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승단한다고?”
대답하는 재경의 목소리가 놀라서 커진 탓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이렇게까지 선포할 만한 건 아닌데. 이연이 머쓱해하는 사이 먼저 수긍한 것은 D.S였다.
“하긴, 그럴 때 됐지.”
그럴 줄 알았다는 목소리였다. D.S 앞에서 대놓고 능력을 쓴 적은 없었는데. 그런 얼굴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자, 눈이 마주친 D.S는 오히려 한심하다는 듯 툭 내뱉었다.
“그림 실체화 능력이 수중 전투를 했다는데 모르면 바보 아니냐? 물 들어간 고글 누가 수리하게?”
“아.”
“그래, 그 허술한 상태로 뭘 오래 끌어? 잘 생각했어.”
“…….”
어김없이 날아온 구박에 금세 의기소침해진 이연이 물을 들이켜자, 혜강이 서둘러 위로해 주었다.
“형 하고 싶은 대로 해. 회사 등급 올라가고 좋지.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2단으로도 만족한다며.”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동자들이 이연을 향했다. 이연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가볍게 말했다.
“나도 영웅이 되고 싶어서?”
“뭐야, 웬 영웅?”
거창한 단어에 재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으로 넘기는 분위기에 이연은 굳이 정정하지 않고 따라 웃었다. 커다란 쟁반을 들고 다가온 수아가 테이블을 세팅하며 들뜬 얼굴로 물었다.
“이연 씨 승단한다고요? 그럼 오늘은 승단 축하 파티인 건가요?”
“아니, 그 정도는……. 아직 뭘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마음만 먹은 거라서요.”
손사래 치는 이연의 말 뒤에 영의 엄숙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네 능력으로도 승단을 못 하면 초관청에 문제가 있는 거다.”
“맞아, 전에 보니까 대단하던데. 제산오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고.”
맞장구친 재경이 때마침 수아가 놓아 준 새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이연 씨 승단 미리 축하해.”
다른 사람들 역시 다 함께 잔을 들었다. 이연은 잠깐 머뭇거리다 뒤늦게야 슬그머니 따라 들었다.
“감사합니다…….”
짤랑,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잔이 부딪쳤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음식이 테이블 한가득 놓였다.
사람들이 술에 취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한동안 왁자지껄하게 먹고 마시던 사람들의 행동이 점점 느려졌다.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잠깐 자리를 비웠더니 그 변화가 더 극명하게 보였다.
재경은 어느 순간부터 영을 붙들고 변이종 역사에 대해 열변을 토했고, 재이는 반쯤 맛이 갔는지 맥주가 반쯤 남은 잔을 노려보며 고개를 느리게 흔들고 있었다. D.S는 어느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수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이중 가장 술을 많이 마셨음에도 제일 멀쩡해 보이는 혜강은 미래의 초등학교 우정 관계를 상담해 주는 중이었다.
“그래서 민희가 성준이를 좋아하는데, 미래는 걔 싫어. 못된 말만 한단 말이야.”
“그렇구나. 못된 말 하는 애랑 같이 놀기 힘든데.”
“맞아! 근데 민희가 좋다잖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미래가 착하네.”
……제법 성숙한 대화였다. 혜강이 미래의 머리를 토닥이는 모습까지 관찰한 이연이 떨떠름하게 자리에 앉자, 미래가 이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삼춘, 미래 졸려.”
“어, 잘 시간 됐나?”
이연이 가게 안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밤 9시가 훌쩍 넘었으니 슬슬 졸릴 때가 되긴 했다. D.S 쪽을 흘끗 확인하니 수아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몰라도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끼어들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럼 일단 여기서 잠깐만 눈 붙이고 있을까?”
빈 테이블의 의자를 끌어온 이연이 의자 두 개를 이어 붙여 미래가 누울 만한 공간을 만들었다. 하얀 모래를 불러내 조그만 토퍼와 베개, 이불까지 만들어 눕히자 눈을 두어 번 비빈 미래가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미래는 곧 고롱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숙면에 빠져들었다.
“잘 자네.”
머리카락을 정리해 준 이연이 돌아오자, 상황은 조금 바뀌어 있었다. 재경의 강의로부터 탈주한 영이 필사적으로 혜강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노력 중이고, 혜강은 귀찮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아직까지는 꼬박꼬박 대답해 주고 있었다. 끈 떨어진 연처럼 덩그러니 남은 재경이 아쉽다는 눈으로 그쪽을 흘끔거릴 때마다 영의 말소리가 빨라졌다.
퍽 절박한 광경이었다. 까짓거 희생양이 되어 줄까……. 그렇게 생각한 이연이 재경의 등을 툭 건드렸다.
“많이 마셨어요?”
“이연 씨.”
재경이 환해진 얼굴로 이연을 바라보았다. 변이종 이야기라면 맨정신으로도 몇 번 들어 보았으니 취한 정신으로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연이 나름대로 각오를 다졌다.
그런데 정작 재경에게서 나온 이야기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괜찮겠어?”
“네? 뭐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타이밍이 영 뜬금없어서. 밝히려면 밝힐 기회가 많았잖아.”
