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이태민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문의 그분을 만나니 신기하네요. 듣기로는 오늘 행사의 주인공이시라던데.”
“적공저지일 행사의 주인공은 언제나 한 분이죠. 저는 참석 자격을 운 좋게 얻었을 뿐입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졌다. 태진은 유정의 과하다 싶을 호기심 어린 질문들을 모두 친절히 받아 주었다. 희수는 두 사람 사이에 서서 멀뚱히 샴페인만 마셨다. 굳이 어깃장을 놓아 분위기를 망칠 정도로 성격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본인을 협박한 인간과 하하호호 이야기를 나눌 만큼 온화한 성정도 아니었다.
무궁화 5단 사이에 낀 모르는 얼굴이 단순한 인사 정도로 끝나지 않고 생각보다 오래 머물러 있자,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모였다. 정보가 없는 인물에 대해 소곤소곤 토의하는 무리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술렁거림이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 가벼운 소란을 파티의 주최자 역시 눈치챘다.
“여기 모여 계셨군요.”
우아한 발걸음의 정원이 다시 다가왔다. 조금 전 희수와 D.S가 있을 때보다는 확연하게 조금 더 부드러워진 얼굴로.
“어머니.”
“어머, 진 선생님.”
희수와 유정이 동시에 고개를 숙이자, 몸을 돌린 태진 역시 정원을 향해 인사했다.
“올해 행사도 근사하네요. 역시 선생님께 맡기면 실패가 없다니까요.”
희수의 가문은 최희원의 존재와 초능력자 친화적인 입장 덕분에 초능력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존중을 받고 있었다. 콧대 높고 거칠 것 없이 살아온 무궁화 5단들도 진씨 집안의 가주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예의를 갖췄다. 예외라면 제산오 정도. 유정이 살갑게 너스레를 떨자, 정원이 희미하게 웃었다. 정원 역시 초능력자에게는 한없이 온후했다.
“별말씀을요. 말년의 낙으로 꾸민 거라 세대 차이가 좀 날까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에이, 세대 차이라뇨. 올해 간 행사 중에서 제일 멋진데요. 전투 구역을 빌릴 수 있는 행사가 어디 있겠어요.”
“너무 띄워 주지 마세요. 도시에서 가장 인기 있으신 분이 그리 말하면 정말 그런 줄 안답니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헌터의 나이대는 대부분 20대에서 40대 사이로, 상당히 젊은 편이었다. 아무래도 전투를 해야 하는 현장직이다 보니 나이가 들면 들수록 경력을 살린 사무직으로 전환하는 사례가 잦았던 탓이다.
그렇게 되면 임무 경력이 적어지니 랭킹도 자연스럽게 떨어진다.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무궁화 5단이라면 모를까, 그보다 훨씬 많은 4단은 세대교체가 주기적으로 되는 게 꽤 티가 나는 편이었다. 당장 행사장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만 봐도 회사 대표로 나온 사람들을 제외하면—어쩌면 회사 대표들까지도— 젊은 얼굴이 압도적이었다.
가벼운 인사치레가 오간 후, 정원은 태진을 향해 흘끗 시선을 던졌다.
“벌써 올해 특별 손님과 말씀을 나누신 모양입니다.”
“아하하, 워낙 핫한 분이셔야죠. 이야기 나눌 수 있을 때 욕심껏 해 보고 있었어요. 제가 너무 붙잡고 있었나요?”
“저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유정이 넉살 좋게 대꾸하자 태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이 흐뭇한 기색이 어린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자, 유정은 이때다 싶었는지 냉큼 물었다.
“올해 특별 순서는 어때요? 저렇게 커다란 무대를 준비하신 걸 보니 심상치 않은 것 같아서 너무 궁금한데, 진 국장님이 도통 말씀해 주시질 않으셔서요.”
아직도 이 화제를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정이 말을 맺으며 장난스럽게 희수를 향해 눈을 흘기자 희수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던 정원이 슬쩍 말을 흘렸다.
“특별 순서니까 특별하겠지요.”
“에이, 그건 저도 알죠. 대체 어떤 특별함인지가 궁금한 거라고요.”
“글쎄요…….”
슬그머니 입꼬리를 말아 올린 정원의 눈동자가 일순 태진을 향했다 다시 떨어졌다.
“특별한 시간이니, 특별한 분과 관련이 있겠지요.”
“어, 설마 이태민 씨요?”
유정은 제 앞으로 던져진 미끼를 피하지 않았다.
적공저지일 행사의 식순은 크게 복잡하지 않았다. 주최자의 개회사와 적공저지일을 기념하는 짧은 영상 시청, 최초의 무궁화 5단이었던 최희원의 축사, 그리고 매년 달라지는 특별 순서와 현 무궁화 5단들을 향한 감사 인사 정도.
