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16)화 (216/250)

#216

혜강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멍하니 벌어지는 입술 새로는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연은 침묵을 틈타 말을 이었다.

“너랑 일하는 거 재미있다고 했잖아.”

“…….”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어졌어. 그럼 네 말대로 죽으면 안 되니까.”

혜강은 놀란 얼굴 그대로 여전히 침묵만 지켰다. 반응을 봐서는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나 혜강은 늘 이연의 이야기를 들어 준다. 그래서 이연은 마지막까지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거 제대로 마무리하고, 너랑 계속 헌터 할 거야. 그러니까 잘 부탁해.”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 후에 흘러나온 목소리는 컴퓨터 책상 쪽이 아니라 소파 쪽이었다.

“이혜강이랑 이전에 사귀었나?”

뾰족한 목소리를 들으니 그새 또 오해한 모양이다. 제산오는 안 그렇게 생겼으면서 이런 어휘에 예민하게 굴었다. 이연이 당황하며 해명했다.

“아니, 만났다는 게 사귄 게 아니고. 맥락상 그냥 알게 되었다는…….”

“오해할 소지가 있는 발언은 최대한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산오가 서늘한 눈으로 경고했다.

“나도 별로 보여 주고 싶은 광경은 아니라서.”

“……절대 안 하도록 해 볼게.”

뭐가 저렇게 무서운지 모르겠다. 이연이 웅얼대며 굳게 약속하자 산오는 그제야 차가운 기색을 거두었다. 아직 권 박사님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피곤하지? 이연이 터덜대며 정말로 사무실을 나서기 위해 발걸음을 막 옮길 때였다.

“다녀와.”

담담한 목소리가 등 뒤로 닿았다. 언제나 이연의 등 뒤에서 그를 도와주는 익숙하기 짝이 없는 미성.

이연은 등을 보인 상태로 슬쩍 웃었다.

“갔다 올게.”

*

“이태진을 만나게 해 달라고?”

포크로 볼을 뒤적거리던 은주가 물었다. 놀랐는지 손은 우뚝 멈췄고 눈은 땡그랗게 벌어져 있었다. 맞은편에서 이연이 양상추와 연어를 한꺼번에 찍어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은주가 요즘 꽂혔다는 샐러드 집에 들어와 있었다. 밝고 키치한 체크 인테리어를 한 가게는 평일 낮인데도 젊은 사람들로 가득해 활기찬 분위기가 풍겼다.

“왜? 그런 놈은 되도록이면 대면하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아.”

은주가 진지하게 충고했다. 그 말은 이연도 동의하는 바였지만, 정신 건강에 도움 되려고 그를 만나려는 건 아니었으므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권 박사님, 혹시 지형 설정 기능 고장 난 거 아세요?”

“아.”

질문 하나로 은주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한 듯했다. 소식을 알 만한 도시의 고위 공무원과 연줄이 있거나, 혹은 태진에게 이미 언질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익히 예상했던 대로.

“비상 상황이잖아요. 어쩔 수 없어요.”

이연이 쓰게 웃었다.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지고, 헤매고, 절망하다가 결국 제풀에 지쳐 알면서도 함정에 걸어 들어가는 사람처럼.

은주에게 모든 걸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태진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공언했지만,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태진과 은주, 두 사람은 긴 세월 동안 알아 온 사이였고 이연은 그들 사이에 어떤 유대가 있는지 몰랐으므로. 신중해서 나쁠 건 없다.

이연의 말에 은주는 눈썹 끄트머리를 살짝 구겼다.

“가면 어떤 일을 당할지 알면서도?”

“한 번 해 본 거잖아요. 박사님도 아시다시피.”

“이번엔 죽을 수도 있는데?”

이연이 입을 다물자, 은주가 재차 물었다.

“걔는 네 능력을 원해. 기력뿐만이 아니라 네 능력 자체를. 기회가 된다면 널 없애고 그 자리에 서고 싶어 하겠지.”

태진은 십 년 동안 이연의 능력을 아주 다양하게 사용해 본 사람이었다. 능력의 활용도에 대해 알면 알수록 갈망은 커져 갔다. 세미가 초능력 팔찌를 만들어 냄으로써 실현 가능성이 생기자 욕망은 정점에 이르렀다.

“그런 놈을 위해서 죽어도 괜찮아?”

이건 태진에게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이연이 자진해서 그에게 접촉해 제 기력을 써 달라고 부탁하면, 태진은 그걸 빌미로 마음껏 이연의 기력을 뽑아낼 수 있었다. 타인의 기력을 착취해 만든 지형 설정 기능 시스템의 복구는 비밀스럽게 진행될 터였다.

