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무려 대표 둘이서 사내 연애를 하니까 이제 와서 뭐 사칙으로 막을 순 없다지만, 그래도 일에 지장은 가지 않아야지.”
계약자는 애인 간의 불화 및 결별을 이유로 무단 결근 혹은 근무지 이탈을 하지 않는다.
계약자는 애인 간의 불화 및 결별을 이유로 회사 업무를 거부할 수 없다.
계약자가 완전한 결별을 원할 시, 업무 조정 및 환경 정리 과정을 거칠 때까지 퇴사를 유예한다.
만일 이를 위반할 경우 위약금을 지불한다. 단, 위약금은 계약자의 노동력으로 대체할 수 있다.
“결별?”
삐딱한 목소리가 글자를 읽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무룩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산오가 짜증스레 서류를 꼬나보다가 시선을 혜강에게로 옮겼다.
“저주하는 건가?”
“보험이라니까.”
어느 순간부터 혜강은 은근슬쩍 산오에게 반말을 쓰고 있었다. 산오 역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봤을 때 형들 진짜 엄청나게 싸웠다가 풀었다가 싸웠다가 풀었다가 할 것 같거든.”
“야, 우리가 무슨…….”
“그때마다 임무 내팽개치고 잠수 타고 청승 떨면 내가 다 수습해야 되거든? 그런데 그러면 내 머리털이 다 빠질 것 같거든?”
“…….”
“그러니까 사인해. 여기서 무사히 일하고 싶으면.”
혜강이 예쁘게 웃었다. 크지 않은 덩치에서 뿜어내는 압박은 놀랍게도 무궁화 5단 둘을 모두 제압했다. 혜강은 곧 대표 헌터 둘의 사인을 챙겨 일어설 수 있었다.
“며칠 동안은 푹 쉬어. 아직 회사 시스템 정비를 좀 해야 되거든.”
긴급 임무는 생각보다 절차가 좀 복잡하더라고. 혜강이 문 쪽으로 걸어가며 투덜댔다. 그러고 보니 연이은 고강도 근무로 뽀송뽀송하던 피부가 조금 까칠해진 것 같기는 했다. 이연이 노파심에 한마디 건넸다.
“야근 수당 잘 챙겨 가.”
“당연하지.”
듬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혜강은 이 회사의 누구보다 똘똘해 보여서 걱정을 덜었다.
“그럼 우린 휴가네? 뭐 할까? 어디 놀러나 갈까?”
이연이 산오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산오는 네 맘대로 하라는 듯 심드렁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침 무언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내일 오전은 안 돼.”
“엥, 왜?”
나 몰래 임무라도 하나 받았나? 이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산오는 조금 느릿하게 대꾸했다.
“초관청에 잠깐.”
“초관청?”
약간의 위화감을 느낄 만한 침묵이 흘렀다. 이연이 그에 대해 무언가 반응하기도 전에, 산오가 말을 이었다.
“초전력 신청을 해야 하지 않나.”
동그란 눈매가 서서히 벌어졌다. 산오는 드물게 시선을 테이블 어딘가에 맞춘 채 움직이지 않았으나, 이연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는 것은 귀신같이 알아챈 듯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이연은 그 모습을 지적하는 대신 산오의 목에 팔을 감고 그를 끌어당겼다. 커다랗고 따뜻한 몸이 순순히 허리를 숙였다. 늘 그랬듯이.
“재미있을 거야.”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댄 이연이 기쁘게 속삭였다. 어린아이처럼 흥분이 가득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너도 분명히 나랑 하는 초전력을 좋아하게 될걸.”
그 말에는 전제가 있었다.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던 산오의 눈매에 아주 조금, 힘이 풀렸다.
마구 당기는 손을 도무지 거부할 재간이 없으니 마주 잡는 수밖에 없었다. 아주 예전의 어느 날, 홀로 남겨진 그에게 망설임 없이 손을 뻗는 아이의 손을 붙잡은 그때처럼.
“당연히 해야지.”
훈훈한 분위기를 박살 낸 건 문간을 나가려다 멈춘 혜강의 목소리였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들렸다. 심드렁한 얼굴의 혜강이 지적했다.
“변이종 전담 회사는 소속 헌터의 60% 이상이 초능력자 전투 능력 평가 시험에 참여해야 한다. 이거 못 지키면 과태료야. 몰랐어?”
몰랐다. 이전의 차금은 이연만 출전하면 무조건 100%였으니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이연의 놀란 얼굴에 대고 혜강은 단단히 못 박았다.
“내가 있는 회사에 쓸데없는 과태료는 없어.”
빙긋 웃는 귀여운 얼굴이 오늘따라 철두철미하게 보였다. 퇴직 이전까지 정이연과 제산오, 두 사람의 성실한 초전력 참여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
이번 초전력은 역대 가장 성대하다는 규모에 비해 실전 장소 자체는 황량했다.
바깥에서 보이는 전투 구역은 사방으로 높게 둘러쳐진 벽만 덜렁 있는 상태였다. 안전 요원들이 벽을 지키고 서 있었고, 호기심에 가득 찬 시민들이 다가서려 할 때마다 통제했다. 허가받지 않은 드론이 접근하면 주저 없이 회수하는 모습도 간혹 발견되었다.
그 안도 상황은 비슷해, 온갖 자연 경관이나 도시 풍경이 난무하던 평소와 달리 판판한 시멘트 바닥뿐이었다.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지형 설정 기능이 완전히 철거되었다는 증거였다. 간혹 무인 카메라와 드론의 렌즈만 반짝거릴 뿐이었다.
