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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15)화 (215/250)

#215

“계획이 뭔데?”

털썩, 하고 의자에 앉은 혜강이 질문을 던지며 컴퓨터를 조작했다. 어지럽게 켜져 있던 오만가지 창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금세 텅 빈 바탕화면이 나왔다.

“먼저 이태진에게 접촉해서, 이 상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의사를 흘려야 해.”

이연은 태진을 속일 생각이었다.

태진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고 촘촘한 그물을 쳐야 했다. 그가 알고 있는 이연이라면 할 법한 행동으로 안심시키고, 이연이 또다시 기력을 바칠 거라고 믿게 해야 했다.

“초관청에 기력 제공하지 말랬더니 이태진한테 제공하는군. 퍽이나 큰 차이가 있어.”

산오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이연의 계획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마뜩잖은 얼굴을 했었다.

“아니, 이건 진짜 제공하는 게 아니고 그냥 미끼니까…….”

이연의 변명에도 산오의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왜 그렇게 복잡하게 굴지? 그냥 납치하자니까.”

“야! 큰일 날 소리 하지 마.”

이연이 펄쩍 뛰었다. 산오는 줄곧 태진을 납치해서 족쳐 버리자는 안을 꾸준히 주장 중이었다. 심지어 눈빛만 보면 족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일 것 같았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진짜로 사람을 냅다 납치해 버리면 뒷수습이 곤란해진다. 이대로 놔뒀다간 이연이 행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산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이태진의 병실로 먼저 찾아갈 판이라, 이연이 다급하게 혜강을 바라보았다. 간절한 눈빛을 받은 혜강은 손을 몇 번 움직이더니 이내 화면에 창 몇 가지를 불러왔다. 이연의 부탁을 받고 정리해 둔 자료의 일부였다.

“이태진은 지금 초호대병원 특별실에 입원 중이야. 대외적으로는 골절 환자고.”

딸깍. 혜강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창 여러 개가 뜨다가 다시 가라앉고 모니터 전체에 하나의 창이 띄워졌다. 초호대병원 특실층의 구조도였다.

“이태진 입원실은 여기, 902호.”

혜강의 손가락이 모니터 구석을 두드렸다. 한눈에 봐도 꽤 큰 규모의 병실이었다.

“워낙 악질적인 중범죄자라서 초수대가 문밖에서 24시간 감시를 서고 있어. 손님이라면 모두 신원 확인이랑 조사를 거치고 들어가는 것 같아. 이태진 본인의 손님이든, 초관청 사람이든.”

“혼자 걸어서 들어가는 건 어림 없겠네.”

모니터를 심각하게 들여다보던 이연이 중얼거렸다. 그는 변이종을 잡는 헌터였지, 첩보원이 아니었다. 훈련된 무장 공무원들을 속일 자신까지는 없었다.

산오와 동행하면 쉽기야 하겠지만, 그는 현재 태진 앞에서 내보일 수 없는 카드였다. 으음. 이연이 침음을 흘리며 팔짱을 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희수와도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희수는 대외적으로 이연의 능력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도와줄 명분조차 없었다. 오히려 이미 태진과의 거래를 거부한 희수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것도 모자라 이연을 몰래 들여보내는 행동 자체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터였다.

어떻게든 이쪽에서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는 건데……. 각자 생각하느라 침묵이 흘렀다.

“권은주 박사한테 부탁하는 건 어때?”

“응?”

고민에 빠진 이연을 건져낸 건 혜강의 제안이었다. 의외의 인물에 이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뭘 그렇게 놀라? 재경이 형네 연구소 소장님 말이야. 형이 어제 이태진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고 했을 때, 이태진 최근 면회인 목록에 있길래 따로 찾아봤거든. 뭐, 자세히 파고들 시간은 없어서 대충 보긴 했는데…… 이태진하고 예전에 알았던 모양인데? 과거 기록이 싹 날아가고 두루뭉술하게 대체된 시점이 이태진의 타임라인하고 비슷해.”

이연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젯밤 재경과의 대화로 대충 짐작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혜강에게 태진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것이 고작 24시간 전. 그중 밤부터 새벽까지는 술을 먹으며 보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가히 놀라울 정도의 정보 탐색 능력이었다.

“권은주 박사는 이태진이 감시당하는 와중에 부른 유일한 사적 손님이야. 그렇다면 이태진 쪽에서 어느 정도 호감을 보이고 있는 거라고 봐야겠지. 게다가 이미 방문한 적이 있으니 한 번 더 방문한다고 한들 초수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고.”

