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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12)화 (212/250)

#212

희수의 눈동자가 이연을 훑었다. 맹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순한 인상의 남자는 사실 오래전에 초능력관리청의 고위 공무원 사이에서 한때 꽤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당시의 희수도 지나가는 소문으로 얼핏 들어 본 적 있었다. 실체화 능력의 하위 분류인 그림 실체화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

실체화 능력의 쓰임새는 도시 전역에 깔려 있는 시스템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비록 지형 설정 기능과는 다르게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만 구현 가능하다는 제한이 있을지라도 없어서 못 구하는 희귀한 능력이다. 거기에 대충 그린 그림 역시 완벽에 가깝게 구현해 낸다는 것이 확인되자 관심은 더욱 커졌다. 초능력 등급 심사 위원회는 물론이고 초능력관리청의 각 국장들, 심지어 청장까지도 새로운 초능력자에 대해 물어봤을 정도였다.

그의 능력은 비단 변이종 전투에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 거는 기대가 컸다. 특히 지형 설정 기능 개발자가 사라졌을 때 한동안 영혼이 빠진 얼굴로 초능력관리청을 좀비처럼 걸어다니던 안전관리국장의 얼굴은 봄꽃이 만개해 있는 수준이었다.

구현이 직접 그린 제 그림에 한정되고, 그림 실력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접하다는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래도 본인이 그리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사람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그림 공부를 시켜, 실력을 향상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안이 나왔다. 인재 육성 명목으로 예산을 편성하고 시간을 좀 들이더라도 특별 교육을 시켜 그럴듯한 결과물을 뽑아 보자는 의견이었다.

여기서 그들이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자신의 작품에 진정으로 만족하는 창작자는 절대로 실력이 발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났다. 이연은 매월 초능력관리청에 출석해 다양한 그림을 그렸으나, 그의 작품 세계는 징그러울 정도로 변함없었다. 자포자기로 시킨 대고 그리기는 그나마 나았지만, 본인의 의지가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복잡한 그림을 요구했을 때 떨어지는 집중력은 성인 ADHD를 의심케 할 정도로 경이로웠다.

위원회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질척댔다. 어떻게든 이연의 능력을 써먹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전혀 진전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일 년이 흐르자 고집을 부릴 명분 또한 급격하게 흐려졌다. 그렇게 그는 2단 헌터로 남았고, 서서히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사실은 그림 실체화 능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초심위가 정이연 씨를 잡아먹으려고 들겠군요.”

그 말에 이연이 조금 찔끔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도 초능력관리청에서 집요하게 이연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애를 썼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림이 많이 늘긴 했지만—본인의 생각이다.— 일부러 방만하게 굴었던 부분은 아직도 양심에 찔렸다.

그러나 이연이 위원회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따랐다면 능력의 존재감이 너무나 커졌을 터였다. 그건 그가 가장 바라지 않는 방향이었다.

“죄송하다고 사과해야죠, 뭐…….”

그때야 이연에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지만, 그들이 그걸 이해해 주느냐는 다른 문제였다.

고의로 허술하게 군 건 문제도 아니었다. 아예 능력 자체를 숨겼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구현하는 것과 빛이나 온기 등의 무형적 개념까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만일 그림을 현실로 불러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위원회가 알게 되면 배신감이 상당할 터였다.

이연의 등이 시무룩하게 처지자, 산오의 시선이 희수에게로 향했다. 어쩐지 서늘한 기색이 묻어났다.

“쓸데없는 소리는 작작 해라.”

싸가지 없는 말투긴 했으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깨를 으쓱인 희수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태진의 일에 끼워 달라고 하셨죠. 그와 무슨 관계입니까?”

이연은 자신이 실체화 능력자라고 했다. 지형 설정 기능에 쓰인 그 초능력과 같은 능력이다. 그리고 그는 지형 설정 기능을 만들었다는 태진을 잡았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너무 공교로웠다. 희수는 거대한 조커가 제 손에 굴러떨어졌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다만 최소한의 확인은 거쳐야 했다.

희수가 알고 싶은 것은 이연의 행동 동기였다. 귀찮다며 훌쩍 가 버린 산오가 다시 돌아오고, 이연이 그간 감춰 오던 능력까지 공개하며 나설 정도라면 틀림없이 무언가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태진과 관련되었을 테고.

산오의 성격상 설마 그쪽하고 손을 잡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이연은 김철재와의 공모 의심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곤란했다. 이건 희수도 사활을 걸고 있는 문제였으므로.

희수의 물음에 이연은 머뭇거리다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 김철재 씨 잡았을 때 그 사람 연구소에서 제 기력 보석이 나왔던 거 기억하세요?”

희수는 묘한 얼굴로 이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았다 뜬 하얀 얼굴에 어벙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단호한 눈망울이 빛나고 있었다.