무궁화 5단의 경기가 진행되는 곳은 도시의 전투 구역 중 가장 넓은 17 전투 구역이다. 스케일이 큰 공격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다 보니 무궁화 5단의 초전력은 늘 그곳에서 진행되었다.
“와, 휑하긴 휑하다.”
17 전투 구역에서 한참 떨어진 건물의 널찍한 방 안, 전투 구역 내 실시간 촬영 화면이 송출되는 모니터 앞에 선 성찬이 중얼거렸다. 그의 뒤로 등받이가 높은 1인용 소파가 간격을 맞추어 다섯 개 배치되어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초신장을 착용하는 헌터들은 초능력관리청 안에서도 특히 안전에 철저한 초수대 내부에 마련되어 있는 보안 휴게실에 먼저 모인다. 의식이 없는 상태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가상 신체에 집중할 때에는 평소보다 무방비해질 수 있다 보니 취하는 안전 조치 중의 하나였다.
“이연이는 처음이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
“아, 네.”
뒤를 돈 성찬의 친절한 말에 모니터 안을 맹하게 보고 있던 이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다른 사람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뭐야? 박성찬. 갑자기 착한 척이야.”
“뭐 잘못 먹었습니까?”
“네 걱정이나 하는 게 좋을걸.”
특히 마지막 말에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일제히 날아든 비난에 성찬의 얼굴이 금세 찌그러졌다.
“하여튼 다들 성질 하고는……. 봤지? 저런 인간들하고 친하게 지내지 마.”
“정이연 씨, 박성찬 씨는 초전력 들어가면 가장 먼저 당신을 패대기칠 겁니다.”
“아니, 능력 발휘할 시간은 줄 거거든?”
“그게 더 악질이야. 애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니?”
“아, 그럼 초전력 들어가서 애를 모셔? 상전 취급 하냐고?”
아웅다웅하는 5단들에게서 전투 전의 긴장감이라곤 한 톨도 없어 보였다. 이미 익숙해서 그렇겠지. 이연이 느리게 숨을 들이마셨다. 본 능력으로는 처음인 초전력이었다. 아닌 척해도 조금 긴장이 되었다.
이번 초전력에 참여하는 무궁화 5단은 총 다섯 명. 제산오, 정이연, 김유정, 진희수, 박성찬. 이전 초전력들과 비교했을 때 무난한 참여율이었다.
다섯 사람 중 이연이 전투 스타일을 아는 사람은 제산오 한 명뿐. 이미 몇 번은 서로 초전력에서 겨뤄 봤을 다른 5단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정보력이었다. 유리한 점이 있다면 이연의 능력 운용 방식을 다른 5단들도 모른다는 점 정도일까.
이연은 아직도 애를 봐주니 마니 하는 설전을 벌이는 무궁화 5단을 슬쩍 바라보았다.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할 만한 게임일 것이다.
“초신장 나눠 드리겠습니다.”
초수대원이 다가와 기계를 하나씩 나눠 주었다. 팔찌 형식으로 된 초신장은 초전력 때 보조 도구로 착용하던 초전력 팔찌와 비슷한 디자인이었으나, 조금 더 견고하고 심플하게 생겼다. 손목에 붙여 잠금장치를 누르자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피부에 부드럽게 달라붙었다.
“제산오, 벽은 끌어 쓰지 마라. 벽 무너트리면 안 돼.”
“한심한 소릴 잘도 지껄이는군.”
산오는 정말로 혐오스럽다는 얼굴로 희수를 바라보았다. 때아닌 진정성에 희수가 조금 시무룩하게 자신의 소파에 앉았다. 유정이 어깨를 토닥이며 괜찮아, 저 녀석은 누가 키워도 저렇게 자랐을 거예요, 하고 위로해 주는 소리가 들렸다.
“야, 국장님한테 너무 그러지 마.”
“진희수 편드는 건가?”
산오가 뚱한 얼굴로 이연에게 다가왔다. 시선으로만 흘끗 이연의 팔찌를 확인하듯 쳐다보는 모습이 묘하게 귀여워, 이연은 괜히 어리광을 부렸다.
“이거 이렇게 착용하는 거 맞아? 중간에 착용 풀렸다가 가상 신체 없어지면 어떡해?”
“인상적인 데뷔전이긴 하겠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산오는 이연의 손목을 쥐고 팔찌가 제대로 착용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손목줄을 슬쩍 쓰는 손가락이 따뜻한 온기를 전해 주었다.
“괜찮은 곳을 몇 군데 알아 뒀다.”
“응?”
뜬금없는 말에 이연이 고개를 들었다. 산오가 무뚝뚝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끝나고 집 보러 가자.”
여기서 뽀뽀하면 안 되겠지. 이연은 간신히 그런 생각을 삼켰다. 사납고 재수 없지만 그만큼 다정하고 성실한 남자를 향한 애정이 울컥울컥 차올랐다. 불쑥 팔을 뻗은 이연이 악수하듯 산오의 손을 쥐었다. 충동만큼 강하게 손을 쥐었다 놓은 이연은 환하게 웃었다.
“완전 좋지.”
기나긴 임시 보호 끝에, 드디어 가족이 생겼다.
그러니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다. 따뜻하고 행복한, 언젠가 아이가 읽었던 동화의 한 장면처럼.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본편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