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이연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를 입혔다. 재앙처럼 말려든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절대로 마모되지 않는 돌덩이처럼 심장 아래에 가라앉아 있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영원히 혼자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인생이었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이연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산오의 뺨에 손을 댔다. 산오는 손길을 피하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제 말을 증명하듯 그를 마주 볼 뿐이었다. 이연이 입을 열었다. 어느새 잠긴 목소리는 공기가 많이 섞여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네가 절대로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억지라는 걸 알았다. 확신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이연이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나마 인정한 이유는 그가 강하기 때문이었다. 죽지 않을 것 같아서 안심했기 때문이었다.
그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네가 옆에 붙어 있으면 안 죽어.”
“협박이야?”
“사실이다.”
허황된 약속이 너무 근사하게 들려서, 이연은 눈동자가 그렁그렁한 와중에 웃어 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그 후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연의 부모님이 죽은 계기, 이름을 바꾼 일, 그 후 초호시에 이사 와 했던 행동들까지. 이연은 말하는 내내 중간중간 멈칫하고, 말을 고르려고 노력하느라 아주 긴 시간을 소비했다.
내내 속에 담아 두고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 자체로 이연에게 커다란 의미였다. 실체 없이 부풀던 공포는 막상 마주해 보니 주먹만큼 작았다. 그것도 공포는 공포라서 여전히 우왕좌왕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이연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럼 조금 괜찮아졌다.
금방이라도 한심해하며 혀를 찰 것 같았던 산오는 의외로 중간에 이연의 말을 끊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연은 무사히 이야기를 끝낼 수 있었다.
“능력 낭비도 그만하면 재능이야.”
물론 평가는 가차 없었다.
“야, 그래도 나중에 정신 차렸잖아…….”
머쓱하게 반박하는 이연의 대답은 들은 체 만 체 한 산오가 물었다.
“내 분신도 만든 적 있나?”
이 질문은 수많은 예상 답안 중에 비슷한 것도 없었다. 그에 당황한 이연은 얼결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 아니?”
“…….”
산오의 눈빛이 스산해지는 것과 동시에 뭔가 답변을 잘못했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산오가 냉랭하게 중얼거렸다.
“좋아한다고 해 놓고.”
“아니, 그건…….”
“분신을 만들어서 옆에 낄 정도는 아니었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
넌 죽은 것도 아니고 우린 하루밖에 안 떨어져 있었잖아……. 그러나 산오의 얼굴을 보니 그런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변명은 집어치워.”
“……지금 만들까? 하나 만들어?”
“꺼져라.”
산오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아니, 이게 아닌데. 이연이 당황하며 그를 쫓았다. 분명히 진지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이연은 그에게 다음에 떨어지게 되면 꼭 분신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했다가 아예 떨어지겠다는 선언을 하냐는 싸늘한 구박과 그딴 걸로 사람을 대체하지 말라는 타박을 연이어 받았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계속하면 무조건 지는 싸움인데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이연이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 뚱한 목소리가 던져졌다.
“네가 죽인 게 아니다.”
“어, 어?”
“네 잘못이 아니라고.”
‘괜찮아요. 몰랐잖아요. D.S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이연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은 언젠가 이연이 D.S에게 했던 말이었다. 거기에 산오도 함께 있었다는 것이 뒤늦게 기억났다.
하지만 몇 주도 지난 일인데.
어느새 걸음을 멈춘 산오는 뒤따라오는 이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평소처럼 무뚝뚝하고 심드렁한 얼굴. 매끈한 무표정.
“넌 그 빌어먹을 연구소에서 사람 셋을 구했어. 네 부모님, 그리고 나.”
더없이 익숙한 표정인데 이상할 정도로 다정하게 느껴졌다.
“네가 한 건 그게 다야.”
그건 산오의 수많은 예상외 행동 중에 정말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이연의 눈가가 미처 참을 틈도 없이 달아올랐다. 울컥이며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 아래에 뜨거운 것이 맺혔다.
“……진짜야?”
어디서든 답을 구하고 싶었던 목소리가 속절없이 떨렸다.
