떨었다. 재하는 다비가 물을 마시기 편하게 바짝 곁에 붙어 컵 밑을 받치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다비가 물 한 컵을 다 마시자, 컵을 내려놓고 다비의 입술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정말 괜찮아요?”
“어. 이제 괜찮아.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네. 기대했을 텐데 미안하다.”
“지금, 제 기분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요. 형이 왜 미안해요. 제가 미안하죠. 뭐가 미안한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저 때문에 형이 그렇게 된 것 같아서 미안해요.”
조금 진정된 다비는 머쓱해하며 이마를 긁적거렸다. 섹스하자고 말을 꺼낸 건 자신인데, 재하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유도 모르고 전부 제 탓이라며 자책하는 녀석이 안타까워 다비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내가… 오랜만이라 그래.”
“…오랜만.”
“그냥 조금 긴장한 거야. 전에 사귀었던 놈이 야동으로 섹스를 배운 무식한 놈이라서 할 때마다 아프기만 했거든. 그래서 그 기억이 좀 남아 있었나 봐. 후배위만 아니면 괜찮을지도 몰라. 다른 자세로 하면….”
재하의 표정이 싸늘해져서 다비는 말을 하다 곧장 입을 다물었다. 정말 오늘은 입을 열면 안 되는 날인가 보다. 침대 위에서 전 남자 이야기를 변명이랍시고 꺼내다니, 차라리 말을 하지 말걸. 모든 게 최악이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비는 재하의 눈치를 살폈다.
“화났어? 미안….”
“…네? 아뇨? 아닌데요? 왜 그런 생각을… 아. 제 표정이 이상했나요? 죄송해요. 제가 형의 안 좋은 기억을 건드린 것 같아서, 저한테 조금 화가 나서 그랬어요. 제가 그런 사정을 몰라서 멋대로 형을 엎드리게 해서 그렇게 된 거잖아요. 그러니까 형은 미안해하지 말아요.”
“한심하지? 섹스 파트너랍시고 여기까지 왔는데. 나 지금 되게 형편없는 새끼 같아서 기분이 좀 그러네. 좀 쪽팔리고.”
다비의 말투에 힘이 쪽 빠져 있었다. 다비답지 않게 주눅 든 채 제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 재하는 얼른 표정을 풀고 이불에 싸인 다비를 품에 꼭 안고 다독여주었다. 다비가 기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 그게 더 마음 아팠다.
“섹스 안 해도 상관없어요. 지금까지 안 하고도 잘 살았어요. 동성 커플 중에 섹스 안 하는 커플도 있대요. 그러니까 형은 신경 쓰지 말아요. 저 진짜 괜찮아요. 형이 반응 없을 때, 제가 빨리 알아차리고 그만뒀어야 했는데. 성욕에 눈이 멀어서 제가 너무 욕심부렸어요. 죄송해요.”
“그런 말 하지 마. 네 잘못 아니고 내 문제야. 그런데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나도 몰랐어. 정말 몰랐어.”
너무 오래전 일이고 인생에서 하찮을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다. 그 개새끼는 대체 어디까지 자신을 끌어내려야 속이 풀리는 건지 모르겠다. 인생에서 유일한 흑역사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을 줄은 몰랐다. 할 수만 있다면 그 기억들을 꺼내 바다에 전부 던져버리고 싶었다. 다비는 저보다 더 놀랐을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네 잘못 아니야. 네가 물고 빠는 건 괜찮았잖아. 반응도 확실하게 했고. 그러니까… 괜히 너 때문에 내가 그렇게 됐단 생각은 정말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응?”
다비가 미소 지으며 재하를 달랬다. 안 좋은 기억 때문에 누구보다 가장 아플 사람이 미소까지 짓고 자신을 달래는 모습을 보자 재하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대신 울어주고 싶을 정도로 아픈 미소라 재하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다비의 손을 붙잡아내려 입을 맞춰주었다.
“저 진짜 괜찮아요. 형이 그런 생각하지 말라면 안 할게요.”
“…내가 뭐 해줄 건 없고. 손으로 만져줄까? 아니면….”
“아뇨. 다음에요. 오늘은 그냥 자요. 아, 하고 싶지 않아서 거절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제 표정이 어떤지 저도 알 수 없어서 형이 괜히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거예요.”
“정말 괜찮아?”
“네. 형만 괜찮으면 오늘은 저 끌어안고 잘래요? 저 형한테 안겨서 자고 싶은데.”
다비는 재하의 요구에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저보다 덩치 큰 재하를 품에 안고 누워 버릇처럼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머리카락 감촉 덕에 마치 커다란 개를 쓰다듬고 있는 것처럼 안정감이 들어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재하가 품에 안긴 채 계속 종알거리며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형, 저 진짜 형 좋아해요. 그러니까 뭐가 됐든 안 좋은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 제 휴대폰에 제가 연주한 곡들 녹음해놓은 거 있는데, 그거 들으면서 잘까요? 아니면 삼촌 연주도 있고요. 마음 편하게 해주는 건 삼촌 연주가 더 좋으려나? 누가 연주한 거 듣고 싶어요?”
“네가 연주한 거.”
“정말요? 우리 삼촌 힐러라고 소문났는데, 형이 내 음악 선택해줬으니까 나중에 삼촌한테 자랑해야겠다. 형이 내 음악 선택한 거 알면, 우리 삼촌 울걸요?”
“그럼 말하지 마. 리온이 울면 훈이 놈이 나 찾아내서 고구마밭에 나 묻어버릴 듯.”
“훈이 형이요? 그렇게 착한 형이… 형을요? 진짜요?”
“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온이를 울렸는데, 걔가 가만히 있을 놈이냐?”
재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계속 신기해하다가 어떤 기분인지 조금 알 것 같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도 다비가 다른 사람 때문에 울었다면 이유를 막론하고 일단 상대를 가만두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고구마밭. 좋네요.”
“뭐?”
“아뇨. 음악 들려줄게요. 잔잔한 거로. 들으면서 자요.”
자신이 첼리스트라 다행이었다. 다비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길 바라며 재하는 자신이 연주한 것 중에 가장 잔잔하고 편안한 음악을 선곡해 재생했다. 첼로의 묵직하고 중후한 선율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다비가 곡을 듣고 금세 알은체했다.
“아. 나, 이거 리온이 공연에서 들어봤던 곡이다.”
“맞아요. 삼촌 유럽 투어 첫 공연 때 연주했던 곡이에요. 그때 형 독일에 왔었잖아요. 기억할 것 같아서 삼촌이 연주했던 거랑 같은 곡 위주로 선곡했어요.”
“근데 이게 소리는 더 좋은 것 같아. 녹음해서 그런가?”
“오, 형 진짜 귀 좋다. 첼로가 달라서 그래요. 얘가 그 하데스예요. 삼촌이 소리가 너무 웅장해서 무섭다고 했던 그 첼로.”
“아, 네가 열다섯 살에 이름 붙여줬다는 그 첼로?”
“기억하네요? 지나가면서 한 이야기인데, 그걸 기억해주다니 저 지금 되게 기쁘고 영광….”
“재하야, 음악 듣자.”
“…네.”
“네 음악 듣기 좋아서 그래. 신경 써줘서 고맙다.”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섞인 재하의 연주는 오늘 하루를 심란하게 보냈을 다비를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게 했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툭 떨어졌다.
재하는 잠든 다비를 다정한 눈으로 가만히 살피다 자리에서 살며시 빠져나왔다. 재생되던 음악을 끈 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테라스에서 이미 어두워진 바다를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비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악몽의 그 ‘형’이 분명했다. 고향 사람이 확실했고 자신을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도 분명했다. 사귀던 사람이 있었다는 건 아주 조금 질투 났지만, 다비가 워낙 잘생겼으니 충격적인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없었던 게 신기했을 뿐.
다만 누군가에겐 다리 뻗고 푹 잘 수 있을 만큼 오래된 과거의 일일지 몰라도 다비에겐 현재의 일이었고 다비가 아직도 힘들어하고 있다는 게 참을 수 없이 마음 아팠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지만 끝까지 울지 않고 저를 먼저 달래던 다비가 떠올랐다.
재하는 그 얼굴이 너무 아파 테라스에서 한참을 소리죽여 울었다. 다비의 상처까지 전부 자신이 보듬어주고 싶었다.
***
그날 이후로 다비를 대하는 재하의 행동은 마치 금방 깨지기라도 하는 유리잔을 만지는 것처럼 더 조심스러워졌다. 정작 다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말이다. 뭔가 할라치면 주위를 맴돌며 먼저 나서서 하는 행동들이 조금 거슬리고 불편했지만, 재하도 많이 놀라서 이러는 건가 싶어 다비는 재하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다.
재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파에 앉아 있는 다비의 무릎에 턱을 기대고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다비를 불렀다.
“형, 혹시 상담받아볼 생각 없어요?”
“무슨 상담?”
“주제넘은 참견인 거 아는데, 아무래도 상담받는 게 좋지 않을까요? 병원에서 진료받는 거 마음에 안 들면 우리 집안 담당 선생님이 계세요. 국내에서 실력자시고, 당연히 비밀 보장되고요. 원한다면 소개해줄게요. 비용도 제가….”
“재하야.”
“네. 역시 제가 좀 주제넘었죠.”
어디서 이런 천사 새끼가 내려왔지? 그동안 너무 삐딱한 말들만 해서 그런가. 자신을 생각해줘서 꺼낸 말이라는 걸 아는데, 왜 재하가 미안해하는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고마우면서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비는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제안해준 건 고마운데, 솔직히 상담받을 자신이 없어. 그런 이야기를 꺼내도 되는 곳이라 할지라도 내 입으로 과거를 말하고 싶지 않아. 상담이라는 게 솔직해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난 그냥…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이해 안 가겠지만,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생각해줘서 고맙다.”
지금까지 그게 큰 문제인지 모르고 살았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몸이 불편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역시 아니라 지금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다만, 재하와의 관계가 문제라면 문제랄까.
재하가 해마다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때만 악몽을 꿨었다. 요즘은 매일 좋아한다고 말하니 악몽은 계속 꾸지만, 혼자 있을 때보다 잠은 잘 자고 있어서 문제라고 느끼지 못했다. 스킨십도 섹스하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다. 오히려 좋았으면 좋았지, 싫어한 적 없었다. 삽입하기 직전에 그런 문제가 터진 걸 보면, 아무래도 자세가 문제였던 듯싶었다.
숙박 시설이 없는 시골 마을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런 짓을 여유 있게 할 수 있는 장소는 많지 않았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폐가에서 후다닥 해치우다 보니 그 새끼하고 한 자세는 그 자세 하나밖에 없었다.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아니, 어쩌면 다른 이유가 그 자세를 싫어하게 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한심했다. 그땐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했다니. 김다비, 이 등신 새끼야. 과거의 김다비를 속으로 욕하던 다비는 제 밑에서 얌전히 쓰다듬을 받는 재하와 눈을 맞췄다.
“재하야. 역시 자세가 문제였던 거 같아. 다른 자세로….”
“아뇨. 무리하지 말아요. 저 진짜 괜찮아요.”
“나도 괜찮은데, 그냥 시도만….”
“형, 섹스 파트너라는 부담감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우리 다른 관계로 바꿔요. 뭐 계약 연애 같은 거요. 그냥 연애도 좋고요.”
“…아니, 딱히 부담 갖고 이런 말 하는 거 아닌데.”
“전 정말 섹스 안 해도 괜찮거든요. 형은 너무 착해서 큰일이에요. 형 마음이 더 힘들 텐데, 제 고추 걱정까지 해주고. 제 생각 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전 형이 마음 편하게 제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괜찮아요.”
유재하는 아무래도 전생에 개였나 보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착한 개가 인간으로 환생한 것 같았다. 그래서 현생에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첼리스트로 성공하고 금수저로 태어났겠지. 아니, 자신을 만났으니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건가? 뭐가 됐든 어디서 이렇게 예쁜 말만 하는 놈이 어쩌다 제 앞에 떨어졌지? 자신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저렇게 예쁜 소리는 못 할 것 같아, 다비는 예쁜 말만 내뱉는 재하가 신기하고 기특했다.
“후, 예쁜 새끼.”
“…네? 저 지금 예뻤어요?”
“어. 좀 예뻤다. 이리 와봐. 안아줄게.”
재하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얼른 소파 위로 올라가 다비에게 폭 안겼다. 덩치 차이가 있다 보니 안긴 모양새는 우스웠지만, 자신의 등을 토닥이고 뒤통수를 쓰다듬어주는 다비의 손이 좋아서 자세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형, 제가 섹스 안 한다고 해서 예뻐하는 건 아니죠? 당분간만 안 한단 소리였는데….”
“그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 모습 보이고 이런 말 하는 거 우습지만,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나 멘탈 약한 놈 아니야. 솔직히 나도 조금 놀랐어. 그런데 그건 네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니까 서로 눈치 보지 말자. 네가 그렇게 나한테 저자세로 굴 필요 없단 소리야. 알았냐?”
“…그래도 걱정돼요.”
“걱정할 시간에 지금처럼 예쁜 짓만 해. 나 지금 네 덕에 나쁜 생각 하나도 안 드는데.”
“제가 예쁜 짓 해서요?”
“어.”
재하는 팔을 뻗어 다비를 꽉 끌어안았다.
“그럼 예쁜 짓 많이 할게요. 어디가 예쁘고 귀여운지 알려주면 열심히 배워서 형한테 보여줄게요.”
“지금도 좀 귀여웠다.”
“그럼 어디가 귀여웠는지도 알려줘요.”
재하가 바짝 기대오는 바람에 다비는 버티지 못하고 소파에 눕고 말았다. 덩치 큰 개가 애교 부린다 생각하니 제법 귀여워서 다비는 재하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이미 벌어진 과거의 일에 원망을 퍼부으며 현재의 삶을 외면하는 건 자신답지 않았다. 어쩌다 발목이 붙잡히게 됐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남아 있는 미래까지 진창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고향 오지도에서는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고, 섬에서 자란 자신은 그렇게 약하지 않았다. 끔찍하게 괴롭더라도 잠깐만 참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견딜 수 있었다. 재하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은 조심스럽게 여길 얇은 유리잔은 아니란 소리였다.
무의식이라는 괴팍한 녀석에게 질 생각은 없었다. 과거의 김다비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지만, 그것 역시 자신이고 그 책임이라고 생각하면 이 정도는 견딜 만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걱정하는 재하의 안쓰러운 모습이 더 신경 쓰이고 마음이 불편했다.
자신과 사귀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 다른 것을 걱정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다비는 잘 참고 버텨보기로 했다.
***
섬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다비는 이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아쉬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람 냄새가 나는 다른 곳도 그리웠지만, 이곳을 떠나면 또 언제 이런 여유 있는 감금 생활을 해보나 싶은 생각에 결국 잠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허리를 감싸고 잠든 재하의 팔이 묵직하게 툭 떨어졌다. 잠을 깨웠을까 싶어 멈칫거리다 곤히 잠든 재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깐 산책만 하고 오려고 했는데, 사라진 걸 알면 또 놀랄 것 같아 밖에 나가는 것이 망설여졌다. 사라지지 말라고 했으니 같이 깨워서 나갈까 생각했다가 깨우기 미안해서 다비는 산책을 포기했다.
다비는 테이블에 놓인 노트북을 들고 침대 밑에 털썩 앉았다. 섬에 와서 찍은 사진은 매일 노트북에 옮겨두었다. 돌아가서 한꺼번에 하려던 작업이었는데, 잠이 오지 않을 때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한 달 동안 찍은 사진이 폴더 안에 빼곡했다. 다비는 한 장씩 자세하게 살피며, 동물, 식물, 풍광 등으로 나누어 분류하기 시작했다. 사진을 하나씩 살필 때마다 섬에 와서 지낸 시간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다비가 가장 좋아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같은 구도, 같은 장면을 찍더라도 같은 사진은 없었다. 그걸 어떤 기분으로 어떻게 찍었는지 전부 기억할 만큼 하나의 사진을 찍더라도 정성을 다했다. 이곳은 정말 사진 찍기 좋은 곳이었다. 하늘, 땅, 물, 어느 곳을 찍어도 전부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찍었고, 이제는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몇 마리인지도 알 수 있을 만큼 많이도 찍었다.
다비가 사진을 보며 추억 여행을 하는 동안, 재하는 어딘가 허전한 기분이 들어 손을 뻗어 시트를 더듬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침대 밑에서 퍼지는 불빛과 불빛에 비친 다비의 실루엣을 발견하고 빠르게 안심했다.
“형, 거기서 뭐 해요?”
“어. 사진 찍은 거 보고 있어.”
“…사진이요? 형이 찍은 거요?”
다비의 사진을 좋아하는 재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잠이 확 깼다. 데이비드 작가님의 사진이라니. 이건 절대 놓칠 수 없는 이벤트였다.
“형, 저 그거 봐도 돼요?”
“언젠 안 본 것처럼 말하네. 이리 와.”
재하는 침대에서 데구루루 굴러 다비의 어깨에 턱을 기댄 채, 노트북에 시선을 주었다. 눈부신 화면에 보이는 섬의 풍경에 저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진짜 좋다. 형 사진은 볼 때마다 좋아요. 이게 형의 시선으로 본 섬이구나. 우리 같은 곳에 있는 거 맞아요? 내 눈으로 본 섬하고 왜 이렇게 다르지? 형, 이때 기분 진짜 좋았구나. 섬 풍경이 되게 동화 같아요. 꼭 인어를 사랑하는 사람이 인어랑 같이 있고 싶어서 이곳에 지은 것처럼 보여요.”
제 귓가에서 감상을 읊어대는 재하의 목소리에 다비는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뺨과 팔뚝에 조금 소름이 돋았다. 자다 깨서 살짝 허스키하고 갈라진 낮은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재하가 자신의 사진을 보고 읊는 감상은 글로 보나, 목소리로 들으나 언제나 소름 돋았다.
재하가 보고 있는 사진은 스노클링 후 숙소로 돌아오면서 찍은 섬의 모습이었다. 이날은 재하가 물속에서 나오는 자신을 보며 인어 같다고 감탄하며 호들갑을 떨던 날이었다. 섬으로 돌아오는데 자꾸 그 말이 맴돌아 계속 피식거렸다.
