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희수의 시선이 산오에게 잠깐 닿았다. 어쩌면 자유롭게 움직이는 무궁화 5단을 코앞에서 지켜보다 보니 생긴 열망일지도 몰랐다. 상상과 실제는 분명히 다를 테고, 고생도 많이 하겠지만…….
“직업상 변이종에도 빠삭하고요.”
처음으로 생긴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러니 희수 역시 용기를 내서 욕심을 좀 부리기로 했다.
“그럼 국장님 집안은 헌터 가주를 얻는 거겠네요.”
이연이 농담을 건네며 웃었다. 그러나 희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 저는 가주를 하지 않을 겁니다.”
“네?”
“응?”
다시 한번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정원이 가주 자리를 내놓겠다는 선언은 집안 내에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말이 사임이지, 실각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운 좋게 빈 자리를 노리는 사람은 꽤 많았다. 그간 기도 못 펴고 살았던 정원의 남매는 물론이고 가문 내에서 목소리가 큰 어른들까지. 각자 치열한 물밑 다툼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희수 역시 은밀하게 가문 인사 몇몇과 접선했다. 한참 어린 그들과 함께할 수 있을 정도로 그나마 진보적이고 관망적인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희수가 직접 이끌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국장 일도 맞지 않는데, 가주 일이 맞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음 가주로는 덕선 누나나…….”
“안 해.”
D.S가 딱 잘라 내뱉었다. 한 번 더 권하면 죽빵을 날리겠다는 얼굴에 희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미림이를 추천할까 합니다.”
미림은 그들 중에서 가장 막내였지만,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과 제 주장을 관철하는 의지가 있었다. 미림 본인은 몰랐지만 희원을 방문하는 일을 그녀가 맡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봐라, 가기 직전까지도 자신 없다며 투덜거리면서도 멋지게 성공했지 않은가.
희수가 만난 어른들 역시 정원을 실각시킬 정도로 궁지에 몬 희수의 능력을 우선 칭찬하긴 했지만, 무려 희원을 불러낸 미림의 행동을 더 높게 쳐주었다. 상황이 도왔든 운이 도왔든 결과는 결과였다. 그러니 별일 없다면 진씨 집안은 드디어 대물림될 수 있을 터였다. D.S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리더십 있는 애니까 잘 해내겠지.”
물론 아직 본인의 동의는 받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고 한껏 기겁하다가 끝내 마지못해 수긍할 막내 사촌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은 희수가 말했다.
“당분간은 집안과 초관청을 오가느라 계속 바쁠 겁니다.”
단순히 태진을 다시 잡아들이고 정원이 가주직을 내놓았다고 해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들과 연결된 초관청의 인사들, 관련된 공무 처리, 언론 수습, 정원이 감춰 두었던 가문 내 불법 행위와 마저 설득해야 하는 가문 어른들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은 산재했다. 함께 고생할 사촌들에게 조만간 보약이라도 돌릴 계획을 짜며, 희수는 이연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정이연 씨의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한 것 같군요.”
때로는 물리적으로 피해를 입히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히는 것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한다. 특히 자존심이 높은 태진에게 이 상황은 사회적 타살에 가까웠다.
정원은 감히 행사장에서 그녀를 버리고 홀로 도주를 시도한 태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태진이 잡을 수 있는 끈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참 뒤 출소한다 해도, 그는 평생 이름과 얼굴 뒤에 따라다닐 사기꾼이라는 타이틀과, 그것이 주는 불신과 비웃음에서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연은 제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나머지 몫을 다해야 할 차례다.
희수가 남은 차를 모두 마셨다. 짧은 휴식 시간은 금방 끝났다.
“그럼 이후 초전력에서 뵙겠습니다.”
“아, 네.”
마무리 인사로 건넨 말에 이연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이제 무궁화 5단이었다. 초전력에 출전하면 국장님을 만나게 되는구나……. 그제야 바뀐 단수가 좀 실감이 나는 듯했다.
