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뭐가.”
“왜 그렇게…… 수그려?”
산오가 고개만 돌려 이연을 바라보았다. 눈빛에 살기가 섞여 있어 이연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 아무튼…… 우연히 종희 씨랑 같이 있다가 네 얘기 들었어. 급한 상황인 것 같아서 자원한 거야. 다른 상급 헌터 구하는 것보다 내가 더 빠르잖아.”
“네 오지랖 덕분에 그 여자는 오늘 해고되겠군.”
“아니, 무슨 해고까지…….”
“사돈 남 말하지 말고.”
“…….”
통렬한 말에 산오를 해고한 당사자가 변명하듯 우물댔다.
“……난 그냥, 네가 굳이 나한테 붙어 있을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였지…….”
그 말에 저 멀리 앞서 걸어가던 산오의 등이 멈췄다. 반응할 줄은 몰랐던 이연이 덩달아 멈칫한 사이 산오가 몸을 휙 돌렸다.
“무슨 이유가 있어야 너한테 붙어 있을 수 있지?”
“어?”
“네 입으로 말해 봐.”
인상을 잔뜩 찌푸려 표정만으로도 이미 화를 내는 것 같은 산오가 말했다. 이를 가는 어조였다.
“대체 무슨 지랄을 해야, 네가 그따위 소리를 하지 않게 되냐고.”
‘산오 님의 의사를 못 본 척하지는 마십시오.’
아까 들은 종희의 말이 불현듯 겹치는 것 같아서, 이연은 대답 대신 숨을 삼켰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한참 고민하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산오가 다시 몸을 홱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사나웠다.
이연은 그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종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산오는 분명히 몇 번이나 괜찮다고 했고,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그를 바득바득 쫓아낸 것은 이연이었다.
하지만 산오가 이연과 함께 있지 않을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났고, 산오는 너무 대단한 사람이고, 할 일도 많을 테고, 그리고 또…….
“…….”
이연도 알고 있었다. 단지 그 이유로는 모든 게 설명되지 않았다. 사실과 변명이 혼재된 합리화였다.
그는 그냥 도망친 거였다.
묻어 두었다고 생각한 과거가 썩은 손을 내밀며 흙 속에서 튀어나왔다. 끝나지 않은 진실이 숨을 죄였다. 그게 너무 끔찍하고 끔찍해서 가장 먼저 눈을 감았다.
친부모에게서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 기껏 다가온 다정한 양부모를 죽음에 이르게 한 말썽쟁이.
그렇다면 미리 버린 친부모가 영리했던 것 아닌가?
가정은 상상력이 극대화된 악몽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산오가 그를 원망하고 경멸하는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이연의 눈앞에서 그들이 만났던 걸 후회하는 얼굴을 한다면. 줄곧 눈꺼풀 아래에 떠오르던 상황은 너무나 선명해서 소름이 끼쳤다.
반응을 마주하기가 무서웠다.
그래서 산오가 알아듣지 못할 말만 줄줄 내뱉은 후 선수 치듯 내보내 버렸다. 맹수를 만나도 모래에 머리만 숨겨 버리는 타조처럼.
이연에게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다. 없을 거면 계속 없었어야 했는데, 두 손으로 힘껏 받아도 넘쳐흐르는 것을 어느 날 갑자기 쥐어 버렸다. 그것들이 전부 사라지고 난 후에야 제 손이 원래 이다지도 가벼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게 다시 가지고 싶어 쉴 새 없이 기웃대면서도, 또 잃어버릴까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네가 사는 것처럼 살아 보고 싶어졌다.’
문득 영의 말이 생각나서, 이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니. 이연에게는 너무 과분한 말이었다. 용감한 것은 영이다. 그녀는 무서워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려고 시도하지 않았는가. 이연과는 달랐다. 그녀의 생각처럼 그는 용감하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았다.
정이연은 그냥 겁쟁이였다.
미래를 사는 것이 무서워서 시간을 멈춰 버린 그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있잖아, 영 씨 기억해?”
이연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공간에는 그 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벌써 저 멀리 나아간 산오에게까지 들린 듯했다. 산오는 신경질이 난 와중에도 무슨 소리냐는 듯 시선을 돌려 마주 봤다.
산오는 이연을 다시 보고서도 무시하지 않았다. 짜증과 화를 낼지언정 이연이 말을 걸면 대답은 했다. 최악의 상상과는 달랐다.
