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19. 그리하여 번데기는 나비가 된다 (下)
스륵 열리는 자동문은 거의 소음이 없었다. 남자의 발걸음처럼.
사실 이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런 식이다. 거대한 무덤 같은 고요가 공기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지나치게 깔끔한 밝은색 인테리어는 오히려 삭막한 인상을 강하게 더했다.
어쩌면 그건 남자의 취향일지도 몰랐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들어찬 거만은 과시보다는 멸시의 빛을 더 강하게 띠었다. 천재라고 떠받들리며 살아와 선민의식이 뿌리 깊게 주입되어 타인을 저와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덜떨어진 것과 한 공간에 있느니 차라리 혼자 있는 것을 택하는 유구하게 오만한 사고방식.
그건 틀림없이 유령처럼 홀로 걷는 그를 닮았다.
너른 방을 거침없이 걷던 남자가 멈춰 섰다. 방 한가운데에 덜렁 놓여 있는 침대 앞이었다.
아니, 그걸 침대라고 부르기엔 다소 어폐가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높이에 정갈하게 깔려 있는 푹신한 시트까지야 그럴듯했지만, 그 위로 덮여 있는 두껍고 튼튼한 유리 덮개는 누워 있는 사람의 크기에 맞추어 빡빡한 여백으로 놓여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낮은 높이.
마치 그럴 일이 전혀 없으리란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 안에 정자세로 누워 있는 남자의 몸에는 전극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전극의 선은 침대 시트 아래와 연결되어 외부의 설비로 이어졌다. 여러 대의 모니터에 떠 있는 수치들은 시설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태진은 침대 안에서 잠든 이연을 내려다보았다. 마르긴 해도 적당한 생활 근육이 붙어 있는 육체는 아주 가느다란 숨만 들썩이고 있었다. 가만히 손을 내밀어 관을 쓰다듬자, 안에 든 사람의 온기는 전혀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온도가 느껴졌다. 그 감각을 조용히 음미하던 태진의 입꼬리가 별안간 올라갔다.
마침내 잡았다.
드디어!
조카는 여러 해가 지나도 여전히 순진하고 멍청했다. 방심한 이연의 몸에 수면마취제를 투여해 잠재우고 이곳으로 옮기는 건 너무 쉬워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물론 그를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영원히 살려 둬야 마땅했다.
그래서 태진은 이연이 잠든 동안 기력을 빼내는 중이었다. 한 번에 많은 양을 추출하면 죽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저 작은 몸에 가득 든 황금알을 옮기는 것이다.
모조리 비운 다음 새로운 황금알을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몸에 남아 있는 기력이 거의 없으면 깨어나도 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초능력 역시 일종의 신체 능력이었으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로는 큰 힘을 쓸 수 없었다. 태진은 언젠가 함께했던 동료들이 그런 식으로 많은 초능력자를 붙들어 두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연이 누워 있는 침대엔 중환자를 위한 기초적인 생명 유지 장치가 전부 되어 있었다. 국내에 있는 여느 대학병원 부럽지 않은 시설이었다. 내부를 순환하는 공기는 물론이고 영양소나 위생까지 빠짐없이 공급되고 있었다. 이만하면 호화 생활이라고 불러도 될 터였다.
뭐, 평생 누워 있으면 다른 신체 능력이 퇴화하겠지만 생명에는 지장 없었다. 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침대의 주인은 영원히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이건 침대가 아니라 관이라고 부르는 게 옳았다.
이연이 있던 방을 나온 태진은 복잡한 구조의 복도를 걸어 다른 방으로 향했다.
커다란 책장과 수많은 캐비닛들, 그리고 널찍한 책상에 올려진 컴퓨터. 단기간에 만들어진 거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제법 본격적으로 차려진 집무실이었다.
태진은 곧장 책상으로 가 컴퓨터를 켰다. 마우스를 몇 번 딸깍이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바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태진이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상황은?”
[조용합니다.]
그의 계획에서 가장 성가셨던 존재를 꼽으라면 단연 제산오였다. 타이밍 하나는 더럽게 못 맞추는 태진의 가장 위대한 골칫덩이.
