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정이연 씨가 아직도 산오 님한테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종희의 물음에 종찬은 뚱한 얼굴로 인상만 죽죽 긁었다. 불만에 가득 찬 입술이 우물거렸다.
“……그건 이제 됐어.”
두 사람은 누구보다—어쩌면 제산오 본인보다 더— 산오를 면밀히 지켜봐 온 사람이었다. 그가 이연을 대하는 태도가 특별하다는 건 단숨에 눈치챘다.
이연의 옆에 있을 때, 산오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칼에 베이기라도 할 것처럼 날카롭지도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당장에 죽여 버릴 것처럼 살벌하지도, 금방이라도 초능력이 폭발할 것처럼 예민하지도 않았다. 인류의 존망을 고민하는 듯한 심각한 얼굴로 요리책을 들여다보고, 그동안은 손도 대지 않던 일회용 커피 잔을 들고 나타나고, 시간이 늦으면 잠을 자러 집에 돌아갔다.
그 모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비서는 아무도 없었다.
“그건 이제 상관없지만, 그 자식이.”
종찬이 주먹을 꽉 쥐고 울컥 소리쳤다.
“그 자식이 감히 우리 산오 님을 찼잖아!”
“아.”
“누나는 화도 안 나? 우리 산오 님이 뭐가 어때서!”
“산오 님이 빠지는 게 없으시긴 하지.”
“내 말이!”
종희는 조금 전 카페에서의 이연을 똑똑히 기억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밀어 내던 목소리와, 산오가 위험하다고 생각되자 바로 창백해지던 인상. 그리고 단호한 얼굴로 종희를 붙잡은 눈동자까지.
그건 눈에 잡힐 정도로 선명한 감정이었다.
“김종찬.”
“어?”
“눈치 없는 거 티 내지 말고 연애 좀 해.”
“뭐? 갑자기 뭔 소리야?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그때였다.
푸르르……. 고요하던 호수 한가운데에 부글거리는 물거품이 일었다. 호수 전체를 울리는 것 같은 진동이 함께 뒤따랐다. 주절주절 대화하면서도 호숫가에 붙박인 듯 서서 수면만 주시하던 종찬과 종희가 동시에 한 걸음 물러섰다.
지축이 얕게 흔들리는 모양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수면 아래에서 거대한 힘이 난리를 치고 있는 것 같았다. 설마 두무기가 올라오고 있는 건가? 두 사람이 파동의 중심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노상 차분하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어렸다. 쿵, 쿠구궁……. 끊임없이 들리던 불길한 소리가 점점 커지던 어느 순간.
퍼엉!
폭발 직전처럼 미친 듯이 울렁대던 수면이 이내 거대한 소리와 함께 터졌다.
분수처럼 공중으로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난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사이사이로 무지개가 떴다.
“야, 종이비행기! 비행기 젖었어!”
그 중앙에서 새하얀 물체가 수면을 뚫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비명 같은 목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종이비행기를 호수 안에서 운전해 놓고 안 젖기를 바란 건가?”
“아니, 그렇게 바로 터트려 버릴 거라곤 생각 못 했지! 마음의 준비는 하게 해 줘야 할 거 아냐!”
“그건 순발력 문제지.”
“어우, 진짜…… 어? 어? 야, 이거 진짜 무너져!”
비명과 함께 종이비행기의 날개 한쪽이 축 늘어졌다. 덕분에 그 위치에 손을 짚고 있던 이연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막 떨어지려던 팔을 산오가 잡아채 끌어당겼다. 동시에 종찬과 종희가 있던 부근의 흙더미가 솟아올라 길고 가느다란 줄 모양으로 변해 산오에게로 향했다. 여러 줄의 끈 모양으로 다듬어진 흙은 안전 로프처럼 산오의 몸을 감싸 천천히 땅으로 이동했다. 얼결에 산오의 몸통을 고목나무처럼 끌어안은 매미 이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은 곧 종찬과 종희의 앞에 도달했다. 산오가 허공을 걷는 것처럼 사뿐하게 발을 디디자, 이연 역시 슬금슬금 다리를 내려 땅을 밟았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의상 묻는 종희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이연이었다. 빙긋 웃는 얼굴이 산뜻하게 말했다.
“처치했어요.”
2급 변이종 두무기 처치 임무를 수락하고 완료하는 데에 고작 8시간.
말할 것도 없는 신기록이었다.
“아, 맞다.”
젖은 머리를 종희가 건네준 수건으로 털어 닦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날이 쌀쌀해서 그런지 금세 몸이 서늘하게 식었다. 부르르 떤 이연이 벗어 놓고 갔던 옷을 주섬주섬 집어 들었다.
“이건 너 혼자 한 걸로 해.”
다발신 때야 어찌어찌 운이었다고 쳐도, 두무기까지 같이 잡았다는 게 알려지면 누가 봐도 의심스러웠다. 포악하기로 소문난 2급 변이종은 하급 헌터를 붕어 똥처럼 달고도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게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이연의 말에는 관심이 없는지, 산오는 딴소리만 했다.
