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어떻게…….”
더듬거리며 흘러나온 정원의 목소리는 힘없이 스러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는 눈동자가 망연하게 선 정원과 그녀 주변의 풍경을 훑었다. 그녀의 딸이 있는 공간은 오래전 희원이 사용하던 곳이기도 했다.
아쉬운 점은 그녀가 쓰던 때와 달리 대부분의 물건이 깨지고 부서져 멀쩡한 거라곤 벽에 걸려 있는 액자 정도라는 것뿐이었지만. 강물의 윤슬이 반짝이는 그림에서 시선을 뗀 정원이 입을 열었다.
“나한테 오랜만에 손녀 하나가 찾아왔지.”
희원은 은퇴를 선언한 이후, 잠적 수준으로 모든 일에서 손을 뗐다. 초능력관리청은 물론이고 헌터나 제 가문의 일까지. 남은 일은 후대의 몫이었다. 그녀는 너무 오래 수면 위에 떠 있었다. 이제는 바다로 나아가 심해 아래로 가라앉는 것이 순리였다.
자식들이 다소 독선적인 면은 있었지만, 세 명이나 되니 서로 협력하면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맡겼다. 가끔 찾아오는 가문의 이들이 집안일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면 의도적으로 말을 막았다. 그녀는 이미 뒷방으로 물러난 사람이다. 관여하지 않을 거라는 입장을 확실히 하자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할머니.’
막내 손녀, 미림이 찾아온 것은 퍽 의외의 일이었다. 보통 희원에게 찾아오는 후손들이라고 해 봤자 자식들, 혹은 조카들 정도로, 그 아래의 아이들은 희원을 거의 만나러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너무 나니 부담스러웠겠지. 희원이 살가운 어른도 아니었고.
충분히 이해하는 바였으나, 내심 아기 때만 잠깐 볼 수 있었던 아이들이 다시 보고 싶긴 했던 모양이었다. 희원은 반갑게 미림을 맞았다.
미림은 처음에는 희원을 조금 어려워했지만, 부드럽게 대해 주자 금세 긴장이 풀린 듯 소소한 잡담을 조잘거렸다. 아마 그녀가 희원의 기세에 눌리지 않을 만큼 성장한 덕도 있을 터였다. 새삼스럽게 세월이 느껴진다는 점도 그저 흐뭇했다.
희원은 재촉하지 않고 미림이 본론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두 세대는 차이 나는 어른을 대뜸 찾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당연히 가문에 관련된 문제겠지.
‘할머니, 할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싫어하시는 건 알아요.’
그들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가.
‘하지만 제 어린 시절을 들려 드리고 싶어요.’
희원 역시 나이를 먹긴 한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듣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나 싶어진 것을 보면.
희원은 한참을 가만히 앉아 제가 놓고 온 자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들었다. 그토록 피하고 있었던 이야기였으나, 막상 들어 보니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그다지 즐겁고 행복한 전개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몇십 년 만에 듣는 현실은 그녀의 생각보다 처참했다. 이건 동화나 소설이 아니었다. 희원이 퇴장해도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고, 타인의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원래는 고모를 막는 걸 도와 달라고 부탁드리려고 온 거였거든요.’
이야기를 마친 미림이 조금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하지만 도와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할머니는 너무 많은 일을 하셨잖아요.’
‘…….’
희원은 집안에서 절대적인 존재였다. 애초에 가문의 힘이 그녀로부터 시작된 거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 것은 빛바래기엔 아직 너무 찬란했고, 가문 사람들은 여전히 강하고 위대한 희원을 존경하며 사랑했다. 어쩌면 강한 초능력자를 각별히 여기게 된 것 마저도…….
그렇기 때문에 희원이 움직인다면 정말로 손쉽게 끝날 일이다. 그래서 희수와 D.S, 미림이 이 방법을 선택한 거였다.
그런데 실제로 그녀와 대면한 미림은 이야기하면서 깨달았다. 그런 마음으로 부탁하기에 희원은 너무나, 너무나 지친 사람이었다.
희원이 말 그대로 쉬지 않고 달려 수십 년간 만들어 낸 수많은 무용담과 업적은 퇴적처럼 쌓여 그녀의 덩치를 키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쇠약해지는 어깨를 고스란히 짓눌렀다. 그토록 자랑스럽고 재미있던 일이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신뢰를 건네는 목소리도, 반짝이는 눈빛도, 동경의 시선도, 모든 것이.
그래서 은퇴한 것이다. 다행히도 그녀의 지난 족적들 덕에 은퇴할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고, 희원은 미련 없이 떠났다.
그녀에게는 쉴 권리가 있었다. 인생을 가열 차게 달려온 자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하는 휴식이.
