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달이 유독 밝은 밤이었다. 조도가 낮은 무드등은 침대 헤드 쪽만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환자복을 입은 남자는 희미한 불빛으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환자치고는 건강해 보였다. 뭐, 다음 날이면 퇴원할 테니 그리 어색한 모습도 아니긴 했다.
커다란 창문 안에서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을 바라보던 태진이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앞에는.
“팔자 좋아 보이는군.”
저승사자처럼 새까만 옷을 온몸에 두른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림자만큼 짙은 목소리가 음산하게 중얼거리자 태진이 몸을 퍼득 떨었다. 팔이 침대 헤드에 부딪히면서 덜컹, 하는 소리가 났다.
“네, 네가 여긴 왜.”
“생각해 보니까 짜증이 나더라고.”
그렇게 말하는 산오는 정말로 온몸에 신경질이 가득 배어 있었다. 진심이 물씬 느껴지는 발언에 태진이 본능적으로 벽을 더듬었다. 너스 콜 하면 사람이 오는 데 얼마나 걸리지? 아니, 그냥 소리를 질러서 밖에 있는 초수대원을 부르면. 짧고 빠르게 이어지는 생각은 곧 살벌한 선언에 끊겼다.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했다.”
그 말과 동시에, 매끈하고 광택이 나는 철 밧줄이 태진의 몸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포박된 태진이 눈을 부릅떴다. 다급하게 벌어진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누구, 누가……!”
밧줄에서 뻗어 나온 철판이 곧장 입을 틀어막았지만, 소란을 들은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곧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며 노크 소리가 이어졌다.
“이태진 씨, 문제 있습니까?”
태진은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으나, 푹신한 침대 위에서는 유의미한 소음을 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태진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한계까지 벌어졌다. 언제나 느긋하던 얼굴로 초조와 공포가 흘렀다.
“이태진 씨. 대답 없으면 강제로 들어갑니다.”
그사이 노크 소리는 조금 더 거세졌다. 직감적으로 이상함을 느꼈는지 경고하는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나 산오는 그것에 반응하는 대신 장승처럼 선 그대로 침대에 꽁꽁 묶인 태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곧 침대가 쑥 꺼지며 태진이 땅속으로 끌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진의 몸이 반쯤 묻혔을 때.
“이태진 씨!”
콰앙!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다급하게 뛰어들어 온 초수대원 둘이 재빨리 안의 상황을 확인했다. 검은 옷을 입은 괴한과 옴짝달싹할 수 없게 포박되어 모습이 거의 사라진 태진. 대원들은 즉시 산오를 향해 무기를 들이댔다.
“이태진을 풀어. 멈추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산오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심드렁한 시선이 대원들을 향하자 길고 예리한 가시들이 바리케이드를 치듯 바닥에서 솟아났다. 대원들이 흠칫한 틈을 타 태진이 완전히 사라지고, 이어 산오까지 바닥으로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텅 빈 침대와 울타리처럼 쳐진 가시들뿐이었다.
“헉!”
이연이 벼락 맞은 듯 떨며 눈을 부릅떴다. 번쩍 뜨인 시야가 뒤늦게 초점을 잡았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따뜻한 체온이었다. 이연은 본능적으로 팔에 힘을 주고 그것을 끌어안았다. 포옹이라기보다는 구속과 감시에 가까웠다. 천 한 겹 너머에 있는 부드러운 피부가 호흡에 따라 느릿하게 부풀었다가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왜.”
자다 깼는지 조금 갈라진 목소리가 정수리에 닿았다. 등을 감싸고 있던 두터운 팔이 품을 파고드는 이연의 몸짓에 따라 조여들었다. 거리가 좁아지며 산오의 가슴과 겨드랑이 사이에 코를 박게 된 이연이 웅얼거렸다.
“너…… 어디 나갔다 온 거 아니지?”
