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왜요?”
“글쎄…….”
물컵을 만지작거리던 세미가 눈을 내리깔았다. 투명한 플라스틱 너머로 손가락이 비쳤다.
“그냥 다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세은과 같이 있으면 좋았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제 피붙이는 무엇보다 소중했다.
태진과 함께 있으면 재미있었다. 세미가 연구에 관심이 있는 것을 안 태진은 그녀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었다. 덕분에 새로운 영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꽤 재능이 있다는 사실도 새로 알게 되었다.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상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떳떳하지는 않을지라도, 즐거우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세은이 치료를 받는 걸 기다리면서, 아버지한테 물어봤어.”
순간순간 치솟았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했던 의문 하나.
‘세은이를 제산오한테 보낸 게, 의도한 거예요?’
‘이런, 세미야.’
‘진짜냐고요.’
‘…….’
태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뜻이 긍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자식은 이세은이 그놈을 상대하면 죽을 걸 알고 있었어.”
그는 거짓말로 세미를 달랠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고, 자신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하면 세미는 믿어 보려고 했을 것이다. 태진은 세은에게 초능력을 줬고, 세미에게는 연구 지식을 줬다. 어쩌면 은인이라고 말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태진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영리한 세미는 금세 깨달았다. 몰랐다고 말하면, 그것은 곧 태진의 계획이 틀렸다는 것을 시인하는 꼴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는 말을 내뱉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니까.
그 남자는 그 지경이 되어서도 자신이 무능했다는 말을, 상황을 면피하기 위한 거짓으로라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게 허상이었다.
이태진은 개새끼였고, 이세은도, ……자신도. 모두 악당일 뿐이었다. 그들이 한 것이라곤 사람을 해치는 일밖에 없었다. 그건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재미있는 일도 아니었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문득 지독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환하게 웃어 보이던 미래의 얼굴과 다친 세은의 얼굴이 눈꺼풀 안쪽에서 번갈아 스쳐 지나갔다.
‘당신 때문에 제 동생은 몇 주째 잠들어 있어요.’
언젠가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가 문득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기억하는 줄도 모르고 있던 말이었다.
‘나쁜 일이잖아요. 반성을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세미의 바람은 언제나 비슷했다. 사랑하는 애물단지 하나와 즐겁게 사는 것. 그 외에 다른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그래서 세은이 하고 싶은 대로 따랐다. 거기서 어떻게든 소소한 행복을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방식은 확실히 별로였다.
“도망치는 건 이제 지겨워.”
순간 이동은 도망치기에 너무 유용한 능력이었다. 물리적으로 막을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었으니까. 일종의 치트키다. 일단 자리를 옮기기만 하면 새로 시작할 수 있었다. 남은 자리에 있는 것을 모조리 외면할 수 있었다.
그 능력 덕분에 세미는 세은을 데리고 영원히 도망칠 수 있었다.
“그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영원히.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도망의 결말은 잡히는 것뿐이었다. 세미는 제 쌍둥이가 죽을 뻔한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세은 씨도 거기에 동의했어요?”
이연의 물음에 세미가 피식 웃었다.
“걔는 진짜 웃긴 애야.”
세미의 말을 들은 세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자수를 하자고?’
‘응.’
‘그래, 그럼.’
경쾌하게 대답하는 얼굴은 망설임도 없었다.
‘이제까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니까, 너도 한 번쯤은 봐줄게.’
그리고는 한쪽 눈을 찡긋이며 덧붙였다.
‘이태진 그 자식도 엿 한번 먹어야지.’
그리하여 두 사람은 미성년자 때 저질렀던 절도, 폭행 및 기물 파손 등의 기존 혐의에 초능력 팔찌 제작 및 유통 건, 호송 중 탈주와 아동 대상 불법 초능력 실험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도 고작 집행유예 3년과 사회봉사로 그친 것이다. 초능력 팔찌의 핵심인 기력 정제 보석 제작과는 관련이 전혀 없다는 점과 탈주 지시를 실제적으로 내린 것이 이태진이라는 점, 불법 초능력 실험이 미수로 끝났으며 오히려 피해 아동을 보호했다는 점과 그간의 행실을 반성하고 모든 것을 가감 없이 자백하여 사건 조사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 양형 사유가 되었다.
“뭐……. 두 분 다 자수하고 반성한다니 다행이긴 하네요. 봉사도…… 성실하게 하고 계신 것 같고.”