요트에서 섬을 보자 재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해변과 맞닿은 숙소를 보며 인어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런 섬에서 저렇게 집을 짓고 물과 뭍에서 만나고 사랑하며 살 것 같다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눌렀다. 그 후로도 이런 섬의 전경은 많이 찍었지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이 사진 하나뿐이었다.
그런 구구절절한 사연이 사진에 적혀 있는 것도 아닌데, 꼭 제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셔터를 누르던 순간 느꼈던 자신의 감정을 재하는 신기하게 알아차렸다.
“넌 어떻게 그런 게 다 보여? 매번 놀라네.”
“음, 그냥 보이니까 보이는 대로 말하는 건데. 그걸 어떻게 보느냐고 방법을 묻는다면… 형 사진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제 팬심?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공감하는 거 보면, 형이 사진을 그렇게 볼 수 있게 잘 찍는 거 아닐까요?”
“그게 그냥 팬심으로 퉁칠 문제냐? 그 정도면 거의 나하고 뇌가 공유된 수준인데.”
“제가 그렇게 형 사진을 잘 해석했어요? 진짜 공유하고 싶다. 공유해주면 안 돼요?”
“안 돼.”
재하는 정말 연결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인지 고개를 들어 다비의 머리통에 제 머리를 들이밀었다. 꾹꾹 밀어대는 무게감에 다비가 큭큭 웃으며 손을 들어 재하 쪽으로 가져다 대자, 재하는 연결 시도를 그만두고 얼른 다비의 손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찰싹 가져다 댔다. 그 상태로 노트북에 있는 다른 사진을 보며 생글생글 미소 지었다.
“형 사진은 언제나 봐도 좋아요.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져요. 형은 얼음을 찍어도 따뜻해 보일걸요?”
“얼음이 따뜻해지면 물이거든?”
“아뇨. 느낌이 그렇다는 거죠.”
돌담에 쌓인 차가운 눈을 찍어도 솜이불처럼 포근한 느낌을 찍는 사람이었다. 황량한 사막에 말라비틀어진 고목을 찍어도 생명력을 품고 있는 사진으로 만드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물을 아름답게 보는 진심의 결과가 사진으로 고스란히 나올 만큼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재하는 다비의 시선과 진심이 담긴 사진을 좋아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형의 사진들은 항상 제 마음을 넘치게 해요.”
“너도 내 사진 보고 영감을 얻어서 연주에 담기도 하냐? 리온이는 그러던데.”
“아뇨. 저는 그런 거 잘 못해요. 삼촌은 감정 연주가 뛰어나니까 그게 가능하고요. 전 작곡가의 의도에 가까운 연주를 하는 연주자고요. 감성도 필요하지만, 삼촌만큼 잘 표현하진 못해요. 제가 삼촌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가 그 차이 때문이에요. 감정이 풍부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은 뭘 해도 눈에 보이거든요.”
다비도 자신의 삼촌과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삼촌은 첼로 연주로 자신의 감성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었고, 다비는 사진으로 자신의 감성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둘 다 자신에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사진에 담긴 형의 마음이 너무 사랑스러웠어요. 그래서 그런 마음을 가진 형을 좋아하게 됐어요. 실제로 만나고 나니까 더 좋아져 버렸고요.”
“음, 항상 말하지만, 내 사진을 어떻게 보든 그건 네가 가진 감성 때문이라고 생각해. 내 사진을 그렇게 해석해주니까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말해야지. 모든 사람이 너와 같은 감상을 하는 건 아니거든. 네가 내 사진을 기가 막히게 해석한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그 덕도 톡톡히 봤고 말이야.”
다비가 SNS에 올리는 사진에는 재하의 답글이 항상 달려 있었다. 낭만적인 녀석답게 사진에 담긴 감수성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감상을 늘어놓았고, 사람들은 재하의 해석을 보며 사진을 더 깊게 이해하고 보기 시작했다. 그 덕에 원래도 SNS에서 유명했던 다비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성적으로 촬영하는 사진작가로 더 명성을 얻으며, 자신의 이름을 건 사진전을 여러 번 열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하니 이 또한 재하 덕분인 셈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사진만 보고 사람을 좋아할 수 있게 되지? 그건 지금도 신기해.”
“운명이었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뭐래. 네가 아직 잠이 덜 깼구나. 아니면 졸려서 그러냐?”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재하는 그저 다비의 손에 얹은 제 얼굴을 바짝 붙일 뿐이었다.
다비는 정말 자신의 운명이었다. 죽음을 생각한 순간 운명처럼 다비의 사진을 만났고, 다비의 사진이 자신을 살렸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너무 어둡고, 다비가 듣고 나면 자신을 부담스러워할 것 같으니까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이미 지나간 과거고 다비를 만난 이후로 그런 순간이 찾아온 적은 없었다. 언젠가 다비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다면 먼 훗날 농담처럼 이야기해줄 생각이었다.
“형, 키스해도 돼요?”
“언제는 안 한 것처럼 말한다. 이리 와.”
재하는 냉큼 몸을 숙여 다비에게 입 맞췄다. 다비도 노트북을 바닥에 내려놓고 몸을 틀어 재하의 입맞춤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바닥에 있던 다비를 끌어올려 침대에 눕히고 재하는 다비의 입술을 본격적으로 탐했다.
“형, 키스 말고 더 좋은 거 해도 돼요?”
“미친, 귀여운 새끼. 작업하긴 글렀네. 어디 해봐.”
“귀엽다고 했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니까.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에 자신만 아는 어두운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았다. 자신은 다비에게 예쁘고 귀여운 모습만 보여야 했다.
섬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은 아름답기만 했다.
***
남태평양의 따사로운 햇살과 아름다운 자연을 뒤로하고 도착한 곳은 미국이었다.
이번에는 어느 섬에 감금되나 내심 걱정했던 다비는 목적지를 알고 안심했다. 하지만 역시 재하는 재하였다.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로 당황스럽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녀석이었다. 다비는 섬에 도착했을 때보다 더 어색해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제 옆에서 뿌듯한 얼굴로 저만 쳐다보고 있는 재하를 불렀다.
“재하야.”
“네. 형.”
“음, 여기가….”
“뉴욕이요.”
“응, 그래. 공항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기가 뉴욕인 건 잘 알았어. 그런데 여긴… 대체 어디냐?”
다비가 어색해하는 건 최종 목적지인 숙소였다. 부담스럽게 높은 건물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들어온 실내는 부담스럽게 넓고 또 넓었다. 통유리로 되어 있는 창 바깥으로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 공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다른 유리창으로 고개를 조금 돌리면 맨해튼의 자랑인 높은 빌딩 숲이 보였다. 호텔이라면 그나마 이해해보려고 했는데, 여긴 누가 보아도 거주가 목적인 아파트였다.
“너, 설마… 이것도 샀냐? 나하고 잠깐 지내려고?”
싸가지 없는 녀석을 순한 녀석으로 개조시킬 때 금전 감각도 함께 교육했어야 했던 건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재산을 얼마나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이러다 파산할 것 같았다. 재하와 같은 핏줄인 리온이는 이렇게까지 돈지랄은 안 했던 거 같은데.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현실감이 없어 멍한 표정으로 실내를 두리번거리는 다비를 보며 재하는 속도 없이 생긋 웃으며 기뻐했다.
“마음에 들어요?”
“아니. 마음에 들고 자시고, 넌 미국 사는 애도 아니면서 여기에 왜….”
재하가 고개를 저으며 다비의 오해를 풀어주었다.
“원래 섬에서 시간 다 보낼 생각 했었다고 말했잖아요. 여긴 제 계획에 없었던 곳이라 못 샀어요. 아는 분께 급하게 빌린 거예요.”
“빌렸다고? 진짜? 누가 이런 집을 빌려줘? 네가 아무리 잘나가는 첼리스트라고 해도 이런 집을 빌려준다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고?”
“거짓말 아닌데요. 정말 아는 분인데, 누군지 이야기하긴 곤란하지만, 요즘은 이쪽에 올 일 없다며 흔쾌히 빌려주시더라고요.”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이런 집을 인맥만으로 턱턱 빌려주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소시민인 자신은 아무리 상상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라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도 공짜로 빌리기엔 집이 너무 부담스러운데. 뭐 하나라도 잘못 건드렸다가 파손될까 봐 여기서 움직이지도 못하겠다.”
“그런 거 신경 쓰실 분들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무튼, 여긴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들긴 하는데. 미국으로 간다고 해서, 나는 네가 우리 집에 가자고 할 줄 알았지.”
조금 전까지 생긋거리던 재하가 웃음을 뚝 거두고 얼굴을 굳히며 다비를 쳐다보았다.
“…혀, 형 집이요? 형이 지금 사는 집 말하는 거죠? 형 혼자 미국에서 사는 그 집. 거기요? 오지도 아니고, 미국에 있는 형 집….”
“우리 집을 몇 번을 불러. 미국에서 오지도는 왜 찾고. 여기서 우리 집이라고 하면, 미국에서 내가 지내는 집이지.”
“형, 우리 거기로 가요. 형 집이라뇨. 왜 지금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거기로 가요. 네?”
목적지를 정한 건 재하 본인이면서, 부동산 사기를 당한 것 같은 얼굴로 다비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다비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터졌다. 조금 더 괴롭히고 싶은 마음에 픽 웃으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우리 집 좁아. 대부분 촬영으로 집을 비우니까 굳이 넓은 곳을 계약할 이유가 없어서. 너하고 내가 그 집 들어가면 집 꽉 차서 안 돼.”
“제가 몸을 접고 살게요. 다른 곳도 아니고 형 집인데, 몸 구기고 지내는 거 하나 못 하겠어요?”
“난 여기 마음에 드는데? 그리고 이제 막 도착했잖아. 우리 집까지 가려면 버스로 4시간 30분은 걸려. 나 지금 피곤하다.”
“형. 제발.”
금방이라도 땅을 치고 울 것처럼 재하가 좌절한 표정으로 불쌍하게 굴었다. 다비의 집에서 지낼 기회를 제 발로 뻥 걷어찼으니 내일 당장 세상이 멸망한다고 뉴스에 나와도 전혀 놀라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슬픔이 밀려들었다.
“형네 집에 가고 싶다.”
탄식처럼 내뱉은 말에 다비는 큭큭 웃으며 재하의 등을 손으로 토닥여 주었다.
“아니, 이렇게 좋은 집을 두고 왜 자꾸 좁아터진 집에 가겠다는 거야?”
“좁은 집이 아니라 형네 집이잖아요. 형이 사용하는 물품이 모여 있고, 형이 먹고 자고 하는 그곳이요. 그건 돈 주고도 못 사는….”
“너 이럴 때 보면 좀 미친 거 같아. 나쁜 뜻은 아니고 웃기고 귀여워서 하는 소리야.”
“저 지금 진지한데. 그리고 미친 거 맞는데요. 형한테.”
“아, 뭐래.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어쩔 수 없네. 여기서 2주만 놀다 우리 집 가자. 여기는 제대로 돌아다녀 본 적 없거든.”
계약한 본사가 미국이라 스무 살 때부터 이곳에 살고 있지만 다비에게는 그냥 거점 같은 거였다. 전 세계 오지와 열대우림, 바다가 다비의 일터였다. 촬영 후 장기 휴식이 주어지면, 미국에서 혼자 지내는 것보다 가족이 있는 한국이나 외가인 스웨덴에서 머물며 가족과 친구를 만나 편히 쉬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다비는 이곳에 대해 다 알지 못했다.
“나도 뉴욕 구경 좀 하게. 2주. 콜?”
“코, 콜이요. 그런데 정말이죠? 2주 후면, 형네 집 가는 거죠?”
“속고만 살았냐? 너 데리고 가는 게 뭔 큰일이라고 그걸 속여.”
“고마워요, 형.”
재하는 기뻐하며 다비를 껴안으려고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달려들었지만, 다비는 바깥 풍경에 홀린 듯 거실 유리 벽 쪽으로 향했다. 눈앞과 발밑에 도시의 불빛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여긴 아무거나 막 찍어도 기본은 나오겠다. 내일은 뭐 하지?”
다비의 물음에 재하는 벌렸던 팔을 툭 내리고, 다비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공원 산책 가요. 이 근처에 베이글 맛있는 곳 있다고 들었어요. 베이글에 커피 사 들고 같이 공원 가서 데이트….”
“베이글에 커피라. 겁나 질리는 메뉴인데. 넌 안 먹어봤어?”
“아, 베이글하고 커피는 먹어봤어요. 돌아다니면서 먹어본 적은 없지만.”
“그럼 이번에 돌아다니면서 먹어 봐. 마침 시기 맞춰서 잘 왔네. 딱 단풍 시기라서 공원 산책할 맛 날 거야.”
재하가 잡은 데이트 코스에 다비가 쉽게 응하자, 재하는 한껏 신난 얼굴로 다비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다비는 처음과 달리 제법 자신의 응석을 받아주고 있었다. 울상을 지으면 진저리치는 건 여전해도 이렇게 몸으로 끌어안으면 다비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사실을 알려주면 다비가 의식하고 안 할 것 같아 절대 말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더 쓰다듬어달라고 다비의 목에 머리를 묻고 귀여움을 떨었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어요. 형하고 데이트하게.”
“산책이라며.”
“산책 겸 데이트요.”
“넌 섹파하고 데이트도 하냐?”
방금 분위기 진짜 좋았는데, 잘나가다 한 번씩 삐딱하게 나왔다. 다비가 찬물을 끼얹어도 재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비를 더 끌어안았다.
“섹스도 안 하는데, 우리가 왜 섹스 파트너예요? 그냥 연애하는 거지.”
“은근슬쩍 말 바꾸네. 앞에 계약은 왜 빼먹어.”
“네. 계약 연애요. 그러니까 데이트도 할 겁니다.”
“그러든가. 그럼.”
고분고분하게 나오는 재하에게 다비가 슬쩍 물러나 주었다. 한참 야경을 구경하고 둘은 뒤늦게 짐을 풀고 일찍 잠을 청했다.
***
“형, 다비 형.”
어디선가 재하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다비는 눈을 뜨지 못하고 눈썹만 들어 올리며 부름에 대답했다.
“…왜.”
“산책 가야죠.”
“…지금?”
힘겹게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바깥은 어두웠고 스탠드 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재하는 코트에 머플러까지 다 차려입고 벌써 나갈 준비를 끝낸 채, 침대 밑에 무릎 꿇고 앉아 다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산책하러 나갈 시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몇 시야?”
“여섯 시요.”
“…여섯. 환장하겠네.”
개한테는 산책 가자 소리를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던데, 지금 재하가 딱 그랬다. 가슴 줄을 입에 물고 주인에게 산책 가자고 졸라대는 모양새였다. 남태평양에서 여기까지 오랜 시간 이동해서 왔건만, 피곤하지도 않은지 재하의 눈이 초롱초롱하기까지 했다. 다비는 일단 일어나기로 했다. 일어나서 한 대 때리고 다시 누울 생각이었다.
다비가 일어나자 재하가 얼른 옆에 앉아, 베개에 눌린 머리를 손으로 빗겨주며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형, 베이글 맛있는 곳 알아냈어요. 공원 근처에 있대요. 베이글에 커피 들고 공원 한 바퀴 돌아요.”
“…재하야. 거긴 그렇게 동네 놀이터 도는 것처럼 말하면 안 돼. 구역을 잡고 돌아야지. 동네 개들도 힘들어서 거기 한 바퀴는 다 못 돌아.”
“그럼 이 근처만 돌아요.”
재하는 다비의 머리를 다 쓸어내린 후, 꼭 끌어안고 쪽쪽거렸다. 잠이 덜 깨서 그런지 개가 핥아대며 산책을 조르는 기분이 들었다. 온몸으로 당장 나가자는 몸짓에 다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씻고 나가자.”
“네. 전 준비 다 했어요. 형만 준비하면 돼요.”
“응, 그래. 그런데 너 정말 그거 입고 나갈 거야? 어디 출근하냐?”
“…네?”
“점퍼 같은 거 없어? 경량 패딩이나.”
코트에 머플러 두르고 공원을 산책할 수도 있겠지만, 다비가 가진 옷은 전부 캐주얼한 옷이라 둘이 같이 다니면 이상해 보일 것 같아 물어본 건데 재하가 얼른 입은 옷을 살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해요? 가진 옷이 다 이런 거라서. 가벼운 옷은 전부 여름옷이고….”
“아니. 겁나 잘 어울려. 모델 같아. 그래도 편하게 입고 다니자. 이따 나가면 옷도 좀 사고.”
“형이 제 옷 골라주려고요? 그렇지 않아도 형 막 입는 스타일 되게 마음에 들었는데. 같이 쇼핑해요. 아, 커플 티 맞춰도 돼요?”
“안 돼.”
시무룩한 채 자신을 안고 있는 재하를 손으로 밀어 떨어트려 놓고 다비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섬에서는 나가기 싫어서 조금이라도 더 자려던 녀석이 도시에 왔다고 저보다 일찍 일어나서 요란법석을 떠는 걸 보니 나가기 싫어도 나가줘야 할 것 같았다.
“배변 봉투도 챙겨야 하나.”
“네?”
“아무것도 아니야.”
다비는 산책할 준비를 마치고 재하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재하가 바라는 대로 베이글로 유명한 가게에 줄을 서 커피와 베이글을 사서 공원으로 향했다. 11월이라 공기는 쌀쌀했지만, 눈으로 보는 공원의 풍경은 단풍으로 한창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과 조깅하는 사람들,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다비가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동질감을 느끼고 있을 때, 재하는 다비와 함께 데이트하고 있는 현실이 꿈만 같았다.
“형, 오늘 하루 종일 여기만 같이 걸었으면 좋겠어요.”
“…참아주라.”
다비는 햇볕이 드는 따뜻한 곳을 찾아, 재하를 데리고 갔다.
“베이글 따뜻할 때 먹어야 안 질겨. 먹고 움직이자.”
다비는 벤치에 앉아 공원의 전경을 감상하며 베이글을 한입 가득 깨물었다. 상큼한 크림치즈와 토마토의 조합이 나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앉은 재하의 뒤통수를 쓰다듬어주었다.
“가게 잘 골랐네. 맛있다.”
“정말요? 형이 맛있다고 해주니까 열심히 찾아본 보람이 있네요.”
“그래. 그러니까 나 먹는 거 그만 쳐다보고 너도 질겨지기 전에 얼른 먹어.”
