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덕선 누나.”
거대한 행사장 입구로 들어서는 D.S에게 희수가 다가왔다. 잘 차려입은 정장에 깔끔히 넘긴 머리 스타일. 평소보다 훨씬 더 공들인 모습이었다.
전통 있는 적공저지일 행사의 주최 측다운 성장이다.
“미림이는.”
D.S 역시 비슷했다. 어두운색의 드레스에 달린 무수한 비즈가 조명 빛에 따라 반짝였다. 우아하게 세팅한 머리와 짙은 화장은 부스스한 채로 다니는 평소의 차림과 괴리감이 대단했다.
“아직.”
“제시간에 오는 건 맞아? 걔가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꼴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시간 내에는 온다고 했어.”
훤칠한 남녀가 마주 서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그 자체로 그림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이 쉴 새 없이 그들을 흘끔거리는 것은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징그럽게 훔쳐보네. 벼락부자 처음 보나.”
D.S가 투덜거렸다. DnY의 핵심 기술을 다른 곳에 팔 생각은 없었던 D.S는 회사를 세워 경영 대리를 고용했고, 출시하기도 전에 수십 개의 투자 제안을 불러 모으는 대박을 터트렸다. 연일 밀려드는 예약 주문을 감당하기에 예정해 둔 제작 규모로는 턱도 없었다. 급하게 공장을 더 수배하느라 D.S는 공방마저 하루 임시 휴업했다.
대리인을 세웠다고 해도 회사 창립 초기였기 때문에 완전히 맡겨 놓을 수 없는 부분이 존재했다. 덕분에 그녀는 희수와 비슷한 수준의 공사다망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그녀가 이 행사에 뜬금없이 참석한 이유는 단 하나. 진희수 때문이었다. 도와주기 위해 오긴 했지만 그리 기꺼운 발걸음은 아니었다. 오늘따라 한층 더 삐딱해 보이는 D.S의 모습에 희수가 진정하라는 듯 등을 툭툭 쳤다.
“벼락부자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주최 측이라서야.”
급부상한 사업가가 최희원의 핏줄, 그것도 가문 내에서 괄시당하던 인물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DnY뿐만 아니라 그녀 자체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 역시 늘어났다. 그건 확실히 피곤한 일이었다. D.S가 새침하게 중얼거렸다.
“주최 측? 우린 아무런 도움도 안 줬는데.”
“다행이지. 도움 하나 주지 않아도 같은 피라는 이유로 자유롭게 입장이 가능하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초능력자, 그중에서도 상급 헌터만 참여하는 적공저지일 행사에 비초능력자인 D.S가 입장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D.S는 핏줄이 준 혜택까지 끝끝내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는지 코웃음만 치고 말았다.
“그 자식은. 있어?”
이연과 산오가 진씨 집안 저택으로 침입했을 때, 중간에 통신이 끊겼기 때문에 D.S는 태진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보지 못했다. 또한 이태진의 송치는 철저한 비공개로 이루어졌으므로 관계자가 아닌 이상 알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그녀는 태진이 여기 왔는지 아닌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희수는 달랐다. 태진을 구금한 것도, 풀어 준 것도 그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또한 얼굴 정도는 당연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태진에 대한 보고를 비공식적으로 많이 받아 본 인물이기도 했다.
“아직.”
고개를 저은 희수가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그의 어머니, 진정원의 취향은 원래 화려하긴 했으나 올해는 유독 심했다. 조명을 반사하는 크리스털 장식을 어찌나 많이 썼는지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였다.
보통 적공저지일 행사는 초호시의 내로라하는 호텔에서 진행되었으나, 올해는 조금 달랐다. 호텔만큼 고급스럽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아주 넓은 야외. 아니, 임시로 천장을 막아 두었으니 야외라고 하기도 그렇지. 희수가 거대한 샹들리에를 흘끔였다. 마치 원래부터 이런 건물이었다는 것처럼 화려한 천장 무늬가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초관청에서 이런 걸 허용해 줄 줄은 몰랐는데. 변이종 나타나면 어쩌려고 그러냐?”
D.S의 빈정거림에 희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손 던 거지, 뭐. 여기 있는 헌터들이면 1급 변이종도 거뜬히 잡을걸.”
반농담으로 넘기긴 했지만, 그녀의 비난도 타당했다. 이곳은 원래 사설 행사를 위해 개방되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무리 적공저지일 행사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비상시를 대비해 늘 비워 두는 도시의 안전 지역. 그중에서도 도시의 최심부에 있는 1 전투 구역.
무려 올해의 행사장이었다.
