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37)화 (237/250)

#237

아연하던 목소리는 음절을 내뱉으며 서서히 강해지더니 끝에 가서는 거의 버럭 소리치는 수준이었다. 격렬하게 드러내는 감정은 조금 전 여유로운 인사와는 전혀 달랐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무궁화 5단들이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 자연스럽게 한곳을 보았다.

“나한테 왜 지랄인지 모르겠군.”

이 도시에서 가장 예측 불가능한 남자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 역시 아직까지 서 있는 채였다.

그에 욱한 태진이 뭐라 소리치려다가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대체 뭐라고 한단 말인가? 저 녀석을 어떻게 찾아냈느냐고? 무슨 수로 자신의 연구소에 침입해서 실험체를 빼냈느냐고? 뭐라 말하든 자충수였다. 산산조각 난 이성을 필사적으로 그러모으는 와중에 산오가 쐐기를 박았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뭐? 태진이 흔들리는 눈으로 산오를 바라보다가,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그 너머를 보았다. 새하얀 모래에 둘러싸여 있는 하얀 남자.

휙. 태진이 사람들의 시선도 잊고 손목을 들어 액정을 켰다. 이연을 가두었던 방에 설치해 놓았던 감시 카메라 화면을 불러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며칠 내내 수도 없이 확인했던 화면이 그 안에 펼쳐져 있었다. 널따란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침대. 그 안에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청년. 태진에게 영원히 힘을 조달해 줄 황금알을 낳는 거위.

분명히 여기 있는데. 그럼 저건……. 믿을 수 없다는 듯 조그만 화면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태진이 문득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유리관 안에 갇혀 있는 이연의 머리카락 끝이 아주 천천히, 잘게 부스러지고 있었다.

부스러기는 곧 새하얀 모래로 변해 공기 중으로 스르륵 녹아들었다.

“……!”

태진의 입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판단하기도 전에 액정 속 유리관 안이 텅 비었다.

남은 것은 거기 무언가가 있었다는 시트의 눌린 흔적뿐이었다.

“특별히 삼촌이 보기 전까지 남겨 뒀어요.”

어느새 단상 앞으로 다가온 이연이 말했다. 태진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흠칫 놀라며 이연에게서 반걸음 떨어졌다. 이연이 농담하듯 가볍게 투덜거렸다. 읏차, 하는 기합과 함께 단상 위로 펄쩍 올라오는 몸짓이 가벼웠다.

“뭘 그렇게 놀라요? 삼촌은 진짜 제가 바보인 줄 알아요?”

태진이 이태민이라는 이름으로 언론 공개를 선택했다는 걸 안 순간, 이연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 기사는 태진이 모든 준비를 끝냈다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태진이 정말로 이연을 계속 가만히 놔둘 거라는 믿음은 한 톨도 없었다. 뭐 하러 계속 삐딱하게 구는 조카를 어르고 달래면서 기력을 구걸하겠는가? 이미 태진은 자유의 몸이 되었고, 쓸 수 있는 수단이 넘쳐나는데.

그래서 이연은 초능력으로 제 분신을 만들어 대신 그에게 보냈다.

“설마 그날 바로 납치를 시도할 줄은 몰랐어요. 성격이 너무 급한 거 아니에요?”

태진의 새로운 연구소 위치를 대략적으로 알아냈을 땐 기가 막히기까지 했다. 찾기 어려울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하늘 위에 지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어떤 초능력자도 찾을 수 없도록, 그는 정말로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던 것이다.

“이정연.”

이연이 정연이었다면 태진의 계획은 멋지게 성공했을 터다.

“이정연 아니라니까요.”

그러나 태진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게 있었다.

이정연이 이혜강을 만날 가능성. D.S를 만날 가능성. 한수아를, 당재경을, 김종찬, 김종희, 진미래, 진희수, 서영, 이세은과 이세미까지 만날 가능성.

그리고 제산오를 다시 만날 가능성.

그를 좋아하게 될 가능성.

“정이연이에요, 정이연.”

그래서 이정연이 정이연이 될 가능성.

그 가능성이 모이고 모여 미래를 뒤집었다.

“이제 좀 외워요.”

절대로 질 수가 없는 판이었다.

“……정이연?”

행사장 내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얼마 전 헌터들 사이에서 꽤 숱하게 오르내렸던 이름이니, 금방 기억해 내는 사람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제산오와 같이 다녔다던 2단 헌터.

새로운 파문 역시 조용하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사람들의 눈빛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정원은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초대받지 않은 자입니다!”

생각할 틈도 없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벌떡 일어서 파리하게 질린 손가락으로 사회자의 마이크를 낚아채 단단히 붙잡은 정원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시했다.

“행사를 방해하는 불청객은 일단 내보내고, 남은 진행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가 무슨 동네 놀이터입니까? 할 이야기가 있다면 행사가 끝나고 충분히 자리를 마련해 드릴 테니, 헌터라면 마땅한 예의를 갖추세요. 여긴 제 어머니이자 도시의 영웅인 최희원 헌터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입니다.”

