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20. 임시 보호를 종료합니다
“나가.”
“어머니.”
“당장 안 나가?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도자기 컵이 날아왔다. 희수를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간 컵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네가 감히, 나한테 망신을 줘?”
핏발이 선 눈동자에 기이한 안광이 흘렀다. 꼴 보기도 싫다는 듯 인상을 일그러트린 정원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차관마저 내던졌다.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 담긴 차가 쏟아지며 고운 빛깔의 도자기가 젖은 채로 나뒹굴었다.
“모두가 있는 곳에서 엄마를 놀리니 아주 즐거웠겠구나! 그래서 네 마음은 좀 풀렸니? 응?”
희수는 빈정거림에 대꾸하는 대신 허리를 숙여 제 발밑까지 굴러온 차관을 집어 들었다. 예술품에 가까운 다기는 깨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과격하게 뒤집혀 있었다.
안에서 흘러나온 찻물에 손이 젖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정원에게 다가간 희수가 차관을 다시 원래 자리에 두었다.
“조금 전에 가문 계좌 내역을 확인했습니다.”
나직한 목소리에 정원이 멈칫했다. 희수에게 그런 권한은 없었다. 제 측근들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그 많은 돈을 어디다 쓰셨습니까?”
이연이 화려하게 등장해 난동 아닌 난동을 피우고 있을 동안, D.S와 미림은 슬그머니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그녀들은 일가 친척들이 모두 행사장에 있는 틈을 타서 행사장 내부의 관계자 구역은 물론이고 평소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본가의 방들까지 모두 뒤질 수 있었다.—이 잠입에는 순간 이동 능력을 가지고 있는 D.S의 가사 도우미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
결과는 참담했다. 도무지 납득하지 못할 정도로 부실한 재정 상태는 명확한 흐름이 끊겨 있었다. 어떤 증거도 남아 있지 않아 그저 심증으로만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그게 정답일 테고.
“난 이 집안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야.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날 추궁해?”
정원의 눈빛이 희번덕거렸다. 광인에 가까운 낯이었다. 그녀가 저녁부터 새벽까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토록 면밀히 준비해 오던 적공저지일 행사는 지옥이었다. 태진은 초능력 사기죄 혐의로 그 자리에서 붙잡혔고, 행사 내내 그와 친분을 과시한 정원의 체면은 땅에 떨어졌으며, 손님들의 관심은 예상치 못하게 등장한 무궁화 5단에게로 쏠렸다. 심지어 그를 소개한 것은 그녀의 아들, 진희수였다.
말 그대로 죽 쒀서 개를 준 꼴이다.
도망치듯 본가로 돌아온 후에도 밀려드는 불청객들을 물리치느라 바빴다. 다들 이때다 싶었는지 사람을 비웃지 못해 안달이었다. 개중 몇은 막아서는 측근과 사용인들을 무시하고 그녀의 집무실에 기어코 쳐들어왔다. 그때마다 뭐라도 던져 대서 쫓아냈지만.
덕분에 이제 정원의 책상 근처에는 남은 물건도 몇 개 없었다. 방금 희수에게 던진 다기가 마지막이었다. 하다못해 불청객을 쫓아낼 만한 수단도 사라진 것이다.
“어머니.”
“나가라고 한 말 못 들었니?”
이 모든 수모를 믿을 수가 없었다. 악몽이라면 어서 빨리 깨어나야 했다. 정원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강한 상처를 새겼다. 눈꺼풀이 감겼다 뜨이는 시야 너머의 광경은 도무지 바뀌질 않았다. 엉망이 된 서재와 그 사이 혼자 꼿꼿하게 서 있는 아들. 부득. 이가 갈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희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 그놈에게 속으셨어요. 행사장에서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연의 초능력을 재심사한 결과, 그가 발산하는 기력이 조금 전 태진이 사용한 것과 같은 파장이며 또한 이연이 이전에 등록한 그림 실체화 능력의 기력과도 동일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위원회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초능력자 등록 과정에서 기력 정보를 정부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할 때 타 초능력자와의 기력 대조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친다. 초능력자 등록 시 주는 혜택 덕에 다양한 방식의 초능력 등록 사기가 있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진의 경우 약식으로 공개 심사를 한 덕에 행사가 끝나는 다음 날 초능력관리청에 들어가고 나서야 기력 등록이 진행될 예정이었고, 기존 초능력자 중에 같은 파장의 기력이 있다는 사실 역시 그 시점에서는 까맣게 알 수 없었다.
태진은 바로 그 부분을 노린 걸 테다. 설마 이렇게나 유명한 인물이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거짓말을 할 거라고 생각이나 하겠는가. 위원회는 물론이고 정원 역시 그 배짱에 까맣게 속은 것이다.