희수 역시 처음에 발송된 초대장을 읽었을 때에는 잘못 본 줄 알고 몇 번이나 확인했다. 정부 주관이 아닌 이상, 전투 구역에서 사적인 행사를 여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전투 구역이 마을 회관도 아니지 않는가. 그간 많은 기업들이 요청했어도 초능력관리청은 단호한 입장을 표명해 왔다.
거기서 첫 번째 전례가 된 것이다.
행사장을 꾸미는 데에는 물론, 지형 설정 기능을 사용했다. 겉에서 보면 단순하게 크고 높은 직육면체형 건물처럼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오면 전혀 느낌이 달랐다.
커다란 문을 넘어 입장하면 바로 앞에 행사장으로 이어지는 문과 행사장 전체를 감싸는 복도가 있었는데, 그 복도에 빼곡히 난 문에는 화장실과 조리실, 준비실 및 임시 창고 등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오로지 오늘 하루만을 위한 장소로 쓰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게다가 메인 스테이지인 행사장 안은 어떤가. 그리스 신전처럼 커다랗고 둥근 기둥들과 섬세한 조각으로 깎은 벽이 높은 천장에 설치된 조명의 빛을 받고 은은하게 빛났고, 바닥 역시 대리석을 깔아 놓은 것처럼 매끄러운 느낌이 났다. 화려하게 꾸미고 온 손님들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우아함이 넘쳐흐르는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인 행사치고는 구조가 다소 성의 없었다.
기본적으로 행사장은 텅 비어 있었다. 적공저지일 행사는 진행 시간 특성상 저녁 식사 및 간단한 술을 겸하는데, 정작 손님들이 앉을 만한 자리라곤 저 멀리 외곽 쪽에 자리한 벤치들 정도였다. 그나마도 너무 멀어 행사장 중앙에서 그쪽으로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다.
희수가 기억하기로 초대장엔 분명히 제 자리가 마련된 테이블 넘버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행사장 내부는 시원할 정도로 휑했다. 설마 바닥에 앉아서 밥을 먹으라고 할 셈은 아닐 텐데.
게다가 행사장 정중앙에 덜렁 놓인 원형 단상은 무슨 레슬링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컸다. 이곳에 온 손님의 절반을 단상으로 올려도 자리가 남을 정도였다. 아마 적공저지일 행사 중 진행되는 ‘특별 순서’를 위한 공간인 듯싶었다.
특별 순서는 적공저지일을 테마로 기획되는 일종의 깜짝 이벤트로, 그 내용은 매년 달랐고 행사 당일에야 공개되었다. 작년에는 유명한 화가에게 의뢰해 적공저지 당시의 모습을 담은 대형 그림을 공개했었다.—현재 그 그림은 초능력관리청의 로비에 전시되어 있다.—
정원의 이벤트는 늘 기발하고 화려했으므로, 사람들은 올해도 무엇일지 잔뜩 기대하고 있을 터였다. 그 증거로 단상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간간이 텅 비어 있는 단상 쪽을 흘끗이곤 했다.
아무튼, 특별 순서가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행사장은 그 넓이에 비해 들어차 있는 게 없었다. 내부 인테리어가 화려한 데다 행사의 손님 수가 적은 편이 아닌데도 그랬다.
제 어머니의 치밀한 성격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광경이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희수가 슬금 드는 불안감을 누르려 괜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에 걸리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만약 산오의 말대로 이곳에서 태진을 소개할 심산이라면 이보다 확실한 주목거리는 없을 것이다. 전투 구역의 핵심 시스템을 개발한 개발자의 첫 공식 행사 참석 공간이 1 전투 구역이라니. 짜 맞춘 것처럼 훌륭한 권력 남용 명분이었다. 벌써 힘을 실어 주지 못해 안달인 꼴이 진절머리가 나면서도, 머리 한구석에서는 의문이 들었다.
‘고작 그 정도로 전투 구역을 개방한다고?’
태진의 업적이 대단한 것은 맞고, 그가 만약 이연의 초능력으로 심사를 받는다면 무궁화 5단이 확실시되는 것도 맞았지만 그래 봤자 미래일 뿐이었다. 현재 그는 아무것도 없는 일반인이다. 아무리 진씨 가문이 요청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지원해 준다는 것이 의아했다. 혹시 무언가 다른 내막이…….
“진 국장.”
그때였다. 또각, 하는 구두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다가왔다. 희수와 D.S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상대를 확인한 D.S의 미간이 꿈틀했으나 상대방이 눈치채기 전에 간신히 표정을 수습할 수 있었다. 옛말 틀린 거 하나 없이, 호랑이가 칼같이 등장했다. 건조한 얼굴의 희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머니.”
솜씨 좋게 말아 올린 머리와 반짝이는 복장이 나이에 꼭 맞게 어울리는 여자가 눈인사를 했다. 고상한 눈빛에는 아들을 바라보는 온기라곤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