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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 (195)화 (195/250)

#195

“잠, 잠깐.”

이연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제멋대로 이어지는 산오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산오가 하는 말은 이연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 너무 달랐다. 방향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절박한 사람처럼 구는 게 이상했다. 산오는 그간 남부러울 게 없이 지내 왔고, 실제로 본인도 자주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나 제산이 어떻게 생긴 건지 알아.”

산오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이연을 노려보면서도 대답은 해 주었다.

“그게 뭐.”

“네, 네가 구해 준 사람들이 널 동경해서 만든 회사잖아. 그리고 불법 연구소에서 구조했던 사람 인터뷰도 읽었고, 인터넷 커뮤니티도 봤고, 네가 나오는 동영상도 봤는데…… 너 엄청 멋있게 살았는데…….”

산오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감상만 나왔다. 헌터가 되자마자 그에게 쏟아진 무수한 대형 임무와 의뢰들. 감탄이 나올 정도의 압도적인 해결. 그는 말 그대로 끊임없이 사람들을 구했다. 특히 헌터 초기는 쉬는 시간이 있나 싶을 정도로 빡빡한 일정이었다.

성격에 정말 어울리지 않게도, 제산오는 공익을 실천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영웅 그 자체였다. 온갖 찬사가 당연하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연과 함께 있어 봤자 크게 좋을 일도 없고, 오히려 나쁜 일이 생길까 봐 무서우니까……. 산오가 직접 닦았던 길로 다시 돌아가면, 그러면 그 역시 뿌듯하고 보람찬 삶을 되찾게 되지 않겠는가.

“지금 이 임무는 네가 원래 하던 거랑 좀 달라서 좀 의아하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피해를 조금 더 줄이려고…….”

“이제까지 뭘 들은 거지?”

“어, 어?”

“내가 먼저라고 했지 않나.”

산오는 정말 말하고 싶지 않았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렸지만, 이내 짜증스레 말을 이었다.

“네가 그렇게 살았잖아.”

산오는 이연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사실 타인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돈도, 명예도 마찬가지였다. 신경을 쓰질 않으니 욕심도 없었다. 어제까지 옆에 있던 사람이 오늘 죽어도 그렇군, 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산오는 바보가 아니었다. 손쉬운 계산은 순식간에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정연의 옆에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계산 정도는.

단순히 힘과 권력만 있어서는 안 됐다. 정연이 자발적으로 남고 싶어 할 정도로 매력이 있는 위치여야 했다. 정연이 좋아할 만한 것.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이 답은 금방 나왔다.

‘난 꿈이 헌터거든. 같이 헌터 해서 변이종 때려잡으면 신날 것 같아.’

어린 소년이 했던 모든 말은 그의 이름이 그랬듯이 산오의 밑바탕이 되었다.

당시의 산오는 그의 생사조차도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정연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그 옆자리는 무조건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어쭙잖은 가능성을 재어 보느라 멍청하게 또 빼앗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정연은 어렸을 때도 그토록 빛나던 인간이니, 자라고 나서는 더할 것이다. 그렇다면 산오 역시 그만큼은 빛나야 했다. 정연이 당연하게 자신의 옆자리를 내어 줄 정도로.

옆에 서도 누군가 손가락질하지 않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누가 봐도 함께 다닐 만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산오는 제가 아는 정연을 따라 했다.

갇혀 있는 사람을 구하고 도시를 부수는 변이종을 물리쳤다. 범죄자를 마음대로 죽이는 대신 정부에 넘기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눈물 그치라고 윽박지르는 대신 풍선을 쥐여 주었다. 정연이 했을 법한 행동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가장 멍청한 선택지만 고르곤 했으니까.

그건 너무 지루하고 먼 길이라 종종 짜증이 났지만, 잠깐의 불만 정도는 참을 가치가 있었다.

그 모든 게 정연에게 닿기 위한 과정이었기 때문에.

“너와 비슷한 인간이 되어야 네가 내 옆에 있을 테니까.”

“…….”

“이제 겨우 따라잡았는데, 이제 와서 내가 놓칠 것 같아?”

산오의 눈이 다시 푸르게 빛났다. 불꽃이라도 피어오르는 것 같은 변화에 이연이 정신을 차렸다. 산오가 하는 말은 죄다 믿을 수 없는 내용뿐이라, 귀로 직접 듣고 있는데도 마치 저한테 듣기 좋은 말만 필터링해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내가, 내가 영 씨의 이야기를 한 건 그런 의미가 아니라.”

