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11)화 (211/250)

#211

18. 그리하여 번데기는 나비가 된다 (上)

희수가 현재 지내고 있는 곳은 진씨 본가가 아닌 개인 주택이었다.

미래 사건 이후, 희수는 가주이자 어머니인 진정원에게 몹시 실망했다. 고작 가문 내 정치 다툼에 그 어린아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미래는 그녀의 종손녀였다. 어느 누가 종손녀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실험을 강제로 한단 말인가. 실험이 성공했을 때의 결과를 생각한다면 보통 악질적인 게 아니었다.

그것을 추궁하고 최종적으로 덮기로 합의한 과정에서 희수는 정원과 다소의 마찰을 빚었다. 정원은 감히 자신에게 반기를 든 자식을 향해 불쾌감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분위기는 한껏 냉랭해졌고, 한집에 살면서 서로의 모습을 보는 것조차 신경을 건드렸다.

결국 본가에서 따로 나와 살기로 결정한 건 시간문제였을 뿐,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닌 셈이다.

그러나 그의 독립은 다소 충동적으로 정해진 사안이었던 터라 마땅한 장소를 구하는 데에 난항을 겪었다. 그렇다고 길바닥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정식 거주지를 구하기 전까지 임시로 개인 주택을 빌려 지내게 된 것이다.

임시 거주지라고는 해도 생활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었다. 희수의 비서들이 야무지게 일을 처리한 것도 있고, 희수가 무던한 성격이라 주변 환경에 크게 영향받지 않기도 했다. 집들이라며 놀러 온 그의 막내 사촌, 진미림은 이 저택을 구경한 후 부잣집 도련님은 언제 어디서든 티가 난다는 평을 남겼다.

따라서 현재 희수의 안색이 좋지 못한 것은 집의 탓이 아니었다.

지금 그의 앞에 앉아 있는 두 명의 인간 때문이었지.

“…….”

현재 시각은 오전 6시. 출근하기도 전인 꼭두새벽이었다.

아니, 사실 그렇게까지 꼭두새벽은 아니었다. 기상 시간인 오전 5시에 침대를 벗어나 밤새 도착한 업무 연락을 확인하면 이 시간 즈음이었다. 최근 살인적으로 높아진 업무 강도 덕이었다. 전날, 아니, 전날도 아니지. 새벽 2시에 잠깐 눈을 붙인 게 하루 숙면의 전부인 생활 패턴은 쓰레기라고 불러도 손색없었다. 이것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이 비극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희수는 이 악마 같은 루틴에 제법 적응한 참이었다. 무려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커피를 내려 마시는 여유까지 생긴 것이다. 그 증거로 희수가 앉아 있는 소파 앞 테이블에는 하얀 머그컵에 진하게 탄 커피가 한 잔 놓여 있었다.

비록 두 불법 침입자를 상대하느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해 싸늘하게 식어 있지만 말이다.

“국장님, 아직 졸리세요? 커피 새로 타다 드릴까요?”

“네가 뭔데 이 집 커피를 타.”

“국장님이 카페인 필요하신 것 같아 보이잖아. 표정이 멍하다고.”

희수에게 지금 필요한 건 카페인이 아니라 고독이었다.

“진희수 얼굴을 네가 왜 신경 쓰지?”

“아니, 보이는데 어쩌라고…….”

“쓸데없는 것만 볼 거면 차라리 눈을 감아라.”

난데없이 그의 임시 보금자리에 쳐들어온 침입자들은 마치 초대받은 손님인 것처럼 맞은편 거실 소파에 당당히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정작 집주인인 희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는 점이 제일 황당했다.

그때쯤 되자 희수의 안색은 점점 어두컴컴해지다 못해 환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한계였다. 사람을 앞에 앉혀 놓고 한참 입씨름을 하는 무뢰배들에게 희수가 최후통첩을 내렸다.

“지금 당장 용건을 말하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그제야 이연과 산오는 잡소리를 멈추었다. 말소리가 뚝 끊기고, 산오가 등받이에 무게를 실은 방만한 자세로 몸을 젖혔다. 그리고 툭 던졌다.

“이태진 넘겨.”

눈가를 좁힌 희수가 탐색하듯 두 사람을 면면이 살폈다. 잠시 후 흘러나온 대꾸는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갑자기?”

산오는 거만하게 대꾸했다.

“네가 원하는 바 아닌가?”

희수가 이전에 태진의 거래와 관련하여 산오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사실이었다. 제산오를 끌어들이는 건 희수가 현재 취할 수 있는 행동 중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워낙 협조성이라곤 없는 녀석이니 기대는 별로 없었으나, 태진이 그가 잡아 온 불법 연구자라는 점과 산오가 불법 연구자를 극렬하게 싫어하는 점에 일말의 희망을 걸었다.

