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17)화 (217/250)

#217

“이제 내 말 이해하겠어?”

은주가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것 같은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나 염려 같은 감정은 없었다. 수더분한 인상에 깃들어 있는 것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간결한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연은 적나라한 진실과 두루뭉술한 거짓의 무게를 가만히 재었다. 저울의 균형은 한참을 팽팽하다가 아주 조금, 진실 쪽으로 기울었다.

“삼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에요.”

은주는 그 말에 눈만 깜빡였다. 이연이 힘주어 마저 대꾸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거지.”

침묵이 흘렀다. 은주의 눈동자는 깊고 잔잔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정제되지 못한 편린이 홍채 사이로 슬쩍슬쩍 스쳐 지나갔다. 그조차도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은주의 입이 열렸다.

“뭐, 좋아. 네 생각이 그렇다면 말 한마디 전해 주는 것 정도야 어려울 건 없지. 안 그래도 이태진이 심심한지 자꾸 날 떠보려고 해서 귀찮던 참이거든.”

“……저에 대해서 삼촌한테 이야기한 적 있어요?”

은주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원래 우리 나이쯤 되면 추억팔이가 다야. 네가 드디어 내 정체를 알았다는 말 하니까 아주 좋아 죽던데.”

“…….”

하여튼 성격 하고는……. 그래도 태진이 그 사실까지 이미 알고 있다면 이연의 요청이 한층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속으로 투덜거린 이연이 은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일방적인 부탁이었는데 승낙해서 다행이었다. 그녀가 더 이상 태진과 엮이기 싫다며 거절했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했을 터였다.

“감사합니다.”

동시에 은주에 대한 경계가 바짝 섰다. 그녀는 태진과 시시콜콜한 잡담까지 나눌 정도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하려는 일을 대놓고 도울 정도는 아니지만, 방관할 정도는 된다는 뜻이었다. 모든 사정을 한 번에 털어놓지 않길 잘했다.

“뭐, 힘내 봐.”

은주는 관심 없다는 듯 손만 휘휘 저었다.

“만약 네가 죽게 되면 청호는 내가 맡아 줄게.”

그렇게 헤어지고 연락이 온 건 불과 다음 날이었다. 태진의 답이 빠를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은주 역시 제법 잽싸게 움직였던 모양이다.

‘내일 밤 11시.’

그 말과 함께 은주가 일러 준 병원 호수는 혜강이 알아낸 것과 같았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병원에 도착하자 무슨 수를 쓴 건지 태진을 24시간 감시하고 있다던 초수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병원에 상주하고 있을 의료진의 기척조차 전혀 없는 텅 빈 복도를 걸어온 이연이 문 앞에 서서 902호의 문패에 인쇄된 익숙한 이름을 확인했다. 이태진. 짧은 심호흡이 가슴을 작게 부풀렸다.

달칵. 단정해 보이지만 호화로운 티가 나는 문이 열렸다.

태진은 침대에 기대 앉은 자세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특히 맑은 하늘에서 달이 훤하게 빛나고 있었다. 문소리에 고개를 돌린 남자는 이연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오랜만이구나.”

이연은 일부러 선뜻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수 싸움이었다. 상대의 생각을 읽어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자신에 대해 이미 파악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어야 했다.

다행히도 심리전은 이연의 주 종목 중 하나다.

이연은 일부러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겁먹어도 무모하게 돌진하던 어린 시절의 모습과 겹치도록. 그러나 딱 나이만큼 망설임이 더해진 것처럼.

이연이 쉽사리 병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자, 태진은 재촉하는 대신 느긋하게 기대어 입을 열었다. 나비를 꼬여 내는 꿀처럼 달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3호는 같이 안 온 모양이구나.”

“……제산오는 반대했거든요.”

“저런. 싸웠니?”

다정한 물음에 이연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조금요.”

실제로 산오가 잠깐 가출했던 건 며칠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 감정 이입하기 위해 슬픈 상상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연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지껄였다.

“엄청 바쁜 애잖아요. 별로 신경 안 쓸 거예요.”

태진은 그런 이연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사람 기분 기묘해지게 만드는 반응이었다.

“3호는 어릴 적부터 기본적인 감정이 다소 결여되어 있었지. 그 애는 아마 널 이해하지 못할 거야. 너와는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

“삼촌은 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누가 누굴 욕해? 발끈한 이연이 뾰족하게 대답했다. 태진은 가렵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상황에 뭐가 중요한지는 3호보다 네가 더 잘 아는 것 같구나.”