방금 꾼 꿈이 아직도 눈에 생생할 정도로 선명했다. 내용이 그럴듯해서 더 수상하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산오는 내내 이태진 납치를 제안하지 않았나. 만약 이게 예지몽이라거나……. 싱숭생숭한 마음에 손끝에 걸리는 산오의 옆구리를 더듬자 선명한 근육선이 느껴졌다. 몸이 왜 이렇게 좋아, 밥 먹고 운동만 했나…….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했던 끌어안고 자는 행위는 며칠 밤이 지나면서 퍽 익숙해졌다. 일단 산오가 밤마다 당연하다는 듯 이연을 끌어당겨 잠들었기 때문에 어색해질 틈이 없었다. 하다 보니 무언가를 안고 자는 자세도 제법 편안하게 느껴져서, 사람들이 왜 바디 필로우를 들이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뭐, 제산오는 바디 필로우치고는 딱딱한 편이지만…….
“누구 때문에 갇혔는데 가긴 어딜 가.”
산오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자세를 조금 바꾸었다. 커다란 손이 얇은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 쓰다듬었다. 아닌 척 제 쪽으로 머리를 꾹 누르는 손길에 이연은 은근슬쩍 몸에 힘을 뺐다. 뺨에 닿는 온기가 기분 좋았다.
“어쩔 수 없잖아. 그쪽에서 네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을 테니까.”
이연과 희수의 계획상 산오는 없는 게 더 도움이 됐다. 태진이 상대하기에 산오는 너무 버거운 존재였고, 이전 저택 지하에서 그는 그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산오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되면 냉큼 발을 뺄 게 뻔했다.
그래서 이연이 태진과 접촉하는 동안 산오는 이연과 싸우고 화가 나서 외국으로 나간 것처럼 꾸미기로 했다.
‘뭐, 이태진도 전부 믿지는 않는 것 같지만…….’
태진은 산오가 집을 나갔다는 말에 수긍하는 듯했으나, 아직 완전히 경계심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이연과 접선해 대화하는 내내 주변을 흘끗였다. 안 그런 척하려고 퍽 노력하기는 했지만 태진을 유심히 관찰하던 이연에게는 훤히 보였다.
대중들이야 산오의 모습을 모를 테지만 초능력관리청 고위층이나 도시의 명문가까지 그러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다. 특히 의심 많은 태진이라면 한동안 이연의 사무실과 집 근처를 주의 깊게 살펴볼 터였고, 그런 상황에서 산오가 평소처럼 밖을 나다니다가 재수 없게 눈에 띄면 일이 복잡해진다. 산오는 이연과 희수가 자신을 쏙 빼고 계획을 짜는 모습에 황당하다는 듯 타박했으나, 그들의 의견 자체에는 동의했다.
그런 이유로 산오는 당분간 칩거하기로 한 것이다.
이연은 산오가 집에만 있어 답답해하지 않을지 걱정했지만, 의외로 그 부분에서는 별말이 없었다. 대신 식사 당번이 누구든 간에 상관없이 제가 저녁을 꼬박꼬박 차리기 시작했다. 산오는 이연이 돌아와 씻고 옷을 갈아입는 시간까지 정확하게 계산해 상을 차렸다. 묻지도 않고 늘 2인분을 만드는 덕에 이연은 요즘 퇴근 시간만 되면 칼같이 집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게 좀 신혼부부 같기도 해서, 이연은 좋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으나…… 역시 집에만 줄곧 있다 보면 산오도 답답하긴 할 것이다. 이연이 조금 시무룩하게 물었다.
“아마 초호시가 아니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정말 외부 출장이라도 다녀올래? 아니면 휴가라든가…….”
산오가 며칠 동안 떠나 있는 건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가둬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동안만 참으면 되니까 그 정도는…….
어영부영 합리화를 하려고 하는 조그만 머리통에 물끄러미 시선이 닿았다. 눈길이 어째 싸늘했다.
“아주 틈만 나면 사람을 내치려고 하는군.”
“뭐?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왜 나갈 거라고 생각하지?”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어조였다. 분명히 산오를 생각해서 한 이야기인데 그렇게 들으니 뭔가 잘못 말한 것 같기도 해서, 이연은 주춤했다. 그사이 미간을 구긴 산오가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을 헤집던 손길은 어느새 뒷머리까지 옮겨 가 이연의 고개를 끌어당겼다. 맹한 얼굴에 조금 벌어져 있는 입술이 단숨에 물어 삼켜졌다.
