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과거 생각에 슬그머니 찌푸려지는 미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건 D.S였다. 그녀는 주의를 환기하려는 것처럼 화제를 돌렸다.
“갔던 건 어떻게 됐어?”
이 계획에서 세 사람은 각자 맡은 역할이 있었다. 희수도, D.S도 맡은 바를 다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쪼개 일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미림은…….
“뭐, 일단 이야기를 전하긴 했는데…….”
미림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맡은 역할은 다른 두 사람만큼 품을 많이 들여야 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가장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큰 기대는 하지 마.”
그나마도 잘 안 된 모양이다. 예상하지 못한 일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희수와 D.S는 시무룩해하는 미림의 어깨만 좀 토닥여 주고 말았다.
“괜찮아. 플랜 비도 있으니까.”
“맞아. 그거 하려고 온 거잖아.”
세 사람이 행사에 참석한 것은 정원과 가문 어른들의 비리 증거를 잡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이태진 하나를 위해 움직인 자금이 대략적으로 계산해도 어마어마했다. 분명히 가문과 관련이 있을 텐데 어디서 어떻게 그 많은 돈을 수급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안에서 쓰는 돈의 행방을 모두 추적하고 있는 참이었다. 가문이 주최하는 적공저지일 행사 역시 조사 대상이었고.
목적을 위해 오자마자 건물을 한 바퀴 둘러봤지만, 워낙 경계가 삼엄해 같은 가문이어도 개최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그들은 관계자 구역에 쉽게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그 부분이 오히려 수상하긴 했다.
의심만 살 것 같아 일단 후퇴하고 다시 행사장으로 돌아온 참이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행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따로 할 일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 모여 있으니 절로 나오는 것은 그간의 안부와 소소한 잡담들이었다.
“언니, 새로 개발한 로봇이 그렇게 핫하다며? 우리 큰오빠도 관심 가지던데.”
“그런 사람 많아. 줄 서.”
“아이, 큰오빠가 나한테 엄청 신신당부했다고. 새언니가 엄청나게 졸랐대.”
“줄 서라니까.”
“그러지 말고~. 있어 봐, 큰오빠가 대신에…….”
특히 미림은 오랜만에 만난 D.S가 반가운지 연신 말을 걸었다. 제 언니 오빠들의 몫까지 네 배는 더 조잘거리는 것 같았다. D.S 역시 싫지는 않은지 까칠하기는 해도 대답은 꼬박꼬박 해 주었다. 쉴 새 없이 수다를 떨던 두 사람은 함께 화장실에 다녀올 겸 다시 복도를 둘러보고 오겠다고 손을 잡고 사라졌다.
얼결에 혼자가 된 희수는 샴페인 잔을 쥔 채로 행사장 구석으로 이동했다. 전투 구역 대부분을 사용한 웅장한 규모에 비해 인원은 별로 없다 보니 외곽으로 걷자 금세 한산해졌다. 물론 희수는 얼굴이 알려진 유명인 중 유명인이었으므로 알아보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았지만, 까마득한 무궁화 5단이자 변이종관리국 국장에게 말을 걸 용기까지는 없는지 근처로 오는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희수는 간만의 휴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이게 누구야, 진 국장님?”
건들대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익숙한 톤이었다. 희수는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박성찬 씨.”
뒤늦게 시선을 돌리자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희수를 보고 씩 웃는 것이 보였다. 190은 훌쩍 넘는 키에 온몸 가득 짜여 있는 근육은 잘 차려입은 정장 위로도 얼핏 태가 났다. 선명한 이목구비는 건장한 몸, 불량한 말투과 어우러져 성찬을 양아치처럼 보이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위압적인 만큼 눈에 띄는 외형에 무심코 고개를 돌린 사람들이 남자의 정체를 알아채고 화들짝 놀라 소곤거리는 것이 보였다. 웅성이는 속삭임이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이 구석탱이에서 혼자 뭐 해요? 사람 구경?”
그러나 성찬은 주변 일은 전혀 모른다는 무신경한 얼굴로 오로지 희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일에 일일이 반응하려면 성찬의 하루는 48시간으로도 모자랐다. 그는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박성찬. 부피 조절 능력을 가진 무궁화 5단 초능력자.
“진 국장님 나이 먹은 거 너무 티 나는 거 아니에요?”
국내 랭킹 6위였다.
“자유분방한 말투는 여전하군요.”
희수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성찬이 무궁화 5단에 오른 지는 6년이 넘었다. 희수 역시 그를 6년 이상 상대했다는 뜻이었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말본새는 별로 화나지도 않았다. 랭킹 1위에 비하면 양반 수준이기도 했고.
희수의 앞에 다가온 성찬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삐딱하게 섰다. 두 사람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성찬의 목소리는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층 낮아졌다.
“왔대요?”
“누가 말입니까.”
이 시점에 무궁화 5단이 물어볼 사람의 정체야 빤했지만, 희수는 일단 모른 척했다. 성찬은 그 은근한 시그널을 타박하며 재촉했다.
