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43)화 (243/250)

#243

산오는 분명 이연과 달랐다. 그는 걸핏하면 사람을 협박했고, 위협적으로 굴었으며, 부탁 하나도 순순히 들어준 적이 없었다. 이연이 본능적으로 행하는 대부분의 일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멍청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멍청한 일에 이연이 뛰어들면 반드시 산오가 따라왔다. 자진해서 멍청하다고 여기는 행동을 했다.

산오는 이연을 그대로 따라 하다 보니 영웅이 되었다고 했지만, 사실 이연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타인의 영향을 받는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변화되지는 않는다. 그 안에는 개인의 의지가 분명하게 있었다.

산오는 타인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대해 단 한 번도 받아 내야 할 빚이라거나 적선하듯 베푼 호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가 원래 그런 사람이어서였다.

“제산오는 삼촌이랑 달라요.”

목숨을 잃어도 괜찮다는 서약서에 사인하며, 산오는 매번 사지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구해 낸 대상은 실재했다. 순간의 기억을 품고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동경하며 현재를 살아간다. 희망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연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걔는 진짜라고요.”

그는 정말로 영웅이라고.

*

삐리릭.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방에서 막 밥솥을 확인하던 이연이 거실 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언제나처럼 검은 코트 자락을 휘날리는 산오가 집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딱 맞게 왔네. 얘기는 잘 끝났어?”

산오가 겉옷을 벗자 어디선가 나타난 FT-4가 자연스럽게 받아 들어 드라이 기능을 가동했다. D.S의 손길을 받고 휘황찬란한 프로토 타입으로 진화한 FT-4는 이제 안에 오일 대신 피만 흐르면 거의 인간과 다름없었다.

“언제 왔지.”

“난 좀 전에.”

성큼 다가온 산오가 이연을 끌어안았다. 뺨과 목에 묻어 있던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이태진이 헛소리를 하진 않았겠지.”

“삼촌은 헛소리밖에 안 하잖아.”

농담처럼 대꾸하자 산오가 대답 없이 허리를 쓸었다. 그는 동의의 의사를 침묵으로 표시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연은 널따란 등을 툭툭 두드리곤 품에서 벗어났다.

“손 씻고 앉아. 밥 먹자.”

저녁 메뉴는 된장찌개였다. 이연이 그나마 할 줄 아는 것 중에 산오가 가장 무난하게 받아들이는 음식이었다. 그만큼 번거로웠지만…… 이연의 꿍꿍이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산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해야 했다.

필사의 준비를 아는지 모르는지 산오는 평소와 비슷한 얼굴로 착석했다. 다른 음식이었으면 ‘이딴 걸 먹고 살았다고?’ 하는 얼굴로 이연을 꼬나보기부터 했을 테니 나름대로 괜찮은 시작이었다.

얌전히 앉아 묵묵히 밥을 떠먹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좀 긴장되었다. 그 앞에서 밥 대신 물을 한 모금 들이켠 이연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제산오.”

산오가 말없이 고개를 들어 이연과 눈을 마주했다. 우물거리는 뺨을 홀린 듯 바라보던 이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말이야…….”

“한 거 맞나?”

“응?”

“진짜로 생각했냐고.”

진지한 표정이 사람을 열받게 했다. 이 자식이……. 이연이 울컥하는 마음을 누르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들어 봐. 혹시 다발신이랑 두무기 때 기억해?”

산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연이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어쩌다가 걔네 발견했는지도 기억나? 다발신은 인터넷 괴담 이야기하다가, 두무기는 설화 이야기하다가 그게 변이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잖아.”

이연이 무궁화 5단으로 재판정 난 덕에 차금 역시 회사 등급이 올랐다. 무궁화 5단에게는 개인 임무 할당량이 존재하는데, 이는 소속 회사가 있다면 실적으로 포함된다. 따라서 고위급 헌터에게 들어오는 긴급 임무 몇 가지만 하면 정부 연계 임무나 개인 의뢰를 하지 않아도 됐다. 보수 역시 그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고.

이연의 능력은 다방면으로 응용하기가 용이하니 다른 사람보다 효율이 몇 배는 좋을 것이다. 임무 수행 시간 역시 단축되겠지.

“그런 게 더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이연은 남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해 보기로 했다.

“도시의 다른 괴담들 중에 또 변이종이 관련된 건 없는지 조사해 보려고.”

괴담 수집에서부터 추적, 만일 변이종이 관련되어 있다면 신고 후 처치까지. 소문만을 좇아 도시 곳곳을 누비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산간벽지까지 구석구석 다녀야 할 것이다.

