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연애. (1)
[형, 저 카페에 도착했어요.]
[ㅇㅇ 나도 거의 도착. 차가 좀 막히네.]
[천천히 와도 괜찮아요. 조심히 와요. ^^]
[ㅇㅇ]
다비는 택시 안에서 재하에게 문자를 보내고 한숨을 얕게 내쉬었다.
미국에서 생태 사진작가로 활동 중인 다비는 얼마 전에 페루의 고산 지대에서 촬영을 끝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고향인 작은 섬마을 오지도에서 추석을 보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재하가 자신도 한국에 있다며 명절 끝나고 만나자고 연락해왔다. 그래서 지금 다비는 서울로 올라와 재하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재하와 알게 된 지 벌써 7년이 넘었다. 둘 다 바쁜 데다가 각기 다른 나라에서 일하고 있어서 자주 만나는 건 아니었지만 문자나 전화로 연락을 오래 주고받은 사이였다. 한 번 보고 끝날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래 연락하고 지낼 줄은 정말 몰랐다.
인연이라는 게 참 신기한 것이 죽고 못 살 것처럼 굴다가도 어느 순간 뚝 끊어지는가 하면, 별로 좋은 인상이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절친이 되어 있기도 했다.
재하는 후자인 경우였다.
좋지 않은 인연인 줄 알았는데 친해진 인연. 재하와의 첫 만남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재하의 첫인상 또한 좋지 않았다.
재하의 첫인상을 떠올리자, 다비는 재하를 처음 만났던 때가 함께 생각나 피식 웃었다. 첼로가 들어 있는 하드 케이스를 양손에 들고 배에서 성큼 내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 모습은 뭐랄까.
“악당 같았지.”
재하를 처음 만난 건 자신이 살던 고향 오지도였다.
스웨덴에서 태어나 10년을 살았지만, 다비가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곳은 한국의 작은 섬마을이었다. 오지도는 육지에서 배를 타고 한참을 이동해 중간 섬에서 내려 작은 배를 타고 들어가야 도착할 수 있는 외진 곳이었다. 그곳에서 다비는 친구들과 함께 십대를 보냈다.
재하는 다비가 고3일 때 섬을 찾아왔었다. 당시 17살이었던 재하는 자신을 피해 도망간 삼촌을 잡으러 섬에 들이닥쳤다. 삼촌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자신과 또 한 명의 친구는 재하의 방문을 환영하지 않았다.
재하는 그야말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선착장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고, 재하는 자신의 삼촌에게 버르장머리 없게 굴고 있었다.
보다 못한 다비는 그 싸움에 끼어들었다. 재하는 ‘이건 또 뭐야.’ 하듯 눈썹을 씰룩이며 아니꼬워했다. 녀석은 삼촌을 가로막아선 다비와 친구를 번갈아 보더니 혼잣말을 지껄였다.
‘영웅 놀이하는 것도 아니고…. 뭐가 이렇게 자꾸 끼어들지?’
‘뭐?’
키도 저와 엇비슷한 녀석이 선글라스를 낀 채 삐딱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태도가 그야말로 싸가지 없는 새끼의 표본이었다. 쯧, 하며 혀를 차는 재하에게 다비가 발끈하자 친구가 막아서고 재하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자 재하는 제 삼촌에게 짜증을 냈다. 버릇없는 그의 태도가 한 성깔 하는 다비를 건드리고 말았다.
‘야. 내가 꼰대 짓은 안 하려고 했는데, 좀 해야겠다. 사람하고 대화할 땐 선글라스부터 벗어. 그다음에 정상, 비정상 운운해. 네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도 정상으로는 안 보여. 말끝에 ‘요’ 붙이면 다 예의 있냐?’
다비가 화를 버럭 내자, 먼저 재하와 대화하고 있던 자신의 불알친구가 다비의 이름을 부르며 말렸다. 그때 자신의 이름을 들은 재하가 갑자기 선글라스를 벗고 맨눈으로 다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묘해서 다비는 영락없이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줄 알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뭐하면 한 대 쥐어박아 줄 생각이었다.
‘데… 데이비드 킴. 자, 작가님이세요?’
조금 전까지 ‘요’자만 사용하고 띠꺼운 말투로 싸가지 없게 굴던 재하는 갑자기 스타를 만난 팬처럼 들뜬 목소리로 다비의 다른 이름을 부르며 수줍은 소년처럼 굴었다.
데이비드는 다비의 스웨덴 이름이자, SNS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이었다. 자신을 작가라고 부르는 걸 보니 SNS 쪽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눈앞에서 제 닉네임을 버젓이 부르고 있는 게 기분 나빠서 퉁명하게 쏘아붙였다.
‘작가까진 아니고 데이비드 킴은 맞아. 그게 지금 이 상황하고 연관이라도 있나?’
그러자 불알친구가 냉큼 고자질해 왔다. 재하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놀랍게도 자신이 SNS에 올린 사진이었다는 것이다. 꽤 많은 수의 팔로워를 가지고 있는 다비는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으로 인기를 얻은 SNS 유명인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 중 이곳을 찾아내고 직접 여기까지 온 사람은 재하가 처음이었다. 정말이지 스토커가 따로 없었다.
‘대박. 손만 보고 여기까지 와? 너 스토커냐? 우리 섬은 그런 거 안 받는데. 내가 아빠 배 키 가져올 테니까 저 스토커 쫓아내자.’
스토커인 것도 짜증 나는데, 자신이 데이비드라는 걸 알고 손바닥 뒤집히듯 태도가 변한 재하를 보고 더 안 좋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정말이지 녀석의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녀석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녀석이었고, 특히 자신에겐 꽤 순한 녀석이었다. 유독 저를 따르는 게 아주 가끔 귀여워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는데, 그게 벌써 7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었다.
지금은 자신이 잘 가르친 덕분에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이렇게 한 번씩 떠올리면 여전히 싸가지 없는 녀석이란 생각이 먼저 들 만큼 재하와의 첫 만남은 그리 좋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택시 기사의 말에 다비는 회상을 멈추고, 택시에서 내려 재하와 만나기로 한 카페로 향했다.
외진 곳에 있는 카페는 둘이 서울에서 만나는 약속 장소였다. 주차장에는 재하의 차만 덜렁 주차된 것이 오늘도 손님은 재하 혼자뿐인 듯했다. 커피 맛도 꽤 좋고 인테리어도 괜찮아 마음에 드는 곳이지만, 올 때마다 사람이 항상 없었다. 그런데도 망하지 않는 게 매번 신기했다.
다비는 카페 문 앞에 멈춰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좋아한다고 말하면 어떡하지?”
친한 건 맞지만 둘 다 바빠서 얼굴은 기껏해야 1년에 한두 번 보는 사이였다. 재하는 만날 때마다 제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것만 아니면 참 좋은 녀석이라 만남을 요청할 때마다 보기는 하지만 이젠 슬슬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이번 추석 때 불알친구 놈한테 한 소리 듣고 온 상태라, 오늘만큼은 재하가 자신에게 고백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매우 컸다.
오늘 재하가 또 좋아한다고 말하면 정말로 이 인연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다비는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직원들의 인사를 받고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먼저 재하를 찾아냈다. 조금 전까지 재하와의 첫 만남을 떠올려서 그런지 그때보다 더 성숙해진 게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17살의 유재하를 처음 봤을 때도 싸가지는 없지만 제법 잘생긴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래도 어린 티가 나서 조금 귀여운 구석도 있었는데, 이젠 그냥 잘생긴 놈이 되었다.
재하는 다비가 온 줄 모르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예쁘장하면서 또렷하고 깔끔하게 잘생긴 녀석의 옆모습은 어딘가 낯선 차가운 인상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얼굴에 익숙하겠지만, 다비는 저 얼굴이 영 낯설기만 했다.
“야, 유재하.”
재하가 다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낯설고 차갑던 인상이 곧장 흐물흐물해졌다. 흐물흐물한 유재하의 모습이 다비에겐 훨씬 익숙한 얼굴이었다.
재하는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다비는 대충 인사를 받아주며 자리로 가까이 다가갔다.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강아지… 아니, 개처럼 재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비를 격하게 반겼다.
“형, 오랜만이에요. 여전히 잘생겼네요. 아니, 전보다 더 잘생겨진 것 같은데요.”
이런 모습을 보면 정말 그때 그 싸가지 없는 그 녀석과 동일 인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 녀석은 자신을 볼 때 처음부터 이랬었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녀석을 매몰차게 내몰 수 없어서 대충 받아줬더니 녀석은 어느새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저 초롱초롱한 눈 좀 보라지. 아무래도 오늘도 좋아한다고 말할 느낌이었다.
“10분 전까지 나한테 문자 보냈던 놈이 오랜만이라고 하니까 이상하긴 하지만, 얼굴 보는 건 오랜만이니까 네 말대로 오랜만이라고 하자. 잘 지냈냐?”
“네. 형 덕분에 캐나다 공연도 하고 명절도 잘 보냈어요. 형은….”
“반가운 거 알겠는데. 일단 좀 앉자.”
다비는 재하의 말을 숭덩 잘라내며 짐을 내려놓고 재하의 맞은편에 앉았다. 재하가 미리 주문해놓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방금 받아왔는지 얼음이 조금도 녹지 않은 상태였다. 다비가 컵을 손에 쥐자 재하가 냉큼 입을 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샷 추가에 얼음 잔뜩. 맞죠?”
“어. 맞아. 고맙다.”
다비는 딱 자신의 취향에 맞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사이 재하도 자리에 앉아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리는 미소를 띠며 다비를 바라보았다. 재하는 오랜만에 만난 다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다비는 그 노골적인 시선에 커피를 마시는 중인데도 목이 바짝 타들어 갔다. 아, 역시 오늘도 말할 것 같은 느낌인데. 다비는 최대한 재하의 고백을 늦게 듣기 위해 일상적인 주제를 꺼내기로 했다.
“으. 10월인데 너무 덥네.”
“그러게요. 캐나다는 쌀쌀하던데, 한국 오니까 더워서 깜짝 놀랐어요.”
“페루도 쌀쌀해서 나도 한국 들어왔을 때 적응 못 했어. 그래도 겨울 되면 이런 날씨가 다시 그리워지겠지. 사람이 참 이렇게 간사해.”
“다 그렇죠. 아, 형 SNS에 올린 페루 사진 봤어요. 고산 지대로 갔던데, 몸은 괜찮아요? 고산병 때문에 고생 좀 한다던데.”
“뭐, 워낙 튼튼해서.”
“하긴 네팔에 촬영 갔을 때도 혼자 고산병 없었다고 그랬었죠.”
자신에게 고백만 하지 않으면 재하는 말도 제법 잘 통하고 꽤 괜찮은 녀석이었다. 솔직히 평생 곁에 두고 싶을 정도로 녀석과 잘 맞는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아는 형, 동생 같은 친근한 사이라는 의미이다.
“그래. 넌 명절 잘 보냈고?”
“네. 삼촌 따라서 오지도에 같이 내려갈까 했다가 저는 준비할 게 있어서 그냥 서울에서 명절 보냈어요.”
“준비? 한국에서 공연 있어?”
“아뇨. 문자로 이야기했었는데. 저 한동안 공연 없이 쉴 거라고.”
“…그랬나?”
보낸 문자가 한두 통이어야 기억하지. 따지기 뭐해 다비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난다는 투로 “아, 그랬네. 그랬지.” 하며 얼버무렸다.
그렇게 근황을 주고받고 재하가 보낸 문자로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재하의 고백에 무덤덤하게 반응해준 게 효과를 본 모양인지 오늘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 다비는 내심 안도했다.
이대로 무사히 이야기가 잘 흘러가면 좋겠는데….
“형, 좋아해요.”
그러나 결국 올해도 어김없이 연례행사처럼 고백하는 재하의 말에 다비는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벌써 7년째, 좋아한다는 말만 하는 녀석에게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다비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입 안으로 들어온 얼음을 아그작, 야무지게 씹으며 재하를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의문이었다.
저 녀석은 대체 날 왜 좋아하는 걸까.
유재하는 독일에서 활동 중인 세계적인 첼리스트였다. 게다가 평범한 인연의 순리대로 흘렀다면 재하는 저와 만날 일이 없을 만큼 대단한 집안의 자식이었다. 그런 녀석이 벌써 7년이나 한결같이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녀석이 왜 자신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재하의 마음이 진심이고 한결같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하의 고백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재하의 고백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같은 성별이라는 게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은 같은 성별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게이인데도 매년 고백하는 녀석의 순정에 넘어가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그냥, 연애하고 싶지 않았다.
거절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답답해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야말로 답답할 따름이었다. 재하가 7년 동안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해줄 말은 ‘그래. 그렇구나.’밖에 없었다. 재하는 오로지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을 뿐이다.
좋아하는 마음을 접으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건 개인의 감정이고, 남이 손가락 접듯 ‘접어라, 펴라.’ 한다고 쉽게 접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 감정에는 그런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재하 역시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감정을 알아달라는 것이 다였다.
좋은 형이 되어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재하가 바라는 것이 그 이상이라면 이제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역시 이 만남을 끝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다비는 들고 있던 유리컵을 내려놓고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사람의 감정도 이렇게 얼음처럼 쉽게 녹아버리고 쉽게 털어내지는 거면 좋을 텐데.
“재하야.”
“형, 저랑 사귀어 주세요.”
끝을 말하려는데, 변화가 생겼다. 유재하가 처음으로 ‘좋아해요.’ 그 이상의 말을 내뱉었다. 다비는 갑작스러운 말에 조금 당황해서 되묻고 말았다.
“…뭐?”
“저랑 사귀어요.”
헛것을 들은 게 아니었다. 재하의 입에서 분명 사귀자는 말이 나왔다. 사귀자는 말과 좋아한다는 말은 달랐다. 좋아한다는 개인의 감정이지만, 사귀자는 말은 자신의 감정에 허락을 구하는 문제였고 답을 할 수 있었다. 거절하거나, 승낙하거나. 그래서 다비는 확실한 거절을 위해 지난 시간 동안 재하의 입에서 사귀자는 말이 나오기를 그렇게도 기다렸다.
다비의 입가가 느슨해졌다. 자신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녀석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보기엔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기대에 부응해줄 수는 없었다.
“후, 사귀자는 말을 이제야 하다니. 너도 참.”
“…혹시 기다렸어요?”
“응. 오래전부터.”
초롱초롱한 녀석의 얼굴에 희망이 가득 차올랐다. 마음이 넘쳐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가가 촉촉해지고 있었다. 아니, 저러다 진짜 울 것만 같았다. 녀석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감격을 토해냈다.
“그럼, 그 말을 먼저 할 걸 그랬나 봐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
“그러니까 말이다. 네가 그 말을 해야 내가 제대로 거절할 명분이 생기잖냐.”
“…네?”
예쁘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갈피를 잃고 일그러졌다. 거절할 것을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는지 녀석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이 안쓰럽긴 하지만, 거절하기로 한 이상 조금 독하게 마음먹어야 했다.
“독한 새끼. 기다린 나도 나지만, 이제야 그 말을 꺼낸 너도 너다. 미안, 나는 너와 사귈 수 없….”
“자, 잠깐만요. 형? 제가 형 좋아한다고 말했잖아요.”
“어. 알아.”
“그런데 안 사귀겠다고요? 방금 기다렸다면서요.”
“어. 네가 사귀자고 해야 내가 거절할 수 있으니까 기다렸다는 거지. 난 정말 너하고 사귈 마음 없거든.”
“말도 안 돼.”
재하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들은 것처럼 멍하면서도 황당하고 어이없는, 아주 복합적인 표정을 지었다. 지난 7년 동안 꾸준히 좋아한다고 고백했고, 다비는 그동안 ‘그래. 그렇구나.’ 하며 알겠다고 대답했었다. 만남을 피하거나 연락을 차단한 적도 없었다. 곁을 바짝 내준 것은 아니었지만, 완전히 자신을 끊어내지도 않았다.
자만이라면 자만이겠지만, 자신은 모자람이 없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돈도 썩어 넘칠 만큼 많았고, 어린 나이에 일찍 성공해서 유명한 첼리스트로 바쁘게 살고 있다. 게다가 외모도 꽤 훌륭했다. 성격은….
아무튼,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했고, 완벽하다고 주위에서 말할 정도였다. 과장 조금 보태면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했고 스스로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을 거절하고 있었다.
거절당하지 않으려고 오랜 시간 공들였다. 어리다고, 그 마음 한때라고 거절할 것 같아서 정말 신중하게 다가갔는데, 지난 시간 동안 그의 마음을 조금도 열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런 결과를 원한 건 아니었다. 이대로 거절당할 수는 없었다.
뭘 제대로 시작하기 전부터 까일 위기에 놓인 재하는 다비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잔뜩 기울여 자신의 장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형, 저 돈 많아요.”
“알아. 너 돈 많은 거.”
“돈만 많은 게 아니라. 저 잘생겼잖아요. 아, 물론 형도 잘생겼지만….”
“어. 그것도 알지만, 꼭 네 입으로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아니면 내가 잘생겼다고 해주길 바라는 건가? 어, 그래. 유재하 참 잘, 생, 겼, 구, 나.”
“…아니. 후, 형. 저 본업도 잘하고 미래도 창창해요.”
“그래. 열심히 살았지. 알아. 근데 갑자기 왜 이래? 칭찬받고 싶어서 그래?”
“…아, 아니요.”
남들에게는 어필될 것들이 다비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재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철벽도 이런 철벽이 없었다.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일부러 튕겨내고 있다는 것이 훤하게 보일 정도로 다비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어쩌자고 이렇게 철옹성 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돼서, 지난 7년간 그의 마음에 금조차 내지 못했을까.
다비에 관해서는 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곁을 내주다가도 이 정도면 될까 하고 다가서면 어느 순간 쳐내는 사람이라 신중에 신중을 기했는데도 결과가 이렇다는 게 충격이었다.
“형, 나 싫어해요?”
“싫은 건 아니지. 네가 싫다면, 이렇게 카페에서 커피 마시면서 노닥거리고 있겠냐.”
“그런데 왜 사귀는 건 싫어요? 나도 형 좋아하고, 형도 나 좋아하면….”
“그러니까…. 그 좋아하는 게 다르다는 거야. 나는 지금 이 정도가 딱 좋은데.”
“난 싫어요. 7년 가까이 형을 좋아한다고 했으면, 형하고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둘이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쯤은 물론 다비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곁에 두었던 것은 재하가 좋은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작가가 아닐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사진을 가장 좋아하는 팬이었고, 작품을 이해하는 깊이가 남들보다 뛰어난 녀석이었다. 어떤 때는 자신의 뇌와 연결이 되어 있는 것처럼 기가 막히게 제 사진을 해석하는 녀석이 좋았고, 그런 녀석이 자신을 따를 때 보이는 마음이 좋았다.
그래서 싫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사귀는 것만 아니라면 정말 평생을 곁에 두고 싶은 녀석이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정리하고 형, 동생 사이로 지내려고 했는데, 거절당한 녀석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조금 불편해지고 있었다.
“재하야, 우리 그냥 형, 동생처럼….”
“대체 어떻게 해야 형이랑 사귈 수 있어요? 뭐든 말해주면 형한테 다 맞출 수 있어요.”
“글쎄 그러니까…. 후, 답답하네. 내가 게이긴 하지만, 남자라고 다 좋아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나도 취향이라는 게….”
다비의 말에 재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재하의 주위에 물음표가 마구 생기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갑자기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은 표정에 다비는 턱을 치켜들고 재하를 바라보았다.
“왜. 뭐.”
“형. 남자 좋아했어요?”
“…이건 또 뭔 소리야. 알고 들이대는 거 아니었어?”
재하는 전혀 몰랐다는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 몰랐다. 독심술을 하지 않는 이상 타인의 성 정체성을 어떻게 알아본단 말인가.
다비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다비는 지난 7년간 사귀는 사람이 없었다. 가끔 펍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그저 촬영뿐인 지극히 바쁘고 건전한 생활을 했다. 사귀는 사람이 없었으니 게이라고 의심할 부분이 전혀 없었다. 그저 다비가 혼자라는 사실에만 기뻐했는데 게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사귀자고 말할걸. 잠깐, 그럼 더 좋은 거 아니에요? 나도 남자잖아요.”