“왜 이래요? 이태민 진짜 왔냐고요.”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뻔뻔한 모르쇠에 성찬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국장님네 어머님한테 뭐 들은 거 없어요? 조금 전에 이야기하는 거 봤는데.”
“요즘 독립 중이라 어머니하고 대화할 일이 없습니다.”
“아, 그랬지…….”
희수의 분가 소식은 꽤 공공연한 이야기였다. 다들 이유를 궁금해했으나 희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희수와 정원이 틀어졌다는 소식을 외부에 알려 봤자 좋을 일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름의 예의이자 전략이었다. 덕분에 희수에게 숨겨 둔 애인이 있다는 소문만 가열차게 퍼져 나갔다.
“에이, 국장님이면 알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이 지형 설정 기능 고쳤다는 거 진짜예요? 그럼 초전력 미룰 필요 없었던 거 아냐?”
희수가 순순히 대답해 줄 기미가 없자 성찬은 화제를 바꾸었다. 아무래도 그에게서 제대로 된 대답을 얻기 힘들다는 사실을 빠르게 눈치챈 모양이었다. 희수는 별다른 내색 없이 얌전히 대꾸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군요.”
태진은 퇴원한 지 정확히 일주일 후, 지형 설정 기능을 원래대로 복구했다. 그간 초능력관리청에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것이 무색할 정도의 속도였다. 덕분에 초전력을 미루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개최 가능할 정도의 여유가 생겼지만, 일정을 다시 번복하는 과정이 훨씬 품이 더 많이 들었기 때문에 초전력은 예정대로 연기된 일정으로 개최될 예정이었다.
“아, 아깝다, 진짜. 민수라 국내 들어온 김에 초전력 하라고 내가 얼마나 꼬신 줄 알아요? 겨우 확답 받아 놨는데 일정 미뤄지니까 냉큼 불참한다고 말 바꿨단 말이에요. 어차피 우리 경기는 지형 설정 기능이랑 상관도 없는데.”
성찬은 5단 중에서도 초전력 출석률이 특히 높았다. 대인전 선호도가 매우 높다는 뜻이었다. 한껏 투덜거리던 그는 이내 초전력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을 떠올리고 반색했다.
“국장님은 이태민이 실체화 능력 쓰는 거 봤어요? 심사 이미 받았나? 이번 초전력엔 참여한대요? 하겠죠?”
성찬이 끝도 없이 질문을 늘어놓았다.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이다. 희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못 봤습니다. 심사는 아직 안 받았고, 초전력 참여 여부는 미정입니다.”
“헐, 불참이라고요?”
미정이라고 말했음에도 성찬은 음절 사이사이의 부정적인 뉘앙스를 용케 읽어 냈다. 황당한 기색이 역력한 중얼거림이 툭 튀어나왔다.
초전력 참여는 선택 사항이지만, 심사를 보고 단수가 막 책정된 초능력자, 특히 4단 이상의 고위급 초능력자는 첫 초전력만큼은 참여하는 것이 관례였다. 높은 단수로 갈수록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적어지는 구조인 탓에 동급의 초능력자들과 겨룰 일이 흔치 않기도 하고, 일종의 자기소개 성격도 띠고 있기 때문이었다.
“뭐야, 재미없게.”
간만에 등장한 새 대전 상대가 참여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자 그의 흥미는 순식간에 뚝 떨어졌다. 성찬이 심드렁하게 투덜거리며 인상을 구겼다.
“개발자라서 그런가, 완전 샌님인가 보네. 그럼 됐어요. 국장님은 참여해요?”
편견이 작렬하는 발언을 내뱉은 성찬의 질문에 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예상이 맞다면 아마 이번에 치러지는 초전력은 꽤 흥미로울 터였다. 산뜻한 긍정에 성찬의 낯빛이 금세 환해졌다.
“대박. 국장님은 웬일? 맨날 바쁘다고 튕기더니. 오늘부터 국장님 공략법 공부합니다.”
“힘내십시오.”
태연한 응원에 재수 없다며 툴툴댄 성찬의 용건은 그걸로 끝난 모양이었다. 그때 보자는 인사를 내뱉고는 막 몸을 돌리던 성찬이 별안간 눈동자를 빛냈다. 간식을 발견한 대형견 같은 얼굴이었다.
혜성이 형, 하고 외치며 가는 뒤통수 너머를 보니 그리스 남신 같은 남자가 서 있었다. 무궁화 4단 헌터 이혜성이었다. 얼마 전 한국에 들어왔다더니 아직 나가지 않은 듯했다.
혜성은 출중한 얼굴에 묻혀서 과소평가된 감은 있으나, 틀림없이 유능한 헌터 중 하나였다. 게다가 무소속이지 않은가. 회사를 이끌고 있는 성찬에게는 탐나는 인재일 터였다. 매번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당하는 것 같긴 했지만……. 저렇게 끈질긴 것도 재능이다. 희수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성찬에게서 시선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