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28)화 (228/250)

#228

진정원이 입을 열었다. 딱 표정만큼 무기질적인 어조였다.

“일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늦지 않게 왔구나.”

“할머님의 업적을 기념하는 행사에 빠질 수는 없지요.”

뼈가 있는 말에 희수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어쩐지 적공저지일 행사가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들 일을 떠넘긴다 했더니, 정원이 또 뒤에서 손을 쓴 듯했다. 희수가 다른 데에 관심을 돌릴 틈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빤했다.

계속 당하다 보니 이제는 좀 적응까지 된 것 같았다. 희수는 산더미같이 쌓인 일을 처리하는 것을 미루고 이곳에 온 대가로 내일부터 쭉 야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대신, 여상한 잡담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유독 사람이 많네요.”

원래 상급 헌터들의 친목을 겸하는 흔치 않은 자리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시보다 일찍 입장해 다른 헌터들과 안면을 터 두곤 했지만, 이번에는 유독 인구 밀도가 높았다. 정식 행사까지 남은 시간을 고려해 보면 조금 특이하다 싶을 정도였다.

“무궁화 5단들이 대부분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잖니. 흔치 않은 일이지.”

무궁화 5단을 받은 사람은 이 나라에 단 아홉 명뿐이었다. 그나마도 이미 은퇴한 최희원을 제외하면 8명이다. 능력이 강할수록 일이 험해지는 이 업계에서 정점에 선 사람들은 워낙 일정이 빡빡하다 보니 아무리 권위 있는 행사여도 참여율이 그리 높지 않았다. 8명 중 3명이 참석하면 많이 한 정도. 그것도 본인의 위치상 매년 참석하는 희수를 포함한 수치였다.

그런데 올해는 무려 6명이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보내 왔다. 응답을 보내지 않은 나머지 세 사람이 손꼽히게 비협조적이고 본인의 소재를 밝히지 않는 랭킹 1위와 오래전에 외국에 나가 장기 임무 중인 랭킹 7위, 그리고 은퇴한 랭킹 9위인 최희원임을 감안하면 국내에 있는 무궁화 5단은 모두 오겠다고 한 셈이다.

그들의 목적은 한 가지.

“이태민이 주목을 많이 받고 있군요.”

희수가 불손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원이 가볍게 팔짱을 꼈다.

“실체화 능력이면 그럴 만하지. 무궁화 5단이 거의 확실하다더구나.”

“이태민은 아직 초능력 심사를 받지 않았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행사 참여 자격이 없지 않습니까.”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으나, 태진은 지속적으로 심사를 받겠다는 의사만 내비칠 뿐 아직 확답은 주지 않았다. 난데없이 시작된 밀당에 초능력심사위원회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애를 태우고 있다는 사실은 초능력관리청 내에서 이미 유명했다.

아무튼, 이태진은 공식적으로 초능력자가 아니니 헌터 행사에 참여하는 건 너무 일렀다. 특히 이렇게 요란한 장소까지 마련하여 기념해 줄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뾰족한 희수의 지적에도 정원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최 측에서 특별 초대를 했단다.”

“예?”

“어차피 시간문제인데, 굳이 눈 가리고 아웅 할 필요 있니?”

특별 취급 중이라는 이야기를 당당하게도 했다. 황당해진 희수가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리려는 순간, 정원은 그녀에게 다가온 비서의 속삭임을 듣더니 이만 가 봐야겠다며 몸을 돌렸다.

망설임 없이 가 버리는 뒷모습이 얄미울 정도로 호쾌했다. 허……. 순식간에 다시 둘만 남아 버린 자리에서 희수는 헛웃음만 흘렸다.

“재수 없긴.”

먼저 목소리를 낸 것은 D.S였다. 정원은 이야기하는 내내 같이 있던 D.S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을 열받게 만들 수 있는지 어디서 연구라도 하고 온 사람 같았다. 뒤늦게 희수가 그녀를 도닥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마. 한두 번 저러시는 것도 아닌데.”

“신경 안 써.”

심드렁하게 대꾸한 D.S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금세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혹시 정이연하고 연락돼?”

“정이연 씨?”

희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일부러 이연과 자주 연락하지 않았다. 태진과 접촉하는 일 일체를 이연에게 일임했기도 하고, 보는 눈이 많아 직접 찾아가기도 어려운 데다 해킹 위험 때문에 통신 기기 역시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있는 판이었다.