“그게 사실…….”

더듬더듬 풀어낸 과거는 생각보다 길었다. 태진을 만났던 일, 여름의 연구소, 산오와 만났고, 이연이 어떤 일을 당했고, 그때 도망친 태진이 어떤 일을 했는지, 진씨 가문의 저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름대로 축약했는데도 다 하고 나니 삼십 분은 훌쩍 넘어 있었다.

희수는 듣는 내내 한 번도 이연의 말을 끊지 않았다. 진지한 얼굴은 무언가를 깊게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연이 이야기를 모두 마친 후에야 그는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태진은 사실 비초능력자고, 지형 설정 기능에 대해 주장하고 있는 것도 블러핑이라는 말이군요.”

“네.”

설마 이태진이 아예 초능력자가 아닐 줄이야. 생각도 못 한 상황이었다. 담대한 거짓말에 기가 차면서도 머리 한편에서는 체스 말이 바쁘게 움직였다.

판이 바뀌었다.

새로 얻은 정보는 말할 것도 없이 희수에게 유리한 패였다. 일이 이런 식으로 풀릴 줄은……. 이연과 산오를 번갈아 바라보던 희수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현재 상황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이연의 얼굴이 환해졌다. 산오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였다.

“이태진은 체포 시 얻었던 부상을 핑계로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거기서 지속적으로 저에게 연락을 하고 있죠.”

“지속적으로요?”

“네.”

희수가 심드렁하게 손깍지를 꼈다. 반듯하던 상체가 조금 기울었다.

“제가 무시하고 있어서요.”

태진이 희수에게 거래를 제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내용 역시 이연이 예상하던 것과 비슷했다. 지형 설정 기능을 고치는 대가로 자신에게 걸린 모든 혐의를 무효화하는 것. 당장 초전력을 진행해야 하는 초능력관리청에서는 혹할 만한 제의였다. 실제로 이 문제를 함께 논의한 고위층 몇은 찬성했다.

그러나 희수는 그 거래를 이렇게 빈정거렸다.

“그자는 세상이 아주 다 제 것인 줄 아는 모양이더군요.”

희수는 4년 전 불법 초능력 연구소 소탕을 강력 주장 하며 일선에서 지휘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태진은 수많은 사람들의 기력을 탈취하는 것도 모자라 제 오촌 조카를 상대로 실험하려고 든 인간이고.

악질 중의 악질이 굴러들어 왔는데 순순히 놓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초전력을 연기한 것도 지형 설정 기능을 대체할 방법을 찾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태진의 뒤에 있는 존재였다.

“이태진은 저희 가문의 비호를 업고 있던 사람입니다. 저택에 머물렀을 때 가주인 어머니와 친밀했다고 하니 미래의 일을 제외해도 음습한 일을 제법 맡았을 겁니다.”

다음 순간 이어지는 희수의 말엔 확연한 빈정거림이 담겨 있었다.

“어찌나 사이가 돈독하신지, 고작 잡혀 들어간 걸로는 연을 끊고 싶지 않으신가 봅니다.”

몇 년 전 제정된 초능력 실험 금지법에 따른 특례에 의하면 불법 실험 혐의로 수감된 피의자의 수사 책임자는 기본적으로 관할에 상관없이 피의자를 직접 잡아 온 자에게서 가장 먼저 인계받는 사람이었다.

이태진을 잡아 온 사람은 제산오였다. 그리고 대대적인 소탕을 하던 시절부터 쭉, 제산오가 잡은 불법 연구자들은 오로지 진희수에게만 인계되었다.

진정원은 대놓고 나서진 않았으나, 제 연줄을 이용해 태진의 수사 책임자를 압박했다. 온갖 일을 넘겨 여유가 없도록 만들고, 진행이 지지부진하다며 이관을 요청했다. 순순히 수락하면 일어날 일은 뻔했다. 덕분에 희수의 생활 패턴은 쓰레기가 됐다.

“……그런데도 계속 파고들겠다고요?”

이연이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정의로운 일이라고는 하지만, 가문 역시 희수에게는 중요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하다 만약에라도 이 일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 굉장한 추문이다. 고위 공무원인 희수에게는 더 타격이 클 테고.

그걸 정면 돌파 하겠다는 말은 용감한 만큼 무모했다. 그런 뜻을 희수 역시 알아들은 듯했다. 그는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어머니가 압력을 행사했던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네?”

희수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드리워졌다.

“이세미가 처음 체포되었을 때 기억하십니까?”

설마……. 이연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희수는 우울하게 시선을 테이블로 내리깔았다. 식어 빠진 커피 표면에 비치는 천장의 인테리어를 가만히 보던 희수가 호텔 사건에서부터의 타임라인을 쭉 되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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