어떤 사고가 나도 알 수 없도록.

“삼촌이 그걸 원할까요?”

이연이 의아하게 물었다. 사실 태진은 초능력자 행세를 하려면 이전부터 할 수 있었다. 지형 설정 기능에 사용된 실체화 능력의 주인은 그 개발자라는 것이 정설이었으니까. 태진은 돌연 잠적해 신비주의가 되는 대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한마디만 하면 됐다.

그건 내 능력이 맞다고.

“얘는. 아직도 순진한 생각을 하는구나?”

은주가 타박하듯 말했다. 놀리는 듯한 내용이었지만 워낙 살가운 어투라 기분 나쁘다기보다는 그냥 말의 의미가 궁금했다. 다행히 은주는 뜸 들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걔가 침묵을 선택한 건 네가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없어서야.”

태진은 정황상 실체화 능력이 제 것인 것처럼 행동했지만, 공언하지는 않았다. 뒤집어 말하면 언제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둔 것이다. 누가 따지고 들면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고 이야기하면 끝이었다.

기세 좋게 거짓말을 하는 건 쉬웠지만, 신중한 동시에 자존심이 센 태진의 성격은 그것을 쉽게 용납하지 않았다. 일단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언제든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증거가 이 나라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태진이라고 왜 정연을 찾지 않았겠는가. 그는 예전 연구소를 폐쇄하고 떠난 후 실체화 능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면서부터, 그 능력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초능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연의 기력을 죽기 직전까지 뽑고 내팽개쳤다는 사실은 태진이 두고두고 후회한 극히 드문 일 중 하나였다.

아예 죽을 만큼 뽑거나, 내팽개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나 뒤늦게 찾은 이정연의 행방은 말 그대로 묘연했다. 연구소 폐쇄 직후 기력 기진으로 인한 병원 입원 기록과 퇴원 기록은 있는데 그 후의 기록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증발해 버렸으나 태진은 직감했다. 정연은 죽은 게 아니다. 어딘가에 반드시 살아 있었다.

정연이 이 사회 안에서 살고 있는 한, 태진은 늘 제 정체가 까발려질 수 있다는 불안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가 편법으로 초능력을 등록한다고 해도 지형 설정 기능에 쓰인 기력과 이연의 기력을 대조하면 능력의 주인은 금방 판별할 수 있었으니까.

실제로 태진은 지형 설정 기능 개발자로 있던 시절 내내 예민한 성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들킬 바에야 아예 하지 않은 거지. 이태진은 망신당하는 거 정말 싫어하거든.”

또한 그 시절의 태진은 초능력 심사를 받아 보라는 은근한 권유를 계속해서 받았다. 그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초능력 심사는 의무가 아니었고, 태진은 헌터가 될 생각이 없다는 말로 그 제안을 회피했다.

그러나 그런 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계속된 거절은 의심을 낳고, 불어나는 의심은 태진의 자리를 좁혀 올 터였다.

그래서 태진은 차라리 신비주의 개발자라는 허상 뒤에 숨기로 한 것이다.

“당당하게 거짓말할 배짱이 없어서 그냥 잠수탄 거라고요?”

이연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살다 살다 이런 사람 처음 봤다. 은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꽤 효과 있었어. 최소한 걔가 의도한 대로는 됐을걸.”

사라진 사람은 말이 없다. 그래서 남은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생각했다. 그렇게 지형 설정 기능 개발자의 입지는 공고해졌고, 아무도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태진이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그렇게 행적을 감춰 버린 덕에 몇 년 후 예정되었던 랭킹 1위의 습격 역시 모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뭐, 완전히 잠수탔다고 하기에도 좀 그렇지. 여길 떠나지는 않았으니까.”

은주가 징하다며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태진은 대외적으로 사라졌지만 초호시를 떠나지는 않았다. 그는 신분만 바꿔 도시의 음지를 돌았다. 사실 이쪽이 그의 적성에 더 맞는 곳이기도 했다. 태진에게 법이란 성가신 방해물에 불과했다. 법망은 예전에 비해 훨씬 촘촘해졌으나 그것을 피해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자가 존재하는 이상 그림자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태진이 몸을 숨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욕망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모르포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오히려 그는 이전보다 훨씬 더 초능력이라는 것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저 기회를 보고 있던 것뿐이었다. 그를 나비로 만들어 줄 완벽한 타이밍을.

“그러다가 드디어 널 찾은 거야.”

이정연이 정이연이라는 이름으로 이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 그것도 능력을 축소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순간, 태진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가정과 계획이 떠올랐다.

만일 이정연이 아예 제 능력을 드러낼 생각이 없다면?

평생 숨어 살 생각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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