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네가 한 건 그게 다야.’
날 데려가라고, 함께 걷자고 말하는 남자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처럼 단단히 제 손을 붙들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된 약속을 질기게 붙들어 매서 이연의 발에 채워 버렸다. 그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이연도 산오와 함께 임무를, 의뢰를, 초전력을 하고 싶어졌다. 한계를 그어 버린 어설픈 능력이 아니라 마음껏 기력을 쓰고 싶었다.
그의 옆에 정말로 서고 싶어졌다.
“도망치는 건 이제 지겨워.”
“…….”
“오늘 만난 사람이 그렇게 말하더라고.”
이연이 흐리게 웃었다.
“나도 동의해.”
“……아무리 듣기 좋은 말로 회유하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연이 말이 이어지는 내내 고집스레 그를 노려보고 있던 산오가 대꾸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은 조금 전과 변함없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싶으면 말해. 기력 기진까지 갈 필요 없이 직접 해 줄 테니까.”
걱정하는 건지 싸우자는 건지 모를 말이었다. 그러나 이연은 살벌한 발언을 듣고도 맞받아치는 대신 빙긋 웃었다.
“그래, 너라면 그럴 줄 알았어.”
“뭐?”
산오가 잔뜩 구긴 인상을 풀지도 않고 되물었다. 이연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 잘생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두 손을 뻗었다. 산오는 얼결에 이연의 품에 안겼다. 커다랗고 탄탄한 몸을 끌어당긴 이연이 어깨에 턱을 올리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야, 내가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지.”
지형 설정 기능을 가지고 태진이 초능력관리청과 거래를 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부끄럽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산오와 같은 생각이긴 했다. 제 능력을 오픈해서, 텅 빈 시스템에 다시 기력을 채워 넣는 것.
기력은 쉬면 다시 찬다. 이전에 한 번 뽑혀 본 양이 아닌가. 죽지 않을 것이다. 당사자가 자원한다면 초능력관리청에서도 임시방편으로나마 허락하겠지. 그런 계산을 했었다.
그러나.
‘그때 형을 만나길 잘했어.’
혜강이 그렇게 말해 주었다.
‘도울 일 있으면 그냥 말하라는 거잖아.’
D.S가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 그냥 궁금할 수도 있다고 했잖아.’
‘네가 용기를 내도 괜찮다고 외치는 것 같았어.’
재경의 말도, 영의 말도 모두 이연의 심장에 따뜻한 눈송이처럼 내려앉았다.
아마 이연의 계획을 말한다면 모두가 말릴 것이다. 위험하다고 만류하는 목소리들은 너무 쉽게 예상이 가서 맥이 빠질 정도였다.
다들 이연을 생각해 주고 있었다. 먼 옛날 부모님이 어린 정연을 끌어안고 괜찮냐는 말 대신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주던 그때처럼.
그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덜 다쳐 보려고.”
이연이 다칠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고, 짜증을 내면서도 꼭 치료하려고 들고,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온몸으로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산오는 이연을 걱정하고 있었다. 몸이 상하지 않기를 바랐다.
“틈만 나면 다친다는 오명도 좀 벗어 보고.”
뜨거우리만치 다정한 애정에 부응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다른 방법을 찾게 했다.
“진 국장님에게 내 능력을 밝히긴 해야 해. 그래야 아무리 급한 상황이 와도 이태진의 거래를 재고하지 않을 테니까.”
태진이 벌인 짓은 먼 옛날 빼앗은 이연의 능력으로 한 것이다. 잔재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태진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허울 좋은 말로 방치하는 건 여기까지였다. 이 이상 태진이 그걸 이용하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느리게 호흡하는 몸을 달래듯 다독이며 이연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대안이 생길 때까지 초관청에 지속적으로 내 기력을 제공하는 방법도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알았어. 화내지 마. 안 그럴 테니까.”
탄력적인 근육이 옷 너머로 꿈틀대다 겨우 얌전해졌다. 한 박자 늦게 산오의 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죽고 싶으면 그래 보든가.”
“알았다니까.”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엽게 구는 거야. 이연은 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있잖아.”
딱 붙어 있던 몸을 살짝 떼어 낸 이연이 산오의 뺨을 잡고 시선을 마주했다. 서늘하게 생긴 얼굴과는 다르게 피부에 닿은 손바닥은 따뜻했다.
“사실은 아직도 좀 무섭거든.”
“…….”
“그러니까 도와주지 않을래?”
이연이 산오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산오는 조심스레 요청하는 순한 얼굴을 빤히 노려보았다. 마치 숨겨진 의중이라도 파악하려는 것처럼. 그리고 얼굴 구석구석을 훑어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이게 만약.”
냉담한 목소리는 그제야 한결 풀려 있었다.
“날 당장 속여 넘기려는 수작이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왜,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와서 죽여 버리게?”
어설프게 제 말투를 따라 하는 이연의 모습에 산오가 피식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가 뺨 위의 피부가 움직이고, 그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느껴졌다.
다음 순간, 산오가 이연의 등을 끌어당겼다. 안 그래도 맞붙어 있던 얼굴이 코가 비벼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지옥은 아무나 가?”