“내 말은 조금도 안 듣지?”
“듣고 있어요. 듣고 있으니까 이런 결론이…. 어? 취향….”
재하는 무언가 깨달은 듯 울상을 지었다. 다비가 게이라면, 자신이 고백했을 때 돌아오는 게 있어야 했다. 그런데 다비는 그동안 무심하고 덤덤하게 굴었다. 갑자기 지난 시절이 떠올라서 설움이 밀려왔다. 자신은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고백해서 조심스럽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취향 때문이라니. 만약 작고 아담한 사람이 다비의 취향이라면, 자신은 이미 글러 먹었다. 그나마 다비와 비슷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던 열일곱 살에 사귀자고 말이라도 꺼내 볼 걸 그랬다며 뒤늦게 후회됐다.
하지만 후회하기엔 마음이 너무 깊어졌고,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왔다.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형, 취향 그거 바뀌라고 있는 거예요. 제가 형의 취향이 될 수도 있잖아요. 고작… 겉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 거라면 다시 생각해주면 안 돼요?”
“너, 취향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몰라서 그래? 취향이 맞아야 살도 비벼보고 싶고, 살을 비벼야 속궁합을 알게 되고, 속궁합이 맞아야 연애도 길어지고…. 아, 애를 붙잡고 내가 뭔 소리를. 아무튼, 나한테 너는 처음 만났던 열일곱 살 유재하로 보여. 취향이니 뭐니 따지기 전에 너는 남자로 안 보인단 소리야.”
다비가 저를 어린 취급하는 것은 몇 년째 듣는 소리라 그다지 타격이 없었다. 나이는 아무리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문제라서 이제 재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 거로 입씨름하느니 차라리 실속 있는 대화를 하는 편이 나았다.
“저는 형을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형밖에 없어요.”
“재하야, 너는 내가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지. 예쁜 사랑을 하라고. 훈이랑 리온이처럼 서로 죽고 못 사는 그런 사랑 말이야.”
둘의 만남에는 ‘훈과 리온’이라는 인물이 사이에 있었다. 고훈과 유리온. 재하와 다비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었다. 고훈은 다비의 불알친구고, 유리온은 다비의 친구이자, 재하의 친삼촌이었다. 훈과 리온은 연인 사이였고, 이 둘 때문에 다비와 재하가 만날 수 있었다.
다비는 훈과 리온의 연애를 곁에서 지켜보았다. 그래서 그 둘이 얼마나 예쁜 사랑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둘의 사랑을 동경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은 그런 사랑을 할 수 없으니 연애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비는 재하도 그런 사랑을 하길 바랐다. 연애할 마음이 없는 자신은 그런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재하는 훈과 리온의 이야기가 나오자 더 이해하지 못하겠단 얼굴로 설득하려 들었다.
“전 그걸 형하고 하고 싶어요. 형과 죽고 못 사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고요.”
“우린 안 된다니까. 넌, 그냥… 팬심이 넘쳐서 그러는 거야. 내 사진을 좋아하는 마음을 착각하는 거라고.”
“그걸 헷갈릴 만큼 바보는 아니에요. 형 사진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사진하고 사랑하는 거 아니잖아요. 나는 형과 사귀고 싶다고….”
“내가 그럴 마음이 안 생겨.”
완강한 거절이 계속되자, 재하는 정말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분명 다비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문자를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보냈는데도 한 번도 싫다고 말한 적 없었다. 연락해서 보자고 하면 그때마다 꼬박꼬박 만나주었다. 무엇보다 좋아한다고 말을 꺼냈을 때, 싫어하지 않고 발그레하게 물든 얼굴은 진심이었다.
“나는 형이 내 첫사랑이고 끝사랑이었으면 좋겠어요. 첫 연애도, 첫 키스도, 첫 섹스도 전부 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재하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다비는 우는 사람에게 약한 사람이었다. 진심으로 내치려면 매몰차야 하는데, 매몰차지도 못해서 지금까지 자신에게 끌려온 사람이었다. 아마 울고 있다고 생각하면, 다비는 곧장 다정한 목소리로 저를 보라고 달래며 손수건을 건네줄 것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아는 다비는 그래왔으니깐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손수건을 건네주지도 않고, 다정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평소와 다른 반응에 다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버릴까 봐 조금 무서워진 재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다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렇다고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고, 어딘가 조금 오묘한 표정이었다.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질색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에 궁금증이 든 재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왜 그래요?”
“너… 총각이야?”
“네? 그거야 당연히… 결혼 안 했으니까.”
“아니, 그거 말고 동정이냐고. 진짜? 경험 없어? 아니, 왜? 너 인기 진짜 많잖아. 첫 키스도 안 했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심 가득한 표정에 재하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절 받아주지 않는데, 제가 누구에게 처음을 줘요. 그러니까 제 고추는 형이 책임져야 해요.”
“…결론이 왜 거기로 튀냐?”
“저 열일곱 살 때부터 형이 그랬잖아요. 고추 떼라고. 그러니까 제 고추는 형이 떼줘야죠.”
조용하고 한적한 카페의 2층이라 누가 대화를 들을 리는 없었지만, 다비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살피며 질색했다.
“미친, 아니.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그 ‘떼라.’라는 말이 그럴 때 쓰는 게 아니잖아. 혼혈인 나보다 네가 더 해석이 엉망이면 어떻게 하냐?”
“저 열세 살에 유학 가서, 한국말 잘 못해요.”
“지랄하네. 한국말 존나 잘하면서 못하는 척하지 마라.”
다비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는 것은 마음이 흔들릴 만큼 당황했단 소리였다. 조금만 더 당기면 되겠다. 이쯤에서 재하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사실 최후라고 하기에는 자주 써먹었지만, 이것만큼 다비의 마음을 흔들어대기 좋은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다비의 약한 마음을 이용하고 싶을 만큼 절실했고, 다비를 좋아했다.
재하는 눈썹을 팔(八)자로 툭 떨구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코를 훌쩍거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전 형밖에 없어요.”
“아, 진짜. 울지 좀 말라고.”
눈물을 보이자 재하가 예상한 대로 다비는 질색하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덩치 큰 녀석이 우는 것만큼 꼴 보기 싫은 장면이 없는데, 이상하게 재하가 울면 더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징그러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마음을 긁을 수도 없는데 긁고 싶어질 정도로 어딘가 간지러워지는 기분이 들어 재하가 우는 게 싫었다. 저만 보면 눈이 고장 난 것처럼 울어대는 녀석 때문에 재하를 만날 때면 꼭 손수건을 챙기게 되었다. 다비는 잽싸게 손을 뻗어 재하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한 번만 더 울면 정말 고추 떼버…. 하, 미친.”
“봐요. 내가 떼달랬나. 형이 떼준다고 했잖아요.”
“아오. 돌아가시겠네.”
자신의 말버릇을 완전히 곡해한 재하 때문에 다비는 속이 타는 듯, 커피의 얼음을 입에 털어 넣고 와그작 씹어대며 한숨을 내뱉었다. 재하는 다비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계속 훌쩍거렸다.
넘어와라. 제발… 넘어와라, 김다비.
흑, 훌쩍 소리가 들리자, 다비가 욕을 내뱉으며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흐트러트렸다. 할 수만 있다면 마음을 꺼내서 박박 긁고 싶을 정도로 재하의 눈물에 약한 자신이 이 순간만큼은 조금 질리려고 했다. 하지만 자기혐오보다 재하를 달래주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앞섰다.
“아, 좋아. 고추 떼.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질질 짜. 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다비가 결국 넘어오고야 말았다. 역시 자주 써먹어도 필살기는 필살기였다. 이렇게 쉽게 넘어올 줄 알았으면 다비가 카페로 들어와 제 앞에 앉는 순간부터 울 것을 그랬다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우는 타이밍이기 때문에 재하는 기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계속 눈물을 흘리며 다비의 마음을 흔들기로 했다.
“저, 정말요? 형이 진짜 제 고추 떼….”
“대신, 연애 같은 감정은 바라지도 말고 기대하지도 마. 난 연애 안 한다고 했어.”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재하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다비를 보았다.
“네? 사귀지도 않는데, 고추를 어떻게 떼요?”
“뭐긴. 하루만 자자는 거지. 씹. 이런 거 진짜 싫어하는데 너니까 내가 이런 결심까지 하는 거다.”
“저, 저도 싫어요. 제가 형을 몇 년을 좋아했는데, 결과가 그거라뇨. 하루만 자자고요? 내가 그렇게 싫어요?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내가 형을 궁지로 몰아넣은 거예요? 어떻게 그런 말을….”
이번엔 진짜 서럽고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다시 쏟아졌다. 이런 결과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하룻밤? 연애도 아니고 하룻밤을 보내려고 지금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차라리 혀를 깨물어도 너하고는 섹스 못 하겠다는 소리를 듣는 게 나을 정도였다. 그런 말 하지 말고 다시 생각해달라고 설득해야 하는데, 너무 마음 아픈 소리라 말이 나오지 않고 자꾸 목이 멨다.
“형이… 어떻게….”
“재하야.”
다비는 한숨을 내쉬다 자리에서 일어나 재하의 옆으로 가 앉았다. 녀석의 넓은 등을 토닥이며 눈물에 푹 젖은 손수건으로 재하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욱해서 한 말이긴 하지만, 이렇게 서럽게 울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네 마음 모르는 거 아니야. 알고 있어. 그런데 나는 연애 안 해. 그래서 계속 너한테 다른 사랑을 하라고 했던 거야. 네가 나한테 무슨 환상을 가진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우리는 이 관계에서 더 나아갈 방법이 없어. 미안하다, 재하야. 네 탓이 아니야. 이건 내 문제야. 그러니까 그만 울자. 응?”
다비는 이런 사람이었다. 매정하게 말을 뱉고 욕을 하지만 마음은 연두부보다 더 물렁물렁하고 다정했다. 울먹이는 걸 싫어하면서도 정작 우는 사람에게 한없이 약해져서 순하게 굴었다. 이렇게 약하게 구니까 자꾸 필살기를 써먹게 되는 것이다. 재하는 다시 다비의 다정함을 이용하기로 했다.
“형을 좋아하게 된 지 거의 7년이에요. 하룻밤은 너무하잖아요. 연애하는 거 싫다면, 100일만 저한테 줘요. 생떼 부리는 거 알지만, 이렇게 매달릴 만큼 형을 너무 좋아해요. 그러니까 100일…. 100일만 저한테 주면 안 돼요? 100일 후에도 저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하면, 그땐 정말 포기할게요.”
“후, 너 진짜 자꾸….”
욱하던 다비가 곧장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등을 토닥이는 손은 계속됐다. 고민 중이란 소리였다. 재하는 다비의 고민이 끝날 때까지 눈물을 쥐어짰다. 슬픈 일을 별로 겪지 못해서 잘 우는 편은 아니지만, 다비를 생각하면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콸콸 쏟아지는 게 제 눈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흘린 눈물은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한참을 달래며 토닥이던 손이 멈추고 다비의 말이 이어졌다.
“진짜 100일이면 돼?”
“네.”
더는 바라지 않겠다는 짧은 대답에 다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어차피 그쯤에 나도 촬영 있어서 더 늘리자고 해도 못 늘려.”
“고마워요, 형.”
“연애하자는 소리 아니야. 100일 동안 섹스 파트너 같은 거야.”
“네. 그거면 됐어요. 지금은….”
재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재하는 이미 축축해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훌쩍거렸다. 이거라도 얻은 게 어디냐 싶어 간간이 웃음도 살포시 터져 나왔다. 100일이면 충분했다.
“형, 고마워요.”
“울면서 웃지 마, 인마. 보기 싫어.”
다비는 물러터진 제 마음이 보기 싫었지만, 재하의 웃는 모습은 보기 좋아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언론에 알려진 첼리스트 유재하는 저렇게 웃지 않았다. 항상 적당히 보기 좋은 미소를 보이는 녀석이 꼭 제 앞에서만 저렇게 해맑게 웃었다. 100일이면 저 녀석도 미련 없이 마음을 접을 수 있겠지. 그 후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녀석의 웃음을 더 지켜줄 수 있게 됐으니 다행이지 않냐며 다비는 행복 회로를 돌렸다.
“그만 울고 일어나. 밥 먹으러 가자.”
“형, 저 할 말 있는데요.”
“뭔데?”
“창피하지만, 솔직히 제가 사귀자고 하면 형이 그러자고 할 줄 알았어요. 형하고 사귀자마자 여행 가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여행 준비 다 했었는데….”
“사귀는 거 아니라니까. 여행은 무슨….”
“사귀는 거 아니라는 거 알아요. 섹… 스 파트너 기념으로 같이 여행 가는 건 안 돼요?”
“미친, 그런 것도 기념하고 그러냐? 나 그런 거 싫어하는데.”
“기념은 핑계고, 제 소중한 첫 경험을 그저 그런 곳에서 대충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형이 싫다면 취소는 하겠지만, 정말 좋은 곳이라서 형도 보면 좋아할 텐데….”
다비는 잠깐 정색했지만, 이내 수긍했다. 낭만적인 뭐, 그런 분위기는 정말 자신의 취향과 멀었지만, 지금까지 봐온 유재하는 음악가라서 그런지 감수성 예민하고 지독한 낭만주의자였다. 연애도 못 해주는데, 그런 거라도 맞춰 줘야 녀석의 미련이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재하의 환상 속 김다비가 어떤 식으로 자리 잡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자신을 겪어보면 100일도 채우지 못하고 알아서 떨어져 나갈 것이란 계산도 있었다.
“그래. 그러자. 여행 가지, 뭐.”
“그럼 지금 가요. 여권 있죠?”
“어? 어. 여권은 있어. 그런데 지금?”
“새벽 비행기라서요. 그리고 형 촬영 스케줄도 없죠?”
“없…. 있는데?”
“없잖아요. 저도 스케줄 없어요. 형 스케줄에 맞춰서 제 공연도 다 빼뒀거든요.”
재하와 문자를 너무 많이, 오래 주고받았더니 이런 부작용이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재하가 또 울기 전에 들어주는 게 나았다. 정말로 재하가 우는 것만큼 보기 싫은 건 없으니까 형인 자신이 넓은 마음으로 녀석을 받아주기로 했다.
“그래. 가자, 가.”
“네.”
재하가 헤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의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아 다비는 재하의 팔뚝을 툭 치며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 그런데 이 카페는 사람이 이렇게 없는데도 장사가 된다? 매번 여기서 너 만날 때마다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기분 탓이겠죠. 여기 SNS에 자주 올라오는 카페던데요.”
“그래? 커피가 맛있긴 하다만은…. 뭐, 카페 사장 걱정을 내가 왜 해. 밖에 있는 거 네 차 맞지?”
“네. 얼른 가요. 식당 예약해놨어요.”
계단을 내려가는 다비를 보며 재하는 입꼬리를 올리며 느슨하게 웃었다. 다비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다비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 억지로 울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 카페가 자신의 명의라는 것도, 다비를 만나기 위해 지었다는 것도, 다비를 만나는 날에는 쉰다는 것도 계속 모를 것이었다.
그런 건 몰라도 상관없었다. 다비가 알아야 하는 것은 자신의 진심 하나면 됐다. 100일을 허락한 순간부터 시작이었다. 100일이면 착하고 여린 다비의 마음을 제게로 돌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100일간의 섹스 파트너, 아니, 계약 연애가 시작됐다.
***
저녁을 함께 먹고, 재하는 자신의 차에 다비를 태우고 공항 쪽으로 이동했다.
“내일 새벽 비행기라서 근처 호텔을 예약했어요. 괜찮죠?”
“…이미 예약해놓고 이제 와서 허락을 구하는 건 어느 나라 예의야? 그리고 새벽 비행기면 그냥 공항에서 좀 기다려도 되는데, 돈 아깝게….”
“형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쉬었으면 좋겠어요. 추석 쇠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온 거잖아요. 오지도에서 서울 올라오는 것도 피곤했을 텐데, 여행 가는 곳도 꽤 멀거든요.”
“얼마나 좋은 곳으로 가기에 이렇게 난리야.”
“꽤 좋은 곳이요. 저야 형하고 있으면 어디든 좋지만요.”
들떠 있는 말투와 기분 좋아 보이는 재하의 표정에 다비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같이 저녁을 먹고 공항으로 향하는 동안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섹스 파트너라는 말을 꺼낸 건 자신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실망하라고 한 말이었다. 7년 가까이 짝사랑한 순정의 대가가 섹스 파트너라면 보통 상대방에게 실망하거나 분노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동안 수절하며 지킨 동정을 애정 없는 행위로 날리는 게 결코 좋은 일은 아닐 텐데, 재하는 연애라도 시작한 것처럼 설레 보이기까지 했다.
다비는 순진한 저 미소에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짜증이 났다. 자신의 고향 친구인 고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속이 좀 꼬여 있어. 착한 놈인데. 그러지 마. 넌 행복해도 되는 녀석이야. 이제 그만 행복해져라.’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신이 착한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속이 꼬였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선택이 꼬여서 나온 행동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내일은 분명 후회할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재하가 하자는 대로 따르는 것은 꼬여 있는 자신의 마음이 먼저 동했기 때문이었다.
“너 섹스 파트너가 뭔지는 알지?”
“네. 그거 모를 정도로 어리고 순진하진 않아요.”
“그래? 너무 기뻐하길래 모르는 줄 알았다. 내가 너 먹고 버린단 이야기인데 그렇게 웃음이 나와?”
일부러 가시 돋친 말을 건네는데도 재하는 전혀 타격받지 않은 표정이었다.
“형이 좋다면 전 지금 이 관계를 뭐라고 불러도 좋아요. 단순히 친하게 지내려면 제 마음을 굳이 말하진 않았을 거예요. 제가 꾸준히 형 좋아한다고 말했으니까, 형이 이 관계까지 와준 거잖아요. 그러니까 섹스 파트너든, 연인이든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어요.”
재하는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섹스 파트너든, 연인이든 상관없었다. 어떤 호칭이 붙어도 다비는 자신이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다비를 밀어낼 수 없으니 무조건 당기고 또 당길 생각이었다. 이쪽에서 당기다 보면 언젠가 끌려오겠지. 끌려오는 순간부터 이 관계는 다시 바뀔 거란 계산만 있었다. 그러니 다비가 정한 호칭 같은 건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100일 동안 둘의 관계가 더 친밀해지고 깊어질 방법을 찾는 게 현재 재하의 가장 큰 고민일 뿐이었다.
“형이 중간에 절 버리지만 않으면 돼요.”
오늘 만나서 재하와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던 다비는 괜히 뜨끔했다. 사귀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어째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녀석이 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한 선택이었다. 우는 게 보기 싫어서 여기까지 왔음에도 저 미소가 울음으로 바뀌는 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정말 속이 많이 꼬인 모양이었다.
“너나 질려서 도망가지 마라.”
“그럴 리가요.”
“글쎄.”
다비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고, 차는 예약해둔 호텔로 조용히 향하고 있었다.
***
호텔로 들어서는 순간에도 재하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들뜬 얼굴이었다. 그에 반해 다비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둘이 함께 잔 적은 여러 번 있었다. 지인들과 함께 여행을 갔을 때라든가, 입대했을 때 면회를 와서 근처 펜션을 잡고 놀았던 적도 있었다. 그때는 아무 일도 없었고, 형과 동생 같은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심란했다.
상황은 변했지만, 재하의 시선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았다. 저가 좋아 죽겠다는 그 시선을 지금까지 외면했는데, 이제는 그 시선을 마주해야만 했다.
“훈이랑 리온이처럼 예쁜 사랑을 하라고 했더니….”
선택할 기회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재하가 선택한 것은 결국 섹스 파트너였다. 어쩌면 자신이 그렇게 만든 걸지도 모르겠다. 저 순진한 녀석은 자신이 거절하자 오기로라도 섹스 파트너를 고른 걸지도 모른다. 정작 제안한 자신은 섹스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침대에서 한참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재하를 본 다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침대만 보고 있으면 뭐가 나오냐?”
“네? 아니요.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형, 군대에 있을 때 우리 잠깐 모텔에 왔었잖아요. 그때 형 머리 짧았던 것도 잘 어울렸는데, 이런 생각 하고 있었어요. 아, 지금도 정말 멋있어요.”
