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99)화 (199/250)

#199

씻고 나오자 부엌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수건을 목에 건 이연은 홀린 듯 그쪽으로 다가갔다.

엄살이 아니라 진짜로 배가 엄청나게 고팠다. 무려 공복 상태로 12시간이나 지났으니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을 지경이었다. 그런 참에 슬슬 풍기는 고소한 냄새는 이연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뭐야? 간장밥?”

“머리털에서 물 떨어트리면 죽는다.”

살벌한 경고에 쫄아 버린 이연이 슬그머니 수건 끝으로 머리카락을 꾹꾹 눌렀다.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앗……. 이연은 머쓱하게 배를 쓰다듬으며 반 발자국 떨어졌다.

그런 기척을 느낀 산오가 계란 프라이를 뒤집으며 흘끗 옆을 돌아보다가, 눈가를 미세하게 찌푸렸다.

“그건 뭐지?”

“응?”

시선이 닿은 곳은 반팔 티 아래에 드러난 팔뚝이었다. 하얀 피부에 새빨간 열상이 나 있었다.

“아, 이거……. 아까 두무기하고 전투하다가 실수로.”

“실수로 안 죽어서 참 다행이야.”

산오는 그렇게 빈정거리면서 프라이팬을 들어 밥그릇에 계란 프라이를 각각 세 개씩 올리고는 싱크대에 프라이팬을 넣었다. 자연스럽게 물을 틀어 손까지 씻은 후 몸을 돌리자, 언제 부른 건지 바닥에서 튀어나온 철 가닥이 그들의 뒤에서 구급상자를 달랑이고 있었다. 하나는 구급상자를, 나머지 하나는 이연의 손목을 쥐고 들어 올린 커다란 손엔 차가운 물기가 배어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치료해 주려는 행동에 내적 친밀감이 증폭되었다. 지금 물어보면 답해 줄 것 같은데.

“나 사실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

슬쩍 던진 물음에 산오가 말해 보라는 듯 침묵을 지켰다. 이연이 냉큼 입을 열었다.

“두무기 말이야, 왜 잡으러 간 거야? 원래 그런 장기 임무 안 한다며.”

“완수하는 데 한나절도 안 걸렸으면 보통 단기 임무라고 한다.”

“아니, 그건…… 내가 갔으니까 그런 거지.”

말하다 보니 어째 자기 자랑이 된 것 같아 좀 머쓱해졌지만, 사실이긴 했으므로 이연은 꿋꿋하게 말을 끝맺었다. 산오는 조금 달아오르는 이연의 귓가를 흘깃 보았다. 변화무쌍한 하얀 피부는 그에게 퍽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였다.

“어디서 본 가족 구성이라.”

“어? 어디서…….”

“그리고 멍청한 소릴 하는 것도 비슷해서.”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을 남의 사정이었다. 가지 말라는 곳에 굳이 가서 위험에 처한 걸 어쩌란 말인가. 죽은 것도 아니고 고작 물에 빠졌다 나온 수준이니 결과적으로 별문제도 없었다.

전부 나 때문이라고 중얼거리는 얼굴이 그렇게 선명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냥 다른 헌터들이 맡도록 내버려 뒀을 것이다.

“그래도 그쪽은 다치진 않았던데.”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그게 흐려지는 일은 없었다.

“넌 왜 틈만 나면 다치는지 모르겠군.”

“……내가 뭘 언제 그렇게 많이 다쳤다고…….”

이연이 열없이 투덜거렸으나, 산오는 가차 없었다. 냉담한 목소리가 줄줄 흘러나왔다.

“김철재한테 칼 맞고.”

“아니, 그건.”

“초전력에선 두 눈 뜨고 배신당하고.”

“……그.”

“멀쩡히 걷는 것도 못 해서 산에서 굴러떨어지고 발목도 삐고. 꼬맹이 찾겠다고 이태진 실험대에 제 발로 다시 올라가고. 다발신 안으로 기어 들어가서 악몽에 갇히고. 기억 안 나면 더 해 줘?”

그렇게 나열하니 할 말이 없었다. 없긴 한데 그건 그때마다 그럴듯한 이유가……. 입은 다물었으나 여전한 반항적인 눈빛을 꿰뚫어 본 산오가 결정타를 날렸다.

“널 보면 능력의 세기가 다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야, 한판 떠?”

“승단하든가.”

울컥한 이연의 도발을 가볍게 무시한 산오가 구급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뒤적여 약과 거즈를 찾아내는 손길이 퍽 자연스러웠다.

산오는 심드렁하게 말하면서도 상처에 물이 닿지 않게 이연이 쥐고 있던 수건에 손을 슥 닦았다. 소독약을 바르는 손길은 단번에 스쳐 가야 덜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거침없었다. 이연은 뜨끔대는 팔뚝의 통증을 가만히 참으며, 제 상처에 집중한 산오의 내리깐 속눈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승단했으면 좋겠어?”

산오가 이런 식의 말을 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이연이 제 정체를 고백하기 전에도 은근히 그런 기색을 내비쳤고, 고백한 후에는 엄청나게 노골적으로 종용했다. 그때마다 이연은 말을 돌리곤 했지만…….

“오히려 왜 안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

산오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이연이 난감하게 뺨을 긁적였다.