그러나 최희원은 이미 은퇴했기 때문에 이런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몇십 년이 넘었다. 따라서 희원의 축사는 당연히 생략되는 순서 중 하나였고, 무궁화 5단들이 평소 이런 행사 참석률이 낮다는 것을 생각하면 5단들을 향한 감사 인사 또한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국 이 행사의 볼거리는 특별 순서에 집중되어 있었다. 주최 측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매년 공을 들였고.
특히 올해는 장소 대관부터 어마어마했으니, 대체 무슨 특별 순서를 준비한 것인지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다. 일각에서는 희수의 초능력 장기자랑이 나오는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였다. 눈을 빛낸 유정이 냉큼 떡밥을 집어 물자, 정원이 친절하게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이태민 씨는 실로 간만에 등장한 무궁화 5단 급의 초능력자인 데다, 능력 역시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우연히 이렇게 시기가 맞으니 조금 더 많은 분들 앞에서 정식으로 소개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 말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곳곳에 있었지만, 유정은 가장 먼저 한 가지를 지적했다.
“뭐야, 이미 이태민 씨는 무궁화 5단이라고 내정되었나요? 아직 심사도 안 받았다던데.”
그럴 가능성이야 적겠지만, 이렇게 일을 크게 벌려 놓고 나중에 심사를 받아 보니 무궁화 5단이 아니라고 하면 그것도 망신이긴 했다. 어디에나 만약은 있는 법 아닌가.
심지어 이런 격식 있는 행사까지 초대했는데 그런 사고가 터지면 체통이 땅에 떨어질 것이다. 명성으로 먹고사는 가문에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정원은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대신 그저 웃었다.
“맞아요, 아직입니다. 초심위가 허수아비도 아니고, 무궁화 5단을 아무렇게나 내주지도 않겠죠.”
미소에 서린 자신감은 모든 미래를 미리 아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유정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정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받을 생각입니다.”
“……여기서요?”
내내 가만히 있던 희수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희수는 초능력관리청에서 근무하는 고위 공무원이었다. 초등력등급심사위원회가 제 어머니에게 그런 것을 부탁받았으면 몰랐을 리가 없었다.
“네.”
……없어야 하는데.
“다행히 다들 흔쾌히 수락해 주셨답니다. 그래서 이태민 씨 역시 아직 헌터가 아니지만, 특별 손님으로 모실 수 있었고요.”
빈틈없이 웃고 있는 정원의 얼굴을 보고서야 이게 희수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짜인 판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거였다. 초능력관리청과 진정원은 이걸 걸고 거래를 한 것이다. 전투 구역을 행사 대관으로 빌려주는 대신, 귀하디귀한 무궁화 5단을 그 자리에서 등록하기로.
초능력자는 등록하는 순간 받는 혜택이 어마어마한 대신 몇 가지 의무가 있었다. 그 의무는 고위 초능력자가 될수록 더 추가되었고. 초능력관리청 입장에서 무궁화 5단은 많으면 많을수록 무조건 이득이었다.
그런데 태진이 계속 심사를 미루니 초능력관리청에서는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어르고 달래도 태진이 도통 미적지근하자 강수를 두었다. 적공저지일이라는 대규모 행사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심사를 보게 해 빼도 박도 못하게 할 심산이었다.
태진은 오늘 그저 남들 다 하는 심사를 받기만 해도 초호시의 내로라하는 헌터들 앞에서 능력을 입증하고 입에 오르내릴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정원과 태진의 노림수였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와, 그건 진짜…… 특별하네요.”
유정도 적잖게 놀랐는지 동그랗게 뜬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원래 초능력 심사는 영상과 활자 등으로 기록이 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심사위원회와 초능력자 당사자만 진행하는 비공개 절차였다. 그 이유로는 편의성이나 심사 기준 비공개 등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초능력의 종류가 공격성을 띨 경우 위험하다는 사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실체화 능력은 얼마든지 평화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기 때문에 초능력 관리청에서도 이 계획을 승인한 것이다. 만일 산오나 희수가 이런 식으로 공개 초능력 심사를 진행하고자 했다면 당연히 거절당했을 터였다.
“갑자기 많은 분들께 능력을 보여 드리게 되어서 조금 쑥스럽지만,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태진의 목소리가 조금 멀게 들렸다. 희수는 뭐라 대꾸도 못 하고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태진이 적공저지일 행사가 전날까지 심사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방심했다. 묘한 허탈감이 드는 것과 동시에, 머리 한구석에서 의문 하나가 솟아났다.
정이연 씨도 이걸 알고 있나?
아직 이연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주최 측인 희수조차 행사의 특별 순서에 관하여 전혀 전달받지 못했으니, 이연 역시 당연히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상황을 알려 줘야 했다.
희수는 연락이 온 척 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기 위해 발자국을 내딛었다. 아무래도 이연에게 연락을 취해서 계획을…….
“어?”
그때였다. 희수의 등 뒤에서 즐겁게 잡담을 나누던 유정과 태진의 말소리가 뚝 끊겼다. 희수는 저도 모르게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유정 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