D.S는 가문과 관련해서 희수와 할 이야기가 있다며 국장실에 남았다. 산오와 둘만 나와 관리국 복도를 걷는데, 지나가는 사람 열에 다섯은 흘끔대며 시선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까지는 고위급 헌터들의 전유물이었던 적공저지일 행사는 이연의 등장이 적잖은 파장이 되어 하급 헌터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초대장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행사라지만 참여 인원 자체가 꽤 많았고, 헌터 몇몇이 찍은 이연의 깽판 영상이 SNS로 퍼졌던 것이다. ‘적공저지일 행사’가 SNS의 실시간 이슈로 한참이나 떠 있었을 정도였다. 궁금증을 느낀 이들이 고위 헌터의 공개 SNS에 몰려가 질문을 잔뜩 했고, 그중 친절한 헌터 몇이 간단한 설명을 해 주며 대략적인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
참고로 그 영상들은 뉴스에도 나왔다. 화질이 낮은 데다가 멀리서 촬영해 명확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눈썰미가 좋은 이들은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정도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식으로 일을 벌였으니 얼굴이 팔리는 것도 충분히 각오한 사안이다. 그러니 이연 본인까지야 괜찮다 치는데……. 자신을 흘끔대는 눈길을 귀신같이 눈치챈 산오가 툭 내뱉었다.
“뭘 봐.”
“내 눈으로 보지도 못하냐?”
“내 손으로도 아무렇게나 해도 되나?”
“내가 잘못된 말을 했다.”
솔직히 제산오까지 나설 줄은 몰랐다. 물론 정식으로 찍지도 않은 영상 두어 개로 국민의 대다수가 알아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당장 받고 있는 시선들 역시 산오를 향한 게 반, 이연을 향한 것이 나머지 반이었다.
“쭈뼛거리지 말고 빨리 걸어.”
정작 산오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연만 타박 중이었지만.
뭐, 본인이 괜찮다면 이연도 상관없긴 했다. 이제까지가 특이했던 거지, 이게 일반적인 무궁화 5단의 모습이기도 했고……. 산오를 알아본다고 하더라도 감히 다가와서 귀찮게 굴 정도로 대담한 인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지뢰밭이 신기하다고 해서 직접 들어가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처럼.
“산오 님.”
이미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복도 끝에서 걸어오던 한 남자가 산오를 불렀다. 사람 두엇을 주변에 갑옷처럼 두른 그는 반갑다는 얼굴로 산오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행사 때는 바빠서 인사도 못 드렸는데, 여기서 뵙네요. 역시 그런 일이 있으면 천하의 산오 님도 초관청에 출두하시는군요.”
제산의 사장인 문서현이었다. 유들대는 말이 물처럼 줄줄 흘러나오자 산오는 세상의 흥미를 다 잃은 얼굴로 대강 대꾸했다.
“귀찮게 하지 마라.”
“아, 그리고 정이연 씨. 제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아십니까?”
갑작스러운 대화 상대 전환에 멀뚱히 보고만 있던 이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이태민이 어렸을 때부터 정이연 씨를 가두고 내내 기력만 뽑아냈다면서요. 협박당해서 본 능력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고작 2단으로밖에 지낼 수 없었다는 게 진짜입니까? 하여튼 뻔뻔한 인간 같으니. 어떻게 그래 놓고 무궁화 5단을 받을 생각을 했답니까?”
“아, 뭐…….”
“정이연 씨는 내내 밝아 보이셔서 그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주저 말고 연락 주세요. 이제 저희도 한 가족 아닙니까.”
“네가 왜 정이연 가족이야.”
“이태민이 가벼운 형을 받는다면 제가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그런 놈은 몇십 년은 썩어야 해요. 우리나라는 왜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지!”
흥분해서 주먹을 불끈 쥐는 서현을 산오가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이연은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머쓱한 웃음으로 대체했다.
오전에 혜성이 뜬금없이 [이연씨 힘내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도 그렇고, 재경이 횡설수설하며 안부 전화를 한 것도 그렇고, 보아하니 저런 소문이 도시 내에 파다하게 퍼진 모양이었다. 이연이 어릴 적부터 태진에게 착취와 가스라이팅을 당해서 그간 억울하게 숨어 살았어야 했고, 산오가 불법 연구소를 소탕하다 우연히 발견한 게 인연이 되었다는 둥의 스토리였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맞는 말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연은 이런 이야기를 면전에서 들을 때마다 어영부영 말을 돌리곤 했다. 거기다 대고 구구절절 사실 정정을 하기도 좀 그랬던 탓이다.
“아, 맞다. 정이연 씨, 산오 님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마침 앞에서 종희를 만나기로 했는데, 초신장 설비 라인 관련해서 산오 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었거든요.”
“아, 네.”
이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오가 순순히 수긍하는 이연에게 말없이 눈을 부라렸다. 불만 가득한 시선이었다. 이연은 모른 척 높은 곳에 있는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다녀와. 이따 집에서 만나자.”
“잘도 버리는군.”
“뭘 또 버려…….”
하여튼 극단적으로 말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그래도 산오는 얌전히 서현을 따라 몸을 돌렸다. 서현이 신기하다는 듯 산오와 이연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