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34)화 (234/250)

#234

만일 뒤늦게 알아도 산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태진은 이미 심사를 통해 초능력이 있다는 것을 공인받은 상태일 테고, 그가 초능력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태진이 능력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거나 이연을 데려와야 했다.

물론 둘 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태진은 제 오른 손목에 두른 팔찌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사이즈에 맞추어 특별히 제작한 새로운 장신구는 살갗에 완전히 밀착되도록 만들어져 본인이 아니면 빼낼 수 없었다. 그의 새장에 갇힌 거위가 그렇듯이.

“자네의 예상이 맞아야 할 거야.”

의뭉스러운 말만 하는 태진을 향해 정원이 싸늘하게 말했다. 팔짱을 껴 팔 사이로 삐져나온 손가락이 부드러운 옷감을 구기듯이 쥐었다.

이번 일을 추진하면서 정원은 이미 태진의 요구를 여럿 들어주었다. 호화로운 병실 생활은 물론이고, 임시 사무실, 기력 추출 설비, 그리고 하늘섬과 그 안에 들어찬 온갖 맞춤 기계들까지. 가문의 재정 상황을 알고 있는 측근들이 난색을 표해도 밀어붙였다.

그녀의 계획 안에서 태진은 대체 불가능한 역할이었다. 원하는 그림을 만들기 위해 정원은 그에게 올인했다. 태진은 반드시 이 행사에서 무궁화 5단을 받아야 했다. 모두의 앞에서 진정원의 새로운 힘이 되어 줄 자가 있다는 것을 공표해야 했다.

불행히도 태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세를 바꾸자 왼 손목에 걸린 워치의 줄이 메탈 특유의 서늘한 질감으로 잘그락댔다. 갑옷을 입은 것처럼 든든한 무게감이었다.

“저만 믿으세요.”

절박한 사람을 상대로 한 거래는 언제나, 너무나도 쉬웠다.

*

“휴…….”

초호시에서 가장 저명한 행사장은 일회성 화장실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으리으리했다. 반질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세면대에 선 남자가 푹푹 한숨을 쉬었다. 남자의 키는 평균 이상이었으나 굽은 어깨에 눈썹은 축 처져 있고 인상 역시 창백해 건장한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 같은 낯빛이라 좀 불쌍해 보였다. 입술 새로 죽어 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김유정 존나 짜증 나…….”

갈까 말까 고민 중이라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꾸역꾸역 행사에 끌고 나온 장본인은 현재 행사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활약 중이었다. 유정은 도착하면 연락하라고 했지만, 남자는 입장하자마자 참석한 인구수에 압도되어 행사장 안에 발만 담궈 보고 화장실로 도망 나왔다. 도저히 다시 들어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일단 행사장 안이 너무 밝고 화려해서 속이 울렁거렸다. 남자 역시 행사의 격식에 맞추어 정갈한 정장을 차려입긴 했으나, 거의 입지 않던 옷이라 영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몇 번이고 확인했는데도 무언가 잘못 입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열 번째로 넥타이를 만지작대며 다시 한숨을 내쉬는데, 마침 양반은 못 되는지 유정에게서 대체 어디 있냐는 연락이 또 왔다. 소개해 줄 사람이 잔뜩이라는 덧붙임은 낯을 많이 가리는 남자의 성격을 알고 일부러 놀리려는 고의성이 가득했다. 남자가 이를 갈았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저기요.”

타인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당황한 남자가 휙 고개를 들자, 딱딱한 인상의 청년이 그를 마뜩잖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모, 모르는 사람인데. 왜 저러지? 남자는 초면의 사람에게 난데없이 받은 적의에 당황한 나머지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반응을 오해한 청년이 인상을 한층 더 굳혔다.

“죄송한데 방금 말씀 들었거든요.”

말씀? 무슨 말씀?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지? 공황 상태가 된 뇌는 상황 파악을 전혀 하지 못했다.

남자는 단순히 놀라서 대꾸를 하지 못할 뿐이었으나, 외형상의 변화는 크게 없었다. 오히려 지친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는 모습에선 네가 뭔데 신경 쓰냐는 분위기가 풍겼다. 청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김유정 헌터를 욕하고 있었잖아요. 당사자가 들을 수 없다고 말을 막 하는 건 너무 무례한 행동 아닙니까?”

“제, 제가요?”

“방금 짜증 난다고,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한 거 다 들었습니다! 대체 무슨 더러운 방법을 쓰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유정 헌터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뭐지? 김유정한테 최근 남자 친구가 생겼나? 라고 착각할 정도로 청년은 진심으로 화내고 있었다. 남자를 바라보는 눈빛은 인간이 아니라 곧 처치해야 하는 변이종을 대하는 것 같았다.