그동안 비어 있을 사무실은 혜강이 지켜 주기로 했다. 태생이 도시 청년인 그에게는 바깥으로 도는 생활이 맞지 않기도 했고, 사무실 역시 누군가의 진두지휘가 필요한 곳이었으므로. 혜강이 사무실을 맡는다면 이연 역시 마음 놓고 초호시를 돌아다닐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혜강이가, 그렇게 되면 아르바이트생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고. 굳이 시킬 일이 없대.”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산오의 눈썹이 삐딱하게 꿈틀댔다. 불량한 기색이 눈동자에 스미는 것을 알면서도 이연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뭐, 회사 등급도 올랐으니 조직 개편 같은 거지.”

이번에는 확실하게 산오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깊게 주름이 팬 미간을 감추지도 않은 산오가 경고했다.

“도발은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다.”

“2단 때야 아무도 주목하지 않으니 대충 얼버무릴 수 있겠지만, 무궁화 5단이 계약서도 쓰지 않은 무급 알바생을 부려 먹는다는 소문이 돌면 곤란하잖아. 그래서 혜강이랑 상의해서 널 해고하는 게 낫겠다고 결정했어.”

“정이연.”

안 그래도 살벌하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져,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분위기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점 이하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연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혜강이 쪽은 몰라도 내 쪽은 인력이 좀 부족할 것 같아.”

“…….”

“현장직을 혼자 하려면 아무래도 외롭기도 하고 말이야.”

불행히도 달아오른 귀까지 숨기지는 못했지만.

“그러니까 나랑 정식으로 파트너 하지 않을래?”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당당하게 제안하고 싶었는데, 목소리 끝이 볼품없이 떨렸다. 산오가 대답을 바로 하지 않자 초조해진 이연이 말을 덧붙였다.

“무급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공동 대표가 되는 거야. 계약 기간은 네가 원하는 대로, 조건도 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돼. ……너무 센 조건이면 조금 힘들 순 있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맞춰 볼게.”

당연히 수락할 거라고 예상했으면서도, 막상 당사자 앞에 꺼내 놓으니 혹시 거절당할까 봐 심장이 속절없이 떨렸다. 꼼질대려는 손가락 끝에 힘을 줘도 움칫거리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산오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툭 내뱉었다.

“그걸 지금 청혼이라고 하는 건가?”

“……시끄러. 청혼 아니거든? 동업 제안이거든?”

귓가가 달아오른 이연이 머쓱하게 투덜댔으나 산오는 개의치 않았다. 곧이어 무뚝뚝한 목소리가 던져졌다.

“집을 하나 마련하지. 주말에 놀러 다닐 수도 있고, 근처에 농구장도 있는 큰 집으로.”

주말? 농구장? 뜬금없는 소리에 이연이 되물을 새도 없이, 잘생긴 얼굴이 최종 오퍼를 내놓았다.

“그 집에 네가 같이 사는 조건이라면 수락하겠다.”

나비를 꼬여 내는 꽃처럼 달큰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날 부리는 데 그 정도면 아주 거저먹는 거야.”

그 뻔뻔한 표정이 어이없고도 귀여워서, 하려던 말도 잊고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덜컹,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이연의 몸이 테이블 위를 덮었다. 반찬 그릇들 위에 짙은 그늘이 지고, 하얀 팔이 뻗어 왔다. 산오의 뺨이 잡혀 매끈한 얼굴이 당겨졌다. 입술에 쪽쪽 소리 내어 키스한 이연이 쐐기를 박았다.

“내일 사무실 가면 계약서 쓰자.”

산오가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근사한 웃음에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차금에 출근해 협상이 극적 타결되었다는 사실을 혜강에게 보고하기 위해 기다렸다. 산오는 이제 제법 익숙하게 이연이 사 온 아메리카노를 마셨고, 이연은 그 옆에 드러누워 무궁화 5단에 임명되면 받는 안내 공문을 눈 빠져라 읽고 있었다. 가끔 이게 무슨 말이냐며 이연이 투덜대는 것을 산오가 재수 없는 타박과 함께 설명해 주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렀다.

슬슬 혜강이가 올 때가 됐는데. 정오가 가까워지자 이연이 사무실 문을 흘끗였다. 사실은 산오가 승낙했다는 것을 혜강에게 자랑하고 싶어 어제부터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놀래 주려고 일부러 따로 메시지도 하지 않았다.

오매불망 기다리는 이연의 마음을 알았는지, 문 유리 앞에 누군가의 실루엣이 얼핏 비쳤다. 드디어. 이연이 반색하며 휙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들어온 이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산오 님이 취직하셨다는 게 정말이야!”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위에 달린 방울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요란하게 등장한 종찬 뒤에 종희가 조용히 뒤따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종찬 씨랑 종희 씨가 여기 왜…….”

이연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들이 사무실까지 쳐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표정도 굉장히 격렬해서 부담스러웠다. 씩씩거리며 이연에게 다가온 종찬이 냅다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지? 산오 님을 꼬신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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