정원은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내뱉었다. 싸늘한 시선이 이연에게로 내리꽂혔다.

“그러니 내빈 여러분은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시고, 아닌 분은 이 이상 혼란을 야기하지 말아 주길 부탁드립니다.”

그녀에겐 주최 측으로서 상황을 정돈해야 할 책임과 권리가 있었다. 저 남자는 행사에 초대받지 않았다.

애초에 올 자격도 안 되었다. 유명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헌터. 정이연에게는 여기 있을 명분이 없었다. 유서 깊은 행사에 어울리지 않는 불청객이자 커다란 행사를 망치는 무뢰배였다. 그러니 일단 쫓아내고 나중에 말을 흘려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면…….

“아니오.”

반박한 것은 그녀를 따라서 일어선 희수였다. 그는 이연을 흘끗 바라보고는, 제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똑바로 맞추었다.

“정이연 씨는 제 특별 손님입니다.”

희수의 목소리는 마이크 없어도 쥐 죽은 것처럼 고요해진 행사장 내에 똑똑히 들렸다. 정원이 호흡을 멈추었다.

원래라면 이연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행사의 손님을 추리기 위해, 주최 측에서 준비해 둔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어느 정도 규모의 회사를 운영하거나, 실적을 쌓아 능력을 인정받았거나. 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여기에 있는 헌터는 죄다 그런 사람들뿐이었다.

딱 한 사람 빼고.

뒤통수를 누가 망치로 내리친 것 같았다. 그녀 스스로 만든 전례가 상대의 명분이 되었다. 정원이 이연에 대해 어떤 말을 하든 태진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몸을 일으킨 희수가 단상으로 향했다. 새파랗게 질린 어머니를 지나 혼란에 가득 찬 초능력심사위원들의 앞에 섰다. 그리고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더욱더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 지금은 특별 손님을 위해 마련된 특별 순서이니, 딱 좋은 타이밍입니다. 귀한 걸음으로 자리해 주신 초능력심사위원회에게 요청합니다. 원래의 능력보다 축소된 단수라고 판단되는 정이연 씨의 초능력 재심사를 이 자리에서 진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희수의 시선이 이연을 향했다. 단상에 멀뚱히 서 있는 청년은 갑작스러운 희수의 난입에 맹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의 예상 초능력은 실체화 능력. 예상 단수는 무궁화 5단.”

정원은 위원들을 이 자리에 불러 모아 이런 웃기지도 않는 쇼를 연출하는 데에 제 권력을 이용했다. 마침 희수에게도 이럴 때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이 하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어머니가 쥐여 준 힘이다.

“초능력관리청의 변이종대응국장으로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속은 조금 다르지만, 초능력관리청이라는 커다란 틀로 봤을 때 위원보다는 국장의 직급이 더 높았다. 이렇게 의구스러운 상황에서 위원회가 감히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은 없었다.

난처한 얼굴로 희수와 정원을 살펴보던 위원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다시 기계들이 점검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단상 위에 선 희수가 중앙에서 정원 쪽으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아주 작은 목소리가 그의 혈육에게만 들릴 정도로 새어 나왔다.

“어차피 시간문제인데, 굳이 눈 가리고 아웅 할 필요 있겠나 싶어서요.”

정확하게 그녀의 말을 인용하는 음성엔 희미한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정원이 뒷머리를 타고 퍼지는 모멸감에 이를 악물었다.

“오랜만에 맞는 말씀 하셨습니다, 어머니.”

태진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것은 그때였다. 그의 발아래로 새하얀 모래가 슬그머니 모여들었다. 모래는 순식간에 자욱한 연기로 변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눈 깜빡할 사이에 태진의 몸이 연기에 가려졌다. 그 모습을 목도한 정원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나.

“어딜.”

이연이 손을 휘젓자, 연기는 다시 모래가 되었다. 단숨에 흩어진 모래는 주인을 찾아가듯 이연 쪽으로 모여들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곧 시야가 걷히고,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단상에 이어진 계단으로 달려가려던 태진을 발견했다. 이연의 곁에 있던 모래들은 길게 늘어져 태진의 양팔에 휘감겼다. 뭘 해 보지도 못하고 기력을 낭비한 태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연은 태진이 도망간 만큼 다가왔다. 단상을 막 내려가려던 태진과 단상 위에 올라온 이연의 눈높이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여기서 가 버리면 안 되죠, 삼촌. 도망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하얀 모래를 이어 붙여 남자를 끌어 올린 이연이 빙긋 웃었다.

“지켜보고 계세요.”

태진의 다리가 힘없이 꺾였다. 이연은 널브러지듯 주저앉은 남자에게서 등을 돌리고 단상의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준비가 되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손을 뻗었다. 곧 눈부신 모래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날 밤, 대한민국에는 약 4년 만에 새로운 무궁화 5단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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