그 반응에 조금 더 용기가 생겼다. 이연이 발걸음을 서둘러 산오에게 다가갔다. 산오는 걸음을 멈추진 않았으나, 보폭이 눈에 띄게 작아졌다. 두 사람은 곧 나란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왜, 내 초전력 구경 왔을 때 봤던 사람. 나랑 같이 팀 한 사람 있잖아.”
“어쩌라고.”
“최근에 그 사람이랑 다시 만났거든. 김철재 씨 잡을 때, 너 만나기 전에.”
기억을 더듬기 위해 이연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초능력 공장에서 그녀를 다시 만난 이야기, 그녀가 한 이야기, D.S의 공방에 갔다가 재회한 이야기…….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영과의 이야기를 산오는 묵묵히 들었다.
“그리고 영 씨가 나한테 뭐라 했냐면, 내가 용기를 내도 괜찮다고 외치는 것 같았대.”
제 입으로 말하려니 어쩐지 머쓱해 이연이 열없이 웃었다. 목소리에 감출 수 없는 쑥스러움이 묻어났다.
“내가 사는 것처럼 살아 보고 싶어졌대.”
“…….”
“솔직히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봤거든. 기분이 이상하더라.”
사람 마음이 참 이상했다. 이연은 영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을 주제가 못 됐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그건 이연 본인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영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연도 용기를 내 보고 싶어졌다.
그런 말을 들어도 창피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이연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쥐어짜고 쥐어짜서 이야기를 꺼내는 중이었다. 너를 좋아해서 네가 잘못될 뻔했다는 게 나에게는 너무 거대한 트라우마라고, 부모님의 전철을 밟을까 봐 겁이 났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심장을 박박 긁어모아 끌어모은 용기보다도 더 많은 마음이 필요했다. 급기야 눈을 질끈 감은 이연이 막 입을 떼려는데, 산오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그 여자가 그런 이야길 했다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의 온도가 생각보다 훨씬 싸늘해서, 이연은 하려던 말도 깜빡 잊고 놀라 눈을 떴다.
의아하게 마주한 산오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굳어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말은 시작도 안 했는데…… 왜 벌써 화가 났지?
“그래서 이번엔 그 여자를 집에 들였나?”
“뭐?”
사납게 다가온 산오가 이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이연이 산오의 감정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이 날카로운 말이 연이어 꽂혔다.
“그 여자가 좋아지기라도 했어? 네가 그토록 원하던 말이라서? 인정받은 것 같아서?”
“어, 어?”
대화 흐름이 뭔가 이상했다. 이연은 뒤늦게 정정하려고 했지만, 이미 산오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마침 나도 쫓아냈겠다, 적절한 타이밍이다 싶었겠어. 고맙다는 인사 하러 온 건가?”
“그게 아니라.”
“널 먼저 안 건 나야!”
벼락같은 노성이 내리꽂혔다. 가파르게 치켜 올라간 짙은 눈썹 아래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네가 나한테 살아서 나가자고 했잖아!”
파르르 떨리는 매끄러운 뺨에 얼룩덜룩하게 검은 비늘이 올라오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짜증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잡은 손아귀 힘이 한층 더 강해졌다.
산오는 이연이 내미는 손이 얼마나 달고 따뜻한지 넘치도록 알고 있었다.
“감히 이제 와서 나를 버려?”
다 알고 있었는데도 잠시나마 방치한 자기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이연은 그들이 떨어져 있던 기간은 물론이고 다시 만나서 같이 다니는 동안에도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손을 뻗었을 터였다. 특별한 손익 계산도 없이, 생색내는 것도 없이, 그저 이게 옳은 일이라 한다고 말하는 눈동자를 빛내며.
그러다가 개중 누군가는 산오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이 사람의 옆에 서고 싶다고.
“고작 그따위 말 몇 마디 들었다고?”
그 사실이 못 견디게 화가 났다.
산오는 이연이 그런 인간이라서 좋았다. 눈 한번 감으면 끝나는 일을 외면하질 못해 부득불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구하러 오는 그런 사람. 타인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 그런 사람.
그런데 지금 순간적으로, 이연이 그런 인간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랐다.
아무도 환하게 빛나는 이연을 몰랐으면 했다. 제 품에 안고 꽁꽁 숨겨 두고 싶었다. 이연의 좋은 점은 자신만 알면 됐다. 세상에는 정이연 같은 멍청이만 있는 게 아니라서, 다른 사람이 알면 군침을 흘리며 당장 뺏으려 들 것이다.
그리고 정이연도 자신에게 다른 선택지가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
“나도 네가 필요해.”
산오는 그제야 제 분노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 깨달았다.
“내가 더 먼저였잖아…….”
불안이었다.