“됐고. 일단 좀 씻자. 10월인데 왜 이렇게 더운 거야. 추석 지났으면 좀 쌀쌀해져야지.”
“씨, 씻으려고요? 벌써요?”
당황한 재하의 목소리에 표정을 본 것도 아닌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쉽게 상상이 갔다. 거봐라. 쫄았으면서 센 척은. 자신이 씻고 오는 동안 겁먹어서 자는 척이라도 해주면 고마울 텐데.
다비는 불가능한 바람을 가져보며 욕실로 향했다.
다비가 씻고 나왔을 때, 재하도 다른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잠들었기를 바랐는데 아무래도 잘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비는 얕게 한숨을 쉬며 재하에게 향했다.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다비의 두뇌는 과부하에 걸릴 만큼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무를 수 있지 않을까. 정떨어지라고 한 소리에 네가 덥석 낚인 거야, 이 망상어 같은 녀석아. 아니, 이렇게 유들유들하게 굴지 말고 차라리 겁을 주는 건 어떨까. 미친 척하고 곧바로 실전으로 들어가면 싫어할지도 모른다. 막상 남자 몸을 마주하면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고 여기고 알아서 포기하지 않을까.
복잡한 머리만큼 복잡한 표정을 지은 다비는 소파에 앉아 있는 재하의 옆자리에 앉았다. 재하는 눈에 보일 만큼 깜짝 놀라며 몸을 흠칫거렸다. 대충 훑어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녀석을 보자 다비는 무모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보기로 했다.
“재하야.”
“네, 형.”
“넌 나하고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연애? 아니면 섹스?”
재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전 형이 하고 싶은 거라면 다 좋아요. 그게 뭐가 됐든. 아, 100일 동안 섹스 파트너 하자는 거 취소하는 것만 빼고요. 연애면 좋겠는데, 형이 그건 싫다고 하니까 지금은 형이 원하는 대로 섹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게 네가 바라는 거다. 뭐, 이런 소리지?”
“네.”
“내가 원하는 거라….”
다비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유재하를 겁먹게 하면서 울리지 않을 방법이라, 뭐가 있을까. 다비가 고민하는 동안 재하는 다비의 분주한 손가락을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제 손가락을 씹어 먹을 것 같은 시선에 다비는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고 재하를 쳐다보았다.
“좋아. 일단 꿇어.”
“…네?”
다비의 손가락에 집중하던 재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다비와 눈을 맞췄다. 제 사전에 누군가가 자신을 감히 무릎 꿇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니, 더욱 낯선 소리였다. 그것과 별개로 진지한 표정과 강압적인 억양으로 ‘꿇어.’ 하고 내뱉는 다비의 모습은 오싹할 정도로 보기 좋았다.
스웨덴인인 어머니와 한국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누가 보아도 혼혈임이 분명한 다비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잘생긴 외모였다. 재하는 다비의 모든 것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다비의 눈을 제일 좋아했다.
깊은 아이홀, 짙은 쌍꺼풀과 긴 속눈썹, 그 안에 자리 잡은 헤이즐넛 색의 맑은 눈동자. 모두 사랑하고 좋아하지만, 외향보다 시선을 더 좋아했다. 여전히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그의 눈을 너무나 사랑하고 또 사랑했다. 그런 눈이 자신을 보며 강압적이면서도 야한 시선을 주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시선에 재하는 온몸이 기분 좋게 오싹거렸다. 그래서 못 들은 척 “네?” 하고 다시 묻자, 다비는 재하를 응시하다 바닥으로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꿇으라고.”
재하는 얼른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저 시선이 계속 자신에게 향한다면 무릎을 꿇는 것도,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재하가 순순히 무릎을 꿇자, 다비는 팔짱을 풀고 재하의 뺨을 어루만졌다. 뺨을 어루만지는 다비의 손길에 재하는 팔뚝이 저릿하고 오싹거려 저절로 눈이 감겼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만지면 불쾌하기만 한데, 다비가 저를 만지는 건 처음부터 좋았다. 이대로 뺨을 내려쳐도 기분 좋아서 다른 뺨도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려주면 좋겠다니, 그런 성향도 아닌데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상대가 다비이기 때문이었다.
재하의 뺨을 어루만지던 다비의 손이 턱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오더니, 다비의 엄지가 재하의 입술에 닿았다. 입술을 아무렇게나 짓뭉개는 손길에 재하가 슬쩍 눈을 떴다. 다비가 내려다보는 시선이 어딘가 야릇해 재하의 입이 멋대로 벌어졌다.
“형.”
입을 벌리고 말하려던 순간, 다비의 손가락이 재하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재하는 다비의 손을 깨물지 않으려고 일시 정지한 것처럼 멈췄다. 벌어진 틈 사이로 다비가 엄지를 더 밀어 넣어 재하의 혓바닥을 지그시 누르며 비볐다. 혀를 비벼대던 손가락이 이번엔 치열을 훑기 시작했다. 입을 다물 수 없자 저절로 침이 고여 들었다. 하지만 다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엄지로 조금 더 사납게 혀를 비비며 짓눌렀다.
“더 벌려.”
재하는 다비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더 벌렸다. 저만 봐주는 다비의 시선이 너무 좋아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비는 그런 재하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껄렁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원하는 거? 내가 하려는 게 이런 거야, 재하야.”
입 안을 마구 헤집던 손이 빠져나갔다. 재하는 얼른 입을 다물고 침을 삼켰다. 다비가 뭘 원하는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제 입 안을 헤집던 다비의 손이 허리로 향했다. 재하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다비의 허리로 향했다. 다비는 소파에 앉은 채,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벌어진 틈 사이로 보이는 속옷이 눈에 들어오자, 재하는 그제야 다비가 뭘 하려는 건지 뒤늦게 알아차렸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아 재하는 연신 눈을 깜빡였다. 머리 위에서 다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 벌려야지.”
버클만 열어둔 채, 다비는 재하에게 명령했다.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는 질색이었지만, 나름 머리를 쓴 결과였다. 유재하는 살면서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 없는 녀석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알던 유재하는 이렇게 취급하면 자존심 상해하며 질색하거나, 겁을 먹을 것이 분명했다. ‘형, 이건 아닌 거 같아요.’ 하고 울먹이면 ‘장난이야, 새끼야.’ 하면서 등이나 팡 때려주고 달랠 생각이었다. 그럼 녀석은 훌쩍이며 앞으로 이런 건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겠지. 그게 다비가 원하는 결말이었다.
그런데 재하가 얌전히 입을 벌렸다. 다비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어버렸다.
“너 지금 내가 뭐 하려는지 알고 입 벌리는 거냐?”
입을 벌린 채 재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비의 다리 사이에 시선을 던진 후, 다비와 눈을 맞췄다. 알아들었다는 시선도 시선이지만 기대하는 듯한 표정에 다비의 미간이 조금 구겨졌다. 이쯤에서 겁을 먹고 물러나야 하는데 생각했던 것과 달리 반기는 모습이 못마땅했다.
“씹. 눈 감아.”
이번에도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하자, 기가 막혔다. 너무 순순한 태도에 소름까지 끼쳤다. 잠시 착각했다. 재하가 자신에게만 한정적으로 순종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아마 죽으라고 하면, 죽는시늉이라도 할 만큼 말이다.
이 방법이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다비는 다시 앞을 정리하고, 재하의 뺨을 손으로 가볍게 톡톡 쳤다.
“눈 떠. 설마 내가 진짜 하려고 했다고 생각해?”
“…네? 안 할 거예요? 전 괜찮은데, 오히려 좋아….”
“네가 그렇게 반기니까 하기 싫어졌어. 일어나.”
키스도 안 해봤다는 놈의 순결한 입에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저녁에 먹은 한정식이 지독하게 얹힌 것 같았다. 시작은 자신이 했지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못 해 먹겠네. 진짜.”
다비는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쌌다. 재하는 무릎을 꿇은 채로 다비에게 말을 건넸다.
“형, 왜 그래요? 제가 뭐 잘못했어요? 시키는 대로 다 한 것 같은데.”
“재하야, 다시 생각하면 안 되겠냐? 여행은 같이 가줄게. 그런데 섹스 파트너는 역시 아닌 것 같아.”
“왜요? 제가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경험이 없어서?”
“그게 아니라, 너는 리온이 조카잖아. 리온이는 내 친구고. 친구 조카한테 이러는 거 이상해. 내가 너하고 붙어먹으면 앞으로 훈이하고 리온이를 어떻게 봐. 지금도 죄책감 장난 아니라고.”
훈은 오랜 불알친구이고, 고향인 오지도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성향을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재하와 가까운 사이기도 했다. 훈과 연애하고 있는 리온 역시 친한 친구이고, 유재하는 그 녀석의 조카였다. 그 관계에 자신까지 끼어들면 그야말로 개족보가 따로 없었다.
“아,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걔들은 거의 부부 같은 애들인데. 그래, 너희들 서로 시조카니 뭐니 해가면서 족보 정리도 했잖아. 내가 너하고 붙어먹으면 훈이는 나한테….”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훈이 형하고 다비 형이 서로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요. 훈이 형이 시켜서 제가 형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형이 왜 죄책감을 느껴요? 형 처음 만나기 전부터 저는 형 팬이었어요. 지금 못 하겠다고 말한 이유가 단지 그것뿐이라면, 저는 문제 될 거 없다고 봐요. 신경도 안 쓰고 있고, 형도 신경 쓸 이유 없고요.”
“유재하.”
다비가 정색하며 짧게 이름을 부르자, 재하는 가슴이 따끔거리고 마음이 아팠다. 여기서 몰아붙이면 다비는 더 거부할 것이 분명했다. 이럴 땐 차라리 마음 약해지게 불쌍한 척하는 게 더 효과가 있었다. 재하는 주먹을 꽉 쥐고 심호흡한 후, 다비를 보며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 어차피 여행은 갈 거잖아요. 여행 가서 다시 생각해요. 형이 내킬 때까지 제가 참아볼게요. 새벽에 일찍 나가야 하니까 먼저 자요. 전 다른 침실에서 잘게요.”
다비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재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조심스럽게 닫힌 문을 보고 다비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고 일어나면 후회할 것 같다고 했던 생각은 틀렸다.
벌써 후회되기 시작했다.
***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자마자 다비는 후회했다.
거절당해서 상처받고 엉엉 우는 녀석이 불쌍해 보여 어울려준 것치고는 너무 휘말린 기분이었다. 100일의 연애, 아니 섹스 파트너를 기념하는 미친놈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했더니, 여기 있었다.
남태평양 어디인 건 알겠는데, 당최 어디로 가는지 재하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가보면 안다는 말만 하고 계속 생글거리기만 했다. 공항에 도착한 후 경비행기로 40분을 날아가더니, 경비행기에서 배를 타고 또 이동하기 시작했다. 배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보이는 것이라고는 바다뿐이었다. 생태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다비는 이런 경로가 익숙해서 그런지 여행이라기보다는 오지로 촬영 가는 기분이었다. 이런 오지에서 첫 경험을 하고 싶다는 낭만적인 또라이가 옆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배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다비는 재하를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대체….”
“섬이요.”
“응. 눈이 있으면 이게 섬인지, 육지인지 구분할 수 있어. 내가 묻는 말은 왜 우리가 이 섬에 있느냐는 거지.”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섬은 자연경관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얀 모래사장과 쨍한 색감의 맑은 바다, 높은 하늘과 끝도 없이 펼쳐진 야자수. 지구의 아름다움을 찍는 게 직업이라 경관이 좋다는 곳을 꽤 다녀봤던 다비조차 생경할 정도로 이곳은 정말 태초의 낙원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설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제대로 된 숙소가 있는 걸 보니 오지는 아니고 관광지인 것 같았다. 제대로 된 숙소라고 하지만, 눈에 보이는 숙소는 딱 하나뿐이었다.
“숙소는 저게 다야? 넌 이런 걸 어떻게 다 알았냐?”
“형하고 오랜 시간 같이 있고 싶어서 준비했어요. 주어진 시간이 100일밖에 안 되니까, 1분 1초라도 형하고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요. 여기라면 형하고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잖아요.”
“아, 네. 그래서 섬을 빌리셨어요?”
“아뇨? 샀는데요?”
“…뭐? 샀다고?”
유재하는 17살에 프로 연주자로 활동을 시작해서 24살이 된 지금은 세계적인 첼리스트였다. 동시에 한국에서는 알아주는 대기업 Y·F그룹의 로열패밀리기도 했다. 그 말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돈이 아주 많다는 소리였다. 당연하게 씀씀이가 클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섬을 볼수록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이건 좀 해도 너무했다. 단둘이 있고 싶어서 섬을 샀다는 사고방식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비는 정색하며 재하의 등짝을 손으로 후려쳤다.
“야, 이…. 돈이 썩어나냐? 네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게 다 네 돈이야? 부모님이 주신 돈을 이렇게 막 써도 돼? 내가 널 그렇게 키웠어?”
“우와, 형. 지금 제 재산 상황까지 걱정해주는 거예요? 조금 감동할 것 같아요.”
“됐고. 환불해. 아니, 환불이 되는 건가? 미친놈아, 무슨 스케일이….”
“생각보다 비싼 건 아닌데….”
“얼만데?”
“백오십….”
다비는 손을 들어 재하의 입을 막았다. 이걸 150만 원에 샀을 리는 없으니, 재하의 입에서 나오지 못하고 막힌 단위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신도 남부럽지 않게 부족한 거 없이 누리며 살았고 지금도 잘 벌지만, 출발선부터 다른 태생의 씀씀이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부자라더니, 생각보다 더 부자였나 보다.
“아니. 정말 섬을 샀다고? 고작 며칠 있겠다고?”
재하를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시민인 다비는 너무나도 그 돈이 아까웠다. 이런 외딴 섬을 살 돈이 있으면 서울에 건물을 사고 말지.
다비의 생각을 알아차렸다는 듯 재하가 눈을 예쁘게 휘며 웃었다.
“단순히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고, 투자한 거예요. 여기서 요트 타고 20분만 나가면 관광지로 개발된 섬에 우리 그룹 리조트가 있거든요. 고모할머니가 리조트랑 호텔 사업하셔서. 저하고 형이 떠나고 나면, 이 섬은 고모할머니가 빌리기로 되어 있어요. VIP 손님 중에서 이런 프라이빗 리조트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지금 고용된 사람들도 리조트 쪽 직원들이에요. 뭐, 오픈 전 시범 운영? 같은 거로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겠어요? 전 임대료 받는 거니까, 엄연히 따지면 투자한 거죠.”
“아, 그런 거라면…. 그래도 스케일이 어마어마하네. 이런 데서 쉬겠단 사람도 대단하고, 이런 사업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아무튼 네가 아주 생각 없는 건 아니었구나. 고모할머니께서 봐주시는 거라면, 사기는 아니겠네.”
다비가 안심하는 동안 재하는 제 입술에 달라붙어 있는 다비의 손바닥 감촉에 수줍어하며 얼굴을 붉혔다. 이런 와중에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다비의 마음이 좋았고, 지난밤에 잠깐 일어났던 일 때문에 어색해서 거리를 둘 줄 알았던 다비가 먼저 스스럼없이 예전처럼 등을 때려줘서 좋았다.
“다른 걱정하지 말고, 형은 그냥 즐겁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재하의 뜨거운 숨결에 다비가 흠칫하며 얼른 손을 떼어냈다. 한숨 쉬는 버릇은 좋지 않은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꾸 한숨이 나왔다. 말이 여행이지 감금이나 다름없었다. 이곳까지 자신을 날라준 배는 벌써 떠났고, 분위기상 재하가 부르지 않으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작정한 티가 팍팍 나는 분위기에 기분이 가라앉으려고 했던 다비는 얼른 최대한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뭐, 아무튼 네가 그 짓거리가 겁나 하고 싶다는 건 이해했다. 고추가 그렇게 떼고 싶었구나.”
“…그건 아니에요. 아니,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지만, 그게 전부인 것처럼은 말하지 말아요.”
“어디서 시무룩한 척이야. 아무튼, 이왕 온 거 어쩌겠냐. 내가 즐겨볼 수밖에. 그러려고 데려온 거라며. 여기서 얼마나 머무를 거야? 열흘?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섬이 그렇게 큰 것도 아니고.”
재하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백….”
다비는 다시 손을 들어 재하의 입을 틀어막았다. 녀석의 표정이 100시간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100일을 이렇게 좁아터진 섬에서 다 보낼 생각이었단 이야기에 긍정 회로를 돌리고 있던 다비의 머릿속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다비는 재하의 팔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팔을 부러트리면 병원으로 곧장 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첼리스트의 팔을 부러트리는 건 너무 심한 처사 같았다. 다비는 재하의 다리를 노려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튼튼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저 다리를 걷어차면 자신이 입을 데미지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때릴 데가 저렇게 많은데 때릴 곳이 없어서 문제였다.
다비는 끓어오르는 성질을 일단 다스리고 다시 협상에 나섰다.
“한 달. 그 이상은 싫어.”
“하지만….”
“한 달.”
“…네.”
재하의 약속을 받아내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다비는 재하의 입에서 손을 떼어내고 짐을 챙겼다.
“숙소는 정말 이거 하나뿐이야? 설마 이것도 원래는 없었는데, 네가 돈 들여서 새로 지은 건 아니지?”
“아니에요. 원래 개인 휴양 섬이었는데, 싸게 매물이 나와서 산 거예요.”
“싸게…. 어, 그래. 일단 들어가자. 덥다.”
재하와 다비가 선착장에서 움직이자, 먼발치에서 둘을 지켜보고 대기하던 버틀러가 성큼 다가와 두 사람을 반겼다. 버틀러는 현지인이었지만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적어도 섬 생활이 어렵진 않아 보였다. 버틀러와 인사를 나눈 후, 그의 안내를 받아 숙소로 들어갔다.
바깥과 달리 실내는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했다. 시원한 곳으로 들어오자 기분이 한결 나아져서, 다비도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조금 생겼다.
개인 휴양 섬이었다더니 숙소는 별장에 가까웠다. 실내는 2층으로 되어 있었고, 매우 넓었다. 바다와 곧바로 이어지는 야외 풀장과 야외 식당도 있었다. 다비가 중앙 거실에서 내부를 둘러보는 동안 재하는 버틀러와 간단하게 일정을 이야기한 후 다비에게 다가왔다.
“형, 2층이 방이에요. 저녁에 2층 테라스에서 보는 풍경이 예쁘다네요.”
“아, 그래. 올라가자.”
다비가 짐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자, 재하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뒤를 졸졸 따랐다. 메인 침실이라는 걸 바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침실로 들어가는 문부터 양문형이었다. 문을 벌컥 연 다비가 안으로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고 우뚝 멈췄다. 재하는 굳어 있는 다비에게 바짝 다가왔다.
“형, 왜요? 방이 마음에 안 들어요?”
“…설마, 저것도 네가 해달라고 한 거냐?”
“어떤 거요? …어?”
다비가 손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아주 넓은 침대가 있었다. 침대 위에는 하얀 꽃과 빨간 꽃이 흩뿌려져 있었고 시트 중앙에는 장미로 거대한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다비는 질색하며 재하의 표정을 살폈다. 재하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비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온다고 말했더니, 저렇게 준비해주셨나 봐요. 꽃이 참 예쁘네요. 꼭 신혼여행….”
“뭐래. 일단 놀자. 놀자고 온 건데 놀아야지.”
다비는 짐 가방에서 편한 옷을 꺼내고 그 자리에서 입고 있던 옷을 훌렁 벗었다. 재하는 몸을 움찔거리다 다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옷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소리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 형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일부러 이러는 건가?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그랬다. 좋아한다는 말을 했음에도 곁을 무방비하게 허락했다.
조심해달라는 말을 건네면 나른하고 잘생긴 미소를 지으며 ‘네가 날 어떻게 해보려고?’라는 말로 자신을 시험했다. 어린애 취급을 멈춰달라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더 당당하게 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정말 목적이 다른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대놓고 말했는데도 다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성적 대상으로 전혀 보지 않는 취급은 괜찮았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재하는 자신을 다잡았다.
“형. 여기 스쿠버 다이빙 하기 좋은 곳이래요. 스노클링 하기도 좋고요. 사유지였던 곳이라 관광지하고 다르게 오염이 덜 돼서 희귀한 물고기도 많대요.”
