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왼쪽.”
“나도야.”
산오는 대답 없이 눈썹 한쪽만 치켜올렸다. 그러나 이연은 이미 산오가 눈썹을 들어 올리는지 날려 보내는지 보지도 않고 제 생각에 빠져들었다.
두무기는 사냥감을 먹어 치울 때 물과 함께 흡입한다. 잡힌 사냥감은 물살에 휩쓸리다 내부에 안착한다. 목구멍을 지난 두무기의 몸통 초입부, 이연이 가장 처음 떨어졌던 광장 같은 곳에.
이연은 뒤를 돌아 왔던 길을 되짚었다. 성큼성큼 걷던 걸음은 점점 빨라져 거의 뛰는 것처럼 변했다. 발밑에서 뼈들이 밟히며 달그락대는 소리가 났다. 그는 곧 물이 얕게 찰랑이는 곳에 다시 도착했다.
“여기야.”
멍한 중얼거림에 뒤에서 저벅대며 걸어오던 산오가 이연이 보는 풍경을 따라 응시했다. 이연이 손전등을 비추고 있는데도 안개 같은 어둠이 짙게 깔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연이 손을 들어 올렸다.
손전등을 만들어 냈을 때는 반응이 없던 것을 보면 두무기의 피부에 대고 초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공중에 뜬 새하얀 모래가 빛을 뿜어내며 널찍한 공간 구석구석을 드러냈다.
꽤 큰 공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어둠에 가려져 있던 부분까지 드러나니 생각보다 더 컸다. 통로의 두세 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층고와 널찍한 너비는 웅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얕게 찰랑거리는 물 아래에는 역시 뼛조각들이 가득했고, 그 사이로—아마 이연이나 산오와 함께 들어온 듯한— 조그만 물고기 몇 마리가 간신히 헤엄치는 것도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목구멍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구멍이 두 개 있었다.
“다시 나가자고?”
산오가 이연의 옆에 섰다. 산오와 이연이 들어왔던 것은 왼쪽 머리였으니, 내부에서는 오른쪽 구멍이었다.
“두무기의 주둥이는 맞춰 놓으면 아귀가 없다고 느껴질 만큼 정교해. 자의로 여는 게 아니라면 외부의 힘으로 열기는 쉽지 않다.”
“……그걸 열어 봤어?”
“밖에서.”
별걸 다 했다. 아무래도 산오는 이연처럼 순순히 촉수들에게 잡혀 들어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애초에 지금 나갈 생각도 아니었다. 이연은 고개를 저었다.
“거기 말고.”
“그럼.”
“안 가 본 데를 가야지.”
산오의 시선이 오른쪽 구멍에서 왼쪽 구멍으로 향했다. 머리가 두 개나 되는데 굳이 하나만 써서 사냥감을 포획하는 변이종.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알 수 없는 오른쪽 머리통의 내부.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가자.”
이연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하얀 모래가 다시 모여들었다. 그것이 만들어 낸 것은 새하얗고 커다란 종이비행기였다. 언젠가 그렸던 삐뚤삐뚤하고 추상적인 모양이 아닌 아주 예쁘고 반듯한 형태였다.
“멀쩡한 것도 만들 줄 알았군.”
“야, 그림에 맞춰서 만드는 게 더 어려운 거거든?”
“그딴 그림이었으니 더 어려웠겠지.”
투닥대며 올라탄 두 사람을 태운 종이비행기는 가볍게 날아올랐다. 경쾌한 움직임을 따라 바람이 불어 앞머리가 날렸다.
“경계가 심할 수도 있다.”
오른쪽 머리가 보주가 있는 공간이 맞다면, 다른 곳을 걸어 다니는 것보다 훨씬 더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다. 어쩌면 진입하자마자 공격이 날아올 수도 있었다. 산오의 경고에 이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밖에서 촉수 찢은 거 너 아냐? 여기서도 똑같이 하면 되잖아.”
대화하는 사이 종이비행기가 왼쪽 목구멍으로 진입했다. 거대한 변이종의 머리 안은 그들이 걸었던 통로만큼 널찍해 종이비행기는 벽에 닿지 않고 그 안을 빠르게 날아갈 수 있었다.
“여기선 못 해.”
“어? 왜?”
제산오가 뭘 못 한다는 말을 제 입으로 내뱉는 건 처음 들었다. 의아한 되물음에 산오는 제힘을 가늠하려는 것처럼 주먹만 가볍게 쥐었다 폈다.
“밖과 달리 여긴 내 능력이 한정돼.”
“응?”
산오는 보통 제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의 힘을 끌어다 쓰는 사람이었다. 두무기의 안에 들어오기 전, 호수 안에서 산오가 촉수들과 싸웠던 곳이 죄다 난장판이 됐던 건 그런 이유였다. 호수 바닥에 묻혀 있는 온갖 광석을 자유자재로 조종했기 때문에.