오히려 최근에는 D.S와 훨씬 더 많이 연락했다. 그녀는 희수와 영 동떨어져 보이는 이연과 달리 사촌 관계였고, 미래라는 그럴듯한 연결고리까지 있어 훨씬 제약이 덜했다. 그래도 알 만한 사람은 눈치챘겠지만, 그것까지야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아무튼, 이연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따로 태진에게 붙여 놓은 감시의 보고로도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고.

“그래?”

D.S가 묘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희수가 의아하게 물었다.

“정이연 씨는 갑자기 왜?”

“오전부터 계속 연락했는데 연락이 안 닿아. 메시지를 잘 안 보는 녀석이 아닌데…….”

말끝을 흐린 D.S는 휴대폰이 들어 있는 파우치를 괜히 만지작댔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덕선 언니, 희수 오빠!”

그때, 젊은 여자가 다가왔다. 홀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화려하게 치장한 여자는 두 사람의 얼굴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일찍도 온다, 진미림.”

D.S의 타박에 미림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세 사람은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촌이어도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나한테 제일 어려운 거 시켜 놓고선.”

“제이일? 나도 머리털 빠질 정도로 일했어. 팔자에도 없는 사장이 됐다고.”

진미림, 그리고 진덕선. 이 둘은 희수가 가장 먼저 연락했던 사촌들이었다.

D.S가 돕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자 희수는 자택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의 집에 가 보니 또 한 명의 사촌, 미림이 D.S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부모끼리의 사이가 워낙 돈독하지 않았던 데다, D.S는 부모와 연을 끊은 지 꽤 오래되었다 보니 희수 외의 사촌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하는 이야기를 보니 희수는 미림을 종종 만난 것 같았다. D.S에게 가끔 연락했던 것처럼. 뭐, 그는 어릴 때에도 어른들의 멸시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덕에 다른 사촌들의 방패막이 역할을 자처하곤 했다.

세 사람은 간단한 안부를 나누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희수가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어른들 막는 거 관심 있어?’

진정원뿐만이 아니었다. D.S의 아버지인 진정욱, 그리고 미림의 아버지인 진정기. 세 명 모두 집안의 권력 다툼을 위해 자식들을 내세웠다. 단지 승자와 패자가 갈렸을 뿐이다.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자식들도 자아를 가진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초능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 형제자매를 무시하는 눈빛, 낮은 단수를 차별하는 발언. 그들은 그런 것을 두 눈으로 보면서 자랐다. 어릴 때에는 마음껏 어울려 놀던 사촌들을 어느 순간 강제로 떨어트렸다. 하는 말은 늘 비슷했다. 걔는 너랑 급이 달라서. 수준이 맞지 않아서.

이해할 수 없는 이유였다. 반발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뭘 할 생각인데?’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난 후에도 아직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것은 납득시키지 못한 어른들의 잘못이었다.

“맞다, 오빠들이랑 언니도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 달래. 특히 작은 오빠가 쌍수 들고 환영하던데.”

미림이 종알거렸다. 외동인 희수나 D.S와는 달리 미림은 무려 4남매였다. 그러나 가장 높은 단수가 3단이었고, 1단이 둘, 비초능력자가 하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걸핏하면 본인의 자식들 모두를 희수와 비교하며 후려치곤 했다.

“걔네 바쁘다며.”

“그 말 할 줄 알았어. 지금 바쁜 게 대수야? 라고 언니가 전해 달래.”

어릴 적부터 특히 사이가 좋았던 남매의 우애는 공공의 적 앞에서 한층 더 공고해졌다. 성인이 되고 본가에는 거의 발길을 끊은 미림 역시 자신의 언니 오빠들과는 거의 매일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모두 찬성이라니 다행이네…….”

희수가 조금 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사촌들이 그를 지지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두고 있었다. 희수가 한 것은 사실상 부모님 세대를 무너트리겠다는 선언이었다. 아무리 제 부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 정도까지 바라는 사촌이 많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전원이 찬성한 것 아닌가.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초능력 가지고 차별이야. 그런 꼰대 같은 생각을 버리질 못하는 게 오히려 신기하다.”

내내 활달하던 미림의 말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3단인 언니와 비초능력자인 큰 오빠, 그리고 1단인 작은 오빠가 각각 어떻게 대우받았는지 내내 보면서 자랐다. 그리고 1단인 자신을 바라보는 고모와 큰아버지 앞에서 수없이 작아져야 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걸 사회에 나가서야 알았다. 넓어진 세상은 절대로 다시 줄어들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