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이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태진은 지형 설정 기능을 마치 혼자 만들어 낸 것처럼 굴었다. 그가 자신이 지형 설정 기능의 개발자라고 밝힌다면, 초능력관리청으로서는 고민되는 사안일 것이다. 왜냐하면 태진의 수많은 거짓말 중 그것만은 유일한 진실이었으니까.
“조사받을 때 이세미 씨한테 물어보지는 않았어요? 이태진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해명하면.”
이연의 말에 세미가 어딘지 머쓱한 얼굴로 대꾸했다.
“뭐, 우린 이태진이 그런 땡깡 피우기 전에 형 집행이 끝나서. 그리고 초관청 소문을 들은 게 다야.”
“그래도 조사관한테 찾아가서…….”
세미는 진실을 솔직하게 털어놨기 때문에 감경되었다. 아마 세미가 말했다면 담당 조사관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곧장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
“넌 괜찮고?”
“네?”
“이거 내가 초관청에 찌르면, 너도 그냥은 못 넘어가. 이태진이 만든 기능이 어디서 온 건지, 원래 누구 거였는지, 무슨 과정을 거쳐서 만들게 된 건지 다 알게 되잖아. 그럼 지금까지의 네 한가한 삶도 끝이야.”
이연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태진이……. 완성되지 않은 문장들이 입 안에 멍울처럼 맺혔다. 세미는 그런 이연을 향해 냉랭한 어조로 내뱉었다.
“이건 네 일이잖아.”
“…….”
“그러니까 네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테이블 위로 침묵이 쌓였다. 이연은 느리게 제가 들은 말을 곱씹었다. 세미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이연을 향한 배려였다.
“……왜, 그렇게까지.”
이연은 세미를 두 번이나 잡아넣었다. 어느 모로 보나 좋게 엮인 사이는 아니다. 그녀가 이연을 그렇게까지 신경 써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신음 같은 의문에 세미가 이연을 마주 보았다.
“난 그냥 빚을 갚았을 뿐이야.”
“……저는 뭘 빌려준 적이 없는데요.”
“그래도 나는 받았어.”
“…….”
“초관청에 알리든 말든 네가 알아서 해. 난 거기까지 책임지고 싶지는 않아.”
세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연은 그녀가 재킷을 걸치는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퍼뜩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세미의 목적은 처음부터 이거였다. 세미는 이연이 모를 거라고 반쯤은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멍하니 흘러나오는 인사에 세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려는 뒤통수에 대고 이연이 급하게 물었다.
“제산오도 이걸 알고 있을 거라고 했죠.”
등 돌린 자세 그대로 고개만 슬쩍 튼 세미가 자신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멋모르는 하급 헌터들도 시끌시끌한 판인데 5단 헌터들에게는 정식으로 공유된 정보일 가능성이 크지.”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수상하리만치 빠르게 희수를 따라나서던 산오의 뒷모습이었다. 마치 들키지 않으려는 것처럼, 어떤 이야기도 나오기 전에 자리를 피해 버리던 그 모습.
이연은 확신했다. 산오는 알고 있었다.
가게를 나온 이연이 향한 곳은 가장 가까운 전투 구역이었다.
도시 곳곳에 마련되어 있는 너른 터는 주로 대형 변이종과 전투하거나 긴급 대피가 필요할 때, 혹은 초전력 때나 사용하므로, 사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았다. 변이종 임무의 절대다수가 소형 변이종 처치 및 포획이기도 했다. 이연 역시 초전력, 그리고 청호와 만났을 때를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하급 헌터들은 쓸 일이 없고 실제로도 거의 쓰지 않지만, 사용 허가 자체는 모든 헌터에게 나 있었다.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한 것이다. 이연이 예전에 32 전투 구역을 개방했을 때처럼.
[무궁화 2단 정이연, 초능력자 확인되었습니다. 이곳은 22 전투 구역입니다. 별도 허가 없이 변이종 전투 외의 용도로 전투 구역을 사용하는 것은 강력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유의 바랍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이연의 시선이 텅 빈 땅을 향했다. 초전력 연기 공문이 뜨기도 전에 문제가 있다고 소문이 무성했던 것은 단지 초능력관리청의 분위기 탓만은 아닐 터였다.
헌터들이 자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
목소리가 인식되자마자 전투 구역 입구의 안쪽에 상황실 부스가 솟아올랐다. 이연은 망설임 없이 부스 안으로 입장해 조작 패드를 눌렀다. 전투 구역을 이용하는 경우는 보통 변이종 전투 직전, 혹은 중간이므로 전투 구역 조작 교육은 매년 헌터 안전 교육 필수 과정에 들어갔다.
[보호벽을 가동합니다. 한번 발동하면 해제 전까지는 출입구가 봉쇄됩니다.]
이연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외부와 공간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변이종 전투 중도 아닌데 전투 구역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구역의 가장자리에서 두터운 벽이 올라왔다. 22 구역의 안은 금세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보호벽은 도시의 생활 소음도 차단했다. 주변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이연은 패드를 조작하기 전, 숨을 깊게 들이켰다. 지형 설정 버튼을 누르는 손은 유난스러워 보일 정도로 신중했다.