“지금 뭐 하려는 거지?”
“뭐 하긴? 옷 갈아입어야지. 수영복 입고 집에 갈 순 없잖아.”
산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야외에서?”
“아니, 우리밖에 없는데 뭔 야외야…….”
“파렴치한 소리만 골라서 지껄이는군.”
왜 내가 엄청난 변태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거지?
“너도 새 옷 줄까? 젖은 옷 입고 가면 무겁고 찝찝하잖아.”
“가서 씻어.”
“아니, 당연히 씻긴 씻지. 근데 오래 걸리니까…….”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산오가 다짜고짜 이연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어? 이연이 얼빠진 소리와 함께 종이인형처럼 딸려 갔다. 이연이 뭐라 항의하기 위해 막 입을 여는데, 타이밍 좋게 산오가 눈짓했다.
“저거나 없애.”
“아.”
산오가 시선을 둔 곳은 호수를 차단한 벽과 천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상으로는 새벽인데 이곳만 대낮처럼 환했다. 이연이 반쯤 매달린 상태에서 능력을 해제했다. 하늘을 빼곡히 덮었던 빛나는 막이 서서히 하얀 모래로 흩어졌다. 산오 역시 땅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중인지 약한 지진 소리와 함께 호수 안으로 벽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호수는 금세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흐리던 하늘은 언제 갰는지 환한 달과 별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종희와 종찬이 눈치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산오는 그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이연을 바투 끌어당겼다. 곧 그가 밟고 있던 땅이 쑥 꺼졌다.
수건으로 대충 닦긴 했지만 몸은 여전히 축축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부둥키니 그럭저럭 따뜻했다. 뭐, 땅속으로 이동하니 다른 사람들이 볼 일도 없고. 그래서 이연은 들고 있던 옷가지를 입으려고 시도하는 대신 산오와 닿은 몸을 밀착했다.
뭐라 하면 추워서 그렇다고 해야지. 변명부터 생각하며 눈치를 살피는데 산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에 용기를 얻은 이연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야, 있잖아.”
산오는 대답하는 대신 이연을 바라보았다. 빤한 눈길에 좀 쑥스러워진 이연이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우리 그럼, 지금 사, 사귀는 거지?”
낯간지러운 단어를 입으로 말하려니 절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확인을 받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까 제산오는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런 난리를 피워 놓고 나중에 갑자기 나는 그저 은인이라고 생각한 거다, 감사의 키스였다, 뭐 이런 말을 지껄이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연이 비장하게 다짐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산오는 서서히 목부터 빨개지는 이연을 계속 응시하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숙였다. 자연스럽게 각도를 튼 얼굴이 내려앉고, 입술 사이를 헤친 혀가 연한 점막을 파고들었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피부가 슬쩍슬쩍 닿았다.
짧은 입맞춤 후 새처럼 쪼는 뽀뽀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이연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고서야 살짝 떨어진 산오가 코앞에서 속삭였다.
“네 옆자리는 내 거야.”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직통으로 들리는 감각이 이상했다. 따뜻한 숨결이 입가에 닿았다. 이연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바짝 굳었다.
“허튼짓하면 재미없어.”
어딘지 위험하기도 하고 장난스럽게도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매끈하고 잘생긴 얼굴이 다시 다가왔다. 얇은 피부가 비벼졌다. 조금 당황한 이연이 입술이 살짝 떨어진 사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야, 너……. 키스 엄청 좋아하네.”
산오가 가소롭다는 눈길로 속삭였다.
“싫으면 그딴 식으로 쳐다보지 말든가.”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어?”
반사적으로 대꾸하던 이연이 멈칫한 틈을 탄 산오가 이번에야말로 입술을 빈틈없이 겹쳤다. 이연은 붉게 변한 뺨을 애써 무시하며 벌어진 입술 새로 파고드는 혀를 마주 댔다.
집엔 금세 도착했다. 아니, 금세가 맞긴 한가?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왜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에서 사람들이 툭하면 키스하는지 드디어 알았다. 좋아하는 상대와 혓바닥을 얽는 감각은 미치도록 좋았다.
현관문 앞에 선 이연이 뒤에 굳건하게 서 있는 산오를 흘끔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열렬히 키스한 흔적이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산오가 싸늘하게 말했다.
“뭐.”
한 음절짜리 대답에 아주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필요하다면 무력을 불사하더라도 그 집에 들어가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완전 싸가지 없는 말투인데 저게 귀엽게 느껴지는 날이 오다니. 이연은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눌러 참았다.
“……오늘 저녁 식사 당번은 너인 거 알지?”
삐리릭.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 완전 배고파. 저녁 굶었단 말이야. 맛있는 거 해 줘.”
“밥도 안 처먹고 싸돌아다녔단 말이지.”
“야, 너도 안 먹었잖아.”
“난 다 컸어.”
“……나도 다 컸거든?”
“고작 그게.”
“고작이라니!”
투닥대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현관문은 언제 열렸냐는 듯 부드럽게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