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사무실을 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사무팀이 맡았다. 산오와 이연은 이 일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무팀의 암묵적인 합의 덕분이었다.
그래서 사무팀이 이전 사무실을 처분하고, 새 사무실을 계약하고, 회사 정보 변경과 업무 최적화 등을 위해 뛰어다닐 동안 현장팀인 산오와 이연은 혜강이 건네준 상급 임무 몇 가지나 수행했다.
임무 하다 죽어도 고소하지 않겠다는 항목에 동의 사인을 할 때에는 조금 긴장하긴 했으나, 혜강이 상급 임무는 처음인 이연의 상황을 배려해 그나마 수월한 것으로 골라 준 데다가 베테랑인 산오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완료할 수 있었다. 오히려 너무 싱겁게 느껴져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런 사정으로, 현장팀은 가구 정리를 할 즈음에야 새 사무실에 처음 방문했다.
“와, 이런 곳은 어떻게 구했어?”
그나마도 이연과 산오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혜강과 종찬, 종희가 오래전에 와서 사무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혜강이 낑낑대며 옮기던 책상을 함께 들어 준 이연이 감탄했다.
새로운 사무실은 이전 차금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기껏해야 서너 블록 떨어진 정도.—덕분에 이연은 근처의 단골집들과 눈물의 이별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인테리어나 구조는 이전 사무실과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새로 리모델링을 했는지 반짝반짝한 새 자재 냄새가 온 공간에 진동했고, 무려 회의실과 헌터실, 휴게 공간이 딸려 있는 사무 공간이 모두 분리된 형태였다. 이전 사무실에서 들고 온 평상을 놓을 수 있는 옥상 정원 역시 잊지 않고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 사무실은 유지비가 크게 안 들어서 인건비 빼도 회사 재정이 넉넉하긴 했거든. 과하게 싼 월세와 관리비 덕분에 말이야.”
‘과하게 싼’ 부분에 묘한 강세가 들어간 것처럼 들렸지만 책상이 무거워서 힘주느라 그런 거겠지? 이연은 모른 체했다.
“용케 괜찮은 곳을 구했군요.”
그리고 아직 정리도 마치지 않은 사무실을 축하해 주겠다며 거대한 난을 가지고 행차한 제산의 사장, 문서현이 심술궂은 목소리로 칭찬했다. 이연이 옆에서 떨떠름하게 물었다.
“……사장님 안 바쁘세요?”
“경쟁사 탐문도 업무입니다.”
탐문치고는 매우 공개적인 방문이었다. 사무실 안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중에야 종찬과 종희의 퇴직 사실—그 두 사람은 행정상으로 제산의 소속이긴 했으므로—을 알게 된 서현은 헐레벌떡 차금에 방문했다. 그의 용건은 간결했다. 기껏 이사까지 하면서 왜 미리 이야기해 주지 않고 외간 빌딩에 자리를 잡았냐는 것이다.
‘아무리 정이연 씨여도 섭섭합니다. 저희 건물에도 자리 많은데요!’
‘에이……. 거길 어떻게 빌려요.’
너무 휘황찬란해서 무서울 정도인 제산의 빌딩에 사무실을 빌리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월세나 관리비는 둘째 쳐도 다른 근무 직원들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특히 그, 이사들의 관심을……. 이연의 단호한 도리도리에 서현은 주제를 바꿨다.
‘무려 산오 님의 새 보금자리 아닙니까. 산오 님의 거취가 또 바뀌었는데 제가 그걸 이제 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절 이렇게 소외시키시다니요.’
‘원래도 속속들이 알고 다니진 않았잖아요. 일도 바쁘시고…….’
그러나 상식적인 반박에 바로 졌다. 서현이 괜히 종찬과 종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런 식으로 굴면 너희 해고야!’
‘이미 퇴직했는데요.’
‘…….’
이 일은 절대 잊지 않겠다며 원망 섞인 눈으로 노려보던 서현은 기어코 이사 날까지 찾아와 구시렁거리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가하면 짐 좀 들어 달라는 종찬의 요청—을 빙자한 구박—을 받고 박스 나르기에 동원되었다.
오늘 안에 정리를 마치려면 모두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삐딱하게 벽에 기대 있던 산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산오 형, 모니터 포장 좀 풀어서 책상에 올려 줘.”
혜강이 산오의 옆에 줄지어 놓여 있던 커다란 박스를 눈짓했다. 얼핏 봐도 대여섯 대가 넘는 모니터 박스는 아직 포장도 채 벗기지 않은 상태였다.
“…….”
산오는 귀찮다는 얼굴로 잠깐 미적거렸으나, 이연이 도와주겠답시고 다가와 박스를 눕히려고 하자 한숨을 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곧 바닥에서 올라온 가느다란 철사들이 박스와 포장을 순식간에 해체하고, 검은 몸체를 들어 올려 책상에 가지런히 올렸다.