“…네. 길에서 뭐 먹는 거 처음이라 기분이 좀 이상해요. 뭔가 나쁜 짓 하는 기분이에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자마자 들은 충격적인 소리에 다비는 하마터면 커피를 뿜을 뻔했다. 새삼스럽게 도련님다운 말에 조금 당황한 얼굴로 다비는 커피를 얼른 삼키고 재하를 보았다.
“거짓말. 한 번도 없었다고?”
“네. 삼촌도 길에서 뭐 먹어본 적 없을걸요?”
“지금은 좀 재벌 집 자식 같았다.”
“…칭찬 아니죠?”
“칭찬이야.”
“아닌 거 같은데요.”
“귀하게 컸단 소리인데, 왜 그게 칭찬 아니야. 넌 나 때문에 지금 나쁜 짓 하고 있는 거네.”
다비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던 재하는 베이글 포장을 뜯어 다비처럼 얼른 한입 가득 깨물었다. 밖에서 먹으나 안에서 먹으나 베이글의 맛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다비와 함께 이렇게 있으니까 밖에서 먹는 게 좀 더 맛있게 느껴졌다.
“이런 나쁜 짓이라면 평생 해도 좋겠어요.”
“귀여운 새끼. 아침마다 이렇게 나와서 나하고 나쁜 짓 해, 그럼.”
매일 함께 산책해주겠단 말에 재하는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그게 평생이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욕심 내면 이마저도 이루지 못할 것 같아 베이글을 입에 얼른 물고 고개를 끄덕이며 울음을 참았다.
바쁜 도시 사람들 사이에서 여유를 부리는 아침이 꽤 즐거웠다.
다비와 함께 뉴욕으로 오길 잘했다며 재하는 뉴욕으로 목적지를 정한 자신을 칭찬했다. 함께 점심을 먹고, 쇼핑하고 다비가 가보자는 전망대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재하는 데이트한다는 기분에 들떠 있었다. 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때도 좋았지만, 역시 자신은 도시가 더 편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곳에 온 게 좋았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재하의 기분은 곧 바닥을 치고 말았다. 이번에도 사람 없는 오지로 여행을 갈걸. 뉴욕으로 목적지를 정한 게 후회됐다.
스테이크를 잘하는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노을을 보며 숙소로 돌아오는데, 어느 순간 주위의 시선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저를 알아본 사람들의 시선인가 생각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시선의 일부는 다비를 향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흘끗 쳐다보고 지나가다 뒤에서 감탄사가 나오는 정도의 수준이라서 우리 형이 잘생겼지, 하는 뿌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두 명의 여자가 가까이 와서 말을 걸었다. 여행객인데 사진을 부탁한다는 말에 다비가 흔쾌히 요청에 응했다. 자신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할 때는 싫다더니 생면부지의 사람에겐 저렇게 친절하게 사진을 찍어주다니. 그때부터 재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다비가 사진을 찍어주고 휴대폰을 건네주자, 사진을 확인한 여행객들이 결과물에 기뻐하며 다비의 사진 실력을 칭찬해주었다. 그걸 시작으로 여행객들의 수작이 시작됐다.
「두 분도 여행 온 거면 같이 다닐래요? 숙소는 어디예요?」
「죄송해요. 저희 둘만 온 게 아니라서요.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다비는 잘생긴 미소를 지으며, 여행객의 제안을 상냥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재하는 서운하고 질투 났던 기분이 조금 풀렸다. 재하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다비의 곁에 바짝 붙었다.
“형, 우리 일행 있었어요?”
“그럼 뭐라고 말해. 일행 있다고 말하는 게 제일 깔끔하잖아.”
“그런가. 그냥 대꾸 안 하는 게 제일 편하지 않아요?”
“그건 예의가 아니고.”
“우리 형, 이렇게 착해서 큰일이네요. 나쁜 사람 달라붙으면 어떡하죠?”
“뭐래. 내가 애냐. 네 옆에 있어서 내가 좀 작아 보이는 거지, 나 여기서도 작은 키는 절대 아니거든. 누가 감히 나한테 달라붙어.”
「너희들 여행 온 거야?」
이번엔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는 재하를 흘끗 보다가 곧장 다비에게 말을 걸었다. 여행 온 거라면 자신이 안내해주겠단 뻔한 수작질을 듣자마자, 재하는 다비의 뒤에서 남자를 서늘한 눈으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싸늘하고 차가운 재하의 표정에 주춤하며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재하는 남자와 눈을 맞춘 채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더 말을 걸면 죽여버리겠다는 의미가 가득 담긴 시선이었다. 다비가 거절하려고 대답하기도 전에 남자는 착각했다며 둘에게서 멀어졌다. 다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뒤에 서 있는 재하를 보았고, 재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착하게 웃으며 다비와 눈을 맞췄다.
“착각했대요.”
“응, 나도 귀가 있으니까 알아들었어. 네가 옷을 그렇게 입어서 여행객으로 보잖아. 누가 그렇게 멋 부리고 다니래. 내일부턴 편하게 입고 다녀.”
“네.”
하지만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재하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다비는 능숙하게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능숙한 만큼 이런 일을 자주 겪었던 걸 깨닫고 나니 속이 조금 부글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섬에 계속 감금… 아니, 계속 휴양이나 즐길걸.
“섬에서 나오지 말 걸 그랬어요.”
“…뭐가.”
“형 잘생긴 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잖아요. 다들 형한테 말 걸고, 수작 부리고….”
“뭐래. 너보다 내가 더 말 걸기 쉽게 생겼으니까 그랬겠지.”
“아니에요. 다들 형 꼬셔보려고 수작….”
다비는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재하를 쳐다보았다. 어딘가 뚱해 보이는 게 제법 귀여워서 팔뚝을 툭툭 두드려주며 달랬다.
“재하야. 나도 나 잘생긴 거 아는데, 네가 지금 말한 건 좀 오버야. 어딜 봐서 그게 수작이야.”
재하는 억울했다. 누가 봐도 수작질이 분명했는데, 다비는 아니란다. 호감을 느낀 이들의 표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재하 역시 그런 시선을 많이 받아봤다. 다비에게 접근해 말을 건 사람들은 전부 다비의 외모에 호감을 느낀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다비가 자신을 향한 호의적인 눈빛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형, 지금은 제가 형의 연인이죠?”
“어. 이제 70일짜리.”
“…저 지금 진지하게 묻는 건데요.”
조금 전까지 기분 좋아 보이더니, 갑자기 왜 기분이 안 좋아진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다비는 그저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재하가 타이밍 좋게 눈썹을 툭 떨구자 다비가 질색하며 입부터 열었다.
“아, 왜. 뭐가 불만인데. 울 생각부터 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봐.”
“형이 너무 잘생겨서 불안해요.”
“…뭐?”
“지금이야 형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이 들이대니까 그렇게 웃으면서 거절하지만, 형 이상형이라도 나타나면 어떡해요.”
“…뭐?”
잘생긴 놈이 잘생긴 놈한테 잘생겨서 불안하단다. 다비는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재하는 지금 울면서 징징대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울면서 다른 사람한테 눈길도 주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질투 때문에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곤란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저하고 있는 동안엔 이상형이 나타나서 말 걸어도 무시해요. 제가 지금은 형 연인이잖아요.”
“…뭐?”
너무 황당해서 같은 말만 입에서 튀어나왔다. 어이없고 말도 안 되는 요구에 결국, 다비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이상형? 연애할 생각이 없었으니 애초에 그런 거 만든 적도 없었다. 이상형을 취향으로 바꿔 말한다면 지금은 유재하였다. 몸도 좋고, 자신을 끔찍이도 좋아하는 녀석인 데다, 자신도 어느 정도 재하에게 호감이 있었다. 현재 이상형인 녀석이 이상형을 만나면 무시해달라는 개떡 같은 소리를 내뱉는 게 퍽 웃겨서 삐딱한 마음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여기서 너무 삐딱하게 굴면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기세라, 다비는 순순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럼 이제부터 내가 너 무시하면 되는 거냐?”
“…네? 왜, 저를…. 네? 저요? 제가 형 이상형이었어요?”
재하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머리가 잠시 멈췄다가 다비의 미소를 보고 뒤늦게 뜻을 알아차렸다. 울면서 징징대지도 않았는데, 다비가 듣기 좋은 소리를 해줬다는 걸 알고 입가가 멋대로 느슨해졌다.
“내가 형 이상형이었구나.”
“아닌데? 난 이상형 같은 거 없어. 취향은 있지만. 네 몸이 취향이라면 취향인데, 네가 방금 무시하라고 했잖아.”
다비가 계속 웃으며 말을 삐딱하게 하고 있었다. 내가 취향이라니. 재하는 그것만으로 좋아서 마음이 흘러넘쳤다.
“좋아해요, 형.”
“네 몸이 취향이라고.”
“네. 알았어요. 앞으로도 잘 관리할게요.”
“그럼 나야 감사하지. 앞으로도 관리 잘하세요.”
재하는 내일부터 다시 몸 관리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얼른 다비를 품에 안았다. 뉴욕에 온 게 진지하게 싫어졌다가 다비의 말 한마디에 손바닥 뒤집듯이 다시 좋아졌다.
***
“여행이 재미없나.”
뉴욕에서 며칠 지내는 동안, 다비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보통 뉴욕으로 여행 오면 유명한 곳을 돌아보며 추억을 쌓는 게 일반적인 관광 코스였다. 전망대에서 도시 구경도 좀 해주고, 야경도 보고, 크루즈도 타고, 맛집이나 명소를 돌아다니면 그것만으로도 2주를 알차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재하는 자신이 가자는 곳만 딱 같이 갈 뿐, 다른 곳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관광에는 관심이 없으면서도 밖으로는 꼬박꼬박 나가려 했다. 매일 아침 산책하자고 했더니 그건 지금까지도 좋은지 일정에서 빼지 않았다. 산책 좋아하는 개같이 구는 건 좋은데, 주위에 사람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잔뜩 경계했다. 들릴 리가 없는 으르렁 소리가 재하에게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오늘 아침에도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을 발견하자 재하는 곧바로 제 뒤로 자신을 숨기고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잔뜩 경계해서, 등짝을 얻어맞는 것으로 산책을 끝내고 온 참이었다. 우리 집 개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고민하다가 오히려 의문만 잔뜩 생기고 있었다. 이럴 거면 여길 왜 왔지?
“잠깐만….”
다비는 휴대폰을 들고 ‘유재하 뉴욕, 미국’을 검색했다. 관련된 것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끝도 없는 기사에 다비는 짧게 숨을 내뱉었다.
“허, 뭐냐. 뉴욕에서도 공연 엄청 했었네? 근데 왜 기억이 안 났지?”
최근 기사로 확인하자, 올해 초에도 뉴욕에서 공연이 있었다. 재하는 묻지도 않았는데 공연 일정을 알아서 보내는 스타일이었다. 어느 나라 어떤 지역에서 무슨 프로그램을 며칠 일정으로 하게 되었다, 같은 내용을 거의 인사처럼 수시로 보냈다. 갈 시간이 안 돼서 그런 건 대충 흘려 넘겼는데, 그중에 미국 공연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비는 이번에 같이 뉴욕을 다닐 때, 재하가 처음이라는 듯 저와 꼭 붙어 다니길래 당연히 처음 방문하는 것인 줄 알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뉴욕에 온 게 처음이라고 재하가 말한 적은 없었다. 재하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조금 속은 기분이었다.
마침 재하가 씻고 나오길래 다비는 재하를 냉큼 불렀다.
“재하야.”
“네.”
“너 뉴욕 처음이야?”
“아뇨. 처음은 아닌데요. 공연도 몇 번 왔었고요.”
순순하게 대답하는 재하의 말에 물어본 자신이 허무할 정도로 기운 빠졌다. 오히려 재하가 서운하다는 얼굴로 다비에게 다가와 찰싹 달라붙었다.
“저 공연 있을 때마다 형한테 문자 보냈었는데. 어디서 밥 먹고, 연습은 어떻게 했고…. 아, 사진도 가끔 보냈고요.”
“그렇게 보낸 게 한두 개였어야지. 잊어버린 건 미안하다. 난 네가 뉴욕 처음인 줄 알았어. 그러게… 네가 다른 나라 공연을 그렇게 다녔는데, 여길 안 왔겠냐. 내가 이렇게 멍청하다. 아니, 우리 부모님은 왜 똘똘한 머리는 죄다 모아한테만 물려주신 거지? 여기서도 나만 신나서 돌아다닌 건가.”
뉴욕이 처음일 거라 생각하고 열심히 재하를 끌고 다녔는데, 그게 전부 헛짓거리가 된 것 같아 생각 없이 움직였던 자신이 한심해졌다. 자책하는 다비를 보며 재하가 더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제가 서운한 티 내서 그래요? 왜 그런 말을 해요. 형 말대로 제가 문자를 많이 보내서 그러는 거잖아요. 그걸 다 기억하는 게 이상하죠. 그리고 저 형이랑 돌아다니는 거 다 좋아요.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럼, 뉴욕엔 왜 온 거냐?”
“…네?”
“나랑 여행 올 거였으면 다른 곳에 가도 됐잖아. 평소에 안 가본 곳. 여긴 많이 와 본 곳인데 굳이 또 여기로 온 이유가 뭔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별거 아닌 질문에 재하가 슬쩍 몸을 떨어트리며 다비의 눈치를 살폈다. 우물쭈물하면서 입술을 달싹거리는 등, 티 나게 저러니 뭔가 무시무시한 소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다비는 일단 마음의 준비를 했다. 엉뚱한 소리가 나오면 곧바로 저 튼실해 보이는 팔뚝을 손바닥으로 내리쳐야겠단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뭔데 그렇게 눈치를 봐.”
“아, 그게… 여기가… 로맨스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배경이라서요.”
“…뭐?”
“그러니까 로맨스 영화 배경으로 저 앞에 있는 공원도 유명하고, 뉴욕도 유명하잖아요. 다들 여기서 사랑에 빠지곤 하니까. 형이랑 여기에 오면… 형도 저한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아니, 미친…. 대체 뭔 영화를 본 거냐?”
말하는 재하는 한없이 진지하고 심각하게 말하는데, 듣는 다비가 부끄러워졌다. 재하는 낭만적인 뭐, 그런 녀석이니까 그럴 수 있는…. 못 견디겠다, 저 감수성. 꼭 로맨스 영화에만 뉴욕이 나오는 건 아닌데, 귀하게 자라서 뉴욕이 배경인 험악한 영화는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여기서 같이 지내면 내가 사랑에 빠질 거 같아서 뉴욕으로 왔다고? 무슨 그런….
“하, 씨발. 귀여워 죽겠네.”
“…저 지금 또 귀여웠어요? 진지하게 말한 건데.”
“어. 네 머리통 굴러가는 게 귀여웠다고. 대체 어떻게 자라야 그런 생각을 하게 되냐? 스물네 살짜리가. 애새끼같이. 미친, 로맨스 영화….”
다비는 이유가 너무나 허무하게 귀여워서 배를 잡고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재하는 다비의 웃음에 당황하면서도 즐거워하니까 그냥 같이 미소 지었다. 분명 칭찬은 아닌 거 같은데, 아무래도 좋아졌다.
뉴욕을 고른 이유가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다.
재하가 뉴욕에서 처음 공연한 건 19살이었을 때였다. 뉴욕 첫 데뷔인데 메인 홀에 곧바로 입성했고, 티켓도 빠르게 매진시킬 만큼 재하의 뉴욕 데뷔는 꽤 화려했다. 연주자들이 한 번쯤 꿈꾸는 무대인 만큼 한국에서도 기사가 제법 많이 쏟아졌다. 많은 사람의 축하가 쏟아졌지만, 그때 가장 기뻤던 건, 다비가 먼저 보낸 축하 문자였다. 지금도 그 문자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기특하네. 촬영만 아니었으면 네 연주 들으러 갔을 텐데 못 가서 미안해. 넌 대단한 녀석이니까 무대에서도 잘할 거야. 힘내라. 항상 응원한다.]
오래전 일이라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자신이 그걸 기억하고 있으니 괜찮았다. 평소에 공연 잘하라는 다비의 문자는 많았지만, 연주회에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먼저’ 문자를 보낸 것은 처음이었다. 같은 나라에 있었으면 직접 공연을 보러 와주겠다는 말을 처음 했던 문자를 뉴욕에서 받았다. 다비의 응원 문자 덕에 뉴욕 첫 데뷔는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다.
그런 추억이 있는 곳이라 뉴욕으로 목적지를 정했던 거였다. 자신이 보낸 문자를 잊어버려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다비에게 이런 말을 꺼내면 다비가 더 미안해할 것 같아 로맨스 영화를 들먹이며 변명했다. 그 덕에 애새끼가 돼버렸지만, 그래도 다비가 숨넘어가게 웃고 있으니 그걸로 변명의 역할은 다한 듯싶었다.
“형, 저 귀여웠으니까 키스해도 돼요?”
“어. 잠깐만, 조금만 더 웃자. 하, 미친… 귀여워.”
재하는 웃고 있는 다비를 붙잡아 품으로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다비는 큭큭거리면서도 재하의 입맞춤을 받아주었다. 곧 웃음소리는 사라지고 질척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때는 뉴욕에서 다비의 문자만 받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함께 좋은 추억이 있는 곳에서 더 좋은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자신이 행복한 만큼 다비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마음을 열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마음이 더 깊어지는 건 저뿐인가 싶어 아주 조금 슬펐지만, 남은 날이 아직은 더 있으니까 재하는 더 열심히 노력하기로 했다.
***
다비는 날이 밝자마자 재하를 산책시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이 여러 개인데도 한 개밖에 없는 것처럼 옆에서 저를 안고 잠든 재하를 가만히 보다가 제 허리에 둘러진 재하의 팔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산책하러 나가서 다른 사람을 경계하며 으르렁댈 때마다 등짝을 때리고 산책을 종료시켰더니 요즘은 많이 얌전해져서 산책할 만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한 다비는 거울을 지나치다 거울에 비친 자신과 마주쳤다. 울긋불긋한 상체에 저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아니, 얘는 왜 이렇게 물어뜯는 거야. 욕구불만인가? 그럼 손으로 해준다고 할 때 받든지. 개 껌을 사줘야 하나. 씁, 아파.”