“그래? 수중 카메라 가지고 올걸.”
다비가 아쉬운 소리를 내며 티셔츠를 갈아입고 재하를 쳐다보았다. 조신한 몸짓으로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귀 끝을 물들이고 있는 재하가 보였다. 다비는 한쪽 눈썹을 씰룩이며 픽 웃었다.
“너 뭐 하냐?”
“형이 오, 옷 갈아입고 있어서…. 눈 둘 곳이….”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닌데, 새삼?”
“지금은 다르니까요.”
아, 그랬지. 다비는 머쓱해서 목덜미를 쓸며 눈썹을 으쓱였다. 그동안 친한 동생으로 대하다 보니 갑자기 바뀐 관계가 적응하기 어려웠다. 계속 이러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 다비는 재하를 가만히 불렀다.
“옷 다 갈아입었으니까 고개 들어도 돼. 그리고 재하야.”
“네.”
“계속 그렇게 나 의식하면 종일 피곤해. 밤까지는 안 건드릴 테니까 너도 편하게 놀아. 그래야 나도 편하게 놀지.”
재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식해주면 좋겠는데, 의식하지 않고 놀고 싶단 말이 서운했다. 하지만 다비에게 그런 말을 했다가는 더 자신에게 벽을 칠 것 같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네. 그럴게요. 대신 밤엔 같이 자요.”
“올라오면서 보니까 방 겁나 많더만, 꼭 같이 자야 해?”
“그러려고 온 거니까요.”
“난 섹파하고 같이 안 자.”
그런 거 없었으면서…. 거짓말인 걸 아는데도 마음 아픈 소리였다. 자신과 조금도 잘될 생각이 없다는 단호한 말에 조금 씁쓸해졌다. 하지만 조급해하면 다비가 더 경계할 것 같으니,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엔 이골이 나 있었다. 재하는 마음을 다잡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 가방을 손에 쥐었다.
“그래요. 그럼, 전 다른 방에서 잘게요. 아, 수중 촬영 가능한 카메라는 제가 준비해놨어요. 형이 쓰는 장비가 어떤 건지는 잘 몰라서, 시중에서 파는 거로 샀어요. 여기 정말 예쁜 곳이라서 형이 사진 찍고 싶어 할 것 같았거든요. 그러니까 낮에는 형 말대로 놀러 온 것처럼 지내요. 전 일단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올게요.”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더니 재하가 서둘러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말을 너무 심하게 해서 상처받은 게 아닌가 걱정됐다. 딱히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녀석의 행동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마음이 약해지려던 다비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다비가 재하를 거절하는 이유는 정말로 재하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자신이 문란한 게이였다면 재하와 벌써 침대에서 뒹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훈과 리온을 핑계로 삼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복합적인 이유로 본의 아니게 날을 세우고 철벽을 치자니 어디에도 말 못 할 사정이라 자신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팔자에도 없는 섹스 파트너라니. 환장하겠네.”
가만히 있으면 마음이 다시 심란해질 것 같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언제 이런 시설을 이용할까 싶어 사진으로 남기려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형. 아, 사진 찍으려고요?”
“어? 아니야. 기다리기 심심해서….”
몸에 딱 달라붙는 래시가드를 입고 들어온 재하를 보고 다비는 하던 말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눈으로 재하를 훑어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자신과 엇비슷했던 녀석이 훌륭하게도 성장했다. 새끼, 잘 컸네. 허벅지 무슨 일이야. 어깨하고 가슴…. 눈으로 재하를 빠르게 스캔하던 다비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재하는 이미 다비가 자신을 살펴봤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호의적인 시선에 조금 기분 좋아져서 재하는 우쭐거리며 슬쩍 다비를 떠보았다.
“형. 형이 좋아하는 취향은 어떤 거예요?”
“내 취향?”
“네. 저는 취향 아니라면서요. 그럼 형은 어떤 사람이 취향인가 싶어서요.”
다비는 자신이 게이라는 자각은 있지만, 딱히 취향에 따라 사람을 가리는 건 아니었다. 연애할 마음도 없고 원나잇은 성격에 맞지도 않아서 취향을 따로 정해둔 적도 없었다. 굳이 따진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곧 취향인 쪽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은 현재 없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거리감이라면 재하…. 다비는 얼른 생각을 멈추고 아무 말이나 던졌다. 재하와 전혀 다른 타입으로 아무나….
“흠, 글쎄. 딱히 취향이랄 건 없지만, 당장 떠오르는 건, 뭔가 작고 예쁜… 그런…. 리온이 같은?”
다비의 입에서 상상도 못 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재하의 표정이 묘해졌다.
“…형. 우리 삼촌 좋아했어요?”
“아니. 그냥 리온이는 작고 귀엽잖아. 성적 매력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리온이 같은 녀석이 좋다는 소리였지. 뭔가 옆에 있으면 챙겨주고 싶고 막 그런 애잖아.”
“형, 우리 삼촌 좋아했구나. 훈이 형도 알아요?”
“아, 미친.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라니까. 리온이는 그냥 예쁘고 귀여우니까 누구나…. 이 새끼가 나와 훈이의 16년 우정을 파탄 낼 생각인가.”
삼촌인 리온은 처음에 사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사귀고 나면 마음이 저절로 향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어떤 뜻으로 말한 건지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에 자신의 삼촌 이름이 나온 건 충격이었다. 일단 자신은 삼촌과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다. 다비가 말했듯이 리온은 예쁘고 귀엽고, 체형까지 아담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다비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다. 예쁘고 귀엽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이기도 했고.
“형이 예쁘고 귀여운 사람을 좋아한다면, 제가 형 앞에서는 귀엽고 예쁘게 굴어볼게요. 저는 안 돼요? 저도 삼촌하고 같은 핏줄이니까 잘 뜯어보면 삼촌하고 어디 닮은 구석이 좀….”
“돌았어?”
다비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어이없는 소리라서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재하는 깔끔하고 단정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첼리스트면서 첼로로 연주가 아닌 운동을 한 건지, 덩치는 저보다 훨씬 좋았다. 저 얼굴에 저 몸으로 귀엽고 예쁘게 군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때려치워. 하기만 해봐. 내 눈을 찔러버릴 테니까.”
“아까는 잡아먹을 것처럼 제 몸을 막 훑어봤잖아요. 그래서 난 내가 조금이라도 형 취향일 줄 알았는데, 삼촌 이름이 나오니까…. 비슷하진 않아도 맞춰보려고.”
“리온이는 리온이고, 너는 너지. 그냥 생각났던 게 리온이였던 거야. 오해하지 마. 그리고 내가 언제 널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봤냐? 자의식 과잉이네? 그렇게 네 몸에 자신 있어?”
말은 그렇게 해놓고 다비의 눈은 다시 바쁘게 재하의 몸을 훑었다. 음악 하는 녀석이 이렇게까지 몸이 좋아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다부진 몸이라서 저절로 눈이 주인을 배신하고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눈이 배신한 것도 모자라 입도 주인을 배신하고 저절로 움직였다.
“너 첼로로 운동하냐?”
“첼로로 운동하는 건 아니지만, 따로 시간 잡아서 운동해요. 혹시 이런 몸 좋아해요?”
“어. 어? …아니? 그냥 관리 잘한 몸이란 생각이 들어서 물어본 거야. 다른 생각한 건 아니고.”
평소보다 입꼬리가 느슨하게 풀어진 다비의 표정을 보고, 김다비의 스토커…, 아니, 열혈 팬인 재하는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런 몸 좋아하는구나. 그동안 열심히 운동한 보람이 있다며 자신을 칭찬했다.
“제 몸이라도 좋아해줘서 정말 기뻐….”
“아, 아니라고. 아무튼, 낮에는 정말 놀기만 하는 거다? 알았냐?”
“네.”
“그럼 얼른 나가서 놀자.”
재하에게 속내를 들킨 기분이라 다비는 얼른 아래층으로 향했다. 재하는 헤실 웃으며 다비의 뒤를 졸졸 따랐다.
***
군락 주변은 물빛이 하늘색이었다. 수면 위에서도 속이 다 비칠 정도로 맑은 하늘빛 물을 재하가 요트 위에서 감탄하듯 내려다보았다. 물론 재하가 보는 것은 자연의 풍광이 아니라 물속에서 인어처럼 움직이는 다비의 모습이었다.
“국내로 여행 갔으면 이렇게 형 구경하진 못했을 텐데. 멀어도 여기로 오길 잘했다.”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섬 출신이라 그런지 다비는 별다른 장비 없이도 물속을 편하게 돌아다니며 마음껏 움직였다. 재하는 수영과 거리가 멀어 그저 요트 위에서 구경만 하는 신세였지만, 다비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곧장 섬 탐사에 나섰다. 공연 때문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도 주로 연습실에 머무르거나 도시 관광이나 하는 재하와는 다르게 오지를 누비는 다비는 적성을 찾은 듯 정말 열심히 즐겼다. 다른 사람이 보면 재하 쪽이 끌려온 사람이라고 오해할 정도였다.
저녁이 되자 다비는 숙소 2층에서 아름다운 노을과 붉게 물든 바다를 카메라에 담았다. 재하는 노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노을에 젖어 카메라를 들고 있는 다비만 바라보았다. 이 순간이 좋았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다비의 시선이 좋았고, 카메라를 들고 있을 때 입가에 머무는 미소가 좋았다. 무의식에서 나오는 순수한 진심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흘러넘쳤다.
“형, 정말 좋아해요.”
“…그래. 아, 아니지.”
재하의 말에 다비가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보람차게 하루를 보내느라 여기에 온 목적을 잊고 있었다. 섹스 파트너 기념 여행. 낮에는 형, 동생처럼 지내고 밤에는 몸으로 어울려주기로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 했다.
“일단 좀 씻자. 너도 가서 씻고 와.”
“네. …네?”
재하는 깜짝 놀랐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종일 밖에서 놀았으니 씻는 게 당연한 건데, 음흉한 생각이 먼저 들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비가 무슨 생각을 했기에 얼굴이 그 모양이냐고 물을 것 같아, 재하는 “씻고 올게요.” 하고 외침과 동시에 다른 방에 있는 욕실로 튀어 나갔다.
얼굴이 새빨간 채로 도망가듯 나가는 모습이 제법 하찮아서 다비는 피식 웃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노곤해질 때까지 씻고 나왔다. 푹신한 재질의 목욕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오자 재하가 편한 옷을 입은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긴장한 듯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고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혼나기 직전의 모습으로 보여 조금 안쓰러웠다. 저렇게 하찮은 걸 보면 이상하게 귀엽단 생각이 들어서 조금 곤란했다. 얼마나 긴장했으면 욕실에서 나오는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까 싶어 다비는 재하를 가만히 부르며 다가갔다.
“재하야.”
“네. 네? 헉? 형 언제 나왔어요?”
화들짝 놀라며 용수철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재하의 행동에 다비가 더 놀라서 몸을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뭐야. 누가 잡아먹는대? 뭘 그렇게 놀라?”
“아, 긴장했나 봐요.”
저보다 한 뼘은 더 큰 녀석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뺨을 붉히고 있는 걸 보자 괜히 나쁜 놈이 된 기분이었다. 섹스 파트너를 제안한 건 자신이었지만, 그거라도 좋다며 수락한 건 재하였다. 이럴 거면 왜 하겠다고 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고 싶을 정도로 진지했던 건가.
다비는 침대에 걸터앉아 재하를 쳐다보았다.
“재하야, 이리 와.”
다비의 부름에 재하는 곧장 다가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재하의 행동에 당황한 건 다비였다. 놀란 눈으로 제 밑에 조신하게 무릎을 꿇은 재하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씰룩거렸다.
“너, 뭐 하냐?”
“…네?”
“왜 무릎 꿇고 있냐고.”
“페, 펠라티오 시키려고 부른 거….”
“아니야. 넌 대체… 무슨….”
재하를 나무랄 입장은 아니라 다비는 입을 다물었다. 한국에서 먼저 이런 분위기를 만든 건 자신이었다. 뭔가 인간쓰레기가 된 기분이 들어 마음이 불편했다. 하찮고 저밖에 모른다는 모습은 정말 주인한테만 충성하는 진돗개보다 한 수 위일 게 분명했다. 다비는 무릎 꿇고 앉아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재하를 내려다보며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귀엽긴.”
“…저 방금 귀여웠어요? 어디가 어떻게 귀여웠는지 말해주면 제가 참고할….”
“일단 옆에 앉아.”
다비가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자, 재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비의 옆에 걸터앉았다. 다비는 재하 쪽으로 몸을 틀었다.
“재하야.”
“네.”
“네가 처음이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처음부터 심한 걸 시키거나 요구할 생각은 없어. 우선, 네가 나한테 제대로 반응하는지부터 확인해보자.”
“형한테 반응….”
재하는 다비의 말을 곱씹어 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말한 ‘좋아한다.’가 여전히 사진작가를 좋아하는 팬이라거나, 아는 형을 좋아하는 동생의 입장이길 다시 확인하겠다는 의미라는 걸 깨달았다. 대체 언제까지 17살 유재하로 볼 생각인지.
“전 자위할 때 형 생각하면서 해요.”
“…하지 마. 허락도 없이.”
“지금까지 야한 상상은 전부 형이었어요.”
“…그, 그랬냐?”
노골적으로 그런 말을 할 줄 몰라서 잠깐 당황했지만, 다비는 곧바로 정신을 다잡았다.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어야 재하에게 휘둘리지 않을 테니까 이것만큼은 제 뜻대로 되어야 했다. 자신도 그리 경험이 많지 않고, 꽤 오랫동안 혼자였던지라 얼마나 주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경험조차 없는 놈한테 밀릴 수는 없었다. 조금 소란스러웠던 마음을 빠르게 다스리고 다비는 능글맞고 잘생긴 미소를 지으며 재하와 눈을 맞췄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어. 섹파라고 무조건 넣고 흔들다 싸고, 끝. 이런 거 할 생각 없으니까 천천히 하나씩 해보자는 이야기야. 이해했어?”
다정한 말에 재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비가 기특하단 눈을 하고 웃으며 재하의 손을 잡았다. 재하가 깜짝 놀라며 잡힌 손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옆에 앉은 순간부터 기분 좋게 풍겨오는 바디 워시의 향과 젖어 있는 머리카락, 목욕 가운 틈으로 보이는 다비의 상체와 허벅지 때문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정신이 금방이라도 가출할 것만 같았다.
“형.”
“손만 잡아도 좋으냐?”
“네. 좋아요.”
“뽀뽀라도 해주면 기절하겠네?”
“뽀, 뽀뽀 해주려고요? 정말요?”
아니. 대답과 함께 다비는 손을 뻗어 재하의 뒤통수를 감싸고 앞으로 잡아당겼다. 버티는 거 없이 순순히 끌려온 재하에게 다비가 입을 맞췄다. 말캉하고 따뜻한 감촉이 느껴지자마자 곧바로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이 재하의 입술을 핥았다. 재하가 얼떨떨한 얼굴로 멍하니 있자, 다비가 입술을 살짝 뒤로 물리고 낮게 소곤거렸다.
“입, 벌려야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재하의 입술이 벌어지자 다비가 몸을 일으키며 입술을 다시 부딪쳐왔다.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꽉 맞물린 채, 벌어진 틈새로 혀를 밀어 넣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재하의 눈이 감겼다. 자신의 입 안을 헤집는 부드러운 감촉에 온몸이 오싹거렸다. 손을 들어 다비를 꼭 붙잡아 제 몸에 바짝 당기고, 다비의 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모든 세포가 입 안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예민해졌다. 움직임을 놓치고 싶지 않아 재하는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젖은 소리가 입 안에서 울리며 귓가로 빠져나갔다. 다비의 혀가 스치는 곳마다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다비가 입술을 살짝 떼어내고 “숨 쉬어.”라고 이야기한 후 다시 입을 맞췄다. 다시 막힌 입으로 숨을 쉴 수가 없어, 재하는 코로 호흡하며 다비의 키스에 집중했다.
잠시 후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다비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재하는 순식간에 허전해진 감각을 느끼며 눈을 떴다.
첫 키스 상대가 다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쉽게 이루어져서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키스해달라고 먼저 말을 꺼내면 미쳤냐면서 발로 걷어차일 것 같단 생각만 했지, 먼저 해주리라 생각하진 못했다. 너무나 다비다운 갑작스러운 키스에 뒤늦게 심장이 쿵쿵거리고 눈앞이 일렁거렸다.
“형, 정말….”
울먹이는 목소리와 함께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자, 조금 전까지 키스를 해주며 웃어주던 다비가 정색했다. 목욕 가운 소매로 재하의 눈가를 닦아주며 혀를 쯧, 하고 찼다.
“아, 뭐냐. 왜 또 울어. 키스 싫어하냐?”
“아니. 아니요? 형이 해준 키스인데, 제가 싫어할 리 없잖아요. 형이 키스해줄 줄은 정말 몰라서…. 정말 몰라서… 감격해서 우는 거예요.”
그냥 키스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보일 수가 있나 싶어서 다비는 조금 민망해졌다. 낭만적인 녀석들의 반응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것으로 보여 다비는 재하의 눈물을 닦아주며 피식 웃어주었다.
“나 그렇게 매몰찬 사람 아니야. 섹파라고 해서 정말 정 없이 섹스만 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네가 말한 그 기간은 어울려줄 만큼 어울려줄 테니까, 벌써부터 질질 짜고 그러지 마. 얼른 뚝 해. 고추 떼… 아니. 그만 울어.”
“그럼, 백 일 동안 계속 뽀뽀하고 키스해줄 거예요?”
“…어? 뭐, 그렇지?”
“다행이다. 이걸로 끝이라고 할까 봐 걱정했어요. 고마워요, 형.”
“고맙긴….”
어느새 눈물을 뚝 그치고 배시시 웃는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귀엽지도 않은 녀석이 조금 귀여워 보여 쓰다듬어 주었더니, 재하가 다비를 슬그머니 붙잡아 제 품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형, 이번엔 제가 형한테 키스해도 괜찮아요?”
“어. 괜찮아. 오늘은 키스만 하자. 첫날부터 너무 진도 빼면 남은 날 재미없잖아.”
“네. 형이 천천히 하고 싶다면 전 괜찮아요.”
재하는 다비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입을 맞췄다. 그리고 혀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다비는 재하의 키스에 혀를 얽으며 응해주었다. 서툰 입맞춤이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재하의 입맞춤은 다비의 입맞춤과 닮은 듯했지만, 더 집요하고 끈질겼다. 다비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재하를 달래듯 등을 토닥이며 받아주었다.
재하의 첫 키스 상대가 재하를 받아줄 수 없는 자신이라 조금 미안한 밤이었다.
***
‘우리 다비, 정말 예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거 알지?’
다비는 자다가 헉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너무나 끔찍한 꿈을 꿨다. 잊고 지내도 한 번씩 불쑥 튀어나오는 그 악몽은 여전히 다비를 괴롭히고 있었다. 자주 꾸는 꿈은 아니었지만 꾸고 나면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바깥에서 잔잔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완전히 깨지 않았는지 오지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갑자기 온몸에서 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씨발.”
목이 따끔거리고 속이 울렁거려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를 붙잡고 불쾌한 기분을 쏟아 내려 했지만, 목에 턱 걸린 듯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변기를 붙잡은 손이 유난히 창백했다. 다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면대에 붙어 있는 거울을 보았다.
지난밤 재하가 끈질기게 물고 빨아댄 입술이 유난히 빨갛고 부어 있다는 것을 빼면, 거울에는 누가 보아도 잘생긴 김다비가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다비는 안심하며 거울에 비친 자신을 향해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뉘 집 자식인지 몰라도 잘생겼네.”
농담처럼 말하는 다비의 표정은 진지했다. 잘생긴 자신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차피 이 기분으로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일어난 김에 다비는 악몽으로 인해 흘린 땀을 씻어내기로 했다.
샤워 후 다비는 밖으로 나왔다. 더운 나라지만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산책하기 좋은 온도였다. 숙소에 있는 야외 풀장으로 나가 연결된 바다로 향했다. 조용한 새벽 바닷가에는 파도 소리만 잔잔하게 들렸다. 푹신한 모래의 감촉을 느끼며 아직은 어두운 해변을 거닐었다.