그리고.
[해당 기능은 현재 사용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
이연은 한껏 들어찬 공기를 내뱉지도 못하고 다시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해당 기능은 현재 사용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또렷하게 귓가에 내리꽂혔다. 늘씬한 몸이 나무토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느릿하게 들이켰다 내쉬는 숨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패드 테두리를 짚고 있던 손등에 핏줄이 섰다.
한참의 침묵 후, 하얀 손가락은 돌연 패드를 다시 조작했다.
[전투가 종료되어 보호벽을 해제합니다. 구역에 손상이 있을 경우 초능력관리청에 신고 바랍니다.]
건조한 음성 안내가 끝나기도 전에 이연은 몸을 돌려 사라졌다. 겨우 열린 출입구 틈으로 뒤늦게 빠져나가는 옷자락이 펄럭였다.
*
“어, 형. 좀 늦게 왔네?”
경쾌하게 열리는 문소리에 혜강이 모니터 사이로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이연이 씨익 웃으며 들고 있던 봉지를 들어 올렸다.
“간식 사 오느라. 너 찐빵 좋아하잖아.”
“형이 최고야.”
따끈따끈한 봉지째 넘겨주자 혜강이 희희낙락하며 받아 들었다. 부스럭대며 포장지를 푸는 소리까지 신이 나 있었다. 이연이 소파로 걸어가며 물었다.
“제산오는?”
“아직 안 왔어. 퇴근 전에는 오려나?”
혜강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원래부터 혜강은 도시의 정세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이 없긴 했다. 그가 능력을 써서 정보를 모으는 것은 차금이 관련되었을 때만이었다.
“혜강아, 요즘 바빠?”
“응?”
그러나 안 하는 거지, 못 하는 것이 아니다.
“혹시 지금 이태진 뭐 하고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있어?”
이연의 물음에 혜강이 멈칫하며 올려다보았다. 이연은 담담히 그를 마주했다.
산오가 사실을 알고도 이연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고의였다. 이연이 모르길 바란다는 의미였다. 아마 끼어들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태진의 재판에 이연을 세우고 싶어 하지 않던 것처럼.
그러나 이것만은 이연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이연의 얼굴이 얼마나 서늘했는지, 혜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닥, 하고 가볍게 키보드를 치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간결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아마 하루 이틀 정도 걸릴 거야. 초관청 보안은 다른 곳보다 빡빡하거든.”
“괜찮아. 기다릴게.”
키보드와 마우스가 딸깍거리는 소리를 배경 삼은 이연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습관처럼 목에 걸어 둔 고글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은 얼핏 보기엔 평소와 다름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순간순간 옅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닌 척하면서도 흘끗대며 살피던 혜강이 말했다.
“있잖아, 형.”
“응?”
“형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건데.”
뜬금없는 서두였다. 이연이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으나, 혜강은 이유를 설명해 주는 대신 하던 말을 이었다.
“난 형이 잘 지냈으면 좋겠어.”
“……갑자기 왜 그래? 너 어디 가? 너 없으면 우리 회사 망한다니까.”
이연은 농담처럼 대꾸했지만 혜강은 웃지 않았다. 평연한 목소리를 타고 진심이 흘렀다.
“그때 형을 만나길 잘했어. 나는 형이랑 같이 일해서 좋아. 지금 너무 재미있거든.”
혜강은 이연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에게서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그는 늘상 가볍고 아무 걱정 없는 것처럼 굴었다. 빈둥거리며 늘어져 있는 것을 좋아했고, 실없는 농담으로 시간을 때웠고, 자주 분위기에 휘말려 끌려다녔다.
신뢰와 호의, 도움. 혜강은 이연이 타인에게 조건 없이 그런 것을 건네는 모습을 아주 많이 봐 왔다. 이연은 어이없을 정도로 사람을 쉽게 믿고, 쉽게 따라나섰다. 어린아이 꼬여 내는 것도 이것보단 어려울 것이다. 혜강이 아무리 타박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덕분에 피해를 본 일도 제법 있었다.
그런 날에는 꼬질꼬질해진 얼굴을 한 이연이 한껏 투덜거리며 사무실로 돌아와 맥주나 한잔 하자고 말하곤 했다. 나란히 옥상 평상에 앉아 적공을 바라보며 짠, 하고 맥주캔을 부딪칠 때마다 이게 인생이라며 웃었다. 붉은빛을 받은 둥근 눈매는 가볍게 접히면 조금 짓궂은 느낌이 났다.
혜강은 그렇게 웃는 이연의 모습을 좋아했다. 웃음을 멈추고 실체가 없는 것을 응시하는 이연은 때때로 아주 쓸쓸한 느낌이 났기 때문에.
지금의 이연은 여차하면 어딘가로 훌쩍 떠나 버릴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위태로운 느낌이 있었다. 춥고 어두운 밤, 혜강의 앞에 나타났던 그때처럼 홀연히.
“형도 그랬으면 좋겠어.”
의무적으로 구는 모습을 도저히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