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202)화 (202/250)

#202

아닌 게 아니라, 혜강은 정말로 유능한 오퍼레이터였다. 그는 이연이 임무 할 때 필요한 지형은 물론이고 변이종 정보와 임무 할 때 필요한 소소한 전자 정보 및 조작까지 모두 보조했다. 거의 말만 하면 알아서 나오는 슈퍼 컴퓨터 수준이다. 실체화 능력이 아니라 실체화 할아버지가 와도 혜강은 필요한 인력이었다.

- 형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혜강이 통신 너머로 슬쩍 웃는 게 느껴졌다.

- 형 부담스러우라고 하는 말 아니야. 오퍼레이터 업무 안 해도 차금은 할 일이 많고. 난 유능한 공동 대표잖아?

이연 역시 피식 따라 웃었다.

“잘 알고 있네.”

- 그냥 뭐, 효율을 따지는 건 직장인으로서의 본능이야. 오퍼레이터 할 필요 없어지면 정보부장 같은 거 하려고.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돼.”

- 당연하지. 사람 둘밖에 없는 회사에 직책이 다섯 개 넘게 있는 거 보면 몰라?

“그랬어? 난 뭔데?”

- 공동 대표.

“제일 좋은 거 줬으니 만족할게.”

- 당연하지. 난 공동 대표에 인사부장, 영업부장, 총무부장, 경영부장이야.

“5인분밖에 안 하고 있어? 한 10인분 정도인 줄 알았는데.”

이연은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천천히 걸었다. 움직임에 따라 뿔다람쥐를 묶은 줄이 달랑거렸다.

- 게다가 형은 이제 산오 형이랑 사귀잖아. 산오 형 성격으로는 나 버리고 전부 둘이서만 하려고 들 텐데.

“에이, 설마 걔가 일하는 것까지…… 그럴까?”

- 안 그러면 좀 신기하긴 하겠다.

단호한 말에는 산오의 인성에 대한 깊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이연이 머쓱하게 뺨을 문지르는 사이 혜강의 목소리는 다시 가벼워졌다.

- 뭐……. 둘이 사귀는 거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긴 했어.

“뭐? 왜?”

- 왜냐니. 형도 산오 형 좋아하고, 산오 형도 형 좋아하잖아.

“알, 알았어? 어떻게?”

이연은 너무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제산오가 날 좋아하고 있었다고? 난 왜 몰랐던 건데? 이혜강은 어떻게 알았던 건데?

- 형들은 너무 티가 나. 본인들은 어떻게 모르는 건지도 모르겠다니까.

“야, 그 정도는…….”

- 아닐걸? 나 말고도 이런 말 하는 사람 있었을걸?

“…….”

그러지 말고 그냥 사귀라는 D.S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뇌리를 스쳐 지나가서, 이연은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헛기침을 했다. 큼. 일부러 꾸며 낸 근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타이밍 좋게 저 멀리서 낯익은 차량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연은 차에 박힌 로고를 확인했다. 동그란 로고 모양에 맞추어 ‘초능력 전담 수사대’라는 글자가 함께 붙어 있었다.

“어, 수사대 왔다.”

- 그래, 이따 사무실에서 봐.

통신이 끊어진 걸 확인한 이연이 고글을 끌어 내려 목에 걸었다. 이 근방에 만두 맛집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뿔다람쥐 넘기고 한번 가 볼까? 지금 장사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열려 있으면 혜강이 것도 사서……. 이연은 소소하게 딴생각을 하며 수사대 차량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여기요, 제가…….”

이연이 뿔다람쥐를 묶은 밧줄을 가볍게 들어 올리다 멈칫했다. 두 명이 탄 차량 안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작은 몸집에 단발머리. 새침한 이목구비. 잊어버릴 수가 없는 인상이었다.

태진과 함께 있던 쌍둥이 자매 중 하나, 이세미였다.

“어.”

맹한 신음을 흘린 이연과 차 안의 여자의 눈이 마주쳤다. 여자 역시 흠칫 놀라는 기색이 선팅된 창문 너머로 똑똑히 보였다. 아니, 갑자기 이세미 씨가 왜……. 놀라는 사이 차 문이 열렸다. 내린 것은 꽤 젊어 보이는 수사대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초능력 전담 수사대입니다. 정이연 헌터 맞습니까?”

“아, 네.”

이연은 그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제 초능력자 등록증을 내밀었다. 세미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로 이연 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알은척을 하지는 않아 이연 역시 가만히 있었다. 신분을 확인한 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단히 묶인 뿔다람쥐를 받아 들었다.

“처리가 끝나면 문자가 갈 겁니다.”

“네, 수고하세요.”

가볍게 인사하고 난 이연이 그대로 등을 돌리려는데, 그를 붙잡은 것은 뜻밖에도 세미였다.

“저기.”

차 밖에 있는 이연에게까지 닿을 정도로 분명한 목소리였다. 잠깐 멈칫하곤 고개를 돌린 이연의 눈이 세미와 마주쳤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 맞다는 것을 확인한 이연이 얼결에 대꾸했다.

“네?”

“……점심 먹었어?”

그대로 스쳐 지나가길 원하는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고개를 가로젓자 세미가 대원에게 꾸벅 인사했다.

“점심시간 끝나기 전까지는 돌아갈게요. 죄송합니다.”

제법 공손하고 얌전한 어조였다. D.S를 공격하던 세미의 첫인상을 생각하면 놀랄 정도로.