깨물린 자국과 살을 빨아올려 붉어진 자국이 빼곡한 몸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지난밤 재하가 떠올랐다. 좋아한다는 말을 숨 쉬듯 내뱉으며 저에게 달라붙는 녀석은 몸에 남은 흔적처럼 끈질기고 참 독했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 같은 거 하지 않아도 티가 팍팍 나는 녀석인데, 세뇌라도 시킬 모양인지 꾸준히 말로 표현하는 것이 기특하게 어딘가 조금 사랑스럽….
다비는 생각을 멈추고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정색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 미친 건가? 뭐라냐. 씻고 약 발라야겠다. 좋아서 물어뜯는 걸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나마 요즘은 보이는 곳에 자국을 안 남기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뭐, 몸은 몸이고, 얼굴은 오늘도 잘생겼네.”
다비는 제 생김새에 만족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말리고, 약을 바른 후 밖으로 나오자 그사이에 일어난 재하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다비 앞으로 눈을 반짝거리며 다가왔다.
“형,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요.”
“어. 너 산책시켜야지. 좋아하잖아.”
“네. 좋아해요.”
산책이 좋단 이야기 중인데 어째서 재하가 수줍어하며 말하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괜히 덩달아 얼굴이 따끈해졌다. 따뜻한 물에 씻어서 그런가. 다비는 서둘러 버릇처럼 벽을 쳐올렸다.
“산책 말하는 거야. 아무튼, 산책 간다면서 손에 들고 있는 건… 정장이냐?”
“아, 형 거예요. 지금 말고 이따 산책 갔다가 와서 이거로 갈아입으라고.”
“나? 정장을 왜?”
“오늘은 저하고 데이트해요.”
“언제는 안 했던 것처럼 말한다?”
개 같은 유재하라고 했더니, 정말 데이트가 아니고 주인과 함께하는 산책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재하가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은 제가 안내할게요.”
“네가?”
“네. 제가 짠 일정으로 데이트해요.”
그거야말로 다비가 바라던 일이었다. 지금까지 자신한테 맞춰줬던 녀석이 내심 신경 쓰였던 터라 다비는 곧바로 재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데이트 기대할게. 그런데 왜 정장이야? 꼭 입어야 해? 불편해서 싫은데.”
“캐주얼 정장이에요. 편해서 막 입기도 좋고, 평소에 입어도 괜찮아요. 오늘 갈 곳이 드레스 코드를 요구하는 곳이라서요. 이 정도만 갖춰 입으면 되거든요. 형 사이즈에 딱 맞춘 거니까 불편한 건 없을 거예요.”
“어. 그래. 고맙긴 한데….”
드레스 코드를 요구하는 곳에 간다는 소리야 저 녀석이 돈이 많으니까 좋은 곳에 데려갈 생각인가 보구나 하고 이해하겠는데, 자신의 사이즈에 딱 맞춘 거라는 말이 상당히 신경 쓰였다. 자는 사이에 치수라도 잰 건가. 이럴 때는 조금 무섭게 느껴졌지만, 옷을 들고 생글거리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전부 넘어가게 됐다.
“뭐, 알았어. 일단 산책부터 갔다 오자.”
“네. 저 빨리 씻고 올게요.”
재하는 다비에게 쪽, 입을 맞추고는 욕실로 향했다.
산책을 끝마치고 간단히 샤워한 후, 재하가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정말로 자신에게 딱 맞는 사이즈에 조금 소름 끼쳤다. 터틀넥에 슈트를 입고, 코트를 걸쳤다. 발에 편하게 딱 맞는 로퍼 역시 재하가 준비한 거였다. 대체… 발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지.
재하는 다비에게 다가가 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
“옷 진짜 잘 어울리네요. 밖에 나가기 싫어질 정도로…. 사람들이 또 반하면 어떡하지. 형, 그냥 이거 벗고 대충 입고 나가면 안 될까요?”
“드레스 코드 어쩌고 한 건 너잖아. 데이트 코스도 짰다며, 진짜 안 나가? 난 상관없는데.”
“…아뇨. 나갈 거예요. 오늘은 꼭 나가고 싶어요.”
“그럼 너도 빨리 옷 갈아입어.”
재하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다비는 파우더 룸으로 가 머리를 손질했다. 결 좋은 반곱슬머리를 드라이해 뒤로 단정히 넘기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만져준 후 왁스로 가볍게 고정했다. 이렇게 일일이 머리 손질하는 게 귀찮아서 차려입는 스타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재하가 먼저 일정을 짠 데이트니까 신경 써주기로 했다.
옷을 갈아입은 재하도 머리를 만지러 파우더 룸으로 왔다가 외출 준비가 끝난 다비를 보고 울상을 지었다. 거울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비는 미간을 팍 구기며 정색했다.
“아, 뭐. 왜 울상이야. 머리가 그렇게 이상하냐?”
“아니요. 나가기 싫어서요. 진짜 잘생겼다. 남들이 보면 모델인 줄 알겠어요. 그러니까 뽀뽀하면 안 돼요?”
“진짜 미친놈 같아. 나는 또 머리 이상해 보여서 그러는 줄 알았네. 그리고 너, 언젠 뽀뽀하고 싶은 거 참았던 것처럼 말한다?”
다비가 헛웃음을 터트리자 재하가 다비의 뒤로 다가와 다비의 목과 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항상 참아요. 제가 안 참았으면 형은 벌써 도망갔을걸요.”
“그럼 계속 참아. 그런데 이렇게 여유 부려도 돼? 줄 서서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
재하는 그제야 다비에게서 떨어져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예약해뒀어요.”
“얼마나 좋은 곳을 가려고 예약까지 했어?”
“전에 한 번 가봤는데, 꽤 괜찮은 곳이더라고요.”
“어디, 얼마나 괜찮은지 가보자.”
재하는 거울 너머로 다비의 얼굴을 감상하며 그저 흐뭇한 미소만 지었다.
***
목적지에 도착한 다비는 가게와 재하를 번갈아 보며 놀란 눈을 했다. 드레스 코드 운운할 때부터 가격 좀 있는 곳이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이곳은 한 달 전에 예약을 해둬야 하는 곳이었고, 미슐랭에 선정된 유명 레스토랑이었다. 이곳에 온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여길 언제 예약해놓은 건지 신기했다.
레스토랑 안에 들어서자 둘을 맞이한 직원이 코트와 재킷을 넘겨받은 후, 예약된 자리로 안내했다. 다비가 자리에 앉으면서 재하에게 속삭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 이런 곳 처음 와보는데.”
“그럼 제가 형 입맛에 맞는 거로 고를게요. 형은 그냥 맛있게 먹어요.”
“그래. 너한테 맡길게. 이런 곳은 돼지고기 요리,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라 무슨 무슨 향신료에 어떤 어떤 소스를 곁들인 돼지고기. 이런 식이잖아. 고르는 거 어려워.”
솔직한 다비의 말에 재하가 웃으며 담당 웨이터에게서 메뉴판을 받았다. 다비에게는 주재료만 설명해주고 주문은 재하가 알아서 했다.
“형, 와인은 뭐로 할까요?”
“아니. 나 당분간 금주야. 너하고 오지도에서 먹기로 했잖아. 그냥 탄산수로.”
“네.”
재하는 여전히 유효한 약속에 기뻐하며 주문을 끝냈다.
정말 재하와 뇌가 공유라도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코스로 나오는 요리는 다비의 입맛에 딱 맞았다. 애피타이저부터 시작해 메인, 디저트까지 전부 만족스러웠다. 음식이 나올 때마다 옆에서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니까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곳은 아니었다. 물론 가격은 어려웠지만.
일찍 갔는데도 두 시간 반이 걸린 식사 시간이었다. 마지막 디저트는 배가 불러서 먹다가 남길 뻔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다비는 재하에게 곧장 고마움을 표했다.
“잘 먹었다. 진짜 입맛에 딱 맞았어. 좋은 곳에 데려다줘서 고맙다.”
“형이 맛있게 먹는 거 봐서 행복했어요.”
“좋은 곳 알려줬으니까 내가 계산….”
“아니요. 제가 데려온 곳인데 제가 할게요. 형 맛있게 먹는 거 구경하려고 온 건데.”
매일 이런 곳에서 먹으면 파산이겠지만, 한 끼 식사 정도는 사줄 수 있었다. 재하에 비하면 하찮을지 몰라도 괜히 잘나가는 사진작가가 아니었다. 다비가 재하를 보며 픽 웃었다.
“지금까지 네가 돈 다 썼잖아. 나도 한 번쯤은 이런 곳에서 계산 좀 해보자. 이거 사준다고 나 빈털터리 되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재하는 한참 고민하다가 어색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만 제가 얻어먹을게요.”
재하가 순순히 다비에게 얻어먹기로 했다. 식당을 나오자마자 재하가 꾸벅 인사하며 배시시 웃었다.
“잘 먹었습니다.”
“그래. 나도 좀 속이 편해졌네. 이제 어디 가는 거야?”
재하는 곧장 윗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뮤지컬 보러요. 거긴 예매해뒀어요. 천천히 걸어가면 시간 맞을 거예요.”
“뮤지컬이라. 그것도 처음 가보네. 넌 자주 가?”
“네. 뮤지컬도 보고, 연주회도 가요. 영화는 집에서 보는 편이고요. 형은요?”
“난 주로 영화. 극장에서 보는 편이고.”
다비의 이야기에 재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윗길을 쳐다보았다.
“아. 그럼 영화를 볼 걸 그랬네요. 지금이라도 바꿀까요?”
“아니야. 뮤지컬 처음이니까 보고 싶어. 그리고 지금 재밌어.”
“재밌어요?”
“어. 유재하는 데이트 코스를 이렇게 짜는구나, 감탄 중이야.”
“마음에 들어요?”
꽤 괜찮았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식당에 가고, 거기에 좋은 공연까지. 온통 좋은 것만 보러 가니 나쁠 리가 없었다. 다만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하지만 재하가 생글거리면서 대답을 기대하고 있으니까 다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마음에 들어.”
“다행이에요. 형하고 꼭 해보고 싶었던 것들만 넣었거든요. 형한테 얻어먹을 줄은 정말 몰랐지만요.”
“익숙해져 봐. 나 누구 먹이고, 사주는 거 좋아해.”
“…저 말고 다른 사람한테 뭐 사줬어요? 누구요?”
곧장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이 된 재하를 보자 자신이 알던 유재하가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이상하게 편해졌다. 질투하는 녀석의 세팅된 머리를 토닥이고 윗길로 턱짓했다.
“뮤지컬 보자며, 얼른 가자.”
“잠깐만요. 누군지 알려줘요. 저 지금 진지해요.”
“뭐래. 언젠 안 진지하게 질투했냐?”
“형.”
“우리 섬 꼬마들 떡볶이 사줬다. 됐냐?”
“아, 애들… 네. 됐어요. 잘했어요. 얼른 가요.”
그게 뭐라고 크게 기뻐하며 재하는 다비와 바짝 붙어 뮤지컬 극장까지 향했다.
뮤지컬은 재미있었다. 영화로 본 내용인데도 현장감도 살아 있고,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도 좋아서 정말 재미있게 집중해서 봤다. 혼자였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텐데, 재하 덕분에 꽤 괜찮은 경험을 할 수 있어서 만족했다.
“뮤지컬 괜찮네.”
“괜찮다니 다행이에요. 전 좋아해서 자주 가는 편이거든요.”
“혼자?”
“주로 혼자 가는 편인데, 가끔 삼촌하고 같이 가기도 해요.”
“그래서 둘이 감수성이 예민한가 보다. 난 때려 부수는 영화 좋아하는데, 넌 별로 안 좋아하지?”
“음…. 네. 이제부터 좋아해 볼게요.”
“그 나이 먹도록 그런 거 안 봤으면 취향이 아닌 거지. 뭘 나한테 다 맞추고 있어.”
이제야 데이트를 하면서 불편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둘은 잘 맞지 않는 편이었다. 대부분 재하가 저에게 맞춰주느라 그동안 느끼지 못했는데, 재하가 잡아놓은 일정들을 경험해 보니 취향 차이라는 게 느껴졌다.
지금이야 재하가 자신을 좋아하니까 그런 게 아무런 문제가 아니겠지만, 연인 관계가 언제나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럴 때 이런 취향 차이라는 게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재하가 고민해서 짠 데이트 코스니까 오늘은 재하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이제 뭐 할 거야?”
“카페에서 케이크랑 같이 커피 마시려고요. 그리고 집에 가요.”
“카페 좋지. 그런데 너 케이크 별로 안 좋아하잖아.”
“오늘은 좀 먹고 싶네요.”
“하긴 당분 당기는 날이 있어. 가자.”
둘은 아침에 산책하러 다니다, 숙소 근처에서 조용하고 괜찮은 카페를 하나 찾은 이후로 그곳을 자주 이용했다. 지금 있는 곳에서는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 게 빠른 편이라 둘은 아침에 들렀던 공원을 다시 방문했다.
오후에도 공원에는 사람이 많았다. 둘이 지나가는데 멀리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길거리 공연이 많은 곳이라 그동안은 잠깐 보고 그냥 지나쳤지만, 이번엔 재하가 공연에 관심을 보이며 발걸음을 멈췄다.
“현악기네요. 정통 클래식 연주고.”
연주하는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이었다. 악기를 전공하는 학생들로 구성된 것 같았다. 다비는 재하가 관심을 두자 재촉하지 않고 옆에서 함께 공연을 지켜보았다. 재하가 학생들을 보며 다비에게 말했다.
“저도 오스트리아에서 학교 다닐 때 자주 길거리 공연했었는데, 저거 보니까 생각나네요.”
“너도 저런 거 했었어? 전혀 상상 안 되는데?”
“왜요? 이래 봬도 팀원들하고 주말마다 같이 공연했는걸요. 그렇게 해서 돈도 모아봤어요. 꽤 재밌었는데. 제법 인기도 있어서 나중엔 팬도 생기고요.”
재벌이 소시민의 푼돈을 강탈하다니 양심 없네, 라고 생각하면 너무 속이 꼬인 건가. 길거리 공연과 도련님은 뭔가 어울리지 않아서 재하의 말을 들으면서도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너 열일곱 살에 대학 졸업했잖아. 그럼 대체 몇 살에 길에서 공연했다는 거야?”
“3학기 때부터 했으니까 열네 살이었네요. 그 후로 졸업 전까지 종종 길에서 공연했어요.”
“그렇구나.”
재하와 리온이 합주했던 걸 몇 번 본 적 있었다. 눈물도 많고 감수성도 예민한 녀석들이 첼로만 품에 안으면 멋있어지던 게 생각나, 다비도 공연하는 학생들을 보며 잠시 추억 여행을 떠났다.
연주가 끝나자,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일부는 젊은 연주자들 앞에 놓인 악기 케이스 안에 돈을 넣어주기도 했다. 재하 역시 악기 케이스에 넣어주기 위해 지폐를 꺼내 학생들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 첼로 연주를 하던 학생이 재하를 알아보았다. 오! 세상에! 감탄을 터트리며 신을 만난 어린양처럼 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의 학생들도 재하의 이름을 듣더니 다들 신을 찾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스타를 만난 팬이 저런 얼굴을 하겠구나 싶은 표정들이었다.
첼로 전공자가 유재하를 모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의 유재하는 첼리스트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위치의, 실력 있는 연주자였으니까 말이다.
첼로 연주하던 연주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하에게 다가왔다.
「세상에, 여기서 당신을 만날 줄 몰랐어요. 이게 꿈은 아니겠죠? 정말 팬이에요. 앨범도 다 샀고, 뉴욕에서 공연 있을 때마다 전부 찾아갔어요. 당신의 연주는 정말… 오. 말도 안 돼. 유재하라니.」
「고맙습니다. 연주 잘하시던데요.」
「정말요? 세상에. 내가 유재하하고 대화하고 있어. 제가 정말 팬이라서 그런데, 실례가 아니라면 한 곡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부담스럽다면 정말 안 하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해주시면 정말 영광일 것 같아요.」
재하는 다비를 쳐다보았다. 다비가 허락한다면 연주를 들려주고, 아니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거절할 것이 분명한 분위기였다. 마침 재하의 연주를 떠올리고 있던 터라, 다비는 재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연주 직접 본 지 오래됐는데…. 네가 괜찮다면 나도 듣고 싶다.”
“정말요?”
재하는 곧장 코트와 머플러를 벗어 다비에게 건네주며 생긋 웃었다.
“형이 원하신다면.”
“…어?”
재하는 뒤돌아서 첼로를 들고 있는 연주자에게 다가가 첼로를 건네받았다. 연주자는 재하가 자신의 첼로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벌써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재하는 다른 연주자들에게 연주할 곡을 의논한 후, 곧바로 연주할 준비를 했다.
재하는 자신의 키에 맞춰 첼로의 엔드핀을 맞추고 의자에 앉았다. 첼로의 주인은 팬 모드로 변해 휴대폰에 동영상으로 기록할 준비를 했다. 재하와 다른 연주자들은 주위에 서 있는 관객들에게 인사한 후 연주할 자세를 잡았다.
재하의 첼로가 먼저 소리를 내며 곡을 리드하기 시작했다.
바이올린곡으로 유명한 이 곡은 피아노와 첼로를 비롯해 여러 악기로 편곡돼 연주될 만큼 유명한 곡이었다. 다들 한 번쯤 어디서 들어본 익숙한 곡이라 주위 사람들도 쉽게 연주에 몰입했다.
같은 첼로로 연주하는데, 젊은 연주자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힘과 섬세함이 느껴졌다. 어딘가 슬프고 아련한 음이 주위의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재하의 연주곡을 알아듣고 제목을 말했다.
「Liebesleid.」
사랑의 슬픔. 제목을 알고 나니 다비는 재하의 표정에 눈이 갔다. 첼로와 한 몸이 되어 부드럽게 활을 밀면서 연주하는 재하는 눈을 내리깔고 연주에 깊게 몰입해 있었다.
사랑 때문에 슬프다는 건지, 사랑을 이루지 못해서 슬프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 가슴이 아픈 기분이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음악이 감미로웠다. 애절하고 아련하지만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주위의 현악기와 어우러져 연주는 더 풍성하고 애절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첼로의 독보적인 실력에 주위의 학생들도 재하의 음에 따라가려고 열심히 연주했다. 연주자 하나만 바뀌었는데, 공연장에서 봐도 아깝지 않을 공연으로 보였다.