모든 걸 실제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져도 인과와 사건은 되돌릴 수가 없었다. 분명히 살리려고 한 일인데,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뿐이었다. 명확하게 보이는 결과를 부정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 때문에 돌아, 윽, 돌아가셨던 게…….”
순식간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푹 젖은 얼굴이 무너졌다.
너무나 듣고 싶었지만 절대 들을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말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해 주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따뜻한 손가락이 뺨을 쓸었다.
“자꾸 우는군.”
나직하게 중얼거린 목소리는 아주 미약하게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손길을 거두지는 않았다. 커다란 온기가 몸을 감쌌다. 뒷머리를 쓰다듬는 손바닥은 평생 이런 걸 해 본 적 없는 것 같은 로봇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럼에도 넘치도록 따뜻했기 때문에, 이연은 그 서툰 손길을 받으며 엉엉 울었다.
아주 늦된 안심이었다.
“……근데 우리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울음을 그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격렬했던 감정이 지나가고 나자 조금 머쓱해진 이연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물었다. 주변이 워낙 조용해 깜빡 잊고 있었지만 여긴 변이종의 내부였다. 그렇게 훌쩍거렸는데 촉수들이 안 나타난 게 천만다행이었다.
“두무기는 초능력으로 벽을 공격하지 않는 이상 반응 없어.”
산오가 엉망이 된 이연의 얼굴을 쿡 찌르며 대답했다. 눈물이 말라붙어 조금 건조해진 뺨이 눌리는 대로 들어갔다. 감촉을 느끼는 것처럼 슬슬 쓸어내리는 것이 민망해 이연이 슬그머니 몸을 떼어 내자, 산오는 별 반항 없이 놔 주었다. ……이게 왜 아쉽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이연이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너 여기 들어온 지는 얼마나 됐어?”
“이제 다섯 시간 정도.”
이연이 여기 들어온 지 두 시간이 좀 넘었으니 시간대가 대충 맞아떨어졌다. 아무래도 산오의 위치 추적기가 작동을 하지 않은 이유는 두무기의 안에 들어오면서 너무 두꺼운 피부 때문에 외부와 통신이 두절되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좀 둘러봤어? 보주는?”
“없어.”
“없다고?”
“끝부분도 여기와 똑같이 생겼다.”
산오는 들어오자마자 촉수와 한판 싸운 후 바로 길의 끝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소화 활동을 하지 않는 두무기에게 배설구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막다른 길이었다.
즉, 이 안은 텅 빈 뼈 무덤이었다.
아무리 산오라도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찾아 부술 재주는 없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이연이 피워 낸 담쟁이덩굴을 발견하고 이리로 돌아온 것이다.
“촉수들은? 걔네들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잖아.”
“2급 변이종이 공격 수단에 약점이자 원천을 침입자에게 전시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 거긴 아닐 거다.”
“그럼…….”
이연이 막막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재경 씨나 권 박사님에게 보주 변이종에 대해 더 물어볼 걸 그랬다. 뭐, 제가 이럴 줄 어떻게 알았겠냐마는…….
“전에 다발신 안에 들어갔을 때, 재경 씨는 보주가 가장 안전한 곳에 있을 거라고 했어.”
두무기라고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제 에너지 원천을 보호하는 건 생물로서의 당연한 본능이니까.
그러나 두무기의 내부는 말 그대로 빈공간이었다. 무언가를 숨길 수 있을 만큼 복잡한 지형도 아니었고, 눈을 속일 만한 장치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불을 밝히고 둘러보면 전부 훤히 보였다. 거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문제일 뿐. 사냥감을 데려다 두는 장소이니만큼 쉽게 갈 수 있는 곳에 여 보란 듯 보주를 함께 놔두지도 않았을 테고.
이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짙은 어둠이 져 있는 통로 안쪽을 노려보았다. 산오가 이미 끝까지 가 봤다고 했으니, 이연이 다시 간다고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여기 외에는 다른 곳이…….
어.
“야, 너 여기 들어올 때 어디로 왔어?”
“뭐?”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주제에 이연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을 재촉했다.
“두무기 머리 두 개 있잖아. 어느 쪽으로 들어왔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