산오는 영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득달같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오로지 이연의 곁에 서기 위해 삶을 살아온 남자가 이연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다가 이연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홀랑 까먹어 버렸다. 조금 전 하려다 막혔던 말의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였다. 내가 용기를, 부끄럽지 않으려고, 부모님의 전철을…… 내가 뭐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하더라? 제산오가 물어본 게 뭐였지? 영 씨를 좋아하냐고? 이연이 맹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그사이 흘러나온 목소리는 뇌를 거치지 않은 본능에 가까웠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넌데…….”

그 말이 뱉어지는 것과 동시에 정적이 흘렀다. 산오는 느리게 한쪽 눈을 찡그렸고, 이연은 멍한 눈으로 그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3초 후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아니. 잠깐만. 미안. 미안해. 이걸 말하려던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아니, 그건 아니고. 아닌 건 아닌데.”

“좋아한다는 소린가?”

“그게…….”

진짜 가지가지 한다. 이연이 최대한 얼버무리며 미치고 팔짝 뛰겠는 심정을 다스리려고 애를 썼다.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고백할 생각은 단연코 절대로 없었다. 그것보다 조금 더 진지하고, 우울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그럼 뭔데.”

이상하게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을 요구하는 산오의 얼굴이 아주 약간, 환해진 것 같았다. 마치 그 이야기가 정말로 그에게 필요한 것처럼.

정말로 미세한 변화였기 때문에 이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확신할 수 없어 긴가민가했다. 다시 보니 착각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하다 보니 다른 문제가 전부 시답잖은 것처럼 느껴졌다.

“좋아해.”

그래서 그 순간 가장 중요하게 느껴지는 말을 내뱉었다.

“너를 엄청, 엄청 좋아하게 됐어.”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표현이었지만 이연에게는 그게 최선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인처럼 산오의 얼굴만 뚫어져라 보는데, 산오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대답이 없었다. 이연이 약간 더 정신을 차릴 즈음에야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못 믿겠는데.”

생각도 못 했던 유형의 대답이었다. ……그럼 어떡해? 이연이 무슨 증거를 대야 하는지 고민하느라 멈칫한 순간, 산오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싫으면 알아서 밀어 내.”

그와 동시에 부드러운 감촉이 강하게 입술로 부딪쳐 왔다.

그동안 소꿉장난처럼 했던 뽀뽀와는 전혀 달랐다. 이연은 이전의 경험으로 조금이나마 익숙해졌던 입술이 아닌 축축한 살덩이가 제 아랫입술을 핥는 것을 느끼고 놀라 입을 벌렸다. 산오는 기다렸다는 듯 입 속을 침범했다. 순식간에 타인의 혀가 입천장과 치열을 훑고 이연의 혀를 감아올렸다.

커다란 손이 이연의 양 뺨을 움직이지 않게 감싸 쥐었다. 끌어당기는 힘이 손가락 끝을 타고 느껴졌다. 싫으면 밀어 내라더니……. 이연은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웬만한 힘으로 밀어 낼 수 있는 완력이 아니었다. 밀어 낼 생각도 없었지만.

이연이 얌전하자 산오는 욕심껏 이연의 입 안을 빨았다. 코가 비벼지고, 두터운 혀가 쉴 새 없이 여린 살 안쪽을 쓸었다. 서로의 타액이 섞이고 건드려지는 느낌이 이상해 이연이 저도 모르게 신음성을 냈다. 어쩔 줄 모르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이연의 혀가 따라서 움찔거렸다.

“읍, 흐…….”

그 반응에 산오의 움직임이 조금 더 거세졌다. 두 사람의 상체가 조금 더 맞붙었다. 산오가 위에서 내리누르자 이연의 허리가 가파르게 꺾였다. 하마터면 중심을 잃을 뻔한 이연이 산오의 팔뚝을 잡고 지탱했다. 손바닥 아래 잡히는 두꺼운 천 너머에서 맥박이 뛰는 것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 후로도 한참을 키스에 열중하고 나서야 산오는 천천히 입을 뗐다. 젖은 표피가 떨어지면서 가벼운 소리가 났다. 뜨거우리만치 따뜻했던 손 역시 뺨에서 떨어지자, 묘하게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산오는 키스하기 전이나 후나 비슷한 얼굴이었다. 냉담해 보이는 눈은 아무 말 없이 이연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산오였다.

“네가 나를 만들었다.”

“……나는, 너를 죽일 뻔했다니까.”

“네가 있어야 나는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어.”

단호한 목소리는 확신으로 넘쳐흘렀다.

“네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어.”

그것은 이연이 타인에게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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