여섯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니 내부는 빠른 속도로 정돈되어 갔다. 커다란 가구가 차곡차곡 들어오고 배치되자 제법 번듯한 사무실 티가 났다. 창가에는 서현이 가져온 화분도 놓였다.
“나머지는 자료 정리랑 자잘한 정돈 정도니까, 이건 각자 알아서 하자. 다들 고생하셨어요.”
허리를 펴며 끄응, 하고 애늙은이 같은 신음을 흘린 혜강이 모두를 둘러보았다. 너 나 할 것 없이 옷과 얼굴 여기저기에 먼지가 들러붙어 꼴이 엉망이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유일한 외부인인 서현이었다. 제 휴대폰을 확인한 그는 옷을 털고 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럼 다음에 뵙죠.”
“다음이 또 있어요?”
태연한 인사에 이연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서현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걸쳤다.
“이사들이 얼마나 절 닦달하는데요. 고작 두 사람 던다고 끝날 무게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긴 했으나, 엄포를 놓은 것처럼 막 드나들지는 못할 터였다.
무소속 헌터로 활동하는 제산오와 타 회사 소속으로 활동하는 제산오는 달랐다. 차금처럼 작은 사무소에 제산처럼 커다란 기업이 계속 붙어 있다는 인상을 주면 무슨 헛소문이 어떻게 퍼질지 모르는 것이다. 빌미는 사전에 차단하는 게 안전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종찬과 종희에게만 맡기지 말고 이전에도 직접 와 볼걸. 서현은 씁쓸하게 산오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훑었다. 어느새 연결 고리가 다 끊기고 없었다. 후회는 언제 해도 늦었다.
“산오 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정이연 씨.”
서현이 손을 내밀자, 이연 역시 먼지투성이인 손을 대충 문질러 닦고 마주 잡았다. 서현은 저보다 매끈하고 작은 손을 힘주어 흔들며 눈썹 끝을 아주 조금 늘어트렸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묘한 섭섭함과 아쉬움이 밀려드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문서현.”
무뚝뚝한 부름에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서현은 악수를 풀지도 못한 채로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산오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도 내 이름을 도용한 책임은 져야 할 거다.”
“…….”
심드렁한 표정은 제 회사 앞에 그가 구한 사람들을 내밀었을 때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서현은 그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당연하죠. 평생 집니다.”
가벼운 말투에는 강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서현이 돌아간 후, 남은 사람들은 다시 정리에 몰두했다. 그러나 이제 남은 부분이라곤 개인 짐 정리 정도였기 때문에 따로 들고 온 물건이 없는 산오와 이연은 멀뚱히 서 있는 게 다였다. 그런 두 사람을 발견한 혜강이 손짓했다.
“형들은 저기 가 봐.”
혜강이 가리킨 곳은 ‘헌터실’이라는 금속 명패가 달린 문이었다.
“형이랑 산오 형 방은 따로 분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뺐어. 필요한 가구는 대강 넣어 놓긴 했는데 두 사람이 쓸 방이니까 거기 정리는 둘이 알아서 해.”
“오, 으응.”
이연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반투명으로 분리된 벽을 흘끗였다. 얼핏 보기에도 제법 넓어 보였다.
“그리고 대충 뭐 하는지는 보이니까 허튼짓하지 마. 방음도 완벽하게는 안 되니까 참고하고. 걸리면 진짜 사내 음란 행위 금지 대문짝만하게 써 붙인다.”
“뭐, 뭘 해. 아무것도 안 하거든?”
지레 찔린 이연의 반박에 혜강은 코웃음만 치고 멀어졌다. 말을 붙일 여지도 주지 않고 제 일을 하러 떠난 혜강의 쿨함에 압도된 이연이 머쓱하게 헌터실 쪽으로 다가갔다.
벽과 마찬가지로 반투명으로 만들어진 문을 밀자 부드럽게 열렸다. 불을 켜 내부를 확인한 이연의 눈이 한순간 커졌다.
헌터실은 이전 차금의 사무실과 인테리어가 거의 똑같았다.
컴퓨터가 올라간 책상, 넓은 소파, 중간에 놓인 테이블, 커다란 캐비닛 몇 개와 서랍장 하나. 물론 가구들은 모두 반짝반짝한 새것이었지만, 이전에 쓰던 것들과 거의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라고 해 봐야 책상이 두 개로 늘었다는 것과 그 위에 각각 산오와 이연의 이름이 새겨진 명패가 놓여 있다는 것, 그리고 벽에 붙은 초능력자 등록증 역시 두 장이라는 것 정도였다.
이연이 책상 뒤에 붙은 액자를 멍하니 응시했다. 초능력자 등록증. 무궁화 5단, 정이연. 무궁화 5단, 제산오. 나란히 걸린 등록증은 마치 쌍둥이 같았다.
언젠가 이런 풍경을 상상했던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