이연의 사고회로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럴듯한 생각이다. 눈썹을 좁힌 이연이 빠르게 중얼거렸다.

“이태진은 뭉치의 일을 이미 알고 있었어. 그렇다면 권 박사님이 말해 줬던 진실과 지금 상황까지 엮어서, 내 멘탈이 완전히 바스라져서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고 싶어 하는 상태라고 착각하게 한다면…….”

혜강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받았다.

“권은주 박사는 이태진을 그리 좋아하는 것도 아닌 듯하고, 오히려 형한테 호의를 보이니까 잘 설득하면 말 전달 정도는 해 줄 것 같은데. ”

“괜찮을 것 같은데?”

“그렇지?”

두 사람의 눈이 반짝였다. 장난감을 찾은 어린아이들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내가 권 박사님 안다는 얘기를 했던가?”

너무 물흐르듯 대화가 이어져서 위화감은 몇 박자 늦게 살아났다. 혜강이한테 권 박사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아직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혜강의 말투는 어영부영 떠보는 어조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이미 아는 사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연의 물음에 혜강이 모니터에 두고 있던 시선을 떼어 이연을 바라보았다. 악동 같은 웃음이 입가에 걸쳐져 있었다.

“형. 내가 초관청이랑 사설 연구소 CCTV 해킹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형이 로비에서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서 난리 난 영상 클립 따 줘?”

“……너 사실 내 과거도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모른 척해 주고 있던 건 아니지?”

“아쉽게도 그땐 디지털 기록이 지금만큼 활성화되지는 않았어서.”

그렇게 대꾸한 혜강의 얼굴엔 정말로 아쉽다는 기색이 만연해서, 이연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무섭다, 이혜강…….

내친김에 은주에게 연락하자 마침 한가하니 점심이나 함께 먹자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연이 벌떡 일어섰다.

“그럼 권 박사님한테 다녀올게. 둘이 점심 먹고 있어. 제산오 얼굴 보이면 안 되니까 어디 나가지는 말고 그냥 배달 시켜.”

“나도 간다.”

산오가 냉큼 뒤를 따라붙으려는 것을 이연이 기겁을 하고 말렸다.

“야, 넌 외국 출장 중이라니까. 권 박사님하고 만나면 안 되지.”

걱렬한 거부에 산오의 얼굴이 대번 서늘해졌다.

“그 여자에게는 빚이 있다.”

“뭐야, 둘이 만난 적 있어?”

가만 보니 이 인간들 자기만 쏙 빼놓고 죄다 소식통이었다. 권 박사님을 제산오가 만날 일이 뭐가 있지? 변이종 전문이니 임무 할 때 조언이라도 받았나? 이연이 의아하게 묻자 매끈한 얼굴에 묘한 한기가 서렸다.

“권 박사님이 말해 줬다는 뭉치에 대한 진실이 아마 내가 진 빚이겠지.”

“…….”

일부러 이연이 썼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는 부분에서 상당한 심술이 느껴졌다.

“감사 인사 정도는 해야 도리인 것 같군.”

산오는 누가 봐도 죽여 버리겠다는 얼굴을 한 주제에 태연하게 정중한 표현을 썼다. 이연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후로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게 산오의 해고에 대한 시발점이었다. 혜강과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깜빡했다. 이연은 순간적으로 대형 포털 사이트 메인에 <제산오, 묻지 마 연구소 습격… 소장 사망> 따위의 헤드라인이 걸리는 상상까지 하고 정신을 차렸다.

“무, 무슨 빚이야. 그분 좋은 분이야. 나, 나쁜 건 나야. 내가 미친놈이었지!”

산오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그따위로 말 돌릴 생각은…….”

“괜히 내가 트라우마 같은 걸로 널 쫓아내기나 하고! 난 쓰레기야! 구제불능! 멍청이! 재활용도 안 돼!”

연이은 자학 행렬에 산오가 경고했다.

“진짜로 쓰레기장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그만해라.”

“네.”

이연은 즉시 제 머리를 쥐어뜯던 행동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 했다.

아무튼 계획을 위해 혼자 가겠다는 이연의 주장에 산오는 다소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무리하게 제 의견을 관철할 생각은 없는지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연이 가방을 챙겨 들었다.

문 쪽으로 다가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이연이 문을 열다 말고 문득 멈칫, 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혜강이 있는 쪽이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인복이 좀 있지.”

“응?”

뜬금없는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혜강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연이 빙긋 웃었다.

“제산오랑,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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