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저는 가문의 행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희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자부심은 썩은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덮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희수에게는 도시를 수호하고 발전하는 데에 모든 걸 바친 사람의 피가 흘렀고, 그것을 보며 자랐다. 그 역시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런 가문의 일원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모든 게 희수의 생각보다 훨씬 더 뿌리 깊었다. 자랑스러운 가문은 현재 도시를 지키고 있지 않았다. 망가트리고 있었다.
두 손 놓고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D.S 씨가 왜 국장님을 그렇게 믿었는지 알겠네요.”
아무리 친하게 지냈던 사촌 동생이라고는 해도 희수는 보수적이고 편협한 분위기인 본가에 들어가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집안에서 어떤 역할일지, 뒤에서는 무슨 소릴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D.S가 미래의 보호자를 맡긴 이유가 있었다. 이래서였구나. 이연이 맹하게 중얼거리자, 희수가 머쓱하게 물었다.
“누나가 절 믿어 주고 있습니까?”
“미래 보호자를 맡겼잖아요. 그 정도면 엄청나게 믿은 거죠.”
“그건 아마…… 차악을 고른 걸 겁니다.”
본가에 미래를 데려온 D.S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가주인 제 어머니 역시 아이에게 살갑게 굴지는 않는 사람들이었다. 소거법으로 고르면 남는 것은 희수뿐이다. 그마저도 너무 바빠 제대로 챙겨 주지 못했지만……. 그건 아직도 희수의 마음 안에서 묵직한 부채감으로 남아 있었다. 만약 그가 조금 더 신경을 썼다면, 미래가 그런 일을…….
“아뇨, D.S 씨는 최선을 고른 거예요.”
씁쓸한 상념을 뚫고 불쑥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D.S 씨는 미래에게 절대로 차악을 주지 않아요.”
그녀는 희수가 서툴러도 미래에게 최선을 다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지켜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미래가 사라지면 일을 미루고 놀이공원까지 찾으러 오고, 같이 외식하고, 옷을 골라 주고, 소소한 취미를 진지하게 봐 줄 사람이라는 것을.
“그건 진 국장님이 좋은 사람이라는 이유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정도는 아닙니다.”
희수가 주저하며 대답했다. 이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지금도 신념 지키겠다고 제일 든든하던 뒷배를 앞장서서 물리치려고 하잖아요. 그건 진짜 쉽지 않은 일인데요.”
“그건, 제 직업이 그거니까요.”
그는 공무원인 동시에 시민을 지킬 의무를 가지는 초능력자였다. 당연한 거였다.
“백수였으면 그냥 무시하고요?”
“백수면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습니까.”
“지금도 할 수 있는 건 없다면서요.”
“…….”
놀리듯 말하는 이연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웃음이 담겨 있었다. 희수는 저도 모르게 그런 이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화제를 돌려 버렸다.
“……아무튼, 그래서 초능력 팔찌에 대한 조사는 진전도 없는 채로 다른 부서로 넘겨졌고, 대신 다른 일이 넘어왔습니다.”
“다른 일이라면…….”
이연이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이연 씨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맞습니다.”
그랬다. 바로 지형 설정 기능 복구였다.
지형 설정 기능 고장은 현재 초능력관리청의 가장 커다란 골칫거리이자 난제였다. 당연했다. 그걸 원래대로 복구할 방법이라곤 개발자를 찾아오는 것뿐이었으니까.
명백한 떠넘기기에 희수는 소속인 변이종대응국 차원으로 항의를 보냈으나, 돌아온 것은 전투 구역이 변이종 전투를 위해 필요한 곳이니 해당 국과 무관하지 않다는 답변뿐이었다.
“아마 초관청 고위층과 저희 가문이 힘을 합쳐서 제 기를 죽여 놓으려던 모양입니다.”
적어도 희수의 가문은 태진이 지형 설정 기능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절대로 희수가 혼자 처리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도.
지형 설정 기능의 핵심 기술은 태진이 가지고 있었고, 기능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태진과 협상해야 했다. 희수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동시에 공범자로 만드는 교묘한 수였다.
희수는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어떻게든 계속 버티고 있었지만, 현 상태가 지속됐다면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장 초전력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고, 여러 이권이 얽혀 있는 만큼 희수 혼자서 개최를 취소할 수도 없었으니까. 일정을 조금 미루는 게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초능력관리청장은 해당 건을 승인하면서 이 이상은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알면서 당해 주는 것 역시 꽤나 분한 일이었다.
그래서 희수는 산오를 불렀다. 태진을 잡은 당사자이자 진씨 가문조차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독립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
“비록 한 번 까이긴 했습니다만.”
뒤끝이 진하게 묻어 있는 말에 산오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어차피 정이연은 내 옆에 있고, 이태진은 정이연 없이 절대로 그거 복구 못 해. 의미 없는 판에 낄 이유는 없다.”