얇은 피부가 마찰되는 소리는 단숨에 습하게 젖었다. 이연은 고개를 젖힌 채로 입 안을 휘젓는 산오의 혀를 받아들였다. 느릿하게 구석구석을 문지르는 살덩이의 움직임에 손끝이 움찔움찔 떨렸다. 달뜬 숨소리가 흐릿하게 새어 나오지도 못하고 다시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집요한 키스였다.
안 그래도 딱 붙어 있는 상태였다. 키스를 하면서 서로에게 매달리듯 붙은 두 사람의 몸이 거의 포개졌다. 산오가 조금 더 끌어당기자 이연이 상체를 일으켜 산오의 몸 위로 올라왔다. 커다란 손이 반팔 티셔츠를 들췄다. 따뜻한 손가락이 허리를 쓸자 이연이 몸을 슬쩍 비틀었다. 산오의 뺨을 붙들고 있던 이연의 손 역시 아래로 은근하게 내려갔다.
크릉…….
발밑에서 으르렁대는 소리만 나지 않았으면 두 사람의 옷가지는 진작 널브러졌을 것이다.
“어, 뭉치야.”
눈을 동그랗게 뜬 이연이 붙이고 있던 입술을 떼며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서 뭉치가 두 발만 침대에 올리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왔어?”
끼잉, 낑. 이연의 시선이 닿자 뭉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순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이연을 응시했다. 산오의 시선이 절로 뾰족해졌다.
“개새끼가 자꾸 방해를 하는군.”
“야, 뭉치 그런 말 알아들어. 뭉치 듣지 마. 뭉치 최고야.”
막말에 풀 죽어 귀를 축 늘어트리는 뭉치를 이연이 급하게 달랬다. 산오에게 향해 있던 몸을 완전히 틀어 머리를 쓰다듬다가 급기야는 침대 위로 올려 주는 꼴을 빤히 바라보던 산오의 미간이 짜증스레 일그러졌다. 제 몸에 딱 붙어 있던 체온이 사부작대며 떨어지는 게 불쾌했다.
최근, 정확히는 산오와 이연이 사귀기로 한 날부터, 뭉치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끈적해진다 싶으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끼어들었다. 살벌한 시선이 이연의 발치에 눕는 시커먼 변이종을 뚫을 듯이 노려보았다. 뭉치가 배를 깔고 누운 위치는 교활하게도 산오와 떨어진 쪽이었기 때문에 발길질도 닿지 않았다.
산오에게는 불행하게도 이연은 반려변이종이 울부짖든 말든 스킨십을 지속하는 타입이 아니었으므로, 번번이 이런 식이었다. 두 사람의 진도는 키스 이상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기분 좋은 행위를 타의에 의해 강제로 멈춰야 한다는 건 꽤 신경질이 이는 사안이었으나.
“제산오, 화났어?”
뭉치를 옆에 재우고 다시 빼꼼 고개를 내민 이연이 산오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산오는 병 주고 약 주는 꼬라지를 잠깐 바라보다가, 짜증스러운 한숨과 함께 팔을 내주었다.
“휴가를 가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저 녀석이야.”
“뭉치가 휴가를 어떻게 가.”
이연이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나, 산오는 웃지 않았다.
“내가 청호 처치 임무를 받아 오기 전에 방법을 강구하는 게 좋을 거다.”
“…….”
증오가 가득 담긴 말투에 이연이 입을 다물었다. 어이없기도 했지만 좀 귀엽기도 했다.
이연이라고 산오와 물고 빠는 중에 계속 방해받는 게 좋을 리가 있겠는가. 뭉치를 좋아하는 마음과 별개로 원망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저만 아쉬운 줄 아는 바보 같은 남자 친구에게 제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행동으로 표현을…….
‘어.’
이연의 눈이 한번 깜빡였다. 묘한 기색을 귀신같이 눈치챈 산오가 흘끗 내려다보았다.
“왜.”
“제산오.”
이연이 산오를 올려다보았다. 베개를 베고 있는 매끈한 얼굴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진 채로도 완벽했다.
“조만간 우리 잠깐 밖에서 만날까?”
짙은 눈썹이 의아하게 들렸다. 이연이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