“그거야, 거기엔 너도 엮여 있고, 이태진도 엮여 있고, 지형 설정 기능도 엮여 있잖아. 숨기고 있는 게 훨씬 낫지.”

승단하기 위해서는 이전 심사를 거짓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했고,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청문회가 열릴 것이다. 거기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이태진이 한 일, 제산오와의 연결 고리, 정이연이 과거에 했던 행동들. 그것들이 있어야 이연이 능력을 숨긴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다.

새로운 5단이 등장하면, 심지어 그게 원래 2단 헌터였는데 재심사를 받아 5단으로 바뀐 거라면 사람들의 이목 또한 집중될 터였다. 청문회 내용 역시 대중에게 알음알음 알려지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지형 설정 기능은 완전히 폐기였다. 불법 초능력 실험을 그렇게 규탄하던 정부에서 그 실험의 산물을 알고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산오가 과거 실험체였다는 사실이 추문이 되리라는 것 역시 너무 뻔했다. 대중은 선망하는 존재가 완벽하지 않으면 끌어내리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었고, 산오는 너무 오랜 기간 무결한 영웅으로 세워져 있었다.

“정이연.”

“응?”

“넌 아직도 날 등신으로 보는군.”

산오가 고개를 들었다. 서늘한 눈매가 이연을 직시했다. 마치 발가벗겨 내장까지 파헤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연은 그런 그를 빤히 마주 보다가, 문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가 5단 아니면 싫어?”

산오의 눈썹이 느리게 일그러졌다. 짜증이 나 죽겠다는 얼굴로 산오가 으르렁댔다.

“왜 그따위로 말해. 죽고 싶어?”

“농담이었어. 야, 왜 그렇게 화를 내냐.”

“한 번만 더 개소리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심통 난 것 같은 어조는 단번에 몸을 돌려 가 버릴 것같이 굴었지만, 이연의 팔을 치료해 주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곧 상처 부위를 하얀 거즈가 꼼꼼하게 덮었다. 화끈거리던 통증이 점점 잦아들었다.

“고마워.”

이연이 제 팔을 이리저리 살피는 동안, 산오는 조금 식은 밥 두 그릇을 식탁에 올렸다. 뚱한 눈빛은 가라앉지 않은 채였다.

“넌 잡생각이 너무 많아.”

“어, 어?”

“머리통에서 뇌를 꺼내서 세척한 다음에 나만 넣으면 소원이 없겠군.”

“야, 그건 좀 잔인한…….”

“밥이나 처먹어.”

산오는 더 이상 말할 게 없다는 듯 숟가락을 들었다. 자식, 성질은. 이연은 투덜거리면서도 따라 수저를 들었다. 마침 꼬르륵대는 배가 자기주장을 한 탓이었다.

제산오가 한 밥이 언제는 안 그랬냐마는, 저녁은 맛있었다. 사실 간장밥은 산오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메뉴였지만—언젠가 여기에 영양이 제대로 들어 있긴 한 거냐고 물은 적 있다.— 나트륨의 노예인 이연은 좋아했다. 만들기 간편하기도 하고……. 야무지게 밥을 퍼먹는 이연을 보는 산오의 표정이 다소 못마땅하게 변했으나, 그는 용케 말을 참았다.

가만 보면 제산오 이 녀석은 요리를 따로 배웠을 것 같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잘한단 말이야. 특히 간장과 참기름, 깨의 비율이 환상적이었다. 윤기 흐르는 프라이의 맛은 말할 것도 없었고……. 만족스러운 식사 후 소화를 위해 시답잖은 대화를 잠깐 한 두 사람은 곧 안방에 들어가 나란히 누웠다.

푹신한 매트리스에 등을 누이자마자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진작에 바닥난 체력이 포만감과 함께 피로로 몰려왔다. 이연이 막 기분 좋게 눈을 감으려는데, 불쑥 멱살이 잡혔다.

“……왜애.”

이연의 목소리는 그새 한껏 늘어졌다. 티셔츠를 쥔 손길은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무시하고 잠들 정도로 장난 같지도 않았다. 범인은 말할 것도 없이 옆에 있는 산오였다.

“내외하지 마라.”

“어엉?”

“애인이잖아.”

……내가 지금 졸려서 쟤가 뭔 말 하는 건지 못 알아듣고 있는 건가? 이연이 미간을 좁히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몸이 휙 당겨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어쩌면 평소보다 더 쉽게— 딸려 온 이연의 몸이 산오와 바짝 붙었다. 가볍게 이연을 품에 안은 산오가 그제야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천 너머로 느껴지는 탄탄한 가슴이 이연의 뺨에 닿았다.

“……이건 유, 유난 아니냐? 우리 사귄 지 하루도 안 됐는데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스킨십을…….”

“유난은 무슨.”

더듬거리는 말을 자르며 산오가 이연을 감싼 팔을 조금 움직였다. 등을 느릿하게 쓸어내린 팔이 허리를 단단히 감았다. 살벌한 중얼거림이 정수리에 닿았다.

“봐주는 거지.”

“…….”

뭔지는 몰라도 이 이상 대화를 계속하면 질 것 같았다. 이연은 애써 눈을 감았다. 다행히 체력이 다 한 몸은 빠르게 의식을 놓을 수 있었다. 누구 것인지 모를 심장이 맥박치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이연을 도닥였다.

따뜻한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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