애절하면서도 그리 슬프지만은 않은 선율이 계속 이어지던 중 재하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다비에게 던졌다. 재하의 시선과 첼로에서 흘러나오는 음이 다비를 감쌌다.
‘좋아해요. 형은 날 사랑하게 될 거예요.’
이 음악은 유재하였다. 다비는 저도 모르게 재하의 코트를 꽉 부여잡고 연주에 집중했다. 제 앞에서는 언제나 헤실거리거나 울상을 짓는 녀석이 첼로만 들면 돌변해서 사람을 자꾸 흔들어 놨다. 정말이지 좋아할 수밖에 없는 놈이었다.
“미친, 예뻐 죽겠네.”
저와 눈을 맞추고 연주하는 저 모습이 미칠 듯이 예뻤다. 저를 보며 사랑해달라는데 당장에라도 응해주고 싶었다. 따뜻하고 다정하면서도 애절한 미소에 마음속에 단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톡톡, 꽃이 피어나려 했다.
예전부터 그랬다. 재하와 리온은 첼로만 들면 그냥 예뻤다. 너무 예뻐서 마음이 갈 수밖에 없는 녀석들이었다. 다비는 휴대폰을 들었다. 저 예쁜 모습은 정말이지 찍을 수밖에 없었다.
연주가 끝나자, 주위 사람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연주가 시작됐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연주자 주위에 몰려들었다. 재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학생들과 함께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사람들은 바닥에 놓인 악기 케이스에 돈을 넣어주었다. 잠깐의 연주에 악기 케이스에는 지폐와 동전이 가득해졌다.
첼로의 주인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감동한 얼굴로 촬영을 끝내고 재하에게 다가갔다.
「오늘을 정말 잊을 수 없을 거예요. 리온의 연주도 사랑하지만, 전 당신의 연주를 더 사랑해요. 정말 고마워요.」
「그래요. 다음엔 같은 무대에서 만날 수 있길 바랄게요.」
「정말 영광이에요. 열심히 할게요. 꼭 무대에서 만나요.」
재하는 다른 연주자들과 인사를 나눈 후, 다비에게 향했다. 재하를 알아본 몇몇 팬들이 재하에게 다가왔지만, 재하의 눈엔 다비만 보였다. 다비 앞에 우뚝 서서 부담스럽게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연주한 이 곡은 짝을 이루는 곡이 하나 더 있어요. 언젠가 형 앞에서 그 곡을 연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게 무슨 곡인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연주하길 바란다는 마음이 간절하게 느껴졌다. 그냥 다른 곡을 연주하고 싶다는 말일뿐인데, 고백처럼 들려와 다비는 시선을 대충 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래. 아, 연주 잘 들었어. 너나 리온이나 본업 할 때는 세상 멋있어진다니까.”
“반했어요?”
“…뭐, 뭐래. 그리고 주위에 사람들 있어. 한국말로 이야기해도 알아듣는 사람들 있을 수 있으니까 조심해. 뒤에 팬들이 다 보고 있잖아. 얼른 코트 받아. 인사하고 카페 가자.”
다비는 재하에게 옷을 건네주었다. 재하는 옷을 받아 입었다.
“형. 옷이 구겨졌….”
“원래 그랬어. 내가 구긴 거 아니다.”
“아. 인사하고 올게요. 그리고 카페 가요.”
카페가 아니라 당장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얘는 왜 갑자기 또 멋있는 척해서 사람을 철렁하게 만들어. 꼴리게.
“…나 지금 미친 건가?”
이상한 의식의 흐름에 다비가 자신에게 정색하며 얼굴을 붉혔다. 욕구불만도 아닌데 왜 생각이 거기로 튀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이지 미쳤다는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사이 팬들에게 정말 인사만 딱 하고 재하가 다시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 야릇한 생각을 했던 다비는 재하와 시선을 맞추기가 민망해, 바닥을 보며 우물거렸다.
“이제 가자. 케이크 먹고 싶다며.”
“네. 가요.”
카페로 향하는 길에 재하는 다비에게 말을 걸었지만, 다비는 지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입을 열면 저번처럼 또 ‘섹스할래?’ 따위의 뜬금없는 말이 나올까 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매일 밤 재하에게 물리고 빨렸더니, 몸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멋진 연주를 들었는데 왜 뜬금없이 거기가 반응하냐고.
연주할 때 보여줬던 멋있는 모습은 어디로 가고 평소와 다름없는 개 같은 유재하가 다비의 옆에서 헤실대며 열심히 종알거렸다.
“형이 제 연주 보면서 웃어줘서 진짜 기뻤어요. 연주하길 잘했어요.”
“…본 내가 기뻐해야지. 왜 네가 기뻐.”
“형이 웃어주고, 연주하는 동안 계속 저만 봤잖아요. 꼭 선물 받은 기분이었어요.”
다비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카페 가기 싫다, 진짜.
“네가 연주를 잘했으니까 그런 거지. 선물은 무슨….”
“오늘 제 생일이거든요. 형한테 밥 얻어먹어서 그걸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는데, 더 큰 선물을 받아서 지금 진짜 행복해요.”
“…뭐? 생일?”
다비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재하와 눈을 맞췄다. 생일이라니. 오늘?
“야, 그걸 왜 이제 말해. 아니, 잠깐만….”
저번처럼 재하가 자신의 생일을 문자로 구구절절 이야기해줬는데, 자신이 잊어버린 걸지도 몰라 다비는 일단 빠르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재하는 자신에게 생일이라고 말한 적 없었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까지 문자로 조잘대는 녀석이 어째서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큰 이벤트를 말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일은 왜 숨긴 거야?”
“딱히 숨긴 건 아닌데요. 말하지 않은 건…. 그냥 형하고 데이트하고 싶어서요. 생일이라고 먼저 말하면 재미없어도 형이 그냥 재미있다고 말할 것 같아서요.”
“오늘뿐 아니라 그전에도 이야기 안 했잖아. 시시콜콜한 것까지 전부 이야기하면서 왜 네 생일은 말 안 했냐고.”
다비의 말투가 조금 매서워졌다. 생일을 말하지 않은 재하에게도 화났지만, 자신에게도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재하가 말하기 전까지 다비는 재하의 생일을 단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호기심 때문에라도 인터넷에 ‘유재하’ 혹은 ‘유재하 생일’을 검색했다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기본 정보를 몰랐다는 게 화가 났다. 이렇게 무심한 자신을 좋아하는 재하가 한심하기까지 했다.
정작 재하는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같이 없었으니까요.”
“…뭐?”
“문자나 전화로 형한테 생일 축하받는 거 싫어서 그랬어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축하받는 건 좋지만, 제가 당장 형한테 달려가고 싶어질 거 같아서… 그러면 형 곤란하니까 참았어요.”
“무슨 그런 개떡 같은 소리를…. 너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뭐라고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놈이 나한테만 자꾸 그렇게 눈치 보고, 죄지은 놈처럼 설설 기는 거냐고. 넌 자존심도 없냐?”
생일인 녀석에게 이렇게 화를 내니 저 녀석이 저렇게 기죽는 거 아니냐고 유들유들한 김다비가 본체를 설득해보지만, 본체에 닿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에 보이는 저 안쓰러울 정도로 순정적인 녀석을 이해할 수 없어 속이 뒤틀렸다. 대체 내가 뭐라고.
“좋아하니까요.”
“그거랑 설설 기는 거랑 무슨 상관….”
“그만큼 간절하니까요. 난 형이 갖고 싶은데, 형은 여지도 안 주니까. 자존심 같은 거 내려놓은 지 오래예요. 그리고 형한테만 내려놓은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원래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래요. 졌으니까 설설 기어야죠. 어쩔 거야, 이렇게 해도 안 받아주는데. 더 납작 엎드리라면 엎드릴 수 있어요. 형은 나한테 그래도 되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재하는 울지도 않고 저를 똑바로 보며 진심을 전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한 번쯤은 말해보고 싶었다는 듯 막히는 것 없이 술술 내뱉는 모습에 다비는 재하가 조금 무서워졌다. 저 큰마음을 받을 자격이 과연 자신에게 있는 걸까. 차라리 울면서 말했으면 대충 짜증 좀 내다가 달래주면서 흐지부지 넘어갔을 텐데, 덤덤하게 말하는 표정이 더 아프고 딱했다. 그 마음을 몰라준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넌 대체…. 네가 전생에 죄를 짓긴 지었나 보다. 그것도 아주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하필 좋아해도 나 같은 걸 좋아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냐.”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리고 형이라서 좋아하는 거예요.”
저 마음이 탐났다. 갖고 싶지만, 동시에 갖고 싶지 않았다. 쏟아지는 단비가 어떤 건지 알았는데, 꽃이 피어버리는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았는데. 제 마음속에 꽃이 만개했다가 더는 단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다시 사막으로 살게 될까 봐 두려웠다.
수도꼭지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마음이 끊어졌을 때도 그렇게 황량해졌는데, 저 흘러넘치는 애정이 어느 순간 끊긴다면 자신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갖고 싶고 탐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꼬인 마음을 대체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하는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으니 재하의 흘러넘치는 마음이 버겁기만 했다.
그래도 오늘 저 녀석 생일이라잖아. 유들유들한 김다비가 본체의 양심을 쿡쿡 찔러댔다.
“아, 진짜. 돌아가시겠네.”
케이크는 거의 입에 대지도 않는 녀석이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했을 때 왜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뒤늦게 떠올리자 또 자신의 눈치 없음에 화가 났다. 생일이라고 카페에서 조각 케이크 놓고 생일잔치라도 할 생각이었던 건가? 먹지 않더라도 10층짜리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줄 파티시에를 고용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놈이 고작 작은 카페에서 조각 케이크라고? 청승도 적당히 떨어야 귀엽지.
“카페 안 가.”
“…형. 화났어요? 제가 말이 심해서 그래요? 그런데 사실인 걸 어떡해요. 부담스러워하지 말아요. 그냥 잊어버려요.”
“아니. 화 안 났어. 그냥….”
그냥 가지면 안 돼? 욕심 많은 김다비가 본체를 꼬드겼다.
계약 연애의 남은 날은 대략 두 달이었다. 그때까지만 저 마음을 욕심내고 싶었다. 무한한 사랑을 의심 없이 받아보고 싶었고, 되돌려주고 싶었다. 재하를 위해 자신의 인생에서 100일을 내어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남은 60여 일 동안 재하의 마음에 응해보고 싶었다.
우리에겐 끝이 정해져 있었다. 그때까지는 계속 함께 있을 테니까 그때까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재하야, 나 그렇게 인정머리 없는 놈 아니야. 네 생일인 거 알았는데, 카페에서 조각 케이크 같은 거 너한테 먹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래서 카페에 가지 말자고 한 거야.”
“정말 화난 거 아니에요?”
“어. 화 안 났어.”
뉴욕의 겨울같이 매서웠던 다비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재하는 의심하면서도 불안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이 꼭 맛있는 간식에 약을 숨겨놓고 간식 먹자고 꼬드기는 주인을 의심하는 개 같은 표정이라서 다비는 픽 웃으며 설명을 더 했다.
“나 제과 제빵 자격증 있는 남자야. 네 생일 케이크 내가 지금 만들어줄게. 저녁에 네 생일상도 차려주고. 우리 섬에선 생일 되면 다 집밥 해서 먹여. 의심 가면 훈이 놈한테 물어보든가. 걔 리온이 사귄 이후로 매번 생일마다 독일이든, 한국이든 리온이 있는 곳에 찾아가서 밥해 먹였을걸. 거짓말이면 내가 우리 아빠 전복 양식장 가두리 한 칸 너 줄게. 그 안에 있는 전복까지 포함해서.”
“…정말 제 생일상 차려주려고요?”
“그래. 속고만 살았냐? 저녁 먹으려면 지금 장 봐야 해서 시간 없어. 한인 마트에서 필요한 거 사서 바로 집에 가자.”
재하는 그 말에 불안해하던 표정을 거두고 예쁘고 순하게 웃었다. 다비는 재하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주고 턱짓했다.
“얼른 가자. 화내서 미안하고.”
“아니에요. 형 기분 풀렸으면 됐어요.”
“귀여운 새끼.”
“저 귀여웠어요? 어디가요? 알려주면 안 돼요?”
“조각 케이크로 생일 치르려고 했던 네 청승맞음이 귀여웠다고.”
“그럼 조각 케이크로 만들어주세요. 형 앞에서 청승 떨게.”
다비는 달라붙으려는 재하를 손으로 밀어 떨어트리고 한인 마트로 목적지를 바꿨다. 이동하는 동안 다비는 훈에게 문자를 보냈다.
[야, 너 리온이 생일상 메뉴 뭐 해주냐? 일어난 거 다 아니까 ㅂㅎ면 빨리 답장해라.]
다비는 지금까지 누구의 생일상을 차려준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서로 차려주셨고, 모아와 자신은 쌍둥이라 생일이 같아서 서로 차려줄 이유가 없었다. 생일날엔 아빠가 생일상을 차려주었고, 미국으로 넘어온 이후로는 미역국이나 끓여 먹으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재하에겐 차려주고 싶었다. 그동안 자신과 함께 생일을 맞고 싶었을 녀석을 위해 그 정도도 못 해줄 만큼 삭막한 인간은 아니었다.
훈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재하가 슬그머니 다비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저 점심에 형한테 이미 얻어먹었는걸요. 저 생일상 안 받아도 괜찮은데….”
“미역국이 없었잖아. 그게 무슨 생일상이야. 우리 섬에선 생일상에 미역국 없으면 진수성찬이어도 생일상으로 취급 안 해줘. 못 믿겠으면 훈이 놈한테 문자 보내서 확인해보든가.”
“아뇨. 믿어요. 제가 형 아니면 누굴 믿어요.”
떠드는 사이에 훈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알고 보낸 거라지만, 한국은 아직 새벽일 텐데 참 부지런한 녀석이었다.
[미역국, 밥, 잡채, 삼색 나물, 샐러드, 갈비찜, 생선구이, 해물 냉채, 모둠전, 김치 정도가 기본이고 리온이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더 추가해. 아. 리온이가 한국에 있으면 회 뜨고 전복찜, 해초 무침, 떡 추가. 주로 우리 리온이가 잘 먹는 거로 한 상 가득 차려. 그런데 갑자기 왜 물어?]
다비는 훈이 보내준 문자를 읽으며 미간을 구겼다.
“미친. 수라상이냐? 저걸 둘이서 다 먹는다고?”
진저리치면서도 다비는 훈이 보낸 메뉴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요리를 빠르게 훑었다. 갈비찜은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불고기로 메뉴를 바꿔야겠다. 전은 잘하는 거지만, 둘이 먹기엔 많으니까 간단하게 두 종류만 부쳐 내고, 잡채는 꼭 넣어야 할 메뉴였다. 나머지는 마트에서 재료를 보고 정하기로 했다. 답장이 없자 훈이 문자를 다시 보냈다.
[뭐야? 읽었으면 대답해. 오타까지 내면서 빨리 보내라더니. 무슨 일 있어?]
[아니. 감사. 쉬어라. 나 바쁨.]
훈의 문자에 대충 답해주고 한인 마트에서 사야 할 재료와 조미료를 꼼꼼하게 메모했다. 숙소에서 한인 마트는 거리가 있어서 하나라도 빠트리면 고생하니까 훈의 쏟아지는 문자에 답할 여유는 없었다.
“재하야. 못 먹는 거나, 알레르기 있는 거 있어?”
“아뇨. 없어요. 다 잘 먹어요.”
“그래. 다 왔다. 내리자.”
한인 마트에서 다비는 필요한 재료들을 빠르게 담았다. 재하는 앙증맞은 장바구니를 들고 다비의 뒤를 따르며 헤실거렸다.
“형, 우리 이렇게 다니니까 꼭 신혼여행….”
“시끄러. 여기 한인 마트라 한국인 관광객들 많아.”
“없는데요.”
“갑자기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란 소리야. 아무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둘러보면서 집어넣어.”
“형이 해주는 거라면 다 좋으니까 대충 해도 돼요. 라면만 끓여줘도 전 좋아요.”
“그러지 말라니까 또 그런다. 정성을 다할 테니까 생일상에 라면이 오를 일은 없어.”
다비는 재하에게 답하면서도 재료를 빠르게 집어 장바구니에 담았다. 주위를 보니 이미 만들어진 음식들도 많이 보였다. 재하는 그걸 보고 다비를 붙잡았다.
“형, 만들어진 거 파는데…. 저런 거 사서 데워 먹어요. 형 힘들잖아요.”
“김치만 살 거야. 김치는 담글 시간이 없어서. 다른 건 오래 안 걸리니까 괜찮아.”
“훈이 형 같다. 근데 다비 형이 더 멋있어요. 오지도에서는 다 요리할 줄 알아요? 전 요리 배우는 거 오래 걸렸는데. 그것도 전부 훈이 형이 삼촌 때문에 알려준 거지만….”
“훈이만큼은 못 해도 어디 가서 안 굶어 죽을 만큼은 해. 빠트린 거 있나? …없네. 계산하러 가자.”
다비와 재하는 양손에 재료를 가득히 안고 숙소로 돌아갔다.
재료를 사서 돌아온 다비는 분주했다. 재하는 다비의 주위를 알짱거리며 도와주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형, 진짜 안 도와줘도 돼요?”
“어. 생일인 사람은 이런 거 안 해도 돼.”
재하는 자신을 위해 요리하는 김다비가 너무 멋있어서, 은근슬쩍 다비의 뒤로 가 뒤에서 끌어안고 ‘귀여운 척’을 시전했다.
“그럼 저 이러고 있을게요. 생일이니까.”
“다친…. 불 사용할 땐 떨어져. 칼질할 때는 왼쪽으로 달라붙고.”
“…진짜 이렇게 있어도 돼요?”
“어.”
재하는 다비의 목에 입을 쪽쪽 맞추며 좋아했다. 생일이라고 말하길 잘했다. 다비가 갑자기 상냥해진 게 전부 자신의 생일 때문인 것 같았다.
“매일 생일이었으면 좋겠어요.”
“생일 아니어도 달라붙었잖아. 새삼스럽긴. 잘 따라붙어라.”
“네.”