그가 사는 곳이 지구인 이상 거의 무적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산오에게도 몇 가지 약점은 존재했다. 가령, 흙이 없는 곳. 성층권 바깥이나 망망대해 한가운데 같은, 뭐 그런 장소.
“여긴 아무것도 없지 않나.”
두무기의 안은 동굴처럼 생겼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원료는 지구의 소재가 아니었다. 광물도, 광석도, 아무것도.
이건 변이종의 피부였다. 산오의 힘이 미치지 않는.
여기서 산오가 다룰 수 있는 건 오로지 제 몸뿐이었다.
그제야 이연은 산오가 왜 무작정 모든 것을 부수지 않고 두 시간이나 넘게 머물러 있었는지 깨달았다.
보주가 살아 있는 한 두무기의 피부는 어마어마한 경도를 자랑한다. 그나마 외부보다는 내부가 더 약한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웬만한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두무기의 내부에 널려 있는 뼛조각을 운용해 봤자 시간 벌기도 안 된다는 건 두말하기 입 아팠다.
산오의 능력에는 신체 광물 동기화도 있었으므로 그 능력을 이용하면 어느 정도의 공격이 가능했으나, 두무기의 벽을 부술 만한 절대적인 힘은 부족했다. 불도저를 압수당하고 삽 하나만 남아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삽이 약한 게 아니라 불도저가 너무 강한 거였다.
제 한 몸 건사하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끝없이 불어나는 두무기의 내부 촉수들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일부러 안으로 들어온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나가서 오랜 시간이 걸려도 겉에서부터 부숴 버릴지, 아니면 안에서 보주를 부술 방법을 어떻게든 찾을지에 대해서.
투둑, 툭.
그때,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앞을 바라보았다.
침입자를 감지한 촉수들이 내벽을 가르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잡아 뜯지 않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한 수였다. 제각기 꿈틀대는 촉수의 움직임은 각각 다른 생명체 같아서 유독 위협적으로 보였다.
“난 또 뭐라고.”
가벼운 목소리에 산오가 이연을 바라보았다. 이연은 뜻밖에도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연은 초능력을 사용해 상대를 죽이기 위한 분야에 특화되어 있지 않았다. 본인의 성격부터도 그랬고, 능력 특성과도 거리가 있었다. 이 부분은 객관적으로 봐도 산오가 이연보다 단연코 뛰어날 것이다. 어쩌면 다룰 것은 제 몸밖에 없는 지금조차도 산오가 더 잘할 수도 있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안 되는 것을 언제까지고 징징거릴 시간은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제산오, 너 지형 설정 기능 제대로 써 본 적 없지.”
능력을 꼭 직접 공격에만 써야 유용한 것은 아니다.
“자, 간이 지형 설정 기능이야.”
이연의 등 뒤에서 후광처럼 하얀 알갱이가 퍼지고 있었다.
“원하는 걸로 골라잡아.”
곧 새하얀 모래 더미는 두무기의 머리 전체를 뒤덮었다.
*
“누나, 역시 다른 지원 헌터를 수배하는 게…….”
이연이 들어간 지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최상급 변이종이라 처치 시간이 이보다 한참 걸릴 걸 알면서도 괜히 초조하게 호수의 수면만 보게 되었다. 수중 전투는 외부인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종찬을 종희가 진정시켰다.
“기다려. 괜히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하지만 그 칠렐레팔렐레한 인간을 어떻게 믿고!”
종찬이 달려들어 버럭 소리치자 종희는 시끄럽다는 듯 종찬의 얼굴을 밀어 냈다.
“이런 능력을 펼칠 수 있는데도 산오 님을 돕지 못했다면, 어떤 지원 헌터가 와도 못 도와.”
호수는 이연과 산오가 펼쳐 놓고 간 탄탄한 방벽으로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환하게 불까지 켜 준 덕에 자정이 넘은 시간임에도 호수 수면의 윤슬을 전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주변이 밝았다.
“그건…….”
종찬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누나의 말이 맞았다. 예상은 했어도 실제로 보니 압도적일 정도의 능력이었다.
이연의 정체가 뭐고,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정확히 몰랐다. 산오가 전혀 언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록 역시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산오가 누군가를 찾아 헤매던 것을 몇 년 동안 충실히 도왔고, 그게 정이연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때 얻었던 정보를 바탕으로 대충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 정도는 눈치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가 하급 헌터라는 기록은 완전히 사기였다. 종찬과 종희는 이연의 초능력 심사 영상과 초전력 영상을 눈알 빠져라 분석한 결과, 구현력이 너무 정교해서 조악한 그림마저도 완벽하게 구현하는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허접한 그림 실력으로 위장할 생각을 하다니, 실로 또라이 같은 발상이었다.
이연의 본 능력은 산오를 수행하며 보는 눈이 높아진 두 사람에게도 범상치 않았다. 믿을 수 없게도 산오와 대등해 보이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