초능력자의 사회봉사 처벌은 보통 초능력관리청 감독하에 초능력을 협조받는 방식이다. 그래서 세미가 초능력 전담 수사대와 함께 움직이고 있던 것일 터였다. 이연의 말에 세미가 아직 백 시간도 넘게 남았다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덕분에 이태진 쪽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요. 종희 씨가 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는지 알겠네.”
몇 년간 태진과 함께 움직였던 세미와 세은의 증언이 있다면 재판에 훨씬 유리할 것이다. 이연의 증언은 필요가 없을 테지. 그녀들이 태진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이연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을 테니까. 잘됐네. 이연이 중얼거리며 물을 홀짝였다. 새로 주문한 접시도 어느새 다 비워져 있었다.
그런데 세미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지금이 제일 위험한데. 이태진 풀려나올지도 모르잖아.”
“네?”
둥그런 눈매가 의아하게 구겨졌다. 풀려나다니? 이제 와서 태진이 풀려나기엔 너무나 많은 증거가 산재해 있었다. 아무리 진씨 가문의 힘을 업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최희원의 자손이 아니라 최희원 할아버지가 와도 못 풀어 준다. 중범죄자를 순순히 놓아줄 정도로 초능력관리청이 만만하지는 않았다.
이연이 상황에 대해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세미의 얼굴은 조금 묘했다. 예상치 못한 것 같기도, 어쩌면 예상한 것 같기도 했다.
“너 소식 못 들었어? 제산오는 알 텐데.”
“……뭘요?”
가슴이 두근, 하고 크게 뛰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애인 이름이 이렇게 불길할 일인가. 이연이 애써 침착을 유지하기 위해 속으로 농담을 읊조리는 사이 세미의 말이 이어졌다.
“초전력 미뤄진 건 알고 있지?”
“아, 네. 공문 받았어요.”
“지형 설정 기능 때문이야.”
다음 순간, 생각지도 못한 진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태진이 지형 설정 기능 가지고 초관청한테 딜 걸고 있어. 고장 난 거 자기가 고쳐 주는 대신에 풀어 달라고.”
한순간에 너무 많은 정보가 뇌 속으로 한꺼번에 들이부어졌다. 이태진이 딜을, 아니, 지형 설정 기능이 고장 났다고? 고치면 풀어 줘? 이게 무슨 소리야? 이연이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게 고장이 났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고장이라기보다는…… 이태진이 미리 손을 써 둔 거긴 하지.”
세미는 이 말을 해도 괜찮은 건지 헷갈리는 듯 목소리가 조금 멈칫거렸지만, 다행히 말을 끊지는 않았다.
“이태진이 꼈던 초능력 팔찌 있잖아. 커다란 보석 주렁주렁 달려 있던 거 기억나? 그거 네 기력으로 만든 거잖아.”
당연히 기억난다. 손톱 크기 정도의 보석들로 만들었던 세미의 팔찌들과는 다르게 주먹만 한 보석들이 무식하게 달려 있어 팔찌보다는 토시에 가깝게 보였던 태진의 팔찌.
“생각해 봐. 너랑 10년째 못 만났는데, 그 인간이 어디서 그 많은 기력을 얻었겠어?”
……어?
“도시 전체의 지형 설정 기능에 나눠서 넣어 뒀던 걸 너 잡겠다고 싹싹 긁어 온 거야. 아마 널 잡았으면 네 기력을 다시 뽑아서 넣어 둘 생각이었겠지.”
그러나 이연은 태진에게 잡히지 않았고, 팔찌의 보석은 이연이 죄다 부숴 버렸다.
“그래서 지금 전투 구역이란 전투 구역은 죄다 지형 설정 기능 제한 걸려 있을걸. 너 최근에 전투 구역 쓴 적 없어? 이거 때문에 초전력도 미뤄지고 있는 거잖아. 지형 설정 기능을 못 쓰니까. 초관청 갈 때마다 난리던데.”
이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머릿속으로 몇몇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초전력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혜성의 말, 초전력 신청이 연기된다는 공문, 전투 구역 총책임자를 찾는 희수…….
힌트는 몇 번이고 있었다. 이연이 별생각 없이 넘겨 버렸을 뿐.
“하지만 이태진은 혼자서는 다시 그걸 만들 수가…….”
지형 설정 기능에 쓰인 기력은 이연의 것이다. 태진이 뽑아냈던 과거의 기력들은 이연이 직접 없앴다. 태진은 혼자서 절대로 그걸 복구하지 못한다.
“우리야 알지.”
“그런데 어떻게…….”
“근데 초관청 인간들은 모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