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D.S가 어린아이에게 가르쳐 주는 선생님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넌 거기 안 갈 수도 있었어. 너 그때 조사 대상으로 초관청에 불려 가 있었다며. 나오면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억지로 와 준 거잖아.”
“……그걸 어떻게.”
“진희수가 알려 줬어.”
이연은 당시 김철재의 공범 의혹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공범인 이태진이 잡히며 상황이 흐지부지해졌고, 나중에 온 희수도 그에 대해 아무런 말을…….
‘어?’
이연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김철재에게서 발견된 이연의 기력 보석은 이태진이 잡혔다고 해명되는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의 기력 파장이 아무리 비슷하다고 해도 완전히 같을 순 없었고, 결국 기력 보석의 파장은 이연과 일치할 테니까.
의혹은 아무것도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희수는, 초능력관리청은 이연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실컷 고민하면서 기억해 둬. 난 너에게 빚을 졌어.”
딴생각에 빠진 이연을 건져낸 건 D.S의 목소리였다. 훅 현실로 돌아온 이연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전 대부업자가 아니라 헌터거든요…….”
세미도 그렇고 D.S도 그렇고, 다들 짜기라도 한 것처럼 빚 운운이었다. 심지어 D.S는 그녀에게 진 빚을 모두 탕감하는 조건으로 이연에게 도우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거면 끝인 거지, 왜……. 투덜거리는 이연을 바라보던 D.S는 다시 작업대로 시선을 내렸다. 한심하다는 목소리와 함께였다.
“멍청아, 도울 일 있으면 그냥 말하라는 거잖아.”
그 발언은 백지 수표나 다름없었다. 이연이 입을 다물었다.
D.S는 자진해서 남의 일에 끼어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거리를 두는 편에 가까웠다. 그녀가 속정이 많다는 것과는 별개의 성향이었다. 이연이 그녀를 더 잘 따른 것은 이런 이유도 있었다. 함부로 깊게 파고들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늘 멈춰 섰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망설임 없이 대답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직 자세한 이야기는 한 줌도 꺼내 놓지 않았는데.
이연은 나름대로 결심을 굳힌 상태였으나 확고하지는 않았다. 이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꽤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D.S의 협력이 있다면 조금 더 손쉬운 방법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잘된 일이다.
그러나.
“제가 뭘 도와 달라고 할 줄 알고요.”
이연의 목소리가 조금 잠겼다. D.S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책상에 처박은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말하면 알게 되겠지.”
거기에 담겨 있는 건 아주 커다란 호의인 동시에 믿음이기도 했다.
“……조금만.”
그래서 이연은 선뜻 말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고민해 볼게요.”
왜냐하면 그가 부탁하려던 것은…….
“그러든가.”
D.S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발언을 철회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이연은 가만히 숨을 물어 삼켰다. 그녀가 건넨 마음이 가시처럼 심장 한구석에 박혔다.
“영 씨랑 재이 씨는요?”
“미래가 무슨 카페 가고 싶다고 해서 놀러 갔어.”
조금 침묵을 둔 후 내뱉은 화제 전환에 D.S는 순순히 따라왔다. 알면서 모른 척해 주는 배려가 오늘따라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연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아, 그…… 궁전 같은 카페요?”
“몰라. 무슨 콜라보 어쩌고 하던데.”
초등학교 하교 시간은 한참 전인데 웬일로 공방이 조용한가 싶었더니, 영과 재이가 벌써 공동 육아를 해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래와 몇 번 그런 체험 카페를 가 본 경험자로서 확신하는데, 세 사람은 두 손에 주렁주렁 많은 쇼핑백을 달고 귀가할 것이다. 이연이 적당히 달래도 커다란 쇼핑백 하나는 너끈히 나오는 판이니, 영과 재이는 미래가 뭐 갖고 싶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은 입력되지도 않은 로봇처럼 행동할 게 빤했다.
그래도 귀엽고 화사한 인테리어의 가게에서 혀가 아릴 정도로 단 음료수과 디저트를 나란히 마시고 있을 세 사람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이연이 가볍게 웃었다.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네요.”
“그 후로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때요? 우렁 각시랑 같이 사니까.”
“보면 몰라? 좋아 죽어. 걔네 기술은 책으로 만들어서 널리 알려야 해. 이렇게 자발적으로 홍익인간 마음이 솟구치는 건 처음이야.”
오늘따라 유난히 피부가 반질해 보이는 D.S는 삶의 여유가 주는 중요성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것 같았다. 누가 봐도 인생 만족도 최상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부럽다. 이연이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징징댔다.
“FT-4에 청소 노하우 업그레이드해 주면 안 돼요?”
“……오. 괜찮은 생각인데?”
“정말요?”
이연의 얼굴이 환해졌다. D.S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재이랑 영이랑 수익 나눠서 아예 상용화 제품을 개발하면…….”
그 와중에도 고글을 살펴보는 손은 멈추지 않는 집중력이 놀라웠다. 한동안 뇌 따로 손 따로 작업하던 D.S는 이내 만족스러운 결과가 도출되었는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수혜를 입을 것 같은 느낌에 이연 역시 흡족해졌다.
“곧 올 텐데 얼굴 보고 가.”
“그럴까요?”
이연이 반색했다. D.S는 그런 그를 흘겼다.
