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어떻게…….”
우웅. 어디선가 공기가 진동하는 소리가 났다. 이연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산오는 색소가 다 빠진 이연의 머리카락이 옅다 못해 은근하게 빛이 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챘다.
“정이연.”
“감히…….”
이연은 산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거대하게 밀려오는 압력과 함께, 새하얀 모래가 이연의 주변에서 산발적으로 하나둘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산오는 이 현상을 알았다. 감정 제어 실패로 인한 초능력 폭주 전조였다.
“정이연!”
산오는 이연의 어깨를 돌려세워 자신을 보게 했으나, 이연의 시선은 허공 언저리를 더듬고 있었다. 저 멀리서 강한 힘을 감지한 뭉치가 털을 곤두세우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얗게 빛이 나는 모래가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혀를 찬 산오가 손에 다시 한번 힘을 주었다. 본체를 압박하는 물리력을 알아챈 모래들이 산오의 팔뚝과 손에 들러붙었지만, 산오는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았다. 약하게 흔들자 끈 떨어진 인형 같던 이연의 얼굴에 일순간 총기가 돌아왔다. 산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정이연, 정신 차려.”
멍한 눈동자가 느리게 산오의 얼굴로 향했다. 그러고도 한참 만에야 이연은 산오를 인식했다.
“……제산오.”
“정신 들었으면 초능력 집어넣어.”
“……어?”
눈꺼풀을 두어 번 깜빡인 이연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러낸 기억도 없는 하얀 모래들이 발치와 소파에 가득 쌓여 있었다. 분노의 잔재들은 이연의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쉽게 흩어 사라졌다.
“설마 내가 지금…… 능력 제어에 실패한 거야?”
이연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감정 과잉으로 인한 능력 제어 불능은 초능력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기초 교육 과정에 포함되므로, 이연도 방금 일어난 이게 뭔지 이론적으로 알고는 있었다.
“반응을 보니 이런 적이 처음이군.”
실제로 한 번도 못 겪어 봐서 그렇지.
“말도 안 돼……. 내가 그 정도로 화가 났다고? 아니, 화가 나긴 했는데…….”
이연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이연 자신으로서도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분노에 사로잡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언가 끓어오르는 감각에 어쩔 줄을 몰랐다.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네 능력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라 그나마 다행이군.”
이연의 주의를 환기한 것은 산오의 심드렁한 말이었다. 이연이 산오를 바라보자, 산오가 어쩐지 뚱한 얼굴로 뒷말을 덧붙였다.
“부술 수 있는 능력은 귀찮아지거든.”
어디로 봐도 본인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는 대사였다. 이건 아마도 이연을 위한 산오 나름의 농담일 터였다. 이연은 그제야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얼굴을 허물고 흐리게나마 웃었다.
“설마 아버지 이름을 쓸 줄은 몰랐어.”
이연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하고 많은 이름 중에 제 죽은 형의 이름이라니,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가 없었다.
“작정을 한 모양이야.”
산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시선을 허공에 두고 무언가를 잠깐 생각하던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적공저지일 행사가 얼마 안 남았군. 거기 등장할 거다.”
“응? 그게 뭐야?”
이연이 의아하게 물었다. 익숙한 글자의 조합이었으나 완성된 단어는 생소했다.
“최희원이 대중 앞에 처음으로 등장해서 적공을 막았던 날을 기념해 열리는 파티다. 초호시 내의 상급 헌터와 이름 있는 변이종 전담 회사에는 모조리 초대장이 발송돼. 헌터들 사이에서는 제법 유명하다.”
“근데 왜 난 몰라?”
맹한 물음을 던지는 이연에게 산오가 진실로 후드려 팼다.
“상급 헌터가 아니거나 이름 있는 변이종 회사가 아니겠지.”
“…….”
괜히 물어봤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이연이 속으로 투덜거리는 동안 산오가 마저 설명했다.
“거기 모이는 건 죄다 한자리 차지한 놈들이야. 무궁화 5단, 4단에 A등급 정연을 도맡아 하는 기업 소속 헌터들이 참석하거든.”
“그렇다면…….”
“그래, 그놈은 거기서 데뷔라도 하고 싶은 것 같군.”
허영심도 이 정도면 병 아닌가? 이연이 입을 떡 벌렸다. 태진에게 과시하고 싶어 하는 성격이 있는 건 익히 짐작했지만, 이건 과시를 넘어 아예 도장을 찍을 작정인 것 같았다.
아니, 아니지. 너무 섣부른 짐작일 수도 있었다. 헌터 사교장이든 뭐든 간에 이태진이 거기 꼭 등장하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이연이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는데, 산오가 쐐기를 박았다.
“그 행사의 중심은 최희원이지. 그래서 주최 역시 관계자다.”