다비는 정말 재하를 등에 매달고 생일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재료를 손질하고 밑 준비를 하면서 케이크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너무 부지런히 움직이는 진지한 다비를 보자 왠지 방해하는 것 같아 재하는 다비에게서 떨어졌다. 대신 옆에서 눈치껏 쓰레기를 처리하는 등 자잘한 것들을 티 나지 않게 도와주었다. 티 내지 않는다고 했지만 소리까진 어쩔 수 없어서, 끊임없이 들리는 부스럭 소리에 다비가 피식 웃었다.
“착하네. 도와줄 줄도 알고, 재하 다 컸구나.”
“…형, 또 어린애 취급.”
“귀여워서 그래. 유재하 어린이는 노는 동안 이것 좀 도와줄래요?”
대놓고 아기 취급하는 다비에게 재하가 미간을 구겼다. 어차피 다비는 요리에 집중하고 있으니 이 정도 불만 섞인 표정은 지어도 될 것 같았다.
“형.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뭐 시키려고요?”
“네 귀한 손 좀 빌리자. 크림 좀 쳐봐.”
“…네?”
크림을 치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자, 다비가 입으로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거기 보면 생크림 있어. 설탕 계량해줄 테니까 조금씩 넣으면서 거품기로 휘휘 돌리면 돼. 여긴 다른 건 다 있는데, 제빵 도구가 없네. 케이크 만들 때 쓸 도구는 사 와서 다행이다. 아, 크림 치면서 중간중간 검사받아라.”
“네.”
자신에게 임무가 주어지자 재하는 다비가 시킨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다비는 생크림을 볼에 부어 설탕을 계량한 후, 얼음물이 담긴 볼에 넣고 거품기와 함께 재하에게 건네주었다.
“지금은 액체 상태지만 거품기로 계속 휘젓다 보면 점점 단단해져. 거품기로 들어 올렸을 때 뿔 모양으로 크림이… 아니, 그건 내가 확인할게. 넌 일단 그냥 단단해지면 그때마다 나한테 계속 보여줘. 그때까지 열심히 휘젓기만 해. 어렵지 않지?”
“네.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어요.”
재하에게 일거리를 건네주고 다비는 그사이 불 앞에 서서 본격적으로 요리하기 시작했다. 오븐에서는 케이크 시트가 구워지고 불 위에서는 음식이 익어가며 주방에는 맛있는 냄새가 가득 들어차고 있었다.
재하는 다비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휘젓다가 점점 단단해지는 크림을 보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형, 진짜 크림처럼 됐어요.”
“그게 그렇게 흥분할 일… 귀여운 새끼. 재밌지? 어디 보자.”
다비는 손을 씻고 불을 조절한 뒤, 재하에게 다가가 크림 상태를 확인했다. 거품기로 몇 번 휘젓고 들어 올리더니 다시 거품기를 재하에게 건네주었다.
“거의 다 됐네. 조금만 더 치면 될 것 같아.”
“네. 신기해. 액체가 조금 휘저었다고 이렇게 되는구나. 그냥 크림 같은 걸 파는 줄 알았더니.”
“갓 만든 크림 맛있는데.”
다비는 손가락으로 크림을 살짝 떠 재하의 입술에 쿡 찍었다. 붉은 입술에 하얗게 묻은 생크림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또 꼴렸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지난밤 재하의 입술을 자신의 것으로 저렇게 만들었던 게 떠올라서 자연스럽게 그런 기분이 들었다.
다비는 고개를 숙여 재하의 입술에 묻은 크림을 쪽 빨았다. 맛있네. 크림만 먹고 떨어지는 다비를 재하가 붙잡아 제 다리 위에 앉히는 건 당연한 행동이었다.
크림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둘은 한참을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다비가 입술을 물리면 재하가 다시 따라붙어 입을 맞추고, 재하가 입술을 물리면 다비가 다시 재하의 입술을 탐했다.
재하는 더 참지 못하고 크림이 담긴 볼을 저만치 치워버리고 조리대 위에 다비를 눕혔다.
“형.”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달려드는 재하를 다비가 손으로 막았다.
“참기 힘든 거 알겠는데, 여기선 안 돼. 음식 만드는 곳에서 뭐 하는 거냐. 진정해.”
“…형이 먼저 시작….”
“어. 내가 먼저 시작했는데, 난 키스만 하려고 한 거지. 유재하 잘 참는다며. 참아.”
재하는 다비 위로 몸을 포개고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맞닿은 하반신이 잔뜩 성나 있는 것이 느껴지는데도 다비는 평온해 보였다. 재하는 불쌍한 표정으로 하반신을 움직이며 애원했다.
“정말 여기서 멈춰요?”
“어.”
“진짜요?”
“그래. 나머진 이따가. 나 지금 음식 하다 말고 이러고 있는 거야. 빨리 움직여야 저녁 시간에 먹지. 이러다 우리 새벽에 밥 먹겠다. 얼른 일어나.”
재하는 몸을 일으키며 다비도 일으켜 세워주었다. 다비는 말 잘 듣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Good boy.”
말 잘 듣는 개에겐 반드시 칭찬을 아끼지 말 것. 다비는 발정 나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랑스러운 개를 뒤로하고 큭큭거리며 불 앞으로 향했다.
재하는 크림이 담긴 볼을 다시 제 앞으로 가져와 거품기를 팍팍 휘저었다.
다비가 먼저 키스해주는 경우는 거의 침대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고 그마저도 많지 않았다. 항상 자신이 먼저 달라붙었는데, 이번엔 다비가 먼저 달라붙었다. 게다가 포개졌을 때 분명 반응도 있었다. 요즘은 매일 밤 물고 빨아대서 욕구불만은 아닐 텐데. 갑자기 왜 자신에게 키스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반했나?
공원에서 연주할 때 다비는 자신을 보며 좋아했다. 호감이 가득한 표정이 분명했다. 생일이라고 말하지 않아서 잠깐 화를 냈지만, 그 후에는 어딘가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정말 반한 건가? 생일이라서 잘해주는 거 아니고?
다비가 좋은 쪽으로 변했다. 희망적인 추측에 저절로 입가가 느슨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독일에서 자신의 첼로인 하데스를 데려올 것을 그랬다. 자신이 연주하는 모습에 이렇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매일 손가락이 터지도록 연주할 수 있었다. 이러지 말고 차라리 독일로 데려갈까. 당장 비행기 표를 확인하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아니다. 재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일주일만 더 버티면 다비의 집에 갈 수 있는데, 그 황금 같은 기회를 버리고 독일에 가는 건 싫었다. 다비가 자신에 대한 생각이 조금이나마 바뀌었을 때 더 반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작전이고 뭐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비가 해준 키스 덕분에 재하는 지금 그걸 회상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크림을 이용해 키스할 타이밍을 만들다니. 생크림은 정말 훌륭하고 좋은 재료였어.
다비는 끊이지 않는 탁탁 소리에 요리하던 걸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재하가 헤실거리며 기계적으로 크림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비는 깜짝 놀라며 재하를 불렀다.
“야! 너 뭐 해. 그만해. 크림 깨진다.”
“…네?”
재하는 일단 손을 멈췄다. 다비가 가까이 와서 다시 볼을 살폈다. 아, 이런. 다비의 입에서 저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재하가 보기엔 별다를 게 없는데,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단단해진 것 같은데 다비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분위기 좋았건만, 실수했을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비의 눈치를 보았다.
“형, 왜요?”
“이건 안 되겠다. 너무 많이 쳤어. 깨진 건 아닌데 너무 단단해. 다시 만들어야겠다. 크림 더 사 오길 잘했네.”
“…그럼 이건 못 써요?”
“어. 케이크엔 못 써. 무슨 생각을 했는데 멍 때리고 있었어. 조금만 더 휘저으면 끝이라고 했더니.”
“죄송해요. 너무 열심히 했나 봐요. 버려야겠네요.”
다비는 재하가 들고 있는 볼을 가져가며 고개를 저었다.
“뭐가 죄송해. 열심히 했으니까 이렇게 된 것을. 그리고 이걸 왜 버려. 아깝게.”
“케이크에 못 쓴다면서요.”
“어. 못 써. 먹어야지. 네가.”
“…네? 형, 저거 다 먹으면 저 살쪄요. 그럼 형이 좋아하는 몸 다 망가지는데.”
재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다비의 손에 들린 볼을 보았다. 다비가 좋아하는 거라고는 제 몸 밖에 없는데. 저걸 다 먹는 건 때려죽여도 안 될 일이었다. 다비가 자신에게 정 떼려고 크림을 먹이려는 거로 보이자 재하는 다급해졌다.
“형, 그냥 버려요. 저 안 먹어요. 아니, 못 먹어요.”
“안 먹어?”
“네. 아무리 형이 원하더라도 안 되겠어요.”
다비는 재하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무언가 소곤거렸다. 다비의 말을 듣고 있던 재하의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고 입가가 느슨해지고 있었다. 크림을 그렇게 사용한다고? 다비 형은 천재인가? 다비는 할 말을 끝내고, 입술을 떼어낸 후 다시 재하에게 물었다.
“이래도 정말 버릴까?”
“아니요. 먹을래요. 먹고 싶어요. 먹을 수 있어요.”
순식간에 열렬한 크림 신봉자가 되어 있는 재하를 만족한 눈으로 바라보며 다비가 잘생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이건 냉장고에 넣어놓고, 다시 준비해줄 테니까 이번엔 예쁘게 쳐봐.”
“네.”
열과 성을 다해 크림을 친 재하는 다행히 이번에는 예쁘게 뿔이 올라온 상태에서 끝마칠 수 있었다.
그사이 다비가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저녁 시간에 맞춰 요리가 완성되었다.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미역국과 냄비에 지은 하얀 쌀밥, 육전과 동그랑땡, 잡채와 노릇하게 구워낸 갈치구이, 밑반찬으로 급하게 무친 나물과 버섯볶음. 그리고 국물 자작한 서울식 불고기와 마트에서 사 온 브랜드 김치로 재하의 생일상이 차려졌다.
넓은 식탁에 차려놓자 부지런히 움직인 거치고는 뭔가 없어 보였지만, 주어진 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은 여기까지였다.
“하루 전에 알았으면 손 많이 가는 음식이어도 내가 제대로 차려줬잖아. 급하게 하느라 이거밖에 없다.”
“아니요? 정말로 진수성찬인데요. 어딜 봐서 이거밖에라는 말이 나오는 건지 전 모르겠는데요.”
재하는 생일상을 보더니 휴대폰을 들었다.
“형, 저 이거 사진 찍어도 돼요?”
“어? 잘 차린 것도 아닌데 뭘 사진씩이나. 넌 다른 생일에 이런 상보다 더 좋은 상 받아봤을 거 아냐.”
재하는 식탁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분명 이것보다 푸짐한 상은 받아봤죠. 그런데 누가 나를 위해 이렇게 차려준 생일상은 처음이에요.”
“뭔 소리야. 너희 부모님께서 들으시면 서운해하시겠다.”
“우리 부모님은 요리 못하세요. 아니, 할 필요가 없으니 안 하시는 게 맞죠. 그럴 시간이 있는 분들도 아니시고. 집에선 고용인들이 다 해주니까요. 축하하는 마음은 진심이겠지만, 부모님이 차려준 생일상을 받아본 적은 없어요. 그건 삼촌도 그렇고요. 게다가 열세 살 이후로는 빈에서 살았으니까 생일에는 뭐… 좋은 식당에서 밥 사 먹으라고 용돈 받은 것 정도?”
말하고 있는 재하는 덤덤한데 정작 다비가 그 말에 마음이 시큰해졌다.
돈이 많은 집안이니까 생일상을 그렇게 해결했을 수도 있겠다고 이해는 했는데, 13살 이후에 외국에서 지냈을 재하를 떠올리니 안쓰러워졌다.
어린 나이에 외국에 나가 적응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비와 모아 역시 10살에 한국에 와서 친구들과 친해지기 전까지 섬에 적응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부모님과 함께 온 자신들도 그렇게 힘이 들었는데,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난 재하는 그 기분이 어땠을지 쉽게 헤아려졌다. 게다가 제 세상이었던 삼촌을 따라 선택한 유학이었는데 오히려 사이가 더 틀어지고 관계가 어긋났었으니, 저 어린 것이 많이 힘든 생활을 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건 자신의 절친인 리온도 겪었던 같은 문제였지만, 리온은 훈을 만난 후부터 정성 넘치는 생일상을 지금까지 계속 받고 있고, 재하는 여전히 아니라는 게 다비의 마음을 쓰리게 했다.
“훈이 놈이 네 생일상은 안 차려주든?”
“아, 못 차려준 게 맞죠. 시기가 안 맞아서…. 저는 생일이 11월 초고, 훈이 형은 월말에 오는 편이라서요.”
“유재하 잘 컸네.”
다비 속이 어떤 줄도 모르고, 재하는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귀여움을 떨었다.
“그러니까, 저 생일상 촬영 허락해줘요.”
“잠깐만 기다려. 케이크도 있어야 생일상 같지. 케이크 꺼내올게.”
다비는 냉장고로 가서 케이크를 꺼내왔다. 과일로 깔끔하게 장식하고 하얀 생크림이 곱게 발린 케이크에 다비가 2와 4라고 쓰인 숫자 초를 꽂아주고 불을 켰다.
“자, 얼른 찍어.”
재하는 감동한 얼굴로 촬영 준비를 했다. 다비 형이 나를 위해 차려준 생일상이라니. 휴대폰 화면으로 보이는 생일상이 너무 행복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을 정도로 손이 떨렸다. 그 모습을 보던 다비가 휴대폰을 낚아챘다.
“너도 같이 찍어줘?”
“아뇨. 상만요. 생일상이 주인공이니까.”
“뭐래. 이 상을 받는 네가 주인공이지. 넌 대체…. 알았다. 찍어서 줄게. 미친. 그렇게 좋으냐?”
“네. 좋아해요.”
틈만 나면 저러니 예뻐할 수밖에. 다비는 생일상을 찍은 후 재하에게 건네주었다. 재하는 사진을 확인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참을 보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사진에 대한 감상을 읊어주고 싶었지만, 다비가 빨리 초를 끄라며 재촉해서 읊지 못했다.
“형, 생일 축하 노래는요?”
“…까분다. 내 노래 더럽게 비싸니까 꿈 깨.”
“얼만데요? 현금은 당장 없고 계좌 번호 불러주면 달러로 송금….”
“시끄러. 진지하게 대답하지 마. 노래 듣는 것보다 더 좋은 거, 이따 할 거잖아. 그러니까 빨리 끄고 밥 먹자. 음식 식는다.”
다비가 아까 자신에게 했던 귓속말을 떠올린 재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활활 타오르는 초를 보았다. 기도하는 것처럼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부디, 내년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보다 더 행복한 생일을 맞이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내년에 이 소원을 똑같이 빌 수 있게 되기를….
재하는 자신의 소원이 이뤄지길 간절히 바라며 초를 후 불었다. 초를 끄는 순간에 맞춰 다비가 크게 인심 써서 손뼉 쳐주었다.
“생일 축하한다. 몇 시간 안 남았지만.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첼리스트로 잘살고 있으니까, 네 인생은 앞으로도 아름답고 찬란할 거야. 오늘은 그 사람들을 대표해서 내가 축하해줄게.”
“고맙습니다. 정말 기뻐요. 형이 손수 차린 생일상이라니 정말 영광….”
“됐고. 얼른 먹자. 음식 식으면 맛없어. 훈이 솜씨하고 비교하진 마라. 훈이가 우리 아빠보다는 못해도 나보다는 요리 잘하는 놈이라.”
다비가 탄 음식을 내와도 접시까지 핥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유재하는 그 소리를 가볍게 흘려 넘겼다. 형이 만든 음식을 어떻게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과 비교하며 못하다는 소리를 내뱉을 수 있겠는가. 그건 아주 불경한 짓이었다.
“잘 먹을게요, 형.”
재하는 미역국을 떠서 한입 먹었다. 다비는 긴장한 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재하의 입을 보았다. 항상 좋은 음식만 먹었을 텐데, 입에 맞을지 걱정부터 들었다.
“먹을 만하냐?”
재하는 미역국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다비는 직감적으로 재하가 울 준비를 한다는 걸 알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맛이 없냐? 먹지 마. 괜히 억지로 먹다가 탈 난다.”
“아뇨? 아닌데요? 진짜 맛있어요. 너무 맛있어서…. 형이 이걸 전부 절 위해서 만든 거라고 생각하니까 감동해서… 그래서 그런 거예요. 저 아직 안 울어요. 보세요.”
재하는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비 앞에 가까이 몸을 기울여 제 얼굴을 보여주었다. 가까이 다가온 재하의 얼굴은 쓸데없이 잘생겨서 괜히 심장이 또 쿵쿵거렸다. 심장이 멋대로 팔딱거리고 아래도 좀…. 시도 때도 없이 몸뚱이가 이상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비는 가까이 온 얼굴을 손으로 슬쩍 밀며 재하를 자리에 앉혔다.
“그래. 전부 널 위해서 만들었으니까, 얼른 먹어.”
“네.”
미역국을 시작으로 다비가 만든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제 삼촌인 리온은 훈의 음식이 최고라고 할지 몰라도 저에겐 다비가 만들어준 음식이 제일 맛있었다. 사심이 조금 섞였겠지만, 실제로도 맛있었다.
“불고기가 진짜 맛있어요. 간도 제 입에 딱 맞고, 고기도 진짜 부드러워요. 낮에 갔던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메인 요리보다 형이 해준 게 더 맛있다고 하면….”
“그걸 내가 믿겠냐? 그래도 잘 먹으니까 예쁘네. 불고기 재워둔 거 냉장고에 더 있어. 내일 산책할 때 베이글만 사 와서 그사이에 끼워서 먹자.”
“네. 잡채는 어떻게 이렇게 잘했어요? 달콤하고 짭조름하고, 기름지지 않아요. 이거 어려운 음식 아니에요? 채소가 많이 들어가서 제 입에 딱 맞아요. 형이야말로 저랑 뇌 공유한 거 아니에요? 아니 내 미각하고 공유한 건가? 훈이 형이나, 요리해주시는 여사님은 고기를 더 많이 넣으셔서 저는 그다지 안 좋아했거든요.”
“그러냐. 그런데 그렇게 하나하나 감탄하지 않아도 돼. 그냥 먹어. 맛 감정단도 아니고 뭘 그렇게 일일이 감상을 읊어.”