잔잔한 파도 소리에 생각이 밀려들었다. 인생에서 삭제하고 싶은 유일한 시간이 다비를 괴롭혔다. 지우려 할수록 선명해지는 기억 때문에 다비는 그저 다른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때까지 해변을 걸었다.
악몽을 다시 꾸게 된 건 재하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마음을 보였을 때부터였다. 그 후로 연례행사처럼 고백하는 재하 덕분에 매년 한두 번씩은 옛 기억을 악몽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정말 별거 아닌 일이 제 딴에는 크나큰 상처가 됐는지, 이런 꿈을 꾸고 나면 꿈을 꾸게 만든 무의식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정작 본체인 자신은 행복한데, 무의식은 왜 구덩이를 파고 있는 건지. 무의식을 꺼내서 씻어버릴 수도 없고 아직도 그런 기억에 휘둘리는 자신이 조금 한심해졌다.
‘다비야,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절친인 고훈은 볼 때마다 제게 그런 소리를 했다. 그럴 때마다 피식 웃으며 항상 행복하다고 말했지만, 훈이 놈은 믿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자신이 살면서 불행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화목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자랐고, 쌍둥이 누나인 모아와도 여느 남매처럼 사이좋게 지냈다. 스무 살 터울의 늦둥이 막냇동생은 보기만 해도 내 새끼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세상 시름이 전부 사라지는 행복감만 가득했다.
인복도 이 정도면 복에 겨울 정도로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지낸다. 거기에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으니 나름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돈이 없어서 궁하고 결핍된 삶을 산 것도 아니었고, 부족한 것 없이 살았다. 몸도 튼튼하고 건강하기만 했다. 이 이상 더 행복할 수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데, 훈은 언제나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훈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훈은 가족들도 모르는 자신의 흑역사를 알고 있는 유일한 녀석이었다. 그러니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응원해주는 녀석이라는 건 알지만, 자신과 재하를 엮으려는 짓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하가 너한테 좋아한다고 말도 했다며. 그런데도 네가 아직까지 걔하고 연락하는 거면 너도 아주 싫은 건 아닌 거 같은데, 왜 아니라고 해? 네가 내 행복을 빌어주듯 나도 너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어.’
훈이 했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아 다비는 저도 모르게 혀를 쯧, 하고 차며 미간을 구겼다.
재하.
7년 가까이 자신을 한결같이 좋아한 녀석이었다. 자신의 사진전이 어느 나라에서 열리더라도 재하는 반드시 그곳에 찾아와 감상을 줄줄이 늘어놓고 사라지곤 했다. 촬영 때문에 오지에 몇 달씩 처박혀 있어도 꾸준히 연락하는 녀석은 재하가 유일했다. 만날 때마다 유재하의 세상에 김다비밖에 없는 것처럼 굴어대는 녀석을 싫어할 만큼 매정한 성격은 아니었다. 다비가 첫 연애 이후로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 것도 나름 자신을 좋아하는 재하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다.
매정하다고 하기에는 자신은 너무 다정했다. 다정하고 물러터져서 재하의 찬란한 인생이 저로 인해 무너질까 두려웠다. 앞길이 창창하고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녀석에게 자신이 오점이 될 것 같아 무서웠다.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좋은 사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지난 시간, 그토록 견고하게 벽을 쳤음에도 재하는 한결같았다.
이런 관계가 되는 것이 무서웠다. 몸을 섞는다면, 분명 재하를 지금 이상의 감정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를 또 사랑하기에는 연애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그 과거가 너무나 괴로웠다. 그 비틀어진 마음이 유재하의 첫사랑을 더럽힐까 두려웠는데, 결국에는 재하가 하자는 대로 휘둘리고 있었다.
“100일….”
다비는 걸음을 멈추고 재하가 자는 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자려나.”
끈질기게 달라붙었던 지난밤이 떠오르자 입술이 따끔거렸다. 다비는 혀를 내밀어 잔뜩 부어오른 입술을 핥았다. 아랫입술이 정말 찢어졌는지 쓰리고 따가웠다.
재하하고 키스해서 그런 꿈을 꾼 건가. 아니면 경고인가.
그때, 풀장 쪽 테라스에서 재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다비 형!”
악몽을 꾼 건 자신인데 무슨 일인지 달려오는 재하의 얼굴이 더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재하가 다비를 꽉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으로 쿵쿵 뛰는 재하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후끈한 체온과 함께 바디 워시 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다비는 어딘가 어색하고 간지러운 기분에 재하를 손으로 슬쩍 밀어내며 틈을 만들었다.
“뭐야. 이 시간에 안 자고 왜 일어났어.”
“형이 사라지는 꿈을 꿔서… 방에 갔는데, 정말로 안 보여서요. 계속 찾다가 혹시나 해서 테라스로 밖을 봤는데 형이 바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어요.”
재하의 말에 자신의 발을 적시는 파도가 느껴졌다. 어디를 걷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없긴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직 어두운 새벽에 물가를 거닐고 있는 걸 발견했으니 재하가 놀란 게 조금 이해가 됐다. 다비는 재하를 토닥이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농담을 건넸다.
“왜. 네가 감금했다는 자각은 있냐? 내가 막 도망가고 그럴 거 같았어? 네가 미안하긴 한가보다. 그런 꿈을 꾼 걸 보면.”
“…….”
농담이었는데, 정곡을 찌른 모양인지 재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다비를 더 꽉 붙들어 품에 바짝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뭐야. 진짜 감금할 생각이었냐? 왜 갑자기 사과를….”
“좋아해요, 형. 그러니까 갑자기 사라지지 말아요.”
세상에 무서울 거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녀석이 불안해하고 있었다. 산책 두 번만 나갔다가는 발에 족쇄라도 채울 것같이 구는 녀석 때문에 다비는 재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내가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하면, 나갈 거잖아. 그렇지?”
“…네.”
“그런데 뭘 걱정해.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겁은 많아가지고. 진짜 고추 떼…, 아니. 아무튼, 네가 뭘 무서워하는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사라지고 잠수 타는 일은 없어. 나 촬영 들어가기 전에 너한테 꼬박꼬박 보고했는데도 내가 못 미덥냐?”
“믿어요. 제가 형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어요.”
말로는 그렇다면서 숨이 막힐 정도로 끌어안고 놓아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
여전히 알 수 없는 의문이 머리를 맴돌았다. 그런데도 묻지 못하는 것은 이유를 듣고 나면 마음 약해져서 이 녀석을 받아주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순적인 마음에 이 녀석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유재하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무의식이 그딴 악몽으로 나타나 마음을 다잡게 됐다. 그러니까 그 악몽은 자신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였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라고.
다비는 일단 재하를 달래기로 했다.
“내가 말했잖아. 여기서 즐겨보겠다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정말 계속 있을 거죠?”
“어.”
“그래도 불안해요. 형하고 같은 방에서 자면 안 될까요? 이런 기분으로는 또 악몽 꿀 것 같아서 혼자 못 자겠어요.”
진심인 듯 촉촉이 젖은 목소리에 또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이런 감정이 싫다는 걸 알면서도 약해지는 게 자신이었다.
“그래. 알았어. 옆에서 자. 해도 안 떴는데, 우리 지금 밖에서 뭐 하냐. 일단 들어가자.”
“네.”
그제야 저를 숨 막히게 감싸던 팔에 힘이 풀렸다. 다비가 먼저 몸을 틀어 실내로 향하자 그 뒤를 재하가 졸졸 따랐다.
“그런데 형은 이 시간에 왜 밖에 있었어요?”
“그냥.”
재하는 스스럼없이 악몽을 꿨노라고 말했지만, 다비는 악몽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얼버무린 건데 눈치 빠른 재하가 먼저 다비의 손을 붙잡았다.
“형,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왜. 악몽이라도 꿨을까 봐? 내가 너냐. 얼른 올라가자. 발 찝찝해. 씻고 자게.”
말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알아차리고 재하가 손을 놓자, 다비는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욕실에서 소금물에 축축하게 젖은 발을 깨끗이 씻어내고 나왔더니 재하는 벌써 제 침대에 누워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비는 재하의 옆에 누웠다. 혼자일 때는 더럽게 넓던 침대가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것만으로도 좁아졌다. 재하가 다비의 옆에 바짝 붙자 다비는 재하에게서 등을 돌리고 누웠다.
“옆에 붙어서 헛짓거리하면 다시 쫓아낸다. 나 잘 거니까 뽀뽀 같은 거 하지 말고. 얌전히 자.”
“…하면 안 돼요?”
“어. 안 돼. 잘 거니까 너도 얌전히 자.”
“네. 그럼 끌어안는 건요?”
“내가 죽부인이냐?”
“그냥 안고 자고 싶어서요. 다비 형처럼 잘생긴 죽부인 있으면 하나 사고 싶긴 하네요. 잠은 정말 잘 올 것 같아요.”
“뭐래, 진짜. 헛소리 말고… 그냥 안고 자든지.”
허락이 떨어지자 재하는 다비의 몸에 팔을 둘러 바짝 잡아당겼다. 등 뒤로 느껴지는 재하의 몸이 조금 낯설어서 잠깐 몸을 굳혔다. 재하는 다비에게 바짝 붙은 채 말을 건넸다.
“열여섯 살 때, 삼촌이 갑자기 제 방에 첼로를 두고 사라졌었던 일이 있었어요. 지금이야 삼촌이 왜 그랬는지 알고 있지만, 그때는 정말 이유를 몰랐거든요. 목숨처럼 아끼던 첼로를 제 방에 두고 말도 없이 한국으로 삼촌이 사라졌을 때. 저 정말 무서웠어요.”
“아, 그 이야기 기억난다. 그래서 리온이 찾으러 우리 섬으로 네가 온 거잖아. 그때 너 진짜 싸가지 없었는데.”
“맞아요. 그랬어요. 다비 형이 사람 만들어놨죠. 아무튼, 그때 삼촌이 사라졌을 때 좀 충격이 컸었나 봐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갑자기 옛날이야기를 꺼낸 건가 했더니, 불안해진 원인을 말하기 위해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재하는 자신을 만나기 전까지, 삼촌인 리온을 제 세상으로 여겼다고 했다. 남이 보기엔 그냥 삼촌 덕후에 스토커 기질도 좀 있었지만, 어쨌든 재하는 태어나면서부터 제 곁에 함께 있던 삼촌을 따라 첼로를 시작할 정도로 리온을 좋아했었다. 지금은 그 세상이 자신인 것 같지만, 리온을 좋아한 것과는 다른 의미로 좋아한다는 건 이제 구분할 수 있었다.
다비는 재하의 손을 토닥여 주었다.
“난 리온이처럼 갑자기 카메라 두고 사라지는 짓은 안 할게. 그리고 사라져도 너라면 몇 시간 안에 찾아낼 것 같아서 좀 무섭다. 너 내 사진만 보고 우리 섬 찾아낸 거잖아.”
“형이 찾지 말라고 하면 참아야죠. 대신 말은 해주세요. 갑자기 사라지지만 말고.”
“이 자식이. 말없이 안 사라진다고 몇 번을 말해. 그런 소리 할 거면 빨리 잠이나 자. 나 이제 진짜 졸려.”
악몽을 꾼 날은 밤을 새우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누군가 곁에 있어서 그런지 다시 잠이 찾아왔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게 이렇게 안심되는 일이라니, 이건 나쁘지 않았다. 다비는 재하에게 안긴 채로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재하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깊게 잠든 다비를 조용히 내려다보며 전신을 눈으로 훑어 내려갔다. 발목에서 시선이 멈춘 재하는 다비의 발목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다비와 섬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쭉 이어진 관계지만, 각기 다른 나라에서 활동하느라 1년에 한두 번 잠깐 만나고 헤어지는 게 다였다.
인연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자신이 일방적으로 보내는 문자 폭탄 때문이었다. 가끔 통화할 때도 있었지만, 문자의 수가 훨씬 많았다. 그러다 100일을 쭉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좋은 만큼 하루가 사라지는 게 더 불안해졌다.
재하는 다비의 발목을 손으로 가만히 감싸 쥐었다. 이대로 발목을 부러트리고 싶었다. 그러면 촬영도 그만두고 계속 내 옆에 있어 줄 텐데. 평생 나만 봐줬으면 좋겠다. 자신과 다르게 다비는 언제든 미련 없이 사라질 것 같아서 불안했다.
진심 가득한 눈으로 한참 동안 발목을 만지던 재하는 손을 거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다비가 알면, 저를 싫어할 게 분명하니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피사체를 아름답게 보는 시선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이런 나쁜 마음은 앞으로도 보여줄 생각 없었다.
재하는 다시 자리에 누워 다비를 꼭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시원하고 달콤한 향을 느끼면서 재하도 잠을 청했다.
“좋아해요, 형. 미안해요.”
고립된 섬인데도 다시 눈을 뜨면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워 재하는 다비에게 바짝 붙은 채 잠이 들었다.
***
재하는 첫날 약속했던 대로 낮에는 아는 동생처럼 평범하게 어울려주었다. 나중에 VIP 전용 프라이빗 리조트가 될 거라더니, 시설이 꽤 나쁘지 않았다. 버틀러를 비롯해 요리사, 하우스키퍼에 마사지사와 개인 트레이너까지 섬에 있는 관리인 숙소에 머물며 둘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보조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럭셔리 휴양이었다.
다비는 며칠 만에 현지인이 된 것처럼 섬의 모든 것을 누리고 있었다. 직업 자체가 오지에 틀어박혀 촬영하는 일이다 보니 집보다 밖,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체질이었다.
해양 스포츠를 즐긴 후,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며 운동을 하거나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섬 깊숙한 곳을 탐험하기도 했다. 오후에는 스파와 마사지를 즐기며 일정을 마무리할 만큼 부지런했다. 속된 말로 뽕을 뽑을 기세로 섬의 모든 것을 즐기고 있었다. 현지인으로 구성된 스텝들까지 다비의 넘치는 에너지를 칭찬할 정도였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이벤트를 기획한 재하였다. 첼로에 놀라울 정도의 천재성을 보이며 13살에 오스트리아 음대에 입학해 17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독일로 넘어가 프로 연주자의 길을 걸었다. 24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이미 첼리스트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그는 느긋한 휴식이라는 것이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삶을 살았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노는 것은 제법 하지만, 이런 식으로 놀아보는 건 처음이라 재하는 그저 다비를 따라다닐 뿐 제대로 즐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축 늘어진 재하를 딱한 눈으로 보며 다비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게, 적응도 못 할 거면서 이런 데를 왜 와.”
“형이 즐거우면 됐어요.”
“같이 놀아야 재미있지. 넌 바다에 오면 하찮아지잖아. 기억 안 나냐? 넌 섬에서 아주 최약체야. 수영도 못하고, 낚시도 못하고. 그런 놈이 무슨 깡으로 섬으로 여행을 잡아.”
과장이 아니라, 재하는 바다에서 유독 하찮았다. 섬에 찾아온 재하를 데리고 처음 선상 낚시를 했던 때가 떠올랐다.
낚시가 처음이라던 녀석은 미끼로 쓰이는 갯지렁이를 보자마자 하얗게 질려 바닥에 주저앉아 파들파들 떨며 기겁했었다.
‘이, 이게 미끼예요?’
‘어. 처음 봐?’
‘…네.’
다비는 장갑 낀 손으로 몸통이 긴 갯지렁이를 반으로 똑 뗐다. 손가락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갯지렁이를 보며 재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인상을 구겼다. 섬에서 자란 다비는 재하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세상 무서운 것 없는 것처럼 굴던 싸가지 없던 녀석이 고작 이런 거에 겁을 먹는 게 제법 웃겨서 더 장난스럽게 굴었다.
‘완전 싱싱하지? 이거 나하고 훈이가 여기 오기 전에 뻘 삽질해서 잡아 온 거야.’
‘이걸요?’
‘만져볼래?’
‘아니요. 아뇨. 으으. 아니요.’
코앞까지 갯지렁이를 들이밀자 재하가 고개를 저으며 엉덩이로 뒷걸음질 쳤다. 그게 재미있어서 몇 번을 같은 행동을 했더니 결국 재하가 눈물을 찔끔 보였다. 눈물이 맺히는 걸 보자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래서 도시 촌놈은 안 된다며 결국 다비가 재하의 낚싯대에 미끼를 꿰어줬었다.
‘다, 다비 형!’
고기를 낚던 순간에도 하찮은 녀석이었다. 재하의 낚싯대가 갑자기 호를 그리며 크게 휘어지자 재하가 화들짝 놀라며 낚싯대를 붙잡고 울상을 지었다. 낚였으면 건질 것이지 무슨 보물단지라도 된 것처럼 낚싯대를 품에 안고 덜덜 떨기에 보다 못한 다비가 재하를 달래며 낚는 방법을 알려줘야만 했다.
‘재하야. 침착해. 꽉 잡아. 아니야. 들어 올리지 말고 옆으로. 아, 옆으로 대를 눕히라고. 줄 끊어진다.’
‘이거 뭐예요? 고래예요?’
‘여기 고래 안 살아. 아, 미친. 내가 도와줄게.’
‘으으. 나 끌려갈 거 같아. 나 수영 못하는데. 어, 어떡하지?’
‘네가 끌려갈 덩치냐. 진정 좀 해.’
그때의 재하는 저와 비슷한 체구였는데 호들갑이 어마어마했다. 이러다 애 또 울겠다 싶어 고기까지 대신 낚아주었다.
17살이었던 유재하는 정말 하찮았다.
그 후에 다시 만난 건 제주도였다. 공교롭게도 그곳 역시 섬이었다. 무슨 운명인지 재하는 제주도에서도 낚시했었다. 그때도 하찮은 유재하는 변함없었다.
세간에 알려진 유재하는 무대 위에서 절도 있는 연주를 하는 첼리스트였고, 연주하는 유재하는 열정적이고 섹시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는 찬사를 들었다. 연주자의 얼굴이 연주 실력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니지만, 잘생긴 얼굴에 무대 매너도 좋고 배경까지 탄탄하니 재하의 외적인 모습을 좋아하는 팬들도 제법 있는 거로 알고 있었다.
아무튼, 도시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재하는 섬에서 유독 약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한결같은 하찮음에 회상에 잠겼던 다비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너도 참, 일부러 그러냐? 내 앞에서만 하찮게 구는 거. 멋진 모습 보여주려면, 도시로 여행지를 잡았어야지.”
“그럼 다음번엔 도시로 여행 갈까요?”
“왜. 나한테 멋있게 보이고 싶어? 이번엔 도시라도 사게? 그럴 거면 그냥 집을 사서 날 주지. 나도 건물주 같은 거 한번 해보게.”
“사줄까요? 어디가 좋아요? 지금 사는 미국 쪽으로….”
“새끼. 농담이랑 진담도 구분 못 하냐?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라. 너 지금 눈빛이 진심이야.”
집을 사주겠다는 재하가 너무나 기쁜 표정이라 다비가 서둘러 철벽을 쳤다. 돈을 아꼈으니 좋아해야 할 재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차라리 형이 제 돈을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평생 형이 제 곁에 붙어 있을 텐데.”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데 돈도 돈 나름이지. 나는 내 주제 파악 정도는 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그 말은 좀 슬프지 않냐? 돈 때문에 내가 네 곁에 붙어 있는 게 정말 좋아?”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다비라서 좋았다. 세상에는 그런 이유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좋아한다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넘칠 만큼 많았다. 생각해보면 다비의 고향인 오지도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다. 돈보다 사람을 더 생각하고, 정당한 노동으로 떳떳하게 벌어들인 돈을 소중하게 여겼다. 동화 같은 마을이라서 그런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조차 동화 속 사람들처럼 착하고 예쁜 생각만 했다. 삼촌인 리온은 그런 동화 같은 마을에서 사는 착한 사람을 만나 예쁜 사랑을 하고 있었다.
삼촌의 행복한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부러웠다. 자신은 그런 착한 사람도 필요 없고, 그저 다비 하나면 되는데, 제 사랑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한지. 다비가 마음을 열고 저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보다 더 완벽한 해피엔딩은 없을 텐데.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삼촌보다 더 예쁜 사랑을 하려고 이런 시련이 주어진 거라 생각하며 재하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나쁜 생각을 멈추었다.
