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33)화 (233/250)

#233

“안녕하세요, 제산오 헌터. 오랜만이죠?”

뻔뻔한 인사에 일순 산오의 눈동자 안에서 흥미롭다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산오는 잠깐의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글쎄, 만난 적이 있던가.”

그 목소리에는 무감함과 동시에 약간의 빈정거림이 조미료처럼 들어 있었다. 거기 담긴 의미를 못 알아챌 리가 없는 태진이 잠깐 멈칫하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싱글싱글 웃었다.

“섭섭하네요. 저랑 제산오 헌터는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완만하게 구부러진 눈매 사이로 눈동자가 슬쩍 보였다 말았다.

“저희 꽤 닮았잖아요?”

산오는 그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머쓱해지려는 분위기를 간신히 잡은 것은 유정이었다.

“제가 외모를 평가하려는 건 아니지만, 두 분 분위기는 완전히 다른 것 같은데요?”

의아한 얼굴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산오가 사납고 날카로운 인상이 강하다면 태진은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말투나 자세도 전혀 달랐고. 어디로 보나 한데로 엮일 만한 조합은 아니었다.

“뭐, 아무래도 제산오 헌터만큼 잘생기기는 힘들긴 하죠.”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기분 상하셨으면 죄송해요.”

농담처럼 건넨 태진의 말을 유정이 부드럽게 넘겼다. 의도된 넉살에 묘하게 살얼음이 낀 것 같던 공기가 한결 풀렸다. 태진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잘 부탁드려요. 앞으로 꾸준히 보게 될 테니까.”

“꾸준히?”

산오의 말은 되묻기보다는 곱씹는 느낌이 강했다. 유정이 설명을 덧붙였다.

“어차피 5단 되실 거라서. 방금 진 선생님이 알려 주셨는데, 아. 이거 비밀이다? 이태민 씨 초능력 심사를 오늘 여기서 볼 거래. 오랜만의 5단이라 특별히 초능력관리청이랑 연락해서 준비하셨다고 하더라고.”

“이태민 씨는 실체화 능력을 기반으로 한 지형 설정 기능을 만드신 분입니다.”

산오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정원이 쐐기를 박는 것처럼 힘주어 말했다.

“그런 걸 구현할 수 있는 분이라면 당연히 무궁화 5단이니까요.”

“저 녀석이 능력을 사용하는 걸 직접 본 적이 있나?”

진실을 훤히 아는 희수가 보기에 산오의 그 질문은 굉장히 심술궂었다. 그러나 정원의 대답은 단호했다.

“네.”

산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본 정원이 분명한 발음으로 대꾸했다. 바늘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치밀한 미소와 함께였다.

“직접 봤으니 이리 확신할 수 있는 거지요.”

대체 뭘 믿는 거지? 희수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태진은 초능력자가 아니다. 당연히 정원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당당했다. 마치 자신의 말이 진짜라고 믿는 사람 같았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깜빡 속을 것처럼.

“와, 선생님은 이미 보셨구나. 이따 심사 때가 기대되네요.”

봐라, 유정은 믿어 버리지 않았는가.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얼굴에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지 정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설마 어머니조차 속고 있나? 희수는 묘한 낯으로 정원을 바라보았지만, 정작 그녀는 희수 쪽으로 눈길을 돌리지도 않았다.

“혹시 이견이 있으신지.”

입을 연 것은 태진이었다. 여전히 가소롭다는 눈빛을 하고 있는 산오를 향한 말이었다. 태진은 속마음을 좀체 파악하기 힘든 웃음을 지치지도 않고 매달고 있었다.

가면 같은 미소를 빤히 바라보던 산오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일 초, 이 초……. 호흡이 몇 번은 흐른 후에야 그는 아주 느릿하게 대꾸했다.

“내 알 바 아니지.”

권태롭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시건방진 발언이었으나 의외로 태진은 빙긋 웃었다.

그 후로도 얼마인가 이야기하던 희수의 무리는 특별 순서를 준비하러 간다며 태진과 정원이 빠지면서 흐지부지 해체되었다. 유정은 손을 흔들며 사람들 틈바구니로 사라졌고, 희수 역시 휴대폰을 한참 확인하더니 심각한 얼굴로 전화하러 떠났다.