“관계자?”
무심코 되물은 이연은 곧 최희원의 관계자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깨달았다. 그런 이연의 생각을 알아챈 듯 산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진희수의 집안이지. 아마 그 집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행사 중 하나일 거다.”
진희수의 집안. 가문 내에서도 중요한 행사. 이연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면 주최 대표는 명확했다.
진정원이다.
“내가 이태진이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걸.”
산오가 삐딱하게 웃었다.
*
달칵. 문이 열렸다. 이연은 그 안으로 들어서는 대신 불량한 어조로 물었다.
“이태민 씨?”
휑한 사무실 안쪽에서 타자를 치고 있던 태진이 멈칫하는 모습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러나 이연은 속지 않았다. 그렇게 대대적인 뉴스가 났는데 이연이 접하지 못할 거라는 순진한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반대겠지.
“삼촌이 그 이름을 쓸 자격이 있어요?”
“내 나름대로의 의미 부여 방식이란다.”
태진은 태연하게 받아치며 다가왔다. 선선한 어조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아버지는 삼촌 때문에……!”
“내 형은.”
태진의 얼굴은 웃는 채로 굳은 가면 같았다. 강철처럼 단단한 겉가죽이 이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연구소를 빠져나갈 때까진 무사했어. 사실 아주 건강한 수준이었지.”
“…….”
“형의 사인은, 뭐, 내가 굳이 상기시켜 줄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
움찔한 이연이 침묵을 지키자, 태진이 부드럽게 웃었다. 올가미를 조이는 사냥꾼처럼 치밀한 미소였다.
“난 약속을 지켰어. 도망치지 않을 거다.”
“…….”
“넌 어떻게 할 거니?”
이연은 포획당한 물고기처럼 바짝 굳어 있었다. 얼어붙은 눈동자가 태진을 바라보다 간헐적으로 흔들렸다. 태진은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발걸음은 결국 사무실 안을 향했다. 탁. 사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작고 섬찟했다.
“착하구나.”
넋이 빠진 것처럼 힘이 없는 걸음걸이는 느리지만 멈추지 않았다. 방 중앙에 있는 의자에 앉기까지는 금방이었다. 태진은 익숙하게 전극을 붙이며 그런 이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연은 반응하지 않았다.
가명을 이태민이라고 쓴 건 마지막 낚싯대였다. 수많은 시험들을 통과한 조카에게 건넨 최후의 관문.
그리고 이연은 화를 낼지언정 이 자리에 왔다. 도망가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비로소 확신이 섰다.
태진이 이연에게서 등을 돌리고 컴퓨터를 조작했다. 추출을 위해 기계 설정을 조정하는 모습이 분주했다. 이연은 그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삼촌.”
이연을 다시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태진의 행동은 조심스럽긴 했으나 망설이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줄곧 계획해 왔던 일처럼.
“2단 헌터로 살고 있는 절 어떻게 찾아냈죠?”
“오늘따라 질문이 많구나.”
태진은 순순히 대답하는 대신 가볍게 웃었다.
“그렇지, 이렇게 할까? 내가 질문에 대답을 해 주면, 너도 대답을 하나 해 주는 거야.”
이연은 말없이 대답을 재촉했다. 묵언의 승낙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쉬웠다. 태진은 대수롭지 않게 입을 벌렸다.
“제산오의 행방이야 워낙 신출귀몰하니 찾을 수가 없다지만, 비서들까지 그렇진 않거든.”
태진은 기본적으로 늘 제산오의 동향을 유의하고 있었다. 어찌 됐든 태진은 산오를 죽이려고 했고, 산오에게 그리 좋게 받아들여지진 않을 터였으니까.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산오의 비서들에게 은밀하게 붙여 놓은 감시가 어느 날 그들이 미행하는 누군가에 대해 보고를 올린 것은 꽤 오래전 일이었다. 꼼꼼하게도 먼발치에서 찍은 사진까지 첨부해서.
네모난 프레임에 담긴 그 얼굴이 제법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태진은 희열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비서…….”
이연이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음성으로 신음했다. 태진이 말하는 때가 언제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산오의 비서들이 이연을 미행하며 은근한 시비를 걸고 다녔을 그때. 당시에는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비서들이었다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사실 그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이제 내가 질문해도 되지?”
이연의 팔에 붙인 전극이 제 위치에 다 있는지 연신 확인하던 태진이 물었다. 대화하느라 익숙한 준비 과정은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이연은 그제야 전극의 개수가 평소에 붙이던 것보다 조금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리를 편 태진은 기계에 손을 댔다.
“너, 진희수와 짜고 나한테 온 거지?”
태진이 웃었다. 마치 입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기다란 웃음이었다.
“정연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탁. 스위치가 켜졌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크고 요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