“그럼 그렇다고 이야길 했어야지.”
희수가 질책하듯 엄중한 눈길을 주었으나 산오는 가볍게 무시했다. 희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 반응도 없이 이연에게 물었다.
“이태진을 어쩔 작정입니까?”
“더 이상 이런 일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고 싶어요.”
도시를 인질 삼아 기력을 요구하는 것도, 산오나 세미 같은 이들이 또 나오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했다. 태진을 멈추고 싶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에 희수가 생각에 빠진 듯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잠시 후, 자세를 반듯이 고친 희수가 산오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조금 짓궂은 눈이었다.
“그럼 일단 제산오를 외국으로 보내죠.”
*
“……그래서 산오 형이 외국 출장을 가게 됐다고?”
혜강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빤한 시선이 이연의 옆에서 인상을 구기고 있는 산오에게로 향했다. 이연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진짜로 가는 건 아니고. 위장이지, 위장.”
산오가 국내에 있는 이상 태진은 몸을 사리려고 들 것이다. 아예 산오의 존재를 몰랐던 예전이라면 모를까, 이제 태진은 산오가 어떤 인간인지, 얼마나 그에게 적대적으로 구는지도 빤히 알고 있지 않은가. 이연이 태진이었어도 산오의 동향을 살피느라 과감한 행동은 절대 하지 않겠지.
그건 꽤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지금 날 보고 걸림돌이라고 했나?”
산오가 음산하게 으르렁댔다. 제풀에 놀란 이연이 선량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아니, 무슨 소리야? 위장해 주면 계획이 편하다는 거지. 절대 그런 생각 안 했어.”
“네 얼굴에 쓰여 있는데.”
하여튼 눈치가 귀신이다. 그러나 이연이 완강하게 발뺌하자 제아무리 산오여도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잘생긴 얼굴이 뚱하게 입을 다무는 것을 본 혜강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형이 산오 형이랑 사귀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맥아리라곤 하나도 없는 목소리에 이연이 머쓱하게 반박했다.
“뭐가, 또.”
“적어도 형이 죽을 생각은 안 하게 됐잖아.”
기력을 뽑혀 줄 생각을 하다니, 제정신이야? 그럼 내가 형을 사지로 밀어 넣는 데 일조할 뻔했단 말이야? 허망한 중얼거림은 약한 자괴감을 담고 있었다. 이연의 원래 계획이 꽤 충격이었던 듯 했다.
“안 죽는다니까. 전에도 머리카락 좀 세어 버린 게 전부였고…….”
“전부 같은 소리 하네. 그게 천운이었다는 생각은 안 해? 도시 하나에서 수십 년 동안 쓸 만한 기력을 한 번에 뽑아내면 보통 죽어. 형 초능력 중에 혹시 불사 이런 것도 있어? 불사를 실체화할 수도 있나?”
“……그런 건 안 해 봤는데.”
둘의 대화를 옆에서 가만히 듣던 산오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한마디 보탰다.
“나중에 꼭 시도해 봐라. 되면 좋겠군.”
“야, 안 죽으면 나중에는 나 혼자만 남잖아!”
“그럼 나도 불사로 만들어.”
“대체 뭔 소리야?”
이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산오에게서 시선을 돌려 혜강을 보았다.
“아무튼, 그 방법은 폐기하기로 했으니까 봐주라. 진 국장님하고도 이야기 끝났어.”
이연은 태진을 막길 원하고, 희수는 제 가문을 막는 것을 원했다. 태진과 진씨 가문의 연결고리를 타고 두 사람의 이해가 일치되었다. 일시적 우군이었다.
“계획이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네 도움이 필요해.”
이연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혜강을 살폈다. 이전처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연은 이제 혜강에게 그런 것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모두 털어놓았다.
혜강의 도움이 필요한 것과는 별개로, 이건 회사 일이 아니었다. 이연의 개인적인 용건이었고, 전혀 관련이 없는 혜강은 거절할 권리가 있었다. 지형 설정 기능에, 이태진, 진희수, 진씨 집안……. 평범하게 잘 살던 혜강에게는 너무나도 상관없는 정보들 아닌가. 사실 엮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마음 편할 것이다. 조심스러운 질문이 덧붙여졌다.
“빌릴 수 있을까?”
그러나 이연의 예상과 다르게, 대답은 지체 없이 나왔다.
“당연하지. 나 차금 정보부장이야. 이런 걸 나 빼고 할 생각이었어?”
혜강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묻기까지 했다. 그 당당함이 허무하기도 하고 안심되기도 해서, 이연은 힘없이 웃어 버렸다.
너무 좋은 사람들뿐이다. 자신에게는 과분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