재하가 아무 말도 없이 어딘가 슬픈 표정을 하고 있자, 다비가 슬쩍 눈치를 보다가 재하의 팔을 툭 치며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노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심각해. 네 돈인데, 네가 알아서 잘 쓰겠지. 그냥 내가 받는 게 부담스럽다는 거야. 지금도 네 덕분에 잘 놀고 있잖아. 네가 쓴 돈 아깝지 않게 내가 더 열심히 놀아볼게.”
“…네.”
여기서 어떻게 더 재미있게 놀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다비를 따라다니는 건 조금 힘들었지만, 다비가 정말 즐겁게 잘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 섬을 산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과 조금만 어울려줬으면 좋겠단 마음이 조금 더 들었다. 형과 동생 놀이는 지금도 충분하니까 빨리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
재하는 악몽을 꾸는 게 싫다면서 결국 다비의 방으로 짐을 챙겨 들어왔다. 곁에 바짝 붙어서 함께 잤지만, 다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그런지 키스 이상의 진도를 나가려 하진 않았다.
“형.”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고 부르는 재하의 목소리가 낮고 습했다. 목적이 분명한 부름에 다비는 낮에 보았던 개 같은 유재하가 그리워졌다. 자신을 보며 발정 난 것처럼 구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어딘가 끈적한 분위기는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뭐, 뽀뽀해달라고?”
“네. 낮에 잘 참았으니까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다비는 몸을 돌려 재하와 마주 본 후, 손을 뻗어 재하를 붙잡아 입을 맞췄다. 쪽쪽, 가벼운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재하의 낮은 신음이 이어졌다. 같은 바디 워시 향과 치약 덕에 하나가 된 것 같은 키스에 재하의 몸이 순식간에 달궈졌다.
키스만으로 이렇게 좋은데, 몸을 섞는 섹스는 대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 했을 뿐인데 젊고 경험 없는 몸은 빠르게 반응했다.
다비의 입술이 떨어지자 재하가 뒤로 몸을 물리는 다비를 바짝 따라붙었다.
“형, 더 안 해요?”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에 다비가 몸을 움찔거렸다. 명백히 자신을 더 원한다는 눈빛이 노골적이었다. 이 새끼는 소중한 첫 경험을 왜 이렇게 빨리 잃을 생각인데, 아깝게. 아니, 경험이 없어서 자꾸 보채는 건가.
다비는 잘생긴 미소를 지으며 재하의 뺨을 톡톡 다독여주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 남는 게 시간인데. 우리 재하, 키스는 많이 늘었네.”
“형이 잘 알려줬으니까요.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그래. 많이 배워라.”
정말 선생님이 된 기분에 눈웃음을 보였더니 재하가 그 표정을 넋이 나간 멍청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눈빛은 이상할 만큼 야살스러워서 다비가 먼저 웃음을 거두고 시선을 피했다.
재하는 다비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추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형, 전에 하던 거는 왜 안 해요?”
“전에 하던 거?”
“펠라요. 형 그거 좋아하는 거 같던데.”
“그거 싫어하는 남자도 있냐?”
“그럼 알려줘요. 형한테 해줄게요.”
아니, 얘는 뭐가 이렇게 거부감이 없어? 경험도 없으면서 선뜻 해주겠다는 말에 다비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해주겠다고? 목구멍도 턱도 아프기만 할 텐데. 요령이 없으면 숨을 쉬는 것도 힘들고, 어설프면 헛구역질까지 나왔다. 해주는 사람은 좋을 게 하나도 없는 행위라는 걸 모르니까 저런 소리를 천진하게 내뱉는 거겠지.
처음 제 손에 떨어졌을 때부터 재하를 강하게 키울 거라고 다짐했었다. 알려달라는데 친절하게 알려줄 생각이었다. 해보고 괴로워야, 두 번 다시 하겠단 소리가 안 나올 테니 다비는 설득하는 것보다 직접 체험하는 걸 권하기로 했다.
다비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자, 재하가 침대 밑으로 성큼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다비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쳤다.
“꿇으라는 말도 안 했는데, 네 무릎은 뭐 이렇게 싸구려야. 유재하 되게 비싼 놈 아니었나?”
“형한테는 평생 무료인 무릎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배우려면 이 자세가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저도 처음 알았는데, 이 각도에서 보면 형 진짜 섹시하게 보여요.”
“미친, 뭐라는 거야.”
“아, 어느 각도에서 봐도 잘생기고 섹시하지만 특히….”
“으,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마. 그런 거 적응 못 하겠다. 아무튼 네가 그 자세가 좋으면 그렇게 있어. 내가 고쳐 앉을게.”
다비는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의 무릎 사이에 재하의 위치를 잡아주고 내려다보았다. 재하는 곧장 무릎걸음으로 다비의 다리 사이에 자리했다. 배우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표정에 다비는 기특함을 담아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입을 열었다.
“입에 넣고 빤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야. 처음 하는 녀석한테 내 고추부터 입에 물리고 싶진 않아. 일단….”
다비는 겁주려고 재하의 입 안에 손을 찔러 넣었던 때와 다르게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턱을 잡아 입을 벌리게 하고, 검지와 중지를 넣어 재하의 입 안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빨아 봐.”
다정한 명령에 재하는 입을 오므리고 다비의 손가락을 빨기 시작했다. 어디서 본 건지, 따로 공부한 건지 모르겠지만, 재하는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혀를 사용하며 손가락이 치아에 닿지 않게 움직였다.
“그래. 서툴긴 한데 그 정도면 나쁘지 않아. 조금 천천히 이렇게….”
다비가 손가락을 직접 움직이며 요령을 알려주다가 각도를 살짝 틀어 재하의 입천장을 비비기 시작했다. 재하가 움직임을 멈추고 다비의 손길에 집중했다.
“지금은 손가락이라 네가 여유 있겠지만, 다른 게 들어가면 네 입 안이 꽉 찰 거야.”
재하의 시선이 다비의 다리 사이로 향하더니 금세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좀 뿌듯해서 다비는 기분 좋은 눈으로 재하를 보며 설명을 이었다.
“아무튼, 급하게 할 필요 없어. 처음부터 다 잘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물어뜯는 것만 주의해서 방금 손가락으로 문질러 주었던 것처럼 네가 입을 움직여 봐.”
재하는 다비가 알려주는 걸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몸으로 체험하며 배웠다. 교육이 끝나고 다비는 손가락을 뺀 후, 재하를 보며 껄렁하게 웃었다.
“못 하겠으면 지금이라도 말해. 억지로 할 필요 없어. 그냥 어떻게 하는지 알려준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할 건데요. 그러려고 배운 건데요.”
“너… 진짜 할 거야? 손가락하고 완전히 다르다?”
“알아요.”
열심히 가르쳐주고서 뒤로 빼는 모습을 보자 다비가 저번처럼 그만하자고 말할 것 같아, 재하는 조급하게 다비의 다리 사이로 손부터 뻗었다.
재하의 손이 닿자 다비가 몸을 움찔거렸다. 기대감보다 더 빠르게 걱정이 먼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남성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에 재하의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던 것보다 거부감이 생기는 건 아닐지. 막상 하려고 하니 못 하겠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닐지. 자꾸 좋지 않은 것만 떠올랐다.
‘역시, 너도 남자구나. 이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아깝게.’
잊고 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라 다비는 재하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을 잡힌 재하가 자신을 순한 눈으로 바라보자, 불쾌한 기분은 삽시간에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성기 위에 올려진 재하의 뜨거운 손은 조금 민망했다.
“또, 똑같은 거 달려 있는데 뭘 확인하겠다고 손으로 만져.”
“형.”
“왜.”
“제가 너무 이상하게 만졌나요? 아파요?”
“아니. 아픈 건 아니고. 그냥 너무 만져대니까 그런 거지.”
다비의 대답을 듣고 재하의 시선이 다비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그런데 왜 안 서지? 재하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다비의 손을 제 앞으로 가까이 잡아당긴 후, 입을 맞췄다.
“그럼 딴생각 중이었어요? 제가 잘하는지 봐줘야죠.”
“까분다. 집중할 테니까 어디 한번 해봐.”
재하는 몸을 일으켜 다비의 입술을 물고 세게 빨았다. 재하가 며칠째 물고 빨아댄 입술은 조금 세게 빤 것만으로도 아물어가던 상처가 쉽게 터졌다. 다비의 미간이 살포시 구겨지는 걸 보고 재하가 눈으로 웃으며 상처에서 새어 나온 피를 혀로 핥았다. 포개진 입 안에서 비릿한 쇠 맛이 느껴지자 다비가 재하의 어깨를 밀며 고개를 물렀지만, 재하는 그만큼 다가가 다비의 입술을 다시 머금었다. 입술이 아릿할 때까지 빨던 재하가 입술을 떼어내고 다비의 목덜미에 입술을 내렸다.
“다른 사람들하고 닿는 거, 정말 싫어하는데. 형은 왜 이렇게 좋기만 하죠? 피까지 맛있으면 어떻게 해요? 상처가 아무는 걸 보면 다시 터트리고 싶어.”
“네가 전생에 모기 새끼 내지는 뱀파이어였나 보지. 성향 참 괴팍하네. 피가 먹고 싶으면 선짓국을 드세요. 내 입술 아작 내지 말고. 아야.”
재하가 흥분을 참지 못하고 다비의 목덜미에 이를 세워 깨물자, 다비가 미간을 구기며 재하의 허벅지를 발로 걷어찼다.
“야. 너 이갈이 하냐? 왜 자꾸 깨물어 뜯어. 아프다고. 이러다가 내 좆도 깨무는 거 아니야? 나 안 해. 아야. 씁, 야 이 미친놈아. 아파.”
촬영 때문에 오지를 쏘다니는 다비는 의외로 피부가 하얀 편이었다. 햇볕에 살이 익으면 빨갛게 화상을 입는 체질이라 어릴 적부터 선크림은 필수였고, 야생 동물을 촬영할 때는 향이 강한 선크림을 바르지 않고 자외선 차단 기능이 있는 옷으로 중무장하며 피부를 보호했다. 그 덕에 유지한 뽀얀 피부에 지금, 유재하로 인해 빨간 자국이 가득했다. 키스 마크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전부 물어뜯긴 자국이었다.
그동안 자신에게 순하게 구는 유재하를 덩치 큰 강아지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진짜 개새끼가 따로 없었다. 아프다고 소리치면 흥분에 눈이 풀렸던 재하는 금방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깨물어댔던 곳을 혀로 부드럽게 핥아대며 사과했다. 미친놈인가 싶다가도 몸을 기어 다니는 듯한 질척한 감촉에 저도 모르게 몸이 반응하기 시작하니, 같이 미친놈이 되는 기분이었다.
“너무 좋아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아팠어요?”
“으, 몰라. 간지러우니까 그만….”
다비의 목소리에 흥분이 섞여 있는 것을 듣고 재하는 계속 상처를 핥으며, 다시 다비의 성기에 손을 얹었다. 반쯤 부푼 성기를 느끼고 안심하며 몸을 물리고 무릎을 꿇었다.
“형, 이제 속옷 내릴게요.”
다비는 대답 대신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리며 탈의를 도왔다. 재하는 다비의 무릎에 입을 맞추며 다비의 속옷을 끌어 내렸다. 속옷이 벗겨지자 다비의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하는 처음 보는 다비의 성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재하의 야릇한 시선에 낯설고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다비와 달리 성기는 주인과 다르게 더 힘을 받아 단단하게 솟구쳤다. 크기와 어울리지 않게 다비의 성기는 깨끗하고 예쁜 색을 띠고 있었다. 서양화에서 보던 핑크빛 볼을 가진 아기 천사의 피부색을 현실에서, 그것도 다비의 성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던 재하는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형, 성기까지 잘생긴 건 반칙 아니에요?”
“뭐, 뭐래. 시답잖은 말 그만하고 할 거면 빨리….”
성기를 감싸는 크고 따뜻한 손의 감촉에 다비는 말을 잇지 못하고 서둘러 입을 닫았다. 조심스럽고 서툰 손길이 성기를 압박하며 훑어대는 게 느껴졌다. 제 손이 아닌 낯선 감촉에 한숨이 자꾸 새어 나왔다. 좋으면서도 싫은 느낌에 기분이 묘해졌다.
“재… 하야.”
가까스로 입을 열어 불러 봤지만, 재하는 듣지 못한 건지 손을 더 부지런히 움직여댔다. 다비는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신음을 참는 다비 대신 재하가 감탄 섞인 소리를 울렸다.
“하, 형. 기분 좋아요? 벌써 젖었어요.”
“시, 끄러. 빨리….”
“네. 원하신다면.”
재하는 망설이는 것조차 없이 곧바로 다비의 성기를 입에 담았다. 귀두에 입술만 닿았는데, 몸 전체에 소름이 돋아 다비는 시트를 콱 움켜쥐며 고개를 틀었다. 따뜻하고 축축한 감촉이 기둥을 감싸고 핥는 것이 느껴지자, 다비는 터져 나올 것 같은 신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말아 물었다.
신음을 참는 건 다비조차 의식하지 못한 버릇이었다. 아주 오래전 잊고 있던 버릇이 깊숙이 새겨져 왜 신음을 참는 건지 이유도 모른 채, 그냥 참고 있었다.
하지만 성기를 빨고 핥아대는 집요한 움직임과 질척한 소리에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다비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앓는 듯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하, 씨발.”
처음이라더니 어디서 연습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움직이는 재하 때문에 다비는 처음으로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낯선 감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이런 기분은 정말 처음이었다. 발끝이 저절로 오므라들고 허벅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잠깐 손가락으로 알려준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고? 이 새끼 천잰가? 의문이 더 길어지기 전에 쾌락이 물밀듯 밀려와 다른 생각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좋으니까, 펠라에 그렇게 환장하는 거였구나. 새로운 깨달음과 함께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걸 멈추고, 다비는 재하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집어넣으며 재하가 주는 쾌락에 몸을 맡겼다.
재하는 다비의 기분을 살피느라 다비와 눈을 맞춘 채 고개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어색해하며 잔뜩 굳어 있던 다비의 얼굴이 점점 야한 얼굴로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움직임에 다비가 촉촉이 젖은 눈을 하고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자, 같이 흥분되기 시작했다. 강아지를 쓰다듬듯 제 머리를 쓰다듬는 다비의 손길이 매우 좋았다. 흥분에 잔뜩 취해 있으면서도 손길은 상냥했고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는 시선은 야릇하고 어딘가 사랑스러웠다.
고작 반만 머금었는데, 다비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온몸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형이 더 좋아했으면 좋겠다. 너무 좋아서 욕하면서 흥분해줬으면 좋겠다. 흥분한 다비가 욕을 내뱉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쌀 수 있을 것 같았다. 재하는 다비와 계속 눈을 맞추며 한계까지 성기를 삼키기 시작했다. 천천히 삼키는 순간, 다비의 성기가 크게 꿈틀거렸고 동시에 쓰다듬던 손의 움직임이 멈췄다. 입 안에서 성기가 더 커짐과 동시에 다비의 목소리가 앓는 듯 터져 나왔다.
“미친, 싸겠… 씹.”
다비가 견디지 못하고 재하의 뒤통수를 움켜쥐더니 제 성기를 목 깊숙이 쑤셔 박았다. 컥, 소리와 함께 잠시 페이스를 잃었지만, 재하는 머리를 뒤로 빼지 않고 다비의 허벅지를 손으로 콱 붙잡은 채 다비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곧이어 목 안으로 울컥 하고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숨쉬기가 힘들 만큼 꽉 들어찼는데도 재하는 괴롭다기보다 제 입으로 절정을 맞이한 다비의 반응에 표현하기 힘들 만큼 만족감을 느꼈다.
다비는 사정 후 뒤늦게 정신이 돌아왔다. 재하를 밀어낸다는 게 저도 모르게 잡아당기고 말았다. 재하의 입 안에 쏟아낸 것을 알아차리고 당황스러웠지만, 재하가 매우 만족한 얼굴이라 사과할 생각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부끄러워하는 것보다 뻔뻔하게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어쩐지 재하 취향일 것 같아, 다비는 재하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며 나른하게 잘생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해. 깨끗이 빨아야지.”
재하는 다비가 시키는 대로 입 안에 담고 있던 성기를 샅샅이 핥아 깨끗하게 만들었다. 다비가 사정한 것들은 목으로 곧바로 넘어간 통에 입 안에 남은 건 없었다. 처음으로 타인의 성기를 입에 물었고, 제 입에 정액이 들어왔는데도 불쾌함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게 전부 다비의 것이라 그저 좋기만 했다. 너무 좋아서 문제였지만.
다비가 몸을 일으키고 앞을 수습한 후, 재하를 살폈다. 아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슬쩍 눈치를 보았다.
“마지막엔 빼려고 했는데, 네가 그렇게 잘할 줄은 몰랐어. 많이… 놀랐지?”
“아니, 크흠. 아니요? 좋았어요. 제가 처음이라 많이 서툴렀을 텐데, 형이 좋아해줘서 기뻤어요.”
“너도 참…. 처음치고는 잘하던데? 그, 나도… 빨아줄까?”
기브 앤 테이크, 뭐 이런 마음으로 권했는데, 재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저어댔다.
“아뇨? 아니요. 전 괜찮아… 읏?”
손까지 내저으며 사양하는데 다비의 발이 재하의 성기 위에 얹어졌다. 재하는 크게 움찔하며 얼굴을 확 붉혔다. 다비는 재하의 속옷 위로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축축하고 끈적한 감촉에 어이없는 웃음을 짧게 터트렸다.
“너, 지금… 내 거 빨다가 싼 거야?”
만져준 적도 없었고, 재하의 손은 자신의 성기와 허벅지 위에 있었으니 스스로 만진 적도 없을 터였다. 그런데 단순히 쿠퍼액을 흘렸다고 하기에는 범위와 감촉이 확연하게 달랐다. 이럴 수도 있다고 말로만 들었지, 이렇게 직접 확인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재하는 부끄러워하며 다비의 발을 양손으로 감싸 들어 올린 뒤, 제 티셔츠로 다비의 발바닥을 닦으며 말했다.
“…형 표정이 너무 야해서요. 목에 핏대 선 거랑 울대 꿀렁이는 것까지 전부 야해서… 거기다가 물어뜯을까 봐 무섭다고 했으면서, 제일 중요한 급소를 저한테 완전히 맡긴 거잖아요. 그런 생각이 이어지니까 너무 좋아서….”
“펠라하면서 싸다니… 진짜 난 놈이네.”
“칭찬해주는 거예요? 마음에 들었어요?”
“…칭찬 아니야.”
“칭찬 같은데요?”
“아니라니까.”
감격에 겨워하는 재하의 표정을 보자 갑자기 현자 타임이 찾아왔다. 대체 이 녀석은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좋아하는 걸까. 마음 어딘가가 미칠 듯이 간지러워져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 정말 모르겠다. 이래도 되는지.”
살면서 이렇게 맹목적인 애정 공세는 처음이었다. 좋으면서 싫은 이 감정을 어떻게 풀어서 설명해야 할지 자신도 알 수 없어 답답하고 심란해졌다. 앞으로도 이렇게 자신을 좋아해 줄 사람이 나타날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100일 후에 후회하는 쪽은 자신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만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면 해결될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조금만 더 참을걸, 네 인생에서 널 이렇게 사랑해주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과거의 자신에게 알려줄 수만 있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속이 꼬여 있는 자신 때문에 재하가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재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 모든 문제는 과거의 김다비가 선택한 일이었다. 누굴 원망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서 다비는 심란한 표정으로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심란한 다비의 표정을 보던 재하는 아주 잠깐 얼굴을 굳혔다가, 이내 순한 미소를 지으며 다비의 무릎을 토닥여 주었다.
“형, 저는 씻고 올게요. 쉬고 있어요. 다음번에는 더 열심히 할게요. 음, 형이 30초 만에 제 입에 쌀 수 있게 더 노력….”
“야, 그런 거 열심히 하지 않아도 돼. 지금 누굴 조루로 만들려고.”
“빨리 싼다고 조루인 건 아니래요. 전 형이 기분 좋아서 빨리 싸게 만들고 싶은 거지, 조루로 만들겠단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그럼 1분?”
