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47)화 (247/250)

#247

“야, 그래도 곤란에 빠졌으면 도와주긴 해야지.”

“왜요, 무슨 곤란이었는데요?”

“아니, 민 씨가 김유정 헌터 뒷담 까다가 팬한테 걸려서 곤혹을…….”

어디선가 날아온 질문에 무심결에 대답한 이연이 위화감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어느새 주변이 조용해져 있었다. 시선 끝에 창백해진 민의 얼굴이 걸렸다. 잠시 후,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하학, 형! 유정 누나 뒤에서 욕했어요? 왜 앞에서 안 하고?”

“허민 씨, 뒷담화는 좋지 않은 행동입니다.”

“그걸 또 팬한테 걸린 게 진짜 웃기다. 나 민 오빠 봉변당한 것 같은 얼굴이 너무 상상돼.”

“하……. 허민, 너 내 욕하고 다니니? 그래 봤자 내 명성에는 어림도 없어, 인마.”

“그런 거 아니라고…….”

짓궂은 놀림 사이로 금세 몇십 년은 늙은 것 같은 민의 목소리가 흐늘흐늘하게 새어 나왔다. 아니,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미안합니다……. 이연이 멀리 앉아 있는 민에게 소리 없이 사과하자, 괜찮다는 듯한 손짓이 힘없이 돌아왔다.

“큼, 다들 정숙해 주십시오. 이번 소집 안건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진정한 것은 희수였다. 희수는 언제 민을 놀렸냐는 듯 엄숙한 얼굴로 들고 온 서류들을 탁탁 두드려 열을 맞췄다.

“이미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지형 설정 기능이 폐기됨에 따라 초전력 진행 방식을 모두 초신장 사용으로 바꿀 계획입니다.”

회의실 내의 사람들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공유된 정보였던 탓이다.

“그런데 이 방식이 아무래도 하위 헌터들과 대중들에게는 낯설다 보니 일부 사람들은 거부감을 표하는 듯합니다. 초신장의 기능 자체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고요. ”

하급 헌터들 중에서는 오로지 초전력만 몇 개월 동안 준비하는 헌터들도 존재한다. 그만큼 대중과 업계의 주목도가 높은 이벤트였다. 그런데 초전력 날짜를 얼마 남기지도 않고 방식을 완전히 바꿔 버린다니, 온갖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만반의 준비를 했던 헌터들에게는 날벼락일 것이다.

벌써 SNS와 방송에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수두룩했다. 시스템 검수를 못 한 건 초능력관리청의 잘못인데 왜 헌터들이 피해를 받아야 하느냐는 여론 역시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그래서 초능력관리청에서는 가이드 겸으로, 이번 무궁화 5단의 초전력을 초능력자 한정 공개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무궁화 4단 경기 역시 같은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고요.”

그 말에 모두의 얼굴에 놀란 빛이 스쳐 지나갔다. 헌터가 아닌 무궁화 1단까지 포함한 국내 초능력자 인구는 약 100만 명. 이제까지 진행된 초전력 중에 이만한 스케일로 경기가 공개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압도적인 초능력이 타인에게 위화감을 심어 줄 수도 있다는 우려와 타국에 전력이 유출될 수 있다는 경계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사항을 제치고 생각할 정도로 초능력관리청에 강수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물론 다른 초전력이 그랬듯이, 이번 초전력 역시 필수 참여는 아닙니다. 일반인 공개로 진행되는 만큼 너무 잔인한 전투법도 자제를 권고하고요. 특히 많은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야 할 테니, 이 부분을 신중하게 고려하고 결정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형 설정 기능을 사용할 수 없으니, 관중석 역시 만들 수 없었다. 때문에 초능력자만 접속할 수 있는 링크를 통한 생중계 스트리밍으로 진행할 예정이었다.

직접적인 시청 권한은 없어도, 같이 시청한다든가 하면 비초능력자 역시 충분히 경기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초능력관리청 또한 엄격하게 보안을 요구하지는 않을 예정이었고.

본인이 나서서 잠깐 인터뷰를 하거나 사진을 찍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목적은 초전력 중계니 헌터들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찍지는 않겠지만, 촬영하다 보면 얼굴 공개 역시 불가피한 부분일 터였다. 그들이 능력을 쓰는 영상을 원한다면 누구나 접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락 거리 한번 되어 달라, 이 말이죠?”

책상에 팔을 괴고 턱을 얹은 유정이 느긋하게 말을 던졌다. 노련한 헌터답게 그녀는 단번에 초능력관리청의 의도를 간파했다. 초전력 방식 변경에 대한 헌터들의 반발도 이유 중 하나인 것은 확실하나,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현재 이태진 건으로 초능력관리청을 향한 비난이 날로 거세지고 있었다. 도시의 핵심 안전 기능을 사기꾼에게 맡겨 두고도 십 년이 다 되는 시간 동안 그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 그걸로도 모자라 사기꾼을 무궁화 5단으로 앉힐 뻔했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치명적인 오점이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헌터들이 얼마나 반발을 하든 간에 지형 설정 기능을 계속 쓸 수는 없었다. 지형 설정 기능은 반드시 폐기해야 하는 동시에, 초전력 역시 성공적으로 개최되어야 했다. 이 두 가지 과제를 그럴듯하게 수행하려면 커다란 볼거리가 필요했다. 대중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그들이 좋아하지 않고는 배기지 않을 볼거리가.