누가 유씨 핏줄 아니랄까 봐, 리온이랑 하는 짓이 똑같았다. 리온이도 먹을 때마다 부끄러울 정도로 리액션을 해대서 훈이 놈을 흐물흐물하게 만들더니, 유재하도 그러고 있었다. 이게 옆에서 볼 때는 진짜 염병한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는데, 막상 들으니까 좋으면서도 민망하고 계속 듣고 싶은 그런 중독성이 있었다. 그래서 훈이 놈이 그 모양이 됐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이런 게 어색해서 다비는 그냥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입 다물고 얼른 먹어.”
다비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숙이고 밥 먹는 것에 집중했다. 재하는 그런 다비를 가만히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어서 밥을 먹었다. 다비가 만들어준 정성이 사라지는 게 아까워서 깨작대다가 다비에게 생일빵도 당했다.
식사가 끝나고 재하가 설거지하는 동안, 다비가 카페에서 커피를 사 왔다. 커피와 케이크를 놓고 디저트 시간을 가졌다.
“음식은 모르겠지만, 케이크나 빵, 쿠키는 내가 훈이보다 더 나아. 맛있게 먹어.”
“네. 음식도 맛있었는데, 그것보다 더 자신 있다고 하니까 케이크는 대체 얼마나 맛있을지 기대돼요.”
다비가 자신 있어 한 이유가 있었다. 케이크는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더 맛있었다. 크림은 부드럽고 달콤했고, 시트는 촉촉했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식감과 과일의 산뜻한 향 때문에 케이크는 기분 좋은 단맛만 남겼다. 달고 느끼해서 케이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재하도 다비가 만든 케이크는 두 조각이나 먹을 수 있었다.
매일 생일이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며 재하가 다비에게 찰싹 달라붙어 귀여움을 떨었다.
“정말 고마워요. 평생 잊지 못할 생일이 될 거예요. 형이 절 위해 요리했던 순간들도, 요리를 먹은 순간도, 형이 제 생일을 축하해준 것도 전부 한순간도 빠짐없이 다 기억할게요.”
“그래.”
내년에 다시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다비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차마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대신 재하는 다비를 더 힘주어 안았다. 다비는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재하를 매단 채 마스터 룸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직 너 먹을 거 더 남았는데? 뭐야. 벌써 끝이야?”
“…네?”
“네가 실패한 생크림 먹어야지.”
“아. 아- 맞다.”
재하는 음식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다비가 정말 좋았다.
침대 위에서 처음 사용하는 도구가 깍지 끼운 짤주머니가 될 거라고는 제안한 다비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몸에 대충 크림이나 찍고 핥게 할 생각이었는데, 이왕 하는 거 이번에 버릇도 고쳐보자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짤주머니가 투입되었다.
씻고 온 재하 역시 짤주머니의 등장에 의아한 얼굴이었다.
“형… 그게 뭐예요?”
“어. 네 버릇 고칠 거.”
“버릇이요?”
“그래. 너는 지금 내 몸 보면서도 아무런 생각도 안 드냐?”
재하는 그 말에 속옷만 입은 다비의 몸을 눈으로 훑었다. 다비가 사람이 많지 않은 오지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카메라로 사물을 찍는 사진작가가 아니라 카메라에 찍히는 모델이 됐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저 몸을 다른 사람들이 본다는 걸 상상하자 잠깐 속이 부글거렸지만, 현실은 사진작가라는 것을 다시 상기하자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지어졌다.
“좋아해요, 형.”
“…아니. 그건 나도 알고. 몸 보고 무슨 생각 드냐고. 됐다. 뭐가 문제인지 알면 네가 이렇게 만들진 않았겠지.”
재하는 다시 살폈지만, 다비는 왜 몸까지 완벽한 걸까, 얼굴만 잘생길 것이지, 같은 생각이 들 뿐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매일 물고 빨아서 하얀 피부가 제 흔적으로 가득하다는 건 매우 뿌듯했고 말이다.
“글쎄요…. 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데요.”
“그래서 알려주려고.”
다비는 손으로 물어뜯긴 자국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어린 강아지 교육하듯 친절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네가 날 좋아 죽겠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건 알겠는데, 이렇게 개 껌 씹듯이 물어뜯으면 내 피부 아작 나. 지금이야 버티지만, 계속 이러면 흉 지겠다고.”
“아…. 그렇겠네요.”
처음 알았다는 듯 대답하지만, 재하도 이미 알고 있었다. 흉 지면 좋을 텐데. 제 흔적이 영원히 남아버리게. 더 세게 깨물어야 하나. 저만 볼 수 있는 곳에 미친 척하고 콱…. 그런데 더 세게 깨물면 두 번 다시 몸에 손도 못 대게 할 것 같아서 나름 조절한 건데… 싫어할 줄은.
“죄송해요.”
힘없이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재하를 보며 다비가 손을 내저으며 짤주머니를 흔들었다.
“아니. 기죽이려는 건 아니었고…. 네가 아무 곳이나 막 물어뜯으니까 하는 소리야. 나도 몰랐는데, 네가 여기저기 막 물어뜯고 핥아도 아프기만 한 곳이 있고, 또… 참을 만한 곳도 있어. 그… 좋은 곳도… 있고.”
“좋은 곳이 있어요? 그런데 왜 말 안 해줬어요?”
“그걸 어떻게 말해. 그게 좋은 곳인지 알기도 전에 네가 다른 곳을 물어뜯는데.”
“…몰랐어요. 이제부터 알려줘요. 잘 배울게요.”
배우려는 의지가 가득한 눈으로 알려달라 조르는 녀석을 보며 다비는 말없이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에 생크림을 짜 얹었다. 재하가 가장 많이 물어뜯고 핥아대는 곳이었다. 막상 설명하려니까 갑자기 현타가 찾아왔다. 순식간에 피부가 붉게 물드는 바람에 하얀 크림이 선명해졌다.
“그러니까… 여기….”
재하가 곧장 몸을 숙여 생크림을 입으로 머금었다. 살짝 닿고 떨어지는 감촉에 다비가 몸을 흠칫 떨며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비의 반응에 재하는 다시 얇게 남은 크림을 부드럽게 핥았다.
“그래. 그렇게….”
다비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재하는 다비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그만두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이미 사라지고 없는 크림을 핥고 빨았다. 다비의 어깨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나른한 숨이 재하의 귓가에 쏟아졌다. 재하는 다비의 귓가에 속삭였다.
“형, 다 먹었어요.”
다비가 이어서 쇄골을 따라 생크림을 길게 짜내자 재하의 입술이 곧바로 따라붙었다. 이번엔 크림 양이 많아 오랫동안 입술이 머물렀다. 다비가 하, 하고 짧게 숨을 터트렸다. 재하 역시 금세 몸이 달았다. 달콤한 생크림 맛도 맛이지만, 그걸 걷어내면 더 달콤하고 탄력 있는 다비의 살을 맛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혀로 얌전히 핥기만 하는 건 성에 차지 않았다. 다비가 기분 좋다고 알려준 곳을 외워야 하는데, 크림은 사라져버리니까 자신이 외우기 쉽게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조금만, 살짝…. 이를 세워 깨물려는데, 가슴에 생크림이 얹어졌다. 다른 곳보다 알아보기 쉽게 생크림의 양이 많았다. 오랫동안 핥으라는 노골적인 요구에 재하는 입술을 혀로 핥아 적시며 곧바로 가슴을 머금었다. 몸을 지탱하던 팔꿈치가 훅 꺾이고 다비의 몸이 침대로 무너졌다. 재하가 곧바로 손을 뻗어 다비를 받치고 조심스럽게 침대로 눕혔다. 그러면서도 가슴에 머문 입술은 크림을 없애기 위해 분주했다.
부드러운 생크림을 걷어내자, 흥분해서 단단하게 솟아오른 작은 돌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크림 사이로 보이는 예쁜 색을 띤 유두를 재하는 입에 넣고 쪽, 소리가 나게 빨고 잘근 깨물었다. 다비는 참지 못하고 재하의 뒤통수를 감싸며 흥분을 터트렸다. 씨발, 돌겠네. 신음 대신 터트리는 욕에 재하는 다비 대신 목으로 신음을 낮게 울렸다.
크림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재하의 몸도 아래로 향했다. 시선은 다비의 반응을 놓치지 않으려고 얼굴에 고정하고, 입으로는 몸에 묻은 크림을 깨끗이 받아먹었다. 재하가 먹는 크림의 양이 많아질수록 다비가 터트리는 한숨 소리와 욕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비가 욕을 뱉을 때마다 재하는 다비를 물지 않기 위해 욕구를 억눌러야만 했다.
허벅지 안쪽에 다비가 크림을 쭈욱 짜내며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거긴, 안 아프게 깨물어도… 괜찮… 아야. 사, 살살… 좀.”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재하는 참지 못하고 다비의 허벅지에 이를 박았다. 당장에라도 살짝 벌어진 다비의 다리를 활짝 벌리고 허락해준 곳을 난장으로 만들어 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피를 보더라도 제 것이라는 흔적을 새기고 싶었다. 어쩔 수 없었다.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크림을 짜면서 깨물어달라는 깜찍한 짓을 하고 있는데, 그걸 보고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지구상에 몇 명이나 있을지.
다비는 모른다. 자신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입으로 설명해주는 건 부끄럽고, 이건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성감대만 골라서 물고 빨아달라니. 사람이 정도껏 귀여워야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데, 이건 정말 참지 못할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재하는 다비와 눈을 맞춘 채 허벅지의 크림을 보란 듯이 혀를 내밀어 핥아 올렸다. 새빨간 혀가 하얀 크림을 가득 머금고 입 안으로 사라졌다. 다비는 재하의 입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비의 울대가 꿀렁였다. 기분이 좋은 게 분명한데 신음만큼은 절대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치 꾹 참는 것처럼 신음 대신 욕을 쏟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재하는 다비의 신음이 듣고 싶어서, 참지 않고 다시 허벅지에 이를 박아 넣었다.
“아, 재하… 야.”
아파서 터지나, 좋아서 터지나 듣기엔 같은 신음이었다. 이렇게 듣기 좋은 소리가 나는데 왜 자꾸 참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소리 내도 괜찮다고 몇 번 권해봤지만, 그럴수록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삐딱한 사람이라 재하는 대신 물어뜯는 걸 선택했다.
허벅지에 이를 박고 잘근거리자, 다비는 흥분한 개를 진정시키듯 재하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달랬다.
“흥분한 거 알겠는데, 자꾸 그렇게 물어뜯으면 입마개 씌울 거야. 살살 하라고.”
“입마개 하면, 내가 형을 못 핥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핥기만 하라고요. 살살 깨물든지. 아으, 이 새끼가 또 못 들은 척… 악.”
재하는 허벅지 깊숙한 곳을 잘근 깨물며 다비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잔뜩 흥분해 성이 난 다비의 성기가 속옷 위로 윤곽을 드러냈다. 재하는 윤곽을 따라 코를 들이밀고 비비며 숨을 들이마셨다. 젖은 속옷에선 바디 워시 향과 야한 냄새가 어우러져, 착한 유재하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차마 이건 이를 세워 물 수 없으니 재하는 입술로 성기 끝에 입을 맞추며 다비에게 귀여운 척 애교를 떨었다.
“형, 여기엔 생크림 듬뿍 짜주는 거죠?”
“…뭐?”
“형은 제가 여길 빨 때 제일 좋아하잖아요. 그러니까 산처럼 많이 쌓아줘야죠.”
다비가 대답하기 전에 재하는 속옷을 코로 비비며 혀로 핥기 시작했다. 다비는 숨을 삼키더니 손을 뻗어 재하의 뒷머리를 잡아당겨 저를 보게 했다. 잔뜩 흥분해 미친개가 되기 일보 직전인 재하의 풀린 눈에 다비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피식 웃었다.
“하, 미치겠네. 진짜.”
“예뻐서요? 아니면 귀여워서?”
저를 빤히 쳐다보며 묻는 재하의 모습에 다비가 한층 더 잘생기고 야한 미소를 지으며 웃어주었다.
“숨겨둔 간식 달라고 졸라대는 개새끼 같아.”
“찾아냈으니까 꺼내줘요. 맛있게 먹을게요.”
“하, 씨발. 많이 컸네.”
다비 역시 흥분을 참지 못하고 거친 말을 내뱉었다. 재하는 오싹해지는 느낌에 눈을 가늘게 뜨며, 정말 개라도 된 것처럼 속옷을 혀로 핥고 다비의 기둥을 손끝으로 아프지 않게 박박 긁어댔다.
다비가 참지 못하고 욕을 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남과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짤주머니를 침대 밖으로 휙 던져버렸다. 재하는 날아가는 짤주머니를 눈으로 좇았다. 가서 물고 와야 하는 건가? 입으로 물고 오면 잘했다고 칭찬해주나? 재하가 다비의 다리 사이에서 몸을 일으키자 다비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재하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다리를 밀어 넣었다.
“하. 못 참겠다.”
“…네?”
“나도 네 거 좀 빨아보자.”
“…형?”
다비가 재하의 다리 사이를 발등으로 훑으며 야릇하게 웃었다.
“네 좆 좀 빨아보자고. 오늘도 사양하면 너도 내 자지 빨 생각 앞으로 하지 마.”
이건 아닌데. 재하는 곤란해하며 엉거주춤 몸을 들어, 다비의 발을 피했다.
“싫어… 아니, 못 해요.”
“왜 못 하겠다는 건데? 제 좆이 커서 형이 고생할 거예요. 형이 아픈 거 싫어요, 같은 개떡 같은 소리 또 하기만 해 봐라.”
“그런데 그게 진짜 이유인 걸 어떡하라고요. 형이 힘들까 봐 이러는 거잖아요.”
다비가 기분 좋아하는 걸 보는 건 좋지만, 아프고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는 건 싫었다. 섹스하려고 했을 때 덜덜 떨던 다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재하는 발기했던 성기가 그냥 가라앉아버릴 정도로 속상했다. 그걸 떠나서라도 다비의 입에 담는 것도 분명 힘들 터였다. 시원시원하게 웃을 만큼 다비의 입이 작은 건 아니라지만 제 것을 물리기엔 버거워 보였다.
“형은 그냥 제가 주는 것만 받아요. 난 그것만 봐도 쌀 것 같으니까.”
“내가 빨고 싶다고.”
“형 힘들다니까요.”
“힘들어도 내가 힘든데 왜 네가 걱정을 해.”
“그럼 손으로 해주세요. 그것도 형 팔 아플까 봐 싫은데.”
“진짜 염병하네. 손이든 입이든 내가 할 수 있을 만큼 조절할게. 빨리 내놔. 나 네가 첼로 연주할 때부터 꼴리는 거 참느라 지금 돌아가시겠거든.”
다비는 재하를 손으로 툭 밀어 눕힌 후, 재하의 바지 위에 손을 얹었다. 두툼하고 단단해진 재하의 성기가 손에 적나라하게 느껴지자 다비는 들뜬 눈으로 재하를 보며 말했다.
“나도 찾았으니까 빨리 꺼내.”
흥분에 들떠 저를 내려다보는 다비의 명령에 재하는 홀린 듯 다비의 손을 잡아 제 허리 밴드에 걸어주고 허리를 들어 올렸다. 알아서 벗기라는 행동에 다비는 마다하지 않고 재하의 바지부터 속옷까지 한 번에 벗겼다.
곧고 굵은 모양 좋은 성기가 모습을 드러내자 다비는 기둥을 손으로 훑으며 재하를 내려다보았다. 재하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저와 눈을 맞춰오자, 알 수 없는 만족감이 다비를 감쌌다.
“이제 내가 물고 빨아줄게.”
“정말 괜찮… 하, 형….”
“물고 빠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배워. 물어뜯고 빠는 게 아니라고.”
그 말을 끝으로 다비는 재하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숙이더니 곧바로 성기를 입에 물었다. 눈과 손으로 가늠하긴 했지만, 입 안으로 들어온 재하의 성기는 너무할 정도로 큰 편이었다. 제 입이 작은 편이 아닌데도 꽉 들어차는 걸 보면 확실히 컸다.
손으로 기둥을 훑으며 입으로는 재하의 성기를 적셨다. 머리 위에서 곧 재하의 신음이 터졌다. 듣기 좋은 소리라 다비는 조금 더 깊숙이 입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이걸 입이 아닌 뒤로 받아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까지 들 정도로 재하의 신음이 제법 듣기 좋았다.
다비는 정말로 재하와 섹스하고 싶었다. 섹스할 기회는 많았지만, 어떤 자세를 하더라도 입구에 손이든, 성기든 닿으면 마음과 달리 몸이 먼저 굳어버렸다. 재하도 그걸 알고 지금까지 무리하지 않았다. 과할 정도로 자신을 아끼고 보호하려고 했다. 하고 싶어도 하질 못하니 다비 역시 짜증 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오늘은 입으로라도 이걸 물고 있으니, 그동안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 가신 기분이었다.
“흡….”
재하의 성기를 반쯤 삼켰을 때, 머리 위에서 들린 소리였다. 씨발. 다비는 미간을 팍 구기며 재하의 성기를 뱉어내고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펠라가 그렇게 싫으냐? 이 상황에서 네가 처 울면 내가 뭐가 되냐. 이번엔 왜 또 우는 건데?”
“…아뇨? 좋아서… 좋아서 우는 건데요? 하던 거 계속…. 안 울려고 했는데, 형이 내 첼로 듣고 꼴렸다고 했던 말이 자꾸 떠올라서… 기뻐서 그랬어요. 형이 연주하는 내 모습에 꼴렸다니….”
“미치겠네, 진짜. 때와 장소 좀 봐가면서 울어. 미친. 울면서 좆은 왜 빳빳하게 세우고 있어. 어쩌라고.”
말은 그렇게 내뱉으면서 다비는 재하를 일으켜 손으로 눈물부터 닦아냈다. 재하는 낭만적인 뭐, 그런 감수성 예민한 녀석이니까 꼴렸다는 말에 감동할 수도 있지. 이런 때에도 우는 녀석이 징그러울 법도 한데, 아무래도 미친 게 분명했다. 울고 있는 저 꼬라지가 예쁜 걸 보면 말이다.
“유재하. 그만 울어.”