솔직히 말하자면, 산오가 그렇게까지 거추장스러울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제산오를 관찰해 온 연구자였다. 관찰 범위는 단순히 기력 혹은 초능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초능력을 발현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검토하기 위해 태진은 산오의 신체 정보는 물론이고 성격이나 성향까지 전부 분석했다. 제산오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도라면 자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산오가 가지고 있는 이연에 대한 각별한 호감은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태진이 파악해 온 제산오라는 인물은 그럴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타인에 대한 이해나 교류에 대한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물론, 애정이라는 개념도 매우 희박했다. 하고 싶은데 못 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안 하는 거였다.
만일 산오가 그 며칠간의 어울림으로 이연을 그렇게나 좋아하게 되었다면, 태진이나 다른 연구원들은 부모 수준으로 따라야 정상이었다. 당시 연구소 내에서 산오는 핵심 실험체였고, 인간을 상대로 하는 실험은 실험체의 자발적인 협조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산오를 함부로 대하는 연구원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모두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를 썼다.
덧붙여 그 시도가 모조리 실패한 것 역시도 사실이다.
태진이 했던 연구는 산오의 음모나 계략으로 속은 게 아니다.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 활동으로 분석한 산오의 성격은 매우 높은 정확도를 가지고 있었다. 예외가 있다손 쳐도 기본적인 정보가 잘못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익히 알다시피, 인간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사무소 동료가 찾는 기색을 보이긴 했으나 헛수고로 그칠 겁니다. 이쪽과 관련이 있는 줄도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태진은 액정 너머의 상대가 차분하게 읊어 주는 정보와 현재까지의 사실을 가만히 배열했다.
현재 이연을 데려온 지 약 24시간이 지났다. 이연의 성격상 태진과의 일을 타인에게 미주알고주알 말했을 리도 없으니, 직장 동료인 일반인 혼자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이연을 찾아낼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그게 아무리 유능한 해커여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뭘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그의 다른 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발칙하게도 감히 이연과 작당해 저를 속이려 들었던 진희수 정도라면 모를까.
“도련님 쪽은?”
[역시 조용합니다. 상황을 어디까지 공유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상황까지는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보안상 연락을 최소화한 것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
이연이 지형 설정 기능에 대한 사실을 알고 취했을 방법이란 빤했다. 태진에게 바로 찾아오거나, 초능력관리청에 연락하거나. 전자인 척 연기하며 후자를 택했다는 걸 알았을 때에는 조카의 성장이 기특하기까지 했다. 그래 봤자 태진의 손바닥 안이었지만.
이연과 희수가 접선했다는 전제를 두고 생각하면 두 사람의 계획 역시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그는 태진과 제 어머니가 우호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고, 이를 이용해 어머니인 진정원을 실각시키려고 할 터였다.
희수는 어머니인 진정원과 사이가 최근 계속 좋지 않았던 것도 모자라 본가에서도 나가 버렸으니 가문 내에서의 입지가 확연히 좁아진 상태다. 밖에서야 국장이니 뭐니 치켜세워 줘도, 집안 내에서 진희수의 비중은 그 어머니와 감히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권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때마침 이연이 아주 좋은 패를 쥐고 희수를 찾아온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즐거웠을까? 태진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연이 태진에게 협조하는 척 다가와 정원과 유착했다는 증거를 찾아내고, 희수는 그 자료를 이용해 태진과 정원, 두 사람을 모두 무너트릴 작정이었겠지.
희수와 근래 유독 접선하는 일이 잦아졌다는 진덕선의 행보 역시 그 추측에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최근 그녀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노선을 택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사업 추진. 이제껏 개인 의뢰나 하며 조용히 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원래 엔지니어로서의 평가가 높은 여자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이는 미개봉 복권도 또 없을 것이다. 아직 출시하지도 않은 아이템을 가지고도 여기저기서 돈을 대 주겠다고 난리인 판인데, 만일 그녀의 사업이 성공하면 막대한 자금이 확보될 거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했다. 진희수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 재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