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49)화 (249/250)

#249

“취향이 일관적이군.”

뒤따라온 산오가 툭 내뱉었다. 그 말에 정신이 든 이연이 헌터실 내부로 한 발짝 더 내딛었다.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환경.

“그러게.”

소파에 털썩 앉자 푹신한 촉감마저도 비슷했다. 이전 사무실의 소파는 이연의 능력으로 만든 거니 같은 제품을 찾을 수는 없었을 텐데, 혜강이 정말로 신경을 쓴 모양이다. 배려가 섬세했다.

산오 역시 이연의 옆자리에 따라 앉았다. 몸을 젖히고 다리를 삐딱하게 세운 불량배 같은 자세였다. 그는 늘 세상 혼자 살 것처럼 건방지게 앉는 주제에 꼭 이연의 옆자리를 고집했다. 그 부분이 문득 귀엽게 느껴져서 이연은 슬쩍 웃었다.

“사무실도 같이 쓰고, 임무도 같이 하고, 같은 집에 살고, 이 정도면 진짜 가족 아니냐?”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에 산오가 눈동자만 흘끗 돌려 이연을 바라보았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건 그다음이었다.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해.”

어라. 이연이 눈을 깜빡였다.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그 위화감을 곱씹어 보기도 전에, 산오가 중얼거렸다.

“이미 늦었지만.”

그 말에는 희미한 빈정거림이 담겨 있었다. 이연이 반사적으로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뭐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산오는 정확한 대답 없이 비슷한 말만 반복했다. 짙은 그늘이 져 있는 눈동자가 이연을 담았다.

“넌 이제 못 물러.”

“…….”

“이전에 경고한 문제다. 이제 와서 다른 소리 하면 죽는다.”

말을 건넨다기보다는 다짐하는 것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세뇌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산오가 다시 되뇌었다.

“넌 늦었어.”

뭐 잘못 먹었나? 이연은 고저 없이 그런 말을 내뱉는 산오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영 뜬금없는 말만 계속하는 게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이연이 심각해진 얼굴로 매끈한 낯을 살펴보다가, 문득 벌떡 일어섰다. 간단히 몸을 돌리는 것만으로 산오의 정면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야가 전복되어 있었다.

“난 아무것도 안 물러.”

“…….”

“너랑 같이 헌터 할 거야.”

산오는 언제나 내려다보았던 그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천장에서 내리쬐는 등의 빛이 이연의 뺨에 닿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연은 정말이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하나도 바뀐 것이 없었다. 저 빌어먹게 눈부신 반짝임마저도.

“그러니까 왜 그렇게 말하는 건지 설명해 줘.”

언제나 이토록 간단하게 그를 무력하게 만든다.

손을 뻗어 뺨을 감싸 쥔 산오가 이연을 그대로 끌어당겼다. 커다란 등에 빛이 가려지고 하얀 남자는 그림자 속에 파묻혔다.

“나는 너를 따라 했다.”

이연은 품 안에 가만히 안겨 산오의 목소리를 들었다. 말을 할 때마다 진동이 몸을 통해 울렸다.

“계속 너만 따라 했어.”

이연의 옆자리를 차지하겠다고 결심을 한 순간부터 줄곧 산오는 이연을 따라 했다. 그의 생각, 사고방식, 행동.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행동하는 것 역시 간단했다. 모두가 그를 영웅이라고 불렀으니 아마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일 터였다. 그들은 원본도 모르지 않는가. 아류가 설치기엔 적절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너를 아무리 따라 해도 같아질 수는 없었다.”

따라 한다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다.

산오는 이연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행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와 계산하고 행하는 이 사이에는 아주 깊은 간극이 존재했다.

모순적이게도, 산오는 이연처럼 말하고 행동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것을 느꼈다. 비슷한 것처럼 꾸밀 수는 있어도, 실제로 비슷하지도 않을뿐더러 완전히 같아지는 건 어림도 없었다.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가 씨를 말리고 싶어 할 정도로 싫어하는 이들과 더 닮아 있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타인의 목숨과 자신의 이득을 쉽게 저울에 놓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간단하게 후자로 기울어지는 사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포기할 줄도, 양보할 줄도 모르는 사람.

‘저희 꽤 닮았잖아요?’