얼결에 혼자 남은 산오는 벽 쪽으로 걸어가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벌써 지루했다. 평소였다면 절대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홀로 서 있는 산오를 향해 많은 사람이 시선을 흘끗였지만 감히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감히 접근하기엔 용기가 필요한 분위기를 온몸에 두르고 있긴 했다. 섣불리 다가갔다가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헌터의 분노를 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분인가 있자, 슬슬 조명의 조도가 점점 낮아졌다. 사람들의 머리에 희미한 어둠이 내려앉은 가운데 중앙의 단상 위에 선 남자가 마이크를 입에 댔다. 낮은 목소리가 행사장 안을 가득 채우며 메아리쳤다.

“아, 아. 잠시 후 행사가 시작되오니 귀빈 여러분은 단상 근처로 모여 주시길 바랍니다.”

드디어 행사 시작이었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사람들이 구름처럼 단상 주변에 둥그렇게 모여들었다. 산오는 미동도 않고 그 꼴을 바라보았다. 꽤 높은 단상이었기 때문에 사람으로 둘러싸여도 사회자의 허리 위쪽은 멀리서 잘 보였다.

“야.”

산오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익숙한 목소리에 건방진 부름. 시선을 돌리자 예상한 인물이 서 있었다.

“혹시 정이연 지금 뭐 하는지 알아?”

D.S는 산오의 얼굴이 싸늘하든 뜨겁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몇 번 봐서 익숙해지기도 했고, 인상이 사나울 뿐 생각보다 호전적이지 않은 녀석이라는 사실도 진작 알아챘던 덕이다. 그녀가 하려던 이야기가 그에게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화제기도 했고. 그녀의 예상대로 산오는 무시하거나 공격하는 대신 뚱하게 대답했다.

“그딴 건 왜 묻지?”

“너 설마 지금 걔랑 연락되냐? 이 자식 내 거만 연락 씹는 거야? 이게 죽을라고…….”

그게 사실이라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한참이나 이연에게 연락을 시도했더니 휴대폰은 벌써 배터리가 바닥나고 있었다. 걱정하는 인간 생각도 안 하고. D.S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뭐?”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는 점은, 그녀의 말에 산오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는 것이다.

*

탁. 문이 닫힌 공간은 꽤 컸다. 창문 없는 벽면을 따라 짐이 가득 쌓여 있었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잡동사니도 곳곳에 쑤셔박혀 있었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사라질 일회성 창고까지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던 탓이다.

한껏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이 들어가기엔 허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정돈이 되지 않은 곳이었지만, 정작 두 명의 방문자는 그 사실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저 녀석, 가만히 둬도 괜찮은가?”

정원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밀폐된 방에 들어서자 억눌러 두었던 초조가 피부를 타고 번졌다.

희수가 행사에 참석한 건 예상 가능한 사안이었다. 정원은 그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나름대로 손을 써 두었지만, 물리적으로 잡아 가두지 않는 이상 완전히 막는 건 불가능했다. 가뜩이나 사이가 안 좋아진 판에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녀석이다. 태진이 참석한다는 소문까지 퍼졌으니, 감시 목적으로 올 가능성도 염두에는 있었다.

그러나 제산오는 달랐다. 그가 행사에 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그간 적공저지일 행사는 물론이고, 다른 공식 행사 역시 한 번도 참석한 적 없었다. 그나마 비공개 행사인 초전력이나 처음 한두 번 나오고 말았지. 그러니 당연히 이번에도 불참일 거라고 생각했다.

정원은 산오를 사적으로 알지는 못했으나, 그가 대충 어떤 인물인지는 알았다. 제산오가 여기 와서 무엇을 하겠는가? 다른 헌터들과의 대화? 친목?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차라리 태진이 진짜 초능력자라는 헛소리를 믿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빙글빙글 돌며 섞였다. 대체 무슨 꿍꿍이가, 어쩌면 진희수가 손을…….

“괜찮습니다.”

불안 가득한 상념을 끊은 것은 태진이었다. 정원이 그를 돌아보자, 태진은 놀랍게도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아마 확인하러 온 걸 겁니다.”

“무엇을?”

“현실을요.”

이연에 대한 산오의 기이한 관심은 확실히 예상 밖이었으나, 이제 와서는 별 상관도 없었다. 산오의 손짓 하나에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내팽개쳐지던 이전과는 달랐다. 지금은 태진에게도 초능력이 있고, 그건 산오와 비견될 정도로 강했다.

그는 심지어 원주인보다 능력 활용을 훨씬 더 잘할 자신이 있었다. 감히 힘으로 태진을 제압해 이연을 내놓으라 윽박지를 수는 없었다. 오만이 준 여유는 그대로 산오에게 독이 되었다.

‘내 알 바 아니지.’

뭐, 태진에게 이연에 대해 묻지 않은 걸 보니 그 정도 관심도 없는 듯싶긴 했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