“어, 미래가 자꾸 네 얘기만 하던데, 누가 엄마인지 모르겠어. 너 나 몰래 걔 키웠냐?”
“에이, 질투하시는 거예요?”
이연의 낄낄거림에 D.S가 그를 냉엄하게 노려보았다. 장승 같은 기세였다.
“누가, 내가? 내 딸을?”
“……미안합니다.”
미래와 영, 재이는 얼마 안 되어 공방에 도착했다. 와글거리며 들어선 세 사람이 D.S와 함께 있는 이연을 발견한 건 금방이었다.
“다녀왔, 어! 이연 삼춘!”
배낭끈을 쥐고 다다다 달려온 미래가 이연에게 안겼다. 허리를 숙여 안아 준 이연이 반갑게 인사했다.
“미래, 잘 지냈어?”
“응!”
발랄하게 대답하는 미래의 머리를 쓰다듬는 사이 영과 재이가 다가왔다. 예상한 대로 두 손에 가득 쇼핑백을 쥔 모습이었다.
“두 분 다 잘 지내셨어요?”
이연의 인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졌다. 여전히 과묵한 사람들이다. 그 익숙함이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져, 이연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수리는 언제 끝나요?”
“며칠은 더 있어야 해. 네 렌즈는 주문 제작 넣어야 하거든. 하는 김에 기능 점검도 좀 하지, 뭐.”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이연이 빈손으로 일어섰다.
“그럼 전 갈게요.”
“그래. 수리 끝나면 연락할게.”
공방을 나서는 이연을 향해 미래가 어찌나 열심히 손을 흔들던지 이연 역시 화답하느라 팔이 빠져라 흔들어 주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기운이 엄청났다. 얼얼한 팔뚝을 문지르며 거리를 막 걷는데, 뒤에서 빠른 발걸음이 들려왔다.
“정이연.”
“어, 영 씨?”
뒤를 돌아본 이연이 의아하게 물었다. 상황이 뭔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최근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이연이 잠깐 딴생각에 빠진 틈을 타 그의 앞에 선 영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받고 보니 하얀 봉투였다.
“이게 뭐예요?”
이연은 봉투를 슬쩍 열었다가 기겁했다. 지폐가 수북하게 들어 있었다.
“의뢰하려고요? 그건 자세한 내용을 알아야 가격이 책정되는데. 일단 다시 받으세요. 상담을 하고…….”
냅다 돈을 받을 줄은 몰랐던 이연이 허둥지둥 되돌려 주려 했지만, 영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의뢰비 아니야.”
“네? 그럼 뭔데요?”
영이 자신에게 돈 줄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고마움이라면 저번에 다 표현했고, 그걸로도 정 부족하다면 밥 정도 사 주면 될 걸 가지고……. 게다가 금액이 너무 많았다. 이연의 떨떠름한 반응에 영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네가 공방 수리비 냈다며.”
“그거야 뭐, 제 잘못이니까…….”
영과 재이가 침입해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던 공방은 이연이 책임지고 배상했다. 애초에 D.S라는 인물의 존재를 김철재에게 들킨 사람이 이연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가 D.S의 엔지니어 인장이 찍힌 연결잭만 제대로 회수했었어도 공방이 습격당할 일은 없었을 테니까.
“실제로 부순 사람은 우리야.”
그러나 그것을 습격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영과 재이였다. 그녀들은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조만간 네 사무실에 찾아가서 주려고 했어. 이번 달 월급뿐이라 좀 적지만, 나머지도 차차 줄게. 몇 달이면 돼.”
“아니,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이연은 정말로 당황했다. 월급이라면 D.S의 가사를 도와주고 받은 돈 아닌가.
조금 전에 슬쩍 봤던 뭉치 두께로 가늠하면 절대 1인분은 아니었다. 영과 재이, 두 사람분의 월급을 털어 이연에게 준 것이다. 그런 걸 받을 수는 없었다.
이연의 손사래에 영은 나직하게 물었다.
“전에 한 얘기 기억나?”
“네?”
“나중에 돌이켜 봤을 때 잘했다고 생각하고 싶어.”
“…….”
“이렇게 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하고 싶지 않아.”
“……이건 좀 치사하지 않아요?”
이연이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제가 한 이야기를 인용해 버리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럼 반만 내요.”
봉투를 뒤적여 돈을 꺼낸 이연이 나머지를 돌려주었다.
“제 과실도 있긴 있으니까. 영 씨랑 재이 씨가 나머지 반을 주는 거면 받을게요.”
영은 마뜩잖은 얼굴이었지만, 이연이 물러서지 않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은 지폐 뭉치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럼 그런 걸로 하고, 계약 성사된 기념으로 제가 저녁 쏠 테니 같이 가요.”
오늘은 시간도 늦었고, 본격적인 행동도 혜강이 정보를 구해 오고 나서야 할 수 있을 테니 아직은 한가했다. 이연의 제안에 당황한 영이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뭐? 그건…….”
“왜요? 제가 제 돈 쓰겠다는데.”
“…….”
영은 인상을 일그러트렸지만,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는 못했다. 이연은 빙글빙글 웃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 공방에 다시 들어섰다. 뭐 두고 갔냐는 D.S의 의아한 물음에 대고 이연이 경쾌하게 외쳤다.
“제가 오늘 저녁 삽니다! 다들 나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