그는 동의의 의사를 침묵으로 표시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태진의 사고방식도, 행동 양식도, 하는 말도 훤히 예측했던 건 제산오가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정이연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 하는 말을 훤히 예측했던 건 제산오가 그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는 이상 산오는 절대로 이연처럼 행동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누군가는 다르다는 걸 알아차리겠지.”

이연과 함께 하는 초전력을 내내 바라 왔으면서도 정작 공개로 진행된다는 말에 주춤했다. 능력의 활용, 특히 전투 습관은 생활 습관과 많은 부분에서 비슷했다. 본인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그리고 살아온 인생에 영향을 받았다. 이연의 전투 방식은 분명 이연다울 터였다.

그렇다면 산오의 전투 방식은?

두 사람이 한 프레임에 잡히면, 화려한 날개 사이에 숨어 있는 볼품없는 몸뚱이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 줘야만 나는 빛과 저 혼자 환하게 내뿜는 빛의 차이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한 명, 두 명, 세 명……. 그렇게 퍼지다가 사실 산오가 이연의 옆에 서기에는 어림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면.

정이연이 그걸 알게 된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이연을 감싸 쥔 손에 설핏 힘이 들어갔다. 산오는 계속 생각하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정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일에 쉽게 해결책을 찾아내는 산오에게는 낯선 상황이었다. 방황하는 어린아이처럼 같은 길을 하염없이 돌고 돌다가 문득 멈춰 선 것은 어떤 가정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너랑 같은 인간이 되고 싶어.”

애초에 방법이 없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뭐든 할 수 있어.”

무슨 짓을 해도 정이연 같은 인간이 될 수 없는 거라면?

“가르쳐 줘.”

산오의 목소리는 여전히 고저도 없이 나직했지만, 이상하게 헐떡이는 것처럼 들렸다.

“너와 다른 인간이고 싶지 않아. 네 모든 것을 알려 줘. 누가 봐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이연은 절박하게 느껴지는 음성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뭐든 맞출 수 있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

“정말이다.”

이연이 그 말에 나를 닮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할 수도 있었다. 달라도 괜찮다고, 상관없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얼마 전의 태진에게 했던 것처럼, 오래전의 산오에게 했던 것처럼.

그러나 정작 흘러나온 것은 뜬금없는 말이었다.

“나는 노을을 좋아하는데, 좋아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고집스러운 목소리가 따라왔다. 아이를 어르는 것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바다도 좋아해.”

“나도.”

“이 도시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한다.”

“난 너도 좋아하는데.”

“…….”

고장 난 스피커같이 목소리가 뚝 끊겨 버린 침묵을 들으며, 이연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산오의 어깨를 잡고 가만히 몸을 일으킨 이연이 산오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같은 높이에서 만났다. 이연은 짙은 초록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도 좋아할 수 있다며?”

대답 없이 빤히 바라만 보는 눈동자는 평소보다 색깔이 어둡고 그늘이 져 있어서, 동공과 홍채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 동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연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동자를 한순간도 피하지 않았다.

아주 길고 긴 침묵이 다시 지난 후에야, 산오의 입술이 달싹였다.

“할 수 있어.”

그제야 이연이 조금 웃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잘 몰랐지만, 어쩌면 산오 본인조차도 잘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그는 늘 노력을 했다. 헌터로 살아오는 내내 바빴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이연은 산오가 준비될 때까지 조금 기다려 주기로 했다. 괜찮다는 말은 그때 해도 늦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옆에는 계속, 제가 있을 테니까.

“형, 있잖…… 둘이 뭐 해?”

혜강이 달칵 문을 열고 들어오다 멈칫했다. 금방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붙어 있는 자세를 수상쩍은 시선으로 훑는 것이 경고문을 프린트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듯했다. 이연이 후다닥 떨어져 산오의 옆에 앉았다.

“어, 어. 왜?”

“…….”

혜강은 얼굴 전체에 만발한 마뜩잖은 기색을 지우지 않았지만, 다행히 별말은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은 혜강이 테이블에 서류 두 부를 내려놓았다.

“이거, 형들 사인 좀 받으려고.”

“이게 뭔데?”

라고 물었으나, 이연은 물음과 동시에 서류 맨 첫머리에 붙은 글자를 읽었다. 합의서.

“보험이야. 혹시 모르잖아.”

혜강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그 아래 쓰여 있는 글자까지 막힘없이 눈에 들어왔다. 본 계약자는 사내 연애에 관련하여 당사자와 다음 사항을 계약, 합의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