미림은 비로소 왜 희원이 잠적하듯 떠나 버렸는지 이해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냥…… 지금의 집안은 이상하고, 저희는 그걸 뒤집을 거예요.’
미림이 돌아간 후, 희원은 그녀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곱씹었다.
이미 그녀의 손을 떠난 상황이었다. 희원은 가주 일도, 헌터 일도 은퇴했다. 이제 와서 개입할 문제가 아니었다. 가문의 평판이 어찌 되든, 사실 그런 것도 전혀 상관없었다. 그건 남겨진 이들의 몫이다. 그들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정원아.”
“……네.”
희원의 부름에 정원이 대답했다.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나는 네가 집안의 가주가 된 것이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
“난 초능력으로 앉은 자리지만, 넌 아니잖니.”
희원은 정원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자신의 세 자식을 아꼈다. 그들이 지닌 초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아이들은 스스로 나름의 삶을 개척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희원과는 다른 길이었지만, 틀림없이 제 뒤에 있었다. 그녀의 그림자를 보며 따라오고 있었다.
단지 그런 그들을 사랑해서 온 거였다.
“내가 물은 흘러야 한다고 한 것 기억나니?”
“……네.”
정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희원이 희미하게 웃었다. 커다란 저택에는 유독 물과 관련된 그림이나 조경이 많았고, 그건 희원의 취향이었다. 희원은 자주 상황을 물에 빗대어 이야기하곤 했다.
그리고 정원은 어머니가 해 준 말 중 단 한 마디도 잊은 게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 말도 기억하겠구나.”
정원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지만, 두 사람 모두 답을 알고 있었다.
물은 언제나 흘러야 했다. 그래야 썩지 않으니까.
*
[실체화 능력자로 알려졌던 이태민 씨가 초능력 사기 혐의로 붙잡히면서, 전투 구역의 지형 설정 기능의 적법성 역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능력관리청은 관련된 입장 발표를 아직 내놓지 않은 상황인데요, 이에 따라 이태민 씨와 초능력관리청의 유착을 밝히기 위한 내부 감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볼륨을 완전히 줄인 희수가 리모컨을 내려놓자,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이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함께 앉아 있는 D.S와 산오 역시 지겹다는 기색이 만연했다.
“요즘 TV에 저 이야기밖에 안 나와요.”
“욕하기 딱 좋은 소재 아닙니까.”
희수가 심상하게 대꾸했다. 이제까지 초능력관리청에 이 정도로 직접적인 화살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초능력 심사의 허점, 불법 기술을 사용한 지형 설정 기능. 각 국장들은 물론이고 초능력관리청장, 심지어 대통령실에서도 관심을 기울일 정도로 일이 커진 것이다.
덕분에 초능력관리청은 연일 바빴다. 바깥으로는 과열된 언론과 대중을 진정시키고, 안쪽에서는 관련된 인사들이 줄줄이 묶여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그 과정에서 지형 설정 기능을 추가 분석하지 못하게 고의로 막거나, 진정원의 의사에 따라 정책을 바꾸는 등의 소소한(?) 비리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이태민이 불법 연구자 이태진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언론에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이연은 그 사실에 합의하는 대신 태진을 태민으로 만드는 데에 찬성한 간부들을 전원 해임할 것을 요구했고, 물러설 곳이 없는 초능력관리청은 조건을 받아들였다. 뭐, 이 난리가 났으니 원래 그럴 생각이기도 했겠지만.
“국장님은 괜찮아요?”
“괜찮아 보입니까?”
희수가 제 책상 앞에 산처럼 쌓인 서류를 반항적으로 턱짓했다. 마주 보기도 끔찍한지 눈동자는 돌리지도 않았다. 이젠 그냥 어떤 인테리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도한 양이었다. 덩달아 압도된 이연이 책상에게서 떨어지듯 옮겨 앉으며 자세를 바꿨다.
“아, 아니. 저거 말고……. 청장님이 뭐라 하지 않아요?”
사실 정원과 가장 밀접하게 관계된 인물을 꼽으라 하면 단연 희수였다. 무려 아들이지 않은가. 희수 역시 비난의 화살을 피해 가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러나 희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정이연 씨 덕에요.”
그는 제 어머니의 비리를 공개적으로 밝힌 인물이었다. 적공저지일 행사에 참석한 모든 헌터들이 상황을 무마하려는 정원과 그를 저지한 희수를 똑똑히 보았고, 그대로 진술했다. 여론은 순식간에 부패한 모친을 막으려는 정의로운 자식으로 새로운 프레임을 짰다. 덕분에 희수는 간단한 조사만 받았을 뿐 직접적인 비난이나 징계를 피할 수 있었다.
오히려 청 내부 비리를 파헤치는 책임자 자리가 넘어올 정도였다. 그의 책상이 숲을 통째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종이로 가득 차 있는 데에는 그 업무도 한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