“…….”

이연은 아직까지도 문간에 서서 병실로 들어오지 않은 채였으나, 굳이 잡으러 나갈 필요도 없었다. 태진은 오히려 침대 헤드에 등을 깊숙이 묻었다. 네 마음대로 하라는 것처럼.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 네가 나쁜 일 하려는 것도 아니잖니.”

제 발로 걸어 들어올 것이다.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이연의 본질은 너무나 쉬웠다.

뭐, 머리를 좀 굴리려고 애를 쓴 것 같긴 하지만 어림없지.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이다. 태진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넌 그냥 그때처럼 사람들을 돕는 것뿐이야.”

“전 그때 사람을 돕지 않았어요.”

이연이 조용히 내뱉은 목소리는 섬뜩할 정도로 고요함을 품고 있었다.

“죽일 뻔했지.”

“3호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니?”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굳어버린 입술을 간신히 연 이연이 경고했다.

“허튼짓할 생각 말아요.”

“진실을 알려 주지 않아도 괜찮겠어?”

태진이 자신만만할 만했다. 그는 정말로 이정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떤 것에 약해지는지, 무엇에 겁을 먹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연은 기꺼이 어울려 주기로 했다.

“이런 이야기나 할 거라면 갈게요.”

실수로 약점을 노출한 사람처럼 딱딱해진 얼굴이 막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태진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렇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태진은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 그대로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반듯한 자세로 앉은 남자가 노련하게 말했다.

“넌 이 도시에 아주 커다란 기여를 하러 왔지.”

제 말이 정말로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라고 여기는 얼굴이 이연을 똑바로 향했다.

“한 번 더 말이야.”

이연은 그를 물끄러미 마주 쳐다보았다. 절대로 달라지지 않는 사람을 보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이연이 한 발자국,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태진의 웃음이 아주 조금 진해졌다.

그는 이연 역시 변하지 않는다고 여길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타인을 판단할 수밖에 없으므로. 태진이 아는 것은 열넷의 정연이었다. 영원히.

“제가 뭘 하면 되죠?”

그것이 이태진의 가장 커다란 패착이 될 터였다.

“간단해. 한 번 해 봤잖니.”

태진의 답변은 익히 예상하고 있던 종류였다.

“그걸 정기적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돼.”

“……정기적으로요?”

침대로 다가온 이연이 의도적으로 말에 여백을 두었다. 순진한 어조에 태진이 매끄럽게 웃었다.

“전에 말하지 않았나? 내 귀여운 조카를 죽일 생각은 없다니까.”

앞으로 백 년을 더 살아도 이보다 믿을 수 없는 말은 듣지 못할 것이다. 귀여운 조카는 무슨……. 이연은 속으로 진저리를 치면서도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대신 신중한 얼굴로 태진을 물끄러미 노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어요.”

태진이 대답 없이 눈짓하자, 이연은 말을 이었다.

“다시는 도망가지 마세요.”

“…….”

“삼촌은 이미 한 번 도망쳤어요. 더 이상 그러지 마세요. 그냥 지형 설정 기능 개발자로 사세요.”

“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 있는 거니?”

태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지형 설정 기능 개발자는 자신의 초능력으로 지형 설정 기능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진이 개발자로 살기 위해서는 실체화 능력을 가진 척 행세해야 했다.

그렇게 행세해도 좋다는 말이었다.

“네.”

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형 설정 기능을 만들고 사라졌던 그때처럼, 태진은 이 상황을 벗어나면 언제든 잠적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한 발짝 물러서 관망할 수 있었다.

그래선 안 됐다.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베일을 걷어 내고 낙인을 찍어야 했다. 어디로든 도망갈 수 없도록.

태진은 단호한 이연의 얼굴을 홀린 듯 빤히 쳐다보았다. 너무 달콤한 제의였다. 오히려 수상해 보일 정도로. 그는 일단 신중해지기로 했다.

“고민할 시간을 좀 줬으면 좋겠구나.”

혹시라도 이연이 냉큼 취소해 버릴까 봐, 서둘러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마.”

그로부터 이틀 후, 태진의 병실에 희수가 정식으로 방문했다.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병실에서 나왔다.

거기서 또 사흘 후.

이태진의 퇴원일이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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