“뭐야, 아는 사이였어? 괜찮아. 늦지만 마.”

사람 좋게 웃은 대원은 뒷좌석에 있는 작은 철창에 뿔다람쥐를 넣고는 혼자서 훌쩍 운전석에 올라탔다. 부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차량은 떠나고 두 사람만 남자, 이연이 어색하게 입을 뗐다.

“……일단 갈까요? 점심 생각해 둔 곳 있어요?”

세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진씨 가문의 저택 지하였다. 당시 지하를 터트리고 D.S의 공방으로 이동한 산오는 이연을 거기 내려 준 후 태진은 물론이고 세미와 세은까지 줄줄이 엮어 데려갔다. 그 후로 이연이 들은 소식이라곤 희수가 지나가듯 말해 준 세 사람의 재판 예상 결과뿐이었다.

그리고 세미가 초능력 전담 수사대 차량에 타고 있던 것을 보니 희수의 말대로 그녀가 사회봉사 처분을 받은 건 맞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연은 초능력 팔찌로 피해를 본 사람이 꽤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세미가 조금 더 무거운 처분을 받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 부분은 이연이 입을 댈 게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그녀와 할 말은 크게 없었으나, 오랜만에 만났으니 안부 정도는 주고받아도 상관없었다. 가볍게 묻자 세미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냥 아무 데나 괜찮아.”

“그럼 제가 먹으려던 데로 가요. 마침 점심 먹고 사무실 돌아가려는 참이었거든요.”

이연이 안내한 가게는 조금 걸으면 금방 도착하는 곳이었다. 허름한 만두 가게 안 몇 개 없는 테이블 중 단 하나만 운 좋게 비어 있었다.

시끌시끌한 식당 구석에 앉아 메뉴 주문을 하고 나자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이연이었다.

“미래가 잘 지내는지 궁금한 거죠?”

“……알고 있었어?”

“이세미 씨가 저한테 갑자기 말 걸 일이 또 뭐가 있겠어요.”

그녀의 용건쯤은 진작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추리할 필요도 없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잘 지내요. 덕분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이세미 씨랑 있었던 일 때문에 요즘 엄마랑 같이 살거든요. 완전 얼굴 폈어요.”

“……그렇구나.”

“이세미 씨도 알겠지만, 미래가 언니들한테 인기 엄청 많거든요.”

뜬금없는 말에 세미가 대답 없이 눈만 깜빡였다. 이연이 덤덤하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완전 까먹기 전에 보러 가요. 안 그러면 쑥쑥 커서 이세미 씨는 금방 잊어버릴지도 몰라요.”

세미는 조금 머뭇대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와 대화하다 보면 아주 가끔, 세미에 대한 화제가 나오곤 했다. 정확한 상황을 모르니 이연도 해 줄 말이 없어 별 영양가 없이 대화가 끝날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이제 세미의 바쁜 일은 곧 끝날 것 같다는 말 정도는 해 줄 수 있다는 건 새로운 소득이었다.

“아, 미래 어머님이 이세미 씨를 보고 바로 공격하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

세미가 입을 다물었다. 미래의 모친이 누군지 그제야 떠오른 듯했다. 이연이 놀리듯 빙글거렸다.

“한 번 싸웠으니 아시죠? 그분 무서운 거. 그래도 말 잘하면 아예 못 만나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D.S 씨는 정말 어른이거든요.”

“……그것참 다행이네.”

세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마침 그때쯤 주문한 만두가 나와서, 그녀는 운 좋게 이 화제를 피할 수 있었다. 한동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집어 먹느라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나온 세 판의 접시가 모두 비워지자 이연이 새로 주문하며 입을 열었다. 용건이 끝났다고 이대로 밥 먹는 내내 묵언 수행하는 것처럼 굴 필요는 없었다.

“사회봉사 중이었죠? 봉사 활동 처분이라는 이야기는 진 국장님께 들었어요.”

가벼운 안부를 묻는 화제에 세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120시간 사회봉사야. 조사하면서 미성년자 때 행적이 같이 나왔거든.”

세미는 말을 하는 내내 차분한 얼굴이었다.

“이태진을 만난 것 자체가 사고 치고 경찰을 따돌리다 만난 거여서.”

세미가 초능력을 가졌다는 걸 안 순간, 세은은 자신 역시 초능력을 가지고 싶어 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니 음지로 돌았다. 그러나 하급 초능력자도 아닌 비초능력자가 초능력을 가지는 방법은 아무리 불법이 판치는 무법 지대일지라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세은은 점점 위험한 사람과 엮였고, 세미는 세은이 그대로 비명횡사하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정보를 노리고 불법적인 일에 뛰어드는 세은을 세미가 뒤늦게 타박하며 간신히 빼돌리는 일이 몇 번 반복되자 경찰과 조직 양쪽에서 쫓기는 처지가 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위태로운 도망 생활을 지속하던 무렵, 쌍둥이는 태진을 만났다.

‘내가 네게 초능력을 주마.’

이제껏 아무도 약속하지 못한 것을 태진은 쉽게도 내밀었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세은은 단번에 그 손을 잡았다. 세미 역시 얼결에 따라가게 되었고.

곧 두 사람은 어떤 제약도 없이 태진과 위장 가족 놀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태진 씨가 두 사람의 과거를 지웠는데도 조사 과정에서 그게 다시 밝혀졌다고요?”

모르긴 몰라도 태진이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의문에 세미가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자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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