“…30초나 1분이나. 아무튼, 너 안 찝찝하냐? 얼른 씻고 와. 이제 자게.”
심란했던 다비의 얼굴이 조금 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재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부디 다비의 번뇌의 이유가 ‘유재하’ 하나였으면 좋겠다.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다른 것들이 다비를 심란하게 만든다면, 그게 뭐가 됐든 전부 끄집어내서 박살 내고 싶었다.
김다비의 세상엔 유재하만 있어야 했다. 이런 이기적인 마음을 다비가 알게 되는 건 싫으니까, 재하는 다비 앞에서 더욱더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에너지 넘치는 다비는 지겹지도 않은지 오늘도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재하 역시 다비를 따라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끝마쳤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밖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가 내렸다. 굵은 빗줄기를 확인하고 재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숨긴 채, 다비를 보며 말했다.
“형, 비 오는데요.”
“아. 그러네. 오늘은 섬 반대쪽으로 가보려고 했는데….”
“비 그치면 가요.”
“처음 왔을 때는 우기라고 해도 그렇게 비가 많이 안 오더니. 10월 중반 넘어가니까, 진짜 우기답네.”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바깥을 보는 다비의 표정에 재하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다비의 입술에 입을 쪽, 하고 맞추고는 배시시 웃었다. 다비가 질색하며 재하를 노려보았다.
“아, 낮에는 이런 거 하지 말라고.”
“집 안이잖아요. 바깥도 아니고, 보는 사람도 없고.”
능청스럽게 웃는 재하의 종아리를 발로 살짝 걷어차며 불만을 표했지만, 재하는 전혀 타격 없다는 듯 다비와 눈을 맞추고 헤실거리기만 했다. 어젯밤 물어뜯긴 목덜미가 간질거리는 기분에 다비는 서둘러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바다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바다에 닿자마자 원래 제자리를 찾는 것처럼 바다와 하나가 되는 장면은 매번 새롭게 느껴졌다. 빗줄기가 조금만 가늘었다면 더 예쁜 장면을 담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들어, 어깨에 둘러멘 카메라 가방을 만지작거렸다.
“비 올 때 사진 찍는 거 좋아하는데.”
“지금은 너무 많이 내리니까, 조금 잔잔해지면 나가요. 그동안 테라스에서 비 내리는 거 구경할까요?”
재하의 권유로 다비는 2층 테라스에서 비 내리는 바다를 구경했다. 난간에 나란히 서서 흐려진 물빛에 하얀 비가 흡수되는 모습을 무심히 보고 있던 다비가 탄식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부침개 먹고 싶다. 비 올 때는 전 부쳐서 막걸리하고 먹어줘야 제대로인데. 그러고 보니 여기 온 이후로 술을 못 마셨네.”
재하는 다비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비가 아쉬워하며 몸을 기울여 자신에게 기대왔기 때문이었다. 어깨에 느껴지는 다비의 무게에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당장 품에 가두고 안아주고 싶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신중하게 접근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보아온 다비는 이런 상황을 지적하면 그 후로 의식하고 더 하지 않으려 하는, 약간 속이 꼬인 성격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며 다비가 계속 자신에게 기대어 있는 걸 유지해야 했다. 재하는 서둘러 입을 열고 아무 말이나 뱉어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아직도 술 안 마시고 있어요.”
“왜?”
“형이 그랬잖아요. 첫 술은 형이 알려주겠다고, 아무 술이나 먹지 말라고 했었는데.”
다비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얼굴로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 말을 했었던가?’라고 생각하자마자 동시에 떠올랐다. 했었다.
자신과 훈이 군대에 있을 때, 재하와 리온이 면회를 와서 외박했던 날이었다. 네 명이 함께 부대 인근 펜션을 빌려 먹고 마시고 놀 때, 다비는 재하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시중에서 파는 막걸리보다 섬에서 담근 막걸리가 훨씬 맛있으니까, 첫 술은 섬에서 좋은 술로 배우라며 스무 살이 된 유재하에게 음료수만 먹였다.
그 이후로 정작 서로 일 때문에 바빠, 그 말을 지키지 못했다. 그게 벌써 4년 전 일인데, 여전히 마시지 않고 있다는 재하의 이야기에 미안해졌다. 다비는 재하의 어깨에서 고개를 떨어트리고 몸을 비틀어 재하를 보았다.
“미안. 지금 기억났다. 아니, 그 후에도 우리 가끔 만났었잖아. 말을 하지 왜 참고 있었어?”
“첫 술은 형한테 꼭 배우고 싶어서요.”
독일에서 사는 재하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맥주를 딱 한 번 마신 적이 있었지만, 독일에서 맥주는 술이 아닌 문화니까 술 마신 적은 없는 셈 치기로 했다. 다비가 그 이야기를 한 이후로는 정말로 지금까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모든 경험이 처음일 수는 없지만 하나라도 더 다비와 함께 처음을 맞이하고 싶었기 때문에 술 같은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다비는 술을 좋아했다. 자주 마시는 것보다 독특한 술을 모아 맛보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세상은 넓고 마셔야 할 술은 넘쳤다. 오지로 촬영 가게 되면, 반드시 그 지역 술을 맛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러다 보니 재하가 지금까지 술을 마시지 못한 책임이 저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미안해졌다.
“다음 설에는 오지도로 와. 지수네 할머니는 이제 술 안 빚으시는데 훈이가 배웠을 거야. 내가 이야기해놓을 테니까, 그땐 꼭 같이 마시자.”
“정말요?”
“당장 여기서 같이 마시면 좋겠지만, 그러면 4년 동안 기다린 보람이 없잖아. 내가 직접 안주 준비해서 유재하 첫 술이 인생 술이 되도록 노력해보마.”
“약속한 거죠?”
“어. 약속. 뭐, 새끼손가락 걸어줘?”
다비는 피식 웃으며 재하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재하는 얼른 다비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고 배시시 웃었다. 다비는 알까. 내년 설은 100일이 지난 후라는 걸. 100일이 지난 후에 둘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바뀔지 몰라도, 그 후에 만날 수 있다는 약속을 미리 잡았다는 게 중요했다. 재하는 다비가 그 약속을 잊지 않길 바라며, 얽혀 있는 손에 몸을 숙여 입술을 내렸다.
다비는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유씨 집안 특징인 건지, 음악 하는 애들이라 그런지, 낭만적인 녀석들이라 그런지. 누가 삼촌 조카 아니랄까 봐 리온과 재하는 유독 이런 낯간지러운 행동을 많이 했다. 무뚝뚝하던 훈이 녀석은 리온이랑 사귀면서 점점 주접을 떨던데, 자신은 그런 장르와 맞지 않아서 그런지 어색하기만 했다.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재하 녀석이 울 것 같아 입술이 떨어질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한참 후에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다비가 슬그머니 손을 빼며 딴청을 부렸다.
“혼자 술 마시는 거 좋아하는데, 너 있는 동안은 좀 참아야겠다.”
“형이 마시고 싶다면, 마셔도 괜찮아요.”
“사람이 있는데 왜 혼자 마셔. 그런 분위기에서는 아무리 좋은 술이 있어도 맛이 떨어져.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여기 와인이랑, 위스키 정도는 있을 거예요. 다른 종류 술도 고모할머니네 리조트에 요청하면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말만 하면 술을 구할 수 있다니 지상 낙원이 따로 없었다. 하마터면 방금 뱉은 말이 무색하게 술을 시킬 뻔했다. 다비는 유혹을 뿌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안 마셔. 술은 술이고, 부침개는 진짜 당기네. 주방에 가서 부쳐 먹을 만한 거 있나 찾아보자.”
“형이 하려고요? 주방에 이야기하면….”
“전은 내가 부친 게 세계 제일이지. 너 그거 먹으면 나하고 결혼하고 싶어질걸?”
“안 먹어도 하고 싶은데요.”
“…미친, 말이 그렇단 소리지. 누가 결혼하재? 너한테 이런 농담은 못 하겠다.”
“…그런 농담을 저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했어요?”
재하가 충격받은 얼굴로 진지하게 물어보고 있자 다비는 재하의 팔뚝을 손으로 툭 때리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내가 말을 말지.”
“저 진짜 진지한데. 누구예요?”
“없어, 없다고. 내가 돌았지. 이게 귀엽고 난리야. 뭐 해. 얼른 내려가자.”
“형, 잠깐만요. 저 귀여웠어요? 어디서 귀여웠어요? 네?”
다비는 괜한 말을 했다고 투덜거리며 1층으로 향했고, 재하는 그 뒤를 졸졸 따랐다.
주방에서 재료를 살펴보던 다비는 망설임 없이 재료를 들고 전을 부칠 준비에 나섰다. 재하가 도와주려고 다비를 따라다녔지만,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전을 올리고 나서야 다비는 재하의 존재를 다시 떠올렸다. 고개를 살짝 틀자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도와주고 싶었는데….”
“아오. 깜짝이야. 언제부터 뒤에 서 있었냐. 놀라서 때릴 뻔했네.”
“저도 요리할 줄 알아요. 다음부턴 같이 해요. 그런데 형도 요리 잘하네요. 제가 끼어들지도 못하게 그 자리에서 뭘 뚝딱뚝딱….”
“명절이나 잔치할 때나 여러 명이 붙어서 하는 거지, 둘이 얼마나 먹는다고 도움이 필요해.”
“힘들어서 같이 하자는 거 아니잖아요. 같이 요리하는 게 중요하죠.”
재하를 향했던 몸은 고소하게 익어가는 냄새 때문에 다시 프라이팬으로 향했다. 재하는 다비와 나란히 주방에 서서 어설퍼도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알콩달콩하게 요리하는 분위기를 원했지만 다비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비의 관심을 받는 프라이팬 위의 전들이 부러워서 재하는 다비에게 바짝 붙어 목덜미에 입술을 붙이고 쪽쪽거렸다. 다비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저었다.
“불 앞에서 장난치지 마라. 위험하다.”
“장난 아닌데요.”
재하는 보란 듯이 다비의 허리를 손으로 끌어안으며 더 바짝 달라붙었다. 다비는 전을 뒤집다가 허리를 감싼 재하의 팔을 내려다보더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기름 튀면 너 손 다친다고.”
“…제 손 걱정해주는 거예요?”
“그럼. 넌 손으로 먹고사는 놈인데, 당연하지. 날 대체 얼마나 삭막한 놈으로 봤길래 그런 말을 하지?”
“아뇨. 삭막해서 그런 게 아니라, 기뻐서요.”
재하는 다비를 더 꽉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웅얼거렸다.
“훈이 형이 독일에 오면 삼촌 먹으라고 음식을 해놓는데, 불 쓰는 일은 항상 저 시키거든요. 삼촌 손 다치면 안 된다고. 저도 삼촌이 불 앞에 서 있으면 괜히 불안해서 제가 하는 게 속 편하지만, 그래도 항상 부러웠어요. 삼촌도 나하고 똑같은 첼리스트인데, 삼촌 손은 훈이 형한테 사랑스럽고 귀한 손이지만, 전 아니니까.”
“훈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 리온이보다 네가 든든하니까 시킨 걸 거야. 솔직히 나도 리온이하고 너하고 둘이 있으면 너한테 부탁하지, 리온이는 어딘가 불안해서 못 시킬 듯.”
“삼촌은 좋겠네. 주위에서 다들 귀하게 여겨줘서….”
“으이구. 네 손도 귀하다고. 그러니까 좀 떨어지라고. 전 뒤집어야 하니까, 좀….”
“형은 내 손만 귀하다고 해줘요. 그럼 안 돼요?”
재하는 다비를 꽉 끌어안고 목덜미를 약하게 잘근거렸다. 아프게 깨물어대는 것도 아니고 잘근거리는 감촉이 간지러워서 전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지금 뒤집어야 김다비 표 명품 전이 완벽하게 완성되는데,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죽을 맛이었다. 재하는 목덜미를 잘근거리며 계속 “응?” 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주인의 관심을 받으려고 온갖 짓을 해대는 개 같은 유재하에게 결국 다비가 져주었다.
“알았다. 알았어. 유재하 손이 유리온 손보다 나한테는 더 귀하다. 됐냐?”
“네. 귀하게 여겨주니까 뒤로 물러날게요.”
다비를 꽉 끌어안고 있던 탄탄한 팔에 힘이 풀어지고 다비의 등에 달라붙어 있던 온기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조금 허전하다고 느껴졌지만, 다비는 전을 뒤집는 게 우선이라 허전함을 빨리 지워냈다. 전을 뒤집자마자 다비는 탄식부터 터뜨렸다.
“아, 너무 익었잖아. 맛없다고 내 탓 하지 마라. 네가 뒤에서 달라붙어서 이렇게 된 거니까.”
“대충 봐도 맛있어 보이는데요?”
“아니야. 이건 내가 부친 전 중에서 망한 쪽이야. 초딩 이후로 이런 실수 안 했는데. 이따 새로 부친 거 하고 비교해 봐. 맛에서 차이가 확 날걸?”
“저는 맛보다 형이 부쳤다는 게 중요한데요. 형이 만든 거라면 다 타버린 전을 가져와도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
“…아, 진짜 뭐라는 거야.”
도무지 저런 말은 적응이 쉽게 되지 않았다. 장난기 있는 얼굴도 아니고 진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내뱉으니 듣고 있는 자신이 민망할 뿐이었다. 프라이팬에서 올라오는 열기 때문인지 볼이 따끈해졌다. 재하가 자신의 말을 듣고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할까 봐 다비는 그 후로 열이 가라앉을 때까지 계속 전 부치는 것에 집중했다.
새로 부친 전은 노르스름한 빛깔과 윤기를 자랑하며 완성되었다. 다비는 평소보다 더 완벽한 전에 감탄하며 얼른 하나를 집어 들고 재하를 불렀다.
“이리 와. 먹어 봐.”
다비가 뿌듯한 얼굴로 재하의 입 앞에 전을 대령했다. 재하가 입을 벌리자 다비가 집게를 뒤로 물리며 전을 후후 불어 뜨거운 김을 식혔다. 그리고는 다시 재하의 입에 대령했다. 자기야, 아-. 같은 행동에 재하가 감격에 겨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도나 국내로 여행 갈 것을 그랬다. 그랬다면 다비가 해주는 음식을 이렇게 전부 받아먹을 수 있었을 텐데. 이곳에선 요리사가 해준 요리를 받아먹다 보니, 이런 기회가 흔치 않다는 게 아쉬웠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국내 여행을 가지 못한 것이 진심으로 아쉬워졌다. 다행히 그런 생각은 손을 들썩이며 먹을 것을 권하는 다비의 미소 덕분에 금방 잊혀졌다.
“뭐 해. 팔 떨어진다. 입 벌려. 아-.”
‘아-.’라니. 재하는 다비의 입 모양을 따라 수줍게 입을 벌렸다. 나긋한 ‘아-.’ 소리와 다르게 다비는 재하의 입에 전을 쑤셔 넣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입 안으로 들어온 전은 간도 딱 맞고, 고소하면서 담백했다. 과장 조금 보태면, 살면서 먹었던 전 중에서 제일 맛있었다.
“맛있어요. 바삭한데 부드럽고, 간도 딱 맞아요. 씹을수록 더 고소해서 삼키기 아까울 정도예요.”
“그렇지? 대구가 스테이크용이었는데, 전 부치기에 딱 좋더라고. 이따 새우전도 먹어. 새우전 먹으면 기절하겠네.”
“안 먹어 봐도 맛있을 것 같아요. 진짜 평생 형이 해준 전만 먹고 싶어요.”
진담 가득한 재하의 프러포즈에 다비가 큭큭 웃음을 터트리며 재하의 팔뚝을 툭 쳤다.
“그렇게 아부하지 않아도 지금 많이 해줄 테니까, 실컷 먹어라. 크, 아깝네. 여기에 막걸리가 같이 있어야 하는데. 너 오지도에 꼭 와. 그땐 막걸리에 같이 먹자.”
“네. 꼭 갈게요.”
다비는 정에 약했다.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재하와 지금까지 계속 연락하며 지낸 것도 끊어내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만나지 않았던 시간에 재하가 끊임없이 보냈던 문자들이 관계를 계속 유지시킨 것이긴 하지만, 자신에게 보인 정성만큼 다비도 재하를 나름 특별하게 생각해왔다.
하물며 지금은 24시간을 함께 보내고, 스킨십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재하에게 마음이 가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금도 귀엽지 않은 녀석이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면 생각보다 빨리 재하에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게 연애로 이어질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늘은 비록 우기의 남태평양 외딴 섬에서 탄산음료와 함께 전을 먹었지만, 다음엔 꼭 오지도에서 막걸리와 함께 먹자고 약속하며 둘은 비 내리는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
침대에서 자던 다비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다비와 함께 자던 재하는 다비의 움직임에 가만히 눈을 뜨고 욕실 문을 바라보았다.
섬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새벽만 되면 다비가 자다 깨는 일이 거의 매일 일어나고 있었다. 가끔은 잠꼬대하며 끙끙거리다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처음엔 재하도 놀라서 욕실 문에 붙어 다비를 찾으며 병원에 가자고 걱정했지만, 그럴수록 다비는 괜찮은 척하며 욕실에서 나오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이렇게 다비가 일어날 때마다 재하는 그저 자는 척하며 다비가 빨리 돌아오길 기다렸다.
‘형, 모아, 아파.’
다비가 잠결에 끙끙거리며 가장 많이 뱉은 말이었다.
모아는 다비의 쌍둥이였다. 이란성 쌍둥이라 나이는 같지만, 성별도 다르고 생김새도 조금 달랐다. 혼혈임이 확실한 이국적인 얼굴로 모아는 예뻤고, 다비는 매우 잘생긴 얼굴이었다. 성격도 달랐다. 모아는 싫고 좋음이 딱 부러지고 할 말을 다 내뱉는 스타일이었다. 가끔 차가운 느낌이 들긴 하지만, 알고 지내면 좋은 사람이었다.
반면 다비는 입이 조금 거친 데 반해 의외로 상대의 눈치를 많이 보는 스타일이었다. 싫다고 말하다가도 금세 고민하고 들어주는 유들유들한 성격이었다. 모아와 다비는 여느 남매처럼 표현을 많이 하지 않아도 사이가 좋은 관계였다.
그러니 모아가 악몽의 원인은 아니란 의미였다.
다비가 아프다고 보기엔 넘칠 정도로 건강했다. 새벽에 잠깐 일어나는 것을 제하면 나머지 시간에는 아무 이상 없었다. 체력 좋은 자신조차 다비를 따라다니다 보면 저녁에는 녹초가 될 정도로 다비는 넘치는 에너지의 소유자였다. 어린 시절의 다비를 본 적은 없지만, 약을 따로 먹는 모습을 본 적 없으니 지병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어딘가 몸이 좋지 않아서 아프다고 잠꼬대로 말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재하가 가장 의문스럽게 생각하면서도 풀지 못하는 것은 ‘형.’이었다. 다비는 스무 살에 한국에서 미국에 있는 다큐멘터리 전문 회사에 입사했다. 외국에서 호칭은 성이나 이름을 부르니까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마도 같은 고향 사람인 것 같았다.
어렸을 때 따돌림 같은 걸 받았을까. 다비네 가족은 스웨덴에서 살다가 열 살에 한국으로 들어와서 살았다고 했다. 혼혈이 시골 마을에서 사는 게 쉽진 않았을 것이다. 혹시 마을 형들이 괴롭혔나? 여기까지 생각하던 재하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지역이라면 몰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섬마을은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시골이라서 그런 일이 일어날 곳은 아니었다. 섬에 대해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 사람들이 전부 착하고 순한 사람들이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다. 설령 혼혈이라고 누군가 다비를 괴롭혔더라도 다비와 모아의 친구인 훈과 지수가 그걸 방관했을 사람들은 절대 아니었다.
추측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자신이야 다비에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전부 말하는 편이나 다비는 오히려 입을 다무는 편이었다. 형, 모아, 아파. 이 세 가지는 대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걸까. 무엇이 다비를 그토록 괴롭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알고 싶단 티를 내면 다비는 입을 다물고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었다.
머리와 마음이 복잡해질 때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하는 어두운 방 안임에도 눈을 감고 얼른 자는 척했다.