다비는 재하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핥아주었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깨끗하고 순수한 짠맛이 제법 꼴렸다. 눈물 좀 핥아줬다고 예쁜 새끼가 다시 예쁘게 울었다. 다비는 양손으로 재하의 뺨을 감싸고 눈두덩에 입을 맞춰 주고, 입술에도 쪽, 입 맞춰 주었다.
“진정해. 이러면 내가 네 좆을 못 빨아요. 계속하시라면서요.”
“…네. 참아볼게요. 형은 하던 거 계속하세요.”
“그래. 착하다.”
다비는 재하의 머리를 토닥여주고 다시 재하의 성기를 붙잡았다. 위로는 그렇게 예쁘게도 울더니, 밑은 흉악하게 세우고 있어서 어이가 없는 웃음이 터졌다.
“귀여운 새끼. 천천히 해줄게.”
다비는 재하의 성기를 손으로 흔들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입술로 귀두를 잘근 깨물고 혀로 살짝 핥자, 재하의 몸이 움찔 떨렸다. 다비는 픽 웃으며 혀를 내밀어 기둥을 핥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극적인지 재하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아으, 형.”
재하의 반응에 즐겁다는 듯 다비는 눈으로 웃어주다 시선을 내리깔고 계속 기둥을 핥고, 손으로 훑어주었다. 그러다 갑자기 다비가 고개를 떼어내고 기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뭔가 자세히 살펴보는 모습에 재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 왜요?”
“너 여기 점 있네.”
“네?”
다비가 픽 웃더니 혀로 기둥 아래를 길게 핥으며 재하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네 좆 기둥 아래쪽에 점 있다고.”
“아, 그래요? 볼 일이 없어서 몰랐어요. 내 몸인데 24년을 몰랐네요.”
“겁나 신기해. 점이 하트 모양이야. 작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겠더라.”
재하가 그 말에 부끄러워하며 좋아했다.
“평생 형만 볼 수 있겠네요.”
“…뭐, 뭐래. 뭘 또 나만이래.”
“형이 발견해준 거니까 형만 알면 되죠. 설마 내가 그걸 남들한테 보라고 하겠어요?”
“그럼 너도 볼 수 있게 찍어줘?”
다비는 평생이란 단어를 자연스럽게 내뱉는 재하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저도 모르게 삐딱하게 답했다. 금세 시무룩해지는 녀석의 모습에 서둘러 손으로 기둥을 흔들어주며 달랬다.
“생일인데, 내가 좀 그랬다. 알았어. 나 혼자만 볼게. 앞으로 다른 사람들한테도 보여주지 마.”
재하는 생일을 그렇게 신경 쓰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진지하게 1년 365일이 전부 제 생일이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상냥하다 못해 알아서 기어주는 김다비라니. 그것만으로도 좋아서 금방 사정할 것 같았다.
“좋아해요, 형.”
“그래. 그럼 난 다시 하던 거 마저 할게.”
혀로 기둥을 핥고 손으로 훑으며 저와 눈 마주치는 건 괜찮고, 좋은 말 내뱉는 건 부끄러워하는 다비가 좋았다. 야하면서 다정한 사람. 재하는 나른하게 숨을 내쉬며 다비가 해주는 펠라를 지켜보았다.
재하는 자리에 앉은 채 다비가 제 성기를 삼키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 현실감 없는 광경에 하반신에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너무 느껴져서 현실감을 잃은 것 같았다.
다비의 입 안은 촉촉하고 따뜻했으며 말도 안 되게 부드러웠다. 다비가 웃을 때 보이던 가지런한 치아를 제 눈으로 확인했는데도 성기에는 그저 부드러운 것만 닿고 있었다. 다비의 볼이 불룩하게 튀어나오며 성기의 윤곽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뚫고 나올 것처럼 보이는데 다비의 표정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러다 오돌토돌한 굴곡이 귀두를 스쳤다. 다비가 말한 입천장에 비벼지는 감촉이 이런 느낌이었나 보다.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 으. …형.”
다비가 저와 눈을 맞추며 눈웃음을 보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다비의 모습이 심각하게 야하고 또 야했다.
다비가 제 성기를 바짝 조이며 깊게 삼켰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 큰 게 저 입 안으로 거의 다 들어갔다. 믿을 수 없었다. 다비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제 것을 물고 빨고 있었다.
감상은 여기까지였다. 다비의 고갯짓이 시작되면서 재하는 처음 느끼는 감각에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혀, 형…. 좋… 좋은데… 하, 좋아요.”
재하의 탄성에 다비는 더 열심히 재하의 성기를 빨았다. 깊숙이 물었다가 뱉으면서 기둥을 혀로 핥아주고, 선단만 입 안에 담아 혀를 세워 갈라진 틈을 간지럽히다 다시 깊숙이 물어댔다. 그러다 숨이 차면 고개를 다시 뒤로 물리고 재하와 눈을 맞춘 채 재하의 음낭과 기둥을 혀로 핥아 올리며 재하의 반응을 즐겼다.
“형. 하아…. 읏.”
재하는 눈가를 붉힌 채 다비의 행동을 전부 지켜보면서 목으로 앓는 소리를 내었다. 다비의 얼굴과 어깨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자신이 남긴 흔적들이 붉어진 피부보다 더 진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 모습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너무 야해서 재하는 손을 뻗어 다비의 귓바퀴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다비가 몸을 흠칫하며 물고 있던 재하의 성기를 조였다.
“흣, 형. 첼로 연주한 손으로 만져서 그래요? 갑자기 확 조이는데…. 좋아서 그래요?”
다비는 대답 대신 목구멍을 활짝 열어 성기를 끝까지 삼키고 조였다.
“아, 형…. 자, 잠깐… 싸겠… 읏…!”
재하가 신음과 숨을 크게 터트리며 몸에 바짝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곧이어 목으로 울컥하고 진한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입에 넣자마자 쌀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사정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조루는 아닌 거로.
다비는 그동안 재하가 그랬듯이 쏟아낸 걸 전부 삼켰다. 삼켰다기보다는 알아서 목으로 넘어간 거지만, 어쨌든 입가로 흘러나온 것을 제외하고 전부 삼켰다. 마무리까지 깨끗하게 정리해주고 나서야 다비가 몸을 일으켰다.
재하는 다비를 붙잡아 제 품에 안고 입을 맞춰왔다. 조금 전까지 제 것을 물고, 정액도 삼켰는데 스스럼없이 입을 맞춰대고 있었다. 재하가 입을 맞추며 다비의 앞을 손등으로 쓸어 올렸다. 다비가 재하의 허벅지를 손으로 토닥여주며 입을 떼어냈다.
“오늘은 네 생일이니까 여기까지.”
“네? 형은요?”
“난 됐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형도 제가 해줄게요.”
“괜찮아. 내 자지가 너무 커서 아무래도 너 힘들 것 같아. 오늘은 안 하려고.”
재하가 평소에 대던 핑계를 다비가 말하며 피식 웃었다. “난 화장실에서 해결하고 올게.”라며 재하가 했던 마무리 말까지 따라 하자, 재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화장실로 가는 다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 다비가 터진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전부 다비를 위한 거라 생각했는데, 제 것을 물고 있는 다비의 표정이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였던 게 떠올랐다. 그동안 자신이 괜찮다고 막무가내로 사양했을 때, 다비가 느꼈던 기분이 이랬을 거라 생각하자 속이 쓰렸다.
뭔가 허무하고, 거부당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만들려던 건 아니었다. 다비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강한 사람이었다. 과거의 아픔을 극복해보려는 사람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고 제멋대로 했단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찾아왔다. 그게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동안 너무 겁먹고 조심스러워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재하는 다음부터 다비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형, 멋있어. 진짜 좋아.”
아직 배움이 부족한 재하는 다비에게 많은 걸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씻고 온 둘은 다시 침대에서 만났다. 따뜻한 물에 빨갛게 익은 다비가 침대에 누워 재하를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안겨. 꽉 안아주고 재워줄게.”
“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거예요?”
“어. 생일인 사람은 그래도 돼.”
“진짜 매일 생일이었으면 좋겠네요. 침대 위에서도 생일 선물, 정말 행복하고 좋았는데. 마지막까지…. 형, 좋아해요.”
“그것도 선물로 쳐주는 거냐? 유재하 진짜 싸게 먹히네.”
“싸다뇨. 7년 가까이 참았다가 드디어 받은 선물인데, 귀하죠.”
재하는 다비에게 몸을 던져 품에 꼭 안겼다. 저보다 더 큰 몸을 안고 있으면서도 다비는 힘들어하지 않고 재하를 토닥이며 재워주기에 집중했다.
“이제 네 생일 알았으니까, 안 잊어버려. 계속 기억할게.”
내년에도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다고 말하면 재하가 괜한 희망을 품게 될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내년 생일엔 한국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해 먹이고 싶었지만, 그때 과연 형, 동생이라는 관계조차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다비는 그냥 말없이 재하가 잠들 때까지 품에 안고 머리를 쓸어주고, 등을 토닥여 줄 뿐이었다.
다독이는 손길과 따끈따끈한 다비의 체온에 재하는 금방 잠에 취해 밤 인사를 건넸다.
“형, 좋아해요.”
“그래. 잘 자라.”
재하가 잠든 걸 확인한 다비는 재하를 한참 토닥이다가 협탁에 놓인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휴대폰 앨범에서 사진 하나를 확인했다.
충동적으로 찍고만, 첼리스트 유재하의 사진.
사진 속 재하는 저를 보며 애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랑해달라고 애원하는 그 시선과 달리 첼리스트 유재하의 모습은 이미 미칠 듯이 사랑스러웠다. 연주하는 걸 좋아하고, 즐기는 재하의 모습은 눈이 부셨다. 그저 예쁘고 예뻐서 사랑스러운 마음만 들었다. 저 모습에 또 반해서 정신줄 놓고 사진을 찍고 말았다.
“어쩌자고 또 찍었어.”
자신의 사진을 기가 막히게 해석하는 재하에게 이 사진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아마 이 사진도 예전의 그 사진처럼 재하가 볼 일은 없을 것이었다.
완벽한 사진을 찍었는데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적이 있었다.
제주도에서 찍은 유재하의 사진이었다. 그때 재하는 해를 넘겨 막 18살이 되었고, 자신은 졸업을 앞둔 고3이었다.
섬 친구들과 졸업 여행으로 제주도에 갔었고, 재하는 중간에 합류해서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겨울 제주도에서 아름다운 설경을 만나 자연을 찍던 다비는 친구들의 독사진을 찍어주게 되었고, 그때 재하의 사진도 찍게 되었다.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했다. 여자애들의 사진을 찍어준 후 다비는 구경하던 재하를 부르며 손짓했다.
‘재하야. 이리 와. 사진 찍어줄게.’
‘저, 저도요?’
‘뭐래. 넌 우리 애들 아니냐? 빨리 와.’
다비는 재하와 잘 어울릴 것 같은 배경을 찾아 뻘쭘하게 서 있는 녀석을 불러 세웠다. 그동안 재하의 사진을 한두 번 찍어준 것도 아닌데 그날따라 녀석이 어색하게 굴었다. 카메라 앞에서 꽤 자연스럽게 있던 녀석이 시선을 딴 데로 돌리거나 쭈뼛거리는 게 답답해서 다비는 카메라를 치우고 재하를 보며 말을 걸었다.
‘뭐 하냐. 왜 갑자기 낯가려. 똑바로 여기 보자?’
‘…네.’
그제야 재하는 카메라를 든 다비를 보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다비는 갑자기 카메라와 낯가리는 재하가 이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단순히 긴장한 거라고 생각했다.
‘자, 웃어야지? 활짝 안 웃어도 되니까. 그 굳어 있는 표정은 좀 풀자? 내가 너무 잘생겼다고 기죽을 필요가 없어. 너도 잘생겼으니까 자신감을 가져보자. 그렇지. 카메라 의식하지 말고 나를 보고 있다고….’
그때였다.
하얀 눈꽃나무 앞에서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재하가 카메라를 응시했다.
재하는 그때 뷰파인더를 통해 자신에게 형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을 건넸다.
실제로 말한 건 아니었지만, 유재하의 시선이 그렇게 말했다. 첫사랑의 순간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을 만큼, 재하가 자신을 보는 시선은 너무나도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그런 시선을 받은 순간 다비는 재하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카메라에 담고 말았다.
하지만 다비는 그때 깨끗하게 마음을 정리했었다.
두 살 차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자신은 성인이 되는 문턱을 밟았고, 재하는 여전히 미성년자인 10대였다. 양심상의 문제라는 핑계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 순수하고 아름다워야 할 첫사랑의 상대가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재하의 순수한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접었던 마음이었는데, 결국에는 이렇게 되어버렸다. 그것도 연인도 아니고 섹스 파트너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로 말이다.
여전히 순수하고 예쁜 마음으로 저를 좋아하고 있는 녀석을 분명 자신도 나름 좋아하고 있긴 한데 두려웠다. 자신은 훈과 리온처럼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멀리 떨어져 지내도 한결같이 무한한 사랑을 주고받을 자신이 없었다.
남은 날이 지나면, 아무리 좋아도 둘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 훈과 리온이 특이한 케이스일 뿐, 일반적인 정설 같은 이야기였다. 다비는 멀어지는 몸과 마음을 붙잡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재하에게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비는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자는 재하의 머리를 쓸어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정말 이 녀석을 정리할 수 있을까.
다비는 생각을 멈추었다. 지금은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재하가 가까이에서 주는 사랑은 너무 예쁘고 소중해서 욕심이 났으니까 자신도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비는 쿠션에 몸을 기댄 채 휴대폰에 담긴 재하의 사진을 다시 보았다.
“예쁘다, 진짜.”
사진에 담긴 재하의 모습과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예쁘고 또 예뻤다.
***
잠들었던 재하는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들어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나고 주위를 살피니 다비가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채 잠든 다비를 찾아냈다. 재하는 웃으면서 다비를 품에 안아 가운데로 이동했다.
끌려오는 다비의 손에서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재하는 다비를 눕히고 바닥에 떨어진 것을 살폈다. 다비의 휴대폰이었다. 재하는 손을 뻗어 다비의 휴대폰을 집었다. 협탁에 올려두려는데, 화면이 켜졌다.
재하는 갑자기 밝아진 화면에 다비가 깰까 봐 얼른 손으로 화면을 가렸다. 그러다가 화면을 건드렸는지, 다비가 마지막으로 본 화면이 액정에 나타났다.
“…어?”
오늘 공원에서 첼로를 연주했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재하가 사진을 보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하.”
재하는 믿을 수 없었다. 다비의 뇌와 공유된 거 아니냐고 할 정도로 다비의 사진을 기가 막히게 해석하는 자신이라지만, 이번만큼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그러니까 사진에 남은 다비의 마음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럽게 봐주고 있는 것도 모자라, 연주하는 자신에게 반했단다.
형이 날 좋아해.
꼴렸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삐딱한 사람이라 반했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할 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더 좋았다. 자신이 쉽게 알 수 없는 사람이면서도 알기 쉬워서 좋았다. 다비가 자신에게 반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입가에 멋대로 미소가 지어졌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자꾸 뜨거워졌다.
그 감정이 찰나였을지라도, 자신에게 반했다는 그 마음이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자신이 왜 잠에서 깼는지 뒤늦게 깨달을 정도로 말이다.
잠에서 깬 이유를 떠올리자, 재하는 곧바로 다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참을 다정한 눈으로 보던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자리를 이동했다.
거실로 나온 재하의 표정은 조금 전까지 다정한 눈으로 다비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싸늘하고 차가웠다.
매우 행복하고 즐거운 생일을 보낸 재하는 그 안에 숨겨진 다른 의미를 찾아내고는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그건 다름 아닌 다비의 선물이었다. 다비는 생각보다 펠라를 너무 잘했다. 자신이 다비에게 해주었을 때, 잘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법 빨리 배우는 편인데도 꽤 시간이 걸릴 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다비는 심각하게 잘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다비의 반응과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문제였다.
지금까지 다비를 만지고, 물고, 빨며 알아낸 것들이 있었다. 다비는 경험이 있는 것치고는 몸에 대한 반응이 느렸다. 자신의 성감대가 어디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처음 다비에게 펠라를 해주었을 때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생각할 정도로 어색해했었다. 조금 과할 정도로 추측하자면 다른 사람에게 만져진 적 없는 반응이었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만져진 적이 없는 몸인데, 경험은 있었다. 그마저도 아픈 기억뿐이라 지금도 섹스를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펠라티오는 잘했다. 그게 섬뜩해서 재하는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개 같은 새끼.”
입에서 저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사귀었다던, 아니. 이젠 그것조차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정말 사귀었던 게 맞기나 한 건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취급했다고? 자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역시 누군지 알아야겠다.
다비가 지난 시간 어떤 사람을 만났든 그건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이런 식이면 이야기가 달랐다. 다비도 모르는 다비의 상처를 발견한 이상, 참견해야만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다비가 말해주기 전까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다비를 그렇게 취급한 개새끼가 어떤 새끼인지는 알아야 했다.
다비의 고향인 오지도는 대부분 20살을 기점으로 사회로 나가는 편이었다. 섬에서는 직업이 한정적이다 보니 거의 약속한 것처럼 20살에 섬을 떠났다. 다비도 다비의 친구들도 훈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20살,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섬을 떠났다.
다비는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혼자였다. 그래서 그 이전에 섬을 떠난 사람들을 찾기로 했다. 재하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랜만입니다. 오지도. …맞습니다. 8년에서 12년 전, 섬에서 나간 사람들 명단이 필요합니다. 아뇨. 남자만. 13년 전이라…. 아닐 겁니다. 아니어야죠. 맞는다면 정말 죽여버려야지. 아뇨. 명단이면 됩니다. 아직은.”
재하는 통화를 끊고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12년도 좆같은데, 13년 전이라니….”
당장 그를 찾아내서 뭘 어떻게 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건 천지 차이였다.
부디 자신이 그의 신상을 알아내는 것에서만 끝나기를 바랐다. 다비의 그늘이 이보다 더 짙고 어둡다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재하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착하고 귀여운 유재하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사람에게 남은 상처와 흉까지 전부 지워주려면, 말 잘 듣는 착하고 귀여운 유재하가 필요하니까. 재하는 끓어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참을 거실에서 우두커니 서 있어야만 했다.
2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