“저는 빠질게요.”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민이었다. 그는 조금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벌써 긴장돼서 토할 것 같아요.”

이연이 나올 것 같아 오랜만에 참여하려고 오긴 했지만, 초전력을 공개로 진행한다는 건 예상에 전혀 없던 일이었다. 제 실력을 발휘하지도 못할 터였고, 그렇게까지 이번 초전력을 할 절박한 이유도 없었다. 민의 기권에 모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전 상관없어요. 어차피 얼굴도 다 알려져 있고.”

“저도.”

유정과 성찬은 선선히 동의했다. 희수 역시 언론에 얼굴을 많이 비췄다 보니 별 상관 없는 모양이었다. 수라는 조금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즉각 성찬의 볼멘소리가 뒤따랐다.

“뭐야, 반참한다며?”

“전투 강도 조절할 자신이 없어. 실수로 팔다리라도 찢었다가 시집도 못 가면 어떡해?”

그녀는 변신 능력을 활용해 신체 일부를 짐승의 것으로 바꾸는 것이 주 전투 방식이었다.

“갈 상대는 있고?”

“죽고 싶냐, 박성찬?”

으르렁거리는 투닥거림 후에 남은 것은 이연과 산오였다.

“둘은?”

“뭐, 저도…….”

이연 역시 이미 능력까지 깐 마당이니 이제 와서 얼굴을 드러낸다는 사실에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정도야 무궁화 5단을 따려고 했던 시점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이기도 했고……. 제산오랑 초전력 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산오를 바라보던 이연이 멈칫했다.

산오가 미간을 희미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넌 싫어?”

이연이 아연하게 물었다. 아니, 물론 민이나 수라처럼 개인차가 있는 문제긴 하지만. 그래도 설마 고민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디 제산오가 남의 시선을 티끌만큼이라도 신경 쓰는 위인이냔 말인가.

산오가 명확하게 대답을 하지 않자, 그러고 보니 쟤는 신비주의였다는 수군거림이 흘러나왔다. 신비주의는 비서들이 지켜 준 거고 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는데……. 이연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굳이 그 부분을 제가 주장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의외의 행동이 영 신경이 쓰여 흘끔흘끔 살핀 산오의 얼굴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희수는 재촉할 생각은 없으니 충분히 고민하고 답해도 된다는 말로 회의를 마무리했다. 뚱한 얼굴로 희수가 있는 전방만 바라보는 것으로 보아, 산오에게 당장 대답할 마음이 없다는 것만은 명백했다.

소집은 금방 끝났지만 사람들은 바로 해산하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저 나누었다. 좀처럼 만날 일이 잘 없으니, 한번 만났을 때 소소한 용건들을 해치우고 가겠다는 의지였다. 주로 자신의 회사로 스카우트할 인재 모집이나 긴급 임무 등의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연이 끼어들 만한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다들 새로운 무궁화 5단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관계로 이연을 화제에 끼우기 위해 안달이었다. 그런 의지로 사람들은 중간중간 일 얘기를 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잡담을 건넸고, 덕분에 이연은 얼결에 다른 사람들과 연락처까지 교환했다. 형이나 누나라고 부르라는 넉살 좋은 인사까지 함께였다.

“드디어 막내 같은 막내가 생기는구나.”

“얘가 제산오하고 동갑이라니, 진짜 믿기지가 않네. 완전 애긴데.”

“혹시 산오가 괴롭히면 얘기해.”

“오, 방법 있어?”

“위로 정도는 해 주겠지.”

꺄르르 터진 웃음과 함께 실없는 대화를 마무리하며 하나둘 일어섰다. 느긋한 한량들처럼 굴었지만 그들은 도시에서 가장 바쁜 헌터들이다. 특별 소집을 위해 간신히 낸 여유도 슬슬 끝이었다.

“우리도 갈까?”

이연이 따라 일어나며 산오에게 물었다. 산오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내내 한 번도 끼어들지 않을 뿐 아니라, 어쩌다 말을 걸어왔을 때도 무시로 일관했다. 워낙 자주 있던 일인지 다른 사람들은 산오가 대답을 하든 안 하든 익숙하게 넘겼다.

그 탓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연이 보기에 산오는 듣고도 일부러 무시했다기보다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시선의 초점이 아주 살짝 흐려져 있는 게 증거였다.

다행히 이연의 말은 들린 모양이다. 산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어색한 분위기에 이연이 괜스레 산오의 눈치를 봤다.

“야, 괜찮아?”

무슨 동작이 그렇게 빠른지 사람들은 이미 다 빠져나가 복도가 한산했다. 침묵 속을 걷다 슬그머니 건넨 질문에 산오의 시선이 이연에게 닿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심드렁한 눈빛이었다.

“뭐가.”

“아니…….”

이렇게 보면 그냥 기분 탓인 것 같기도 하고. 이연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산오를 샅샅이 훑었으나, 산오는 뭘 꼬나보냐는 듯 뚱하게 마주 보기만 했다.

“괜찮으면 됐어.”

그래서 이연은 그렇게만 말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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