다비가 조용히 침대로 오더니 곧바로 눕지 않고,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한숨을 깊게 내쉰 후 곧이어 몸을 돌려 재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가운 손이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아지를 쓰다듬듯 머릿결을 따라 움직이는 손은 조심스럽고 조금 떨리고 있었다.
“진짜 싫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에 재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장 일어나서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다비는 속마음을 쉽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다비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며 옆에서 신뢰를 얻는 것밖에 없었다.
쓰다듬던 손이 멈추고 다비는 재하의 옆자리에 몸을 뉘었다. 몸을 들썩이며 재하에게 가까이 다가가 팔을 들어 올리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재하는 뒤척이는 척하며 다비를 품으로 끌어당겨 꼭 안아주었다. 다비가 편히 잠들 수 있게 잠결인 척 등을 쓸고 토닥였다.
***
다비가 악몽을 꾸게 된 원인은 재하의 고백 때문이었지만, 악몽을 꿔도 다시 잠들 수 있는 것 역시 옆에 있는 재하 덕분이었다. 지난 시간 동안은 악몽을 꾸면 잠을 잘 수 없었는데, 이곳에 와서는 악몽을 꿔도 다시 푹 잘 수 있었다.
재하가 옆에 있어서 푹 잘 수 있지만, 아침마다 야릇한 기분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역시 재하 때문이었다. 다비는 아직 잠이 깨지 않아 멍한 상태로 제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덩치 큰 녀석에게 투덜거렸다.
“손… 크흠, 손 좀 떼라. 아침마다 대체….”
“잘 잤어요?”
목이 잠긴 자신과 달리 재하의 목소리는 갈라지는 것 없이 깨끗했다. 언제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꽤 일찍 일어난 모양이었다. 다비는 눈을 감은 채로 일단 제 다리 사이에 붙어 있는 재하의 손을 붙잡아 떼어냈다.
“네 거나 만져. 왜 자는 사람을 못 살게 하냐.”
“저 때문에 깼어요? 그런데 만진 지 한참 됐는데 형 전혀 모르던데요.”
“몰라서 미안합니다? 아무튼, 일단 떨어지자. 화장실 가게.”
다비는 재하가 다시 달라붙기 전에 얼른 침대에서 내려왔다. 재하는 다비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자리에서 함께 일어나 다비의 뒤를 졸졸 따랐다.
“형, 오늘 뭐 할 거예요?”
“글쎄. 오늘은 비 안 오려나? 왜? 너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아뇨. 형이 하고 싶은 게 제가 하고 싶은 거죠.”
“그런 놈이 자는 사람 고추…. 아니, 일단 어디까지 따라올 셈이야.”
이러다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올 기세라 다비는 일단 걸음을 멈추고 재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재하는 빠르게 다비의 표정을 살폈다. 목소리는 새벽과 달리 평온했고, 표정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조금 더 이야기를 붙이고 컨디션을 살피고 싶었지만 대화는 식사하면서 나눠도 되는 거니까 일단 다비를 화장실로 보내주었다.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아 아침을 먹는 중에 재하가 다비에게 물었다.
“오늘은 뭐 하고 싶어요?”
“비도 안 내리니까 물에 들어갔다 올 생각이었는데.”
“아, 스노클링? 아니면 스쿠버 다이빙? 어떤 거요?”
“갑자기 비 올지도 모르니까 가까운 데서 스노클링 하려고….”
일정을 말하던 다비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재하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모든 일정이 정말 자신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걸 알아차린 게 섬을 떠나기 일주일도 안 남은 시점이라는 것에 스스로 놀라 당황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재하가 원하는 거라고 했었는데, 그 말을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었다. 심지어 섹스 파트너랍시고 여기까지 왔는데도 정작 잠만 같이 자고 섹스는 아직까지 하지 못했다. 고추 떼달라고 엉엉 울었던 녀석인데, 펠라 이상의 진도는 나가지 않고 그마저도 자신에게 해줄 뿐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자신이 꽤 뻔뻔한 인간으로 보였다.
“재하, 너는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정말?”
“전 정말 없는데요. 사실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가져보는 게 거의 처음이라서요. 형하고 노는 거 전부 재밌어요. 형 따라다니면서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고요.”
“공연 없고, 평소에 쉬는 날 넌 뭐 하는….”
물어보려다가 뭘 하는지 알고 있어서 다비는 입을 다물었다. 공연이 있는 날도 마찬가지지만, 재하는 공연이 없는 휴식 시간에는 자신에게 문자 보내는 것으로 모든 시간을 보냈던 녀석이었다. 가끔 카페나 식당, 리온과 함께 있는 사진을 보내며 일과를 자신에게 알렸고, 훈이 녀석이 오는 날은 훈이 해준 음식을 사진 찍어 보내면서 훈의 근황을 전하기도 했다. 연습이 있는 날은 연습실 사진도 보냈고, 스태프들과 다른 연주자들의 사진을 보내며 그야말로 24시간을 전부 자신에게 알렸다.
통신이 좋지 않은 지역에서 한 달을 넘게 촬영하고 도시로 돌아와 휴대폰을 확인하면, +999가 떠 있는 문자와 먼저 마주했다. 재하가 보낸 문자를 읽는 데 3일이나 걸린 적도 있었다. 자신이 곁에 없었어도 재하의 세상은 김다비였다.
“넌 내가 그렇게 좋으냐?”
“네.”
“대체 왜?”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나요. 어느 순간 갑자기 좋아하게 됐어요.”
준비한 듯 막힘없는 대답에 다비가 피식 웃으며 식탁에 놓인 빵을 잡아 입에 쏙 집어넣었다.
“그거 할 말 없는 놈들이 그렇게 뭉뚱그리면서 핑계 댈 때 쓰는 말인데. 그냥 이유 없이 네가 다 좋아, 이런 거.”
“아뇨. 이유는 있는데, 그건 그냥 계기고, 좋아한다고 자각한 후부터 형이 점점 좋아졌어요. 그걸 이제 와서 구구절절 설명하기 어려워졌다는 거죠. 형이 어떤 행동을 해도 저한테는 이제 전부 좋아하는 순간이 돼버렸으니까요.”
재하는 정말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다비에게 7년간 좋아한다고 매 순간 고백해왔다. 다비의 사진이 좋고, 사진에 담긴 다비의 마음도 좋았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그 시선도 사랑하지만, 그건 전부 사랑하게 된 계기일 뿐이었다. 알면 알수록 다비가 좋아졌다.
재하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달싹거렸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전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다비의 마음이 다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말하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다. 어쩌면 마음 약한 다비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 사귀어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재하는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일부만 꺼내기로 했다.
“저 처음 만났을 때, 형이 저 보고 스토커냐고 하면서 막 욕했잖아요.”
“…어. 그랬지. 그런데 진짜 스토커 같았어. 리온이 손가락만 보고 섬으로 걔 찾으러 온 거잖아. 리온이 찾은 계기가 내 사진 때문이었고. 경악할 만했지. 게다가 네 첫인상이 얼마나 더러웠냐. 온몸에서 싸가지 없는 티가 좔좔 흘렀잖아.”
“그래서요. 절 그렇게 대한 사람은 형이 처음이었거든요.”
다비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재하를 보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였다. 날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 반해주지. 이런 건가?
“그거… 재벌하고 사귀려면 뺨 때리면 된다는 뭐 그런 맥락이야? 욕해서 나한테 반했다고?”
“네. 그렇게 아름다운 사진을 찍는 작가님이 현실에서는 그렇게 에너지 넘치고 입이 거친 사람이라는 걸 몰랐거든요. 얼굴에는 귀찮은 녀석 뒷바라지하게 생겼다고 쓰여 있는데, 행동은 정말 다정하고 자상했고요. 형은 별거 아닌 행동이었을지 몰라도 저에겐 반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어요.”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이유라서 재하의 표정은 진실을 고하듯 한없이 진지했다. 다비는 터무니없는 소리에 어이없어하다가 이내 이해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든 사람이 같은 행동과 같은 이유로 누군가를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재하는 그런 거로 반할 수도 있었다. 자신의 기준을 들먹여 재하의 진심을 깎아내리고 싶진 않았다.
“그래. 뭐, 이유가 궁금했던 거야. 생각보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내가 네 마음에 스며들었단 소리네.”
“네. 그런 셈이죠.”
“그래. 밥 먹자.”
오히려 그게 나았다. 거창한 이유가 붙었다면, 조금 부담스러웠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대단한 이유를 책임지고 싶다는 이상한 사명감에 불타올라 재하가 정한 틀에 자신을 맞추려 들었을지도 몰랐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그냥 좋아하게 됐다는 말이 차라리 듣기 좋았다.
궁금한 것이 풀렸다는 듯 한결 편한 얼굴로 아침을 먹는 다비를 보며, 재하는 역시 거기까지만 말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침을 먹은 후, 2층에 올라가 나갈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다비는 언제나 그렇듯 재하를 의식하지 않고 티셔츠부터 훌렁 벗어 던졌다. 재하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손에 들고 다비를 흘끔 쳐다보았다.
옷을 입으면 마른 몸이지만, 벗기면 오밀조밀 근육이 잘 짜여 있었다. 자신처럼 트레이너를 붙여 일부러 만든 몸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근육이 잡힌 탄력 있는 몸이었다. 하얀 피부 덕분에 조각상처럼 느껴지는 다비의 몸엔 자신이 밤새 남겨놓은 자국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재하는 마음이 쉽게 넘쳐흘렀다.
“좋아해요, 형.”
“너도 참, 뜬금없다. 내 뒤태만 봐도 막 설레고 그러냐? 아침부터 발정 나지 마라.”
“형은 절 좋아하게 될 거예요.”
‘형이 절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도 아니고 좋아하게 될 거라며 확정 짓는 말투에 이건 또 무슨 자신감인가 싶어 다비는 몸을 돌려 재하를 바라보았다. 말실수가 아니었는지 아침부터 마주하기 부담스럽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비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재하의 말을 기다렸다.
“어떤 사막에 7년 동안 내릴 비가 한꺼번에 내린 적이 있었대요. 그 후에 삭막했던 사막에 꽃이 가득 피었다는 거예요.”
“아, 들어본 것 같긴 하네.”
“사막에 꽃이 가득 필 수 있었던 건, 삭막한 환경에서 때를 기다리며 버텼던 씨앗이 가득했기 때문이에요. 저 역시 지난 7년간 형에게 제 진심을 심어두었어요. 형의 마음에 단비가 가득 내리는 날, 제 진심도 가득 필 거라고 생각해요. 그날이 곧, 형이 절 좋아하게 되는 날이에요.”
“…아니, 미친.”
재하가 말을 마치고 진지한 얼굴로 다비를 응시했다. 다비는 재하의 시선을 피하고자 몸을 돌렸다.
저건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고백법이었다. 평소라면 개수작 부리지 말라며 허벅지를 걷어차 줬을 텐데, 저 얼굴이 다 했다. 저 말이 뭐라고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재하가 말한 단비라는 게 지금처럼 저를 향한 맹목적인 애정 공세라면, 다비는 지금 이 섬과 같이 우기에 들어서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저 말이 낭만적으로 들리는 걸 보면 말이다. 투둑 하고 재하의 진심이 제 속에서 싹을 틔운 것만 같았다.
온몸에 열기가 돌았다.
한번 오른 열기는 시원한 물속에서 노는데도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
이곳에서 재하와 지내면서 이렇게 될 거라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자신은 맹목적인 애정 공세에 면역이 없는 편이었다. 부모님의 사랑 역시 맹목적이지만, 이런 열기를 띠진 않았으니 어쩌면 이런 걸 처음 겪는 걸지도 몰랐다.
재하의 마음을 필터 없이 받는 게 어렵고 어색했다. 받는 건 어색하지만 주는 건 익숙했다. 한번 마음을 주기 시작하면 멈출 줄 모르는 게 저였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적정선인지 모르니 그저 해주고 싶은 걸 전부 퍼주게 되었다. 그게 몸이든 마음이든 말이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고 그토록 선을 지켰건만.
이러면 안 되는데.
아주 오래전에 바닥을 보여 이젠 퍼줄 게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사랑까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유재하가 귀여워하던 개에서 연애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분만으로 연애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은 연애하기에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훈이 녀석처럼 무한한 사랑과 응원을 해줄 수 있는 다정한 마음도 없었고, 리온이처럼 귀엽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연인에게 퍼주었던 사랑의 끝이 최악이었던 만큼, 사랑이 무조건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재하에게 뭔가 말해주고 싶었다. 적어도 네가 남자로는 보인다고 알려주고 싶었는데, 방법을 모르겠다. 꼬였던 속이 하루아침에 풀어질 리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제 입에서 그 말이 예쁘게 나올 것 같진 않았다.
표현하는 게 서툰 다비는 특히 감성적인 말을 싫어했다. 시적인 표현이든, 낭만적인 표현이든,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명대사를 질색했다. 듣는 것도 싫으니 입 밖으로 내는 것은 더 어려웠다. 너를 위해서라면 저 하늘에 별도 달도 따줄 거야. 밤하늘에 있던 별이 전부 네 눈으로 내려앉았나 봐. 극단적인 예지만, 자신의 앞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하면 손에 쥐고 있는 걸 던지며 하지 말라고 진저리쳤을 터였다.
그 누군가가 바로 훈이네 커플이었다. 둘이 대화하고 있는 걸 보면 입에서 저절로 ‘염병하네.’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런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제 앞에서 염병하는 커플이었다. 그 모습이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정말로 그런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상대가 좋아 죽는단 소리니까, 좋게 보면 예쁜 커플이었다.
훈이 놈한테 좀 배워둘걸. 아니, 무뚝뚝한 놈을 그렇게 만든 리온이한테 배울 걸 그랬나. 말재주가 없으니 이런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다비는 속이 조금 답답해졌다.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에도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계속 자신을 기다렸던 듯 물에서 나오자마자 재하가 바스 타올을 들고 와 얼른 몸에 둘러주었다.
망했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행동에 설레기 시작했다.
***
재하는 다비가 신경 쓰였다. 새벽에 악몽을 꿔서 그런 건지, 평소답지 않게 멍한 표정이었다. 말을 붙여도 ‘어, 그래.’ 같은 영혼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몸은 이곳에 있는데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저녁까지 다비는 계속 멍하기만 했다. 악몽 때문에 그런 거냐고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다비의 상태가 더 안 좋아질 것 같아 묻지 못했다. 대신 다비에게 찰싹 붙어 평소보다 더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재하는 다비가 오늘 밤은 잘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저녁을 먹고 잠이 잘 오는 허브차를 부탁했다. 허브차를 받아와 다비에게 건네주며 소파에 마주 앉았다.
“형, 내일은 뭐 할래요? 어지간한 건 거의 다 하긴 했는데 일주일도 안 남았으니까 여기서만 할 수 있는 것들로 다시 해볼래요?”
“내일은 음….”
차를 호록 마시며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에 재하는 서둘러 다른 계획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와서는 낚시 한 번도 안 했네요? 제가 초보라서 배려해주는 거예요? 형하고 누나들 낚시 좋아하셨던 거 같은데. 오지도하고 다른 바다니까 여기선 다른 물고기가 잡힐 텐데, 너무 지겨워서 안 하는 건가.”
낚시 이야기에 다비가 재하와 눈을 맞췄다. 8시간 20분 만에 자신과 제대로 눈을 맞추는 다비 덕분에 재하는 낚시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고 생각하며 조금 더 떠들어댔다.
“여긴 저 같은 초보도 쉽게 낚을 수 있나 봐요. 먹을 수도 있다던데, 잡기만 하면 다 손질해서… 아, 형은 생선 손질 잘했죠. 그러고 보니 형은 고기도 잘 구웠다. 요리사를 데리고 나갈 필요는 없겠네요. 배도 몰 수 있구나. 형은 진짜 못 하는 게 뭐예요? 혼자서 그렇게 다 잘하니까 제가 좋아할 수밖에 없죠. 다른 사람들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럼 우리 둘이 나갈까요?”
눈 조금 맞춰줬다고 보이지도 않는 꼬리가 재하의 뒤에서 파닥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과 달리 재하는 저렇게 눈을 반짝거리면서 온몸으로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게 익숙한 녀석이었다. 세상에 저밖에 없다는 착각을 심어주는 저 시선에 마음이 기울지 않을 리 없었다.
“재하야.”
“네? 아, 둘이서만 나가자고 해서 걱정하는 거예요? 배에서는 가만히 있을게요. 그냥 순수하게 낚시하려고 꺼낸 말인데….”
“섹스할래?”
차에 술을 탄 것도 아닌데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침부터 오른 열이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말을 뱉자마자 다비는 제가 한 말에 당황해 제 입을 손으로 덥석 막았다. ‘나 생태 사진작가야. 재미로 낚시하는 거 이제 안 해. 재미로 낚시한 건 초딩 때나 그랬고 섬에서도 먹으려고 낚시한 거지. 여기 먹을 게 넘치는데 왜 쓸데없는 살상을 해.’라는 말을 뱉는다는 게 어째서 그런 소리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연관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말이라 말이 헛나왔다고 변명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당황한 다비는 허둥거리며 말을 보탰다.
“그, 그러니까 우리 명색이 섹스 파트너잖아. 그런데 정작 아무것도 못 했고. 생각해보니까 네가 전부 나한테 맞춰주느라 우리 진도가 안 나간 것 같아서 빚진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이래서는 그냥 나만 놀다 가는 것 같으니까 네 목적도 들어줄 때가… 아이 씨, 나 뭐라냐. 아무튼, 그렇다고.”
말을 할수록 없어 보이는 변명에 다비는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팍 구기며 혀를 쯧, 하고 찼다. 차라리 변명하지 말고 그냥 제대로 말할걸. 너하고 섹스하고 싶다고 대놓고 말했으면, 낭만은 없어도 마음은 전해지지 않았을까 싶어서 조금 후회됐다.
재하는 다비의 변명에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권유해준 건 고맙지만, 그런 이유라면 전 괜찮아요. 형이 내킬 때 해도 괜찮고요. 지금도 충분히 받아주고 있잖아요. 게다가 갑자기 왜 그런 말이 나온 건지 이해가 잘 안 돼서 선뜻 그렇게 하자고 대답하기가 그래요.”
“받아주긴 내가 뭘 얼마나 받아줬다고. 나는 아직 네 고추 구경도 못 했…. 하, 말을 말자. 오늘은 내가 입 열면 안 되는 날인 것 같다. 그리고 오해하는 게 있는데, 하기 싫어한 적 없어. 그냥 오늘 하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 꺼낸 말이야. 네가 싫으면 다음에….”
“정말 형이 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형이 지금 저하고…. 왜요? 갑자기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재하가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자신이 뭘 했기에 다비가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으니 자꾸 의심스러웠다. 악몽 때문에 그냥 푹 자고 싶어서 그런 걸까? 마침 옆에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 충동이 들었나? 그보다 어느 시점에 갑자기 하고 싶어진 거지? 다비가 자신을 아직 남자로 보지 않고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재하의 머릿속에는 물음표만 가득해졌다.
“형. 저는 정말 괜찮은….”
“아니, 섹스 한 번 하자는데 뭘 그렇게 고민해. 내가 지금 하고 싶다고. 네 고추 떼준다고 말하잖아. 왜, 하기 싫으냐? 그럼 그만두든가.”
“아뇨. 할게요. 하고 싶어요. 아니, 하고 싶었는데 형이 왜 갑자기 이러는지 궁금해서 그랬어요. 안 하려는 거 아니죠?”
온 기회를 마다할 재하가 아니었다. 망설였던 것도 다비가 후회할 것 같아서 그랬던 거지, 자신은 오래전부터 바라던 상황이었다. 마음이 서로 통하고 사랑을 속삭이며 근사한 첫 경험도 좋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비가 먼저 원했고, 좋은 곳에서 첫 경험을 하게 되는 거니까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속궁합이 맞아서 다비가 더 좋아해 줄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할 만큼 재하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기서 거절하면 다비가 먼저 원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 같았다.
재하는 간절함을 담아 다비와 눈을 맞췄다.
“형.”
“싫은 건 아닌가 보네. 그럼, 일단 씻자.”
다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하의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려 웃었다.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재하도 다른 욕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