따뜻한 입술이 닿았다. 숨결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
“음…….”
눈을 떴다. ……눈을 떴다고? 이연이 멍한 시선을 천장에 고정한 채로 느리게 정신을 깨웠다. 조금 전까지 분명 제산오랑 키스를…… 하지 않았나?
“드디어 일어나셨군.”
나직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음성에 따라 약하게 진동하는 피부와 닿아 있던 탓에 천둥처럼 들렸다. 그 순간 이연은 찬물에라도 맞은 것처럼 후다닥 깨어났다.
“헉! 뭐야? 뭐지? 나 왜 자고 있지?”
맹한 물음에 이연에게 팔을 내어 준 채로 나란히 누워 있던 산오가 코웃음을 쳤다.
“술 처먹고 그만큼 대화한 것도 용하지.”
“아니, 맥주 몇 잔 마셨을 뿐인데…… 으.”
불쑥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두통 때문에 이연이 멈칫하자, 산오가 팔을 뻗어 협탁에 놓은 물컵을 건네주었다. 단맛이 나는 물을 몇 모금 마시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입가로 흐른 액체를 팔로 대충 문질러 닦은 이연이 고개를 돌려 산오를 내려다보았다.
외출복에 겉옷만 벗은 상태로 잠들었던 이연과 달리 산오는 편한 실내복 차림에 머리카락도 뽀송했다. 보나 마나 꼬질해진 제 모습과 비교가 될 것 같아 이연은 뒤늦게 이리저리 뻗쳤을 뒷머리를 슥슥 매만졌다.
“어디까지 기억나지?”
산오는 예의상 묻는다는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당시 심하게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이연은 살짝 발끈했다.
“국장님한테 능력 밝히고 같이 상의해 보기로 했잖아. 다 기억나거든?”
심술궂은 빛을 띤 초록색 눈동자가 이연을 바라보았다.
“그럼 주택도 빠른 시일 내에 알아보도록 하지.”
“……어?”
“지금 집은 좁으니까 2층 주택으로 이사하자며.”
“……내가?”
“기억난다던 놈치곤 흥미로운 반응이군.”
아니, 진짜야? 이연은 탐색이라도 하는 것처럼 산오의 얼굴 구석구석을 뜯어보았지만, 심드렁한 기색이 만연한 얼굴은 어떤 의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내가 진짜 그런…… 걸 말했다고? 웬 주택? 주택 관리를 내가 어떻게 해? 혼란에 빠져든 이연이 청소를 제대로 하지 못한 대저택에 먼지가 쌓여 하루 종일 기침하다 폐에 문제가 생겨 병원에 실려 가는 상상까지 마쳤을 무렵에야 산오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툭 던졌다.
“거짓말이다.”
“야!”
산오는 발끈해서 날뛰려는 이연을 솜씨 좋게 낚아채 다시 품에 안았다. 이연은 벗어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능력을 사용하지 않은 단순 물리력으로 산오를 이기는 건 어림도 없었다. 씨름 같은 장난은 이연이 항복을 선언하며 몸에서 힘을 빼고 나서야 종료되었다.
이연은 축축 처지는 몸을 가눌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늘어졌다. 안 그래도 숙취 때문에 얕은 두통이 있었는데 간신히 차오른 체력까지 몽땅 쓰니 피로가 쏟아져 이대로 그냥 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연이 못 이기는 척 눈을 다시 감으려는데, 산오가 슬쩍 흔들었다.
“씻고 자라.”
“아,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씻겨 줘?”
“…….”
명색이 애인이 말하는 건데 로맨틱하게 들리지도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이연은 얌전히 일어났다.
역시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기분이 다르다. 이럴 때 쓰이는 말은 아니었지만 맥락상 영 틀린 표현도 아니었다.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오는 이연의 뺨이 따끈따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씻는 동안 환복하고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확인하던 산오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이연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애가 따로 없군.”
“뭐가?”
“제대로 말려.”
고개를 까딱이며 쥐고 있던 수건을 가리키자 이연이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제 두피를 박박 닦았다. 산오의 눈썹이 다소 못마땅한 기색으로 꿈틀거렸지만 간신히 참는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수건을 어깨에 걸친 이연이 옆자리에 앉자 산오가 보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진희수는 이태진과 거래를 하지 않을 거다.”
“내가 능력을 밝히지 않아도?”
“네가 능력을 밝히지 않아도.”
줄곧 이연이 승단하길 바랐으면서도, 산오는 굳이 다시 물었다.
“그래도 말할 건가?”
그 마음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져서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감추어야 했다.
“응.”
무슨 일이 생겨도 제 옆에 있을 것 같은 남자가 이연의 마음속 지반을 다져 주었다. 용기를 내고 싶게 했다. 한걸음 더 내딛고 싶게 했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결정됐군.”
가벼운 목소리가 선고했다.
“잡아.”
스스럼없이 내미는 손을 이연의 손이 단단히 붙들었다. 곧 두 사람의 형체는 땅으로 꺼지듯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