“알 바 아니라며.”

예상했던 대로 대차게 까였지만. 희수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산오가 했던 대답을 그대로 읊어 주었다. 심지어 거절까지 했단 말이야?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이연의 어이도 사라졌다. 그러나 산오는 두 사람의 표정이 바뀌든 말든 뻔뻔한 낯을 고수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하루 만에?”

의심스러운 질문이 재차 건네지자 짧은 인내심이 그새 끊어진 모양이다. 대번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가릴 처지인가?”

저게 랭킹 1위만 아니었으면 한 대 쳤다. 옆에서 듣던 이연이 저도 모르게 과격한 생각을 하다가 희수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은 눈동자가 느리게 한 번 깜빡였다. 하지만 눈꺼풀로 완전히 덮였던 동공이 다시 드러났을 때, 희수는 놀랍게도 순간 치솟던 폭력성을 훌륭히 갈무리한 채였다.

“넌 그렇다 치고, 정이연 씨는 왜?”

그 말에 산오가 이연을 흘끗 바라보았다. 이연은 대답하는 대신 손을 앞으로 뻗었다. 길쭉한 손가락 끝에서 하얀 모래가 뭉쳐 들었다. 순식간에 거실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아진 모래들이 꾸물꾸물대며 모양을 잡았다. 이어서 약한 빛이 비치고, 곧 희수의 주변에 주먹만 한 볼풀공이 가득 넘쳐흘렀다.

마법 같은 광경에 희수의 입이 무의식적으로 벌어졌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공 수백 개가 거실 바닥은 물론이고 소파까지 쌓였다. 희수는 금세 볼풀장에 들어간 사람처럼 볼풀공들 사이에 파묻혔다.

“이건…….”

희수가 소파에 굴러다니는 볼풀공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볼풀공이 바스락대는 소리를 내며 우수수 굴렀다.

환각이라기엔 지나치게 현실감이 느껴졌다. 언젠가 미래와 함께 간 키즈 카페에서 본 것과 똑같은 생김새와 촉감이었다.

묘한 얼굴로 분홍색 볼풀공을 빤히 바라보는 희수를 조심스레 살피던 이연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후회인지 후련함인지 모를 감정이 마음속에 어지럽게 뒤섞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희수 앞에서 능력을 그대로 내보였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제 능력은 그림 실체화가 아니에요.”

그렇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그냥, 그냥 실체화예요.”

이연의 고백에 희수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이 지난 후에야 희수의 입이 열렸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초관청에 거짓으로 능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까.”

믿을 수 없는 상황 앞에서 평소보다 훨씬 더 이성적인 목소리가 이연에게 던져졌다. 이연은 벌을 받는 아이처럼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게…… 예. 그렇죠…….”

“이유가 뭡니까?”

이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같이 일하고 싶은 친구가 있는데, 단수가 좀 높아서요. 저도 비슷한 정도가 되어야 할 것 같아서.”

“제산오를 말하는 겁니까?”

이연은 산오를 흘끔 돌아보았다. 심드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산오와 눈이 마주치고 다시 고개를 돌려 희수를 봤다. 목소리가 조금 더 단단해졌다.

“네.”

“정이연 씨의 능력이 제산오와 비슷한 급이라는 거고요?”

그 질문에는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이연이 빙긋 웃었다.

“경우에 따라 제가 더 셀걸요.”

장난스러운 말을 들은 산오의 눈썹이 삐딱하게 치켜 올라갔지만, 희수의 예상과 달리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친구?”

“야, 맥락상 대충 받아들여.”

“받아들이게 하고 싶으면 표현을 똑바로 써. 친구가 아니라, 읍.”

재빨리 산오의 입을 막은 이연이 희수의 눈치를 살폈다. 하여튼 이 녀석은 말을 걸러서 하는 게 없어서 큰일이다.

그러나 다행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희수는 조금 얼이 빠진 상태로 두 사람의 대화 대신 방금 들은 말을 곱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산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특히 제 능력에 관해서는 오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솔직했다.

기실 따져 보면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이 도시, 나라, 전 세계를 두고 봐도 산오의 능력은 독보적이었다. 살아 있는 자연재해라는 무궁화 5단급과 비교해도 규격 외였다.

그 사실을 본인 역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산오는 이제까지 자신과 남을 비교해 아래는커녕 동급으로도 놓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재수는 없어도 사실은 사실이다. 희수를 비롯해 그와 겨뤄 본 모든 이가 동의하는 바였다.

그랬던 놈이 당사자 앞에서, 저보다 강하다고 말하는데 반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행동의 의미는 명백했다. 제산오가 순순히 수긍할 정도로 강력한 초능력자.

4년 전, 산오의 등장 이후 내내 공고했던 초능력자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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