이연이 대답 없이 눈만 깜빡이자 재경이 말을 덧붙였다.
“승단하는 거 말이야.”
객관적으로 봐도 단수가 낮은 헌터보다는 높은 헌터의 혜택이 훨씬 좋았다. 세율도 낮고, 대상 정책도 많은 데다가 부수적인 혜택도 꽤 짭짤했다. 헌터라면 할 수 있는 한 높은 단수를 받는 것이 무조건 이득이었다.
그런데 승단해도 괜찮냐고 물어보는 재경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발신 안에서 얼핏 체험했던 이연의 능력은 척 봐도 평범하지 않았다. 그냥 능력 사용이 조금 능숙해진 수준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승단 심사도 일반적으로 치러지는 것과는 조금 다를 가능성이 높았다. 결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까지 평범하게 살다가 갑자기 그런 걸 감수해 가면서 승단을 하려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시 그게 우리, 우리 소장님이랑 관련 있어?”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이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반응을 보고서야 그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재경이 머쓱하게 변명했다.
“아니, 뭉치 보주 이야기 했을 때 이연 씨 표정이 좀 심상치 않았잖아. 그리고 혜강이도 갑자기 소장님에 대해서 물어보고……. 그래서 관련 있는 줄 알았어.”
“혜강이가요?”
“응. 근데 난 소장님하고 개인적으로 친한 건 아니라서 잘 모르거든. 그래서 대답해 줄 게 별로 없었어.”
태진의 정보를 캐내다가 자연스럽게 은주까지 알게 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이야기를 해야지 생각했는데, 그럴 필요조차도 없었다. 이연이 혜강의 정보력에 혀를 내두르는 동안 재경은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있잖아. 내가 도울 건 없어?”
재경은 머뭇대면서도 꿋꿋이 말을 이었다.
“난 일반인에 가깝고 헌터에 대해서도 잘 몰라서 승단에 쓸모는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필요하면 꼭 말해 줘. 그냥 막 속풀이 같은 거라도 괜찮아. ……이연 씨가 나, 나보고 친구라며.”
“…….”
“친구끼리는 도움도 주고받잖아.”
후다닥 말을 끝낸 재경은 별안간 맥주 잔을 들어 원샷했다. 둥근 귀 끝이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연이 한숨 쉬듯 웃었다.
“재경 씨.”
“응?”
“저도 재경 씨가 좋아요.”
“어, 어?”
재경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이연은 조금 쑥스러워지는 기분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재경 씨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재경뿐만이 아니었다. 혜강도, D.S도, 수아도, 미래도, 영도, 재이도.
이 사람들이 좋았다.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했다.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축하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위로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돕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살고 싶었다.
사실 혼자는 질색이었다.
“그래서 결정한 거예요.”
담담한 목소리에 재경은 조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이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깬 것은 혜강이었다. 뚱한 얼굴이 폭탄 발언을 내뱉었다.
“뭐야……. 둘이 사귀어?”
“어엉?”
이연이 화들짝 놀랐다.
“아니, 방금 좋아한다고 했잖아.”
“아니, 그건 그런 의미가 아니지. 그냥 인류애적인 의미의…….”
“어라, 이연 씨는 애인 따로 있지 않아요? 전 그렇게 알고 있는데.”
어느새 대화가 끝났는지 수아와 D.S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애인이 생긴 건 맞는데 이제 하루 된 걸 사장님이 어떻게 알지? 지레 놀란 이연은 언젠가 산오와 사귀는 척을 할 때 수아의 가게에서 축하 파티까지 벌였던 일을 간신히 기억해 내고 진정했다. 그땐 거짓말이었는데,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진실이 되어 버렸다는 점이 새삼 희한하긴 했다. 옆에서 무덤덤하게 맥주를 홀짝이던 D.S가 덧붙였다.
“그러게. 합의된 거 맞아? 그놈은 바람 같은 거 피웠다간 두 조각으로 찢어 버릴 것 같던데.”
“아니, 바람이라니! 무슨 소리예요?”
모두가 침착한데 이연만 펄펄 뛰었다. 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뭐, 거기나 재경이 형이나 비슷하지.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난 상관있어!”
“애인이 있었군…….”
그 와중에 영이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어쩐지 조금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그냥 친애적인 의미라고. 재경 씨도 좋아하고, 너도 좋아하고, D.S 씨도 좋아하고!”
“어머, 섭섭하네. 저는요?”
수아가 냉큼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켰다.
“수아 씨도 좋아하죠!”
“고마워요.”
살풋 웃은 수아가 그제야 젓가락을 들어 안주를 집어 먹었다. 난데없이 고백을 한바탕 펼친 이연의 뒷 목이 달아올랐다. 이게 갑자기 뭔 난리인가 싶었다.
그런 이연을 영과 재이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숨 막히는 시선이 이어졌다.
“…….”
“…….”
“……영 씨랑 재이 씨도 좋아해요.”
그제야 두 사람은 흐뭇해진 얼굴로 서로 짠을 했다. 안색이 한결 죽은 이연이 퀭하게 물잔을 집어 들었다. 이런 대화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피로가 몰려왔다.
싸늘한 목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 퍼진 것은 그때였다.
“잘들 노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