“이태민, 아니, 이태진은…….”
말을 이어 나가던 희수가 정원과 눈이 딱 마주쳤다. 담담하던 말끝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희수는 제 어머니를 뚫어져라 바라본 끝에, 분노로 가득한 얼굴 어디에도 배신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알고 계셨습니까?”
아연한 목소리가 멍했다. 알고도 이 모든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고?
“대체 어쩔 작정으로…….”
초능력심사위원회는 초능력관리청 공무원 중에서도 특히 꼬장꼬장한 사람들만 골라 구성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들은 초능력자의 능력 그 자체를 정확하게 분석해 단수를 나누는 것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고,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 역시 대단했다. 외부의 압력으로 심사 결과를 조작하느니 차라리 옷을 벗을 위인들이었다.
그러니 일반적인 초능력 심사를 진행했다면 태진은 번거롭고 위험한 방법을 택해야 했을 터였다.
그러나 초능력관리청은 물론이고 초능력심사위원회 역시 새로운 5단의 탄생을 누구보다도 고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무궁화 5단을 받았던 제산오가 벌써 5년 차 헌터다. 무궁화 5단이 어디 밭에서 뽑아 오는 것처럼 씀풍씀풍 나오는 인재는 아니었지만—실제로 최초의 5단인 최희원 이후 무궁화 5단이 등장한 것은 무려 17년 만이었다.—, 요 10년 사이의 무궁화 5단 발현율을 생각하면—9명 중 현 20대는 3명이나 된다.— 슬슬 조바심이 나는 시기긴 했다.
이태진의 초능력 공개 심사는 정원과 태진, 그리고 초능력관리청 모두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인 셈이다. 이 이벤트의 장점은 아주 많았지만,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기력 등록이 미뤄진다는 점이었다.
초능력 심사에서부터 실제 초능력자 등록까지의 공백은 최소 10시간.
그 정도나 시간이 있으면 자료를 바꿔 치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였다.
“이 일에 뭐가 달려 있었는지 알기나 해?”
정원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태진이 비초능력자라는 사실은 모를 수가 없었다. 본인이 명확하게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추측 가능했다. 그렇게 생각한 근거에는 정원 역시 초능력자라는 점과 무궁화 5단을 포함한 고위급 초능력자들을 수없이 접했다는 점 역시 있지만, 사실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실체화 능력자가 왜 막대한 시간을 들여 연구개발을 하겠는가?
태진의 행동은 그 자체로 모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원은 태진에게 초능력 심사에 대한 말을 계속 흘렸다. 태진의 초능력 출처 따위는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어쨌든 그녀에게는 희수 대신 제힘이 되어 줄 새로운 무궁화 5단이 필요했고, 태진은 그에 부합하는 인물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이 가문을 가장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오로지, 오로지 자신만이 가문을 번성하게 하고, 도시에 더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고작 무궁화 2단임에도 어머니인 최희원의 뒤를 이어 가주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러니 그녀에게는 이 자리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어머니, 어떻게……!”
희수가 다시 소리쳤다. 혼란, 참담, 실망……. 갖가지 감정이 눈동자에 얼룩지는 것을 정원은 무감정하게 바라보았다.
곱게 키워 순진하기 짝이 없는 아들은 이런 순간에서조차 판단이 느렸다. 그녀가 그렇게 바랐던 것을 쥐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온실 속의 화초.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면서, 마치 대단한 정의의 사도라도 된 것마냥…….
“대화 끝났다. 나가.”
그녀는 언제나 제 아들이 부럽고 미웠다.
“전 아직 안 끝났습니다.”
“자는 사람 붙잡고 말하고 싶다면 실컷 그러려무나.”
정원은 정말로 침실로 들어가 버릴 것처럼 등을 돌렸다. 실제로도 그럴 작정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지쳤고, 쉬고 싶었다. 슬슬 머리가 아팠다.
실패에 언제까지고 붙들려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차근차근 수습하면 된다. 일단 자고, 일어나서…….
“진정원.”
정원의 몸이 멈추었다. 지금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였다. 들려서도 안 되는 목소리였다.
지쳐 있던 얼굴에 확연한 동요가 퍼졌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녹슨 기계가 움직이는 것처럼 눈동자가 끼기긱 돌아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희수 혼자만 서 있었던 자리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얼굴, 조금 세어 버린 머리카락. 그럼에도 여전히 맑은 눈동자와 정정한 자세.
“……어머니.”
초호시를 열었던 최초의 초능력자이자 초대 초능력관리청장. 이 가문의 주춧돌이자 뼈대.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최희원이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