기세에 압도된 남자가 김유정과 자신은 아는 사이라는 정당한 변명도 하지 못하고 주춤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아는 사이면 욕을 해도 되는 건가? 욕은 어쨌든 사람한테 하면 안 되는 거긴 하잖아. 순간적인 혼란이 올 정도였다.

“이…… 미안하다는 기색도 없고, 이 뻔뻔한 녀석이!”

방어 기제로 회피적인 생각이나 하고 있던 남자는 어느새 다가온 청년에게 덜컥 멱살을 잡혔다. 청년의 키가 더 작았던 관계로 옷만 좀 구겨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돌발 상황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초능력을 쓰면 충분히 제압하고도 남겠지만—이 행사장에서 남자보다 강한 사람은 한 손 안으로 꼽을 수 있었다.— 괜히 소란을 피웠다가 일이 커지는 것도 난감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남자가 난처하게 눈만 굴리고 있을 때였다.

“아니, 좋은 행사 와서 왜 싸우세요. 싸우지 마세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슬쩍 건네졌다. 사람이 또 있었어? 두 사람이 시선을 돌린 화장실 입구 쪽에는 순한 인상의 청년이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옅은 색의 머리칼과 꼭 같은 색의 눈동자였다. 혼혈인가? 아니면 탈색?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단정하게 차려입은 정장을 보니 청년도 행사의 참석자 같았다.

“관계없는 사람은 빠져!”

그 와중에도 남자의 멱살을 놓지 않은 청년이 버럭 외쳤다. 상당히 격앙되어 있는 모습에 옅은 머리칼의 청년이 달래듯 권유했다.

“물론 욕한 건 잘못했지만, 그분도 정말로 뭔가를 하시려고 한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김유정 헌터가 워낙 대단하긴 하잖아요. 질투할 수도 있죠.”

질투한 거 아닌데……. 남자는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괜히 제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질까 봐 눈치만 봤다. 멱살을 잡은 청년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조금은 진정했는지 손에 힘이 풀렸다. 청년도 이렇게 큰 행사날 싸워서 엉망인 상태로 돌아다니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앞으론 조심하세요.”

탁. 내던지듯 옷깃을 내려놓은 청년이 싸늘하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대로 행사장으로 가 버리는 뒤통수가 살벌했다. 어찌나 거칠게 걸어가는지 입구에 서 있던 옅은 머리칼의 청년과 어깨가 부딪힐 뻔했으나, 다행히 옅은 머리칼의 청년이 잽싸게 몸을 피했다.

“괜찮으세요?”

황당하다는 듯 뒤를 돌아본 옅은 머리칼의 청년이 금세 남자에게 다가왔다. 남자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예에…….”

“김유정 헌터 팬이 많다더니, 정말인가 봐요. 하긴 워낙 인기가 많은 분이시니까.”

몇 년 연속 인기 헌터는 그냥 되는 게 아니구나. 평소에 밖을 나다니지 않는 남자는 그제야 그 말을 절절히 실감할 수 있었다.

“헌터님은 이름이 뭐예요?”

청년은 상황이 정리되었음에도 놀랍게도 자기 할 일만 하고 나가지 않았다. 손을 씻으며 이름을 물어보는 친화력에 남자는 조금 당황했다. 임무나 의뢰는 무조건 단독으로, 일이 없을 때는 집에만 처박혀 있는 극내향성 인간에게 너무 과한 관심이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거지? 그냥 대답을 해도 되는 건가? 나한테 한 말이 맞긴 한 거야? 남자는 한참 우물쭈물하다가, 그래도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니 용기 내어 대답했다.

“아, 저는 허민입니다.”

“허민?”

청년은 묘한 뉘앙스로 그의 이름을 곱씹는 듯하다, 이내 눈을 크게 떴다.

“허민? 무궁화 5단?”

과하게 놀라는 모습을 보니 조금 쑥스러웠지만, 거짓말을 하기도 뭐해서 민은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박. 저 허민 씨는 처음 봐요! 다른 분들은 TV에 종종 나오시잖아요.”

민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본인의 성격상 매체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방금 그에게 시비를 건 청년이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럼 김유정 헌터 이야기도 그냥 친구라서 그런 거였구나. 그럼 그렇게 말하시지!”

“말, 말하려고 했는데…….”

그 청년이 말할 틈을 안 줬다. 민의 반응에 웃음을 터트린 청년이 손을 내밀었다. 민은 망설이다 조심스레 악수에 응했다. 물기가 조금 남아 있는 손바닥이 시원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정이연이에요.”

곡선으로 휘어진 눈매가 둥글게 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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